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교회란 무엇인가' ㅣ박영호 목사ㅣ잘잘법 230회

잘잘법 · 2026-10-18

채널: 잘잘법 |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it7Ddj5oI_Y | 길이: 35:23

요약

🎯 TL;DR

박영호 목사는 교회를 "주님께 속한 공동체(퀴리아케)"로 규정하고, 교회의 두 본질을 사귐(교제)과 선교로 설명한다. 하나님은 타락으로 깨어진 관계와 만물을 회복해 샬롬을 이루려 하시며, 교회는 그 샬롬을 먼저 누리고 세상에 보여 주는 공동체다. 교회는 불완전하지만 하나님이 계속 일하시는 통로이므로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하며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 결론이다.

📌 핵심 논지

  1. 교회의 핵심은 집회라는 제도적 틀이 아니라 "주님께 속했다"는 정체성이다.
  2.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관계적 존재로 지음받았으나, 타락(관계의 파괴)으로 함께 사는 일이 어려워졌다.
  3. 구원은 관계의 회복이며, 교회는 화해(샬롬)를 먼저 누리고 확장하는 사귐과 선교의 공동체다.
  4. 교회는 회복의 도상에 있는 존재이므로 영광과 함께 겸손이 필요하다.
  5. "교회를 믿는다"는 것은 제도가 아니라 교회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교회라는 말의 뜻: 에클레시아와 퀴리아케

  • 화자는 에클레시아가 본래 아테네 같은 직접민주주의 시대의 시민 집회(어셈블리)를 뜻하는 세속적인 말이었다고 설명한다.
  • 우리말 '교회'에 해당하는 독일어 Kirche, 영어 church는 에클레시아가 아니라 헬라어 퀴리아케(주님의)에서 왔다고 한다. 집회의 형태보다 "주님께 속한"이라는 형용사가 본질이라는 것이다.
  • 윌리엄 틴데일은 헬라어·히브리어 원어에서 직접 영어로 번역한 첫 시도에서 에클레시아를 church가 아닌 congregation(회중)으로 옮겼고, 당시 교회 지도자들이 발끈했다. 화자는 이것이 틴데일이 화형당한 가장 결정적인 이유였다고 말하며, 중세 교회가 제도적·형식적 틀을 그만큼 중요하게 여겼다고 지적한다.

하나님의 시야: 만물의 회복

  • 로마서의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를 인용하며, 만물이 주님께 속했다고 말한다.
  • 요한복음 3장 16절의 "세상"은 교회나 그리스도인, 인류만이 아니라 천지 만물 전체이며, 요한계시록 21장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로 성경이 창조에서 새 창조까지 만물을 시야에 둔다고 한다.
  • 따라서 나의 구원·행복, 교회의 성장만 보는 것은 너무 좁은 시각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딜레마: 혼자 살 수 없으나 함께 살기도 어렵다

  • 쇼펜하우어의 고슴도치 비유(추워서 가까이 가면 서로 찔리고, 떨어지면 추운 것의 반복)를 소개한다.
  • 인간은 반드시 함께 살아야 하는 동물이지만, 부부·부모 자식·국가·사회 어디에나 갈등이 있다.
  • 창세기 1장의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에서 복수("우리")에 주목한다. 해·달·동물을 만들 때는 단수인데 인간 창조에서만 복수가 나온다는 점이다.
  • 화자는 이를 하나님의 공동체적 속성, 곧 서로 사랑을 주고받으며 의미와 행복을 발견하시는 삼위일체의 핵심과 연결한다. 그래서 인간도 관계적 존재이며, 물질적 조건이 좋아도 관계가 나쁘면 행복할 수 없다.
  • 성경이 말하는 타락은 구체적 악행 이전에 관계의 파괴다. 하나님의 사랑과 뜻을 의심하고 불순종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어서 사람 사이(아담과 하와, 가인과 아벨)가 깨졌다.

구원과 샬롬: 화평 누리기와 선교

  • 예수님은 화목제물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회복하신다.
  • 로마서 1~4장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설명하고, 5장 1절은 "…화평을 누리자"로 이어진다. 화자는 구원이 화해라면 신앙생활은 그 화해를 누리는 것(enjoy)이라고 한다.
  • 이 화해를 아직 화해되지 않은 영역으로 넓히는 것이 선교다. 고린도후서 5장 18절("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인용하며 선교를 the reconciling ministry of the reconciled community(화해된 공동체의 화해하게 하는 사역)로 정의한다.
  • 샬롬은 전쟁이 없는 상태만이 아니다. 굶주림, 질병, 가족 간의 대립 등이 없는 전인적 평화이고, 남북·동서·남녀 갈등 같은 아픔을 극복하는 것도 포함된다.

사귐과 선교: 무엇이 더 중요한가

  • 예전에는 전도가 목적이고 사귐은 수단이라는 말을 많이 했지만, 요한1서는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고 말한다. 곧 전도의 목표가 사귐이다.
  • 천국에는 전도가 없지만 사귐은 영원히 계속되므로, 사귐은 최종 목표이자 모든 선교의 근거다.
  • 요한복음 13장의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를 인용한다. 우리끼리만 잘 살자는 뜻이 아니라, 먼저 서로 사랑해야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보여 줄 수 있고 세상을 사랑할 힘과 방향이 생긴다는 뜻이라고 풀이한다.
  • 세상의 사귐은 이익과 어울림에 따른 배제와 판단이 많지만, 교회는 모두가 약해서 도움을 받아야 하면서도 누구나 하나님 은총의 통로로 쓰임받을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 초대교회는 "저렇게 사는 것도 가능하구나" 하는 도전을 준 공동체였다.

