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죄인입니다"로 시작하지 않는 구원 이야기|김학철 교수|잘잘법 286회

잘잘법 · 2026-09-22

채널: 잘잘법 |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aAw2KOG2Cuw | 길이: 36:30

요약

🎯 TL;DR

김학철 교수는 기독교의 구원을 “당신은 죄인입니다”라는 법정적 언어 하나로만 설명해서는 신약성경이 보여 주는 풍성함을 담을 수 없다고 말한다. 복음서의 구원은 위험에서 건짐, 질병의 치유, 죄책감과 수치심에서의 해방, 사회적 관계와 공동체로의 복귀를 포함한다. 바울은 구원을 법정, 화해, 시장,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여러 언어로 표현한다. 요한복음의 영생과 동방정교회의 신화(神化)는 하나님과 깊이 사귀고 그분의 성품에 참여하는 삶을 가리킨다. 이런 다양한 구원의 언어를 통해 이미 삶에서 경험한 구원을 발견하고,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기쁨과 충만함을 누리자는 것이 강연의 결론이다.

📌 핵심 논지

  • 현대인의 불안은 자신이 무가치하며 사회에서 인정과 사랑을 받지 못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연결된다.
  • 교회가 구원을 주로 사후에 지옥에 가지 않는 문제로 설명하면 불안, 허무, 실패감, 죄책감, 수치심, 관계의 파탄 같은 현실의 고통을 충분히 다루지 못한다.
  • 신약성경에는 서로 다른 삶의 자리에서 구원을 이해하고 경험하게 하는 여러 언어가 있다.
  • 구원은 죽은 뒤의 문제에만 머물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치유되고 관계가 회복되며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경험이다.

복음서의 구원: ‘소조’가 담는 다양한 경험

복음서에서 ‘구원하다’로 번역되는 헬라어 소조(σῴζω)는 먼저 위험에서 건져 내는 것을 뜻한다. 마태복음 8장에서 폭풍을 만난 제자들이 예수께 자신들을 구해 달라고 외친 것은 익사의 공포에서 건져 달라는 요청이다. 삶의 실제 위험에서 건짐을 받은 경험도 구원 체험으로 나눌 수 있다.

소조는 질병의 치유와 회복에도 사용된다. 마가복음 5장과 10장, 누가복음 8장, 야고보서 5장 15절 등에서 병자를 고치는 일을 구원이라고 부른다. 화자는 치유 경험을 지나치게 극화하지 말고, 아픔과 어려움 속에서 실제로 경험한 회복으로 나눌 수 있다고 말한다.

누가복음 7장의 죄인이라 불린 여인에게 예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신 사건에는 육체적 치유가 없다. 여기서 구원은 자기 양심에서 오는 죄책감과 타인의 시선에서 오는 수치심으로부터의 해방이며, 배제된 사람을 공동체로 돌려보내는 사회적 회복이다. 영화 《미션》에서 노예 사냥꾼이 짊어진 갑옷과 무기를 과라니족 사람이 끊어 버리는 장면처럼, 죄의 흔적과 책임은 남더라도 죄책의 무게에 짓눌려 살지 않게 되는 것이다.

누가복음 19장의 삭개오는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겠다고 결단한다. 여기에는 내면의 변화와 함께 경제적 격차로 깨졌던 사회적 관계의 회복이 있다.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은 여인 역시 생물학적 치유뿐 아니라 종교적·사회적 격리, 경제적 파탄, 수치와 공포에서 회복되어 공동체로 돌아간다.

바울이 사용한 네 가지 구원의 언어

첫째는 법정의 언어다. 죄, 고발, 율법, 심판, 사면, 은혜, 의인 선언이라는 표현을 통해, 죄인인 인간을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통해 의롭다고 선언하고 새로운 공동체로 부르시는 구원을 말한다. 이것이 칭의의 언어이지만 바울의 구원 이해 전체는 아니다.

둘째는 관계와 화해의 언어다. 고린도후서 5장 19~20절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절로서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라고 간청한다. 인간에게도 하나님을 향한 섭섭함과 분노, 항의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이런 사람에게 먼저 죄인이라고 말하기보다,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하나님도 고통을 아시므로 하나님과 화해하라고 요청한다. 하나님에게 화가 난 사람이 그분과 다시 관계를 맺는 것 역시 구원의 경험이다.

