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말 구원 받았을까? 성육신 교리 완벽 정리ㅣ권연경 교수ㅣ잘잘법 238회
채널: 잘잘법 |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juTKgUvTrg | 길이: 25:30
요약
나는 정말 구원받았을까? 성육신 교리 완벽 정리
🎯 TL;DR
권연경 교수는 성육신을 하나님이 인간을 대신해 죽기 위해 사람이 되신 사건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예수는 인간과 같은 자리에서 연약함과 시험을 겪고도 순종하며 구원의 길을 앞서 가셨다. 그가 말하는 구원은 그리스도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자라가며 그 길을 따라가는 여정이다.
📌 핵심 논지
사람에게서 비롯된 죽음의 문제는 사람을 통해 해결되어야 한다. 그러나 죄를 지은 인간은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에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 교수는 이를 “사람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는 말과 ‘결자해지’라는 표현으로 설명한다.
예수의 대속은 소중하지만 구원의 전부는 아니다. 대신해 주심은 사람이 달라지지 않은 채 머무르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이 점에서 예수는 우리를 대표하는 분인 동시에 우리가 갈 길을 먼저 가신 선구자다.
성육신과 ‘사람을 통한’ 구원
교수는 고린도전서 15장 21~22절을 들어, 죽음이 사람을 통해 왔다면 부활도 사람을 통해 와야 하며, 아담 안에서 죽은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는다고 설명한다. 그는 그리스도가 실제 인간이 되셨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어 동물 제사가 잠정적으로 사람을 거룩하게 했다면, 더 완전한 하나님이 굳이 사람이 되셔야 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그의 답은 문제를 일으킨 것이 사람인 만큼 해결도 사람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대속에서 구원의 여정으로
교수는 예수가 죄인을 대신해 죽으셨고 그 죽음으로 용서받는다는 설명을 인정한다. 다만 이를 구원의 전부로 여기면, 자신은 달라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기 쉽다고 지적한다. 아이를 처음에는 돌봐 주지만 자라면서 스스로 걷고 먹도록 돕는 것처럼, 대신해 주심도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구원을 출발점과 목표가 있는 달리기에 비유한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출발했지만 목표를 향해 달리는 중이므로, 물러나거나 포기하지 말고 현재의 삶을 소중히 여기며 걸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와 같으면서 앞서 가신 예수
교수는 히브리서가 예수를 구원의 선구자로 그린다고 설명한다. 예수는 우리가 가야 할 길에 먼저 들어가신 분이다. 동시에 인간이 되셔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에, 그 길을 걷는 사람을 공감하고 도우실 수 있다.
그러나 교수에 따르면 공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예수는 우리와 같이 시험과 유혹을 받으셨지만 죄를 짓지 않으셨고, 고난 속에서 순종을 배우셨다. 교수는 겟세마네에서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해 달라고 기도하신 모습을 힘겨운 순종의 예로 든다. 그래서 예수는 우리의 고통을 아시면서도 그것을 이겨 내고 앞서 가신 희망이 된다.
함께 들어가도록 이끄는 분
교수는 화생방 훈련 중 가스실에서 도망친 병사의 손을 잡고 중대장이 함께 다시 들어갔던 경험을 소개한다. 그가 상상해 본 ‘중대장이 훈련을 대신 받는’ 경우와 달리, 실제로는 병사가 중대장과 함께 견디고 나왔다. 교수는 이 장면에 빗대어, 예수가 우리가 못 하는 부분을 대신하시면서도 결국 우리가 가야 할 길을 갈 수 있게 이끄신다고 설명한다.
결정적 발언·반론·핵심 용어
- 결정적 발언: “사람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 교수는 또 예수를 우리의 ‘대표 주자’이자 ‘선두 주자’라고 부른다.
- 반론: “꼭 사람이었어야 될까?”라는 질문에, 교수는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셨다고 답한다.
- 핵심 용어: 성육신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심, 대속은 예수가 우리를 대신해 죽으심을 가리킨다. 선구자는 우리가 가야 할 구원의 길을 앞서 가신 예수를 나타낸다.
