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잘클립] 당신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기독교인과 살아가는 방법ㅣ김학철 교수
채널: 잘잘법 |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zyP9DERh9T4 | 길이: 15:15
요약
[잘잘클립] 당신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기독교인과 살아가는 방법 — 김학철 교수
🎯 TL;DR
김학철 교수는 신앙과 정치 이데올로기가 뒤섞이면 고통받는 사람을 보지 못하고, 신앙이 지키려는 관계마저 해칠 수 있다고 말한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쓰러진 사람이 어느 집단에 속하는지가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정치적 선택이 다른 기독교인 사이에서도 신앙, 가족, 우정의 가치를 앞에 두고 대화하자고 권한다.
📌 핵심 논지
- 신앙과 집단의 이익은 구분해야 한다. 신앙의 이름으로 내세우는 주장에도 집단의 생존, 재산, 권력이 얽힐 수 있다.
- 신앙은 고통받는 사람을 알아보게 한다. 상대의 소속부터 따지는 시선은 도움을 가로막을 수 있다.
- 정치적 견해가 달라도 더 중요한 가치를 함께 찾을 수 있다. 각자 신앙 양심에 따라 투표하되, 서로의 선택을 이유로 신앙과 관계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쌓인 적대감
교수는 요한복음서의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의 대화를 들어 두 집단이 서로 상종하지 않을 만큼 적대적이었다고 설명한다. 이어 이스라엘의 분열과 멸망, 귀환 이후 성전과 성벽 건축을 둘러싼 갈등을 짚는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귀환한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의 협력 제안을 거절한 데에는 혼합주의에 대한 신앙적 우려와 함께 자치권·재산·토지를 지키려는 이해관계도 있었다. 그는 신앙이 현실에서 왜곡될 때 이권이 결부되는 경우를 경계한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배 장소를 물은 것도 어디에서 예배할지뿐 아니라 누가 참된 하나님의 백성인지 묻는 질문으로 읽는다. 교수는 예수가 이 대화에서 양쪽의 신앙·정치 이데올로기를 넘어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도록 이끈다고 말한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쓰러진 사람은 누구인가
누가복음서의 비유에서 강도 만난 사람은 옷을 빼앗긴 채 누워 있고,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를 돕지 않는다. 교수는 시체에 손대면 부정해질 수 있다는 설명을 소개한 뒤, 자신이 더 중요하게 보는 해석을 제시한다. 옷이 벗겨져 그가 유대인인지 사마리아인인지 알 수 없었고, 집단의 경계 안에서만 이웃을 찾는 사람에게는 도와야 할 대상인지조차 분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반면 신앙의 눈에는 그가 고통 속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으로 보인다. 교수는 유대인 청중이 멸시하던 사마리아인이 비유 속에서 신앙을 행한 사람으로 등장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율법학자의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예수는 사마리아인처럼 가서 행하라고 한다. 교수는 이를 이데올로기가 그은 선을 넘어 세상을 다시 보라는 요청으로 받아들인다.
다른 후보에게 투표하는 사람과 살아가기
교수는 신앙 양심에 따라 투표하는 일을 부정하지 않는다.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도 서로 다른 신앙적 측면을 보고 다른 후보를 지지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럴 때 상대를 공격하기보다 무엇에 합의할 수 있고 어떤 중요한 신앙의 가치에 함께 동의하는지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신앙이 앞에 있으면 정치적 견해 차이를 조정할 수 있다고 본다.
그는 선거 때마다 다투는 가족, 정치 문제로 우정이 깨지는 친구들의 예를 든다. 가족의 화목과 우정이 정치 이데올로기보다 앞서야 하며, 정치가 그 가치들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고 말한다. 세대마다 살아온 경험이 달라 투표도 달라질 수 있으므로, 차이를 빌미로 사람들을 갈라놓는 정치적 선동을 경계하자고 당부한다.
결정적 발언 · 핵심 용어
“신앙의 눈으로 보면 저 사람은 고통 속에서 도와줘야 할 사람”이다.
