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연애, 성, 외로움에 대하여ㅣ이정규 목사ㅣ잘잘법 232회

잘잘법 · 2026-10-14

채널: 잘잘법 |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hWvJdJ3Da6o | 길이: 57:38

요약

사랑, 연애, 성, 외로움에 대하여 — 이정규 목사

🎯 TL;DR

이정규 목사는 사랑을 갈망하면서도 사랑 때문에 거절감과 상처를 겪는 인간의 딜레마를 이야기한다. 특히 연애 상대에게 자신의 가치와 외로움에 대한 궁극적인 답을 기대하면 서로를 압박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는 십자가에서 드러난 예수님의 사랑을 로맨스의 중독적인 갈망과 구별하고, 성관계를 결혼 안에 두려는 기독교 성윤리를 서로의 전인격과 취약함을 보호하려는 관점에서 설명한다.

📌 핵심 논지

  • 사람은 사랑할 때 살아 있음과 삶의 의미를 느끼지만, 로맨스에는 슬픔·죄책감·분노와 윤리적 갈등도 따른다.
  • 우리는 약점을 숨기고 싶으면서도, 그 약점까지 알려진 채 받아들여지기를 원한다.
  • 연애 상대가 자신의 가치와 의미를 확정해 주기를 바라면, 상대에게 하나님께만 기대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하게 된다.
  • 성적 동의는 몸에 관한 허락에 그치지 않고 상대의 전인격을 배려하는 문제로 생각해야 한다.

사랑의 기쁨과 고통

목사는 오래 짝사랑한 사람에게 거절당한 뒤 슬픔과 하나님을 향한 분노, 죄책감을 느꼈던 경험을 들려준다. 작은 사건이었지만 그 안에 거절감, 상실감, 죄책감처럼 로맨스가 불러오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고 말한다. 사랑의 상처나 부모의 관계를 보고 사랑을 믿기 어려워진 사람도 있지만, 누군가를 깊이 사랑할 때 자신이 살아 있고 의미 있는 존재라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렇다고 설렘 자체를 사랑의 전부로 볼 수는 없다고 강조한다. 싱글이 짝사랑하며 부르는 노래와, 결혼한 사람이 배우자가 아닌 다른 이를 짝사랑하며 같은 노래에서 위로받는 상황은 다르게 보인다. 로맨스는 사람을 기쁘게도 하지만 고통스럽게 하고 윤리적 경계를 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로맨스와 십자가의 사랑

목사는 십자가에서 고통받으며 자신을 모욕하는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지금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라고 말하는 예수님을 사랑의 사례로 든다. 그는 이 사랑에 로맨스의 요소가 완전히 배제됐다고 단정하지는 않으면서도, 상대를 반드시 가져야만 한다는 중독적인 요소는 없다고 설명한다. 반면 답장을 기다리며 계속 휴대전화를 확인하는 경험에는 그런 갈망이 드러난다고 말한다. 그 감정 자체를 나쁘다고 하기보다, 그것만이 사랑이라고 여기는 데 문제가 있다고 본다.

알려지는 두려움과 받아들여지고 싶은 마음

연애를 시작하면 상대의 매력에 끌리지만, 관계가 깊어질수록 자신의 이기심과 약점도 드러난다. 목사는 약점을 들키면 버림받을까 두려우면서, 약점을 모르는 상대에게 사랑받는다면 그 사랑이 피상적으로 느껴지는 딜레마를 말한다. 자신의 모든 모습을 알고도 안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는 연애 상대가 자신을 받아주는 정도에 자신의 가치와 의미를 맡길 때 상대가 압박을 느낀다고 설명한다. 두 사람이 서로의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 연애해도, 외로운 때와 필요한 것이 서로 다를 수 있다. 모든 연애가 이기적이거나 완전히 순수한 것은 아니며, 그 사이에서 분노와 냉담함, 죄책감을 겪는다고 말한다.

성관계와 전인격적 배려

목사는 기독교 성윤리가 성관계를 결혼이라는 언약 안에 둔다고 설명한다. “서로 사랑하는데 왜 결혼 전에는 성관계를 하면 안 되느냐”는 질문에 모든 답을 제시하기보다, 앞서 말한 취약함의 문제를 생각해 보자고 한다.

그가 소개한 글에서는 한 여성이 성관계 당시의 행동에는 동의했지만, 다음 날 연락이 끊긴 경험을 돌아보며 성적 동의를 몸에 관한 허락으로만 좁혀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목사는 이 일을 강간이라고 부르지 않으면서도, 한쪽이 취약해진 뒤 상대에게 전인격적으로 배려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문제에 주목한다. 그가 설명하는 결혼은 서로를 가지려면 서로에게 자신을 다 주어야 한다는 약속이다.

핵심 수치·결정적 발언·반론·핵심 용어

  • 핵심 수치: 목사는 인용한 책을 통해 로맨스와 애정이 결혼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 역사가 100년도 되지 않았다고 전한다.
  • 결정적 발언: “오직 하나님께서 나에게 줄 수 있는 것을 내가 상대방에게 요구하고 있었구나.”
  • 반론: 현대에 결혼 전 성관계를 제한하는 윤리가 낡았고, 서로 사랑하며 동의했다면 충분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소개한다.
  • 핵심 용어: 로맨스, 굶주림, 외로움, 취약함, 전인격적 배려, 결혼의 언약.

자막 원문 (참고)

