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enius Philosopher Who Changed the Meaning of Existence - A Summary of Deleuze's Philosophy (...

충코의 철학 · 2026-05-18

채널: 충코의 철학 |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0G41wIaiV3M | 길이: 20:51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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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 철학 — 동일성에서 차이로

이 영상에서 화자는 프랑스 현대 철학자 질 들뢰즈의 핵심 사상을 소개한다. 들뢰즈는 스스로를 형이상학자로 여겼으며, 세계를 바라보는 근본 관점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 화자의 설명이다. 그 전환의 핵심은 동일성보다 차이를 우선시하는 형이상학이라고 화자는 말한다.

원인과 결과의 역설

화자는 야구공과 유리창 사례, 손흥민의 골 사례를 들어 원인-결과 판단이 언제나 사태의 일면만 포착한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손흥민·골키퍼·수비수처럼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대상들을 먼저 상정하고 그 관계로 사태를 설명하려 하기 때문이라고 화자는 강조한다.

동일성 우선의 사고

화자는 서양 철학이 오랫동안 각 존재가 '울타리'처럼 완결된 동일성을 먼저 가지며, 차이는 그 사이에서 파생된다고 전제해 왔다고 설명한다. 철수와 영이 각각이 완결된 존재로 있기 때문에 차이가 성립한다는 사고 방식이다.

차이가 동일성에 앞선다

들뢰즈는 이 순서를 뒤집는다고 화자는 전한다. 차이가 이미 흐르고 있고, 그 흐름 속에서 동일성이 잠시 출현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들뢰즈가 이를 표현하기 위해 고안한 개념들도 소개된다. 잠재적인 것은 동일성으로 표현되기 이전에 실재하는 차이의 흐름(토네이도 이전의 기압·수분 흐름처럼)이고, 전쟁 기계는 기존 체계를 벗어나려는 힘으로 도적·해적·예술·전쟁 등 다양하게 현실화된다. 아장스망(배치)은 이 잠재적 장들의 배치로, 유튜버-컴퓨터 관계처럼 주체-객체 구분 자체가 유연하게 뒤바뀔 수 있음을 보여 준다고 화자는 말한다.

결론

화자는 들뢰즈가 표준어/사투리 사례를 통해 동일성 위주의 사고가 차이를 차별하는 수단이 됨을 경고했다고 전한다. 다만 탈영토화를 맹목적으로 신성시하는 것도 또 다른 획일화가 될 수 있다는 점을 화자는 들뢰즈 수용의 한계로 함께 지적한다.


자막 원문 (참고)

