최고의 현자들이 수 천년에 걸쳐 깨달은 것

심리학고양이 · 2026-08-22

채널: 심리학고양이 |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jQKfFtAurS8 | 길이: 27:04

요약

🎯 TL;داR — 유물론적 세계관을 넘어 의식을 자아의 본질로 재정의하고, 매력·혐오라는 이분법적 반응을 멈추는 것이 윤회를 끊고 진정한 평온에 이르는 길이라고 설명한다.

📌 핵심 논지 — 화자는 현대인이 겪는 만성적 혼란과 방황이 내면을 탐구하지 않은 데서 비롯된다고 진단한다. 유물론(정신은 물질로 완전히 환원된다는 관점)을 걷어내면 침묵을 통해 순수 의식이라는 본질에 닿을 수 있으며, 이 의식이야말로 신체·인간이라는 옷보다 근원적인 '나'라고 주장한다.

🗺️ 영상 구성

  • 현대인의 방황과 '삶에 중독된' 상태 진단
  • 유물론이 내면 탐구를 가로막는 장애물임을 논증 (박스 사고실험)
  • 몸의 정비 → 매력·혐오 차단 → 침묵(명상)의 실천 단계
  • 침묵 끝에서 발견하는 순수 의식과 영사기 비유
  • 의식-신체 비동일성, 윤회·환생 논증
  • 끌어당김/밀어냄을 멈추는 것 = 윤회 정지
  • 깨달음 이후에도 남는 세 가지 문제(안주, 무기력, 자만)
  • 여행자로서의 마음가짐으로 마무리

━━━ 본문 ━━━ 삶에 대한 중독과 내면의 부재 화자는 사람들이 모두 "제빛 영혼"을 가진 것처럼 목적지가 확실한 듯 분주히 살아가지만, 실제로는 삶이라는 현실에 중독되어 의문을 회피하고 있을 뿐이라고 지적한다. 직장·학교·가정·사회·국가·이념 어디에도 답이 없으며, 유일하게 살펴보지 않은 곳이 바로 자기 내면이라고 말한다.

유물론이라는 장애물 화자는 정신을 물질로 환원하는 유물론적 세계관이 내면 탐구를 막는 가장 강력한 장애물이라고 설명한다. 근거로 "박스 안에 갇힌 사람" 사고실험을 제시한다. 키보드와 모니터로만 외부와 소통 가능한 사람은 자신이 AI 채팅 프로그램이 아니라 의식적 존재임을 결코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의식적 경험이 본질적으로 복수의 관찰자에게 경험될 수 없음을 보여주며, 그렇다고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라고 강조한다.

몸의 정비와 매력·혐오 차단 내면으로 들어가는 첫 단계는 자극적인 감각(음식, 냄새, 소리, 시각)을 줄이는 것이다. 화자는 하나의 생각이 일어나면 반드시 매력 또는 혐오라는 감정으로 미끄러지고, 그 감정에 반응할수록 생각이 반복된다고 설명한다. > "불의 연료를 공급하는 어리석음을 멈추는 것" — 즉 생각에 매력과 혐오를 덧붙이지 않는 것이 상념을 가라앉히는 근본적 방법이라고 말한다.

침묵과 순수 의식의 발견 화자는 '명상'이라는 단어가 오염되었다며 침묵이라는 표현을 제안한다. 침묵은 자기 자신과도 대화하지 않는 깊은 상태다. 충분한 시간이 지나면 "텅빈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텅빈 것이 나"라는 자각에 이른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화자는 영사기 비유를 든다 — 필름(감각·정신 자료)이 돌아가도 광원(의식)이 켜져야만 스크린에 영상(세계)이 나타나며, 광원 자체는 어떤 형태도 없이 그저 밝게 빛날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불교의 견성과 대응된다고 설명한다.

의식은 신체와 무관하다 화자는 의식이 몸의 크기나 종에 관계없이 동일하다고 주장하며, "나의 의식이 인간의 신체에 담기면 인간으로서, 당나귀의 신체에 담기면 당나귀로서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본질적인 '나'라고 부를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보는 자'뿐이며, 신체와의 동일시는 착각이라는 것이다.

의식 X와 죽음·환생의 논증 화자는 논증을 구체화하기 위해 자신의 의식을 'X'로, 그것이 발현되는 물리적 조건을 'A B C'로 지칭한다. 조건이 형성되면 의식이 나타나고, 조건이 와해되면(죽음) 의식은 그 시점에서 사라지지만, 우주는 유한한 물질과 무한한 시간을 가지므로 언젠가 다시 동일한 A B C 조합이 형성되어 의식이 재등장한다고 설명한다. 중요한 것은 이 '끊어짐'은 외부 관찰자 시점에서만 보이는 것이며, 의식 X 자신의 관점에서는 끊김 없이 항상 현재적이라는 점이다. 마치 수면 마취에서 깨어나는 사람이 시간의 흐름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한다.

세계는 의식이 지어낸 것 화자는 우리가 믿는 '객관적 물질 세계'조차 감각기관이 보낸 자료를 의식이 재구성한 것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꿈을 예로 들며, 꿈속 세계를 만드는 것은 자기 자신이지만 그 안에서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듯이, 현실도 내가 일으켜 세우지만 내 의도대로 움직일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의식은 "유아론적이고 자폐적"이며, 나는 나의 세계 밖을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다고 강조한다.

윤회를 끊는 방법 화자는 습관이 반복되듯 삶도 반복된다고 설명한다. 인간은 다음 생에도 인간으로, 개는 개로 태어나는 이유는 마음이 담긴 대상(끌어당김·밀어냄) 때문이라고 말한다. 반대로 더 이상 환생하지 않는 사람은 사람이나 대상에 대한 애착·혐오가 사라져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에 머문다고 설명한다. 윤회는 미시적(생각의 반복), 중간적(생과 생의 반복), 거시적(우주의 탄생·소멸) 규모로 나뉘지만, 멈추는 방법은 동일하게 끌어당김과 밀어냄이라는 이원적 마음 상태를 멈추는 것이라고 말한다.