Kind: captions Language: ko 그까 모든 사람들은요. 내가 누군가를 죽도록 사랑할 때 내가 살아 있는 걸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삶의 의미를 찾죠. 왜요? 우리 모두에게는 마음속 깊은 영혼의 기억이 존재하는 겁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완전히 사랑하고 서로를 환대하고 환영하고 기뻐하며 어 그 과정 중에서 우리는 계속해서 내 연약함이 들통나날까 봐 두려 두렵습니다. 예. 딜레마에 사로잡혔어요. 왜냐면은이 약점을 계속해서 노출시키고 싶지 않은 겁니다. 앞으로 약점이 더 많잖아요. 더 많은데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거예요. 근데 문제가 하나 더 있었어요. 약점을 상대방이 모르는데 날 사랑하면 피상적이라고 느끼지 않습니까? 딜레 많이 사러져 있어요. 들키고 싶지 않아. 난 상대방에게 받아들여지고 싶어. 또 동시에 난 피상적인 사랑을 하고 싶지 않아. 내가 온통 다 벌거벗겨지더라도 누가 날 안아줬으면 좋겠어. 이것은 성 혹은 성관계라는 주제의 이름은 더더욱 심해집니다. 여기에 대해서 약간은 노골적인 이야기를 좀 해 [음악] [박수] [음악] 보겠습니다. 네. 네. 안녕하세요. 저는 시광교회를 섬기고 있는 이정규 목사라고 합니다. 아, 오늘 여러분들하고 나눌 이야기의 주제는 뭐 사랑, 그리고 뭐 연애, 외로움, 뭐 성 이런 주제들을 좀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어, 사실 제가 이런 이야기에 그렇게 적합한 사람은 아닌 거 같아요. 왜냐면 어, 이런 쪽에 제가 경험이 그렇게 있게 보이지 않잖아요. 그렇죠? 예. 다들 그렇게 얘기하시더라고요. 그러니까 저는 이제 형이랑 그리고 남동생 사이에서 이제 삼형제죠. 삼형제 사이에서 이제 부모님과 함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면 사실 이런 경우에는 그니까 집안 전체가 좀 약간 남성화되는 경향이 생겨요. 뭐 계란으로 붙여도 막 세 개씩 붙이고 한 사람당 뭐 그러면서 이제 짐승처럼 먹고 약간 그런 분위기에서 삶을 살았어요. 그래서 여성과 대화를 나눌 일이 거의 없는 거죠. 이제 그래서 약간 이제 여성과 대화를 나누는 적이 한 번도 없으니까 어떻게 대화를 나누는지 모르고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이제 어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이성 교재를 해 본 적이 없죠. 늘 갈망했지만. 근데 이제 20살이 됐습니다. 20살이 되면 제일 먼저 뭐가 하고 싶겠어요? 당연히 위원회 하고 싶겠죠. 그래가지고 너무너무 갈망했습니다. 근데 보통 대화를 할 줄 모르고 그리고 외모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그 평범한 20살 남자를 좋아할 20살 여성은 없어요. 왜냐면 대체로 20살 여성들 같은 경우에는 이제 그래도 화술이 좀 있고 그리고 좀 재미있는 오빠들을 선호하기 마련이거든요. 저는 이제 늘 외면받고 삶을 살았습니다. 근데 그래도 이제 정말 간절히 갈망했죠. 사실은 그니까 연애나 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나누기가 그렇게 적절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이야기를 주로 할 거예요. 그러니까 연애를 어떻게 예쁘게 잘할 수 있는지 뭐 어떻게 나는 지금 못 소린데 어떻게 연애할 수 있나요? 이건 잘 몰라요. 저도 알고 싶어요. 어쨌든 저는 은혜로 결혼을 했어요. 어 오히려 제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왜 이렇게 연애가 고통스러운가? 예. 왜 이렇게 사랑이 고통스러운가? 그리고 어디서 문제가 있었던 건가? 왜 우리는 그런 존재인가? 그리고 어떻게 탈출할 수 있는가 이런 이야기를 좀 나눠 보려고 해요. 그래서이 이야기는 아직 연애를 안 한 분들도 그리고 예쁘게 연애 중이신 분들도 결혼을 하신 분들도 한번 생각해 볼 만한 주제일 것 같습니다. 저는 20살에 이제 예수님을 믿고 나서 뭐 그렇게 무슨 뭐 큰 타락 뭐 이런 것들을 해 본 적은 없는 거 같습니다. 그니까 아주 보수적인 곳에 있었기 때문에 그니까 술은 건드리면 그냥 무조건 지옥 가는 거였어요. 그 진짜예요? 그리고 어 성적으로 타락 이거는 그니깐 당연히 그건 욕하는 거기도 했지만 더 나아가서 이게 성적인 타락은 혼자는 못 한단 말이에요. 그렇잖아요. 저는 타락하고 싶었는데 하고 싶었는데 저 혼자라서 계속 그 싱글이니까 할 수가 없었던 그런 굉장히 슬픈 뭐 그런 배경이 있었단 말이에요. 근데도 지금도 기억나는 굉장히 그 죄책감을 느꼈던 타락의 일이 하나 있어요. 뭐 왜냐면 제가 이제 짝사랑하는 분이 있었어요. 늘 짝사랑 분은 있었어요. 늘 있었는데 이제 늘 그랬듯이 그분이 거절하셨죠. 예. 거절해 가지고 이제 되게 슬펐습니다. 근데 그때는 특히나 더 슬펐던 거 같아요. 왜냐면 오래 좋아했고 올해 기도했거든요. 예. 그래서 하나님께서 제발이 자매를 달라고 내가 진짜 무엇이든 바치겠다고. 선교사로 가라면 그 선교사로 그 자매한테 무슨 손해야 근데 어쨌든 선교사로 가라면 선교사로 가겠다. 뭐 이런 얘기까지 하면서 열심히 기도했어요. 근데 당연히 거절이었죠. 그런 거서 너무 화가 나는 거예요. 근데 여러분 그럴데 없어요. 그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응답 안 되면 하나님께 열 받잖아요. 그러면 왠지 삐뚤어질 테다 이런 생각 안 드세요? 제는 이제 삐뚤어질 테다. 근데 제 뇌 속에서 삐뚤어지는게 술집 가는 거 말고 없는 거예요. 술 안 마시니까. 그래가지고 집 근처에 술집이 뭐가 있나? 저 평상시에 갈 일이 없으니까 모르는데 이제 꼬치구이집 있었어요. 두 다리 그때도 있었어요. 두 다리는가 가지고 저기서 내가 타락하리라라고 마음을 벗고치구이를 시키 고추구이 겁내 맛있는 거예요. 시키고 어 그리고 소주를 한 명 시켰죠. 예. 소주를 딱 따라와서 계속 마시면서 타락할 거야. 막 그러면서 아니야 그러면서 그러고 나서 이제 그날 일기를 적었죠. 너무너무 슬프고스럽고 죄책감이 든다. 예. 물론 뭐 대단한 일도 아니죠. 생각해 보면 뭐 뭐 무슨 엄성난 타락이나 그런 것도 아니고 사실은 문화에 따라서 얼만지 그럴 수도 있다라고 받아들여질 만한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어 강조하고 싶었던 거는 그냥 그 작은 사건 안에도 우리가 보편적으로 느끼는 고통이 다 들어 있었다는 거예요. 거절감. 그렇죠. 예. 그리고 어 잃어버린 것 같은 슬픔. 네. 사실 가져본 적도 없는데. 그리고 또 하나는 죄책감. 네. 죄책감이 되게 심하게 들었습니다. 예. 뭐 술 마시는게 뭐가 대수겠습니까? 그런 것도 아니에요. 근데도 불구하고 저는 뭔가 반항하고 싶었죠. 그리고 그 가운데서 죄책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해하지 못하는 마음. 