자막 원문 (참고)
Kind: captions Language: ko 그러면 왜 성경은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그렇게 강조하는 걸까? 뭐 한마디로 말하면 사람만이 사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다시 말 사람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라고 표현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자 해지 원칙 묶은 놈이 풀어야 되는 거니까 문제를 일으킨 것이 사람이라면 그 해결도 사람이해야 되는 거죠. 우리 성령 주신의 교리는 단순히 우리 대신 돌아가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말로는 우리가 다 담을 수 없는 훨씬 더 깊은 진리가 사실 담겨 있는 것이고 우리를 정말 참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그 계획의 가장 중요한이 일부가 바로 하나님이 직접 사람이 되어서 우리 가운데 오신 거였고 [음악] 예. 그렇죠. 사실 성육신이라고 우리가 부르는데 이건 기독교의 가장 독특한 교리 중에 하나죠.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이야기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서 사람을 구원하는 이야기인 건데 기독교는이 하나님이 사람이 되는요 과정이 사실은 구원의 가장 핵심적인이 절차였다고 얘기를 하거든요. 그럼 왜 하나님이 사람이 되졌을까 하는 질문 우리가 당연히 하게 되는데 일단 뭐 기본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얘기는 사람이 죄를 지었으니까 사람이라 숙제할 수 있다. 근데 사실이 죄인 당사자가 그걸 해결할 수 없으니까 하나님이 대신 사람이 되셔서 그걸 해결해 주신다 하는 그런 얘긴데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으로 와서 그 죽음을 대신 죽었고 우리는 그 죽음 덕분에 이게 무죄 방빈이 된다. 그런 얘기죠. 한편 생각해 보면 꼭 사람이었어야 될까 하는 질문이 여전히 남죠. 왜냐면 우리 구약 성경에 보면 기독교의 관점에서는 그게 어느 정도는 잠정적인 조치긴 하지만 동물의 제사가 사람을 거룩하게 했단 말이죠. 그러면 되지 않을까? 게다가 사람보다 못한 동물도 그런 속죄 효과가 있는 거라면 근데 사람보다 훨씬 더 나아신 더 완벽한 존재이신 신이 만약에 이게 사람을 위해서 죽는다면 훨씬 더 확실한 효과를 낼 거다라고 생각해할 수 있죠. 근데 굳이 사람이 됐었으면 될까? 뭐 한마디로 말하면 사람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얘기죠. 사람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라고 표현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멋진 표현은 아니지만 결자 해지 원칙이라고 지금 그냥 한번 불러보기도 하는데요. 묶은 놈이 풀어야 되는 거니까 문제를 일으킨 것이 사람이라면 그 해결도 사람이 해야 되는 거죠. 바울으로 말하자면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이제 21절 22절에서 이렇게 얘기하죠. 죽음이 사람 때문에 왔다면 사람을 통해서 왔다면 부활도 사람을 통해서 와야만 된다. 아담을 통해서 모든 사람이 죽었던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라고 얘기하거든요. 그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얘기가 결국은 한 인간이 되신 그리스도를 얘기하는 거죠.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왜 꼭 인간으로 오셨어야 했는지 알아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예수님이 우리 대신 돌아가셨다는 잘 알려진 말씀의 진짜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오해하고 있었던 부분도 있으니 잘 들어 주세요. 우리 교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이미지가 사실 십자가인데요. 