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김기석 목사가 알려주는 첫 번째 인생 레슨: 주어진 트랙을 벗어나면 보이는 것들ㅣ잘잘법 240회
채널: 잘잘법 |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3tn7g5gMgxk | 길이: 16:01
요약
주어진 트랙을 벗어나면 보이는 것들
🎯 TL;DR
김기석 목사는 성적, 연봉, 집의 크기처럼 측정 가능한 성취로 자신을 평가하면 삶의 가치를 놓치기 쉽다고 말한다. 사람마다 출발 조건이 다른 만큼 남이 정한 성공의 트랙에서 밀려났다는 이유로 자신을 실패자라 여길 필요는 없다. 주어진 조건을 받아들이면서도 자기 삶을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며, 타인에게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데서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이야기다.
📌 핵심 논지
세상은 업적과 성취로 자신을 입증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화자는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그 기준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고 본다. 훗날 하나님 앞에서 받게 될 질문도 “세상에서 어떤 업적을 이루었느냐”보다 “세상에서 어떠한 사람이었느냐”일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자신이 타인 앞에서 어떤 존재로 살아가는지가 중요하다.
서로 다른 자리에서 시작하는 삶
사람은 건강, 장애, 능력 등 서로 다른 조건에서 태어난다. 그런데 모두를 같은 기준으로 평가하면 삶이 고단해진다. 화자는 숲의 씨앗을 예로 든다. 씨앗은 척박하거나 햇빛이 부족한 자리에 떨어져도 그 자리를 옮길 수 없다. 그곳에서 때를 기다리고, 물과 햇빛을 얻으며 싹을 틔운다.
그는 바꿀 수 없는 삶의 조건이라면 그것을 자기 삶으로 받아들일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받아들인 뒤에는 그 조건을 어떻게 창조적으로 전환해 아름다운 삶을 빚을지 고민해야 한다. 이를 위해 자기 삶을 생각하고 스스로 결정하는 내면의 능력이 자라야 한다.
‘실패자’라는 판단에서 벗어나기
남이 만든 기준으로 삶을 성공과 실패로만 나누면, 기대에 못 미친 이유를 밖에서 찾으며 원망하거나 남을 끝없이 부러워하는 선망에 사로잡힐 수 있다. 이유를 자신에게만 돌릴 때는 자기 비하에 빠질 수도 있다. 화자는 어느 쪽이든 자신을 실패자로 단정하기 쉽다고 말한다.
그가 제시하는 다른 기준은 관계 속의 모습이다. 누군가에게 친절하고 따뜻하며, 깊이 공감하고 경청하고, 자신을 선물로 내줄 수 있다면 성공적인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행동은 남과 경쟁할 필요가 없으며, 그 안에서 행복과 보람이 차오르면 세속적 욕망이 자신을 규정하는 힘도 줄어든다고 본다.
남이 만든 트랙 밖의 삶
화자는 먹을 것과 안심하고 머물 공간, 옷, 기본적인 문화생활 같은 욕구는 채워져야 한다고 말한다. 다만 삶의 기준을 계속 높이면 늘 부족함을 느끼게 된다. 제한된 상을 얻으려고 모두가 같은 트랙을 달리는 삶 밖에도 다른 길이 가능한지 생각해 보자고 권한다. 그가 보기에 오늘의 신자유주의적 경제질서는 다른 삶과 행복을 상상하는 능력을 빼앗는다.
그는 디오게네스의 일화를 들며, 초라한 식사에도 만족할 수 있다면 권력자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고 살 수 있다는 태도를 소개한다. 어느 삶이 더 나은지는 스스로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족과 감사가 있으면 작은 일에도 기뻐할 수 있지만, 남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는 동안에는 이미 주어진 행복을 보지 못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핵심 용어
- 원망·선망: 자신의 삶을 긍정하지 못할 때 각각 남을 탓하거나 남을 끝없이 부러워하는 마음.
- 자족·감사: 작은 일에도 만족하고 기뻐할 수 있게 하는 내면의 태도.