도대체 하나님 나한테 왜 이러십니까? 예.이 이 모든 마음들이 다 로맨스하고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로맨스는 항상 이런 감정들을 불러일으켜요. 죄책감, 슬픔, 상실감, 그리고 분노 이런 것들을 불러일으키죠. 아이유마저도 그 세상에 모든 사람 좋아하는 아이유요. 예. 그 아이마저도 자신의 인생에서 제일 슬펐던 일이 자기가 싹사랑하는 사람이 자기를 거절했던 일이라고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제가 어떤 그 방송에서 봤거든요. 그러니까 이거는 생각보다 끔찍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럼 뮤지컬 컴패리 보신 분 계신지 모르겠어요. 거기에 이제 노래 중에 being al라이브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거의 주제가 급의 노래죠. 근데 정말로 우리의 마음에 와닿는 건 뭐냐면은 너를 충격으로 몰아놓고 너를 지옥으로 이끌 사람. 근데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너를 꼭 안아 줄 사람 그리고 너를 너무 필요로 하는 사람 이렇게 이야기를 하죠. 마고서 표현해 보자면은 로맨스는 우리를 천국으로 보내기도 하고요. 지옥으로 보내기도 합니다. 예. 그리고이 노래 가사의 후렴해 보면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하지만 혼자는 혼자일뿐게 아니야. 예. not alive. 예. 혼자는 혼자일뿐게 아니야. 그러니까 이런 거죠. 여기 계신 분들 중에서는 그니까 사랑의 행복을 지금 누리고 계신 분들도 있을 겁니다. 예. 그리고 어떤 분들은 사랑의 고통을 지금 겪고 있는 분들도 있을 거고요. 그리고 아직도 그 사랑의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한 분들도 있을 거예요. 그럼 항상 우리는 그니까 예민해지고 냉담해집니다. 예. 모든 비온주의자가 다 냉담 때문에 그런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많은 비온주의자들이 실제로 아 나는 그냥 콜로 있겠어라고 생각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사랑에 대한 상처 때문인 것 같아요. 모두가 그렇다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 나는 비원주의자가 되기로 했어요. 왜요? 우리 부모님은 맨날 싸웠어요. 우리 부모님을 보면 그들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어요. 또는 내 과거에 누구와 연애를 했는데 그 연애는 정말 끔찍했어요. 나는 사랑을 더 이상 믿지 않아요. 나는 이제 홀로 남겠어요. 어 그 그렇게 해서 홀로 남으면 좋나요? 뭐 당장 편할 수는 있죠. 예. 근데 어이 가사는 정말 우리의 마음을 와닿 우리의 마음을 울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혼자는 혼자일뿐게 아니야. 예. 그까 모든 사람들은요. 내가 누군가를 죽도록 사랑할 때 내가 살아 있는 걸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도 제 아내를 또 제 딸들을 딸이들이 있거든요. 정말 감사하죠. 어, 그리고 제가 사랑하는 시관교회를 정말 죽도록 사랑할 때 아, 내가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존재구나라고 느끼거든요. 그니까 우리는 사랑을 원해요. 그렇지만 사랑 때문에 상처를 받죠. 그리고 이것은 그니까 특히 로맨스의 관계에서 더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그 제가 되게 좋아하는 가수 그리고 이제 노래가 있어요. 이제 얼마 전에 작고하신 휘성 가수분 너무너무 좋아했습니다. 휘성의 노래 하면 생각나는게 뭐 있으신가요? 예. 아, 그렇죠. 맞아요. 안 되나요? 뭐 끝도 있고요. 안 되나요는 제가 진짜 노래방에서 엄청 불렀죠. 너무 힘들어요. 다른 사람 곁에 그대가 있다는게 그렇죠. 내가 누군가를 좋아해. 근데 그 사람 옆에 다른 사람 있는 거예요. 얼마나 슬픕니까? 안 되나요? 나를 사랑 그만할까요? 여러분들 비가 썩는 느낌인데 나를 사랑하면 조금 내 마음을 알아주면 안 돼요. 아니면 그 사람 사랑하면서 살아가도 돼요. 내 곁에만 있어 준다면. 네. 이게 되게 그때는 진짜 마음을 울렸어요. 그 계속해서 거절당하는 그 시절에 야 진짜 이건 명곡이다. 근데 사실은 어 이러한 로맨스의 마음을 무조건 긍정적으로만 보기 어려운 면들도 있습니다. 예를 한번 들어보죠. 제가 최근에 이제 상담했던 어떤 분 이야기해요. 이분이 이제이 얘기를 풀어도 좋다고 해 가지고 저는 허락을 받고 이야기를 풉니다. 결혼 한 분이에요. 어, 결혼을 했고 아내와의 관계가 그렇게 좋지는 않았습니다. 아, 참고로 지금은 다 회복되고 모든게 행복하게 달됐습니다. 근데 이분이 어, 이제 아내하고의 관계 말고 결혼한 상태인데 다른 여자분을 좋아하기 시작한 거예요. 예. 다른 이제 다른 여자를 착사랑하게 된 거죠. 아내 말고. 근데 그 이제 여자분도 다른 분이 있었나 봐요. 그렇죠. 어. 근데 그때이 남자분이이 휘성에 안 되나요? 노래를 보면서 그렇게 위로를 받았다는 거예요. 자 보세요. 다시 가사 읽어 드릴게요. 안 되나요? 나를 사랑하면 조금 내 마음을 알아주면 안 돼요. 아니면 그 사람 사랑하면서 살아가도 돼요. 내 곁에만 있어 준다면. 여러분 보세요. 아까 제가 그 이제 싱글일 때이 노래를 불면서 뭐 울기도 했다 그러면 아이 불쌍하기도 하고 그래 풋풋한 사랑 이야기 이렇게 느껴지잖아요. 근데 바꿔서 결혼을 한 사람이 아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짝사랑하면서이 노래를 듣고 막 위로를 받았다. 그럼 어떻게 느껴지세요? 예. 막 좋게는 안 느껴지실 겁니다. 분명히. 아, 물론 이제 뭐 큰 뭐 문제는 없었다니 다행이긴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 아니지라는 생각이 들잖아요. 자, 여기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자,이 감정을 우리는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이 남자분의 감정을 로맨스라고 부를 수 있을 겁니다. 예. 그럼 로맨스는 그니까 보통 우리가 아, 영상 매체에서 보는 것처럼 늘 아름답고 늘 우리를 설레이게만 하나요? 아요. 굉장히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들고요. 그리고 어 윤리적인 경계를 늘 넘어서게 만듭니다. 근데 우리가 보통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 사랑이라고 부르고 듣는 것들은 대부분 로맨스인 경우가 많습니다. 한번 잠깐만 생각해 보십시오. 십자가를 우리 잠깐만 한번 생각해 봅시다. 