우리가 십자가에 애착을 갖는 건 좋은데 어떤 부분에 우리가 주어 집중을 하냐면 십자가에 달리 돌아가신 예수님은 죄인인 나를 대신해서 돌아가신 분. 그리고 대속이라는 아이디어에 우리가 집중할 때가 많습니다. 나는 죄인이지만 나 대신 예수님은 돌아가시고 그 죽음 때문에 내가 용서되고 그래서 내가 구원받게 된다는 얘기를 하는 거죠. 이 대속이 그래서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아이디어가 되는데 소중한 건 좋은데 그렇다고게 전부가 아니거든요. 일부분 이야기를 우리가 전부를 자꾸 만들고 싶어요. 왜? 대신해 주면 다 좋으니까. 근데 대신해 주는 것이 해답일까 하는 질문을 우리가 던지면 사실 생각처럼 간단하지는 않죠. 인간의 경험을 좀 생각해 봐도 좋을 것 같은데 대신해 준다는게 답이 될 때도 있지만 어느 시점이 되면 대신해 주는게 사실 방해가 될 때가 많죠. 아이가 잘할 때 생각해 보면 어릴 때는 아무도 못 하니까 모든 걸 다 해 주잖아요. 사실은이 엄마 접하는 것도 못 하니까 그것도 도와주고 근데 모든 걸 다 해 주다가 조금씩 애가 잘하면서부터는 이제 스스로 하려는 경향이 생겨나면서부터 스스로 걷고 스스로 밥도 먹고 점점 하게 되죠. 그러니까 이게 대신해 주는게 이게 그냥 평생 그렇게 살자가 아니라 어느 시점이 되면 자기 두 발로 서서 자기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될 수 있게 만들어 주기 위한 조치였던 거죠. 사실 우리 복음도 그런 면이 있거든요. 예수님이 우리 대신해 주셔야 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어요. 우리가 우리 죄로 잘할 순 없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해 주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사실 도치에 가까운데 우리는 대신 죽어 죽어서 이렇게 우리 죄를 사여 주는 그게 구원의 전부라고 말하고 싶은 거잖니까. 그게 우리의 좀 실수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종종 나는 잘하지 않은 채로 있고 나는 달라지지 않은 채로 있고 그냥 천국에 가는 그런 그림을 그릴 때가 있어요. 그니까 나는 엉망인처럼 그대로 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힘입어서 천국에 들어가는 이게 이제 구원에 대한 혹은 하나님에 대한 심각한 오해가 사실은 깔려 있는 건데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착각에 가까운 거죠. 이걸 제가 이렇게 그냥 편하게 얘기할 때는 이걸 믿음이 아니고 도둑놈심보다 그렇게 제가 이렇게 표현을 하는데요. 우리는 마치 그것이이 복음의 약속인 것처럼 오해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생각할 때 구원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누리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열심히 달려가서 사실 쟁취하는 것으로 얘기할 수도 있거든요. 그러면서 우리가이 구원을 우리가 걸어가야 할 여정으로 생각하는 습관도 굉장히 필요할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은 특히 바울도 그렇고요. 히브리스 같은 경우도 그렇고 달리기 그림을 사실 되게 좋아합니다. 왜냐면 이게 출발한 지점이 있죠. 우린 분명히 출발했고 그다음에 목표 지점이 있겠죠. 우리는 출발해서 목표 달리고 있는 중인 거죠. 이게 그리스도인의 현실을 가장 잘 나타내는 그림 중에 하나가 되는 거죠. 내가 구원의 여성을 달리지 않고 목표 이룰 수는 없잖아요. 내가 애써서 달리지 않은 채로 구원에 도달할 수는 없는데 우리는 사실 이렇게 논리적인 이게 아주 제주를 발휘해서 내가 가지 않고도 도달에 있는 그런 그림을 우리가 쉽게 그린단 말이죠. 도둑 신보에 가까운 장. 그러면이 구원의 여정을 생각할 때 우리가 생각하는 그리스도는 어떤 분인가? 우리 성경이 가르쳐 준 그림 중에 하나. 특히 히브리서가 가르쳐 준 그림 중에 하나가 선구자 그리스도라는 그림입니다.이 선구자 그리스도의 그림은 히브리서 아주 독특하게 우리에게 보여 주는 건데 2장 10절에 보면 이제 우리 예수님을 얘기할 때 구원의 선구자라고 부르기도 하고요. 