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 특집] 이 영상은 시간 들여 볼 가치가 있습니다 | 기독교가 한글을 깨웠다 | 이덕주 교수 | 잘잘법 288회
채널: 잘잘법 |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0bjVUDDb_Xw | 길이: 41:47
요약
🎯 TL;DR
이덕주 교수는 한글이 오랫동안 지배층의 공적 문자로 쓰이지 못하다가, 19세기 기독교의 성경 번역과 출판을 통해 널리 활용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한글을 택한 일이 결과적으로 민중의 소통과 민족 정체성 보존에도 기여했다는 것이 강연의 중심 주장이다.
📌 핵심 논지
교수는 선교사 게일의 표현을 빌려, 기독교가 전래되기 전에 한국인에게 주어진 두 가지 ‘선행 은총’으로 하나님이라는 관념과 한글을 든다. 게일은 세종대왕이 기독교인은 아니었지만, 훗날 복음 전파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뜻에서 그를 ‘조선의 멜기세덱’에 비유했다. 교수는 히브리서가 예수 그리스도를 ‘멜기세덱의 반차’로 설명한다고 덧붙인다.
소통을 위해 만들어졌으나 잠들어 있던 문자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든 중요한 목적은 백성의 말을 듣고 백성이 자기 생각을 표현하게 하는 소통이었다. 당시 공적 문서에 쓰인 한문은 배울 수 있는 사람이 제한돼 있었고, 조선의 입말을 그대로 적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지식인과 양반층은 계속 한문을 사용했다. 한글은 ‘언문’이나 ‘암글’이라 불리며 낮게 취급됐다. 교수는 1443년 창제 뒤 약 400년 동안 한글의 가능성이 충분히 쓰이지 못했다고 표현한다.
성경 번역이 한글을 쓰게 하다
만주에서 활동한 선교사 존 로스는 의주 출신 이응찬·백홍준 등에게 조선어를 배우고, 그들과 함께 성경을 번역했다. 1882년 만주에서 한글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인쇄됐다. 교수는 이를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오기 전에 우리말 성경이 먼저 들어온 사건으로 강조한다.
초기 번역에는 의주 방언과 민중의 표현이 담겼다. 교수는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가 “보라 하나님의 양새끼로다”로 옮겨진 사례, ‘바늘눈’을 조선인 번역자의 표현에 따라 ‘바늘귀’로 옮긴 사례를 소개한다. 그는 성경 번역을 글자만 바꾸는 일이 아니라, 한 문화권의 말을 다른 문화권에서 알아들을 수 있게 하는 일로 본다. 이 성경이 인쇄됐을 때 “하나님께서 조선말로 말씀하시기 시작하셨다”는 것이 교수의 표현이다.
이후 조선에 온 선교사들은 소외된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려면 그들이 쓰는 문자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한글을 선택했다. 의주 방언으로 된 성경을 서울에서도 읽을 수 있도록 1887년부터 교파를 넘어 번역 모임도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성경·찬송가·신문·잡지·교재의 출판은 한글이 실제로 쓰이는 범위를 넓혔다.
한글 연구와 해방을 맞을 준비
교수는 배재학당의 삼문출판사가 한문·한글·영어 활자로 책을 인쇄했고, 그곳에서 일한 주시경이 선교사들의 한국 언어·역사·문화 연구를 접하며 한글 연구에 뜻을 두었다고 설명한다. 이어 주시경이 ‘한글’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표기법을 연구했으며, 교회 강습소를 통해 다음 세대 연구자들을 가르쳤다고 말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어 사용이 억제됐지만 교회와 가정에서는 한국말을 이어갈 수 있었다고 교수는 회고록을 통해 전한다. 한 목사는 학생 시절 교회에서 한글을 쓰고 집에서 태극기와 애국가를 배운 덕분에, 뜻밖에 찾아온 해방 직후 마을 사람들에게 한글과 태극기 그리는 법을 가르쳤다고 회고했다. 교수는 이 사례에서 깨어서 광복을 맞을 준비를 하는 것의 의미를 읽는다.
핵심 수치·결정적 발언·핵심 용어
- 1443년 한글 창제, 1882년 만주에서 한글 복음서 인쇄, 1885년 아펜젤러와 언더우드의 조선 입국, 1887년 선교사들의 서울 중심 성경 번역 모임 시작이 강연의 주요 시점이다.
- 교수의 결론은 “잠들었던 한글을 깨우쳐 준 것이 기독교”라는 말로 압축된다. 선교사들의 선택은 복음 전파를 위한 것이었고, 교수는 그 결과 한글이 민족 정체성을 지키는 데에도 쓰였다고 본다.