Kind: captions Language: ko 저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생각할 때면 머릿속이 굉장히 복잡해지고이 세상에서 있는 저 자신의 존재 자체가 아주 묘해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한번 야구공을 잘못 던져서 유리창이 깨졌다고 해보죠. 이때 우리는이 현상을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이해합니다. 야구공이 유래창에 부딪혔고 그게 원인이 돼서 창문이 깨지는 결과가 발생했다는 거죠. 그런데 한번 여기에 대해서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상황이 생각보다 매우 복잡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제가 야구공을 더 약하게 던졌다면 유리창은 깨지지 않았을지도 모르죠. 또한 유리창이 더 강한 소재로 이루어져 있었다면 깨지지 않았겠죠. 야구공이 더 부드러운 소재로 이루어져 있었어도 깨지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다면 이때 과연 우리는 야구공이 부딪혀서 유리창이 깨졌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대답하기가 쉽지만은 않습니다.이 역설은 모든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다 적용될 수 있습니다. 손흥민이 감마차기로 골을 넣은 건 손흥민이 기가 막히게 공을 찾기 때문일까요? 혹은 골키퍼가 막지 못했기 때문일까요? 수비수의 능력 부족이었을까요? 수비 전술의 문제였을까요? 이런 모든 가능한 원인들의 나열을 생각하다 보면 도대체 손흥민의 꼴이 어떻게 발생한 것인지 불명확해집니다. 우리는 평소 A가 B의 원인이다라고 말하는데 매우 익숙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을 더 해보면 모든 원인과 결과에 대한 판단은 그저 사태의 일면만을 보여줄뿐 결코 완전한 판단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이 인과성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은 철학자 데이비드 휴이 제시했던 것인데요. 그런데 오늘은 이것을 다른 철학 이야기에 접근하기 위해 활용하려고 합니다. 바로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 질레즈의 생각인데요. 들레즈의 철학은 아마이 시드의 가장 강력한 영약을 발휘하고 있는 철학 사상 중 하나일 겁니다. 철학은 물론 예술계에서도 들레즈에 대한 언급을 아주 쉽게 볼 수 있죠. 그런데 들레즈는 매우 난해한 글을 쓰기로 유명했고 그의 철학을 개승해서 활용하는 사람들도 주로 굉장히 나해한 언어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대중적으로는 굉장히 큰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죠. 오늘 영상에서 저는 들레지가 그 나해한 언어를 통해 과연 무엇을 말하고자 했던 것인지 그 핵심 아이디어를 제가 이해한 선에서 설명드리려고 합니다. 오늘의 제 이야기가 들레지 철학의 전부를 설명하는 것은 결코 아니고 더 깊은 이해를 위해서는 더욱 전문적인 자료를 보셔야 할 겁니다. 하지만 제가 해석하기에 들레즈의 사고에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경로가 있기 때문에 오늘은이 사고의 길에 대해서 한번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먼저 들레즈는 자신이 형의 상학자라고 생각했습니다. 형의 상학 메타직스는 세계와 존재의 가장 깊은 본질에 대해 다룹니다. 물리학 피직스가 물리적으로 관찰 가능한 사물들의 본성에 대해 다룬다면 형의 상학은 그 관찰 가능한 사물들이 존재하도록 하는 더 깊은 질서를 파악하려고 하죠. 그래서 보통 형의 상학은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립니다. 눈에 보이는 거 이상의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형의상학은 우리가 세상에 대해 근본적으로 어떤 관점을 취하고 있느냐와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주제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심층적으로 어떤 관점을 품고 있느냐에 따라 그 이상의 표칭적인 영역에서 여러 생각이나 행동이 다르게 나타날 테니까요. 간단히 말하자면 들레즈는 세상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관점 자체를 뒤바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그동안 우리가 엄청난 선입견에 지속적으로 사로잡혀 왔으며 이제는 그걸 제거하고 새로운 관점으로 나아가야만 비로소 세상을 공정하고 진실되게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봤습니다. 오늘 제가 가장 먼저 강조해서 말씀드릴 개념은 차이입니다. 들레저는 우리가 그동안 동일성을 우선시하는 관점에 사로잡혀 왔으며 그 관점에서 자연스럽게 차이를 동일성으로부터 파생된 것으로 치부했다고 분석했어요. 그리고 그는이 전통적인 관점이 상당히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으며 이제는 폐기 돼야 마땅하다고 생각했죠. 