우리 개혁 계정에는 구원의 창자라고 번역이 되겠습니다. [음악] 그리고 12장에도 이제 달리기 흐름 열심히 달려가자 얘기하면서 우리 믿음의 선구자 이시고 믿음의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얘기하는데 믿음의 선구자이신 거죠. 그리고 완성자이기도 하고 그다음에 6장에서도 또 이제 얘기하는데 히브리서에서 우리 구원을 얘기할 때 이제 어떤 식으로 얘기하냐면 구약의 이제 상징을 가지고 와요. 구약의 제사를 드리는데 특별히 이제 대속죄조일 같은데 보면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데도 있지만 아무나 못 들어가는데도 있고 대제사장만 가는데도 있고 근데 대제사장도 1년에 한 번만 갈 수 있는 평소에 못 들어가는 그게 이제 지성소거든요. 그게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자리라고 얘기합니다. 근데 그 영광의 자리로 들어가는 걸 구원으로 설명을 해요. 근데 우리가 가는 길이 없어요. 근데 예수님이 그리로 앞서가셨다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앞서 가신 분 예수. 헬라말 한번 써 보면 프로드로모스라는 표현인데요. 프로가 이렇게 앞이라는 뜻이죠. 영어 단어에도 많이 나오는 드로모스가 이렇게 달려간다는 뜻입니다. 이게 영어 단어에도 또 나옵니다. 그러니까 글자 그대로 앞서서 달려가신 분이라는 뜻인데 그 그건 이제 우리말로는 선구자가 되겠죠. 우리 선구자니까 사실은 우리도 앞서가는 분인 거죠. 내가 가야 될 길인데 그 길을 앞서가는 분입니다. 그 한편으로는 우리와 똑같은 분이에요. 히브리서가 강조하는게 두 가지면 첫 번째는 우리와 똑같다는 거잖니까. 사실 내가 가야 되는데 내가 못 가요. 근데 그걸 도와줄 짓이려면 내가 있는 대로 와야 도와줄 수 있는 거죠. 그까 나와 똑같은 사람이 되지 않으면 나은 상관없는 존재이니까. 사실 뭐 하나님이 굉장히 훌륭한 일 하셨다고 그 나한테 무슨 격려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나는 여전히 못 하는데. 근데 나하고 비슷한 사람이 똑같은 일 했다 그러면 그거는 어 걔가 했다고 그럼 나도 하는 생각 할 수 있겠죠. 그것처럼 히브리에서는 일단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는데 정말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셨다는 걸 무지무지 강조합니다. 우리 구원을 얘기할 때이 부분 우리가 잘 생각을 하지 않는데 실제로 예수님이 혹은 인간이 되어서 우리의 연약함을 깊이 공감한다는 사실이 굉장히 중요한 이게 중요한 구원의 요건으로 이렇게 제시가 되고 있습니다. 바로 그런 예수님이니까 우리가 예를 들어 사고 쳐주님 앞에 갔다 그러면 예수님 우리를 보면서 고개를 잘라쩔래 흔들면서 내가 도대체 이해를 못 하겠다라고 얘기하시는게 아니라 그런 우리를 보면서 오히려 우리보다 더 마음 아파하실 수 있는 그런 분으로 우리에게 계신다는 얘기를 강조하는 거잖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다는 게는 바로 그런 부분이 있는 거잖아. 우리와 똑같은 자리에 와야만 우리의 구원이 시작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나와 똑같은 자리에 오셨다. 근데 바로 이런 면에서 제가 이제 가끔 뭐 설교할 때 사실 뭐 예를 들기도 하는데 어느 교회 젊은 부부가 있었어요. 근데 젊은 부부가 있는데 이제이 어릴 때부터 자랐던 교회에서 자랐던이 청년들 부부라 이게 사실 교회 이제 장로는 이런 분들이 다 어릴 때부터 아기 때부터 막 기워하면서 키웠던 그런 근데 이제이 부부가이 애를하고 키우다가 아기가 일찍 죽었어요.이 이 젊은 부부는 시리에 빠져서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는 거잖아요. 왜냐면 지금까지 너무너무 성실하게 정말 교회 정화 하려고 애를 썼고 그렇게 살았는데 하나님 아기를 데려가셨다는 생각을 극복을 못 하는 거죠. 그리고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는 거죠. 목사님이 찾아와도 안 되고 어떤 수로도 사실은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 교회 한 장로님이 이제 그 부를 찾아갑니다. 근데 그 장로님이 어떤 분이냐면 장로님도 자식을 먼저 보냈던 그런 아픈 경험을 가진 장로님이에요. 그 장로님이 갑니다. 