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이데올로기, 더 이상 헷갈리지 마세요ㅣ김학철 교수ㅣ잘잘법 237회

잘잘법 · 2026-10-02

채널: 잘잘법 |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SOxggjuFSQ8 | 길이: 45:31

요약

🎯 TL;DR

김학철 교수는 기독교 신앙을 특정 정치·사회 이데올로기와 동일시하는 순간 신앙의 본질이 흐려지고, 자기 집단의 이익이나 폭력을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할 위험이 생긴다고 말한다.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신뢰”이며, 그 사랑에 근거해 자유와 관용을 얻는 삶이다. 반면 이데올로기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관념을 체계화해 특정한 사회적 목표와 행동을 요구하는 실천 지향적 사상이다. 둘은 현실에 대한 불만, 이상적 세계의 제시, 희생적 실천 요구라는 점에서 닮았기 때문에 더욱 주의 깊게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 강연의 중심 주장이다.

📌 핵심 논지

  •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신뢰다. 김 교수는 성부·성자·성령의 사랑,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설명한다.
  • 이 사랑에 근거한 신앙은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 그는 고대 수메르어의 자유 개념을 “속박에서 풀려나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에 비유하며, 신앙인의 자유를 사랑 안에서 자기 자신으로 편안히 존재하는 상태로 묘사한다.
  • 유동식 교수의 시를 소개하며, “아버지를 만났으니 여기가 고향”이라는 표현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얻는 자유와 평안의 이미지로 제시한다.

신앙과 이데올로기는 왜 혼동되는가

김 교수는 이데올로기를 개인과 사회에 대한 관념을 바탕으로 어떤 사회를 만들고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를 체계적으로 제시하는 실천 지향적 사상으로 설명한다. 마르크스의 ‘허위 의식’ 개념과 경제적 낙수 효과 논쟁 등을 예로 들며, 어떤 보편적 주장처럼 보이는 관념이 실제로는 특정 집단의 이익과 연결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신앙과 이데올로기는 구조적으로 닮은 점이 있다. 둘 다 현재 현실을 충분하지 않은 것으로 보고, 더 나은 이상적 상태를 제시하며, 그 이상을 위해 행동과 희생을 요구한다. 따라서 신앙인이 특정 이데올로기를 신앙 자체로 받아들이면 그 이데올로기에 신앙적 열정을 쏟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결정적 차이: 신앙은 하나의 이념보다 크다

김 교수는 기독교 신앙이 자유주의·자본주의·민주주의·사회주의·민족주의 등 어떤 특정 이데올로기에도 완전히 담길 수 없다고 강조한다. 신앙인이 한 이념에 따라 행동하더라도 그것이 곧 신앙 전체를 완전히 실현한 것은 아니며, 다른 정치적 선택을 하는 신앙인을 곧바로 잘못된 신앙인이라고 판단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또 이데올로기가 인간의 힘으로 이상을 완성할 수 있다고 믿는 데 비해, 기독교 신앙은 역사의 완성이 하나님의 섭리에 달려 있다고 고백한다고 설명한다. 이 차이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다른 사람에게 관용을 가질 수 있게 하며, 목적을 위해 폭력을 무제한 정당화하는 태도를 경계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폭력의 정당화와 역사적 사례

안중근 의사가 일본군 포로를 함부로 죽이지 않았다는 사례를 들며, 민족주의적 적대와 기독교 신앙의 인간 이해가 충돌할 수 있음을 설명한다. 적군이라도 무장해제된 포로가 되는 순간 함부로 죽일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 교회의 반공주의도 같은 관점에서 다룬다. 공산주의 정권 아래에서 실제 박해를 경험한 가족사를 언급하면서도, 반공주의 자체가 기독교 신앙은 아니다라고 선을 긋는다. 신앙과 반공 이데올로기를 동일시하면 폭력을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비극이 생길 수 있으며, 서북청년단의 역사를 그 사례로 든다.

성경에서 보는 신앙과 집단 경계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신앙과 집단 이데올로기의 차이를 설명한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적대에는 종교적 주장뿐 아니라 역사적·정치적 이해관계와 집단 정체성이 뒤섞여 있었다고 본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쓰러진 사람이 자기 집단에 속한 사람인지 판단하려 하지만, 사마리아인은 그를 단순히 도움이 필요한 고통받는 사람으로 본다. 김 교수는 이를 “이데올로기는 사람이 어느 편인지 먼저 묻지만, 신앙은 고통받는 사람을 먼저 본다”는 차이로 설명한다.

마무리

김 교수는 신앙을 정치 이데올로기로 바꿔치기하거나 둘을 뒤섞지 말라고 권한다. 신앙인은 각자의 양심에 따라 정치적 선택을 할 수 있고 서로 다른 후보에게 투표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정치적 선택을 곧 신앙 그 자체로 절대화하지 않고, 다른 선택을 한 사람을 신앙 밖으로 밀어내지 않는 것이다. 강연은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내는 적대와 배제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신앙의 중심에 두고 살아가자는 권고로 이어진다.