동일성을 차이보다 우선시한다는게 과연 무엇일까요? 한번 형의 상학적으로 생각해 보죠. 철수라는 사람과 영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철수와 영이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죠.이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합니다. 그런데이 차이는 과연 왜 존재하는 걸까요? 아주 어려운 질문입니다만 한번 간단하게 생각을 해 보면 철수와 0이라는 사람이 존재하기 때문에이 둘 사이에 차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철수라는 하나의 완결적인 존재가 먼저 있고 그 옆에는 마찬가지로 0이라는 하나의 완결적인 존재가 먼저 있습니다. 이렇게 두 존재가 성립해 있기 때문에 그 사이의 차이가 비로소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만약 철수나 영이 중 하나가 없었다면 차이 또한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게 바로 동일성을 우선시하는 사고 방식입니다. 여기서 철수와 영인는 각각 자기 자신과 동일한 존재로 상정되어 있습니다. 철수라는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존재가 있고 영이라는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존재가 있죠. 만약 철수가 납치된 사이 그 자리를 영수가 철수인 척을 하고 대체했다면 지금이 영수는 더 이상 철수의 동일성을 유지하는 존재라고 볼 수 없죠. 철수라는 존재에는 철수를 이루는 나름의 기준이 있고 그 기준을 유지하는 한 철수는 계속해서 유지됩니다. 그리고 영인은 또 나름대로 자신의 기준을 갖춘 채 동일한 존재로 유지되고 있죠. 애초에 우리는 어떤 대상의 존재에 대해 생각할 때 안묵적으로 항상 이런 동일성에 기초한 사고를 하고 있습니다. 나사와 모이 있을 때 나사는 나사로서 즉 나사의 기준에 맞는 나사와 동일한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못은 그것과는 조금 다른 못의 기준을 갖춘 못과 동일한 대상으로서 존재하는 것이죠. 쉽게 표현하면 우리는 평소 존재를 기본적으로 어떤 울타리와 비슷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철수는 철수 울타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울타리가 깨지지 않는 한 철수는 계속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죠.이 울타리로 경계지어져 있는 영역은 철수의 본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이 안에 무엇이 들어오고 무엇이 나가는지는 계속 변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서 변호사라는 특성이 들어올 수도 있고 자영업자라는 특성이 들어올 수도 있죠. 한국 거주라는 특성이 들어올 수도 있고 일본 거주라는 특성이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이런 속성들은 계속 변합니다. 하지만 애초에 울타리가 그대로 유지되는 한 철수는 계속 동일하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바로이 서로 다른 울타리를 가진 대상들 사이에 차이가 비로소 성립합니다. 애초에 동일성의 울타리가 굳건하게 쳐져 있지 않았다면 차이는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들레즈는 이게 서양 철학이 오랫동안 간직해 온 선입견이었다고 봤어요. 처음에 언급했던 원인과 결과의 이야기를 다시 살펴보죠. 여기서 혼란이 발생했던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동일성을 유지하는 대상들 사이의 관계를 통해서 사태를 파악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손흥민, 축구공, 골키퍼, 수비수 등등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대상들이 먼저 있고이 대상들의 움직임을 통해 원인과 결과를 설명하려고 했죠. 여기서 어떤 문제가 생겼냐면 하나의 사건 안에도 대상들의 관계는 사실상 무한히 주어질 수 있어서 우리가 처음 생각했던 원인과 결과의 관계는 사태 전체를 설명하기에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면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 가지 방법은 더 많은 동일성을 유지하는 대상들을이 그림에 포함시키는 겁니다. 처음에는 손흥민과 축구공만 생각했다면 다음에는 골키퍼, 그다음에는 수비수 이렇게 더 많은 설명 요소들을 끌어들이고 나중에는 잔디, 축구장 인프라, 관중의 함성, 관중 수, 세계의 축구 문화 등등 아주 많은 대상들을 설명의 틀 안에 끌어들이면 더 정교한 설명이 가능해집니다. 그런데 들레지적인 사고 방식에서는 또 다른 접근 방식을 선택합니다. 바로 동일성을 우선시하는 사고 방식 자체를 아예 포기하는 거예요. 애초에 손흥민이라는 동일한 대상을 상정해 놓지 않으면 손흥민이 감아차기로 골을 넣었다라는 사태 자체가 존재하지 않게 되고 그러면 이것을 설명해야 할 필요성도 사라져요. 