가서 뭐 하냐? 아무 말도 안 하죠. 그냥 안아 줍니다. 안아 주면서 나도 안다 그러면서 같이 웁니다. 그냥 근데 이게 재밌게도 나도 안다 그러면서 품어주고 같이 울어 주는 그게이 두 부부한테는 해결의 실마리가 되는 거죠. 그때부터이 두부가 마음이 풀리기 시작하고 같이 엉울면서 비로소 빠져나오기 시작하는 터널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하는 거예. 바로 이런 치유의 관계가 우리의 삶에 필요한 거 아닙니까? 그 우리의 구원의 여정이라는게 밖에서 그냥 뭐 이렇게 집어 올리는게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가 이런 구원의 여정 속으로 사실은 이렇게 들어가야 되거든요. 그러려면 우리를 그 여정 속에 계속 견딜 수 있게 해 주는 이런이 대제사장 같은 분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아시는 분 공감하시는 분이 필요한 거죠. 그래서 히브리서는 우리 사람이 되어서 우리와 똑같이 되신 예수님을 많이 강조합니다. 근데 또 한 생각하면 우리와 똑같기만 하다고도 해결이 되는 건 아니죠. 우리와 똑같은 사람 주인에 많이 있는데 그 사람이 우리를 구원할 순 없잖아요. 그래서 또 한 가지 얘기는 우리와 똑같지만 또 우리와 또 다르다. 우리와 똑같이 자 시험을 받고 똑같이 유혹을 받았지만 우리와 달리 죄가 없으시다라고 얘기합니다. 죄가 없다는 것은 처음부터 존재가 달랐다는 뜻이 아니라 죄를지지 않았다는 뜻이죠. 그럼 다르게 말하면 우리는 시험 받으면 사고 치고 그러는 경우가 많은데 예수님은 시험을 받으면 오히려 그 시험을 이렇게 실패한게 아니라 오히려 그런 시험과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웠다고 얘기합니다. 제가 신약 성경에서 가장 과격한 구절 중에 하나라고 종종 얘기하는데요. 순종을 배웠다는 표현인 거죠. 예수님 순종을 배웠다는 얘기는 안 배우면 모르는 거죠. 배우니까 아는 거죠. 입니다. 제가 피아노를 못 치는 건 안 배워서 그렇고 헬라로 읽을 줄 아는 건 배워서 그렇고 그런 것처럼 예수님이 순종을 배웠다는 얘기는 처음부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서 순종하도록 프로그램이 짜여졌는게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조건 속에 있었는데 예수님은 거기서 순종하셨다는 거죠. 그 시험을 이기고 순종하셨고 그래서이 히브리서가 강조하는 것처럼이 땅에 계실 때에 눈물과 통곡으로 아버지께 기도하면서 삶을 살았다고 그랬는데 그건 순종의 그 행보였던 거였던 거죠. 우리가 겟만의 동산 이야기에서 보는 것처럼 사실 인간적으로는 죽기 싫은 마음이 앞으니까이 잔을 나에게 지나가게 해 달라라고 기도하지만 근데 금방 내 생각대로 내 뜻대로 하지 말고 아버지 뜻대로 해 달라라고 기도하셨던 그런 분이나 우리는 많은 경우에 그냥 내 뜻대로 하고 끝나잖아요. 근데 예수님 거기서 내 뜻대로 하지 말고 아버지 뜻대로 하게 해 달라라고 기도하셨던 우리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그 기도를 세 번 반복하신 걸로 되어 있습니다. 그 얘기는 그만큼 투쟁이 힘들었다는 거죠. 그런 힘겨운 투쟁을 이기면서 예수님이 순종하셨고 비록 그렇게 순종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의 사실 토대가 될 수 있었다고 얘기 하는 거거든요. 이게 공감하는게 굉장히 중요하지만 공감으로 끝나는게 아니었다는 거죠. 이제 제가 요거 이렇게 설명할 때 이제 또 다른 예를 드는데 앞에서 얘기했던 그 젊은 부부 얘기는 사실 실제 얘긴데요.요 얘기는 제가 한번 상상해 보는 겁니다. 그 교회 다른 집사님이 한 분이 계셨는데 그 집사님도 사실은 이렇게 아이를 잃어버린 슬픔을 이렇게 겪은 그런 분이에요. 근데 그 집사님 같은 경우에는 아이를 잃고 나서 굉장히 어려움에 빠졌거든요. 되게 부부들 보면 아이를 잃고 나서 부부가 아주이 굉장히 심한 갈등을 겪는 경우가 많고 그기 때문에 이원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이 집사님이 그랬던 거죠. 그러니까이 부부가 서로 힘들다 보니까 서로 말을 막하게 될 때도 있고 한마디 잘못하면 끝장나잖아. 애 좀 잘 돌보지 그랬냐 이런 말 잘못해 가지고 박살려고 막 그러잖아요. 