자막 원문 (참고)
Kind: captions
Language: ko
예전에 제가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인은
누구에게 투표해야 되는가라는 방송을
한번 한한 적 있죠. 그때 재밌는
경험을 했는데요. 한 분이 저에게
전화하셔서
아, 참 고맙다고 어, 목사님 그
강연 때문에 자기가 A 후보를 찍을
수 있게 됐다. 그렇게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저는 속으로 약간
놀랐어요.
그런데 어떤 분이 저한테 얘기를 전해
주시기에
B라는 후보를 그렇게 찍으라고
노골적으로 말할 수 있냐? 그러면서
비판이 있다고 얘기하더라고요.
근데 여기 잘잘법 제작팀 다
아시겠지만 그 영상은 대선 후보가
최종적으로 선발되기 전에 찍은
겁니다. 그러니까 누가 대선 후보가
될지 다 알지 못한 상태에서 찍은
영상이었는데
자신이 듣고 싶은 걸 들었던 거
같아요.
민감하게 듣는 거죠. 민감하게
듣는다는 건 무슨 말이냐면 저 사람은
내가 지지하는 사람을 지지하나 안
하나 이렇게 자기 정체성을 확실히
가지고 제가 한 말씀을 들었다는
뜻이겠죠. 신앙의 문제나 정치의
문제나 모두 민감하게 됐습니다.
자기의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기 때문에
저 사람은 과연 내가 지지하는 그
정치인을 지지하는가?
저 사람은 과연 내가 믿고 있는 그
신앙을 말하는가? 굉장히 자기
정체성과 연견된 질문이니까 아주 주의
있게 듣죠. 그래서 제 지금 영상을
또 듣고 어떤 분들은 아유이 새로
뽑힌 대통령을 지지하란 얘기구나. 또
어떤 분들은 아유 새로 뽑힌 저
대통령을 반대하라는 얘기구나 이렇게
됐겠죠.
그런데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이
영상은 투표 대통령 투표율 하기 전에
찍은 것이라고 말씀을 드리는
변적했네요.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신앙은 무엇이고
우리가 신앙과 종종 착각하는
이데올룩기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이
둘을 헛갈렸을 때 우리의 신앙에 무슨
문제가 생기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어떤 문제를 일으키나? 그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저도 나름대로
제가 지지하는 정치인이 있을 테고
투표하는 사람이 있을 테고 그런데
그런 것을 염두에 일단 두지 않고
조금 중립적이라고 할까요? 그렇게
알아보려고 노력을 조금 했습니다.
같이 제 생각을 한번 나눠 보도록
하겠습니다.
[음악]
[웃음]
[음악]
신앙이란 뭘까요? 특별히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건 뭘까요? 저보고
아주 간략하게 정의를 내리라고 그렇게
말씀한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신뢰 그것이 제가
정리해드리고 싶은 기독교 신앙입니다.
조금 더 길게 저한테 얘기하라고 하면
하나님 아버지 되신 하나님과 아들
되신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께서 서로
더불어 사랑하시면서 그 사랑 속에이
우주가 탄생하고
사랑이 생명을 낳고
그 위 하나님의 사랑이 오늘날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이라고
말하겠습니다.
더 말해도 된다고 그렇게 얘기하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증명되었고
또 그 사랑의 힘은 부활이라고 하는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된다.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인으로 산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굳게 믿으면서 사는 거죠.
그러면 그런 삶은 어떤 결과를 갖고
오는가? 우리에게 자유를 선사합니다.
자유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자유라는
말을 쓰면 그것은 사실은 일본 분들의
번역이죠. 그러면 그 일본 분들이
fre덤 혹은 liber티라고 하는
서형의 언어를 번역한 것일 텐데요.
문자로 남은 기록 중에 가장 오래된
자유라는 뜻을 가진 단어가 있습니다.
그 언어는 스메르어인데요. 아마기
혹은 아마르기라고 하는 수메르어가
있습니다. 그 말을 오늘날 자유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럼 그 뜻은 뭔가?
그 사람이 빚을 지거나 혹은 어떤
의무의 상태가 있거나 혹은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누군가에게 속박된 상태를
뜻합니다. 아주 쉽게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빚을 졌어요. 근데 갚을 수가
없어요. 그럼 어떡하겠나? 그 사람
집에 가서 노예 사리를 하는 거예요.
또 뭐 잔신부름도 하고 노동력을
제공해요. 그러다가 그 빚을 다
갚았어요. 그래서 이제 다시 빚이
없는 상태로 돌아가는 겁니다.
참 감격스럽겠죠?
이제 그 주인 나의 채권자의 말을 더
이상들을 필요가 없죠.
그걸 자유라고 그렇게 하는 단어가
수메로의 아마르기 혹은 아마귀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 문자를
분해 보면 더 깊은 뜻이 나옵니다.
아마르기 아마르요 어간이 무슨
뜻이냐면 엄마라는 뜻입니다.
마두도 아니고 마음이라는 건데
기는 나중에 이제 현재를 뜻하는 그런
말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러니까 그
말을 다시 풀면
그런 어떤 비에서 놓여서 엄마품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자유라는게 뭐냐?
자기가 자기 스스로 존재해도
되는 편안한 상태. 그것이 바로
자유라고 하는 거죠.
어린아이가
엄마 앞에 있는 상태가 자유라고 하면
그 머리속에 그것이 그려져요.
제대로 자기 몸을 가울 줄 모르는
어린 아기가 엄마 앞에 있어요.
엄마가 아기를 보니까 아이가 오줌을
넣어 버렸어요. 그래서
아 진자리가 됐어요.
