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ecisive reason why Koreans have become particularly sensitive and uncomfortable these days

충코의 철학 · 2026-05-17

채널: 충코의 철학 |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IGxZXypnIt0 | 길이: 18:22

요약

영상 개요

충코의 철학 채널은 조승현 채널의 영상에서 촉발된 문제의식, 즉 한국 사회에서 "이거 나만 불편해?"라는 식의 민폐 논란이 급증하는 이유를 철학적으로 조명한다. 화자는 이 현상의 근저에 반자연(反自然)이라는 단일 개념이 있다고 주장하며, 한국의 압축 근대화가 빚어낸 특수한 문명화 경향을 논한다.


반자연 개념과 한국의 압축 근대화

화자는 문명이란 본질적으로 자연에 반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자연을 통제하고 예측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문명이며, 이는 분명 많은 이점을 준다. 그러나 서구 문명을 단기간에 수입한 한국은 자연을 열등한 것으로, 문명화를 우월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극단적이고 급격하게 발현됐다고 말한다. 과거 한국이 이탈리아처럼 열정적인 국민성으로 여겨졌던 것과 달리, 지금은 일본식 거리두기 문화에 못지않게 많은 것을 통제하고 조심하는 사회가 됐다고 강조한다.


세 가지 징후

화자는 이 반자연 경향의 징후를 세 가지로 짚는다. 첫째, 안전에 대한 과도한 집착으로, 수학여행 폐지, 위험 요소 없는 놀이터, 강에서 노는 것을 더럽고 위험한 행위로 간주하는 현실을 예로 든다. 둘째, 상처 주지 않는 문화로, 학교에서 축구 금지, 체육대회 승패 폐지, 힐링 에세이 대유행을 그 표현이라고 말한다. 셋째, 예측 가능성 추구로, 전화를 기피하고 조별 과제를 극도로 꺼리는 MZ세대 문화를 예시로 든다.


비판 의식의 부재

서구 사회는 1·2차 세계대전의 참혹한 경험을 통해 계몽 비판 운동을 발전시켰다고 화자는 말한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은 신화로 되돌아간다"는 주장을 인용하며, 이성으로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시도가 결국 폭력으로 귀결된다고 설명한다. 반면 한국은 그런 파국을 자체적으로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판 의식이 훨씬 더 부재한 채로 반자연의 경향이 지속된다고 말한다.


대안적 사례들

화자는 규정 없는 공터에서 아이들을 자유롭게 놀게 한 연구를 소개하며, 아이들이 오히려 덜 다치고 학교 복귀 후 생활 태도도 좋아졌다고 말한다. 또한 프로듀서 브라이언 이노가 작업에 의도적으로 무작위성을 도입해 창작 능력을 극대화한다는 사례를 든다. 위험을 인지한 아이들이 스스로 주체성을 발휘하듯,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 오히려 더 큰 집중력과 능력 발현을 이끈다고 강조한다.


결론 요약

화자는 매번 동일한 방향으로만 나아가는 문명은 결국 자멸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며, 한국 사회가 문명화에 대한 비판 의식을 갖고 다양한 변수에 열린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입장을 밝힌다.


자막 원문 (참고)