세 단계의 샬롬과 교회의 자리

  1. 나와 하나님의 화해 (전통적으로 구원·복음이라 불린 것)
  2. 화해된 공동체 (샬롬을 먼저 맛보고 누리며 세상에 보여 주는 공동체)
  3. 그 공동체를 통한 온 세상의 샬롬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 신약에서는 예수님을 통해 모인 교회가 그 역할을 맡았다. 화자는 개인과 하나님의 관계, 세상 전체의 변화 사이에 이 사귐의 공동체가 있어야 개인도 구원을 얻고 사회 변화도 소망할 수 있기에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셨다고 말한다. 이것이 "왜 교회인가"에 대한 답이다.

가르칠 교(敎)가 아니라 사귈 교(交)

  • 예수원에서 사역한 대천덕 신부가 한자 '교회'를 가르칠 교가 아닌 사귈 교로 써야 한다고 했다고 소개한다. 교회는 콘텐츠를 익히는 공동체 이전에 사귐의 공동체라는 것이다.
  • 네 복음서에 공통으로 기록된 기적은 오병이어 하나뿐이라며, 음식을 나누며 사귐이 회복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보여 주는 가장 중요한 행위라고 한다. 성찬도 같은 이유로 교회의 핵심 예전이다.

영광과 겸손

  •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 하시려는 일이 소중하므로 교회에는 영광이 있지만, 교회도 회복의 도상에 있으므로 겸손해야 한다.
  • 화자가 보는 한국 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교만이다. 진리를 다 소유한 듯한 태도를 지적하며, 바울의 "내가 온전히 이루었다 함이 아니라 달려가는 중"을 인용한다.
  • 소속 교단의 "다시 거룩한 교회로" 슬로건을 두고, 종교개혁 때가 교회가 가장 골치 아픈 때였고 개혁자들도 곧 크게 싸웠으며 신약의 초대교회에도 갈등과 속임수가 있었다고 되짚는다. 30년 전 고성장기가 좋은 시절이었다는 생각도 부정하며, 지금의 문제는 그때 잘못 뿌린 씨앗의 열매일 수 있다고 말한다.
  •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명제를 인용하며, 장로교·감리교·가톨릭·회중교회 등 어떤 틀도 절대적일 수 없다고 한다.

"거룩한 공교회를 믿사오며"

  • 사도신경의 이 고백은 교회가 신앙의 대상임을 뜻한다.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믿는 것과는 조금 다르지만, 교회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본질적이라고 한다.
  • 영원까지 일하실 그 교회는 지금의 건물·제도·직분 형태와 다를 수도 있다.
  • "교회는 그리스로 가서 철학이 되었고, 로마로 가서 제도가 되었고, 미국으로 가서 기업이 되었다"는 말을 통찰이면서 쓰라린 말로 소개하되, 교회 역사 전체를 담지는 못한다고 한다. 아시시의 프란시스를 예로 들어, 전통을 이어 온 것은 교황과 제도가 아니라 그런 신앙의 고백과 실천이었다고 말한다.
  • 오늘도 실망스러운 제도 교회 안 어딘가에 하나님이 은혜 주시고 쓰시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믿는다. 교회를 믿는다는 것은 제도가 존속·성장한다는 뜻이 아니라, 교회의 미래에 대한 소망을 잃지 않고 사랑한다는 뜻이다.
  • 한국 교회가 욕먹는 것은 마음 아프지만 놀랍지 않으며(자신이 비크리스천이어도 손가락질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정말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교회에 소망을 걸고 사랑하는 분들이 있다는 점이고, 그 사랑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한다.

결론: 어머니 교회

  • 화자는 청소년 딸이 한 말을 전한다. 어릴 때는 엄마가 다 옳은 줄 알았는데 지금은 엄마도 잘못할 때가 있음을 알지만, "그래도 엄마를 더 사랑하는 것 같다"는 말이다. 교회를 "나의 어머니"라고 고백하는 것도 이와 같다고 한다.
  • "교회를 어머니로 모시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는 진술에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어 "나 혼자 하나님 잘 섬기면 되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받은 사랑, 신앙의 뼈와 근육이 모두 교회 공동체를 통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 교회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교회를 통해 믿음·생명·돌봄을 받았고 하나님이 교회에 대한 사랑을 주셨으며 앞으로도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 일하실 것을 믿기에 교회를 사랑한다. 그래서 교회가 여전히 세상의 소망이라고 말하며 마무리한다.

