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모든 것 이 안에 다 있다 '주기도문'|김기석 목사| 잘잘법 287회
채널: 잘잘법 |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lJob1OSWGWE | 길이: 43:23
요약
기도의 모든 것 이 안에 다 있다 ‘주기도문’|김기석 목사
🎯 TL;DR
김기석 목사는 주기도문을 기도의 원형으로 설명한다. 그에게 기도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비는 행위에 그치지 않고, 내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에 조율하는 과정이다. 주기도문의 각 간구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이웃을 돌보며, 하나님의 뜻을 삶에서 실천하라는 요청으로 이어진다. 마지막 “아멘”도 그 내용을 살아내겠다는 결단이어야 한다.
📌 핵심 논지
예수님에게 기도는 간헐적인 종교 행위가 아니라 삶을 관통하는 일이었다. 목사는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을 여덟 개의 간구로 설명하며, 그 뜻을 이해하는 일이 다른 기도의 뿌리가 된다고 말한다. 기도자는 하나님께 세상을 바꿔 달라고 구하는 동시에, 자신도 그 변화에 참여해야 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는 하나님의 성별을 가리키기보다, 우리를 돌보고 삶을 이끄시는 분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목사는 탕자의 비유에서 아들을 향해 달려가는 아버지를 떠올리며, 기도의 바탕에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사랑의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내 아버지”가 아닌 **“우리 아버지”**라는 말에는 신앙의 공동체성이 담겨 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도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곁의 사람을 소중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하늘에 계신”은 하나님이 우리가 통제하거나 원하는 일에 동원할 수 있는 분이 아님을 일깨우며, 경외심을 담는다.
이름·나라·뜻을 구하는 기도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자신의 욕망이나 목적에 이용하지 말라는 요청이기도 하다. 목사는 레위기 19장을 들어, 거룩한 삶이 이웃의 아픔을 헤아리고 나그네의 몫을 남기며 품삯을 미루지 않는 일상으로 드러난다고 설명한다.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드러나기를 구하는 기도라는 것이다.
“나라가 임하옵소서”는 힘으로 지배하던 로마의 평화와 달리, 사랑·낮춤·섬김으로 이루어지는 세상을 바라는 기도다. 기도하는 사람은 그 나라를 기다리기만 하지 않고 미움, 시기, 다툼 같은 것을 삶에서 줄이며 시작한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역시 하나님의 뜻이 자기 삶을 통해 나타나기를 바라는 고백이다. 목사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를 떠올린다. 그 뜻에 참여하는 삶은 적대감 속에서 환대의 자리를 만들고, 어떤 사람도 낭비하지 않고 아끼는 삶이라고 말한다.
양식·용서·시험을 구하는 기도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는 하루하루 먹고살기 어려웠던 예수님과 제자들의 처지를 반영한다. 목사는 오늘도 양식이 절실한 사람이 있음을 기억하고, 풍요 속에 사는 사람은 그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해 보자고 제안한다. 배고픈 이의 아픔을 헤아리기 위해서다.
죄를 사해 달라는 간구를 설명하며 목사는 ‘죄’를 ‘빚’으로도 읽어, 빚의 탕감과 용서를 연결한다. 용서는 상대에게 새 삶의 기회를 주고, 용서하는 사람도 아픈 기억에 붙들린 상태에서 자유롭게 한다. 다만 큰 잘못을 무조건 용서하자는 말은 폭력이 될 수 있으며, 정의의 회복과 잘못한 사람의 참회가 중요하다고 덧붙인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에서 목사는 남과 같아지고 싶거나 남보다 구별되고 싶은 욕망을 유혹의 길로 꼽는다. 유혹에 협조하는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벗어나지 않게 해 달라고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악에 맞설 힘은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자라며, 믿는 사람들이 선을 행할 때 악의 세력은 약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 핵심 수치·결정적 발언·반론·핵심 용어
- 여덟 개의 간구: 목사가 설명한 주기도문의 구성.
- 열 명: 목사는 히브리인의 회당 예배에서 열 명이 모이는 미니안을 신앙의 공동체성을 보여 주는 예로 든다.
- 용서에 대한 단서: 정의의 회복과 참회 없이 역사적 큰 죄를 “넓은 마음으로 용서”하자는 말은 폭력이 될 수 있다.
- 결정적 발언: “아멘 이전과 이후의 삶은 달라져야 합니다.” 주기도문의 “아멘”은 기도의 내용을 삶에 구현하겠다는 실천의 결단이다.