Kind: captions Language: ko 제가 최근에 조승현의 탐구 생활이라는 채널에서 굉장히 흥미로운 영상을 하나 봤어요. 요즘 민폐 논란이 많은 이유라는 영상이었는데 요즘에 한국 사회를 보면 이거 나만 불편해. 이런 식으로 불만을 표출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진 것 같다는 거예요. 예를 들면 기차에서 음식 먹는 사람들 그거 냄새 나는데 나만 불편해. 식당에서 아이들 시끄럽게 구는 거 나만 불편해. 이런 식인 거죠. 물론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거는 굉장히 중요한 일이지만 거기서 조승현 님이 주장하셨던 거는 사회는 내가 권리를 침해받지 않을 자유도 있지만 내가 무언가 행동을 할 자유도 있다. 그렇다 그랬을 때 다수의 사람들이 동의하기 쉬운 자유는 보통 그 이거 하지 말자, 저거 하지 말자 이렇게 규정해 놓는 자유인데 문제는 그런 종류의 자유를 굉장히 많이 보호를 해 주다 보면 결국에는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할 자유는 막상 굉장히 제한되게 된다는 거예요. 그렇다 보니까 우리 사회에서는 어느 순간부터는 어떤 행동들을 자유롭게 어딘가에서 하기가 굉장히 어려워진 사회가 된게 아닌가 이런 분석을 내놓셨어요. 특히 과거에는 한국이 유럽으로 따지면은 이탈리아 사람들이랑 굉장히 국민성이 비슷한 거 같다. 열정적이고 그런 문화라는 인식이 강했고 일본은 반면에 거리두르기가 굉장히 심하고 서로를 무조건 배려야 되고 절대로 그 사람의 영역을 침해서는 안 되는 그런 의식이 강한 사회 이런 이미지가 있었는데 요즘에는 한국도 정말로 만만치 않게 엄청나게 많은 것들을 통제하고 조심하고 거리를 두는 사회가 된 것 같다라는게 그분 의견이었어요. 특히 그 영상에서는 이런 최근 한국의 영향을 위생에 대한 굉장히 증대된 관념과도 연결을 시켰어요. 깨끗한 거를 굉장히 중요시 하고 특히 아이키우고 그러는 집들은 조금이라도 아이가 더러워지면은 안 될 것처럼 생각을 하고 그런 문화가 확실히 한국은 얻는 색부턴가 생긴 거 같아요. 저도 유럽에 살 때랑 한번 비교를 해 보면 유럽에서는 사실 강아지들을 산책을 많이 시키는데 그 개들을 보면은 꼬질꼬질한 개들이 굉장히 많거든요. 근데 한국계들은 정말 하나같이 깨끗한 강아지들이 정말 많아요. 그리고 아이들 같은 경우도 사실 유럽에서는 어디 공항이라든지 기차역이라든지 그런 데서 길바닥에서 그냥 기어다니고 그래도 부모가 가만히 냅두는 경우가 엄청 많아요. 근데 한국에서는 무조건 절대로 그런 불결한 것에는 절대로 접촉을 하지 말아야 되는 문화가 됐죠. 전반적으로 지금 사람들이 굉장히 타이트하게 절대로 서로한테 불편함을 주면 안 되고 내가 불편함을 느끼는 거는 절대로 참을 수 없고 그렇게 되는 영역들이 점점 늘어가는 추세인 거 같아요. 그렇다면 결국에 제가 궁금한 거는 도대체 왜 이렇게 됐을까 하는 거예요. 한국 사회는 왜 다른 나라들보다도 훨씬 더 이런 경향이 그동안 강하게 발전을 해 왔을까? 저는 결국에는이 모든 현상을 반자연이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압축해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다른 요인들도 굉장히 많을 거예요. 그런데이 반자연의 경향성이 그동안 몇십년 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수많은 사회적인 변화들을 만들어내는 가장 핵심적인 에너지 축에 하나였던 거 같아요. 제가 말하는 반 자연은 자연에 반하는 겁니다. 반자연을 다르게 표현하면 어쩌면 문명이라고 부를 수도 있어요. 문명은 자연에 반하는 것이죠. 자연을 그대로 두지 않고 자연을 개관하고 우리가 이용하기 좋은 방향으로 우리가 편안함을 느끼는 방향으로 바꾸는 것이 문명입니다. 문명은 기본적으로 좋은 점이 굉장히 많아요. 뭐 우리가 지금 문명이 없었다면 이렇게 편리한 생활을 누리고 있지 못하겠죠. 지금 제가 이런 카메라를 통해서 영상을 찍고 있지도 못할 거예요. 그런데 인간이 문명의 장점에 주목을 하다 보면 점점 점점 자연을 계속해서 바꿔야 된다. 자연을 있는 그 상태대로 두면 안 되고 우리의 뜻에 맞게 바꿔야 된다. 자연을 그대로 냅두는 것은 열등한 거고 자연을 우리의 뜻대로 바꾸는게 더 우월한 거다라는 의식으로 발전하게 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실은 서구사회는 그런 과정을 굉장히 오래 전부터 겪어 왔었어요. 과학 기술 문명이 수백년 동안 최소 근대적인 문명에 발전을 해왔기 때문에 그 사이에서는 자연적인 것보다 문명적인 것을 더 우월시하는 의식의 흐름의 발전도 엄청나게 크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한국 같은 경우는 결국에는 그 근대 문명을 석으로부터 수입을 했잖아요. 