그것처럼 그런 상황에서 부부가 갈등을 겪고 슬픔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술을 마시니까 이제 점점 심해지고 중독이 되고 직장도 잃고 결국 이혼하고 그리고 서울역에 노숙자가 됐어요. 노숙자로 있는 중에 자기가 어릴 때부터 아끼던 청년 부부가 아이를 잃어버렸다는 소식을 듣게 된 거예요. 그러면서 자기가 가서 한번 위로를 해 줘야 되겠다고 생각이 나서 그 집을 찾아갔어요. 현관문을 열었는데 그 집사님이 노숙인의 신분으로 문 앞에 나타났어요. 그럼이 젊은 부부가 보기에 그게 위로가 됐을까? 아니면 고통이었을까? 위로가 됐다고 아무도 생각 안 하겠죠. 왜냐하면 자기들이 가장 피하고 싶고 가장 무서워했던 그 결과를 지금 눈앞에 보고 있는 거니까. 장로님이 위로가 됐던 이유는 그걸 이기신 분이니까 공감을 하면서도 실패한 사람은 위로가 안 되는 거죠. 우리 무서운 거죠. 그러니까 그것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아픔을 잘 이해하시지만 동시에 우리의 연약함을 극복하신 분이어서 우리에게 희망이 되고 우리 구원의 사실은 이렇게 토대가 될 수 있었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나와 똑같은데 하지만 나와는 달리 순종을 배우셨던 분. 그러면서 영광을 향한 여정을 달려가셨던 그 예수를 바라보면서 나도 이제 그 예수님한테 희망을 걸고 내게 주어진 구원의 길을 달리는 것. 그게 하나님이 사람에 대해서 우리에게 오신 이유라고 설명을 합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공감하실뿐 아니라 이겨내시고 이끄시는 선구자 예수님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예수님을 바라보고 따라가는 신앙생활은 어떤 모습일까요? [음악] 근데 이런 얘기가 좀 더 우리에게 이제 와닿하려면 일단 우리의 삶이 중요하다는 사실으로 조금 더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 은혜 얘기하면서 우리의 삶이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하는 경향이 있어요. 근데 사실 우리의 삶 자체가 구원의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는 여정이라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달리다가 그 목표 이루지 못하는 그런 일이 없어야 되잖아요. 약속하신 안식이 있는데 그게 도달하지 못하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지금은 잘 달려야 되는 거잖니까. 그래서 신약 성경은 물러나지 말자, 포기하지 말자 하는 얘기를 하면서 성도들을 계속 동료합니다. 근데 우리는 종종 당장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서 삶의 책임을이 회피하는 그런이 습관들이 좀 이렇게 있는 거 같아요. 재판할 때 보면 소위 평소에는 말짱하던 사람들이 재판하게 되면 갑자기 아픈 척하는 사람들 많죠. 뭐 휠체어 타고 나타나기도 하고 뭐 정신병 약 먹는다고 이렇게 둘러기도 하고 그러면서 형을 이게 낮추려고이 형을 낮추는 방법이 뭐냐면 자기를 바보 만드는 거죠. 그러니까 자기를 더 못난 사람으로 만들어서 책임을 피하는 거죠. 참 못난 거죠. 근데 우리도 사실 그러고 싶은 거니까 나는 늘 못하는 사람으로 남아 있으면서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만 힘 있고 싶은 그런 유혹에 있게 받을 때가 많단 말이죠. 근데 그게 사실은 해답이 되냐면 해답이 안 되는 거죠. 아까 제가 아이 잘하는 얘기를 했는데 아이가 조금씩 크면지가 하고 싶은게 많아지잖아요. 밥도 못 먹다가 자기 손으로 먹고 싶어 하잖아요. 근데 처음에 못 먹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먹여 주다가 근데 자꾸 먹고 싶어 해요. 그죠? 먹게 하잖아. 근데 좀 지나면 먹잖아요. 근데 그걸 보기가 안타까워서 엄마가 너 어차피 못 찾잖아. 마 내가 먹여 줄게. 그러고 평생 먹여 주기만 하면 그럼 그게 그 아이에게 구원이냐면 그 아이 인생을 망치는 거잖. 내가 제대로 된 인간들을 자아야 되는데 그걸 못 하게 하는 거잖아요. 그것처럼 우리가 구원을 생각하면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자라가야 되는데 구원의 여정을 가야 되는데 그걸 우리가 하기가 힘들다는 생각이 드니까 안 하는 길을 자꾸 모색하는 거죠. 