십자가에 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못 박혀서 죽고 있습니다. 예. 엄청난 고통 가운데 시달리고 있었어요. 그분의 양 손과 발이 못 박혔고요. 그리고 손과발이 못 박히고 십자가가 들리잖아요. 그러면 어 등이 꺾이면서 패에 엄청난 압박감이 옵니다. 그럼 숨이 쉴 수가 없어요. 숨을 쉴 수가 없는 상태에서 발을 끝을 조금 들면 숨을 쉴 수가 있는데 그 상황에서 숨을 쉬려고 발을 듣잖아요. 들잖아요. 그러면은 몸이 더 깊게 박힙니다. 그리고 등이 거친 십자가 나무 그 결에 긁혀요. 그러 너무 아픕니다. 그런 상황에서 다시 몸을 내립니다. 그러면 숨이 쉬지 않아요. 그리고 헐떡거리으면서 괴로워하면서 몸을 들 들었다가 내렸다가 들었다가 내렸다 하고 있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그분을 향해서 침을 뱉고 조롱하고 모욕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세요.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지금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자, 이런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있나요?이 십자가의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있나요? 네. 당연하죠. 이보다 더 큰 사랑을 어디서 찾겠습니까?이 이 완전한 사랑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근데 이분이 이런 로맨스의 마음으로 우리를 사랑하는 [음악] 걸까요? 어, 완전히 배제된 거라고 말할 수 없지만 어, 여기에는 중독적인 요소가 없습니다. 그렇죠? 예. 일종의 중독적인 요소는 전혀 없어요. 보세요. 아까 우리 컴퍼니 그 being al라이브라든가 아니면 뭐 안 되나요 이런 노래들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안 되나요를 불렀던 그 남자분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는 중독적인 요소가 있죠. 내가 그녀를 가져야 돼요. 예. 가지지 못하면 나는 너무 고통스럽고 괴롭습니다. 예. 이런 중독적인 요소는 여러분들이 삶에서 이미 경험해 본 적이 있을 겁니다. 여러분들이 누군가를 짝 사랑해요. 그리고 뭐 짝 사랑하는게 아니더라도 이뭐 이미 연인끼리도 그런 경우가 있을 겁니다. 연인끼리도 뭐 사회가 조금 안 좋거나 뭐 약간 긴장이 있 시기가 있잖아요. 그럼 그때 카톡을 보내요. 그럼 카톡을 보냈는데 상대방이 오랫동안 답이 없고 1이 없어지지 않으면 어떻죠? 미쳐버릴 것 같잖아요. 그렇죠? 예. 그리고 그 상황에서 더 고통스러운 건 뭐죠? 1이 없어졌는데 답이 없습니다. 예. 그럼 진짜 끔찍하지 않습니까? 예. 그리고 여러분들은 어떻게 되죠? 계속 카톡을 봅니다. 예. 그리고 아이 안 봐야지. 그러면서 치워나도 계속해서 눈길과 마음이 거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저기 전화가 드르륵 울립니다. 그럼 어떻게 되죠? 예. 딱 잡아가지고 보게 되는데 광고 문자예요. 예. 그리고 막 계속해서 그 막 단톡방에 막 여러 개 올라오는 거 있잖아요. 너무 짜증나지 않습니까? 그때 제가 왜 이렇게 이걸 잘할까요? 어, 시원교에는 청년이 많습니다. 예. 엄청나게 많은 청년들이 있어요. 그리고 청년들이 계속해서 저한테 이야기해 줬어요. 저는 처음에는 이제 제가 그 짝사랑을 하던 그니까 아직 연애계에 있던 지금 연애계를 떠났습니다. 결혼한지 오래돼 가지고요. 연애계했던 그 시절에는 카톡이 없었어요. 예. 근데 어 지금 어 시광교회 청년들한테 이런 이야기를들을 때는 아 되게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리고 또 동시에 아 여기는 뭔가 중독적인게 있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나쁘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닙니다. 근데 그게 그니깐 그것만이 사랑이라고 생각할 이유는 없는 거죠. 그리고 보통 어 진짜 심각한 문제는 이게 사랑이라고 이게 로맨스라고 이게 삶의 관계에서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랑이라고 우리가 보통 착각하고 산다는 거죠. 그리고 거기에는 고통과 죄책감과 수치심과 분노가 계속해서 엮겨 들어간다는 겁니다. 사실 과거의 세계관에서는 이런 종류의 로맨스를 그렇게 대단하게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어 과거에도 당시 사람들은 사람이었으니까 어 로맨스를 좋아했죠. 그리고 로맨스를 많이 즐겼습니다. 근데 로맨스가 결혼에 중요한 이유는 아니었어요. 스테파니 쿤츠라는 이제 미국의 여성 역사학자가 있습니다. 아,이 사람이 쓴 책 중에서 결혼의 역사라는 책이 있거든요. 우리나라말로도 옛날에 번역이 됐었어요. 어,이 책에 보면요. 그러니까 로맨스 그리고 애정이 결혼을 해야 되는데 제일 중요한 요소가 된 거는 인류 역사 가운데 사실 100년도 되지 않았다라고 이야기를 해 줍니다. 과거에는 로맨스가 어디 있어요. 그냥 부모님끼리 어 너희 딸과 우리 아들 잘 맞으면 우리 결혼합세 이러는 거예요. 그리고 실혼 첫날 밤에 딱 보고 나서 확인하고 그런 거죠. 예. 어 그런데 지금 이제 너무나 많이 달라졌죠. 그리고 로맨스만이 결혼을 하는 우리가 연애를 하는 가장 유일한 이유다가 되었죠. 저는 이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과거의 세계관으로 꼭 돌아가야 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거의 세계관은 훨씬 더 억압적이었죠. 하지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겁니다. 그럼 현대 세계관는 훨씬 더 좋냐는 거예요. 예. 우리를 행복하게 해줬냐는 거죠. 그렇지도 않다는 겁니다. 스슬루이스는 아 되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줍니다. 그니까 스슬루리스의 책 중에서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라는 굉장히 재밌는 책이 있어요. 그 책의 설정은 뭐냐면 스크루테이프가 악마예요. 고참 악마 스크루테이프가 그 하급 악마인 원무드라는 조카예요. 조카한테 계속해서 편지를 보내는 겁니다. 편지의 내용은 뭐냐면은 그 어떻게 인간을 유혹해서 죄에 빠뜨리게 할 수 있는가 뭐 이런 내용입니다. 근데 거기에 보면은 이제 시슬 루이스가 그 스크루테프의 말을 빌어서요. 그니까 우리가 흔히 말하는 로맨스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자, 읽어 드릴게요. 지상에서는 이러한 욕망을 종종 사랑이라고 부르고난다. 