자막 원문 (참고)
Kind: captions Language: ko 아멘. 이전과 이후의 삶은 달라져야 합니다. 그러니까 주기도문을 예배를 마치는 프로세스로 과정으로 사용하기보다 아멘 하고 기도함으로써 그 기도의 내용을 내 삶 속에 구현하겠습니다라는 실천의 결단으로 삼을 때 그 기도는 위대한 기도 그리고 파워풀한 기도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가장 위대한 기도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요. 아, 그런데 오늘날 우리 이제 주기도문이 교회에서 어떤 방식으로 활용이 되냐면은 아, 축도할 목사님이 없을 경우에 [웃음] 예배를 마치는데 주기도문으로 마칩시다. 이렇게 이제 얘기하는 경향이 제법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뭐 그것도 나쁘지 않은데 아 주님의 기도라고 하는 건 정말 소중한 기도, 기도의 원형이라고 얘기할 수 있기 때문에이 기도를 잘 이해하는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다른 기도들의 뿌리가 된다고 여겨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 기도라고 하는 것은 아 내가 바라는 것을 하나님 앞에 구하는 것 빌기자 빌도자거든요. 한자로 얘기하면 그러니까 내가 바라는 것을 빌어서 얻으려고 하는 태도가 기도이지만 그러나 기도의 벌레적 모습은 그런 거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그것 포함되긴 하지만 저는 기도를 뭐라고 말하냐면 하나님의 마음에 내 마음을 조율하는 과정이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아 악기를 연주하려고 그러면은 제일 처음에 하는게 저유라는 거잖아요. 천학기의 경우에는 너무 팽팽해졌으면은 좀 늦혀야 하고 느슨하면 팽팽하게 만들어야 소리를내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도 팽팽해지거나 느슨해져 있을 때가 많기 때문에 기도라고 하는 그 행위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선율에 맞는 음조로 바꿔 나가는 과정이 기도다. 그런 기도 가장 열심히 하셨던 분이 예수님이기도 합니다. 한적 한 곳 찾아가셔서 기도하셨던 대목 새벽 오히려 미명에 주님이 산에 올라가 기도하셨다는 대목. 이렇게 주님은 언제나 그렇게 기도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제일 유명하게 겟세만의 동산의 기도이기도 하지요. 그러니까 주님은 늘 기도하셨습니다. [음악] 또 12 제자를 선택하려고 할 때도 주님은 기도하신 다음에 선택을 합니다. 기도는 예수님에게 간헐적으로 하는 어떤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의 삶을 관통하고 있는 하나의 핵심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는데요.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세요라고 청합니다.이 훌륭한 태도입니다. 그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고 말하면서 주님 기도를 들려 주는데 여덟 개의 간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근데 맨 처음부터 보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기도를 들으시는 그분을 부르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요라고 말하는데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식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그렇게 낯선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아주 적극적으로 표현한 분은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네 아버지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별을 일컫기 위한 말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의 뿌리이고 우리를 돌봐 주시고 또 우리를 지켜 주시고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시는 어떤 존재에 대한 원유적 표현이 아버지라고 얘기할 수 있겠는데 생각해 보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할 때 번개와 우래 가운데 등장하시고 구름 가운데 등장하시 천둥같은 소리로 말씀하시는 그래서 인간의 삶을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고 계신 하나님을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마치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처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들을 향해 달려가서 맞아주는 아버지의 이미지로 하나님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음악] 여기에 있는 것은 뭘까요? 하나님에 대한 신뢰, 사랑의 관계 이게 본질입니다. 그니까 하나님을 심리학에서 얘기하고 있는 슈퍼 에고처럼 [음악] 멀리서 내 행동을 통지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누구보다도 깊이 사랑하시고 돌봐 주는 분으로 인식하는 거죠. 이게 아버지라고 한 말 속에 담겨 있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가 아니죠. 우리 아버지라고 얘기합니다. 신앙은 기본적으로 공동체적입니다. 마치 성삼일체 하나님이 사무로서 한 몸을 이루시는 것처럼 신앙은 관계 속에 있는 것이죠. 여러분 히브리인들이 회당에서 예배를 드릴 때 10명이 모여야 예배가 시작됐거든요. 그걸 미니안이라고 얘기하고 있는데 그 열명이 모였을 때 비로서 토라를 낭독할 수 있고 죽은 자를 추모하기 위한 기도문인 카드시를 낭독할 수 있고 하나님을 찬미하는 성령을 부를 수가 있었습니다. 나 혼자도 할 수 있지만 열명 모여야 했어요. 그 기본적으로 하는 얘기가 뭐냐? 신앙이라고 하는 건 공동체적이다라고 하는 걸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 아버지라고 얘기할 때 하나님에게는 자식이 많아요. 