핵심 용어

  • 퀴리아케(Kyriake): "주님의"; Kirche·church의 어원
  • 에클레시아: 본래 시민 집회(assembly)
  • 샬롬: 하나님과의 화해에서 만물의 회복까지 포괄하는 전인적 평화
  • 사귐(코이노니아)과 선교: 교회의 두 축
  • 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의 취지: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자막 원문 (참고)

Kind: captions Language: ko 제 딸이 청소년인데요. 최근에 저한테 그런 말을 해요. 아빠, 나는 어릴 때는 엄마가 다 오른 줄 알았어. 근데 지금은 그러니까요. 어, 엄마도 잘못될 때가 있어. 내가 잘못한 거 아닌데 잘 모르고 야단칠 때도 있고 엄마도 짜증나서 그냥 하지 말아야만을 할 때도 있고. 그래,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래도 난 엄마를 사랑하는 것 같아. 내가 그때 아주 어릴 때보다 지금 엄마를 더 사랑하는 것 같아라고 말하는게 제 마음에 아주 깊이 새겨졌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어머니로 모시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 아주 유명한 교회론적 진술인데요. 아 저는 어 처음에는 이거 좀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아 나 혼자 예수 믿으면 되지 뭐. 나 혼자 하나님 잘 섬기면 되지 뭐. 교회가 굳이 하나님과 나 사이에 중간에 개입되 있어야 되나? 교회는 무엇인가? 왜 교회가 필요한가? 하는 질문을 우리가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어, 교회. 어, 신약 성경에 보면은 교회라고 하는게 원어로 에클레시아다라고 하는게 꽤 많이 알려져 있는 어, 지식인데요. 어, 의원적으로는 사실은 이게 정확하진 않습니다. 어, 에클리시안 어셈ly, 집회라는 말이고 옛날에 그리스의 어, 아테네 같은 직접 민주주의 시대 때 온 백성들이 시민들이 다 모여서 국사를 논하던 그런 폴리스의 의사 결정 기구였죠. 그 집회 어 이게 자체는 굉장히 세속적인 말입니다. 아테네인의 에클레시아, 고린도인의 에클레시아 이런 식으로 말했었죠. 그런데이 말을 그리스도인들이 가다 썼는데 본래이 철치 어 혹은 독일로 키르해 우리말로 교회라는 말은요. 에클레시아에서 온게 아닙니다. 어 헬라어로 리아케 에클레시아 주님의 집회라는 말이죠.이 이 퀴리 악해 주님의라는 말이 독일어의 퀴회로 그리고 영어의 철치로 하고 있 교회로 번역됐죠. 그래서이 어셈블리다, 집회다라고 하는 모임의 형태와 틀지만 사실은 우리가 교회라고 할 때 훨씬 더 본질적이고 중요한 거는요. 주님의라고 하는요 형용사입니다. 우리는 다른 에클레시아가 아니라 다른 집회가 아니라 주님께 속한 어 에클리시아다라고 하는 말이죠. 어, 요게 뭐 미묘한 차이고 있을 수 있는 차이다시지만 이게 한 때는 한 사람의 목숨이 왔다갔다 할 정도로 중요한 이슈였습니다. 루트가 종교 계획을 하고 독일로 성경 번역을 했다는게 아주 유명한 사건인데 그전에 윌리엄 틴데일이라는 분이 영어로 성경을 번역했습니다. 루트보다 먼저 있던 일이고 루트의 성경 번역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어 영어 성경 중에서 히브리어와 헬라의 원어에서 직접 번역한 첫 번째 시도였습니다. 그 틴데일이 성경을 번역해서 보니까 에클레시아 어 이거 철체가 아니네 그래서 이거를 컨그리게이션 어 회중이란는 말로 번역했습니다. 근데 여기에 당시의 교회 지도자들이 발끈한 겁니다. 그래서 마침내 틴데일이 화영을 당하게 되는데 틴데일이 성경을 번역하고 화영을 당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에클레시아를 철치가 아닌 컨그리게이션으로 번역을 했다는 사실이에요. 이분 놀랍지 않습니까?이 번역 하나로. 그죠? 그만큼 중세의 교회는 교회라는 제도 자체 어셈블이든 뭐든 이렇게 제도적 형식적 틀 자체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겁니다. 어 여기서부터 교회가 잘못된 것을 우리가 보여 주는 거죠. 교회는 어셈블리든 뭐 어떤 집회든 어떤 공식적인 제도의 틀, 정체적인 틀이 중요한게 아니라 주님께 속했다라고 하는 그 고백 그 정체성의 교회의 핵심이 돼야 된다라는 말이 키르해철 교회라는 말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께 속해 있다라는 말이 뭔가 교회의 핵심 교회 핵심은 주님께 속해 있다라는 건데 사실은 로마서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이는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갑니라. 만물이 모두 다 주님께 속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복음의 핵심 요한복음 3장 16절에 보면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랬거든요. 뭘 사랑했습니까? 교회를 사랑한게 아니에요. 그리스도인을 사랑한게 아니에요. 온 인류를 사랑했다는 것도 아니고요.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다라는 말은요. 천지 만물이죠. 하나님이 창조하신 온 세계 전체를 말씀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세계가 지금 많이 망가져 있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인간뿐 아니라 그래서 성경 맨 마지막에는요.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되 있습니다. 보세요. 성경 처음부터 이렇게 하나님이 세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고 성경 맨 마지막에 어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 그랬고 복음의 중심이 뭔가 하면은 하나님이 세상을 그 천지 만물을 사랑하셔서 모든 인류와 세상 전체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셨다라는게 복음의 중심이십니다. 어이 맨 처음에 하나님이 어 천지를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다라고 했던 바로 그 창조 세계 그 창조의 본래 의도를 회복해 가는게 하나님의 회복이고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만이 아니라이 창조 세계 전체를 시야에 넣고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걸 좁혀서 나의 구원, 나의 행복 이것만 가지고 보면요. 너무 좁은 거죠. 