물론 들레즈가 우리가 이렇게 현실에서 마주하는 현상들에 대한 설명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현실을 바라보는 구도 자체를 완전히 바꿀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동일성을 우선시하는 당연한 사고 방식. 특정한 울타리를 가진 채에 자기 자신으로서 본질을 갖고 존재하는 대상들을 중심해 놓고 세상을 바라보는 그 근본적인 사고 방식을 포기할 때 우리에게는 새롭고 더 나은 세계에 대한 해석이 펼쳐지게 된다는 거죠. 들레제는 차이가 동일성에 앞선다고 주장했습니다. 동일한 대상들이 이미 있고 그 사이에 차이가 성립하는게 아니라 차이가 이미 존재하고 그 차이의 흐름 속에서 그때그때 특정한 조건을 갖추며 우리에게 모습을 나타내게 된 것이 동일성이라는 거예요. 철수 먼저 존재하고 그다음에 영의와의 차이가 발생하는게 아닙니다. 그보다 이미 철수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일종의 흐름 속에서 출연한 것입니다. 그 변화에는 근본적으로 동일성이 앞서서 있는게 아니라 차이가 앞서서 있어요. 여기서 우리는 흔히 또다시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변화를 다시 동일성을 바탕으로 바라보게 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철수를 이루고 있는 세포들은 끊임없이 교체되고 있는 중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철수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어요. 그런데 여기서도 우리는 보통 세포들이라는 동일한 대상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고 그것이 또 다른 동일성을 가진 다른 세포들로 교체되는 것이라는 그림을 그리죠. 하지만 여기서는 또다시 금방 문제가 생겨요. 그 각각의 세포들 또한 완벽한 동일성을 먼저 갖고 있는게 아니라 끊임없는 변화를 통해 이루어져 있거든요. 결국 우리는 무한한 설명의 굴래에 빠지게 됩니다.이 굴래를 빠져나오는 한 가지 방법은 차이를 절대적으로 우선시하는 겁니다. 변화를 동일성을 가진 것들 사이의 교체가 아닌 동일성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차이의 흐름으로 해석하는 거예요.이 이 관점에서 동일성은 잠시 출연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가 철수라고 부르는 것이 차이의 흐름 속에서 생겨날 뿐이에요. 그 이상으로 철수가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때로 이런 들레즈의 철학은 굉장히 당연한 소리로 들리기도 해요. 세상 만물이 끊임없이 변한다는 걸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제 생각의이 당연함은 우리의 선입견에서 오는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우리는 동일성을 이미 전제하는 사고 방식에 너무 익숙해요. 그래서 들레지가 말하는 차이에 기초한 변화도 자연스럽게 동일성의 관점에서 명확하게 이해된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이렇게 이해가 이루어졌다고 느끼는 순간 이미 동일성의 함정에 빠져들고 있는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차이를 우선시하는 사고는 사라져 버리고 다시 변화를 동일한 것들 사이의 교체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죠. 들레즈의 철학의 상당 부분은이 기묘한 차이의 장을 어떻게 하면 동일성 위주의 사고에 다시 잡아먹히지 않으면서 포착하고 표현해 낼 수 있을까 하는 고민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런 고민의 과정에서 들레즈는 많은 개념들을 발명해서 사용하기도 했는데요. 그가 특수하게 사용하는 대표적인 개념 중 하나가 잠재적인 것입니다. 들레지가 말하는 잠재적인 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로 나타나기 이전, 즉 동일성을 갖춘 존재로 표현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차이의 흐름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서 토네이도가 있을 때 우리가 토네이도라고 부르는 것은 자기 동일성을 가진 하나의 대상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토네이도라고 부르는 현상이 나타나기 이전에도 이미 공기 중에는 기압과 수분의 특정한 흐름이 존재하고 있죠. 그 흐름이 어떤 방향으로 쭉 발전하다가 어느 임계점을 넘었을 때 토네이도의 모습을 보일 뿐입니다. 그러다가 이내 토네이도가 아닌 모습으로 흩어지죠. 흔히 우리는 잠재적인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익숙합니다. 토네이도는 토네이도의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며 그 이전까지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여기서는 토네이도가 존재하게 됐을 때와 존재하지 않던 때를 어떻게 딱 나눌 수 있을 것이냐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일상적 관점에서 생각하면 토네이도가 생기기 전에는이를 테면 공기라는 다른 대상이 있었을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동일성의 사고에 빠져들고 있죠. 