자막 원문 (참고)
Kind: captions Language: ko 개일이란 선교사님은 그렇게 표현합니다다. 선교사들과 기독교가 우리나라에지 조선 민족에 오기 전에 하나님께서 선행 은총으로 예비 은총으로 미리 한 민족에게 주신 축복이 자기는 두 가지가 있다고 본다. 하나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신관념을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다. 하늘님, 하난님, 하느님 뭐 여러 가지로 발음이 되는데 자깐 하늘님이에요. 하늘에 계신 해븐갓.이 이 신관념을 가지고 있는 민족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거예요. 중국에는 상제라 그렇습니다. 샹티 상제. 이거는 제우수 개념이에요. 모든 신들의 재왕이야. 이게 상제야. 그러니까 그신론이 깔려 있는 거예요. 그다음에 일본은 감이라 그래요. 신. 귀신 신자를 써요. 이건 더 신론이에요. 모두가 죽으면 다 신이 되니까. 거기는 3만 얼마의 신이 있어요. 일본 사람들이 섬기는 신이. 근데 한국인들은 하나님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불교를 믿든 유교를 믿든 샤마니즘을 믿든 다 그걸 하나님 하는 거예요. 하나님 아이고 하나님 아이고 제일 위기 있던 아이고 하나님 그러는 거예요. 근데 그분의 형상이 없어요. 그분을 섬기는 사당이 없어요. 이게 바로 우상 형상이 없는 야외 신앙과 똑같다는 얘기죠. 그래서 그런 하나님 관념을 한국인들이 이미 5,년 전부터 가지고 있다는 것이 기독교가 쉽게 퍼질 수 있는 첫 번째 선행은총이다. 두 번째가 한글. 그러면서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을 뭐라고 표현했냐면은 조선의 밀기 세대이라고 표현해요. 그러니까 아브라함 내게 축복해 주었던 그래서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던 그런 멜기세 히브리서는 멜기세의 반차로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죠. 그래서 세종 대항이 비록 기독교인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이 보내신 밀기세대처럼이 한 민족에게 한글이라는 거를 만들어 가지고 400년 후에 기독교가 들어와서 전파되는 아주 유효한 토대를 만들어 줬다. 이렇게 표현을 하는 거죠. 한 10년쯤 전인 된 거 같아요. 그때 이제 서울 YMC에서 저한테 아주 좀 아 좀 독특한 그런 강연을 어 뭐 어떤 대화 모임을 부탁을 해요. 그 학생들과 함께 광복 70주년 기념 공개 대화 모임을 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좀 생각이 난 것이 1945년 8일로 광복이 이루어졌을 때 그때 중고등학생 나이였던 분들 어 그때 10대에 청소년이었던 분들의 회고록을 한번 읽어 보자. 그래 그분들이 8호를 어떻게 맞이했는가? 아 8위로를 어떤 어 분위기에서 그분들이 8위로 광복을 맞고 그 후에 이제 어떻게 살는가? 그래서 나름대로 이제 교회 지도자들, 기독교 지도자들의 회고록을 수집해 가지고 좀 읽었어요. 뭐 정일령 박사님의 회고록, 조병옥 박사, 뭐 이윤영 목사님. 그래서 해방 이후에 한국 교회 한국 사회의 지도급이었던 기독교인들의 회고록을 이렇게 다 읽는데 공통적으로 발견한 것이 파리로 광복은 꿈만 같았다. 혹은 밤중의 도둑처럼 찾아왔다. 얘기치 못했다는 얘기예요. 그러니깐 40년 동안 가차게 독립을 얘기하면서도 막상 독립이 되었을 때, 광복이 되었을 때 그 현실적으로 느껴지지가 않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꿈인가 생시인가? 이건 독립운동 한 분들까지도 그런 고백을 해요. 이렇게 쉽게 일본이 무너질 것은 몰랐다. 뭐 철저하게 언론을 통제하고 있었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겠죠. 그러니까 아주 극소스의 해외에 있는 민족동가들만 아마 알았을 거예요. 일본의 패망을. 그러나 국내에 있었던 대다수의 890%는 일본이 이렇게 허망하게 망할 줄 몰랐단 거죠. 그러니까 이제 밤중에 도둑과 같았다. 꿈인지 생시인지 몰랐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은 광복은 됐는데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우리가 해방을 맞았다. 그러다 보니까 결국은 외세의 개입으로 인한 남북 분단이 이루질 수밖에 없었다. 뭐 그런 내용들이었어요. 그래서 아 깨어서 그날을 기다린다는 거. 복음서에도 예수님이 그 말씀 늘 하시잖아요. 때와 귀한은 아버지께서 정하실 것이기 때문에 언제 될지 모른다. 저는 이제 통일도 그렇게 봐요. 언제 통일이 될지 아무도 모른다. 때와 기하는 아버지께서 정하실 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다만 깨어서 준비하는 것과 잠자면서 준비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얘기죠. 맞이하는 것과 다르다는 얘기죠. 그때 아주 흥미로운 회고로 읽었어요. 바로 70년대 80년대 그 CBS 방송 사장을 여임하셨던 이재은 목사님. 그분의 회고록이 참 저한테는 다가왔어요. 