교회의 성장, 교회의 부원, 교회가 어떻게 될 것이냐 이것도 사실은 너무 좁은 시각입니다. 너무 작은 주제죠. 그래서 우리가 교회가 무엇인가를 알려면 먼저 세상 만물을 지으시고 어이 지금 타락한이 망가진이 세상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손길 전체를 볼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지으신 세 아름다운 세상이 타락했다.이 타락했다는 징후가 무엇인가라고 하는 거든요. 제가 이런 말을 할 때마다 생각나는 우아가 있습니다. 쇼펜하우가 이런 말을 했어요. 굉장히 추운 숲속에 고슴도칠 두 마리가 살고 있습니다. 어, 너무 추우니까 서로의 체온이 그리워서 함께 가까이 갑니다. 근데 서로 찌르겠죠. 아야. 아파서 다시 뒤로 물러놔요. 후회하면서 내가 왜 가까이 갔던가? 그런데 또 떨어져 있으니까 너무너무 살을 애이는 추위를 견딜 수가 없습니다. 또 가까이 가요. 또 찔리고 또 아파하고 또 뒤로 물러나고 그렇게 밤새도록 가까이 갔다가 어 찔리고 아프고 또 멀리 갔다가 추워서 괴롭고 하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 그게 인생이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인간은요 혼자 살 수 없습니다. 함께 살아야 됩니다. 여러분이 동물들을 분류해 보면 이렇게 함께 사는 동물이 군지평이 있고요. 혼자 사는 동물들이 있거든요. 사자는 함께 살죠. 호랑이는 혼자 살죠. 인간은 절대적으로 함께 살아야 되는 동물입니다. 그런데 인간은요 참 신기하게도 함께 사는게 쉽지 않습니다. 인간이 사는 모든 곳에 갈등이 있습니다. 부부사에 갈등이 있고요. 뭐 부모 자식간에도 갈등이 있고요. 어 뭐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전쟁 물론 마찬가지고 사회 우리나라 사회에 있는 많은 갈등들 인간이 사는 모든 곳에 갈등이 있다. 그리고 그 갈등의 아픔으로 상처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이 두 가지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다. 어 그러나 함께 사는 것도 쉽지 않다. 이것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어 딜레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 어,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함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요.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라고 하시거든요. 그런데 이때 왜 복수가 나올까 하는 것이 굉장히 궁금한 대목입니다. 물론 이게 이제 성부, 성자, 성령, 일제 하나님을 말한다라고 하면 교리적인 대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창세기 1장을 쭉 읽어 보면요. 하나님이 해를 만드시고 달을 만드시고 빛을 만드시고 사자 호랑이를 만드실 때는 다 단수로 나왔어요. 그런데 인간을 만들었다는요 대목에서만 우리라고 하는 복수가 나오는가? 일찬이 왜 나오는가라고 하는 것은요.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험받았다는 그 뜻이 무엇인가라는 것을 알려주는 아주 중요한 실마리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체험받았다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우리가 인간을 보고 아 하나님도 눈 두 개 코 하나 입하나 있는 이런 존재일까? 혹은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생각하는 능력, 인간의 말하는 능력이 하나님이 닮았다. 이렇게도 말했는데요. 사실은 성경을 보면이 우리라는 말에 집중을 해 보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라고 할 때에 가장 중요한 중심적인 메시지는 하나님의 공동체적 속성. 혼자서 어 자족적으로 계시지 않고 서로 사랑을 주고 받으며 사는 그래서 서로 함께 사랑을 나누는 관계를 통해서 삶의 의미와 행복을 발견하는 존재 하나님이시다. 그게 3일치라는 교례의 아주 중요한 핵심입니다. 왜 하나님이 그런 분이실까? 왜 우리에게 그런 하나님을 보여 주셨을까?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다면 그 의미가 무엇일까라 할 때에 바로 그 하나님 공동체적 속성의 하나님 관계적 존재라는 거죠. 관계를 통해서 사랑의 관계를 통해서 의미와 행복을 발견하시는 분이라고 할 때에 인간이 그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에 인간도 관계적 존재로 지연받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다른 아무런 물적인 조건이 좋아도 잘 먹고 잘 살고 잘 갖추어져 있어도 관계가 좋지 않으면 인간은 결코 행복할 수 없고 인생이 의미 있을 수도 없다. 그런데 문제는 함께 살아야 되는데 왜 함께 사는 것도 힘들가 힘든가 하는 것은 그게 바로 타락이라고 하는 거죠. 인간의 타락이 무엇인가? 성경은 죄다 타락이라 이야기할 때에 어떤 구체적인 어떤 뭐 나쁜 짓 이런 것을 이야기하기 전에요. 관계의 파괴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셨는데 하나님이 사랑하셨는데 그 하나님의 사랑과 뜻을 의심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써 관계가 파괴되고 그것 때문에 사람들 사이도 파괴된 거죠. 아담과 하와가 서로 의심하고 서로 손가락질하고 가인과 아벨 그죠. 형제 간의 분쟁이 있지 않습니까? 누가 그런 농담을 해요. 저 시골의 학교에 어 두 명밖에 없는 학교 있었습니다. 아이가 그 그 두 명이 막 싸워요. 그 교장님이 불러 가지고 야 너희들 정교 회장하고 부회장하고 싸우면 어떡하냐? 그래요. 아담과 하와가 그런 거죠. 이거는 부부 싸움이고요. 제1차 세계 대전입니다. 그렇죠? 그다음에 가인과 아벨은 서로 죽이는 데까지 이르는데이 관계의 파괴로 인한 아주 마음 아픈 결과들을 지금 온 인류가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이 관계의 파괴가 어 다르게 결과를 하면 구원은 무엇인가? 관계를 회복하는 거죠. 예수님은 무엇보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회복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우리가 화목재물이라고 하는 말을 쓰잖아요. 