나는 지옥에서는 이것을 굶주임으로 인식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예.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되세요? 그니까 사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불리는게 가만히 뜯어 보면은 굶주림일 수도 있다는 거죠. 예. 그러니까 바꿔서 표현해 보식일 수 있다는 겁니다. 로맨스도 상대방의 좋은 점이 있습니다. 아마 연애하는 분들은 뭐가 좋으니까 연애를 했을 거 아니에요. 그렇죠? 상대방이 너무 예뻐 혹은 너무 친절해 혹은 너무 지적이야. 이런 것들로 많이 얘기를 했을 겁니다. 어 저 같은 경우에도 제 아내가 그러니까 뭔가 조건을 하나 말해 주긴 했습니다. 예. 저보고 아 저보고 아 이거 말 안 할래요. 말해 줄까요? 예. 저보고 아 등치가 커서 좋다고 했어요. 부끄럽군요. 뭐 그게 나쁜 건 아닙니다. 당연히 그런 매력적인 요소가 서로 있어야 사랑이 시작되고 결혼도 하게 되는 거죠. 하지만 그니까 어 그 과정 중에서 우리는 계속해서 내 연약함이 들통날까 봐 두려 두렵습니다. 예. 처음에 제 아내를 이제 연애를 시작할 때는 미친 듯이 쫓아다녔죠. 6개월 동안 계속 주사 했습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이제 사귀 달라고 이야기를 했죠. 제 안해도 이제 뭔 뭔가 좋았겠니까 뭐 등치가 좋았 커튼 뭐든 뭐 뭔가 좋았으니까 이제 저랑 사귀을 거 아니에요. 사귀나서 제가 느꼈던 거는 저는 되게 자기 중심적으로 사랑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저 되게 그러니까 어떤 의기적인 거죠. 예.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당연히 제 약점이 제 그때 당시 여자친구에게 계속해서 들통 났겠죠. 예. 그러면서 저는 딜레마에 사로잡혔어요. 뭐냐면은이 약점을 계속해서 노출시키고 싶지 않은 겁니다. 예. 그리고 약으로 약점이 더 많잖아요. 더 많은데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거예요. 그리고 계속해서이 사람의 사랑을 받고 싶은 겁니다. 근데 문제가 하나 더 있었어요. 어, 여러분들 모두가 인식할 텐데 약점을 상대방이 모르는데 날 사랑하면 피상적이라고 느끼지 않습니까? 보세요. 소개팅을 처음 했어요. 처음한 소개팅이 상대방이 나를 보면서 아 사랑해요. 우리 결혼합시다. 그럼 여러분 어떤 생각이 들어요? 신나요? 미친 거 아니야?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죠. 물론 상대방이 원빈이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물론 상대방이 칼이 나면 또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어요. 하지만 핵심은 이겁니다. 이건 피상적인 사랑이야. 모두가 인정할 겁니다. 그렇죠? 그러깐 저는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드는 겁니다. 하나는 뭐냐면은 들키고 싶지 않아. 난 상대방에게 받아들여지고 싶어. 예. 또 동시에 난 피상적인 사랑을 하고 싶지 않아. 내가 온통 다 벌거벗겨지더라도 누가 날 안아줬으면 좋겠어.라는 생각이든 거죠. 그니까 저는 그렇게까지 막 감성적인 사람도 아니었고 어 그냥 삶에서 조금 관종이었을 뿐이지 그렇게 막 사람들의 사랑을 애타하고 뭐 그런 사람도 아니었어요. 말씀드렸던 것처럼 냉담한 사람이었죠. 조금. 그리고 항상 사람들한테는 뭐 너희들이 날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아. 뭐 그런 식으로 이제 대학곤 했습니다. 사람들을. 근데도 불구하고 제 마음은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내가 버림 받으면 어떻게 할까? 예. 그리고 이런 과정 중에서 저는 사실은 어 상대방에게 오직 하나님께서 나에게 줄 수 있는 것을 내가 상대방에게 요구하고 있었구나.라는 어라는 걸 이해하게 됐습니다. 어 이거를 사실 그 어 얘기해 준 사람이 있습니다. 백커라는 사람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유명한 사람은 아니에요.이 사람은 조널리스트고요. 그리고 70년대 말에 그 죽음의 부정이라는 그러니까 필리처상을 받은 굉장한 책을 썼습니다. 우리나라 말로도 번역이 됐습니다. 거기에 보면 굉장히 통찰력 있는 이야기래요.이 사람은 기독교인이거나 그러지 않습니다. 근데 인류 문명의 역사와 내용을 굉장히 잘 알고 있었죠. 그러면서 이제 고대 세계에 관해서 사람들이 자신의 의미와 가치를 찾는 과정하고 그리고 현대 세계에 관해서 사람들이 자신의 의미와 가치를 찾는 과정을 대비해 줍니다. 거기에 보면 8장이 앞권이거든요. 그게 로맨스에 관한 내용이에요. 그러니까 이제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고대 세계에 관해서는 제사를 지냈어요. 사람들이 다 이게 이제 신이 있고요. 그리고 신을 매개해 주는 제사장 같은 존재, 무당 같은 존재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무당 같은 존재에게 갑니다. 그리고 많은 재물을 갖다 받쳐요. 혹은 많은 공로를 갖다 바칩니다. 그리고 내 삶에서 심지어 아주 고대 악한 종교 같은 경우에는 자녀를 갖다 바치기도 됐죠. 예. 그러고 나서 그렇게 갖다 바치고 신이 어 그 무당이나 혹은 뭐 제사장이나 이런 사람을 통해서 내가 너를 인정한다. 너는 훌륭한 존재다. 그러면 거기서 아 나는 의미 있는 존재야. 가치 있는 존재야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삶을 영유할 수 있었다는 거죠. 이게 고대 사람들이 자살하지 않고 삶을 살 수 있는 유일한 이유였다는 겁니다. 그리고 정말 많은 고대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신의 승인과 사랑을 받으면서 삶을 살았습니다. 근데 어린스트베는 이렇게 얘기해줍니다. 사회가 세속화되면서 이제 로맨스가 사랑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고요. 조금 어려운 말이지만 어니스트베커의 말을 좀 다 읽어 드리겠습니다. 연애 상대를 신의 위치에 올리면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구원이다. 우리는 상대의 잘못으로부터 공허감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한다. 우리는 정당화되고 싶어한다. 그리고 우리의 창조가 우리가 지어진 이유가 헛되지 않았음을 인정받고 싶어한다. 우리는 영적인 것을 경험하기 위해 완벽한 승인을 위해 연애 상대에게 기대된다. 그렇죠. 이제 더 이상 신도 없습니다. 그리고 어 심지어 기독교를 믿는 아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종종 이제 여러분 다 이해하잖아요. 저도 그렇습니다. 