그 말의 의미 뭡니까? 내 마음에 드는 사람만의 하나님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때때로 내 마음을 괴롭히는 사람.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그에게도 여전히 하나님의 존재 뿌리셔요. 그 말은 뭡니까?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우리의 삶에 소중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야함을 뜻합니다. 이게 우리라고 한 말 속에 담겨 있는 것이죠. 그다음에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이라고 말하는데 하늘은 저 위에 있는 어떤 그 공정을 뜻하는 말이 아니죠. 하늘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무서부제하심 이런 것들 또 달리 얘기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무한한 차이가 있다는 인식이 하늘에 계신이라고 한 말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을 우리가 통제 가능하게 본다든지 하나님을 우리가 원하는 일을 위해서 동원하려고 하는 마음이 잘못되었음을 나타내는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이라고 한 말 속에는 그분에 대한 경외심이 담겨 있는 말임을 알 수 있겠죠. 그러니까 하나님이라고 하는 부분을 한 분을 얘기할 때도 금방 얘기했듯이 아버지 우리 하늘에 계신 이렇게 얘기함으로써 우리가 경배하는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이 어떠한 분인지의 성격이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거 하나님에겐 자식이 많다. 나만이 아니라 이게 이제 하늘에 계신 이런 말 속에 담겨 있는 의미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름이 거룩 여김을 받으소서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름은 징조다 하는 말이 있거든요. 네임이 오맨이라고 한 말인데 예를 들어 보면 내가 어떤 사람의 이름을 듣는 순간 마음이 따뜻해지고 허뭇해지고 행복해지는 이름이 있습니다. 단순히 그 이름을 입에 올렸을 뿐인데도 기억에 떠올렸을 뿐인데도 그런 존재가 있는가 하면 그 이름을 떠올리거나 듣는 순간 불쾌해지고 몸에 소름이 돋고 외면하고 싶고 그런 이름도 있죠. 그런 의미에서 이름은 징조라고 하는 말이 참 맞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첫 번째 기도로서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라고 얘기하고 있는데이 까닭은 뭘까요? 그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이 오용되고 있는 상황을 염두해 둔다면 우리가 알 수가 있을 겁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세상을 창조하시는 분이기도 하고 또 제가 좋아하는 이미지로 얘기하자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당신을 소개하실 때 이렇게 얘기합니다. 나는 내 백성 이스라엘이 그들의 신음 소리를 들었어. 그들이 얼마나 고통받는지를 보았어. 그들이 얼마나 근심하고 있는지를 내가 알아. [비명] 보고 듣고 아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거죠. 땅에서 들려오는 신음 소리를 하나님의 정의를 요구하는 소리로 들으시는 분이 하나님이란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이름을 아 나의 욕망을 위해 사용할 때가 제법 많이 있습니다. 10개명 가운데 제 3계명이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 때에 읽었지 말아라. 그 뜻없이 빈말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써먹지 말아라는 말이기도 하고 또 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수단으로 삼지 말아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전쟁을 기억하고 누군가를 파괴하려고 하면서 그것을 정의의 전쟁이라고 하나님이 시키신 전쟁이라고 얘기하는 거 이런 것들도 하나님의 이름을 오용하는 사례라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그니까 정말 기도자들이 명심해야 될 것은 뭐냐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져야 하는 거지요. 그런데 인간의 현실은 하나님의 이름을 오용하고 또 거룩하게 만들지 않을 때가 아주 많이 있습니다.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스스로 당신의 이름의 명예를 회복하소서라는 뜻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그러나이 기원 속에는 나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그 거룩하신 이름이 드러나게 해 주십시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내가 어떻게 살 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드러날까요? 저는 늘 레우기 19장을 떠올리는데 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거룩함 같이 너희도 거룩하여라라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어떤 얘기를 합니까? 안식일 잘 지켜야 한다. 부모 공경해라. 하나님께 재물을 바칠 때 이렇게 해야 한다. 얘기 나오다가 느닷없이 등장하는 말이 있습니다. 밭에서 추수할 때 밭에 한 모퉁이나 남겨두어라. 너희 가운데서 살고 있는 거류민과 나그네의 몫시니라. 포도밭에서 수학할 때도 똑같이 계명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뭐라고 얘기합니까? 듣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저주하지 말아라.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 앞에 걸림돌 두지 말아라. 