“정치는 우정을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 정치는 가족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
교수에게 신앙은 세상의 근원이 사랑임을 깨닫고 그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며, 이데올로기는 외부의 적과 내부의 적을 가려내야 안전하다고 말하는 틀이다. 그는 신앙과 이데올로기를 구분하고 사랑 안에서 살아가자고 맺는다.
자막 원문 (참고)
Kind: captions Language: ko 누가복음서에 보면 우리가 다 자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나옵니다. 이게 이데올로기와 신앙을 예수님께서 구분해 주신 이야기로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요한복음서 봐도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께서 대화하신 그 장면 사마리아 여인이 그럽니다. 유대인은 사마리아 사람과 상정도 하지 않는데 왜 외관 남자 유대인이 당신 나랑 나한테 말을 겁니까? 그렇게 얘기하죠. 둘 사이가 얼마나 나빴느냐. 매우 나빴어요. 그 이스라엘이 있다가 다윗이 있다가 솔로몬이 지혜왕으로 알려졌지만 진짜 폭군이잖아요. 폭군이라서 북 이스라엘과 남녀가 갈렸단 말이죠. 나쁜짓 많이 했단 말이죠. 솔로몬이. 솔로몬을 지혜의 왕으로만 알고 있으면 안 되죠. 북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게 망하고 722년이라고 기억하는데 남 유다는 바빌로니아에게 망하잖아요. 그 아시리아가 이주 정책을 썼단 말이죠.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을 데리고 왔어요. 그러니까 북 이스라엘 이쪽에는 남유다 사람들이 생 생각할 때는 혼혈족이 탄생한 거예요. 여기저기 이주민들이랑 하고. 그리고이 아래는 주전 기원전 586년 신바빌로니아에게 망해서 그 바빌론 도시 같은 대로 다 끌려갔잖아요. 많은 그 중요한 유대인들이. 이때 페르시아의 키루스 개혁교제는 고레스라는 사람이 보내서 돌아오잖아요. 그때이 사마리들 살던 사람들이 성전 짓고 성벽 사는데 도와줄게 하고 협력을 제안했는데 거절해 버리잖아요. 그 왜 거절했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를 들 겁니다.이 사마리아 사람들은 뭐 혼혈족이기 때문에 신앙을 저버려서 혼합주의적 성격을 갖고 있어서 그래서 그 사람들하고 섞이면 어 하나님의 신앙이 혼합주의적이 되고 또 혼혈이 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못 지키고 그러니까 그런 얘기들이 있죠. 구역학자들하게 한번 물어보면 여러 이야기를 합니다. 뭐냐? 예루살렘 성벽을 짓고 성전을 짓는다고 하는 것은 페르시아에서 허가받은 일종의 자치권이고 그 권리를 사마리아 이토창민하고 나누게 되면 자신들이 소멸될 것 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사실 신앙과 관련된 것과 동시에 자신들의 생존과 이득과 관련된 이데올로기적인 거예요. 이돌로기는 특정 계층이나 특정 집단의 이익과 연결된 거거든요. 또이 귀한 페르시아에서 귀한 유대인들은 거기에 세금도 받쳐야 되고 페르시아에 자기 자신도 운용해야 되기 때문에 재산을 함부로 다른 사람들이 나누다가는 스스로 없어지고 말아요. 그러니까 자기네들끼리 결혼해서 토지 같은 걸 뺏기면 안 되는 거예요. 나중에 누구에게 유산으로 가서이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당연히 순수한 의대로 한게 아니죠. 그러니까 이권이 걸려 있는 거예요. 이권과 신앙의 정당성이 걸려 있는 거예요. 이게 무서운 겁니다. 