그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은 그니까 하나님이 내 삶의 이유와 가치기가 되기보다는 사람에 정말 많은 것들이 내 삶의 이유와 가치가 되지 않습니까? 내가 막 일에 미친 듯이 몰도할 때는 일의 성공이 나를 입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내가 로맨스에 빠지면 어떻게 되죠? 상대방이 나를 안아 주는 것. 예. 상대방이 나를 받아 주는 것. 그게 내 가치와 의미를 결정해 버리죠. 그러면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예. 어스트백커는 여기서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고 말합니다. 어떤 문제일까요? 상대방이 질식 질식돼해 버린다는 거죠. 근데 생각보세요. 아, 하나님은 전지하시고 전능하십니다. 그리고 늘 나와 함께 있을 수 있죠. 예. 근데 상대방은 그럴 수 없잖아요. 그러니깐 오직 하나님께서만 나에게 주실 수 있는 걸 상대방에게 기대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요? 상대방이 이제 점점 압박감을 느끼게 됩니다. 대체로 연애를 하면서 서로 압박감을 느끼는 가장 큰 이유가 이거예요. 예. 보통 제가 이제 연애에 대해서 조언을 할 때 청년들한테 이런 얘기를 많이 해요. 외로워서 연애하면 안 된다. 나도 외롭고 상대방도 외롭고 외로운 사람이 서로의 외로움을 채워 주기 위해서 연애하면은 끔찍한 일이 발생한다. 이런 이야기를 해 주거든요. 우리 같이 즐거운 커플이 되어보자. 근데 외로움의 시기가 안 맞죠. 서로. 예. 내가 너무 외로운데 얘는 내일 생 저기 내일 시험이야. 나는 시험이 끝났어. 그럼 어떻게 될까요? 서로가 서로의 외로움을 채워 줄 수 있을 거라는 기대 때문에 연애를 했지만요. 사실 직면한 현실은요. 둘 다 상대방을 사용해서 내 외로움을 채우고 싶었다라는 것만 남는 거죠. 예. 모든 연애가 다 이렇게 이기적인 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모든 연애가 완벽하게 순수한 것도 아닙니다. 항상 우리는 그 중간에 어딘가에 헤매하게 되고요. 그리고 그 과정 속 중에서 우리는 분노하게 되고 그리고 거절하게 됩니다. 냉담하게 대하기도 하죠. 그리고 냉담하게 대하고 나서도 시간이 지나고는 죄 시간이 지나고 나면 죄책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은 어 성 혹은 성관계라는 주제의 이름은 더더욱 심해집니다. 사실 어 뭐 오늘 주제가 그니까 연애뿐만 아니라 성에 대한 이야기도 좀 해야 될 것 같아서 여기에 대해서 약간은 노골적인 이야기를 좀 해 보겠습니다. 어 기독교의 성윤리는 언제나 그러니깐 성은 성관계는 결혼 안에서만 행해져야 된다라는 거였습니다. 이건 1세기에도 그랬고요. 1세기에 보면 굉장히 유명한 그때 당시 목회자들의 금원이 있어요. 로마의 많은 사람들은 침실을 쉐어하고 침실을 나누고 돈을 나누지 않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어 침실을 나누지 않고 돈을 나눕니다. 이런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어 그만큼 그들은 성적인 순결에 대해서는 엄격했습니다. 그렇지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돈이나 자원 같은 경우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죠. 그리고 2년 내에 아 뭐 모든 기독교인들이 성적으로 순결하고 뭐 잘 살았다는 건 절대 아닙니다. 과거나 지금이나 그랬어요. 하지만은 어쨌든 성윤리 자체는요. 오직 결혼이라는 언약 안에서만 우리는 성을 누려야 한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은 현재 기독교에서도 공식적으로는 아주 진보적인 기독교나 아주 보수적인 기독교나 아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근데 보세요. 이거에 대해서 이제 우리는 종종 그니까 지금이 시기가 어느 때데, 때가 어느 때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느냐, 혹은 아직도 그런 고리타분한 윤리에 매어 있어야 되느냐 이런 이야기를 듣기도 합니다. 그리고 정말 많은 기독교인들이 아니 성이라는게 좋은 거기도 하고 그리고 또 기쁜 거잖아요. 쾌락이라는 게. 그리고 또 왜 하나님은 우리를 괴롭히려고 하나? 왜 이렇게 결혼 전에는 성관계를 못 하게 하나? 우린 서로 사랑하는데 이런 질문을 많이 하기도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제가 다 대답해 드릴 순 없지만은 한 가지 좀 의미 있는 생각을 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했던 이야기의 연장선입니다. 어 팀 캐라 목사님의 글을 보면은 되게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가 나옵니다. 아 자기가 이제 어떤 칼럼을 읽은 거예요. 칼럼을 읽었는데 어떤 여성분이 이제 원나이을 한 겁니다. 원나잇을 했는데 그 원나이를 하고 난 경험에 대해서 칼럼을 쓴 거예요. 근데 이제 온나하고 처음에 이제 뭐 클럽 같은데 사람을 만났겠죠. 만나 가지고 이제 그날 밤에 그 남성분하고 이제 관계를 맺는 거예요. 근데 그 남성분이 굉장히 뭐라 그럴까 다정하고 그리고 모든 행동 하나하나에 대해서 동의를 구하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뭐 뭐 같이 있어도 되냐 뭐 같이 밤을 보내도 되냐부터 시작해 가지고 뭐 예를 들면 스베타를 벗겨도 되나요? 뭐 이런 식으로 다 물어보더래요. 그래 가지고 이제이 여자분이 어 이걸 다 일일이 물어보네라는 생각에 뭐 한편으로는 뭐 별나기도 하다라는 생각도 들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되게 귀여워 보했대요. 그래 가지고 아 그래 귀엽다 그러면서 이제 다 허락을 하고 그리고 관계를 맺었던 거죠.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됐고 이제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날의 그 반응 만남 이런 것들이 너무 기분이 좋아서 그다음에 이제 연락을 했대요. 연락을 했는데 그냥 씹혔다는 거예요. 예. 그다음에 이제 철저하게이 무시당한 거죠. 그리고 나서 이분이 칼럼에 이런 말을 적어 놓습니다. 들어보세요. 그 뒤로 몇 주 동안 곰곰히 생각해 보니 현재 우리 문화에서 말하는 합의의 의미는 폭이 너무 좁다. 합의를 성적인 부분으로만 국한시키면 의미가 없어진다. 몸은 나의 정체성을 이루는 복잡한 성운의 그니까 세계의 한 부분일 뿐이다. 합의 문화의 근거를 몸에만 둔다면이이는 육체만 배려하면 된다는 사고 사고와 같다. 