깨달음 이후 남는 세 가지 문제 화자는 깨달음을 얻어도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다고 경고한다. 첫째 안주(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고요에만 머무름), 둘째 무기력(모든 것이 꿈이자 역할극이라는 허무감), 셋째 자만(깨달은 자는 도덕적으로 완벽할 것이라는 오해)이다. 화자는 자녀가 "방학은 끝날 거니까 아무것도 안 하겠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비유하며, 현실이 환영임을 아는 것은 삶에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만 뒤로 물러나 사랑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반복은 줄지만 완전히 끝나지 않는다 화자는 깨달음 이후에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겠지만, "반복임을 모른 채 반복하는 것"과 "반복임을 알며 반복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는 횟수가 열 번에서 아홉 번, 여덟 번으로 점차 줄어들다가 결국 윤회의 고리가 끊어진다고 설명한다.

여행자의 마음가짐 화자는 마지막으로 우리가 '영원한 여행자'임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 "비가 오는 날엔 비가 오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 맑은 날엔 날이 맑음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지금 곁에 있는 사람과 순간을 사랑하는 태도가 지혜라고 강조한다.

🔢 핵심 수치 — 이 영상은 통계·데이터 중심이 아니라 철학적 논증 위주로, 별도의 핵심 수치는 제시되지 않는다.

💬 결정적 발언

"나는 떠돌 것이다. 하지만 아무 곳에도 가지 않는다. 나는 태어날 것이다. 하지만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죽지만 죽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종일 이 사람의 얼굴과 저 사람의 얼굴, 인간의 말과 글을 들여다보며 좋아하고 미워한다. 당신의 의식 세계는 인간으로 가득하다. 당신은 인간이었고 인간으로 돌아올 것이다."

"당신은 심해에 닿았지만 수면 위의 파도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 화자가 다룬 반론·한계

  • "그렇다고 해도 변하는 건 없지 않나요? 내 의식이 발현된 건 어쨌든 내 몸에서고..." — 화자는 이를 의식 X와 조건 A B C의 반복 형성 논증으로 반박한다.
  • 깨달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점을 스스로 인정하며, 안주·무기력·자만이라는 부작용을 명시적으로 다룬다.
  • 명상 교육 단체들이 강조하는 '스트레스 해소·집중력' 효과는 부수적 이득일 뿐, 궁극적 목적이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 핵심 용어

  • 유물론 = 물질만이 유일한 실체이며 정신은 물질에서 파생된 현상이라는 견해
  • 견성 = 불교에서 자기 마음의 텅빈 바탕을 직접 보는 것
  • 카르마(업) = 신체적 기억을 넘어 다음 생으로 이어진다고 여겨지는 초월적 흔적
  • 해탈/열반/니르바나/목크샤 = 윤회의 고리가 끊어진 상태, 전통 종교의 표현들

🔎 보완 & 확인

  • 배경·맥락 보완: 이 영상은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시리즈 저자(채사장으로 추정, 자막 내 오타로 "제사장"·"체사장" 등으로 표기)의 신간을 소개하는 서평 형식의 콘텐츠로 보인다. 내용은 불교의 유식론·견성 개념, 힌두교의 아트만/브라만 사상, 그리고 임사체험(NDE) 연구를 혼합해 재구성한 것으로, 특정 종교 교리를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화자(혹은 원저자)의 통합적 해석이다.
  • 사실 유의점: "우주의 물질은 유한하고 시간은 무한하다"는 전제는 물리학적으로 논쟁적인 가정이며(우주의 궁극적 운명, 엔트로피, 시간의 유한/무한성은 현재도 미해결 문제), 이로부터 도출된 '동일 조건 A B C의 무한 반복' 논증은 철학적 사고실험이지 과학적으로 검증된 주장이 아니다(확인필요). 또한 "임사체험 연구에서 기억과 정체성이 이어진다고 보고된다"는 서술은 실제 임사체험 연구 문헌에 그런 보고 사례들이 존재하긴 하나, 학계에서는 신경생리학적 설명(산소 결핍, 측두엽 활동 등)과 경합 중인 논쟁적 영역이라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추정).

자막 원문 (참고)