그렇다 보니까 그 과정에서 엄청나게 압축적으로 빠른 속도로 모든 문명의 선물들을 받아들였어요. 근데 문제는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연을 극복하고 문명화를 해야 돼. 과거에 그 열등하던 상태 지저분하고 모든 것이 통제되어 있지 않고 예측 불가능한 채로 남아 있는 그 상태로부터 탈출해서 우리는 더 깔끔하고 더 잘 통제되고 더 잘 예측되는 사회로 가야 돼. 그렇게 개인의 삶도 바꿔야 돼라는 그 힘이 너무 단기간에 너무 강하게 발현됐기 때문에 자연적인 것을 무조건 열등한 걸로 치불를 하고 문명적인 것을 훨씬 더 좋은 것으로 여기는 경향성도 굉장히 극단적으로 강하게 나타났던 거 같아요. 사실 서구문명에서는 그 자연과 대척점에 서연과 싸우고 자연을 정복하고 극복하려는 그 힘이 굉장히 큰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다라는 점에 대해서도 그 충분히 긴 시간 동안 아주 잘 알려졌습니다. 그게 이제 1900년대 초반부터 중반까지 서구 문명 안에서 특히 유럽 사회에서 굉장히 강력하게 나타났었던 개몽 비판 움직임이에요. 근대적 이성을 비판하는 움직임이었죠. 그 당시 서구 사람들은 제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거기서 수백만 명, 수천만 명이 죽었단 말이에요. 지금 우리가 막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충격을 겪었습니다. 그러면서 아, 우리가 그동안 자연을 정복한다라는 모토를 통해서 과학 기술을 발전시키고 이렇게 진보된 사회를 잃었는데 결국에는 우리가 발명한 탱크와 생황 무기들과 핵폭탄을 바탕으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파멸에 이르는구나. 그리고 꼭 그런 기술뿐만 아니라 사회를 지나치게 인류적으로 통제하려는 관료주의적인 마인드, 시스템 이런 거를 통해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아주 효율적으로 강제 수용소에 보내지고 효율적으로 처형당하고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구나라는 것을 보면서 결국에는 문명이 자연보다 절대적으로 우월한 것이 아니라 그 어딘가에서 우리는 밸런스를 잡아야 된다라는 비판적인 의식이 활발하게 일어났습니다. 저는 그 비판적인 의식이 활발하게 일어나던 시기가 어 서양 사상 철학에서는 가장 전성기였다고 생각을 해요. 사실 지금에 와서 저는 서구 문명을 우리가 무조건 추종해야 되는가? 절대로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동아시아 문명권이 훨씬 더 앞서 있는 부분도 많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그 서구 문명의 역사로부터 배울 수 있는 거는 자연을 배척하려는 반자연의 정신이 결국에는 파국을 불러올 수도 있다라는 경고인 거죠. 그런데 한국은 아직까지는 다행이라고 불러야 될 수도 있지만 근대 문명을 통한 엄청난 파국을 우리 자체적으로는 겪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침략에 의해서 겪고 그런 건 있었지만 우리 자체적으로 문명을 극단적으로 발전시켜서 아직 직접적으로 파괴적인 결과를 눈에 띄게 본 상태는 아니에요. 이거는 시각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왜냐면 어쩌면 지금 한국의 굉장히 심각한 저출산도 그 극단적인 문명화의 결과일 수도 있거든요. 그런데 어쨌든 뭐 커다란 전쟁 같은 건 아니니까 우리는 아직까지는 그것에 대해서 경각심을 가질 정도의 상황을 마주하진 않았습니다. 그렇다 보니까 비판 의식도 훨씬 더 적을 수밖에 없는 거죠. 이런 우리 사회의 비판 의식의 부제를 굉장히 잘 보여주는 몇 가지 징후들이 있습니다. 일단 첫 번째로 안전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에요. 안전한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이고 안전하지 않은 것은 나쁜 것이다. 이런 의식 속에서 일부 학교들에서는 수학 여행이 없어지고 있다고 하고요. 어린이 집과 유치원에서는 굉장히 극단적으로 아이들의 안전을 책임지려고 하고요. 그리고 놀이터들은 조금의 위험함도 없는 굉장히 안전한 곳으로 그동안 많이 변화를 했습니다. 결국에 자연 환경이란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잖아요. 