셋째는 시장의 언어다. 고린도전서 6장 20절의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 되었다”는 표현은 값을 치르고 사람을 되사는 이미지다.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값을 치르셔서 종과 채무자의 처지에 있던 사람을 자유롭게 하셨다는 설명이다.

넷째는 연합의 언어다. 바울이 반복해서 사용하는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참여하여 그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것을 뜻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며,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는 새로운 존재와 체질로 변화한다.

요한복음의 영생과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삶

요한복음 17장 3절에서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이는 죽은 뒤 천당에 가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깊이 사귀며 내가 그분 안에 있고 그분이 내 안에 계시는 삶이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 따르면 이런 사람은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으며, 육체적 생명이 끝나도 하나님과 누리는 영생은 끝나지 않는다.

동방정교회가 강조하는 신화(神化, 테오시스)도 같은 연합의 관점에 놓인다. 아타나시우스의 표현처럼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게 하기 위함이다. 이는 인간의 본질이 하나님의 본질로 바뀐다는 뜻이 아니라, 베드로후서 1장 4절이 말하듯 하나님의 신성한 성품과 활동에 참여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분노와 모욕 앞에서도 다른 방식으로 반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 구원받은 삶이다.

🔢 핵심 수치

  • 신약성경은 27권이며, 그 안에 구원에 관한 여러 층의 언어가 있다.
  • 바울의 구원 언어는 크게 네 가지로 정리된다: 법정, 관계, 시장, 연합.
  • 혈루증을 앓은 여인은 12년 동안 고통받았다.
  •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을 100번 이상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 결정적 발언

“여러분은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이 풍부한 것을 제쳐두고 왜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 이해에 머물러 있으려 합니까?”

↩️ 반론과 응답

  • 구원은 죄인이 용서받아 심판을 피하는 것 아닌가?
    그것은 성경에 실제로 있는 중요한 법정적 언어지만, 바울과 복음서가 말하는 구원의 전부는 아니다.

  • 죄책감이 사라지면 죄를 가볍게 여기게 되지 않는가?
    죄의 흔적과 양심의 경고는 남는다. 다만 죄책의 무게를 계속 짊어지고 살지 않게 된다.

  • 신화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된다는 뜻인가?
    하나님의 접근 불가능한 본질로 변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시는 에너지와 신성한 성품에 참여한다는 뜻이다.

🔑 핵심 용어

  • 소조(σῴζω): 구원하다, 건져 내다, 치유하고 온전하게 하다.
  • 칭의: 하나님께서 죽인을 의인으로 선언하시는 법정적 구원의 언어.
  • 화해·화목: 적대하고 멀어진 관계가 다시 가까워지는 구원.
  • 대속: 값을 대신 치르고 종이나 채무자의 처지에서 자유롭게 하는 시장의 언어.
  •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여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
  • 영생: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깊이 사귀며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삶.
  • 신화·테오시스: 하나님의 본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신성한 성품과 활동에 참여하며 하나님을 닮아 가는 것.

자막 원문 (참고)