Kind: captions Language: ko 모든 사람들이 재빛 영혼을 가진 거 같습니다. 회사에 가고 SNS를 뒤적이고 지하철을 타고 거리를 걸어도 보드니가 현실에 취해 있는 것만 같아요. 모두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죠. 궁금합니다. 우리는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요? 나는 이렇게 혼란스럽고 주저앉고 싶은데 어떻게 사람들은 목적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것처럼 바쁘게 걸음으로 옮길 수 있는 걸까요? 우리 모두가 삶에 중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현실에 빠진 사람들은 의문을 품지 않아요. 오히려 당신에게 되묻습니다. 뭐가 그리 불만이야? 뭐가 그렇게 혼란스러워? 그리고 중고가 이어집니다. 너 자신을 괴롭히지 마. 마음을 좀 편하게 가져봐. 좋아하는 걸 찾아봐. 당장의 불안감은 가라앉습니다. 그래, 나는 잘하고 있어. 고민하지 말자. 더 힘내 보자. 해야 할 일을 해 나가자.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지만 오래 가지 않아요. 당신은 또다시 혼란과 고통 속에 밤을 지세웁니다. 대체 무엇이 문제일까요? 그건 바로 길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직장, 학교, 가정, 사회, 국가, 이념. 그 어디를 기웃거려도 당신이 찾는 길은 없어요. 하지만 잘 생각해 보니 딱 한 군데가 보지 않은 길이 있습니다. 바로 당신의 내면입니다. 인류의 정신적 스승들은 말합니다. 진리를 깨닫고 싶다면 내면으로 들어가라고요. 하지만 의심부터 됩니다. 과연 내면이라는게 존재하긴 할까요? 일반적으로 내면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우선 온갖가 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걸 내면이라고 부르든 영혼, 정신, 마음, 의식이라 부르든 어쨌든 우리 안에 물질만으로는 완벽히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실체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죠. 반면 그런 건 없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정신과 관련된 모든 현상은 물질로 설명 가능하다고요. 당신은 어느 쪽을 믿으시나요? 대부분의 현대인는 당연히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유물론적 견해라고 부르죠. 유물론이란 물질만이 유일한 실체이고 정신적인 모든 것은 물질에서 파생된 현상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실제로 그렇지 않나요? 내면이 도대체 어디에 있죠? 내면이라 할 때 그나마 대응되는 실체는 두 개고란의 뇌, 척추와 신경 다발 침장 장기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사실 나의 내부에 있는게 아니라 외부의 물질 세계에 속한 것들이죠. 우리가 아무리 뇌를 잘게 잘라보고 뱃속에 내장 안쪽까지 살짝이 뒤져봐도 내면 영혼 마음에 대응하는 그 어떤 것도 찾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의 작가 제사장은 바로이 유물론이 내면의 길로 들어설 수 없도록 발목을 잡는 가장 강력한 장애물이라고 말합니다. 세계는 두 가지로 나닙니다. 관측할 수 없는 것과 관측할 수 있는 것. 관측할 수 있는 건 다시 두 가지로 나뉘요. 한 사람에 의한 경험과 여러 명에 의한 경험입니다. 유물론이 인정하는 현실은 바로이 여러 명에 의한 경험뿐이죠. 당신이 외부와 차단된 박스에 갇혀 있다고 해봅시다.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키보드와 모니터뿐입니다. 당신이 쓰는 말은 박스 외부에 붙은 모니터에 표시됩니다. 박스 밖에는 하나의 키보드가 더 있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당신과 채팅을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AI 채팅 프로그램이 아니라 박스 안에 갇힌 의식적 존재라는 걸 증명할 수 있을까요?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가능하지 않아요. 물질 세계에서 인간은 박스 안에 갇힌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물질적 신체와 언어만으로는 타인에게 결코 나의 의식을 증명할 수도 보여줄 수도 없죠. 한마디로 의식적 경험은 복수의 관찰자이에 경험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죠. 유물론이 장악한 오늘 날에는 정신이 물질적 뇌 활동으로 환원되고 학문적 탐구의 대상에서 배제됩니다. 하지만 저자는 강조합니다. 내면도 객관적 탐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요. 자, 이렇게 유물론이라는 바위를 잠시 치워 버리자 내면으로 향한 길이 드러납니다. 무엇부터 해야 할까요? 몸의 정비는 근육질 몸매를 만들고 생생한 젊음을 유지하고 건강에 대해 강박 관념을 갖는 걸 의미하진 않습니다. 저자는 자극적인 감각을 멀리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입에 자극적인 음식을 줄이고 코에 자극적인 냄새를 줄이고 귀에 자극적인 소리를 줄이고 눈에 자극적인 모습을 줄여야 합니다. 그렇게 육체가 자극적인 감각에 치우치지 않을 때 마음도 고유하고 평온해집니다. 하나의 생각이 떠오르면이 생각은 두 가지 감정 중에 하나로 미끄러집니다. 하나는 매력이고요. 다른 하나는 혐오입니다. 만약 하나의 생각이 일어나고 그 생각이 매력적이면 나는 그 생각을 반복하게 되겠죠. 혐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의 생각이 일어나고 그 생각에서 혐오를 느끼다면 나는 그걸 멈추는게 아니라 반복하게 되죠. 스마트폰 사진 첩을 정리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죠. 하지만 모두가 공통적으로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반복되는 비슷한 사진들부터 띄우는 거죠. 우리가 머릿속을 정돈하려 마음 먹었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반복되는 생각을 끊어내는 일입니다. 생각을 끊어내기 위해 운동을 하거나 집안일을 하는 사람도 있고 음악을 듣는 사람, 영화를 보는 사람 아니면 생각과 정면 승부하겠다고 산책을 하며 결론을 내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더 근본적인 방법도 있는데요. 그건 바로 불의 연료를 공급하는 어리석음을 멈추는 것입니다. 즉 생각의 매력과 혐오의 감정을 덧붙이지 않는 것이죠. 