화목재물 하나님과 우리와의 죄를 어 죄용서받고 구원받고 관계가 회복되는 화해되는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어 우리가 예수 믿고 하나님 자녀가 된다. 지옥 안 가고 천국 가게 되었다라고 하는 요게 복음이면요. 요게 기독교 신앙의 전부면 사실은 굉장히 간단합니다. 사영리 이런 거 있잖아요. 10분만 말하면 다 그냥 알아듣습니다. 근데 왜 우리는 이렇게 두꺼운 숙경책을 들고 다니고 공부도 하고 말씀도 듣고 그럴까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사는가 하는 걸 말해 주는 거예요. 신약 성경 로마서를 보면 이제 구원이 무엇인가를 차근차근히 잘 설명하는데 어 1장부터 4장까지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습니다라고 하는 내용을 설명합니다. 5장부터는 그 삶이 어떻게 진행되는가 증어를 말하는데 5장 1절에 보면 그 중간에 어 연결 고리가 이런 고리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을 누리자. 이거 전반부죠. 믿음으로 의다심을 받았다. 그다음에 뭔가 하면요. 화평을 누리자. 이것이 신앙생활의 전부라 해도 관이 [음악]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과 원수된 사람이 하나님과 화해된게 구원이라 그러면 이제는 그 화해를 누리는 것 인조이 하는 거죠. 사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김에 더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사화야 되었는데 어 세상에 안 그런 사람들이 많잖아요. 세상에 안 그런 화해 안 된 영역들이 많잖아요. 거기에까지 하나님의 화해를 확대해 가는 것을 뭐라 그러는가면 선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교가 뭔가 다양하게 설명할 수 있겠지만 고린도후서 5장 18절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음매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니라는 말이이 하나님의 구원에이 시야가 세상 만물 전체를 눈에 넣고 있다는게 다시 확인되죠. 그러니까 나는 구원받았는데 나는 하나님과 화해되었는데 나의 구원에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이 화해를 확대해 가는게 선교인데 선교가 뭔가 하면요. 오늘이 말씀처럼 하나님과 화해된 사람들의 화해를 만들어 가는 사역입니다. 영어로 the reconsing ministry of the reconsiled community 화해된 공동체의 화해하게 하는 사역이죠. 그러니까 이미 하나님과 화해가 된 사람들이 그 샬롬을 화해를 넓혀 가는 겁니다. 여러분 샬롬이 뭡니까? 우리가 아주 좁게는 전쟁이 없으면 평화 샬롬이라 할 수 있지만 여러분 그게 천부다가 아닙니다. 전쟁이 없어도요. 먹을게 없어서 배가 고프면 샬롬 아니죠. 먹을게 있어도 몸이 너무 아파서 밤새 끙끙으면 샬롬이 아니죠. 어, 건강해도 먹을게 있어도요. 가족이 서로 대적하고 막 눈치 보고 막 서로 손가락질 한다면 그거 화해 아닙니다. 어, 샬롬이라고 볼 수가 없죠. 우리 한국 사회가 오랫동안 남과 북이 나눠져 있었는데 가면 갈수록 어,이 통일의 길은 오지 않고요.이 동서관에 어, 진년간에 뭐 많은 갈등이 있지 않습니까? 최근에는요. 또 남자, 여자와의 갈등, 갈등이 해결되기는 그냥 점점 더해지는이 아픔들이 도대체 무엇인가? 어, 여러분,이 모든 아픔들을 다 극복하시는게 피조물의 파괴, 단식 포함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샬롬입니다.이 샬롬을 넓혀가는 우리가 먼저 누리고 넓혀가는 것이 바로 교회 사김과 선교 두 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김과 선교가 교회 두 본질인데 단적으로 아주 쉽게 질문해서 사김이 중요한가? 어, 선교가 중요한가? 예전에는 교회에서 그랬습니다. 우리가 전도가 지상 명령이니까 전도가 가장 중요하니까 잘 사귀서 그죠. 서로 친교를 잘해서 정말 중요한 목표인 전교 전도를 잘할 수 있도록 합시다라는 말을 많이 했는데요. 그러니까 그런 생각을 보면 전도는 목적이고 사김이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근데 성경을 보면 좀 다른 말씀이 나옵니다. 요한 1서에 보면요. 우리가 보고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김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김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그랬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전도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데 전도하는 목표는 사김을 위해서 전도 어 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전도해서 결국에는 그 목표가 서로 사귀는 삼위일체 하나님 하나님 아버지 어 또 우리 예수 그리스도 성자 성부 어 성령 하나님이 사임으로 들어가는 이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다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전도하는데 천국에 가면 전도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왜요? 없죠. 천국에서 전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김은 천국에 가서도 계속될 것입니다. 영원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김은 최종적인 목표이기도 하고요. 또 모든 선교를 가능하게 하는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세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서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이 말씀 들으면요. 선교도 중요하지만 어쩌면이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에 모든 것이 걸려 있는 것처럼 그렇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이 말은 우리 안에서만 잘하면 된다. 세상이 어떻게 되든 우리끼리만 사랑하고 잘 살자이 말이 아니고요. 먼저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세상에 보여 줄 수가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먼저 사랑해야 세상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는 힘과 방향이 거기서 생긴다는 겁니다. 