젖은 자리 그걸 진자리라 그러잖아요.
그걸 보고 엄마가 마른 자리로
갈아입히세요. 우리가 어버이날 노래
부를 때 진자리 마른 자리 가라뉘시며
그 노래가 그거 아니겠습니까? 엄마
앞에 있을 때는 자기가 자기대로
편안하게 마음 놓고 살아요. 왜?
엄마의 사랑이 그 아기의 근거예요.
자유의 근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갖고
산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성령님의
더불어 사랑하는 그 사랑 앞에
자신감을 가지고 만편이 있는 거예요.
두려움이 없고 걱정이 없고 불안이
없고 누군가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강제로 시키는 그런 의무와 명령에서
벗어난 상태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해서 우리가 사는 기독교 신앙인의
신앙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좋아요?
엄마 앞에서 사는 거니까 얼마나 아
좋습니까?
제가 배운 선생님 중에 유동식
교수님이라고 하는 선생님 제가 예전에
한번 말씀드렸는데 이분이 5월에 전에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깨닫고
지으신가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어떤
한 승녀가 도를 닦다가 자기가 불교의
이치를 깨달으면 그걸 오도성 깨달음의
노래를 부르는데 제가 생각할 때는
유동식 선생님의 이시가 바로 기독교
신앙의 오도성 같아요. 예전에는
말끔하게 제가 외웠는데 이제는 좀
보고 외워야 될 것 같아요. 이런
겁니다.
고향을 그리며
바람 따라 거닐다가
아버지를 만났으니 여기가 고향이라.
[음악]
하늘 저편 가더라도
거기 또한 여기거늘
새봄을 노래하며 사랑 안에 사으리라.
여기를 보면 고향이라고 하는 자기가
마음 놓고 있을 수 있는 그곳을
그리워해요. 왜냐면이 현실은 유능숙
선생님은 그 강제 징집당에서
일본군으로가 있었거든요.
1922년생이니까.
그분의 그 경험에 따르면 폭탄을 안고
미군이 상륙하면 자폭 테러를 하라고
그렇게 교훈을 받고 폭탄을 안고 그
일본군 진지 아래 있었대요. 그때
해방 소식이 들려오니까
자기가 폭탄을 안고 죽을 상황이
있다가 이제 그거 안 해도 된다고
하니까 얼마나 대단하겠어요.
얼마나 일본군들의 차별 받으면서 그
일본군 진지 안에 있을 때 고향이
얼마나 그려웠겠어요?
그런데 고향을 더 이상 갈 수 없죠.
625 때문에. 그분은이 황해도가
고향이고 나중에 춘천날이라서 사셨는데
그러니까 고향을 더 이상 갈 수
없으니까 고향을 그리는 거예요.
거기는 마음 놓고 살 수 있거든요.
그런데 거기 못 갔는데
그래서 바람 따라 거닐 수밖에
없어요. 어떨 땐 센 바람, 어떨 땐
부드러운 바람이겠지만 그렇게 거일다가
아버지를
만난 거예요. 그랬더니
여기가 바로 고향인 거예요. 여기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근거한 자유가
있어요.
그러니까 아버지를 만났으니까 여기가
고양이에요. 하늘 저편을 가더라도
그러니까 죽을 맞이하더라도 거기 또한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랑 있는 것이니까
사랑의 근거에서 두려울게 없어요.
그러니까 이분이 마지막으로 이렇게
얘기합니다. 새봄을 노래합니다.
희망을 얘기하는 거죠. 새봄을
노래하며 사랑 안에 사는 거예요.
이게 기독교 신앙의 오도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게 기독교
신앙이에요.
제가 5분 넘게 말했는지 말씀드렸는지
모르겠는데 요게 기독교 신앙의
정수라고 생각해요. 이후에 뭐 여러
가지 신조가 붙어요. 니케아
콘스타티노플 신조도 붙고 우리가 하는
사도신경도 있고 무슨 온갖 이야기들
교리들이 붙어요. 그것은이 신앙의
핵심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하는지를 그 논리적으로 우리의 믿는
바를이 사랑이 어떻게 구체적인 철학적
언술로 교리적 언술로 나타낼 수
있는지를 붙은 거예요. 근데 그
고갱이에 고갱이에 고갱이에 가면
제가 말씀드린 그것이 있다고 저는
그렇게 믿어요.
그런데 이것을 이데올로랑 바꿔치는
것들이 있습니다. 요거 바꿔치는게
굉장히 위험한 건데 요게 진품이에요.
요게 진품이고 정말 진짜예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요것과 닮았지만 아닌
다른 것을 내놓고 요게 진품이라
그래요. 그래서 사람들이 모든 힘을
다해서요 가짜를 진짜처럼 생각하고
요거를 요거에 집중해요. 여긴 생명이
없어요.
저는요
참 신앙을 닮았지만 실제로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을 우리에게
던져 주면서 이걸 신앙으로 착각하라고
하는 그 거짓된 것을 오늘 말씀해
보려고 합니다. 그것을 저는 이제
신앙 이데올로기라고 부를 수도 있겠고
혹은 신앙을 가장한 종교 이데올로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데올로기라는 말은이 사회과학자들에게
이데올로기가 뭡니까? 그러면 아유,
그거 한마디로 하기 어려워요.
복잡해요. 그렇게 얘기할 겁니다.
그런데 그거는 사실 이데올로기만 그런
것도 아니에요. 제가 예전에 한번
말씀드렸는지 모르겠는데 수학에서
기아학에서 점이 뭡니까? 이렇게
물어봐도 그냥 인터넷 검색해 봐도요.
선호가지 나옵니다. 제가 수학교
교수님한테 점이 뭡니까? 선어가지
나오던데 그랬더니 그분 말씀이
선어가지보다 더 돼요. 그렇게
얘기해요. 그럼 그중에 뭐예요?
이렇게 물어보면 복잡하대요.이 세상에
간명하게 정의 내려지는 건 없어요.
그러나 이데올로라고 하는 것을 제가
간략하게 5분 안에 한번 얘기해
보려고 합니다. 이데올로 하는 말을
분해 보면 이데아라고 하는 사상
관념이라는 말이 있고 그다음에 로고스
로이라는 거 하는 거예요. 그러니깐
사상의 과학이에요.이 이 말은
18세기 프랑스의에
드트라시라고 하는에 분이 아 사상의
역사, 사상의 분석을 하기 위해서
만든 그 언어라고 해요. 아 그
일종의 자기의 학문적 방법론이겠죠.
그리고 학문의 관심 대상이기도
하고요. 사상의 역사 혹은 사상
자체를 분석하려고 하는 시도니까.
요것이 나폴레옹 시대에 와서
나폴레옹이 그게 쓸데없는 일 다시
말해서 너희들은 실천을 하다도 하지
않고 그냥