어디에 기대도 좋고 바르게 앉아도 좋습니다. 눈을 감아도 되고 뜨고 있어도 좋습니다. 그저 편하게 있어 봅시다. 지금은 무엇을 하는 시간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입니다. 하지만 곧 알게 됩니다. 시끄럽게 떠드는 존재가 있음을요. 생각해 보면 우리 인생 전체에서 가장 수다스럽고 정신없게 만드는 존재는 바로 다 자신입니다. 의미 없는 말들이 떠들고 이미지가 떠둡니다. 이것을 가라앉쳐야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매력과 혐오라는 장작을 넣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매력과 혐오에 이분법적 감정을 붙이지 않는다면 상념은 에너지를 공급받지 못하고 옅어지면 결국 사그라듭니다. 상념이 일어나면 그것을 그저 내버려 두세요. 나에게 끌어당기거나 밀어내지 말고 따라가지 마세요. 영상은 낙엽이 짓는 날 마당을 쓰는 것과 같습니다. 끝없이 쏟다지는 낙엽 속에서 우리는 잠깐씩만 빈 마당을 볼 수 있죠.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나뭇가지의 나뭇잎 무한하지 않고 계절이 무릎 익으면 더 이상 수고로야 할 낙엽도 남아 있지 않을 테니까요. 영상이 익숙해지고 많은 날이 지납니다. 어느 날 당신은 알게 됩니다. 영상이 이제 나의 즐거움이 되었음을요. 이제 머릿속에 혼란이 사라지고 마음은 평온해 머니다. 나는 삶을 살며 처음으로 행복하다고 느낍니다. 여기까지의 내용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명상에 관심을 갖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영상을 교육하는 대부분의 단체에서는 이런 내용으로 사람들을 모으죠. 나쁜 일은 아니에요. 여기까지 도달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니까요. 대부분의 사람들도 이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래서 많은이가 명상을 오해합니다. 명상은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집중력을 높여주고 마음을 다스려 일상의 행복을 가져오는 행위라고요. 다만 이런 것들은 부수적인 이득일 뿐입니다. 진리를 발견하고자 했던 우리가 찾는 궁극의 목적은 아니죠. 사람들이 자리에서 하나 둘 일어납니다. 명상의 실용적 목적을 이루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네요. 하지만 우리는 흔들리지 말고 좀 더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 봅시다. 사실 많은 단어가 그렇듯 명상이라는 단어도 오염되었습니다. 종교적 색체가 느껴지기도 하고 현실 도피적으로 느껴지기도 오늘 날의 힐링 문화가 만들어낸 상업화된 서비스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명상 대신 어떤 단어가 좋을까요? 저자는 침묵이라는 단어를 제한합니다. 침묵은 어떠한 말도 어떠한 이미지도 상념도 욕망도 의지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것은 나 자신과도 대화하지 않는 깊은 시면입니다. 많은 날이 지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리를 떠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곳 침묵 속에 앉아 있습니다. 세상은 고유하고 나는 차분합니다. 가끔 미세하게 상념이 일어났다 사라지지만 나는 마음을 내지 않습니다. 그대로 침묵에 머니다. 침묵의 텅빈 자리. 그 텅빈 자리를 지긋이 지켜봅니다. 그리고 충분한 시간이 지난 어느 날 나는 비로소 알게 됩니다. 내가 텅빈 것에 머보려고 있는 것이 아님을. 사실은 텅빈 것이 나이고 텅 비어 있음과 나는 분리되지 않음을. 나는 마지막이 선언합니다. 나는 비어 있음이다. 나는 내 안에 머무는 자다. 나는 침묵이다. 인류는 오래 전부터 이것에 대해 알고 있었고 여러 이름을 붙여왔습니다. 의식, 마음, 본성, 진화, 본질적자, 아트만, 영혼, 신성, 공부 무아, 알아차림, 그리고 진리. 영화관에서 사용하던 영사기를 떠올려 봅시다. 벽에는 거대한 스크린이 걸렸고 적절한 거리를 두고 영사기가 놓여 [음악] 있습니다. 가운데 백색의 광원이 위치하고 그 광원 앞으로 필름이 돌아갑니다. 필름에는 사람과 자동차와 건물과 사물 등 영화의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죠. 하지만 필름을 돌린다 해서 스크린에 무언가가 뜨는 것은 아니죠. 광원이 켜질 때에야 필름의 영상이 스크린에 드러납니다.이 그림은 의식이 세 개를 일으키는 메커니즘을 잘 보여주는데요. 스크린 위에 움직이는 이미지는 당신 눈앞에 펼쳐진 세 개이고요. 필름은 당신의 감각 정보와 정신적 요소들입니다. 광원은 의식이고이 순수 의식이 곧 우리가 찾아헤매던 것입니다. 광원이 스크린에 영상을 드러내지만 실제로 광원 자체는 어떤 문이나 특징이 없죠. 내면의 깊은 시면의 본질 역시 그 자체는 어떤 형태나 특징도 없습니다. 그것은 그저 텅비어 있고 스스로 밝게 빛날 뿐이죠. 자기 마음의 끝 맨 밑바닥 텅빈 바탕을 보는 것를 불교에서는 견성이라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마음을 본다는 걸 비유적인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스스로의 행위를 돌아본다거나 편안히 여유 시간을 갖는 것 등을 뜻한다고 말이죠. 하지만 이제 우리는 압니다. 마음을 본다는 건 말 그대로 마음의 시면을 관조하는 것입니다. 스크린도 필름을 보는 것도 아닌 의식이라는 광언을 보는 것이죠. 의식은 실제로 있음이 아니라 어떠한 능력으로 작용합니다. 명사보다는 동사에 가깝죠. 그 능력은 두 가지로 관조와 세계를 일으킴입니다. 관조란 말 그대로 보는 능력을 말해요. 의식의 가장 근본적인 능력이죠. 의식은 세계를 봅니다. 나는 감각 기관을 통해 외부 세계를 보고 내면에 떠오르는 언어와 이미지는 내면 세계도 봅니다. 사실이 보는 능력은 우리가 즐겨 쓰는 용어의 자아와 동이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침묵을 통해 알게 됩니다. 텅비어 있으면 크기도 없고 경계도 없다는 걸요. 작은 미물들의 내면세계는 좋고 큰 생물들의 내면세계는 넓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의식은 몸의 크기나 신체 능력의 크기나 진능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의식에는 그 어떠한 차이점도 없습니다. 그럴 순 없겠지만 만약 둘이 이상의 텅 비어 있음을 비교한다면 우리는 어떤 의식이 어떤 존재의 것인지 알 수 없을 겁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이것은 모든 의식이 모든 종류의 신체에 담길 수 있음을 암시한다. 나의 의식이 인간의 신체에 담기면 인간으로서 생각하고 느끼고 욕구하게 될 것이다. 