공기라는 동일한 대상을 중심으로 사고하면서 차이를 놓치고 있는 겁니다. 들레지가 말하는 잠재적인 것은 이런 자기 동일적인 완결적 모습으로 나타나는 대상들로 완전히 표현되지 않는 순간순간 변화하며 흐르고 있는 장입니다. 그는이 잠재적인 것이 우리가 평소에 명확히 인식하는 현실적인 것들만큼이나 실제를 이루는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들레즈가 잠재적인 것과 관련해 내놓은 굉장히 흥미로운 아이디어 중 하나로 전쟁 기계가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전쟁이라는 현상에 대해 생각할 때 국가끼리의 분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들레즈는 이런 사고를 뒤집기를 요구합니다. 그는 어떤 주체가 먼저 있고 그게 전쟁을 일으키는게 아니라 전쟁 기계라는 것이 이미 있고 그게 적절한 세상의 조건을 만났을 때 우리가 아는 전쟁의 형태로 현실화 되는 것이라고 봤습니다. 여기서 전쟁 기계는 바로 동일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잠재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들레즈가 말하는 전쟁 기계는이 세상에 어쩌면 사회가 생겨나기 이전부터 이미 흐르고 있었을지도 모를 힘 같은 것을 가르킵니다.이 힘의 흐름의 특징은 정규적인 체계를 벗어나고 그걸 무너뜨리려 한다는 겁니다.이 벗어남과 무너뜨림의 힘은 세상의 적절한 조건에 놓이게 됐을 때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게 됩니다. 국가의 공권력이 약하던 시절에는 마을을 약탈하는 도적대로 나타날 수도 있고요. 국가의 감시망을 벗어나는 곳에서는 해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들레즈는 예술 또한 전쟁 기계와 깊음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술은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잠재적 힘이 물리적 폭력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현실화된 결과라는 거죠. 혹은 국가 단위로는 전쟁 기계가 우리가 흔히 아는 전쟁의 형태로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이 결과만을 보고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했구나. 러시아와 일본이 전쟁을 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 이면에는 국가로 결코 완전히 설명되지 않는 아주 오래 전부터 흐르고 있었던 전쟁 기계의 장이 존재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러한 한 눈에 보이는 것 이면의 잠재적인 장들의 배치를 가르쳐서 들레즈는 아장스망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영어로는 어셈블리지라고 번역되는 개념으로 아마 문화 예술계 쪽에서 일하시거나 그쪽 책들을 많이 보시는 분들은 심심치 않게 마주칠 수 있는 단어인데요. 우리는 일상 어디에서나 아장스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저는 유튜버로서 영상을 만드는데요. 이걸 동일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저라는 한 명의 동일성을 유지하는 유튜버가 주체로서 영상을 만든다고 해석하게 되죠. 하지만이 똑같은 상황을 차이의 관점에서는 전혀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저라는 한 명의 유튜버는 유튜브 생태계라는 전체 아장 스망을 이루는 하나의 요소입니다.이 생태계 안에서는 서로 다른 경향성을 가진 여러 잠재적인 것들이 교체하고 있죠. 예를 들어서 컴퓨터와 관련해서는 그 나름의 흐름이 있고 저와 관련해서는 저를 둘러싼 또 나름의 흐름이 있습니다. 그리고이 둘이 교체하며 어떤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내기도 하죠. 여기에는 애초부터 정해져 있는 위계나 주체와 객체의 관계 같은 것이 없죠. 따라서 어쩌면이 상황을 컴퓨터가 저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하는게 더 나을 때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또한 컴퓨터 플러스 인간이라는 하나의 묶여진 존재를 기본 단위로 생각하는게 더 나을 수 있습니다. 저는 영상을 만들 때 언제나 컴퓨터를 이용하는데 그럼 컴퓨터와 저는 서로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인지 혹은 하나로서 존재하는 것인지 이건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입니다. 메가 컴퓨터를 이용한다라는 건 그저 우리의 전통적인 선입견 동일성의 사고에서 나오는 한 가지 해석에 불과하죠. 이렇듯 아장스망의 사고에서는 주체와 객체 사이의 관계, 세계를 이루는 존재의 기본 단위 자체가 유연하게 뒤바뀌며 우리의 선입견을 계속 뒤집습니다.