신앙이 현실로 나타날 때 그 신앙을 왜곡하는게 늘 이익권과 관련돼서 나타나거든요. 그러니까 그 두 집단이 싸우게 된 거예요. 나중에 요한 힐카누스 이생과 그리심산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그 묶었다고 하는 그 장소에 세운 사마리아 성전을 완전히 부셔 버리잖아요. 참 예루살렘 성전은 그렇게 중요하게 어기면서 사마리아 사람들의 성전을 부셔 버리니까 얼마나 화가 났겠어요?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들은 상종하지 않습니다. 서로 적대적이고 서로가 서로를 향해서 살기를 뛰고 있죠. 유대인들은 유대인 나름대로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했을 거예요. 사마리아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 나름대로 그것을 정당했을 거예요. 예수님과 사마리아 사람 대화 나누는데 여인 대화 나누는데 사마리아 사람 여인이 얘기합니다. 이미 그 신전은 없어지고 만지가 오래됐는데 우리는 이곳에서 예배를 드려야 된다고 하고 당신들은 예루살렘 저곳에서 얘기를 예배를 드려야 된다고 하는데 어디에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라고 예수님께 묻잖아요. 그니까이 말은 단순히 정말 예배를 드려야 할 장소가 어딘가요라고 물어본 말인 동시에 누가 참된 하나님의 백성인가요라는 말도 돼요.이 말에는 신앙적인 얘기가 있지만 동시에 이데올로기가 섞여 있는 거예요. 사마리아 사람과 유대인 여기 안에 신앙을 묶고 두는 질문이기도 해요. 예수께서 말씀합니다. 여기도 아니고 저기도 아니야. 유대인들의 신앙 정치 이데올로기도 아니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정치 신앙 정치 이데올로기도 아니야. 그러면 예배드려야 할 때가 없는데 바로이 때다.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셔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겁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는데이 사람이 아마 가난한 사람 같아요. 저항하다가 강도에게 흠신 두들겨 맞았는데 옷까지 다 뺏기고 누워 있어요. 제사장이 지나가고 레위인이 지나가요. 도와주지 않아요. 왜 도와주지 않았을까? 뭐 예전에 얘기할 때는 제사장이나 레인이나 죽어가는 시체에 손되면 부정해지니까 그 일을 못 한다. 그리고 실제로 자기 친인척 외에는 제사장 외의가 잘 손되지 않죠. 그런데 그거보다 더 중요하다고 저가 제가 생각하고 다른 학자가 한 말인데 누군지 모르는 거예요. 그 사람이 내가 저 사람을 도와줘야 할 유대인인지 혹은 사마리아 사람이라면 도마 도와줘야 할 사마리아 사람인지 내 동적인지 내 의인지 알지 못하는 거예요. 왜 알지 못할까? 이데올로기 속에 있는 거예요. 유대인은 내가 도와줘야 할 이웃. 유대인이라면 자기가 사마리아 사람 죽게 놔둬도 아무 문제 없지. 옷을 벗겨 놓으니까 저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는 거예요. [음악] 이데올로기 속에 있으면 저 사람이 누군지 모르는 거예요. 그런데 신앙 속에 있는 사람은 저 사람이 누군줄 알아요. 저 사람은 누구냐면 도와줘야 할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이에요. 신앙의 눈으로 보면 저 사람은 고통 속에서 도와줘야 할 사람인데 이데올로기와 신앙을 같이 결합해 놓은 사람 눈에는 저 사람이 누군지 모르는 거예요. 참 희한하죠. 신앙은 저 사람이 누군지 알려 주는데 신앙과 정치 이데올로기를 합쳐서 이데올로기가 더 위에 있는 사람은 고통받고 있는 저 사람이 누군지 모르는 거예요. 