나의 의식이 당나귀의 신체에 담기면 당나귀로서 생각하고 느끼고 욕구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의식이라는 건 내가 태어날 때 켜졌다가 내가 죽을 땐 꺼지는게 아닌가? 이러한는 오늘날 널리 퍼져 있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것은 나의 본질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한 오해다. 그 오해는 우리가 너무 인간적이라는 데서 발생한다. 인간으로서의 감각은 너무나 강렬해서 나는 나의 신체와 나를 동일시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안다. 본질적인 나라고 말할 수는 유일한 것은 보는 자일 뿐임을 말이다. 나의 신체가 나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저 내가 거기서 눈 떠서다. 만약 나의 의식이 다른 시대와 다른 지역에서 발현되었다면 나는 그가 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만약 나의 의식이 다른 동물이나 인간 외에 다른 신체에서 발현되었다면 나는 그것이 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렇게 발론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변하는 건 없지 않나요? 내 의식이 발현된 건 어쨌든 내 몸에서고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유일한 곳일 수도 있잖아요. 그렇다면 의식은 내 신체의 탄생과 함께 시작하고 내 신체의 죽음과 함께 사라진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 거 아닌가요? 그렇다면 가장 확실한 사실부터 시작해 봅시다. 누구도 보정할 수 없는 건 매순간 경험되는 나의 의식입니다. 여기 나의 의식이 있습니다. 지금이 영상을 보고 있는 나의 의식 이것을 X라고 해보죠. 나의 의식 X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알려주는 건 나의 의식이 발현되기 위한 특정한 조건이 앞서 있었다는 것입니다.이 조건을 A BC라고 하겠습니다. 여기서의 조건 ABC는 순전히 물리적인 조건이라고 가정합시다. 쉽게 말해 ABC는 신체, 뇌, 유전, 환경 등의 여러 물질적 조건들의 결합이라 해보겠습니다. 즉이 우주 어딘가에서 ABC라는 물질적 조합이 우연히 형성되면 나의 의식 X가 세상에 등장하는 것이죠. 이렇게 의식 X는 인간의 신체를 가지고 20세기 한국에서 태어납니다. 그리고 100년의 시간이 지납니다. 신체가 노화될수록 물질적 조합은 변형되고 결국 어느 순간에 ABC의 조합이 와해 되겠죠. 조건이 형성되면 결과가 나타나듯 조건이 와해되면 결과도 사라집니다. 의식 X는이 우주에서 사라집니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죽음이죠. 이후 우주에는 우연히 AAC가 형성되고 BCA도 대타하지만 A B C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주의 물질은 유한하고 시간은 무한하죠. 1만 년의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어느 공간에서 우연히 ABC의 물질적 조합이 등장합니다. 나는 그 물질적 신체에 담겨 그 신체와 연결된 수많은 상념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신체의 수명은 200살이고 수명이 다해가자 조건이 와야되기 시작합니다. 다시 2만 년이란 시간이 시작합니다. 우주의 다른 공간엔 우연히 ABC가 또 형성됩니다. 그에 따라 의식 X가 그 신체에서 일어나고 이거저거 무수히 반복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100년을 살다가 1만 년 동안 존재하지 않다가 다시 200년을 살다가 2만 년 동안 없다는 건 어쨌든 의식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냐고 말이죠.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그렇지 않습니다. 의식이 생겨났다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외부의 관찰자 즉 다른 의식의 시점이니 말입니다. 나는 외부의 관찰자 시점에서 나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나의 의식의 시점에서 나와 세계를 보죠. 의식 X의 시점으로 다시 보면 이렇습니다. 나는 자하와 세계를 경험하다가 100년이 지나면 눈을 감게 됩니다. 그리고 부디어 눈을 뜨면 다른 시간과 다른 공간에서 다른 신체 자신을 보게 되죠. 마치 수면 마취에서 깨어난 이얘기는 시간의 흐름이 인식되지 않는 것처럼 의식 X는 그저 주어진 신체를 애정하고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고 살게 됩니다. 의식 X의 관점에서 끊어짐은 없습니다. 의식은 언제나 현재적이죠. 인간이라는 종은 인간에게 취해 있습니다. 인간에게 인간은 너무나 매력적이기에 인간 안에 된 모든 의식은 자신을 인간이라 생각하죠. 당신이 자신을 인간이라 생각하는 건 당신의 입은 그 인간이라는 옷의 특징 때문입니다. 그 옷은 너무 강렬해서 당신을 그 옷이라 생각하게 하죠. 진실을 보고자 한다면 커다란 사유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본질적 자하 기준을 인간에서 의식으로 바꿔야 하죠. 사람들이 가진 강력한 선입견 중 하나는 세계를 자하와 분리된 객관적인 실체라고 생각하는 것인데요. 하지만 그런 세계는 개념적으로만 존재합니다. 사람들이 객관적인 세계라 믿는 물질 세계도 실제로는 나의 감각 기관이 보내준 자료를 가지고 의식이 재구성한 세계죠. 우리의 믿음과는 달리 내 앞에 펼쳐진 세계란 나의 외부에 있는 물질 세계 실제 모습이 아닙니다. 실제 세계가 있다면 그것은 색도 소리도 냄새도 맛도 감축도 없는 무언가일 겁니다. 그렇다면 의식은 무엇으로 세계를 만들까요? 하나는 물질 세계에서 감각 기관을 통해 제공된 감각 자료입니다. 색 소리 향 맛 감촉 이역에 속하죠. 다른 하나는 물질적 뇌를 기반으로 하는 정신 자료로 기억 이미지 언어 느낌 욕망이 포함됩니다.이 두 가지가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것이죠. 하지만 이외에 한 가지 가능성이 더 있습니다. 바로 의식에 남은 흔적입니다. 인도 문화권과 아시아에서 발전한 종교들과 불교에서는 신체적 기억을 넘어 다음 생으로 이어지는 모종의 초월적 기억이 있다고 말합니다.이를 카르마 업이라고 부르죠. 현대 임사 체험 연구를 보면 사람들은 자신의 신체와 분리되면서도 기억과 정책성이 이어진다고 보고하고 있죠. 만약 이런 것들이 정말 가능하다면 의식의 흔적에 해당하는 자료는 무엇일까요? 아마 그 의식이 거쳐 수많은 신체에서의 기억일 수 있습니다. 꿈을 생각해 보죠. 나는 자매대로 꿈을 꿉니다. 이때 꿈의 세계를 일으켜 세우는 자는 누구인가요?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입니다. 