일꾼의 품싹을 미루어 두지 말아라. 이런 이야기가 계속 나옵니다. 우리는 거룩하면 종교적인 덕목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맞아요. 거룩함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할 무게를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게 거룩한 삶입니다. 근데 그 삶은 뭐로 나타나냐? 우리가 일상적 삶 속에서 나하고 대하고 살고 있는 사람들을 귀히 여기고 그들의 아픔을 헤아리고 그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를 쓰고 생생내지 않고 그가 몸멸감을 느끼지 않도록 도와주고 그렇게 사는 삶의 방식이 뭐냐? 거룩한 삶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당신의 이름이 거룩을 받으서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은 바로 레우기 19장이 얘기하는 삶을 내 삶 속에서 구현하며 살아야 하는 거죠. 이게 하나의 윤리적 신학적 요구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이게 두 번째 기도의 내용이고요. 세 번째 나라가 임하옵소서라고 한 말을 하고 있는데이 말은 막연히 보면 안 될 것 같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살고 있었던 그 시대가 로마가 지배하던 시대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명심하고 봐야 합니다. 주전 31년경 로마가 이제 통일되게 됩니다. 내전이 그치고 그리고 통일이 되고 그리고 몇 년 후 아마 주전 27년 경우로 생각합니다만는 옥타비아노스라고 하는 사람을 황제로 삼게 됩니다. 황제란 지명을 처음부터 주지 않지만 나중에는 황제가 되긴 합니다. 아 로마 원로원이 그에게 영예로운 호칭을 부여하죠. 위대한 자라고 하는 뜻에 아구스라고 하는 이름을 그에게 부여함으로 황제 정치가 시작되었고 그래서 소위 얘기하는 로마의 평화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지중해를 내해로 거느리고 있는 지중해 세계 전체가 이집트까지 포함해서 어 로마의 지배 영역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의 지배라고 하는 것은 로마의 평화를 얘기하긴 했지만 그 평화에 본바탕이 되고 있는 것은 뭐냐면 군사력입니다. 군사력. 그러니까 힘을 가지고 사람들을 누르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 힘에 복종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냥 일상적 평화가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지배를 거절하는 이들에게 로마는 언제나 군단을 보내 가지고 참혹하게 그들을 진압합니다. 이게 로마식 평화입니다. 로마 제국입니다. [음악] 제국이라고 하는 것은 무한한 자기 확장을 꾀하는 것이 제국입니다. 태국은 일종의 사욕 기계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대에 예수님이 오셨죠. 로마의 그 힘에 짓눌린 사람들이 억압을 당하면서도 숨조차 쉬기 어려웠던 그 시절에 주님은 전혀 다른 나라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라고 기도하라고 제사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나라는 힘에 의해 다스려지는 나라가 아니라 사랑에 의해 다스려지는 나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시죠. 이방인의 직권자들은 사람들을 힘으로 지배하고 귀인들은 은인 소리 듣는 것 좋아하지만 너희는 그러면 안 된다. 너희 가운데 뜸이 되려고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섬겨야 [음악] 한다라고 말합니다. 예수 [콧방귀] 그리스도가 얘기하고 있는 당신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고 하는 것은 힘이 아니라 사랑으로, 낮춤으로 헌신으로 [음악] 만들어지는 세상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가 임하소서라고 하는 것은 오늘의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는 얘기지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으로 그 세계를 가져오신다고 우리는 믿는 거야. 그러니까 오늘의 우리의 삶이 제물이 곤고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런 세상으로 우리를 초대하셨어라는 꿈을 품는 것이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라는 것입니다. 그까 오늘 우리의 현실이 제물이 어둡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나라는 기억 오고야 말 것이다. 이게 소망이 되어서 절망을 있고 희망을 갖도록 만드는 거고 어둠의 빛으로 나갈 수 있게 되는 거죠. 그러면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은 막연히 아무것도 [음악] 안 하고 그날이 오기만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내가 기다리고 있는 그 나라를 내 삶 속에서 시작하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없을 것 같은 것들을 내 삶 속에서 [음악] 없애며 사는 삶. 미움, 시기, 다툼, 증오, 공해, 쓰레기. 그런 것이 하나님 나라에 없다고 생각하면 능동적으로 그것들을 줄이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거. [음악] 이것이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라고 하는 기도 속에 담겨 있는 실천적 도전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하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질서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눈에 가리워져 있지만 역사를 주관해 가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죠. 