그래서 그 자연적인 위험 우리가 부상당할 수 있고 아플 수 있고 그 모든 것들을 철저하게 통제해야 된다라는 압박은 대한민국 사회가 전 세계적으로도 굉장히 강력한 편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이것도 유럽 사회랑 비교하면 굉장히 간적으로 드러나거든요. 유럽에서는 엄청 엄청 위험해 보이는 놀이터들도 꽤 쉽게 볼 수 있어요. 물론 유럽 사람들이라고 다 그렇고 한국 사람들이라고 다 이런 건 절대 아닙니다. 근데 이런 경향성은 저는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요. 아까 위생에 대해서 말씀드린 것도 저는이 안전이랑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랑 불결하다고 생각하는 거는 굉장히 많은 경우에 겹쳐 있거든요. 이것도 다른 많은 선지국 사회에서는 사실 아이들이 그냥 자연에 나가서 노는 경우도 많거든요. 예를 들어서 자연에 호수가 있다. 도시 근교에 어디에 호수가 있다. 그러면은 그 호수가에 가서 사람들이 그냥 자연스럽게 호수에 뛰어들어서 노는 경우가 많거든요. 성인들도 그러는 경우가 많고 아이들도 그러는 경우가 많습니다. 강에 뛰어들어서 노는 경우도 많고요. 그런데 요즘에 한국은 어떻죠? 강에 뛰어들어서 논다라는 건 거의 상상을 할 수가 없는 일이에요. 어디 동네 연못 같은데 그냥 들어간다. 상상할 수 없죠. 더럽고 위험하고 절대 용납될 수가 없는 행위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상처 주지 않는 문화가 있어요. 조금 바꿔서 표현하면 상처받는 것을 굉장히 두려워하는 문화가 어느 순간부터 자리를 잡았습니다. 자연적인 질서에서는 항상 우리의 의지가 좌절되고 자연은 결코 평등한 곳이 아니고 많은 불평등이 존재하고 누군가는 억울함을 겪을 수밖에 없고 그런 일들이 비일비하거든요. 그런데 문명사에서는 그런 것들을 최대한 보정을 넣어서 형평성 있게 만들고 서로 배려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된다라는 의식이 기본적으로 있죠. 이거는 분명히 좋은 겁니다. 좋은 면이 많아요. 그런데이 의식이 너무 과도하게 발현되면 조금의 상처를 주는 것도 절대로 용납할 수 없게 되는 거죠. 요즘에 어떤 학교 운동장에서는 점심 시간에 축구하는게 금지됐다고 합니다. 왜냐면 그 축구에 참여하지 못하는 학생들한테 상처가 되니까. 그리고 체육대에서는 승패가 없어진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패한 학생들이 상처받으니까. 저는이 상처 주지 않는 문화의 발전을 힐링 소설이나 힐링 에세이의 대유행을 통해서 처음 감지했었던 거 같아요. 힐링이라는 건 좋은 걸 수 있죠. 우리가 피곤한 사회 속에서 위안을 얻는 거 자체는 굉장히 좋은데 그런데이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는 그 사회의 상황을 무조건 그 사회가 잘못하고 환경이 잘못한 것으로 생각하고 너는 잘못이 없어. 너는 괜찮아. 이렇게 마치 어린애 달래 주는 것처럼 달래 주려고 하는 그런 문화가 엄청나게 크게 발전을 하는 걸 보고 아 이게 사람들이 상처에 대한 극단적인 거부감을 보이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까 이렇게 상처를 두려워하고 거부감을 갖는 것의 문제는이 세상은 절대로 상처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는 곳이라는데 있죠. 아무리 우리가 보호를 받더라도 결국에는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데 그런데 애초의 환경 자체가 상처 주는 거를 극단적으로 배제해 버리면 우리가 상처에 대항할 힘을기를 기회조차 없어지게 되는 거 같아요.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거는 저는 상처받지 않는 혹은 상처를 극복하는 강인한 정신을 기르는 거라고 보거든요. 그런데 그러려면 많은 상처를 받아봐야 돼요. 상처가 너무 커서 우리를 무너뜨릴 정도가 되면 안 되겠지만 적어도 적절한 정도의 상처는 지속적으로 계속 받으면서 그걸 핸들링하는 훈련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처럼 상처에 면역된 사회에서는 그런 기회가 사라져 버리죠. 마지막 세 번째로는 지금 우리 사회는 예측 가능성을 굉장히 극단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거 같아요. 내 삶을 예측 가능하게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줄 어떤 것을 분명히 손에 넣어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그건 보통 자격증이나 좋은 대학 간판이나 그런 것들이 되죠. 