나는 잠에 감각 자료와 정신자료 그리고 의식의 흔적을 재료로 시공간을 펼치고 사물들과 사람들을 만들어 배치합니다. 그리고 나의 신체도 만들어 그 신체의 시점에서 꿈이라는 세계를 체험하죠. 호랑이에게 쫓기고 낯선 세계에 가고 낯선 기분을 느낍니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드네요. 나는 왜 내가 만든 세상을 통제하지 못할까요? 내가 꾸는 꿈처럼이 현실도 내 의식이 만든 것이라면 내 의지와 뜻대로 세상이 움직여 하는 거 아닌가요? 하지만 내가 만든 것과 내가 마음대로 하는 건 인과적 관계가 아니라 임의적 관계입니다. 꿈의 세계를 내가 만들어 내지만 내 마음대로 만들어 낼 수 없고 그 안에서 내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는 것처럼 현실의 세계와 죽음의 세계도 내가 일으켜 세우지만 내가 원하는 대로 일으켜 세울 수도 없고 내 의도대로 행동할 수도 없습니다. 나는 그저 세계를 일으켜 세우고 동시에 내가 만든 그 세계 안에서 이리저리 휘둘릴 뿐이죠. 나는 나의 세계 밖을 본 적이 없고 경험한 적도 없습니다. 나의 세계 밖으로 단 한 발짝도 다갈 수 없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의식은 유아론적이고 자폐적입니다. 나는 현실에서 여기를 가고 저기를 간다 느끼지만 실제로는 그 어디도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꿈에서 여기를 가고 저기를 간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그 어디도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죽음의 세계에서 여기를 가고 저기를 간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그 어디도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의식은 세계를 끊임없이 일으켜 세웁니다. 그렇다면 세계가 일어나고 사라지는이 끝없는 윤회는 멈출 수 없는 것일까요? 당신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커피를 내리는 사람이라면 내일 아침에도 커피를 내릴 확률이 크겠죠. 만약 당신이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난 사람이라면 내일도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날 것입니다. 당신이 걱정이 많은 사람이면 내일도 걱정할 것이고 행복한 사람이면 내일도 행복할 겁니다. 왜 반복될까요? 끌어당김과 밀어냄 때문입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고 그 사랑은 커져 갑니다. 나는 내가 미워하는 것을 미워하고 그 미움을 키워 나갑니다. 저자는 일상이 반복되듯 삶도 반복된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전의 생에서도 인간이었을 거고 다음 생에서도 인간으로 태어난다고요. 개는 전해 생에서도 개였을 것이고 다음 생에서도 개로 태어날 거라고요. 왜 그럴까요? 우리가 마음에 담기 때문입니다. 개는 개를 좋아하고 개를 미워합니다. 개의 마음은 개로 가득하죠. 새는 새를 좋아하고 새를 미워합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당신이 종일 들여다보는 스마트폰을 보라. 당신은 종일이 사람의 얼굴과 저 사람의 얼굴, 인간의 말과 글을 들여다보며 좋아하고 미워한다. 당신의 의식 세계는 인간으로 가득하다. 당신은 인간이었고 인간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 생에 인간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태어난 사람들의 특징은 무엇일까? 그는 사람에 대한 애착과 관심이 없을 것이다. 대신 다른 무엇에 대한 애착과 관심이 클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 사람의 특징은 무엇일까? 더 이상 환생하지 않고 윤회하지 않는 사람들은 말이다. 그는 고요하고 평온할 것이다. 인간의 몸이 만드는 욕망과 감정의 기복이 사라졌을 것이다. 사람에 대한 애착과 미움이 없고 다른 존재에 대한 매력과 혐오도 없을 것이다. 그는 깨어 있을 때, 꿈을 꿀 때, 깊은 침묵이 들 때 그 언제나 고요하다. 그의 마음은 어디로도 기울지 않는다. 의식은 손해 줄 수 있는 그 어떤 재료도 없게 세계를 지어내지 않는다. 연료가 공급되지 않으면 불은 타오르지 않습니다. 재료가 없는 목수는 집을 지울 수 없으니까요. 전통적 종교에서는 이러한 경제를 해탈, 열반, 니르바나, 목크샤, 해방, 영원한 자유 등으로 표현합니다. 많은 사람이 윤회를 환생과 동일하게 생각하지만 사실 윤회는 더 큰 개념입니다. 생각과 생각의 반복이나 행위와 행위의 반복은 미시적 직면에서 윤회에 해당합니다. 생과 생의 반복과 같은 환생은 중간적 직면에서 윤회를 할 수 있고 물질적 우주의 탄생과 소멸 단위의 반복은 거시적 직면에서 윤회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규모가 어떤지와는 무관하게 윤회는 의식의 문제입니다. 모든 존재의 일어섬과 사라짐은 의식 안에서 이루어지니까요. 그렇게 어떤 규모의 윤회를 할지라도 그것을 멈추는 방법은 동일합니다. 바로 끌어당김과 밀어냄이라는 마음의 이원적 상태를 멈추는 것입니다. 저자는 윤회를 끊어내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고맙게도 세상은 우리가 윤회의 순환을 스스로 끊어낼 수 있도록 수없이 많은 기회를 줍니다. 환경이 바뀌어도 동일한 문제 부딪히는 사람이 있죠. 그는 이렇게 되돌니다. 왜 나한테만 항상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그는 전 직장이나 조직 집단에서 겪었던 문제를 유사하게 겪고 이에 대해 유사한 감정을 느낍니다. 두 가지 태도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고통의 반복 속에서 그저 괴로워하는 태도입니다.이 태도는 어리석음에서 나옵니다. 여기서의 어리석음이란 능력이나 진행 학력 등의 문제가 아니라 이것이 윤회의 문제임을 알지 못하고 의식의 문제임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는 어제 그랬던 것처럼 오늘 괴로워하고 내일 괴로워할 것입니다. 한명 두 번째 태도가 있어요. 몇 번의 고통을 겪으면 아 뭔가 잘못되었구나 하고 잠시 멈췄는 사람이 있죠.이 이 태도는 지혜에서 나옵니다. 그는 이분법적 마음의 작동을 멈추기 위해 싫어했던 것을 싫어하는 반응을 멈추겠다 다짐하고 좋아했던 것을 좋아하는 반응을 멈추겠다 다짐합니다. 미워하는 사람을 미워하는 반응을 멈추고 애정하는 사람을 애정하는 마음을 멈추겠다 다짐합니다. 선호하는 대응 방식을 멈추고 부로하는 대응 방식을 멈추겠다 다짐하죠. 앞서 우리는 자기 자신과도 대화하지 않은 깊은 침묵의 끝에 나왔죠. 그곳에서 텅빈 자아의 본질을 찾았습니다. 그것은 의식이었죠. 