그분의 회고록에서 이제 어떻게 쓰냐면 해방될 때 그분은 개성에 있는 중학생이었어요. 10대. 그래서 중학생 때 해방을 자기가 맞았다는 거예요. 그분도 역시 마찬가지로 전혀 뜻밖에 밤중에 도둑처럼 우리에게 광복을 맞았다. 이게 하시는데 그러면서도 하시는 말씀이 그런데 다행히 나는 그 다행히 나는 그 소수지만 깨어서 광복을 맞이한 그러한 축에 나는 둘 수 있었다 하면서 이런 말을 해요. 이미 1930년대 중반 이후에는요. 모든 공교육 기관에서 한글을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조선을 사용할 수가 없어요. 한국말을. 관공서 용어는 물론이고 사립학교, 공립학교 모든 것이 다 일본어로. 그렇게 해서 혹시라도 조선을 쓰면은 고발하면은 당하는 그런 시대였어요. 그 완전히 일본어 시대입니다. 그것이 이제 총독부 정책이거든요. 한글을 철저하게 말사를 하는 것. 그런데 이제 이재현 목사님은 부모님 때부터 교회를 다니셨던 분이기 때문에 교회만 가면은 한글을 썼다는 거예요. 한국말을. 교회만 가면 교회에서는 찬송도 기도도 설교도 다 한 걸로 했다는 거예요. 그럼 물론 총독부에서 이제 1942년부터 어 교회도 설교는 일본어로 하라고 지시를 합니다. 아 그러나 일본말로 유창하게 설교할 수 있는 목회자가 없었어요. 별로 일본 유학 갔다 오지 않고서는 그래서 해방될 당시까지 유일하게 한글을 사용할 수 있는 한국어로 대화할 수 있 한국어로 집회할 수 있는 공간이 교회밖에 없었던 거예요. 모든 관공서는 다 일본으로 다 통용이 되기 때문에. 그래서 주일학교 때부터 자기는 교회 가서 한글을 썼고 집에서도 철저하게 한국말을 하도록 부모님에게 교육을 받았다. 가끔가다 부모님이 벽장을 열고 거기에서 보작에 싼 태극기를 보여주며 이것이 우리나라의 본래 국기다. 그렇게 그걸 보여 주셨다는 거예요. 그리고 애국과 가사를 쓴 동해물과 백두산이 그거를 보여 주시면서 이게 본래 우리 국가다. 이거를 부모님부터 받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공교육에서는 철저하게 일본어 일본 역사를 배웠지만 교회에서 그리고 가정에서는 한글을 사용하고 태국기를 보면서 이것이 나의 본래 정체성이라는 걸 교육을 받았다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해방되자마자 자기 마을에 한글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가 중학생 신분에 마을 주민들, 어린아이들 모아놓고 한글 교육을 시작을 했다. 그리고 태극기 그리는 법을 가르쳤다. 이걸로 보면은 비롯 밤중의 도둑처럼 광복을 맞았지만 나는 우리 부모님이 기독교인이었고 우리 부모님이 그렇게 태극기와 애국가를 보존해 주셨기 때문에 광복 이후에 해방 이후에 새롭게 전개될 우리 민족의 역사에 첫 출발을 나름대로 나도 중학생 신분으로 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요런 표현을 썼어요. 그래서 제가 그걸 보고서 아 10대 청소년이었지만 이분이 이렇게 한글을 사용할 수 있는 문화 공간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결국 새롭게 전개되는 역사 속에 한 몫을 차지하길 수 있는 그런 배경이 되었구나하는 걸 내가 느꼈어요. 그만큼 이제 한글은 단순한 문자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혼 얼 그 정신 그 문화 그걸 담고 있는 언어죠. 그러기 때문에 일제 강정기에 들어서서 철저하게 일본 총독부가 추구했던 교육 정책 중에 하나가 1911년에 제일 먼저 조선 교육령을 선포하고 1943년에 제4차 조선 교육령을 선포하면서 계속해서 강화된 것이 뭐냐면 조선호 말살이었어요. 독립학교뿐만이 아니라 사립학교까지 미션 스쿨까지 한골 교육을 한글로 수업하는 거를 억제해 나가는 그 과정을 거친 거죠. 뭐 전 세계 역사 보면 얼마나 많은 민족들이 세계를 제했다가 소멸되는 그런 과정을 봅니다. 그래 소멸되는 민족들을 보면은 자기 문자가 없어요. 여진족이 얼마나 융성했습니까? 돌골족이 얼마나 무시무시했었습니까? 그런데 그 문자가 없어요. 결국 그 문자가 소멸되면은 그 민족 정체성도 소멸돼 버리는 거죠. 그래서 19 30년대 이제 조선호학회 사건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30년대 조선호학계가 조직이 돼서 말살돼서 소멸되어 가고 있는 조선호 사전을 편찬하는 그 작업에 최현배 선생이나 이윤경 선생 같은 연위 전문학교 크리스천 학자들이 그걸 주역해 나가는 거죠. 무기를 들고 일본에 저항한 것만 독립운동이 아니라 그런 말살과 소멸의 위기 속에서 한글을 지켜낸 그런 것도 우리 민족의 무장투쟁에 멋지 않는 그런 저항 운동이었다. 그렇게 보는 거죠. 그래서 조선학 사건이 그렇게서 혹독했던 겁니다. 그 조학계 사건이 결국 발결된게 하흥 영생에 여학교 그게 이제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들이 설립한 미션 스쿨이에요. 거기에 역사 교사가 한글 조선학회 회원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수업 시간에 학생들한테 은밀하게 학생들한테 한 거를 그 중요성을 가르킨 거죠. 그게 일기장에서 발견된 거예요. 그래서 일기장에서 발견된 것 추다 보니까 이게 전국 조직의 조선학회 회원들이 그래서 수백명이 체포가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런 과정 속에서 결국 한글이 점점점 소멸되어 가는 과정 가운데 그 한글을 마지막까지 지킨 공동체가 기독교 공동체가 됐던 거죠. 