그보다는 합의를 상대의 전인격을 배려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면 좋겠다. 내가 당신을 배려하는 것처럼 행동하다가 다음날 사라져 버려도 될까요라는 물음에 그러라고 답할 사람은 없지 않 많지 않을 테니 말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되시나요? 예. 간단하게 얘기하면 어 스웨터를 벗겨 되나요? 오케이. 근데 거기서 말하는 오케이가 스웨터를 벗기고 그다음 성관계를 맺고 그리고 그다음날 사라져 버린 다음에 당신한테 당신이 나한테 카톡을 보내도 내가 씹어 버려도 되나요? 그런 질문은 아니었잖아요. 그리고 그런 질문에 대해서 오케이를 해 준 건 아니잖아요. 예. 그냥 오케이를 했을 뿐이라고요. 근데 그 오케이를 했을 때 이제 내일 당신은 나한테 연락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렇게 허락한 적은 없다는 거죠. 근데 이제 와 가지고 구질구질하게 그 사람을 찾아내 가지고 왜 나는 허락하한 적이 없는 거를 합의한 적이 없는 걸 네가 했냐? 이렇게 말할 수는 또 없습니다. 예. 그러면서이 사람은 묘하게 자신이 그렇게 표현할 순 없지만 그래도 간간당한 느낌을 가진다고 말합니다. 예. 간간은 아니에요. 당연히 합의를 했으니깐요. 그렇지만 그 느낌은 존재하는 거죠. 왜 왜 강간당한 느낌이 존재하는 걸까요? 간간이라는 걸 한번 생각해 볼까요? 끔찍한 일이죠. 아주 나쁜 죄입니다. 강관은요. 둘 다 취약해지지 않는 겁니다. 이게 핵심이에요. 예. 옷을 벗긴다라는 것은 취약해지는 겁니다. 그렇죠? 옷을 벗잖아요. 그러면 뭐 누가 주간에 공격하면 죽어야 돼요. 그렇죠? 그리고 어 상대방에게 옷을 다 벗고 상대방과 그 사랑을 나눈다. 이거는 상대방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상대방이 나를 위해 가거나 공격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확실할 수 있기 때문에 하는 행동입니다. 예. 자, 근데 간간을 한번 생각해 보죠. 간은 한쪽은 한쪽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괴롭히고 있고 한쪽만 즐기는 거예요. 이것은 사실상 너는 취약해져라. 나는 취약해지지 않겠다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한쪽은 취약하지 않습니다. 한쪽은 주도권을지고 있습니다. 한쪽은 모든 걸 컨트롤하고 있어요. 그 컨트롤한 그 상대가 그러니까 보통 이제 대부분은 남성이 간을 하죠. 여성에게 그 상대가 실제로 옷을 벗 벗었을 수도 있습니다. 예. 그렇지만 옷을 벗었다 하더라도 취약해진 건 아닙니다. 연약해진 건 아니에요. 자기를 내려놓은 건 아닙니다. 나는 여전히 통제하고 있고 나는 주도하고 있고 나는 폭력을 휘들르고 있습니다. 상대방만 취약해진 거죠. 이거는음 늘 결혼 전의 성관계에서 결국은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실 기독교가 그니까 결혼이라는 아 성관계라는 것을 결혼 안으로만 제한하는 이유가 인간을 이런 방식으로 보호하기 위해서요. 결혼이라는 거는 이런 겁니다. 아 당신이 나를 가지기 위해서는 그리고 내가 당신을 가지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 서로를 다 주어야 합니다라는 거예요. 어 사회학자들의 말을 한번 인용해 드리죠.이 이 말은 제 말이 아니고 사회학자의 말입니다. 사역학자의 말은 그러니까 우리가 왜 이렇게 결혼하지 않는가에 대해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분석을 합니다. 근데 아 그중에서 이제 문화적인 분석을 시도하는 분들도 있죠. 아 그런 분들 중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왜 현대 사회에서 거 결혼을 별로 안 하느냐? 뭐 다양한 이유가 뭐 경제적인 이유도 있지만요. 어 성관계 가격이 너무 싸졌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제 말이 아니고요. 저 제가 이렇게 말한 적 없어요. 아 저는 이렇게 비속한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아 근데 고객가 끄덕해지는 얘기죠. 성관계의 가격이 너무 싸졌기 때문이다. 과거에는요. 어떤 남성이 그니까 뭐 기독교의 윤리가 세계를 지배하지 않더라도 아주 보수적인 윤리 아래 있었던 시대에는요. 어떤 남성이 어떤 여성의 성을 몸을 어 소유하기 위해서는요. 결혼을 했었어야 됐어요. 다시 말하면 자기의 전 존재, 자신의 재산, 자신의 운명을 다 걸었어야 되는 거죠. 물론 그게 막 다 100% 좋은 결과만 나왔다 이렇게 얘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리고 나서 이제 남자가 딴 마음 보면 바람도 많이 폈으니깐요. 예. 그러니까 어떤 특정한 제도가 무조건 옳다고 얘기하고 싶은 건 아닙니다. 하지만 어 과거에는요. 어쨌든 성관계의 가격이 비쌌습니다. 예. 지금은요. 데이트 비용만 내면 됩니다. 예. 데이트 비용만 내면은 성관계를 얼마지 즐길 수 있어요. 그러고 나서 거기에는 항상 온도 차이가 발생합니다. 어떤 온도 차이일까요? 예. 둘 중에 한 명은 그게 여자일 수도 있고 남자일 수도 있습니다. 성관계를 하면서 아 우리는 연인이야. 우리는 서로 사랑하니까 성관계를 할 수 있어. 언젠가 결혼할지도 몰라. 아니 내년쯤 올해 연말쯤 그 사람이 나한테 청원할지도 몰라. 우리가 헤어질 일은 없을 거야. 우리는 하나가 하나가 되었고 성관계를 통해서요. 그 앞으로도 하나가 될 거야라는 마음으로 성관계를 했어요. 그 남자일 수도 있고 여자일 수도 있습니다. 근데 또 다른 난쪽은 그럴 마음까진 없어요. 예. 오늘 즐기기 위해 성관계를 했어요. 근데 얘랑 계속 사귈지 안 사귈지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내년에 유학을 갈 수도 있고 그리고 직업을 직장을 옮길 수도 있어요. 그리고 난 지금 별로 돈이 없어요. 내가 안정적이기 전까지는 결혼할 생각까지는 딱히는 없습니다. 그리고 얘 예라는 확신은 없어요. 근데 어쨌든 우리 연애 중이잖아요. 그러니까 성관계를 하는 겁니다. 물론 그걸 대놓고 말할 순 없죠. 그러니까 사랑한다. 좋다. 그리고 결혼할래 그러면음 나도 생각하고 있어. 정도로 맞춰 줄 순 있죠. 하지만 그 정도까진 아니에요. 뭐죠? 뭐가 다르죠? 온도가 다릅니다. 이쪽이 조금 더 뜨겁고 이쪽이 조금 더 차갑죠. 그리고 그 상황에서 주도권은 항상 차가운 쪽이 가져갑니다. 맞죠? 뜨거운 쪽이 항상 을이 되죠. 그죠? 한쪽이 훨씬 더 취약합니다. 한쪽이 주도권을 잡고 있죠. 예.이 칼럼을 쓴 여성도 그걸 직관적으로 느낀 겁니다. 예. 저는 그 연인끼리 합의해서 하는 모든 성관계가 다 간간이라고 얘기하고 준 건 아닙니다. 예. 그렇지만은요. 죽는 날까지 서로 사랑하겠다고 하면서 자신의 사회적인 그리고 경제적인 모든 것을 다 걸고 자신을 헌신하면서 어 결혼을 하고 그 안에서 맺는 관계는요. 둘 다 취약해질 수 있어요. 