자막 원문 (참고)
Kind: captions Language: ko [음악]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끝없이 우리가 해내는 성취하는 일들을 평가하고 그걸 가지고 우리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자꾸 정량화해서 나타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업적과 성취를 통해 너 자신을 입증하라고 얘기하고 있. 그리고 이제 스스로를 평가합니다. 나는 인생의 실패자야. 그런데 인생의 성공과 실패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단순하게 얘기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뭔 훗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던지시는 질문은 내가 세상에서 어떤 업적을 이루었느냐 하는 것은 아닐 거라고 봅니다. 너는 세상에서 어떠한 사람이었느냐라는 질문일 겁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끝없이 우리가 해내는 성취하는 일들을 평가하고 또 그걸 가지고 우리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정량화해서 나타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대표적인 것이 수치를 통해서 우리의 업적을 가음해 보는 일들인데요. 수량화 또 계측 가능성 이런 것들로 내 삶을 평가하는 일에 나도 모르게 익숙해져 살게 마련이란 말이죠. 어릴 때부터 그러잖아요. 학교에서도 성적이 몇 등인지 몇 점인지 이런 걸 보고 또 대학에 들어가도 대학 순위가 어떠한지 내가 들어가는 대학은 어떠한지 직장 생활을 해도 연봉을 얼마나 받는지 또 내가 살고 있는 주택의 평수 몇 평인지 이런 끝없는 수치에 내 삶을 걸어놓고 살게 되죠. 그러다 보니깐 내가 만족스러운 그 수치를 얻지 못할 때는 내 삶이 무가치한 것처럼 느껴지고 그리고 남들이 나를 바라보면서 조롱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기도 하고 그러죠. 사실 인생을 산다고 하는 것은 모두가 공평하게 출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한 체질로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병약하고 어떤 사람은 날 때부터 장애를 갖고 태어나기도 하고요. 또 머리가 좋은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고 굉장히 다양합니다. 그런데 똑같은 기준을 가지고 사람들을 평가하기 시작하면 우리의 삶이 고단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공평함이 없는 세상에서 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깊이 해 가야 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얼마 전서부터 저는 그 숲을 가르치는 선생님으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얻고 나는데요. 선생님이 그런 이야기를 하십니다. 숲속에 있는 나무들을 좀 보내는 거지요. 그 나무는 씨가 떨어져 가지고 싹을 띄우고 자라난 것들인데 씨가 떨어진 그 자리가 어 때로는 착박한 자리일 수도 있고 경쟁이 굉장히 심화된 자리일 수도 있고 영양분이 부족한 곳일 수도 있고 햇빛 받기 어려운 장소일 수도 있는 거죠. 그러나 씨앗은 자기가 떨어진 그 자리에서 옮겨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씨앗이 원망하지 않죠. 다만 때를 기다렸다가 정말 최선을 다해서 햇빛을 받으려고 하고 수분을 안으로 품어 가지고 싹을 키우고 그리고 한껏 광합성하기 위해서 몸을 뒤틀기도 하고 그러면서 살아냅니다. 나는 그래서 그 숲을 바라보면서 장엄한 삶을 느끼게 되는데요. 바위에 떨어진 씨앗도 바라되기를 기다리고 그리고 마침내 싹을 티우게 됐을 때 말라 죽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생명의 신비라고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 홀로 유정해서 나에게 주어져 있는 삶의 요건 같은 것들을 원망하고 이런 경우가 아주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꿀 수 없는 우리의 인생의 조건이라고 한다면 아 그것을 내 삶으로 수용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겠다 하는 생각이 들고요. 그래서 남들과 비교하면은 나의 출발은 상당히 더 되지만 내 삶에 아름다움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살아갈 수 있는 내면의 든든함 같은 것들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생명은 언제나 그렇죠. 남들과의 경쟁 속에 살 수밖에 없는게 생명입니다. 숲에 나무들도 그러지요. 큰 나무 아래 자라는 나무들은 자기 나름의 생존 전략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때때로 경쟁을 하기도 하고요. 