그게 뭐냐면 나 못 해요. 대신해 주세요.라는 얘기만 자꾸 하고 싶은 거잖니까. 근데 성경은 그것이 구원의 길이라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일단 우리는 우리의 삶을 소홀하게 이기지 않는 법, 우리의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법을 좀 배웠으면 좋겠다는 거죠. 하나님 우리한테 넌 못하니까라고 얘기하시는 법이 없는 거죠. 너는 할 수 있고 해야 돼. 왜? 그게 너의 원래 본래 모습이니까. 너는 나의 자녀가 돼야 돼라는 욕심을 부리시는 거잖아. 그 그림을 그려 놓고 우리가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우리를 계속 동료하시는 거지가. 우리가 그 목적제 도달를 걸 생각하면서 우리보다 우리에게 와서 나와 똑같은 존재가 되어서 그 길을 한걸음 먼저 가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그 길을 따라가는 것 그것을 이렇게 선구자 예수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바울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바로 그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해 가는 빌립보에서 사는 얘기죠. 그런 그림이 나올 겁니다.이 여성을 앞서가신 분을 히브리서는 선구자 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근데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할 때 십자가 그림을 너무 이렇게 일방적으로 생각하면서 우리 예수님을 우리의 대표주자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많이 있어요. 근데 대표주자이기도 하죠. 근데 동시에 예수님은 우리의 선두 주자이기도 한 것이죠. 우리가 못 가니까 대표 주자이긴 하지만 결국 우리도 가야 되거든요. 그니까 우리의 선두 주자가 되어서 우리의 길을 먼저 가신 분. 그리고 우리가 그 길을 따라가는 거예. 바로이 부분에서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죄를 사해 주시는 그런 분일뿐만 아니라 우리가 가야 할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 그러면서 우리 구원의 선구자이시기도 하다 하는 이야기를이 신약 성경이 들려 줍니다. 바로이 예수를 바라보는 것이 믿음이고이 예수를 바라보면서이 예수님에게 시선을 놓지 않고이 뛰어가는게 구원의 길이라고 얘기하죠. 히브리서기처럼 우리 히브리서 3장에 보면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이런 표현이 나오거든요. 그다음에 12장에도 예수를 자세히 바라보자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그러니까이 선자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우리가 우리의 구원의 길을 걸어가는 그 그림을 머릿속에 만들라는 거죠. 바로 그러면서 신약 성경은 왜 예수님이이 사람이 되어서이이 땅에 오셨는지를 설명을 해 줍니다.이 우리가이 구원의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거잖니까. 제가 이렇게 이런 말씀드리면서 가끔씩 어 훈련소에 있을 때 제가 겪었던 일을 이렇게 일화로 이렇게 뭐 이렇게 소개를 하고 하는데요. 제가 훈련소에 있을 때 제일 마지막에 했던 훈련 중에 하나가 화생방 훈련이었습니다. 이게 가스 마시는 훈련이거든요. 어떻게 하냐면 가스 실에 이제 들어가는 건데 들 들어가기 전에 엄청 굴려요. 그다음에 이제 방동면 쓰라 그럽니다. 그 방동면을 쓰면 숨이 잘 안 쉬워지거든요. 안 그래도 숨 차 죽겠는데 방정을 쓰라 그러니까 이제 숨을 못 거의 못 시 이렇게 막 하면서 이제 숨을게 힘들게 힘들게 쉬워요. 그런 상황에서 가스 실로 들어가라 그래요. 근데 들어가서 뭐 하냐면 또 뛰어요. 한 5분을 또 뛰게 합니다. 그럼 이제 막 숨이 차서 미치는 거니까 그 순간에 방동면을 벗게 합니다. 그러면 박혀 있는 가스가 그 방에 차 있는 가스가 바로 들어오는 거죠. 그럼 그때부터 제 미치는 거죠. 견탄 가스하고도 좀 달랐던 거 같고요. 