한글이 1443년 세종대왕께서 이제 창제하신 다음 사실 세종대왕은 굉장한 기대감을 가지고 이걸 창제하셨지요. 지편전 학자들을 총동원하고 심혈를 기울여 가지고 자기의 시력을 잃을 정도까지 그래서 이제 후민정을 반포하셨는데 훈민정음을 만들게 된 가장 근본적인 목적 중에 하나가 소통이었습니다. 그래 훈민정 해제도 첫 말씀이 그거잖아요. 우리나라 글이 중국과는 달라서 자기 생각을 밝히 드러내는데 한계가 있다는 거예요. 그 전까지는 이제 문자 물론 신라 시대 이두가 있긴 있었습니다만은이 토라고 하는 거 구결이라고 하는 것은 한문에다가이 보조 언어예요. 우리 주언어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한문으로 모든게 소통이 됐던 거죠. 중국의 문자죠. 그래 중국의 문자로 한국인들이 그 소통하다 보니까 한계가 있는 거예요. 소위 말한 입말,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한자로 그대로 표기가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한자의 특징은 뭐냐면 입말과 글말이 다른 거예요. 소리내는 글하고 쓰는 글자하고 이게 달라. 더군다나 한문이 얼마나 어려워요. 지금도 한자는 중국 사람들한테 난공 불락이에요. 지금도 계속 발발 그 개발되고 있는게 한자예요. 한자는 그래서 완전 해독이 불가능한 거예요. 그러니 중국 사람들도 완전 해독하기가 어려운 한문을이 조선 사람들이 그러니까 상류 1%죠. 아주 상류 1%만 그래서 서당에서 글공보하고 과거 급제하고 상류 1%만 한 문 가지고 유통하게 자기 의사를 그러니까 모든 상소문도 다 한문이잖아요. 모든 왕의 지식공선 문서도 다 한문이고 그러니까 그런 한문으로 제한된이 소통의 문자를 세종대항의 소원이 뭐겠어요? 백성들의 소리를 좀 듣고 싶은 거죠. 그리고 백성들도 자기 생각을 마음대로 펼칠 수 있는 표현할 수 있는 그래서 소통의 독으로 후민정을 만든 거거든요. 그러니까 이걸 만들면은 모든 조선 백성들이 전부 다 반갑게 야 이렇게 편리한 글이 나왔네 해 가지고 할 줄 아는데 웬걸 최마리를 비롯해서 수구 보수 그래서 중국 사대주의 중국의 문자로부터 독립되는 걸 두려워하는 그래서 마치 한자를 폐기하면은 중국을 배반한 것처럼 생각하는 그런 사대주의적인 망상에 포로에 잡혀 있는 그 사람들이 결국 계속 후민적 조금 창제 때부터 제동을 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결국 세종 대왕께서는 맨들어만 났지. 그게 일반 대중 모든 조선 민족에게 보편적으로 사용되기는 어려웠단 거죠. 여전히 지식인 상류 계층, 양반계층은 한문만 한문으로만 소통의 언어로 독구로 사용한 거죠. 세조 임금님 때 비로소이이 산스크리어 하문으로 됐던 불경이 한글로 잠시 번역된 적이 있어요. 집중적으로. 그러나 그거는 불교 사찰, 불교 어 승려들 거기 제한돼 있었어요. 그러니까는 1443년에 창제는 하셨지만 사실 400년 동안 뭐 잠들어 있었다. 무시당했다, 배제됐다. 이렇게 표현한게 맞죠. 19세기에 이제 선교사들이 들어왔을 때 후민정음 그 한글이 한글은 그때 한글로 불리지 않았어요. 언문이라 그랬어요. 언문이란 말은 좀 더 덜 떨어진 글이라 그런 뜻이에요. 아주 심하게 말면 암클이라 그랬어요. 암것들이 쓰는 글. 그러니까 언문이나 암클은 이게 아주 비하하는 용어예요. 철저하게 무시됐던 거죠. 19세기 말에 이제 선교사님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옵니다. 우리나라의 최초로 한글로 성경을 번역하신 분이 중국 만주에서 활동하셨던 스코틀랜드의 전노스라는 선교사님이에요. 이분은 태어날 때부터 자기가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스코틀랜드 모국어하고 그다음에 영어 두 개의 언어를 같이 사용하는 그런 문화권에서 태어나신 분이에요. 그러니까 바이링규 두 개 언어를 동시에 사용하는 그러니까 이런 분들이 외국어에 대한 해등력이 굉장히 빨라요. 그래서 이분이 이제 중국에 와 가지고 1870년대 초반에 이제 중국 만주 연구로가 가지고 거기서 어 만주 사역을 하시는데 1874년 어간의 고려문이라고 하는 봉천 심양 바로 아래 있는 조그만 무역 마을이에요. 고려 사람들이 와 가지고 무역하는 동네라 그래서 고려문이라 그래요. 도려촌이라 그래서 거기서 한국 사람을 처음 만납니다. 의복이나 외양은 중국 사람 비슷한데 언어가 다른 거예요. 조선을 쓰니까. 그래서 그로서 선교사가 관심을 가져요. 그래서 이제 그 사람 중에 장사하러 왔던 사람 가운데 이응찬이나 백홍준이나 이런 사람들을 접촉을 해요. 그러면서 조선이란 나라를 처음 알게 돼. 존노로스라는 선교사가. 그러면서 관심이 가는 거예요. 자기는 원래 중국 선교사로 왔지만 저 암록강 건너편에 있는 조선이라는 나라 거기는 아직 선교사가 한 명도 들어가지도 않은 아주 폐쇄적인 국가인데 거기에서 무역하러 왔던 의주 사람들을 만나면서 저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는 생각이든 거예요. 그래서 그 의주 출신이었던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을 이응찬이에요. 그분을 자기 어학 선생으로 고용을 해요. 