어 룸펜처럼 책상에 앉아서 아이
생각은 이렇고 저렇고 그렇게 사사변
탁상 공론하는 거지 실제로 어떤
사회적 영향력도 없는 거 요렇게 이제
변형되다가이
이데올록이라고 하는 말을 가장 철저히
그리고 오늘날까지 가장 영향력 있게
풀리한 사람이 바로 그 칼
마르크스라고 하는 마르크스라 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이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 혹은 반감이
너무 크기 때문에 마르크스 하면 벌써
아상을 찍이 계실 텐데 뭐 BBC이
이런 데서 조사해 보면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인가 하면 꼭 5위
안에 드는 사람이죠. 거의 뭐 1,
2위를 다투 사람인데
이분에 따르면 이데올로기는 허위
의식입니다.
어떤 특정한 계급의 이익에 봉사하는
관념을 보편적인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 특정 계급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을
기만하려고 만든다는 거예요. 다시
말을 정리하면요 말은 굉장히 보편적인
진리다.라고 어떤 사람들이 얘기하지만
실제로이 말이 사회에 나왔을 때 어떤
기능을 하거나 어떤 내포된 뜻은 특정
계급에 봉사하지
사회 보편적 봉사를 하는 그런 기능을
가진 언술이 아닌 아니에요. 그런데
그 특정 계급에 봉사하는 그 말을이
계급에 속하지도 않는 사람이 주주
주주장하고 지지하고 그걸 따르면 그냥
허위 의식에 불과한 거예요. 그래서에
당시 칼스는 마르크스는에
어떤 이데올로기들이에
사실은 그 자본주의 사회에에
막스가 살 때는 굉장히 그
심했으니까 노동 차취 착취가 굉장히
심했으니까 어떤 이야기가 실상은 특정
계급에 봉사하고 그렇지 않은 대다수의
노동전 농민에게는 봉사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을 이제에 분석을 했죠.
그래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역에
쓰이는데 글쎄요. 어떤 예를 들 수
있을까 좀 제 고민을 해 봤는데
약간의 논란이 있지만 경제적 낙수
효과 그렇게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공급 측면을 강조해서 연구하는
경작자들 사이는 좀 낙수 효과가
있다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다고는
들었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로 대다수의
분들은 경제적 낙수 효과가 없다라는
말에 좀 더 부개 중심을 실는 거
같아요. 그런데 낙수 효과를
주장한다고 하는 것은 사실 그 나라의
그 사회의에
대기업
세금을
덜 내고 경제 활동을 열심히 하라고
규제를 풀어 주고 기업 활동을 활성이
해야 나라 전체가 삽니다. 맞는 말
같은데. 예. 그 이른바 큰 기업
위주의 정책이 실제로 이른바 악수
효과를 일으켜서 사회 전체에 부강으로
돌아오는가? 그건 조금 다른 말
같다고 하는 것이
적자는 분들의 주장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낙수 효과를 주장한다는 것은
마르크스가 말한 어 허위 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에 가깝다라고 판정하는
사례가 많더라고요. 그러면
이데올로기를 오늘날 막스는 그렇게
썼지만 오늘날에는 그럼 어떻게
쓰느냐? 아, 이것은
한 개인이나 사회가 누구이며 그래서
어떤 일을 해야 하고 그래서 사회에서
정책이나 사회적 과정을 진행할 때
어떠한 정책과 어떤 합의를 이끌어내야
된다고 하는 전체적인 사회에 대한
관념, 인간에 대한 관념이 있는데이
관념을
실천지향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체계적 사상 상 혹은
체계적 어떤 이념 이런 것들을
이데올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행동
지향적인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누구고 사회는 누구고 그래서 어떤
정책을 펴야 되고 어떤 사회적 합의를
이뤄야 돼라고 하는 주장이 있죠.이
이 주장을 체계화해서
실천 지향적인 강령으로 바꾸는 거
요런 것들을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 그러면 신앙하고
이데올로기를 가만히 보면 굉장히
유사한게 있어요. 아 첫째 뭐가
유사하냐? 일단 현재가 조금
불만족스럽다고 하는 얘기를 해요.
신앙의 눈으로 봤을 때 오늘날의
세계는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찬 세계가
아니에요. 내가 엄마품처럼 편안하지
않아요. 내가 나 그대로 나의
가능성을 발휘할 때 주변에 그렇게
나를 놔두지 않아요. 나는 여전히
비제 팔린 노예처럼 살고 있는 거
같아요.
그러니까 현실에 불만이 있어요.
신앙도.
그리고 이데올로기 어떤 특정
이데올로기 속에 있는 사람도 그것이
현재의 상태가 최선의 상태다라고
말하는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대부분
현재 상태가 만족스럽지 않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오늘날이 대표적인 뭐
이데올로기가 뭐 자유주의 개인의
인권과 자유를 주용해야 하는 사회주의
공동선 평등을 주용하는 그다음에
민족주의 같은 것들 우리 민족의
이익이 가장 중요하다라고 얘기하는 또
파시즘 또 뭐 그주의 극단적 어 좌파
교점은 거의 없지만 뭐 이런 것들
극단적 이슬람주의 이런 것들이에
이런 이데올로기를 따른 사람들은
현실이 만족스럽지 않아요. 그니까
우리 기독교 신앙인들도 현실이
충분하지 않다고 얘기하잖아요.
그러니까 그렇게 현실에 대해서 불만
있는게 똑같아요. 그러니까 신앙을
가진 사람이나 아니면 이데올로기 가진
사람 둘 다 모두 현실은 축분하지
않다는데 동의해요. 그거 비슷하죠.
두 번째 이상적인 세계가 있다고
하는데에 둘은 또 동의해요. 그
만약에 현실은 둘만인데 어떤 세계가
이상적인지 모르겠다.라고 생각이
없으면 신앙도 없는 거고 이데올로기도
없는 거예요. 그런데 신앙이나
이데올로기 모두 이상적 세계가 어떤
것인지 제시해요. 그러니까 현실 불만
비판 그다음에 이상적 세계가
어디다라고 얘기해요. 그런데요 불만인