안전과 상처에 대한 집착도 예측 가능성과 굉장히 큰 관련이 있습니다. 다치고 상처받는 거는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라는 점에서 사전에 그거를 다 차단해 버리는게 더 맞다. 그렇게 우리가 통제할 수 있게 예측 가능할 수 있게 상황을 세팅하는게 맞다라고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거고 이런 의식은 아마 요즘에 대학생들 젊은 층 사이에서는 다른 사람들과의 직접적인 소통을 극단적으로 꺼리는 문화로 나타나고 있는 거 같아요. 직접 전화하는 거를 요즘 MG 세대는 굉장히 싫어한다고 하죠. 왜냐면 텍스트로는 내가 충분히 상대방의 행동을 계산해서 시간을 갖고 무언가 보낼 수 있는데 전화는 실시간으로 예측 불가능한 일들이 일어나니까. 그리고 요즘 대학생들은 조별 과제를 극단적으로 싫어한다라는 것은 많은 교수님들의 입으로부터 나오고 있는 견해입니다. 10년전, 20년 전이랑만 해도 분위기가 굉장히 다르다고 해요. 거기에는 굉장히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한 가지 이유로 지목되는 것 중 하나는 결국에 조별로 누군가와 함께 작업을 할 때 그 사람이 잘할지 안 할지, 그 사람이 어떤 성향을 가질지 예측할 수가 없으니까 학생들이 극단적으로 꺼려하는 거 같다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1900년대 중반에 철학자 호르크이머와 아도르노는 개몽은 신화로 되돌아간다라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개몽 사람들을 자연의 무지매한 상태로부터 일깨워서 이성적인 문명으로 이끄는 것은 얼핏 보기에는 고대의 무지매한 사람들이 미신으로서 믿었던 신화와 굉장히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신화가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신의 이름 아래 해석을 하듯이 결국에는 우리가 가진 그 이성이라는 것에서 모든 것들을 장악하려는 시도라는 점에 있어서 신화랑 동일한 구조를 가졌다라는 주장이었어요. 그리고 또 그들이 주장했던 건 그렇게 신화로 되돌아가는 계몽은 필연적으로 굉장한 폭력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거기에는 근본적으로 무엇이 과연 우리에게 진짜로 좋은 것이냐에 대한 고민이 있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냥 안전한게 좋은 거야. 우리가 예측 가능한 자연에 대한 통제력을 갖게 되는게 좋은 거야. 상처는 나쁜 거야. 이렇게 이미 특정한 문명 인해 결론을 내려놓고 그 기준에 봉사하는 것들로만이 세상을 가득 채우기 위해서 그 기준에 어긋나는 것들은 다 억압하려고 하기 때문이에요. 그런 논리 속에서 결국에 그 억압은 굉장히 정당화가 돼 버리죠.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서해요라는 말로 모든 것들이 정당화되는 사회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제가 생각하는 조금 더 좋은 사회의 모습에 대해서 한번 말씀을 드려 보겠습니다. 얼마 전에 어 영어로 원제가 메시인 책을 읽었어요. 어 지저분함, 불완전함, 불확실성 이런 것들이 우리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서 다른 책인데 굉장히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여러 가지 연구 결과를 소개하는데 그 중 하나가 학교 옆에 어떤 공터를 개방을 했대요. 그다음에 아이들을 거기서 자유롭게 놀게 시켜봤다고 합니다. 일반적인 다른 아이들의 놀이 공간은 안전 규정이고 그런데 공터는 그냥 아무런 규정이 없는 곳이었던 거죠. 그런데 그곳에서 논다고 해서 아이들이 더 많이 다치는 건 아니었다고 해요. 그리고 학교에 돌아왔을 때 오히려 아이들의 생활 태도가 굉장히 좋아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연구에서는 아이들을 어른들이 생각하기에는 일반적으로 위험해 보이는 환경에서 한번 놀게 해 봤대요. 그런데 놀랍게도 오히려 안전한 곳에서 놀 때보다 아이들이 덜 다쳤다고 합니다. 아 물론 이런 연구가 엄청나게 많이 이루어진 건 아니라고 해요. 그래서 과학적으로 딱 명확하게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사는 아닌데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생각을 해 볼 수 있는 건 그 책에서 주장하는 건 어쩌면 아이들은 자신들이 위험한 환경에 놓였을 때 알아서 그 환경에 적응을 한다는 거예요. 