그래서 조선을 배워요. 1882년 초에 성경으로 번역했 나기 전에 코리안 프라이머라고 하는 한국어 문법책을 중국 상에서 처음으로 인쇄해 내요. 아주 놀라워요. 한국어 배운지 1년 만에 얘기는 뭐냐면 그만큼 한글이 배우기가 쉽다는 거야. 한국어 문법 책을 쓴 거예요. 요만한 책을 코리안 프라이머. 나중에 이분이 히스토리 오브 코리아라고 한국 역사책도 써요. 그러면서 그 이흥찬 씨를 또 백홍준을 자기 어학 선생으로 고용하고 또 그 사람들을 성서 번역자로 해 가지고 그때부터 한글 번역 성경을 시작합니다. 아마 이것이 세종 대왕께서 한글을 창제하신 다음에 한글이 비로서 자기 기능을 자기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첫 번째 사건인 거예요. 코리안 프라이머를 보면은 영어 문법책으로 한글을 깨우치는 거예요.이 양반은 중국 선교사입니다. 그런데도 이분은 미래를 본 거예요. 언젠가는 조선 땅에 선교사들이 들어갈 거다. 그러면 그 사람들 제일 필요한 거는 조선호 문법 책이다. 언어를 알아야 문화를 알아야 복음을 전하니까. 그렇게 해서 이분이 그 기초 문법책을 쓴 거예요. 그러면서 한글이 얼마나 과학적인 문자인지를 처음으로 서구 세상에 알리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본격적으로이 언어로 낯선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자. 그래서 이제 조선 의주에서 온 그 상인들을 그 사람들은 이제 한문 성경을 대본으로 하고 로스 선교사는 헬러 성경과 RSV 영어 킹제임스 버전 영어 성경을 대본으로 해서 번역을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첫 한글 성경이 1882년에 만주 심양에서 누가복음하고 요한복음 두 권이 인쇄돼서 나와요. 이게 우리나라의 아펜젤러 언더 선교사 들어오기 3년 전의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기독교 복음이 들어오게 된 거는 선교사가 먼저 들어온게 아니에요. 그렇게 만주 땅에서 한글로 번역된 성경이 먼저 들어왔어요. 사람이 먼저 들어온게 아니라 성경이 먼저 들어왔어요. 우리말로 번역된. 그러다 보니까 이제 성경 에피소드가 좀 많이 생겨요. 이분들이 이제 전부 다 의주 출신이잖아요. 평안도. 그래 번역 원문을 보면은 의주 사투리가 많아요. 티디 만물이 어들에서 났나뇨? 이렇게 나와요. 하나님 아바이입니다. 여기다. 어암 이래요. 어머니 어맘암. 요한복음 보면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 처음 등장할 때 세례요한이 자기 제자에게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즘 그렇게 되잖아요. 근데 그때 번역된 1882년 성경 보라 하나님의 양새끼로다. 재밌는 것 중에 하나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운 것을 예수님의 비유로 부자가 아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운 것이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요런 대목을 번역하게 된 거예요. 영어 성경에는 바늘귀가 아브니들이요. 아이브니들. 지격하면 바늘 룬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깐 로스 선교사는 낙타가 바늘 룬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려우며 이렇게 번역본이 되고 그러니까 의주에서 가는 한국 사람들이 이해를 못 하는 거예요. 바늘눈이 뭐냐 도대체 로스 선교사가 그림을 그려서 바늘에 생긴 구멍 그랬더니 의주 사람들이 어 그거 바늘 귀다. 그럼 그 바늘 귀라고 하면 된다. 같은 형상이지만 서양에서는 눈이고 아이고 동양에서는 귀로 해석이 되는 거죠. 결국 성경이 하나의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번역이 된다는 이야기는이 문화권에서이 문화권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번역이 된다는 뜻이에요. 저는 그래서 1882년에 인쇄대에서 나온이 성경책을 중요시 하는 이유가 비로소 하나님께서 조선말로 말씀하시기 시작하셨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히브리 민족에 유대인들에게 히브리어로 처음 말씀하시기 시작해요. 그다음에 신약 시대에 와서 헬라말로 말씀하시기 시작해요. 그다음에 중세에는 라틴어로 말씀을 하세요. 종교 개혁 후에는 독일어로, 영어로 말씀을 하세요. 그리고 이제 19세기 말을 드디어 조선말로 우리 한민족의 언어로 하나님은 말씀하시기 시작한 거죠. 그러다 보니깐 그 민족 사람들이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이 번역이 되는이 모든 과정에서 이제는 단지 한 문자에서 한 문자로 번역이 된다기보다 한 문화권에서 한 문화권으로 한 민족의 역사에서 또 다른 민족의 역사로 하나님의 사역이 옮겨진다. 그렇게 볼 수도 있는 거죠. 근데 우리말로 번역할 수 없는 단어들이 있거든요. 그 소위 말하면 안식일 같은 경우 이거는 이제 편안할 안자의 쉴식자를 지금 쓰고 있는데 사실 이제 19세기만 처음 번역할 때 히브리 말로 안식이 사입니다. 