그렇죠? 둘 다 온도가 맞는다고 해요. 물론 마음의 온도까지 다 맞진 않겠죠. 어쨌든 제도적으로 사회적으로는 온도가 맞게 돼 있습니다. 예. 하지만 서로 죽는 날까지 헌신하겠다고 약속하지 않는 상태에서는요. 항상 그걸 간간이라고 말할 수 없겠지만요. 간간과 비슷한 유사한 메커리즘이 그 안에 작동하죠. 한쪽이 항상 상처를 받게 됩니다. 한쪽이 항상 이용하게 되죠. 예. 항상 여기에는 이용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어 이런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로맨스는 고통스러워요. 그리고 고통스러운 가장 큰 이유는 로맨스는요. 사랑이라는 거대한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이라는 거대한이 사랑이 주는 사랑의 일부일 뿐이고요. 그리고 그것은 중독적인 경향이 있고요. 그리고 그것은 진짜 사람과 맞닿지 않는 한 항상 상대를 이용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얘기가 얘가 성관계라는 거고요. 자, 그러면 왜 우리는 이렇게 로맨스 때문에 고통스러운 걸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그니까 성경이 로맨스에 대해서, 사랑에 대해서 그리고 결혼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는지 한번 좀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을 것습니다. 어, 우리가 창세기를 가보잖아요. 그럼 창세기 1장에 보면은 굉장히 아름다운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을 쫓아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인간을 만들었다는 거죠. 예. 그게 창세기 1장에 있습니다. 창세기 2장에는 더 아름다운 말씀이 있죠. 사람이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룬다라는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게 있죠. 보세요. 하나님께서 일종에이 작전을 짰는데요.이 작전 가운데서 어떤 일이 있었냐면 1장에 보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든다고 했죠. 그리고 2장에 보면 하나님의 형상이 완벽하게 완성되기 전에 즉 남자만 있을 때는 복이 좋지 않았습니다. 근데 여자까지 있고 둘이 한 몸이 되고 완성됐다는 거죠. 예. 자, 그러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는 건 뭘 의미하는 걸까요? 예. 그걸 여러 가지를 의미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근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게 있습니다. 하나님은요. 복수로 존재하는 분이라고요. 예. 여러분, 사위일체에 대해서는 잠깐 들었을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아, 죄송하지만 여기서 교리 공부 잠깐만 좀 해 볼게요. 아, 여러분들 졸리게 할 생각은 없습니다. 3일최를 최소한으로 간단하게 한번 설명해 보죠. 성부와 성자와 성령 각각이 계십니다. 성부는 성자가 아니시고 성자도 성령이 아니시며 성령도 성부와 성자가 아니시라는 겁니다. 예. 근데요. 우리는 성경은요. 하나님을 계속해서 한 분이라고 말하죠. 끊임없이 절대 세 분이라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성경에서요. 하나님이 한 분이시다라고 말하는 것과 우리가 아까 읽은이 본문에서의 둘이 한 몸이 될지라이 한이라는 단어는 같은 단어입니다. 제 아내는 지금 저희 저 집에 오류동인데요. 집에 있습니다. 저는 여기 목동에 있죠. 그렇죠? 둘이 떨어져 있죠. 그렇지만 우리는 한 몸입니다. 그게 자웅 동체가 된다는 의미는 아니잖아요. 그렇죠? 예. 떨어져 있지만 우리는 연합돼 있죠. 뭘로 연합돼 있죠? 사랑으로요. 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계시고요.이 새격은요. 너무나도 서로를 깊이 사랑하고 너무나 서로를 끌어나 주십니다. 창세 전부터 인간도 우주도 아무것도 존재하기 전부터 하나님께서는요. 서로를 깊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여 주는 것 때문에 행복하셨습니다. 우리가 로맨스가 힘든 이유가 바로 그거예요. 예. 우리는 영원히 서로를 받아들여 주는 위 하나님이 서로를 영원히 받아들이는 한 행복한 가족 안에서 그런 사랑을 느끼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지음을 받았어요. 예.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요. 상대방이 나를 받아줄 때, 인정해 줄 때 행복함을 느낍니다. 예. 여러분, 교리 공부를 좀 하신 분이라면 칭이라는 단어를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어, 예를 들면 이신칭이 같은 거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인정받고 의롭다고 여김받습니다. 이거를 법적인 표현으로 설명하자면 칭이지만요. 관계적인 표현으로 설명해 보자면요. 그분이 우리를 받아 주시는 거예요. 알아 주시는 겁니다. 그분이 우리를 기뻐 맞아 주십니다. 이거는요. 우리가 삶에서 계속해서 추구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회사에서 어떤 프로젝트를 했는데 그 성공했습니다. 그러면 직장 성사가 뭐 승진을 하거나 승진을 여러분들이 시켜 주거나 아니면 인정을 해 주거나 잘했어 그러면서 등을 뜨드려 주겠죠. 그때 나는 내가 의미 있는 존재라고 느낍니다. 내가 누구한가한테 고백을 했습니다. 근데 그 상대방이 예스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성원을 했습니다. 근데 결혼을 해 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럼 어떻게 되죠? 내가 인정받고 존중받고 사랑받는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삶의 의미를 찾죠. 우리 모두 그렇다고요. 왜요? 우리 모두에게는 마음속 깊은 영혼의 기억이 존재하는 겁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서로 완전히 사랑하고 서로를 환대하고 환영하고 기뻐하며 전혀 외로움이 없는 세계에서 완벽한 행복을 느끼는 것 그게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기억으로 남아 있고 우리 모두를 기억 상실증에 걸린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