하지만 일상에 빠져 있는 현대인은이를 알지 못합니다. 그저 자신이 신체라 생각하고 자신이 인간이라 생각하며 살아가죠. 삶은 한 번뿐이라는 환상을 갖게 되고 죽음이 이해되지 않게 그로부터 도망치려 하거나 근거 없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그는 삶에 매달리고 물질에 집착합니다. 이와 달리 의식의 의미를 깊게 숙고한 사람은 진실이 무엇인지 압니다. 그는 신체가 내가 아님을 알고 인간이 내가 아님도 알죠. 그는 삶도 나이고 죽음도 나이며 삶과 죽음 넘어도 나임을 선명히 봅니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삶에 매달리지 않고 물질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현실에는 다시 한번의 코펠레니쿠수적 전환이 필요하다. 자아의 기준이 물질적 신체에서 의식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것은 실용적인 이유가 아니다. 개인과 사회의 이익 때문도 아니다.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이다. 나는 떠돌 것이다. 하지만 아무 곳에도 가지 않는다. 나는 태어날 것이다. 하지만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죽지만 죽지 않을 것이다. 하나의 꽃대에서 수많은 꽃이 피었다가 사라지고 다시 피어나지만 그 꽃이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듯이 이제 천천히 눈을 뜹시다. 긴 침묵이 끝났네요. 여전히 세상은 고요하고요. 창문에 열린 틈 사이로 부드러운 바람이 불러오고 멀리 도시의 소음이 희미하고 먹게 들려옵니다. 진리를 보았고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걸까요? 그렇진 않습니다. 우리는 깨달음에 대한 기대가 큽니다. 깨달음이 모든 문제 해결책을 제해시해 줄 것만 같죠. 물론 깊은 이해는 기존의 심리적 정서적 문제를 완화해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 인간의 몸에 담겨 있게 인간적인 한계는 다른 방식으로 찾아옵니다. 저자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이 다음 세 가지 문제를 겪게 된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는 안주입니다. 시면의 다이가 그곳에 정박한 채 고유와 평온에만 머무르려는 경향을 말합니다. 그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아요. 더 이상 호기심도 일어나지 않고요. 그 누구도 그에게 새로움을 주지 않기에 사람과의 약속도 잡지 않습니다. 그는 친절해지고 온해졌으면 부드러워졌지만 더 이상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저 내면의 빛이 머물고 고유의 지혜 속에서 자주. 두 번째 문제는 무기력입니다. 무기력은 안주와 드러나는 양상이 유사하지만 안주가 자쪽으로 인한 외부와의 단절인 반면 무기력은 회의와 허무함이 원인이 된다는 점에서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꿈이구나. 모든 것이 옷이고 인간이라는 옷을 입고 남자 혹은 여자라는 옷을 입고 세금내는 시민이라는 옷을 입고 직장인의 옷을 입고 그것이 나인냥 역할 놀이를 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스스로 만든이 놀이에 흠뻑 빠져서 해가지는 것도 모른 채도 울고 있다가 멀리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할 일 없이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 같이 이번 생을 끝내고 다음 생으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이 생을 치열하게 살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이 생에 애정을 붙여야 할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게 그는 무기력에 빠집니다. 하지만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면 뭐라고 답하실 건가요? 여러분의 자녀가 여름방학 중간에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어머니, 어차피 방학은 끝날 것입니다. 모든 것은 꿈과 같습니다. 그러니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압니다. 이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말인지. 그러니 당신은 아마도 아이에게 이렇게 말해 줄 겁니다. 맞아. 곧 끝나겠지. 그러니 방학을 즐겨야 하지 않겠니? 꽃이지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꽃병에 꽂아드듯 환영처럼 사라질 현실이라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현실이 환영임을 직시한다는 건 그저 삶에 너무 빠져들지 않고 한 걸음만 뒤로 물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지막 문제는 자만입니다. 우리는 깨달음에 너무 큰 기대일 겁니다. 깨달음을 얻은 자라면 높은 도덕성을 가졌고 삼라만성을 꿰들어보는 해안을 가졌으며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을 가졌을 거라 생각하죠.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기대는 깨달음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게 생깁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자신의 부모는 모든 걸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 같죠. 저자는 말합니다. 어떤 면에서 깨달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저 자와 세계의 본질을 들여다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당신을 고결하게 만들지도 거룩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나는 깨달음 이후에도 먹고 살아야 한다. 일을 해야 하고 사람들과 경쟁해야 하고 사회와 관계 맺어야 하고 다양한 영역들을 경험해야 한다. 고통도 계속될 것이다. 욕심도 계속될 것이고 성냄도 계속될 것이다. 매순간 마음의 파도가 넣울될 것이다. 당신은 심해에 닿았지만 수면위의 파도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당신의 정신은 다시 살라내질 것이다. 안나는 모든 것을 매력과 혐오로 나누고 평가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쏟았던 노력은 모두 무의미해지는 걸까? 