어 또 어떤 때는 서로 협력하기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내게 주어져 있는 인생의 여건을 받아들이되 아 그것을 어떻게 창조적으로 전환시켜 가면서 아름다운 인생을 빚어낼 것인가 하는 고민을 우리가 해 나가야 한다는 거죠.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생각해야 합니다. 내 삶에 대해서 생각하고 내 삶을 스스로 결정하려고 하는 내면의 능력이 우리 속에 자라나야 한다는 이야기죠. [음악] 그러면 생각해 봅니다. 남들과의 경쟁에서 내가 밀려났다고 생각하면 나는 인생의 패배자인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단조롭게 바라봅니다. 성공 아니면 실패. 남들이 만들어 놓은 기준에 따라서 내 삶을 재단하는 거지요. 거기에서 두 가지 삶의 태도가 등장합니다. 하나는 내 인생에 이렇게 된 것은 외부에 문제가 있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두 가지의 부정적 감정에 시달립니다. 첫 번째는 원망하는 거죠. 내 부모가 능력이 없어서 내가 살고 있는 나라가 이꼴이어서 늘 내 삶에 이렇게 된 것은 누구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또 다른 것은 조금 정류가 다르긴 하지만은 남들을 한없이 부러워하는 거예요. 이게 선망 하는 마음입니다. 원망과 선망이라고 하는 것은 내 삶을 긍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일수 사로잡혀 있는 부정적 감정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내 삶이 이렇게 잘 안 된 것이 내 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건강한가 생각해 보면 그렇게 건강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자기 비하의 감정에 사로잡히죠. 나는 못나서 나는 게을러 나는 남들보다 명민하게 사태 대처하지 못해요. 이런 자기 부정적 감정이 가득 차올라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죠. 그리고 이제 스스로를 평가합니다. 나는 인생의 실패자야라고 느끼는 거죠. 그런데 인생의 성공과 실패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단순하게 얘기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뭔 훗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던지시는 질문은 내가 세상에서 어떤 업적을 이루었느냐 하는 것은 아닐 거라고 봅니다. 너는 세상에서 어떠한 사람이었느냐라는 질문일 겁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세속적 기준으로 보면은 그가 성취한 내용에 따라 판단되지만 그러나 나의 존재에 대한 평가는 다른 기준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라고 하는 이야기. 그래서 남들이 나를 실패자라고 얘기한다 할지라도 내가 누군가에게 친절하고 내가 누군가에게 따뜻한 사람이고 누군가에 깊이 공감해 주는 사람이고 또 그 사람의 말을 경청할 줄 아는 사람이고 내가 나를 선물로 줄 줄 수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정말 나는 성공적 존재로이 땅에서 살고 있는 거다라는 생각이 드는 거지요. 그래서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업적과 성취를 통해 너 자신을 입증하라고 얘기하고 있지만 그러나 나의 나뎀이라고 하는 것은 성취보다도 타자 앞에서 나는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이 나를 더 오롯이 드러낼 때가 많이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아 누군가에게 친절한 거 누군가를 따뜻하게 대하는 것은 누군가 경쟁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나의 내면에 있는 힘을 끌어내면 되는 거고 그리고 제법 행복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친절하게 대할 때 또 누군가에게 나를 선물로 내 주게 될 때 인간은 진정한 행복을 느끼고요. 자기의 내면 속에 행복과 보람이 차오르게 될 때 세속적 욕망이 나를 규정하는 힘은 현조하게 줄어든다. 그 생각을 품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이 경쟁이 심화된 세상에서 내가 패배자가 아닌가 하는 두려움 속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은 자기의 삶을 조금 더 큰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선을 획득하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마다 이제 기준이 다르죠. 어떤 사람은 뭐 광고에 등장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소유하거나 누리지 못하면은 내가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그거 전혀 없어도 스스로 행복한 사람도 있고 그러죠. 