세상이 어떻게 될 수 있는지 되어야 되는지 보여주는 공동체가 있어야 선교가 가능해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세상의 사김은요. 굉장히 배제와 판단이 많이 개입됩니다. 내가 누구하고 사귀야 내가 좀음 이익을 얻을 것인가? 누구가 나한테 좀 어울릴 만한 사람인가? 그리고 교회라고 하는 것에 가장 중요한 특징은 모든 사람이 다 약하고 그래서 도움을 받아야 되고 모든 사람이 다 누군가를 조금이라 도와줄 수 있다라고 하는 그 가능성 거기에 교회 사김에 아주 어 중요한 특징이 있는 거 같습니다. 세상의 사김은요. 유용한 사람이 있고 도움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근데 교회는 그렇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누구나 다 하나님 은총의 통로로 어 쓰임받을 수 있다라고 하는 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그 은총이 흘러나는 통로가 될 수 있다라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사김이 다른 거죠. 그래서 여러분 모든 건강한 교회 사회에서 건강한 공동체는요. 어 교회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아 저렇게 사는 것도 가능하구나. 우리도 저렇게 살고 싶다라고 하는 도전을 주는 공동체였습니다. 초대교회가 그랬습니다. 정리하면요.이 샬롬이 목표예요. 목표인데이 화해 샬롬을 세 단계로 어 해 보면요. 적용해 보면 첫 번째는 나와 어 우리 하나님과의 화해입니다. 어 두 번째는요. 화해된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그다음에이화된 공동체를 통해서 온 세상의 샬롬을 가지고 가져오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이 맨 안에 있는 원 하나님과 우리와의 화해 이걸 전통적으로 구원이라 그랬죠. 이걸 복음이라 그랬죠. 그 사실 복음은요 훨씬 더 넓은 개념입니다. 온 세상 만물을 회복시키시고 온 세상을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그것이 복음이죠. 그게 온전한 샬롬인데 그 온전한 샬롬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누군가가 샬롬을 먼저 맛보고 먼저 인조히 누리고 이것을 세상에 보여주는 공동체가 필요했습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요. 신약에 와서 예수님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모인 교회가 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세상 전체의 변화도 굉장히 중요하고 우리 개인과 하나님과의 관계의 변화도 화도 중요하지만 그 중간에 있는이 공동체 사김의 공동체가 꼭 있어야 어 개인도 구원을 얻들 수 있고 사회의 변화도 우리가 소망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것이다. 왜 교회인가?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교회를 한자로 쓰면요. 우리가 동양 사람들은 가르칠 교자 교회를 씁니다. 학교할 때 교하고 똑같은 거예요. 그런데 예수원에서 사역하셨던 대천 신부님이란 분이 계십니다. 굉장한 신학자고요. 아주 통찰력이 깊은 분입니다. 이분이 한국말 잘 모르고 외국으로 한국말을 배워서 했는데 동양 사람들이 교회라는 말을 쓰는 걸 보고요. 이런 말씀하셨습니다. 아, 교회는 가르칠자 교자 교가 아니고 사일 교자 교회를 써야 된다. 교회는 배우고 가르치는 것 이전에이 무슨 컨텐츠를 머리에 익히는 공동체가 아니라 서로 사김의 공동체다라고 말씀하셨던 굉장히 중요한 말씀을 해 주셨어요. 여러분, 어, 성경에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복음서가 있잖아요.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요거네 개 복음서 중에서 많은 기적이 있는데 그 수많은 기적들 중에서 사복음의 공이 다 기록되 있는 기적은 딱 하나뿐입니다. 뭐겠습니까? 사복음의 사복음서에 공통적으로 기록되 있는 단 하나의 기적이 뭔가면요. 우리가 오병이의 기적이라고 부르는 먹는 거예요. 먹는 거. 함께 나누는 것. 음식을 함께 나누면서 사김의 현장이 회복되는 것. 그렇죠? 그 오병이의 기적이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행위 행위로 보여주신 말씀이죠. 그래서 우리도 성찬하잖아요. 이죠. 어 그래서 교회에서 아주 중요한 교회 핵심적인 어 전례인 것이 바로 그런 이유에 있습니다. 그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하나님과 함께 식구라고 하잖아요. 그죠? 우리 함께 가족이 된 함께 먹는 사람이 되어서 그 교재를 사김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가장 중요한 상징으로 사복음서에 많은 기적이 나오지만 병고치는 것도 중요하고 뭐 죽은 사람 살리는 것도 있고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기적 모든 복음서가 다 기록해만 했던 중심적인 기적이 바로 오병이어의 기적 하나님과 우리의 사김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사람과 사람이 사귀는 식탁의 교재였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교회는 그 회복을 향해서 가는 도중에 있다. 그 회 온 세상 만물의 회복을 위해서 하나님이 교회를 부르셨고 공동체를 만드셨다라고 하는 자의식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렇기에 영광이 있습니다. 세상에 일어난 다른 어떤 일보다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 그만큼 소중하고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 계획의 중심적인 일이기 때문에 교회가 가지는 영광이 있습니다. 동시에 여기에 교회 겸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회복되어 가는 도상에 있거든요. 우리는 완전히 목적지에 도달해서 빨리 와 거기서 뭐해? 그게 아니고요. 우리도 함께 한 발 앞서서 가면서 다른 사람들을 초청해 가는 그런 겸손한 어 그래서 여러분 오늘날 한국 교회에 많은 문제가 있다. 그러지만 제가 보기에 가장 어 심각한 문제는 어 교만인 같습니다. 