삼일체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이야기도 했습니다만 안드레이 류블로프라고 하는 분이 그렸던 성삼일체를 보면 삼일체 하나님이 어떤 존재들로 표상되 있는데 그분들이 정말 그 평온을 누리고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안드레이 타르코스키라고 하는 감독입니다만 그 감독은 그 그림을 두고 그렇게 얘기하죠. 세상의 불화와 미움이 침투할 수 없는 공간에 대한 상징 그렇게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거칠어요. 그리고 폭력적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지만 우리가 꿈꿔야 되는 건 뭐냐면 하나님이 다스르시는 그 세계에는 이런 역사의 부정성이 극복된 나라일 거야라는 소망을 우린 품는 거예요. 그 세계를 향해 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우리는 그 하나님의 아름다운 질서에 맞추어 내 삶을 바꿔 갈 필요가 있는 거죠. 이게 땅에서도 이루어지다라고 하는 고백 속에 담겨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어떠합니까? 에덴동산 이후에 세상을 얘기할 때 가인이 아담과 하와 사이에 태어난 첫 존재가 가인데 다음에 태어난게 아벨인데 성경 이야기는 아담과 하와의 그 사랑으로부터 태어난 첫 존재인 가인이 형제 사례자가 되었다는 씁쓸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질투심 때문에 그랬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과 달은 하나님이 아벨의 재물은 받으셨지만 가인의 재물을 받지 않으셨기 때문인데 가인이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이에요. 데 하나님에게는 자기의 미워하는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인 아벨을 없애므로 가인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에게 복수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런데이 이야기는 잠언에 보면 가난한 자를 멸시하는 사람들 그들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거라고 얘기하거든요. 연결되는 지점이 그렇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작품을 파괴하려는 마음은 결국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운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게 이제 성경이 보여주고 있는 인간론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러니까 경쟁과 효율이 승상되고 있는 세상에서 가인적 삶의 태도가 우리에게 내면화 되었고 가인의 사대 후선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라멕의 노래를 우리가 압니다만 자기의 두 아내에게 사랑하거든요. 아다와 실라여 나에게 상해를 입은 젊은 사람을 내가 죽여버렸다고 얘기합니다. 폭력의 악순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게 땅의 현실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보기에 좋았다고 했던 그 세상이 인간으로 말미암아 속절없이 파괴되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마음 아픔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이 세상에도 이루어지다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그것은 단순히 그 나라가 오기를 바랍니다. 뜻만이 아니라 내 삶을 통하여 하늘에서 이루어진 그 뜻이 내 삶을 통하여 구현되기를 소망합니다라고 한 태도일 겁니다. 그때 [음악] 우리가 그렇게 산다고 하는 건 뭡니까? 적대감이 가득차이는 세상에서 환대 공간을 열어 가는 것이고 내 마음을 열어 다른 사람들을 내 품에 받아들이는 그런 태도로 나타날 겁니다. 난 아무것도 할 수 [음악] 없으니까 하나님 해 주세요가 아니라 하나님이 꿈꾸시고 계획한 그 세계를 하나님이 열어가실 때 나도 그 꿈에 동참하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는게 그 기도에 담겨 있는 의미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이 깨세 안에서 동산을 기도하실 때 하신 말씀이 뭡니까?이 [음악] 이 산을 내게서 물려 주십시오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하셨죠. 그때 주님은 [음악] 하나님의 침묵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차리십니다. [음악] 그다음에 하는 얘기 뭡니까?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음악] 그러나라고 하는 역접 접속사는 한 다음에 발화될 수 있는게 아닙니다. 잔을 몰려 주십시오와 [음악]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사에는 깊은 계곡이 있습니다. 시면입니다. 그시면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침묵을 알아들었기 때문에 주님은 [음악]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라고 얘기했어요.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면서 안 되는 건 뭡니까? 예수님이 [음악] 한 사람도 낭비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어떤 사람도 낭비하지 않고 아끼는 삶을 살아감을 뜻합니다. [음악] 이것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하는 기도 속에 담겨 있는 의미라고 보겠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유령한 양식을 쓰소서라고 한 기도인데요.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의 제자들은 나를 따라오라라고 하는 부름을 듣고 먼저 첫 번째 제자들은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 다닙니다. 