그러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욕구는 채워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뭐 굶주여서도 안 되고 또 내가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머물 수 있는 공간도 있어야 하고 나를 품어줄 수 있는 옷도 입을 수 있어야 하고 아주 가장 기본적인 인간적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문화 생활도 할 수 있으면 좋겠고 그러나 그것을 이제 기준을 자꾸자꾸 높여가다 보면 어 나는 언제나 부족함에 시달릴 수밖에 없죠. 나에게 워져 있는 삶이라고 하는게 무한히 갑치다고 하는 생각을 머릿속에 품는다고 한다면 어 내가 원하는 아주 넉넉하고 행복한 인생의 조건이 내게 없다고 해 가지고 인생 포기하듯 살아서 안 된다는 생각을 저는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 우리들이 자기의 삶을 주체적으로 돌아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거듭거듭하게 되는데 그러니까 항상 남이 만들어놓는 삶의 문법 속에서 내가 산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건 뭐냐? 어떤 그 트랙이를 달리는 것과 똑같은데 욕망의 문법은 동일하게 가지고 있으면서 그 트랙에서 어 우리가 차지할 수 있는 상은 아주 제한되 있는데 그것들을 노리기 위해 달려가곤 있는데 언제나 그 상이라고 하는 것은 서수에게만 돌아가도록 돼 있고 그렇다고 한다면 나는 이런 트랙에서의 삶 말고 다른 삶을 한번 시도해 볼 거야.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없을까?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신 자유주의적 경제질서이 속에서 살아가면서 우리가 빼앗긴 굉장히 중요한 능력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상상하지 못하게 만들어요. 그니까 행복의 길이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우리를 몰아가고 있다는 얘기죠. 근데 사실은 눈을 들어서 바라보면은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길들이 제법 많이 있는데 그런 길이 마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생각하고 가고 있단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가져야 하는 것은 얼만큼이라고 얘기하기보다는 자기의 내면 속에 자족하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 이런 것들이 내 속에 있을 때 적은 일에도 우리들이 만족하고 기뻐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되는데 언제나 내 삶의 기준을 타자들에게 놓고 그들이 만든 기준에 맞춰 살려다 보면 진정한 만족이라고 하는 거 느낄 수가 없죠. 그래서 정성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디오게네스라고 하는 사람의 이야기죠. [음악] 흔히 일설로 들려오는 이야기. 알렉산더 대왕이 찾아와서 자기를 도와달라고 하면서 소원이 있음 말아라고 얘기할 때 좀 물러나 달라고 당신이 내 햇빛을 가리고 있다고 이거를 유명한 사람입니다만 어느 날 이제 그 알렉산더 대왕이 디오게네스의 친구를 보냈다는 거죠. 가서 철득을 좀 해 달라고. 아 그때 마침 디오게네스는 콩꼬트리로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그건 비난하기를데 없는 식사였죠. 초라한 식사였습니다. 근데 그걸 바라보면서 아 이게 설득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생각하면서 알렉산더에게 조금만 머리를 숙였더라면 이런 음식은 먹지 않고도 살 수 있을 텐데라고 말하자 디오게네스가 그렇게 말했답니다. 이런 콩꽃트리를 먹고도 만족할 수 있다면 고개 숙이지 않고 살아도 됐을 텐데라고 말하는 거죠. 어느게 더 나은 삶인지에 대해서는 자기 스스로가 평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남들이 만들어 놓은 기준 그것을 내 삶의 기준으로 삼아 삼는 한 나는 행복을 누리기가 매우 어려울거다 하는 생각이 늘 들어요. 내 삶이 그렇게 빈곤한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시작하는데 우리는 이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해된 자아가 있습니다. 남이 끝없이 너는 지금 불행한 거야. 너는 지금 결핍 속에 있어. 너는 지금 패배자야. 이런 말들에 나 스스로를 묶어 두고 살고 있지 않는가 생각해서 행복할 수 있는 것들은 이미 우리에게 많이 주어져 있는데 그것을 노리지는 못하고 오히려 남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건너다 보느라고 내 시간을 낭비하고 있지 않나 그 생각을 늘 해요. [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