하여튼 이렇게 매습범과 하여튼 고통스러움이 좀 이렇게 굉장히 심했던 근데 실제로 바닥에 보면 토해 가지고 막 그랬던 그때 바닥에 막 있고 그러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이렇게 방동면 벗어 놓으니까 막 어쩔 줄을 모르는 거 어떤 뒹그고 낮짜빠지고 난리가 나요. 근데 그러다 보니까 이제 밖에 튀어 나가고 싶잖아. 근데 박해는이 밀면 나갈 수 있는 문이긴 한데 이게 조교네 명이 문을 딱 맞고 있습니다. 튀어나가면 안 되니까. 무슨 일이 벌어졌냐면 그중에 한 놈이 얼마나 괴로웠을까요?네 네 명이 막고 있는 그분을 밀치고 밖으로 도망갔습니다. 가스 훈련한 그 주변 다 논뚜렁이었는데 그 논뚜렁 막 도망가고 조개들이 가서 이렇게 5분인가 지났으니까 잡아왔더라고요. 보통 그럴 때 이제 박살이 나거든요. 엄청 얻어맞고 난리가 나야 되는데 무슨 생각인지 중대장이 일어서더니 그 친구를 따로 오라고 해서 불러요.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소리를들을 수 없는 것으로 데리고 가요. 가서 둘이 한참을 얘기를 하는 거지니까 우리 이제 궁구해서 미치고 그 나중에 무슨 일이 벌어졌냐면 중대장이 그 충에 손을 잡고요. 방동면 안 쓰고 가스실로 들어갔습니다. 우리가 깜짝 놀랐죠. 그니까 그리고는 한참 있다가 둘이 손 잡고 나오더라고. 근데 그 장면이 그때 둘이 손잡고 나올 때 우리 모두가 우리도 모르게 이어서서 박수 쳤어요. 그 장면이 지금도 생생한데 그걸 가지고 제가이 얘기를 생각을 해 보는 겁니다. 그 중대장이 그 친구에게 무슨 얘기 했을까? 한 가지 시나리오. 너 못 하냐? 못 하겠습니다. 해. 주어도 못 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내가 대신해 줄게.라고 라고 얘기하고 중대장이 대신 가스실로 들어가 준 거예요. 만약에 그랬다면 그게이 친구에게 구원이었을까? 아니면 확인 사설이었을까? 확인 사살이 가까웠겠죠. 근데 중대장은 그러지 않고 아니 너 해야 돼. 네가 안 가고는 안 돼. 네가 해야 되고 할 수 있고 못 하겠냐? 죽어도 못 하겠습니다. 그랬을 때 중대장이 어때요? 내가 같이 할게.라고 라고 그 친구가 손을 잡고 한걸음 앞서서 그 친구를 이끌고 들어간 거예요. 근데 결국은 견디고 같이 나왔죠. 계속 손을 잡고 있었겠죠. 나올 자도 손 잡았으니까. 결국 손잡고 나왔습니다.이 [음악] 중대장은이 친구의 연약함을 자기 연약함으로 탐은 거죠. 바로 그것을 통해서이 친구는 중대장의 승리를 자기 승리로 만들 수 있었던 거죠. 대신해 주는게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 대신이라는 것은 결국이 친구 역시 그 가스실을 견딜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그런 대신이었던 거죠. 그러면서 우리 선구자 예수님의 그림이 바로 그겁니다. 우리가 못하는 부분을 대신 해 주는 면이 있긴 하지만 결국 그것은 우리가 해야 할 것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그리고 그걸 우리가 못 하니까 한걸음 앞서서 우리와 똑같이 그것을 겪어 가시면서 우리가 따라할 수 있도록 하시는 분. 그게 바로 성구자 그리스도의 그림이고 바로 이런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오셨다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 성령 신의 교리는 단순히 우리 대신 돌아가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말로는 우리가 다 담을 수 없는 훨씬 더 깊은 진리가 사실 담겨 있는 것이고 우리를 정말 참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그 계획에 가장 중요한이 일부가 바로 하나님이 직접 사람이 되어서 우리 가운데 오신 거였고 그래서 우리의 길을 앞서 가신 거였고 그래서 우리가 사실이 선구자 되신 그리스도의 그림을 우리 마음속에 좀 더 선명하게 새기고 있다면 오늘 우리가 걸어가는이 걸음 하나하나가이 선부자 예수의 뒤를 따라가는 구원의 예정이라는 걸 기억하는게 되는 거니까 훨씬 더 생생하고 의미 있고 훨씬 더 건강한 삶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 볼 수 있을 것 습니다. [음악] 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