그러니깐 생업에 종사해도 살기가 어려웠던 시절에 떠돌이 유랑 설교자와 동행한다고 하는 것은 언제나 고단한 일이었을 겁니다.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 아니죠. 누군가의 호위에 의지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죠. 예수님이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세상에 내보내시면서 그들에게 하셨던 말씀도 두벌도 가지고 가지 말고 전대도 가지고 가지 말고 너희들 빈몸으로 가라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너희를 환대해 주는 사람의 집에 머물며 그 집을 위해서 복을 빌어주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이 이 얘기는 어떤 얘기냐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것은 돈으로 하는게 아니구나라고 하는 것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만 어쨌든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정말 필요한게 일용할 양식였던 것이죠. 하루하루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그들의 삶을 반영한다고 얘기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아주 오래 전입니다만 벌써 한 40몇 년 전 43년쯤 됐네요.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어느 목사님이 우리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그분이 설교를 하셨어요. 그런데 그분이 이렇게 물어요. 여러분, 주기도문 가운데 어떤 말씀이 여러분에게 가장 깊이 다가옵니까? 그 우리는 생각했어요. 아, 나라가 어려울 때였기 때문에 나라가 임하옵시며 이런 것 올렸습니다. 근데 그분이 얘기합니다. 저는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라는 기도가 가장 잘 칠하대요. 왜 그런가 했더니 [음악] 그분은 일본에서도 빈민들을 위해 선교를 한 분이었습니다. 근데 그렇게 부유한 나라인데도 정말 빈곤에 처 있는 사람들은 하루하루 먹고 사는게 너무 힘들었고 그 목사님을 통하지 않으면은 하루를 살아갈 수가 없었어.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도 일용할 양식이 없어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의 상황이 그러했다는 거고 그렇게 보면 [음악]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풍요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용할 양식을 주십시오라고 하는이 기도가 정말 우리가 드려도 되는 기도인가? 왜 우린 많이 쌓아놓고 지내고 있잖아요. 그러면이 기도는 두 가지로 살펴야 할 것 같습니다. [콧방귀]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는 거예요. 우리 집에는 명시적으로 기도하진 않더라도 그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하루하루 누군가의 호위에 의지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 사실을 알 때 [음악] 우리에게이 기도는 뭐냐면 우리가 그들의 기도의 응답이 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지요. 감리교회 오늘을 시작하는 기도의 그런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오늘 나의 삶이 누군가 당신에게 바치는 기도의 응답이 되게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가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도 신음 소리를 통해서든 혹은 구체적인 말을 통해서든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하는 구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어떤 사람일지에 대한 도전이이 기도 속에 주어진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근데 그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서 필요한 일은 뭘까요? 저는 그래서이 기도를 이렇게 돌이켜 볼 것을 제안합니다. 하나님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주십시오. 내가 가득 차 있을 때 나는 배고픈 사람의 아픔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내가 뭔가 넉넉하다고 생각할 때 공핍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경멸하는 태도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주시고 일용할 자비로움을 주시고 오늘 일용할 건강을 주시고 그렇죠. 이런 기도로 우리들이 바꿔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보는데요. 저는 이게 아이 기도가 갖고 있는 급진성이라고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십시오라고 하는 대목이 등장하는데요. 여러분 여기 죄라고 번역되 있는이 단어는 헬라오르는 빛을 뜻하는 단어하고 같습니다. 그래서 이렇게도 얘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사람의 빛을 탐감하오니 우리의 빛을 탄감해 주십시오라는 기도로도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빛을 탐감해 준다고 하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 사람이 더 이상 빛을 갚을 능력이 없어요. 