사 그러다 보니까 사이라는이 말을 정확하게 우리말로 변해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1882년에 나온 성경을 보면 사날로 해요. 사날. 어, 사은 그냥 히브리엄을 쓰고 사날. 그리고 세례를 티즘이란 말이 없어요. 우리한테는 영어에 티즘. 그래서 그걸 밥예라 그래요. 밥. 이해절리했자. 받침예. 그리고 성령도 숨님이라 그래요. 숨님. 후하고 숨을 쉬는 그 숨님. 이런 식으로. 뭐 유월절 같은 경우에는 대표적으로 어 지금은 너물 유자에 너물 월자를 쓰지만 영어 패스 오버거든요. 패스오브라는 그 뜻을 이제 우리가 설명을 듣고 그걸 뭐라 그러냐면 넘난절 이렇게 써요. 넘난절. 아 멋있어. 나는 오히려 유월절보다 넘난절이 얼마나 이게 6월절 하면은이 젊은 세대들은 5월 다에 오는 6월인 줄 알아. 요즘도 근데 이게 넘난절. 어 이거 패스오버 이거 얼마나 좋아. 그래서이 의주에서 번역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다 민중계층이에요. 밑바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의 언어로 한 거예요. 그러다 보니깐 민중들이 알아듣기 쉽게 이게 바로 세종대항이 원하셨던 거죠. 상 지식인들끼리만 저들끼리만 아는 문자로 왔다 갔다 하는게 아니라 제일 밑바닥 사람들에게 통하는 언어로 그러니깐 400년 전에 세정대양께서 만드신이 후민정음이 결국 기독교를 통해서 그 세정대응의 뜻과 의지가 구현되었다. 저는 그렇게 보죠. 그래서 그때부터 모든 신약 성경이 다 번역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1887년에 신약 전체가 만주에서 번역이 돼요.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서는 이수장 선생이 또 마가복음을 또 번역을 해요. 그래 그 마가복음 번역된 성경을 가지고 아펜젤러 언더우드 두 선교사가 조선 땅을 방문합니다. 이분들이 이제 미국을 거쳐서 일본 일본을 거쳐 가지고 아 이제 조선에 들어오게 되는데 일본에 도착했을 때 이미 이수정 선생이 1년 전에 번역한 그런 한글 성경을 선물로 받아요.이 사람들 한국말 모를 때입니다. 지금 조선의 개척 선교사로 들어가는이 두 선교사한테 이수정 선생이 자기가 번역한 마가복음 한글 성경을 주면서 우리 민족의 복음을 전할 때 이걸 사용하십시오. 그래서이 두 분이 1885년 부활절 때 인천 아빠대에 도착했을 때는 그들의 짐속에 이미 한골로 번역된 성경이 있었던 거죠. 아마 이게 세계 선교 역사상 한국밖에 이런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때부터 이제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이제 서울에 정착하면서부터 그러다 보니까 만주에서 번역된 성경이 신약은 다 되긴 됐는데 이게 다 의주 의주 방언으로 돼 있다 보니까 이게 지방 사투이니까 서울 사람들이 또 이게 통하지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서울 중부 지방 방언으로 성경을 번역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 거죠. 그래서 이분들이 이제 1887년부터 언더우드, 아펜젤러, 그다음에 거기 스크랜튼, 헤론 이런 선교사님들이 성서 번역 회의를 해요. 성경 성경 변역 모임을 시작을 합니다. 빨리 서울 중부 지방 중심의 언어로 한글 성경을 만들자. 이게 변두리 방언이 아니라 그것이 이제 발전 발전 발전서 오늘날의 대한소공해로 발전을 하는 거죠. 그래서 성경 번역은 초교파적으로 교파를 초월해서 그 성경을 번역하는 그런 전통이 이제 선교 초기부터 세워지는 거죠. 그러니까 선교사님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로스 선교사도 그랬지만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이 언어입니다. 우리나라가 지금 해외 선교사 파송할 때 제일 먼저 그 현재 언어를 배워야 되듯이 그게 소통이니까. 그다음에 역사 문화를 알아야 돼요. 그들 전통이 뭔지를. 그래서 복음을 전하기 전에 먼저 배워야 합니다. 선교사들은. 그러기 때문에 한국에 왔던 모든 개척 선교사들이 한국에 딱 들어왔을 때 언어부터 배우는데 두 개의 문자가 있는 걸 알아요.이 조선 사람들이 사용하는게 하나가 한자고 하나는 한글이에요. 그러니까이 한자는 오래 전부터 사용했던 건데 이거는 원래 중국의 문자고 이걸 사용하는 사람들은 상류 1%의 지식인 양반 계층 아주 고도의 학문을 한 사람들만 해독할 수가 있는 또 다른 하나는 한글이에요. 그땐 한글이라는 용어를 안 썼지만 자 업문 앙클로 어 불렸던 그 문자가 있는데이 문자는 분여자 평민들 민중계층들의 언어야.이 두 개를 비교하는 겁니다.이 두 개 문자를 놓고 선교사들이 그러면서 어떤 문자를 선교의 용어로 쓸 것인가? 당연히 한글이에요. 그리스도의 복음 자체가 눌린 자, 소외된 자, 가지지 못한 사람. 이런 사람들이 선교 복음 전도의 제일 대상이야.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언어 그게 바로 한글이야. 더군다나이 한자는 배우기도 어렵고 해독도 어려운데 한글은 누구나 한 달이면 깨칠 수가 있으니 더군다나 로스도 그랬지만 언도우드 아펜젤러게 존스 헤론 헐버 모든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한글을 공부하다 보니까 이처럼 과학적이고 이처럼 효율적인 문자가 또 어디 있겠는가 그래해서 뭐이 뭐 토론도 안 하고 한글을 선택한 거예요. 