세계에서 이상적 세계로 가려면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잖아요. 신앙도 실천을
말하고 이데올로기도 실천을
말하거든요. 특별히 어떤 실천을
말하냐? 자기 희생적 실천을 말해요.
공동체적
실천을 말해요.
우리가 예수께서도 우리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속에 하나님 나라 속에
살려면 우리 스스로 변화해서 그렇게
살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특정
이데올로기 있는 사람들은이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구현들 새상을
위해서 희생해야 한다고 말하거든요.
그러니까 둘 다 현실은 불만이고
현실을 비판적으로 봐 봐야 된다고
얘기하고 이상적 세계가 있다고 하고이
이상적 세계를 위해서 행동해야 하는데
희생이 불불불가패하게 따른다고
얘기해요. 둘 다 구조가 비슷해요.
그래서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은 특정 이데올로기에 노출되고
이것이 신앙이라고 착각하는 순간
신앙적 열정을 발휘하게 마련입니다.
이걸 조심해야 합니다. 그럼이 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느냐? 결정적
차이가 있습니다.
아, 기독교 신앙은 특정 이데올로기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자유주의나
자본주의나 민주주의나 공산주의나
또 파시즘이나 민족주의가 기독교
신앙을 다 담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내가 민족주의 혹은 자본주의,
민주주의를 온전히 실행하면 신앙을
실행한다고 착각해서 안 됩니다.
자신이 어떤 민족주의로서 어떤 운동을
할 때 뭐 예를 들면 일제 강정기 때
민족주의자가 민족주의 이념을
실행하고자 할 때 그걸 통해서 나는
기독교 신앙을 다 실행했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은 기독교
신자인데 민족주의자로서 이것을
실행해요. 그래도 늘 신앙인으로서
자기가
다 그것을 수행하지 못했다고 하는
신앙은 늘 이데올로기보다 크다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말을 바꾸면 나는
민족주의자라서 이렇게 하는데
어떤 사람은 다른 어 삶을 실천해요.
근데 나는 완전한 민족주의자고 완전한
기독교 신앙인이고 쟤는 잘못했다고
말할 수가 없어요. 왜냐면 신앙은
나의 이데올로기안을 안에 갇치지 않고
훨씬 더 크기 때문이에요. 이건 뭘
얘기하죠?
나의 한계와 동시에 나의 한계를
인식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관용의
태도를 기본적으로 전제를 하는
겁니다.
그리고 둘째로 어떻게 되냐면
민족주의적 이념이 완전히 실현된 것이
기독교의 신앙이 말하는 이상형이
실현된게 아니에요. 이데올로기는
인간이 그것을 할 수 있다고
얘기해요. 그러나 기독교 신앙인은
인간이 그것을 할 수 있다고 얘기하지
않아요. 우리가 최선을 다하지만이
역사의 완성은 하나님의 섭리 아래
달려 있다고 겸호히 고백해요. 그러면
하나님의 섭리 달려 있다고 겸히
고백하는 것과 인간이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어떤 차이를 갖고 오느냐?
제가 아까 민족주의라고 하는 예를
들면 민족주의라고 하는 틀에 기독교
신앙을 다 담지 못한다. 그러니까
이렇게 작은 틀에 작은 박그릇에
이렇게 큰 물이 쏟아지면 나머지 물이
옆에 있잖아요. 다른 그릇에
있잖아요. 다른 그릇에. 그러니까
내가 민족주의를 가지고 난 기독교
신앙인이고 너는 잘못된 신앙인이고
이렇게 말할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도 신앙인이라는 걸 인정해야
됩니다. 두 번째 그니까 어떤
이데올로기를 실행하는 것이 인간이
그것을 실행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아니
우리 삶의 이상은 하나님의 능력
속에서 온전히 구현돼라고 하는 것에선
큰 차이가 옵니다. 인간이 실행한다고
믿는 것은 폭력을 언제든지
정당화해요.
우리가 실행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실행하면 그뿐이에요.
그러니까 자기 반성적 태도가 현저히
줄어들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걸 하신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에 우리가 불가피하게 사용하는
폭력이 어느 선까지 있는지를 명확하게
인식하게 해줍니다. 저는 이해로
최근에 제가 아중근
의사의 그 이야기를 들고 싶어요.
이분이 기독교 신앙인이잖아요. 여기서
제가 기독교란 말할 때 개신교,
천주교 다 합한 말인데 로마 캐톨릭
신자잖아요. 이분이 전쟁 전투를 하고
나서 일본군 포로를 잡으면이 포로들을
인간으로서 포로로서 대우하고 함부로
하지 않았다잖아요. 그래서 그
부대에서 다툼이 있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포로들을 살려보내면 어떡하냐? 다
죽여야지. 쟤네들이 방금 전까지 우리
동기들을 죽인 사람들인데 왜 그
사람들을 살려서 내보냈냐? 그렇게
안중군의 부대원들하고 안중군
지위관하고 서로 싸웠다는 거
아니에요. 민족주의자는 저 일본군
일제에
군인들을 죽일 수 있습니다. 왜냐면
민족주의를 실롯하기 위해서는 저 앞에
있는 저 일본 포로들은 우리의 적
있거든요. 그러나 기독교 신앙인은 내
앞에 있는 저 일본 방금 전까지 내
동지들을 죽이던 그 일본군 포로
일본군은 포로가 된 순간 무장
해제되는 순간 더 이상 죽일 적이
아닌 거예요.
아주 극명하게 나뉘는 거예요. 이게
그니까 신앙과 이데올로기를
혼동하면 내 신앙은
민족주의와 결부되 있다. 제가 오늘
민족주의만 자꾸 얘기해서 다른 것도
얘기해야 되는데 그러면 서슴없이
죽이고 그것을 신앙으로 정당을
합니다.
911 테러가 있었을 때 이제는
오래된 얘기지만
신앙의 이름으로 테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슬람 이데올로기
극단주의 이데올로기지 이슬람 신앙은
아닐 겁니다.
그걸 구분할 수 있어야 됩니다.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은