그런데 그 빛에 시달리고 있을 때 그는 언제나 부담감을 가지고 살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때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게 뭐냐면 탄감해져라고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누군가의 빛을 탐감해 주는 것, 누군가의 죄를 용서해 준다고 하는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매우 소중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용서함으로써 그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를 부여하는 거예요. 그니까 용서한다라고 하는 그 말은 forgive라고 하는이 단어는 완전히 주어버리다. 그런 뜻에서 고대 용어에서 발행한 말입니다. 용서라고 하는 건 뭐냐면 주어 버리는 거야. 갑없이. 그래서 용서를 하는 거기 뭐냐? 오늘 나한테 잘못을 서주는 사람을 용서함을 통해서 그를 풀어 주는 거예요. 그가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일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빚의 탄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면재년이 되거나 희년이 되면은 빛을 탄감해 주므로 그 사람이 자유롭게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줬던 것처럼 인간 관계 속에서 우리가 얽히고 설힌 문제들이 서로를 난맛처럼 얼어두고 있을 때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건 뭐냐면 그의 빛을 탄감해 주므로 그가 자유롭게 자신의 생명을 한껏 누리며 사는 사람이 되게 해줘라라고 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목을 가다듬음] 여기 중요한 대목이 있습니다. 내가 누군가의 죄를 용서해 주면 그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자유롭게 만들어 주는 일이기도 하지만 나를 자유롭게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할 때 나는 언제나 그에게 붙들린 상태입니다. 내가 그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에게 붙들린 상태예요. 그 기억으로부터. 근데 그를 용서해 버림을 통해서 내가 자유롭게 되는 일이기도 한 것이죠. 물론 용서라고 하는 말이 함부로 할 말은 아닙니다. 왜냐면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있는데 그에게 무조건 난 널 용서하노라라고 얘기하는게 늘 마땅한 것은 아닙니다. 역사 앞에 큰 죄를 저지른 사람이 있는데 우리가 넓은 마음으로 용서합시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도 폭력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뭡니까? 정의가 회복되어야 하고 그 그가 정말로 참여하고 그런다고 할 때 우리는 용서해 버리는 거예요. 이게 중요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니코스카산 자키스라고 하는 분이 썼던 그리스인 조바라고 하는 책에 이런 대목이 등장합니다. 조르바가 얘기해요. 대장 하나님은 굉장한 임금님이시죠. 조르바 그게 무슨 얘기야? 하나님의 임금이라니. 그때 졸르바가 이야기를 들렸습니다. 하나님은 물이 흠뻑 묻은 스펀지를 들려 베드로를 천국문 앞에 세워 드신답니다. 죄인 하나가 오면 베드로는 그 죄인을 보다가 그 물이 잔뜩 묻은 스펀지를 가지고 닦아 줘요. 그리고 의고 불쌍한 것 그리고 천국으로 들어가게 안 되는 거예요. 그리고 저르바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용서해 버리는 거지요. 이게 서설의 얘기이긴 합니다만 하나님의 굉장한 임금님이신가 달고 뭐냐? 늘 이렇게 하나하나 체크하면서 내 죄를 내가 알렸다 그런 분이 아니고 용서하고 받아들이고 용납하고 이런 분이라는 거죠.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담는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해 보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작정 용서해야 된다라고 하는 말도 폭력이 될 수 있지만 그러나 용서의 두 가지의 방향 그를 자유롭게 해 주고 나 또한 그 아팠던 기억으로부터 해방되어서 장의적이고 건강한 삶을 살도록 하는 것 이것이 용서해 주는 것이죠. 그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도 제자들에게 오셔서 평화 인사를 하는 다음에 그들에게 숨을 내시면서 용서하라고 얘기하거든요. 그래야 내가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우린 그런 세계로 초대를 받았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하는 기도인데요. 우린 시험에 들죠. 오늘 언제나 시험에 빠지곤 합니다. 유혹이 많은 세상에 우리들이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유혹에 빠지는 원인을 보면 두 가지를 얘기할 수 있겠는데 하나는 남과 같아 주고 싶은 마음 때문에 유혹에 빠집니다. 달리 얘기하면 남들이 누리는 것 나도 다 누리고 싶어요. 오늘에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삶을 불행하다고 느끼는 까닭은 과거 몇십 년 전에 우리 가난했던 시절보다 더 불행하다고 느끼는 까닭은 뭘까요? 우리 60년대, 70년대에 비하면은 80년대에 비하면 지금은 엄청 잘 삽니다. 그러니깐 경제적으로만 본다고 한다면 어마어마하게 행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많은 걸 누리면서 행복해야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기대 수준이 높아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언제나 내가 누리고 싶은 것은 점점 점점 점점 커졌습니다. 그런데이 기대 수준에 따라가기에는 내 능력이 조금 미치지 못해서 나는 불행하다고 느낍니다. 기대 수준이 점점 높아진 까닭은 뭘까요? 욕망 때문인데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비교의 대상이 있습니다. 나도 저 사람만큼은 누려보고 싶어. 남과 같아 주고 싶은 거예요. 남이 누리는 건 다 누려야 하고 그러지 못하면 내가 비참하다고 느낍니다. 이게 첫 번째 질병입니다. 두 번째는 같아지는데 만족이 또 안 돼. 남과 구별되기를 소망합니다. 