앞으로 모든 기독교의 문서는 한글로 인쇄한다. 그렇게 하다 보니까 한글이 이제는 말 그대로 활용이 되는데 기독교 기독교이 선교의 용어로 한글이 정착되다 보니까 성경 찬송 기독교 문서 수문 잡지 이게 다 한글로 번역이 되다 보니까 한글이 과학적이고 유용하다고 하는 사실이 선교사들이 제일 먼저 그걸 깨닫고 역으로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가르쳐 주는 형창이 된 거예요. 기독교 문서 출판이 굉장히 일찍 시작됩니다. 1887년에 이미 배제학당 안에 산문 출판사라고 하는 제목 원래 이제 산문 출판은 정식 명칭은 아니에요. 이거는 이제 영어로 어 트릴링규 프레스라고 하는 말을 씁니다. 영어 선교사들이 트릴링규 트릴링규이면 세계 문자로 된 인쇄소라 그런 뜻이에요. 그래 한글로는 이제 미의미 인쇄소, 감리회 인쇄소 뭐 그런 뜻으로 많이 번역이 됩니다. 그러니까 배제학당이 딱 설립이 됐는데 배제학당을 설립한 아펜젤러의 교육 원칙이 뭐냐면은 지도자가 되려면 남을 섬겨야 된다. 그러기 때문에 이제 육체 노동을 천시하면 안 된다. 이게 사농 공상해서 옛날 유교 시대는 사외에는 다 하류였거든요. 육체적으로 노동하는 걸 천시했던 그런 때입니다. 대재학당은 제일 먼저 학생들한께 가르쳐 준게 이제 영업에 오려고 출세하려고 오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다 양반 계층들이 와요. 지식인 계층 자녀들이 많이 와요. 학교에 올 때 하인들을 다 데리고 오는 거야. 하인들을. 그래 가지고 하인들이 학교까지 와 가지고 양반 자재가 교실에서 수업하는 동안 바깥에서 기다리는 거예요. 그리고 운동 시간에 야구하는데 땅 저가저 안타쳐서 치는 건 양반이 하고 뛰는 건 하인한테 시키는 거야. 그러니까 육체적인 노동을 천시하는 거예요. 양반들이. 그래서 배제학당의 철 학생 철 초기 철중경에 학교 등교할 때 종데려오지 않는 것. 종리고 오면은 학교 못 오는 거 이걸 가르쳐요. 그리고 학생들이 직접 자기가 노동해서 학비 버는 걸. 그래서 알바를 그때부터 알바 문화가 생긴 거예요. 배제학당에. 그런 알바 장소가 바로 삼문 출판사예요. 그래서 세 개 문자, 세 개의 활자를 가지고 책을 인쇄하는 거죠. 그러니까 세 개 할자가 한문. 전통적인 언어예요. 두 번째가 한글, 그리고 세 번째가 영어예요.이 세 개의 활자를 가지고 신문잡지 그다음에 어 성경 뭐 찬송 그다음에 기독교 교리적인 서적들을이 배제학당에서 인수해내는 거야. 학생들이 그 과정에서 배제학당에 들어왔던 학생들 가운데이 한글을 연구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한 거예요. 그게 이제 주식형 선생이에요. 주식형 선생도 본래는 이제 영업에 와 가지고 출세하려고 지방에서 올라온 양반 어 몰락 양반 출신입니다. 그래 주식형 선생이 배제학당에 들어와서 처음에 영업에 와 가지고 자기도 관직에 나와서 출세하려고 이제 배제학당에 들어왔던 거죠. 그때 이제 헐버트라고 하는 분이 이제 산문 출상 관리자였는데 이분이 이제 해금 이사 사건을 도와줬고 아주 한국 독립운동가에 공원했던 분이죠. 이분은 진짜 고정황제의 아주 측근으로 마지막까지 민족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분입니다. 이분이 이제 산문 출판사 그 책임을 맡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 밑에서 이제 식자공으로 알바를 한 거죠. 주식형 선생이. 그러다 보니까 자연히이 세계 문자의 특징을 알게 된 거예요. 이때 산문 출판에 인쇄된 여러 가지 뭐 저기 동일신문도 초기에는 이제 산문 출판 인쇄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신문, 그리스도인 회보 이런 기독교 계통의 신문 잡지들도 이제 삼문 출판에서 인쇄를 했고 뭐 장원 상론이라든지 철로 역정이라든지 사인 필지라든지 이런 초창기의 미션 스쿨 교재도 다 산문 출판에서 인쇄됩니다. 그때 산문 출판에서 인쇄한 가장 중요한 전열 중에 하나가 선교사들끼리내는 선교사 연합 초교파 선교사 연합 잡지가 있는데 코리안 레포지터리라고 하는 코리안 레포지터리라고 하는 한국 연구학지예요. 한국 연구학지입니다. 매월 발관되는 전널이었어요. 그걸 산문 출판사에서 인쇄했습니다.이 코리안 레포지터리가 말 그대로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주죠. 한국 언어, 한국 역사, 한국 문화 이것에 대해서 나름대로 자기가 스터디한 거를 논문으로 발표하는 것이 바로 코리안 레포지터리의 실리입니다. 이거는 자기가 한국의 선교사로 왔으니까깐 필요에 의해서 한국문화, 한국 역사, 한국의 그 언어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그걸 논문으로 후배들을 위해서 발표하는 거예요. 거기에 이제 한국 문자에대 한글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선교사들의 논문이 수록이 됩니다. 헐버트 같은 경우에는이 한글은 조선인들의이 세종대왕께서 창조하신이 문자는 그런 우수한 문자다. 한글의 과학성과 효율성은 전 세계에 으뜸이다. 아리랑이라고 하는이 노래의 가사를 처음으로 분석해서 수록한 것이 바로 헐버트예요. 레포지터리에. 