함부로 다른 사람의 삶과 목숨을
대하지 않습니다. 폭력으로 아삭아가지
않습니다.
그것이 아주 결정적인 차이가 될
겁니다. 그래서 이데올로기는
상대적입니다.
바뀌면 얼마든지 다른 체제를 할 수
있어요. 우리의 신앙은요. 공산주의가
있기 전에 있었고 민주주의가 있기
전에 있었고 자본주의가 있기 전에
있었고 사회주의가 있기 전에
있었어요. 민족주의가 있기 전에
있었고 공산주의가 사라진 후에도
신앙이 있고 민주주의가 사라진 후에도
신앙이 있어요. 둘이
똑같은 거 아니에요.
우리나라의 문제는 뭐냐? 한국적
우리나라의 맥락에서 문제는 뭐냐?
제가 최근에 것과 결부시키면
또 민감해져서 결국 저 사람은 저렇게
얘기하고 싶었던 거야. 그럴까 봐 좀
오래된 얘기 한번 해 보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을 반공주의랑
딱 연결시키는 거예요.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공산주의 이전에도 있었고 이후에도
있을 거예요. 민주주의 이전에도 있을
거도이 이전에도 있고 이후에도 있을
거예요. 우리 신앙은 어떤 한 틀이
다 담지 못해요. 근데 이북에 있던
기독교 신앙이 인의 2 정도가 아
이북에 있었다 그러잖아요.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온
후에 박해를 당했어요.
제가 반공주의하고 신기독교 신앙하고
구분하라고 이렇게 말씀드리면
저 사람 좌파라 그럴 텐데 누구도
그렇게 저한테 얘기할 수 없습니다.
저희 저희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부 다
평양이 있었던 분들이고 실제로
평양에서 박해받았던 분들이에요.
에피소드를 다 말씀드릴 순 없지만
저희 이제 할아버지 때
공산주의자들에게 핍박받은 사연들
있습니다. 원람하고 결국 돌아가지
못한 채로 저희 아버지 안식하셨고
굉장한 방공주의자였어요. 저희
아버지도
그건 뭐 다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그러니깐 어 제가 뭐 순진하거나 뭐
이래 가지고 방공주의하고 전혀
상관없다 그런 생각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그러나 방공주의는 곧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반공주의의 역사가 기독교 신앙하고
갈부돼서 어떤 비극이 일어났습니까?
우리가 서북 청년단 얘기하는데
서북 청년단 얘기하는데 만약에
안중군처럼 신앙과 이돌기를 구분할 줄
알았으면
기독교 신앙인인 청년들이 그렇게 하진
않았을 거예요.
그 고통스러운 이야기입니다.
미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핍박을 받고 내려온
분들이 그 얼마나
울분에 찾겠어요.
저희 아버지가 아주 금 저 아주
철저한 기독교 신앙이었인이었는데
그니까 몸에는 절대 이런저런 문신간
안 하죠. 근데 어렸을 때 아버져
보니까 여기 무슨 문신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글자를 읽을 수가
없어요. 왜냐면 글자를 다 지우려고
노력하셨던 거 같아요. 그래서 이게
무슨 글자냐고 했더니 나중에 얘기해
주시더라고. 반공이라고 써 있었어요.
근데 그것을 그 글자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지우신 거예요. 부끄러우신
것죠. 그 살아남기 위해서 혹은
굉장히 안에 울분이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반공주의는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과 그것을 연결하는
순간 우리는 말할 수 없는 폭력을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게 됩니다.
그런 어리석은 일을 다시는 해서 안
됩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에
제가 성경과 연결해서 해 보려고
해요. 우리나라에 여러 이데올로기들이
있어요. 그것과 신앙을 착각해서 안
돼요. 나쁜 사람들이에요. 기독교
신앙은이 이데올로기라고 등치시키는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이에요.
이게 어떤 일인지 제가 성경을 통해서
얘기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서에 보면 우리가 다 자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나옵니다.
이게 이데올로기와 신앙을 예수님께서
구분해 주신 이야기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음악]
우리가 요한복음서 봐도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께서 대화하신 그 장면
사마리아 여인이 그럽니다. 유대인은
사마리아 사람과 상정도 하지 않는데
왜 외관 남자 유대인이 당신 나랑
나한테 말을 겁니까? 그렇게
얘기하죠. 둘 사이가 얼마나
나빴느냐? 매우
이스라엘이 있다가 다윗이 있다가
솔로몬이 지혜왕으로 알려졌지만 진짜
폭군이잖아요. 폭군이라서 북
이스라엘과 남녀가 갈렸단 말이죠.
나쁜짓는 많이 했단 말이죠. 솔로몬이
솔로몬을 지혜의 왕으로만 알고 있으면
안 되죠.
북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게 망하고
722년이라고 기억하는데 남 유다는
바빌로니아에게 망하잖아요.
그 아시리아가 이주 정책을 썼단
말이죠.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을
데리고 왔어요. 그러니까 북 이스라엘
이쪽에는
남유다 사람들이 생 생각할 때는
혼혈족이 탄생한 거예요. 여기저기
이주민들이랑 하고. 그리고이 아래는
주전 기원전 586년 신바빌로니아에게
망해서 그 바빌론 도시 같은 대로 다
끌려갔잖아요. 많은 그 중요한
유대인들이. 이때 페르시아의 키루스
개혁교제는 고레스라는 사람이 보내서
돌아오잖아요.
그때이 사마리들 살던 사람들이 성전
짓고 성벽 샀는데 도와 줄게 하고
협력을 제안했는데 거절해 버리잖아요.
그 왜 거절했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를 들 겁니다.이
사마리아 사람들은 뭐 혼혈족이기