이 과정을 탈영토화라고 합니다. 고정된 성질과 정체성이 굳어지며 하나의 영토가 생겨날 때 이내 그것을 뒤없는 기존 체계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전환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거죠. 이처럼 들레즈는 우리의 생각이 어떤 하나의 완결적인 대상에 고정된 채 거기에 안주하고 그 똑같은 기준을 바탕으로 한 사고를 자기 복제적으로 계속 내놓는 것에 반대했습니다. 그는 동일성 위주의 사고는 진정한 사고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파악한 현실에서 더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가 현실을 파악하는데에 사용했던 틀을 계속 똑같이 적용하는 것에 불과한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독일과 프랑스의 전쟁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독일과 프랑스라는 동일성의 틀을 당연한 듯이 계속 사용하고 그것 중심의 분석만 이어 나간다면 그것을 뛰어넘는 전쟁 기계의 역동적인 면은 들여다보지 못하게 됩니다. 추가로 들레즈는 동일성 위주의 사고가 차이를 차별하고 배격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표준어라는 동일성의 울타리를 쳐 놓고 그것을 위주로 사과하기 시작하면 사투리를 표준어가 아닌 것으로 취급하게 됩니다. 사실 세계의 실상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언어의 흐름 속에서 일정한 조건을 통해 표준라고 불리는 것이 출연하고 그건 옆에 사투리라고 불리는 것이 출연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동일성 위주의 사고에서는 사투리를 퓨즈너가 아닌 것으로 바라보면서 세련되지 않은 말로 취급하거나 심지어 고쳐야 할 말로 여기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가 살면서 모든 차별을 다 없앨 수는 없을 것이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 차이 위주의 사고를 하면 결코 잘못된 것으로 낙인 찍지 않을 것을 동일성 위주의 사고만을 고집하면서 배척한다면 한 번쯤은 관점의 전환을 통해 과연 그 배척이 정말로 정당한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겁니다. 우리가 차이를 차별하고 억압하는데 익숙해지면 결국 항상 똑같은 것을 반복하며 거기에 굴종하게 될 겁니다.이 이 굴종을 경계하며 끝없이 변화하는 세계의 흐름에 맞게 우리의 사고 또한 계속되는 변화에 열어 놓차는게 딜레즈의 철학이 전하는 윤리적인 메시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딜레즈의 철학은 지나치게 해체적이기만 한 사상들에 많이 이용되기도 합니다. 사실 세상에서는 탈토화가 중요한만큼 하나의 시스템을 세우고 그것을 발전시키는 영토화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들레즈의 철학을 받아들인 사람들 중에서는 영토화를 부정하고 탈토화에만 초점을 맞추며 모든 전통과 권위를 비판만 하려고 하는 경우도 있죠. 저는 이런 지나친 해체는 사실 하나의 가장 강력한 영토화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해체를 신성시하며 탈영토화라는 동일한 논리로 모든 것을 통일해 버리려는 가장 극심한 회일화와 권위주의의 정신이 될 수 있는 거죠. 우리는 이런 문제점을 잘 경계하면서 들레즈 철학의 생산적인 메시지를 잘 이용해야 할 겁니다. 네, 오늘은 들레즈의 철학에 대해 설명드렸는데요.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바라볼 때 생겨나는 혼동이 사실 동일성 위주의 사고 때문일 수 있다는 견해로부터 이야기를 출발했고요. 그리고 동일성보다 차이를 우선시하는 사고가 과연 무엇인지 또한 그 차이의 사고를 들레지가 어떻게 잠재적인 것과 아장스망과 연결된 사고로 더 구체적으로 발전시켰는지 설명드렸습니다. 서두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들레즈는 자신이 형의 상악을 내놓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아마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특정한 형의 상악적 관점을 아주 강력하게 품고 있을 겁니다. 그 관점에서 세상에 나타나는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해석하게 되죠. 하지만이 자연스러운 해석이 편리할 수는 있지만 때로는 우리가 더 나은 변화로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을 수도 있습니다. 들레즈의 차이의 철학, 잠재성의 철학을 생각하며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물을 한번 평소와 다른 각도에서 해석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예를 들어 지금 여러분이 보고 있는 전자 기기는 과연 하나의 독립된 사물일까요? 혹은 주변에 다른 사물들과 연결된 채 변화하고 있는 것일까요? 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