예수께서 유대인 청중들 앞에서 정말 마음 깊은 곳에서 분노가 일어나는 말씀하신 거예요. 너희들이 그렇게 상정도 안 하고 아주 뭐 인간 말중으로 보고 방멸했으면 좋을 것 같은 바퀴벌레로 보고 없어졌으면 좋을 것 같은 기생충으로 보는 저 사마리아 사람이 신앙에 눈 뜬 사람이다. 그리고 율법 박자한테 그렇게 얘기하죠. 너도 가서 저 사람처럼 행하라. 신앙을 행하라. 율법 학자의 질부는 누가 내 이웃십니까? 그것은 이데올로기로 말할 수 있거든요. 유대인 동은 내 형제입니다. 자매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아니죠. 우리의 이데올로기는 어디까지 선을 거을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이라면 예수님의 말씀은 야 이데올로기를 버리고 신앙인으로 세상을 다시 봐라.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그런 의미로 오늘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을 겁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드릴 말씀을 마무리하려고 하는데요. 신앙을 이데올로기로 바꿔치거나 신앙과 이데올로기를 섞어서 우리의 눈을 가리는 그런 행태들을 이제 좀 그만했으면 좋겠어요. 이제 뭐 새 정부가 들어서게 됐는데 어떤 정부인지 저는 전혀 알 수가 없죠.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정치 이데올로기 때문에 신앙을 잃어버리거나 자신의 신앙을 정치 이데올로기랑 섞어서 신앙적 열정으로 특정 행동을 하거나 신앙에 의한 행동이 아니라 이올로기적 행동으로 폭력 그다음에 맹목적 증만 두셔야 한다. 신앙을 회복하시라. 왜 신앙을 믿지 않고 신앙 속에 있지 않고 이데올로기 속에서 자기의 정체를 확인하려고 하시는가? 신앙은 엄마 앞에 있는 거예요.이 세상의 근원이 사랑이라는 걸 깨닫고 그 사랑 안에 있는 거예요. 이데올로기는 우리에게 사랑 앞에 있다라고 알려주지 않고 너 외부의 적과 그리고 그 외부의 적과 내통하는 나쁜 물이 앞에 있어. 우리가 정신 바짝 차리고 외부의 적과 그 외부의 적과 내통하는 우리 내부에 있는 그 저 사람들을 타게 해야 타도 해야 우리 삶의 안전이 와 그렇게 얘기할 거예요. 거기 속으면 안 됩니다. 신앙인들은 벌거벗고 있는 사람이 유대인인지 사마리아인지 알지 못하면 행동하지 사랑을 베풀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신앙과 이대기 잘 구분하시고 우리가 새봄을 노래하며 사랑 안에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아니 아닙니다. 절대 배제하는 얘기로 내 신앙 양심에 따라 투표할 거예요. 저도 제 신앙 양심에 따라 투표할 거예요. 그런데 어떤 분은 자기 신앙 양심에 따라 다른 분에게 투표할 거예요. 자. 자. 그럼 어떻게 되는가? 제 주변에 신학자들 많잖아요. 신학자이자 목사님 분들. 어떤 분들은이 후보야말로 성경적 가치간에 부합하는 인물이라고 막 주장해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서. 어떤 분은 어떤 사람이야말로 신앙에 부합하다고 다른 후보 지지하고 있어요. 열심히 두 분 쓰는 걸 제가 보고 있어요. 음. 그럼 어떻게 되는가? 어떻게 되나? 두 분의 신앙 양심에 투표할 거예요. 그럼 둘이 만나서 서로를 비난하고 공격할 거예요. 이분은 이분이 채 보지 못한 어떤 부분을 보보아 보아서 그분에게 투표한 거예요. 이분은 이분이 최 보지 못하고 덜 강조한 부분을 생각해서 이분에게 투표했어요. 우리는 서로가 다 캐치하지 못한 어떤 신앙의 부을 보고 오고 투표한 거예요. 자, 그럼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둘이 서로 싸워요? 