한국 교회가 겸손을 잃어버린 마치 어떤 진리를 그대로 다 소유했고 목표를 잃은 것 같은 바울도 그랬잖아요. 그죠? 내가 온전히 이루었다함이 아니라 달려가는 중에 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는 그리고 모든 교회는 길이의 교회 미안의 존재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렇게 어떤 움직임이 쭉 있는데 어떤 한 장면을 딱 스냅 사진 찍어서 이것이 교회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장면은 없습니다. 모든 교회는 다 부족한 교회예요. 제가 속한 교회 교단에서 몇 해 전에 그런 슬로건을 낸 적이 있습니다. 다시 거룩한 교회로 아주 가슴이 뜨거워지는 슬로건이었습니다. 근데 저희들이 많이 생각을 해 봤어요. 다시 거룩한 교회로라고 하는데 그럼 언제가 거룩한 교회였는가? 언제가 우리가 돌아 교회였는가? 그때 뭐 루터 종교 개혁 500주년 근처였는데 종교계혁 때 교회가 좋은 교회였는가? 아닙니다. 교회가 가장 골치 아팠을 때입니다. 교회를 개혁하자고 나와 나섰던 개혁자들끼리도요. 얼마 안 지나서 엄청 싸웠습니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초대기에도 여러분 아시죠? 굉장히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교재가 있고 성령의 능력이 있고 정말 역동적인 복음의 증거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등이 있었고 싸우기도 했고요. 속임수도 있었고요. 그랬습니다. 어 지금 한국 교회가 뭐 우리 많이 어려워져서 교회가 한참 부흥하고 성장할 때 그때가 야 정말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좋은 시절이었다. 한 30년 전에 그랬죠. 근데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는요. 지금 한국 교회가 겪고 있는 많은 문제가 그런 고성장시기 때 잘못 뿌린 씨앗에 열매를 거두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 교회와 관련돼서 굉장히 중요한 명제가 있습니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이 말은요. 어떤 제도와 틀을 어셈블리이 장로교든 감리교든 로마 가톨릭이든 뭐 회중 교회든요. 어떤 어떤 틀 자체가 절대적일 수 없다는 겁니다. 시대가 지나면 바뀌면 바뀌어야 되고 바뀔 수 있습니다. 어 우리가 교회에 대해서 말할 때 꼭 빠지지 말아야 되는게 사도신경에 보면요. 거룩한 공해를 믿사오며 거룩한 공해라는 말은 공적인 교회를 이게 축약한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성경에는 거룩한 공교회를 믿는다라고 바뀌져 있습니다. 여러분, 사도신경은 전 세계 가장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공동으로 고백하는 신앙의 근거 출발인데 여기서 I believe in the church. 나는 교회를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물론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것만큼 교회를 믿지 않습니다. 조금 달라요. 그러나 여전히 교회는 신앙의 대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시대가 바뀌어도 끝까지 교회를 통해서 일할 것이라는 교회를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우리 신앙의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부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끝까지 영원까지 일하실 그 교회는요.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교회, 이런 건물, 이런 제도, 이런 틀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교회 목사님이 있고 장로님이 있고 이런 뭐 이런 제도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런 건물 이런 문화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형태의 교회든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서 세상 끝날까지 그리고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고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실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교회를 믿습니다라고 하는 것은요. 우리 신앙에 아주 중요한 그리고 그 교회는 서도에 말씀드린 대로 주님께 속한 교회 에라고 하는 그 교회겠죠. 요즘에 교회에 대해서 많은 아픔들도 있고요. 비판도 많은데 이런 말들이 있더라고요. 교회는 그리스로 이동해 철학이 되었고 로마로 옮겨가 제도가 되었고 미국으로 가서 기업이 되었다. 아 촌철 살인 어 어떻게 보면 이렇게 어 기독교 역사를 잘 정리했나 할 정도로 아주 이렇게 통찰력 있는 말이기도 하고 굉장히 삐픈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 바로 이거이 명제가 교회 역사 전체를 아우르지는 못한다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잘 알 겁니다. 예를 들면 아시의 프란시스라고 하는 굉장히 존경받는 어른이 계시잖아요. 그죠? 교황 아니었습니다. 그때 다른 교황이 있었어요. 근데 사람들의 눈에 보기 교회는 저거구나. 교황이 대표하는 그 제도였구나 생각했지만 지금 우리가 보면 그 교회 전통을 이어온 분들은요. 어 교황이나 제도 교회가 아니라 아시C의 프란시스 같은 그런 신앙의 고백과 실천들이 더 깊고 넓게 살아남아서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날도 더욱 그러고 생각합니다. 대형 교회들이 있죠. 큰 교단들이 있죠. 혹은 교회를 대표한다는 사람들이 있죠. 옛날에 교황이 있 있었듯이 그런데 어 그 제도 교회 안에 혹은 언절이 어디쯤에 그 우리가 볼 때로 실망스러운 그 모습 안에요. 어디엔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사용하고 계실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이 샬롬을 누리고 세상의 샬롬을 위해서 헌신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그렇게 헌신이 계속된다는 말은 그들의 삶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자기들이 기쁨을 누리고 샬롬을 누리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를 믿싸오며라고 하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제도의 틀에 있는이 교회가 계속해서 존속할 것이고 강해갈질 것이고 성장할 것이다. 