때문에
신앙을 저버려서 혼합주의적 성격을
갖고 있어서 그래서 그 사람들하고
섞이면 어 하나님의 신앙이
혼합주의적이 되고 또 혼혈이 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못 지키고
그러니까 그런 얘기들이 있죠.
구역학자들하게 한번 물어보면 여러
이야기를 합니다. 뭐냐?
예루살렘 성벽을 짓고 성전을 짓는다고
하는 것은
페르시아에서 허가받은 일종의
자치권이고 그 권리를 사마리아
이토창민하고 나누게 되면 자신들이
소멸될 것 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사실 신앙과 관련된 것과
동시에 자신들의 생존과 이득과 관련된
이데올로기적인 거예요. 이돌로기는
특정 계층이나 특정 집단의 이익과
연결된 거거든요.
또이 귀한 페르시아에서 귀한
유대인들은 거기에 세금도 받쳐야 되고
페르시아에 자기 자신도 운용해야 되기
때문에 재산을 함부로 다른 사람들이랑
나누다가는
스스로 없어지고 말아요. 그러니까
자기네들끼리 결혼해서 토지 같은 걸
뺏기면 안 되는 거예요. 나중에
누구에게 유산으로 가서이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당연히
순수한 의대로 한게 아니죠. 그러니까
이권이 걸려 있는 거예요. 이권과
신앙의 정당성이 걸려 있는 거예요.
이게 무서운 겁니다. 신앙이 현실로
나타날 때 그 신앙을 왜곡하는게 늘
이권과 관련돼서 나타나거든요.
그러니까 그 둘 두 집단이 싸우게 된
거예요. 나중에 요한 힐카누스
2세인가 그리심산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그 묶었다고 하는 그 장소에 세운
사마리아 성전을 완전히 부셔
버리잖아요.
참
예루살렘 성전은 그렇게 중요하게
어기면서 사마리아 사람들의 성전을
부셔 버리니까 얼마나 화가 났겠어요?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들은 상종하지
않습니다. 서로 적대적이고 서로가
서로를 향해서 살기를 뛰고 있죠.
유대인들은 유대인 나름대로 신앙의
이름으로 그걸 정당했을 거예요.
사마리아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
나름대로 그것을 정당했을 거예요.
예수님과 사마리아 사람 대화 나누는데
여인 대화 나누는데 사마리아 사람
여인이 얘기합니다. 이미 그 신전은
없어지고
만지가 오래되 있는데 우리는 이곳에서
예배를 드려야 된다고 하고 당신들은
예루살렘 저곳에서 얘기를 예배를
드려야 된다고 하는데 어디에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라고 예수님께 묻잖아요.
그니까이 말은 단순히 정말 예배를
드려야 할 장소가 어딘가요라고 물어본
말인 동시에
누가 참된 하나님의 백성인가요라는
말도 돼요.이 말에는 신앙적인 얘기가
있지만 동시에 이데올로기가 섞여 있는
거예요. 사마리아 사람과 유대인 여기
안에 신앙을 묶고 두는 질문이기도
해요. 예수께서 말씀합니다. 여기도
아니고 저기도 아니야. 유대인들의
신앙 정치 이데올로기도 아니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정치 신앙 정치
이데올로기도 아니야. 그러면
예배드려야 할 때가 없는데 바로이
때다.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셔요.
선한 사마리아인 비우고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는데이
사람이 아마 가난한 사람 같아요.
저항하다가 강도에게 흠신 두들겨
맞았는데 옷까지 다 뺏기고 누워
있어요.
제사장이 지나가고 레위인이 지나가요.
도와주지 않아요. 왜 도와주지
않았을까? 뭐 예전에 얘기할 때는
제사장이나 내인이나 죽어가는 시체에
손되면 부정해지니까 그 일을 못
한다. 그리고 실제로 자기 친인척
외에는 제사장 외의가 잘 손되지
않죠. 그런데 그거보다 더 중요하다고
저가 제가 생각하고 다른 학자가 한
말인데
누군지 모르는 거예요. 그 사람이
내가 저 사람을 도와줘야 할
유대인인지 혹은 사마리아 사람이라면
도마 도와줘야 할 사마리아 사람인지
내 동적인지 내 의인지 알지 못하는
거예요. 왜 알지 못할까? 이데올로기
속에 있는 거예요. 유대인은 내가
도와줘야 할 이웃. 유대인이라면
자기가 사마리아 사람 죽게 놔둬도
아무 문제 없지.
옷을 벗겨 놓으니까 저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는 거예요.
[음악]
이데올로기 속에 있으면 저 사람이
누군지 모르는 거예요. 그런데
신앙 속에 있는 사람은 저 사람이
누군줄 알아요. 저 사람은 누구냐면
도와줘야 할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이에요.
신앙의 눈으로 보면 저 사람은 고통
속에서 도와줘야 할 사람인데
이데올로기와 신앙을 같이 결합해 놓은
사람 눈에는 저 사람이 누군지 모르는
거예요. 참 희한하죠. 신앙은 저
사람이 누군지 알려 주는데 신앙과
정치 이데올로기를 합쳐서 이데올로기가
더 위에 있는 사람은 고통받고 있는
저 사람이 누군지 모르는 거예요.
예수께서 유대인 청중들 앞에서 정말
마음 깊은 곳에서 분노가 일어나는
말씀하신 거예요. 너희들이 그렇게
상정도 안 하고 아주 뭐 인간 말으로
보고 방멸했으면 좋을 것 같은
바퀴벌레로 보고 없어졌으면 좋을 것
같은 기생충으로 보는 저 사마리아
사람이 신앙에 눈 뜬 사람이다.
그리고 율법 학자한테 그렇게
얘기하죠. 너도 가서 저 사람처럼
행하라.
신앙을 행하라.
율법 학자의 질부는 누가 내
이웃십니까? 그것은 이데올로기로 말할
수 있거든요. 유대인 동은 내
형제입니다. 자매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아니죠. 우리의
이데올로기는 어디까지 선을 거을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이라면 예수님의
말씀은 야 이데올로기를 버리고
신앙인으로 세상을 다시 봐라.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그런 의미로
오늘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을
겁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드릴 말씀을
마무리하려고 하는데요.
신앙을 이데올로기로 바꿔치거나
신앙과 이데올로기를 섞어서 우리의