우리 둘 사이에 무엇을 합의할 수 있는지 어떤 신앙의 중요한 부분에 동의할 수 있는지를 찾아보는게 중요한 거 같아요. 그러니깐 요게 그니까 신앙이 우선돼서 정치적 견해가 다른 것을 조정할 수 있으면 신앙이 우선된 거고 정치 이데올로기도 후 후자 있는 거예요. 그러면 괜찮아요. 어떤 가족이 있어요. 제가 아는 어떤 가족은 선고 때마다 싸워요. 밥상 뒤집어 없는대요. 선구마다 그러면 그 집은 가족 가치보다 정치 가치가 위에 있는 거예요. 왜 그렇게 바부처럼 살아요? 가족 가치를 위에 두고 정치 이데올로기 뒤에 둬요. 그래서 너는 누구 뽑을 거고 누구 뽑? 저희 집도 투표가 달라요. 제가 아들 아들 하나 딸 하나 있고 아내 하나 있고 남편 하나 있는데 내시 성격 전적 생각이 다를 거 아니에요. 그러면 그 사람한테 투표한다고 쟤는 내 아들도 아니야. 내 딸도 아니야. 그렇게 해요. 가족이 먼저 해요. 가족이 행복하고 잘 살려고 우리가 투표하잖아요. 왜? 근데 투표 때문에 가족 저 가족의 화목을 깨야 돼요. 아 이렇게 이데올로기를 후순으로 놓으면 서로 대화하고 타협할게 많아질 것 같아요. 친한 친구예요. 막 싸워요. 어 너는 말이야. 제가 실제로 매운탕치가는데 뒤에서 친구들끼리 막 놀다가 갑자기 소리소리 질르고 싸우기를 왜 이렇게 싸우나 가만히 들어갔더니 정치 문제 두고 싸워요. 그 막 소리 지르더니 나가 버렸어요. 어 너무 시끄러웠는데 바보들이에요. 우정을 정치 위돌르기 위해 둬야죠. 그래야 정치인들에게 안 놀아납니다. 그래야 선동꾼들에게 안 놀아나요. 정치 선동꾼들에게 놀아나면 안 됩니다. 왜 그들의 선동에 우리 더 중요한 가치를 깨요? 정치는 우정을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 정치는 가족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 우리 신앙적 가치 우의 아래 정치를 생각한다. 그렇게 중요한 가치들을 위해 두는 생각과 버릇을 열심히 습관을 들여야 정치 선도군들이 이데올로기 선도군들이 우리 삶에 안 파고들어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부모 세대랑 자식 세대랑 손자 세대랑 정치에 대한 생각이 다를 거예요. 너는 서로 그것 때문에 싸워요? 안 싸워도 돼요. 자기의 삶의 경험이 달라요. 저희 아버지 부모님 세대는 다 유기와 겪은 분들이에요. 그 아주 원형적으로 거기 바혀 있어요. 저희 세대는 이른바 민주화 운동 세대예요. 어 아주 DNA 박혀 있어요. 저희 아래 제 자식 20대 중반 제 아들 딸 세대는 다른 정치 사회적 경험이 있을 거예요. 밖혀 있을 거예요. 그래서 다른 투표를 할 수 있어요. 그것 때문에 서로 싸운다고 내 아들 딸과 그리고 아들 딸 남녀 있는데 그것 때문에 서로 저 남매가 싸운다고 그렇게 하는 사람 그렇게 싸우라고 부추이는 그 선도꾼들을 우리가 눈독해 보고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해야 돼요. 더 중요한 가치를 위해서 정치가 봉사를 해야지 어디 감히 정치 이데올로기가 우리의 소중한 가정을 해치려 그러는 거예요. 어 어떻게 감히 선정치 선동꾼들이 우리의 신앙인들을 서로 갈라놓고 자기가 살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을 조심해야 돼요. 더 중요한 가치를 확인할 수 있어야 돼요. 교회에서도 그 가치를 확인해 줘야지 정치 이올로기 아래 들어가서 신앙을 말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혐오해야 됩니다. 죄송합니다. 혐오란 말을 써서 강력하게 말하려고 그래서 그랬던 거예요. 혐오란 말은 취소할게요. 주의해야 합니다. 더 중요한 가치를 확인하면 선동꾼들이 우리 틈에 끼어들 틈을 주지 습니다. [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