남이 누릴 수 없는 걸 내가 누려야 우월감을 느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깐 남이 나를 쫓아오면 더 빨리 달아나야 하기 때문에 숨이 가빠집니다. 그래서 자기가 남들과 같아지고 남들과 구별되기 위해 숨차게 달려가다 보니 우리의 삶은 행복을 느낄 결도 없이 앞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죠. 그때 유혹이 찾아옵니다. 내 소망을 이룰 수 있는 굉장히 중요한 그 기회가 있다는 거예요. 그때 우리는 거기에 귀를 기울여요. 우린 그거를 유혹이라고 얘기합니다. 내 마음을 하나님에 대한 사랑, [음악]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돌이켜서 세상을 향한 사랑, 자기를 향한 사랑으로 돌이키도록 만드는 일체의 것들을 우리는 유혹 혹은 시험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시험은 언제나 협조자가 있어야만 시험이 가능합니다. 내가 시험에 둘 때 가장 강력한 협조자는 누구이겠습니까? 나 자신입니다. 내가 협조하지 않으면 유혹이 유혹이 안 됩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겁니다. 나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죠. 왜? 내가 유혹의 협력자 되기를 그치게 해 달라고 하는 기도가 여기에 [음악] 있는 것이죠.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고 하는 근본적 계명 거기에서 벗어나서 나와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는 그 길로 나를 유인하려고 하는 세상의 유혹이 너무도 강렬하기 때문에 내가 거기에 협조자가 되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는 내용이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이고 결국 그렇게 시험하는 것을 악이라고 얘기했고 여기 악은 그냥 추상명사 악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악한 힘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사탄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멀어지게 만들고 이웃과 우리 사이를 멀어지게 만들어서 갈라놓고 지배하려는게 악인데 이런 악의 힘이 너무 더 크게 작동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세계라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이제 중력에 이끌리는 것처럼 인간은 그렇게 악에게 이끌리는 성향이 우리 속에 있습니다. 내가 내 마음을 어떻게 통제해 볼 수가 없는 거예요. 그 바울 사도 얘기합니다. 자기 분녀를 아프게 고백하죠. 마음으로는 내가 선을 행하고 싶은데 번번히 악을 행하고 있는 자기를 발견해요. 그래서 바울이 얘기하죠. 내 속에 또 다른 법이 있어서 나를 죄로 이끌고 가더라는 겁니다. 근데 그 힘을 내가 이겨내는 능력이 없죠. 그게 그가 탄식합니다. 오라난 곤고한 자로다. 누가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원하려. 내가 할 수 없어요. 그때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속에 들어오죠. 은혜가 아니고는 악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는 겁니다. 악에서 구원하소서라고 내 힘으로 하기가 어려워요. 그렇다고 내가 아무것도 못 한다는 얘기가 아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악에게 저항할 수 있는 힘이 내 속에 자라나기 시작한다라고 하는 이야기죠. 이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린 두 가지를 봐야 돼. 악의 힘을 과서 평가해도 안 되고 악의 힘을 과대 평가해도 안 됩니다. 세상은 그래 악한 자들이 잘되는 세상이야. 아무리 선하게 살아봐도 소용 없어. 이게 악의 힘을 과대 평가하는 겁니다. 그러나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기도하는 이들은 악은 결국은 극복될 거라고 믿고 가는 거예요.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구스테노스 성인이 악을 뭐라고 말하냐면 악은 선의 결핍이다라고 말하거든요. 캄캄한 방을 생각해 보자고요. 창문도 없어서 캄캄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성냥불 하나를 밝히면 어둠이 물러가죠. 어둠은 실체가 아니라 빛이 없는 상태라는 거죠. 악도 그렇다는 겁니다. 선이 결핍될 때 악이 득세하는 거지요. 오늘 세상이 제물이 악한 것처럼 보여도 선을 행하는 존재인 믿음의 사람들이 선에 불을 밝히기 시작하면 어둠의 세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이게 우리의 소망입니다. 우리가 그런 방식으로 살게 될 때 오늘 마지막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라고 하는 성형 부분이 마련되는 거라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정말론적인 아름다운 삶의 성취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만은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하는 것은 그 나라를 우리의 삶 속에서 살아내기 시작하는 거고 그래서 어떤 단초를 마련한 일이고 세상이 제 아무리 악해도 하나님의 지배가 영원하다고 하는 사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세상이 우리에게 도래할 거라는 사실을 우리들이 확신하고 하고 살 때 우리는 어둠에 지지하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아멘인데요. 아멘 이전과 이후의 삶은 달라져야 합니다. 그러니까 주기도문을 예배를 마치는 어떤 그 프로세스로 과정으로 사용하기보다 아멘 하고 기도함으로써 금방 얘기했던 그 기도의 내용을 내 삶 속에 구현하겠습니다라는 실천의 결단으로 삼을 때 그 기도는 위대한 기도 그리고 파워풀한 기도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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