그래서 언젠가는 한글이 세계를 지배할 날이 올 것이다. 요런 얘기를 이분이 이미 120년 전에 합니다. 이분이 더 충격적인 거는이 존스라는 인천에서 활동하셨던 감리교의 선교사가 있어. 이분은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한국에 나온 20세 때 한국에 나온 최연소 선교사입니다. 이분은 고등학교 때 성영 체험하고 한국의 선교사로 나와 가지고 한 30년 사역하시는 분인데 이분이 어떻게 보면 개인 선교사랑 비슷하게 왕조실로 한문으로 된 그걸 다 읽을 수 있는 한국의 역사 종교 거에 대한 책을 많이 씁니다. 이분이 고등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하고 한국에서 선교 사역을 했는데 10년 후에 안식년 휴가를 받아 가지고 미국에 갔을 때 두 개의 대학에서 명예 박사하기를 줘요. 고등학교 졸업생 이분한테. 왜 그러냐? 이분이 그동안 10년 동안 한국의 역사와 문화와 종교에 대해서 코리안 레포지터리라든지 미국에서 발행되는 미셔너리 리뷰라든지 이런 영어 전널에 계속해서 한국 역사 문화와 그거에 대한 논 발표하신 거예요. 자기가 공부한 내용을. 그래서 코리안 스터디에 시발점이 됩니다.이 양반이. 그래서 미국의 대학 두 곳에서 명예 박사기를 주면서 우리 대학 교수로 있어라. 근데 그걸 거부하고 한국 선교사로 오신 분이에요. 이분이 1895년에 최초의 논문을 코리안 레포지터리에 발표하시는데 그게 바로 임진외란에 대한 논문이에요. 이분이 이미 그때 난중 일기를 읽어요. 그리고 훈노트에 달아요. 걸 그러면서 일성을 비롯해 가지고 어느 누구도 임진회란에 대해서 언급도 안 하는 그 시기에 1895년에 임진란에 대해서 영어로 논문을 써요. 그 외 거북선에 대한 연구, 한국의 무기에 대한 연구, 한국의 곤충에 대한 연구, 한국 역사, 언어, 문화 이런 것이를 레포즈들로 계속 실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거를 인쇄하기 위해 십자공으로 일하던 주식경이 거기 도전을 받는 거예요. 내가 조선 사람인데 내가 몰랐던 우리 역사 문화를 저렇게 외국에서 온 선교사들이 이렇게 깊이 연구해서 이렇게 깨우쳐 주고 그 소중한 가치를 저렇게 알려 주는데 나는 무엇을 했나? 조선 민족으로서 열등감에만 사로잡혀서 결국은 영업에 와가지고 추세하려고 했던 것이 나의 꿈이었나? 민족적 자각이 이루어진 거죠. 그래서 주식형 선생이 영어 배워서 추세하려고 했던 그 꿈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우리 민족 문화의 가장 핵심 정수인 한글을 연구하기 시작해요. 그러면서 한글이라는 용어를 붙인게 주식형 선생이에요. 그 전까지는 암클 업문이었어요. 천시받고 무시당했던. 근데 한이라고 하는 말은 크다. 그 한이 그거예요. 한 민족 한 그리고 글자를 넣는 거야. 한글. 그래서 그때부터 비로소 최종대께서 창제하신 그 문자의 한글이라고 하는 타이틀이 붙여진 거죠. 그래서 이분은 그때부터 한글 연구자로 그렇게 해서 자기가 배제학당에서 배운 영어의 문법 체계로 주어 동사 형용사 그전까지는 뛰어쓰기가 전혀 없었어요. 훈민적음 시대 이후에. 그리고 피어리어드 쉼표 이런 것도 없었어요. 마침표 다운표도 없었어요. 그전까지는. 그래서 모든 한글의 표기법을 서양의 과학적인 영어의 문법책에 맞춰서 주어와 동사와 형용사와 부사의 형 이걸 구별하기 시작하고 모든 거를 과학적으로 연구를 하면서 이때부터 한글 전도사로 그래서이 양반의 별명이 주보따리가 됩니다. 그래서 보다리를 들고 다니면서 한글 교육하기 위하여 다니는 거예요. 학생들. 그래서 상동교회 이제 한글 강습소를 허락하죠. 교회 안에서. 그때 이제 와서 배운 분이 최현배 그다음에 김두봉 이런 한글학자 제 2세대들이 이제 나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한 주식형 선생은 소위 말하면 한글 학자로서의에 자기 인생을 출발한 거죠. 이분이 이제 1914년에 돌아가시는데 결국 그분의 꿈이 이제 결국 이제 그 후배들에 의해서 어 결국 계속해서 한글을 과학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면서 그러다 보니까 이제 일제 강정기에 덜어서면서 계속 탄압을 받는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이제 한글을 지켜 나가는 김구 선생도 그런 말을 했어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면은 작원 한글을 지켜야 된다. 고유한 민족 고유한 문자가 살아 있는 한 민족은 소멸되지 않는다. 그래서 잠들었던 한글을 깨우쳐 준 것이 기독교다. 그러니까 선교사님들로 봐서는 선교의 효율성을 봐서 한거리를 선택한 거겠죠. 그런데 우리 민족의 역사를 보게 되면은 한글을 통해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지킬 수가 있었던 거죠. 끝까지 해방 직전까지. 그게 이제 교회 공동체가 그걸 한 거죠. 선교사님들이 들어오면서 한글에 재발견이 이루어진 거고요. 그래서 세정대왕께서 만드신이 문자의 우수성과 과학적인 효율성이 이제 우리는 몰랐어요. 정작 우리는 몰랐어요. 근데 그게 결국 선교사님을 통해서 그게 드려지게 됐고 그다음에 그 가치를 이제 인식한 주식형 선생과 같은 기독교인 학자들이 그걸 과학적으로 발전해서 일어나가는 거죠. เ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