아, 위험하네. 날카로운 물건이 있네. 어, 조금 발 헛디면 떨어지겠네라는 것들을 아이들도 의식을 하고 그만큼 더 조심해서 논다는 거죠. 여기에는 굉장히 큰 장점도 있습니다. 뭐냐면 아이들은 거기서 주체성을 발휘했다는 거예요. 오히려 어른들이 모든 것들을 다 안전하게 세팅해 준 환경에서는 어쩌면 아이들은 자신이 주의력을 발휘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더 발을 헛들 수도 있고 더 손목을 필지도 몰라요. 그런데 그렇게 자신이 주체적으로 위험을 인식하고 피하고 그런 훈련을 통해서 아이들은 정말로 나중에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더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죠. 그리고 또 예측 가능하지 않은 무작기성 또한 우리 삶에는 엄청나게 큰 역할을 할 수가 있습니다. 브라이언 이노라는 전설적인 음악 프로듀서가 있다고 해요. 그런데 그 사람이 굉장히 많이 사용하는 방법 중 하나가 작업 과정에 일부러 무작기성을 딱 끌어들인다고 해요. 예를 들어서 무작이로 개념 하나를 뽑아서 그 개념을 바탕으로 사람들한테 음악 작업을 시킨다든지 굉장히 전설적인 드러머가 드럼 치러 왔는데 아 오늘은 기타 쳐 주세요. 이렇게 부탁을 한다든지 그런 방식으로 작업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이 사람이 주장하는 논리는 이거예요. 그런 무작기성을 마주쳤을 때 예측 불가능성을 마주쳤을 때 우리는 훨씬 더 큰 주의력을 발휘하게 되고 긴장 상태에 놓이게 되고 그 긴장 상태에서 우리가 많은 능력들을 최대한 끌어내려고 스스로 노력하면서 거기서 좋은 창작물이 나온다. 맨날 익숙한 것만 하고 충분히 논리적인 거, 합리적으로 설명되는 거, 예측 가능한 거 그런 것만 하면 사람이 그냥 이완돼 버리고 충분히 자신의 능력의 100% 주의를 기울이지 않게 된다는 거예요. 이거는 위험한 환경에서 노는 아이들 이것과도 일맥상 통하는 면이 있어요. 자신이 얼마나 긴장감을 발휘하는 환경에 있느냐. 그게 긴장이 누군가한테는 상처가 될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 상처를 극복하면서 나아갈 때 진정으로 우리는 사실 성장을 할 수가 있다는 거죠. 저는 이런 주장에 굉장히 강력하게 동의를 합니다. 저를 진정으로 많이 성장시켰던 순간들은 편안하고 예측 가능하고 안전했던 그런 순간들이 아니라 어쩌면 조금은 제 의지와 상관없이 낯선 상황에 처하게 됐을 때였어요. 그 변화에 우리를 열어 두는게 얼핏 보면 되게 반문명처럼 보일 수도 있어요. 아 요즘에 누가 그렇게 하냐? 다 안전하고 모든 거 통제하고 하는게 좋은 거지. 왜 이렇게 할 수 있는데 그러냐? 그건 덜 떨어진 거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저는 매번 똑같은 것을 계속 반복하고 한 방향으로 향하는 문명은 결국에는 자멸할 수밖에 없다라고 생각을 하는 주의입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도 앞으로는 조금 더 문명화에 대한 비판 의식을 좀 가지고 경각심도 갖고 하면서 다양한 변수들의 우리를 열어놓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라는게 저의 입장입니다. 네. 네, 오늘은 아, 조승현의 탐구 생활 영상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서 좀 생각보다 제가 처음에 예상했던 거보다 좀 이야기를 길게 많이 했네요. 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상처받지 않는 사회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상처에 대응할 힘을 기르는 사회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안전한 사회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조금 위험하더라도 많은 도전을 하는 사회가 좋은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여러분의 다양한 의견을 많이 남겨 주시면 함께 생각하는데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습니다. 오늘 제가 준비한 내용은 여기까지고요. 저는 다음에 또 재밌는 내용으로 덜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