그런 말이 아니고 하나님이 계속해서이 교회를 통해서 일하실 거라는 말입니다. 정말 우리에게 많은 실망을 주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는구나.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있구나 하는 것. 어, 그것 때문에 우리가 교회를 믿싸오며라고 말할 수 있는 거예요. 교회를 믿는다는 것은 교회 미래에 대한 소망을 잃지 않는다라는 말이기도 하고 교회를 사랑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저는 요즘에 한국 교회가 굉장히 욕을 많이 들으니까 어, 마음이 아픕니다. 안타까운 점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그게 놀랍거나 이상하진 않아요. 제가 넌 크리스천이라도 한국께 욕할 것 같아요. 손가락질 할 것 같아요. 어 교회이 어 특별히 일부 지도자들의 정말 비상식적인음 모습들 보면 어 정말 나라도 고개를 돌리고 싶어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가 욕 먹는게 마음 아프지만 놀랍진 않습니다. 정말 놀라운 거는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교회에 남아 있는 분들이 있다는 거죠. 남아 있을뿐 아니라 여전히 교회 소망을 걸고 교회를 사랑하는 분들이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어슬프고 이렇게 약점만은이 교회를 여전히 사랑하고 충성하고 교회로 해서 눈물 흘리고 교회가 잘 되기를 바라고 기도하고 하는 분들이 지금도 여진이 많습니다. 교회 공동체에 대한 순도 높고 열정적인 사랑을 보면서 제가 깜짝 놀릴 때가 많습니다. 이것이 어디에서 왔나 여러분. 어 바로이 사랑 어 세상 기준으로는 굉장히 이렇게 망가진 것 같고 아무 소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이 교회 안에 여전히 헌신하고 사랑하는 분이 있다는 것은요. 하나님이 주신 사랑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말이 있어요. 교회에서 아주 오래된 말인데 교회는 믿는 이들의 어머니다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이 말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 수 있을까? 모든 어머니가 다 완벽하고 완전하기 때문에 우리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건 아닐 겁니다. 제 딸이 청소년인데요. 최근에 저한테 그런 말을 해요. 아빠 나는 어릴 때는 엄마가 다 오른 줄 알았어. 근데 지금은 그러니까요. 어 엄마도 잘못될 때가 있어. 내가 잘못한 거 아닌데 잘 모르고 야단칠 때도 있고 엄마도 짜증나서 그냥 하지 말아야만을 할 때도 있고. 그래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래도 나는 엄마를 사랑하는 것 같아. 내가 그때 아주 어릴 때보다 지금 엄마를 더 사랑하는 것 같아라고 말하는게 제 마음에 아주 깊이 새겨졌습니다. 우리가 나의 어머니 나의 교회여라고 고백할 때 바로 이런게 아닌가 싶습니다. 어릴 때는 교회 가면 무조건 좋아요. 어릴 때는 교회 가면 다 맞는 것 같아요. 근데 조금씩 우리가 나이가 들고 청년이 되고 어른이 되고 어떤 분은 장로님이 되고 이러면요 어 왜 교회가 왜 이래 하는 소리도 할 수 있고 또 세상에서 교회에서 밖에서 막 이렇게 욕을 하니까 교회가 왜 그래 왜 그 모양이라고 말을들을 때에 참 마음이 아프죠 근데 이제 교회 사랑하기를 거기서 거짓점에서 우리가 그만두어야 하는가 우리가 어머니가 완전하다고 알았을 때 사랑하는 것보다 어머니의 부족한 점 결점도 알고 그럼에도 불구 내가 어머니를 통해서 생명을 받았고 나를 키우신 분이고 여전히 하나님이 어머니 통해 나를 은혜를 주시고 내가 사랑하는 분이기 때문에 더욱더 깊이 사랑하는 그 부족함을 알면서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어 교회에 대한 사랑이다라고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그런 말했습니다. 교회를 어머니로 모시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 아주 유명한 교회론적 진술인데요. 아, 저는 어, 처음에는 이거 좀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아, 나 혼자 예수 믿으면 되지 뭐. 나 혼자 하나님 잘 섬기면 되지 뭐. 교회가 굳이 하나님과 나 사이에 어, 중간에 개입되 있어야 되나? 그런데 어, 아, 내가 어떻게 신앙의 사람이 되었지? 내가 또 앞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지라고 생각하면 교회를 제외하고는 아, 이게 있을 수 없는 일이구나. 나에게 나에게 개인적으로 다가온 하나님의 말씀.이 이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어 왔고 어 내가 받았던 많은 사랑들이 그래서 내 신앙의 뼈와 근육을 형성했던 많은 부분들이 다 교회를 통해서 왔구나. 나도 교회를 통해서 그 일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신뢰하고 사랑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지만 여전히 우리는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교회를 통해서 일할 하나님을 기대하고 소망합니다. 교회가 완벽해서 완전해서 사랑하는게 아니고요. 우리가 교회를 통해서 믿음을 가졌고 생명을 얻었고 돌봄을 받았고 또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에 교회에 대한 사랑을 주셨기 때문에 교회의 현실에 대해서 부족하고 실망스러운 모습을 많이 보면서도이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는 주님께 속한 교회라고 하는이 신앙 공동체를 통해서 하나님 계속해서 일하실 줄 믿기 때문에 여전히 교회가 세상의 소망이다 생각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그 사랑을 부어 주시고 있다고 믿습니다. 입니다. [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