깨달음도 내면의 길도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마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걱정할 것은 없다. 물론 우리는 동일한 실수를 반복할 것이다. 다시 세상의 마음 빼앗길 것이다. 윤회의 고리는 너무나 강력하게 내가 마음 먹었다고 쉽게 끊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반복임을 모른 채 반복하는 행위와 이것이 반복임을 알며 반복하는 행위가는 큰 간격이 있다. 세상에 다른 이들처럼 먹고 살기 위해 다시 애쓰게 될 테지만 당신은 이제 안다. 먹고 살기 위해 쓰는 것이 삶의 목적이 아님을 말이다. 당신은 조금은 더 나아졌을 것이다. 그 전에 세상에 빠져드는게 열 번이었다면 이제는 아홉 번으로 줄어들었을 것이다. 부와 성취의 마음 빼앗기던 것이 열 번이었다면 아홉 번으로 줄었을 것이다. 생계와 가족에 대한 의미에 고통스러웠던 것이 열 번이었다면 앞으로는 아홉 번으로 줄어들게 될 것이다. 당신의 깊은 영혼에는 세속이 목적이 아니라는 지혜가 깊게 새겨졌을 것이다. 아홉 번은 여덟 번으로 여덟 번은 일곱 번으로 점차 줄어들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충분한 시간이 지난 어느 날에는 가늘게 이어져오는 윤의 고리가 마침내 찬란이 끊어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여행자임을 기억해야 한다. 훌륭한 여행자의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훌륭한 마음가짐은 지금 여행하고 있는이 시간과 공간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이가 자신이 여행자임을 알지 못한다. 현재를 지겨워하고 오지 않은 것들을 기대한다. 비가 오는 날에는 맑기를 바라고 맑은 날에는 비가 오기를 바란다. 젊어서는 빨리 나이 들게 바라고 나이 들어서는 젊음을 그리워한다. 자기 곁에 사랑하는 이들을 돌보지 않고 떠난 후에야 후회하는 사람. 일상에서는 여행을 갈망하고 여행지에서는 집에 안락함을 그리워하는 사람. 우리가 지혜롭다면 영원한 여행자임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비가 오는 날엔 비가 오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 맑은 날엔 날이 맑음을 사랑하는 사람. 젊어서는 젊음의 열정을 사랑하고 노년에 이르러서는 평온에 이르렀음을 사랑하는 사람. 내 곁에 사랑하는 이들의 손을 잡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 일상을 사랑하고 여행도 사랑하는 사람. [음악] 바야로 인류 역사상 개인이 가장 많은 지식을 알고 있는 시대입니다. 매수인간 스크롤과 함께 고급 정보들이 휘발되어 사라지죠. 다만 문제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다는 겁니다. 가슴에 구멍이 난 것처럼 모든 것이 빠져나가죠. 그럴수록 의심하게 됩니다. 내가 아는게 부족해서선가? 머리에 정보와 지식을 더어더 가득 채우면 낮아지려나? 채워보고 채워보지만 채워지지 않습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우리는 그다음 역시 이미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머리만 귀엽기 때문임을 말이죠. 그래서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무한 편에서는 지식이 아니라 실천을 통한 지혜를 다룹니다. 처음이 책을 제한받았을 때는 당연히 저자분의 이전 작품들처럼 다양한 교양 지식을 쉽게 다룬 책일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이 책은 깨달음에 관한 책이요 삶과 죽음, 사후의 문제, 영혼과 윤회의 문제, 자와 세계의 본질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현실적인 문제들 다른 책이었습니다. 저도 대학 시절부터는 유물론적 세계관에 절여져 있어 왔기에 처음이 책을 읽을 때는 거부감이 있었습니다. 사실 거부감 이전에 이해조차 잘 되지 않았어요. 이전에도 관념론이나 불교 철학에 대해 접해 본 적은 있었지만 추상적인 용어와 내용 때문에 진입 장비로 느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편견을 내려놓고 여러 번 읽고 나니 복잡한 용어 하나 없이 이렇게 쉽고 간결하게 인류의 종교적 철학적 유산을 달아준 저자분에게 존경스러운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깨달음의 길을 정말 쉽게 풀어낸 책이라고 생각하지만 꼭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분들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고 사는 지평선 그 너머의 세계를 엿보고 싶으신 분들에게 강력히 추천드리고 싶은 책이었습니다. 마음의 날씨는 변덕이 심하다. 기분은 일어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그것은 폭풍가 되었다가 햇살이 되었다가 밤이 되었다가 낮이 된다. 이렇게 내가 어쩔 수 없는 마음의 상태를 불교에서는 고통이라 말한다. 그래서 행복은 고통이다. 즐거움도 고통이고 불행도 분노도 모두 고통이다. 그것은 내가 통지할 수 없는 파도웨이기 때문이다. 나는 몰아치는 파도웨이를 부유하는 아무입처럼 휩쓸려야만 한다. 방법은 없는 것인가? 다행히 우리는 이제 안다. 변하지 않는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안다. 그것은 마음의 심해에 있다. 행복, 분노, 질투, 혼란, 우울, 쾌락, 즐거움.이 이 모든 감정의 파도는 바다의 표면에서 일어나고 사라진다. 하지만이 모든 파도에 바탕이 되는 깊은 마음의 심에 텅 비어 있음은 파도치지 않고 흐르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다. 우리가 깊게 침묵한 이유는이 움직이지 않는 심해 닿기 위해서다. 사람들은 고유와 평온도 감정의 하나일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고유와 평온은 인간적 감정에서 비롯된 무엇이 아니라 마음의 본질적 상태다. 고유와 평온은 내가 억지로 만들어낸게 아니다. 그것은 원래 처음부터 내 안에 있었다. 변화하는 것이 고통이라면 변하지 않은이 텅 비어 있음을 우리는 이렇게 불러야 한다. 진정한 행복. 진정한 행복은 이미 내 안에 있다. 비본래적인 내 마음의 찌꺼기들과 불순물들이 모두 사그아들면 그 모든 것의 바탕으로 존재하듯 본래의 행복이 드러난다. 그렇기에 나는 이미 진정한 행복이다. 오늘도 끝까지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입니다. [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