눈을 가리는 그런 행태들을 이제 좀
그만했으면 좋겠어요.
이제 뭐 새 정부가 들어서게 됐는데
어떤 정부인지 저는 전혀 알 수가
없죠.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정치 이데올로기 때문에 신앙을
잃어버리거나 자신의 신앙을 정치
이데올로기랑 섞어서 신앙적 열정으로
특정 행동을 하거나
신앙에 의한 행동이 아니라 이올로기적
행동으로 폭력 그다음에 맹목적 증만
두셔야 한다.
신앙을 회복하시라. 왜 신앙을 믿지
않고 신앙 속에 있지 않고 이데올로기
속에서 자기의 정체를 확인하려고
하시는가? 신앙은 엄마 앞에 있는
거예요.이 세상의 근원이 사랑이라는
걸 깨닫고 그 사랑 안에 있는
거예요. 이데올로기는 우리에게 사랑
앞에 있다라고 알려주지 않고 너
외부의 적과 그리고 그 외부의 적과
내통하는 나쁜 물이 앞에 있어.
우리가 정신 바짝 차리고 외부의 적과
그 외부의 적과 내통하는 우리 내부에
있는 그 저 사람들을 타게 해야 타도
해야 우리 삶의 안전이 와 그렇게
얘기할 거예요. 거기 속으면 안
됩니다. 신앙인들은 벌거벗고 있는
사람이 유대인인지 사마리아인지
알지 못하면 행동하지 사랑을 베풀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신앙과 이르기 잘 구분하시고 우리가
새봄을 노래하며 사랑 안에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아니 아닙니다. 절대 배제하는 얘기
아니고 내 신앙 양심에 따라 투표할
거예요. 저도 제 신앙 양심에 따라
투표할 거예요. 그런데 어떤 분은
자기 신앙 양심에 따라 다른 분에게
투표할 거예요. 자. 자. 그럼
어떻게 되는가? 제 주변에 신학자들
많잖아요. 신학자이자 목사님 분들.
어떤 분들은이 후보야말로 성경적
가치간에 부합하는 인물이라고 막
주장해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서.
어떤 분은 어떤 사람이야말로 신앙에
부합하다고 다른 후보 지지하고
있어요. 열심히 두 분 쓰는 걸 제가
보고 있어요. 음. 그럼 어떻게
되는가? 어떻게 되나? 두 분의 신앙
양심에 투표할 거예요. 그럼 둘이
만나서 서로를 비난하고 공격할
거예요.
이분은 이분이 채 보지 못한 어떤
부분을 보보아 보아서 그분에게 투표한
거예요. 이분은 이분이 최 보지
못하고 덜 강조한 부분을 생각해서
이분에게 투표했어요.
우리는 서로가 다 캐치하지 못한 어떤
신앙의 부분을 보고 투표한 거예요.
자, 그럼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둘이 서로 싸워요?
우리 둘 사이에 무엇을 합의할 수
있는지, 어떤 신앙의 중요한 부분에
동의할 수 있는지를 찾아보는게 중요한
거 같아요. 그러니깐
요게 신앙이 우선돼서 정치적 견해가
다른 것을 조정할 수 있으면 신앙이
우선된 거고 정치 이데올로기도 후자
있는 거예요. 그러면 괜찮아요.
어떤 가족이 있어요. 제가 아는 어떤
가족은 선고 때마다 싸워요. 밥상
뒤집어 없는데요. 선거마다 그러면 그
집은 가족 가치보다 정치 가치가 위에
있는 거예요. 왜 그렇게 바부처럼
살아요? 가족 가치를 위에 두고 정치
이대로올로기 뒤에 둬요. 그래서 너는
누구 뽑을 거고 누구 뽑? 저희 집도
투표가 달라요.
제가 아들 아들 하나 딸 하나 있고
아내 하나 있고 남편 하나 있는데
내시 성격 전적 생각이 다를 거
아니에요. 그러면 그 사람한테
투표한다고 쟤는 내 아들도 아니야.
내 딸도 아니 그렇게 해요. 가족이
먼저 해요. 가족이 행복하고 잘
살려고 우리가 투표하잖아요.
왜? 근데 투표 때문에 가족 저
가족의 화목을 깨야 돼요. 아 이렇게
이데올로기를 후순으로 놓으면 서로
대화하고 타협할게 많아질 것 같아요.
친한 친구예요.
막 싸워요. 어 너는 말이야. 제가
실제로 매운탕치가 뒤에서 친구들끼리
막 놀다가 갑자기 소리소리 지르고
싸우기를 왜 이렇게 싸우다 가만히
들어봤더니 정치 문제 두고 싸워요.
그 막 소리 지르더니 나가 버렸어요.
어 너무 시끄러웠는데 바보들이에요.
우정을 정치 위돌르기 위해 둬야죠.
그래야 정치인들에게 안 놀아납니다.
그래야 선동꾼들에게 안 놀아나요.
정치 선동꾼들에게 놀아나면 안
됩니다. 왜 그들의 선동에 우리 더
중요한 가치를 깨요? 정치는 우정을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
정치는 가족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
우리의 신앙적 가치 우의 아래 정치를
생각한다. 그렇게 중요한 가치들을
위해 두는 생각과 버릇을 열심히
습관을 들여야 정치 선도군들이
이데올로기 선도꾼들이 우리 삶에 안
파고들어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부모 세대랑 자식 세대랑 손자 세대랑
정치에 대한 생각이 다를 거예요.
너는 서로 그것 때문에 싸워요?
안 싸워도 돼요. 자기의 삶의 경험이
달라요. 저희 아버지 부모님 세대는
다 유기와 겪은 분들이에요. 그 아주
원형적으로 거기 박혀 있어요. 저희
세대는 이런바 민주화 운동 세대예요.
그 아주 DNA 박혀 있어요. 저희
아래 제 자식 20대 중반 제 아들
딸 세대는 다른 정치 사회적 경험이
있을 거예요. 밖혀 있을 거예요.
그래서 다른 투표를 할 수 있어요.
그것 때문에 서로 싸운다고 내 아들
딸과
그리고 아들 딸 남녀 있는데 그것
때문에 서로 저 남매가 싸운다고
그렇게 하는 사람 그렇게 싸우라고
부추는 그 선도꾼들을 우리가 눈독해
보고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해야
돼요. 더 중요한 가치를 위해서
정치가 봉사를 해야지 어디 감히 정치
이데올로기가 우리의 소중한 가정을
해치려 그러는 거예요. 어 어떻게
감히 선정치 선동꾼들이 우리의
신앙인들을 서로 갈라놓고 자기가
살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을
조심해야 돼요. 더 중요한 가치를
확인할 수 있어야 돼요. 교회에서도
그 가치를 확인해 줘야지 정치
이올로기 아래 들어가서 신앙을 말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혐오해야 됩니다.
죄송합니다. 혐오란 말을 써서
강력하게 말하려고 그래서 그랬던
거예요. 혐오란 말은 취소할게요.
주의해야 합니다.
더 중요한 가치를 확인하면 선동꾼들이
우리 틈에 끼어들 틈을 두지 습니다.
[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