Kind: captions Language: ko 그러게 말씀입니다. 그냥 한 말씀만 하면 되는데 그걸 안 해 주시네요. 그렇게 [음악] 이제 박원서 작가 하는 얘기잖아요. 아니 그냥 뭐 한 말씀만 하거나 뭐 기침이라도 하면 납득하겠다 그러는데 그것도 안 해 주시죠. 예. 하나님께 섭섭하잖아요. 아, 그래서 구원의 언어 중에 그 관계 언어 너희가 하나님과 화해하라고 하는 그 구원의 언어가 길주다는 신약 성경 27권에 나온 구원에 대한 다양한 층의 이야기들입니다.이 풍부한 것을 제쳐두고 왜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에 머물러 있으려 합니까? 또 풍요로운 아름다운 곳을 두고 왜 좁은 하나의 이해에만 정착하려 [음악] 하나요? 저는 그래서 구약과 신약에 나온이 언어들을 우리가 하나하나씩 잘 보면서 [음악] 우리 삶에서 이미 일어났는데 알지 못했던 그런 구원 체험들을 서로 나눌 수 있고 아 이런 것이 구원이구나 하는 그런 것들을 깨달아서 거기에 참여하려고 노력할 수도 있고 그러한 다양한 경험을 통해서 기독교인으로서 사는 재미 기독교인으로서 사는 기쁨 기독교인으로서 사는 아, 그 충만함 그런 것들을 누리셨으면 좋겠다.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오늘 우리나라 사회에서 살아간 사람들 보면 부정적인 감정들을 그렇게 느낀다고 얘기를 합니다. 저도 학교에서 가르치니까 만나보면 학생들이 참 안 되는 학생들이 많아요. 마음이 아픈 학생들이 많아요. 그런데 학생들을 이렇게 보고 있으면 제일 관통하는 정서가 불안이에요. 불안해요. 그 드라마 모자 그 드라마죠. 장면 받는데 거기 보면 신인이지만 육체 노동으로 먹고 사는 형이 영화 감독 대비하지 못하고 남의 영혼을 헐뜯고 다른 사람한테 폭력적으로 구우는 황동만 그걸 보면서 그렇게 얘기하잖아요. 동생한테. 너 도대체 뭘 바냐? 뭐 성공이냐? 뭐 영화를 하는 거냐? 막 이렇게 물어보니까 그 황동만이라고 하는 등장 인물이 어 난 그냥 불안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불안하지만 않으면 돼.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 얘기를 들었어요. 그 불안하고 무가치함하고 직결하는 겁니다. 직결하게 연결되 있는 거예요. 왜 우리는 왜 불안하냐면 우리가 무가치할까 봐 두려워하는데 불안한데 가치가 있다 없다는 누가 판단해요? 그게 문제거든요. [음악] 사회가 판단해요. 사회가. 그러니까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한다, 못할 것이다라는게 불안하게 [음악] 만들어요. 우리가 사랑을 갈고하게 되 있는데 사랑하는 연인의 사랑도 갈고하지만 사회라고 하는 자기가 사는 삶의 장소에서도 사랑받기 원하거든요. 사회로부터 사랑받기 원하는 말을 바꾸면 인정받고 싶은 거예요. 근데 인정받지 못한다 말을 바꾸면 [음악] 사랑 사회로부터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끼면 불안해요. 인간은 그런 불안정서, 허무의 정서, 실패의 정서 이런게 만연해요. 왜? 우리가 어렸을 때 엄마가 없으면 불안해서 애가 울잖아요. 그런데 엄마가가 가지고 아기를 안아주면 아무것도 엄마가 안 해도 애가 안 불안해서 안 울어요. 엄마가 사랑해 준 엄마가 있으니까. 그런데이 기독교 구원 얘기하라 그러면 자기들이 절박하게 느끼는 불안의 문제, 허무함의 문제, 자기 무가치함의 문제, 실패자라고 하는 좌절감 이런 것들을 말하지 않아요. 잘 그거를 교회 복음 안에서 다루려고 잘하지 않고 매우 피상적인에 답변을 준단 말이죠. 그리고 구원에 대해서 말하자 그러면 자꾸 대세에 지옥하지 않는 걸로 논의를 몰아간단 말이죠. 근데 신약 성경 구약 성도 마찬가지지만 신약 성서를 봐도 아 우리가 자기의 무가치함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 불안한 사람들, 분노하는 사람들, 좌절감 느끼는 사람들, 혼돈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 각각에게 기독교의 구원의 이야기를 듣고 싶게 할 수 있거든요. 신약 성서의 이야기를 제가 오늘 간략하게 해 보겠습니다. 구약 성서에서 제가 말씀드릴 때는 구원을 말하는 단어가 야샤, 고엘, 하다 이렇게 세 가지 단어가 있다고 했는데 신약성서의 특별히 복음서는 그 단어가 좀 하나로 모입니다. 그게 바로 소조라고 하는 동사고 거기서 쏘리아라고 하는 말이 나왔는데 명사죠. 이것은 구원자라는 뜻입니다.이 소조 구원하다 우리말로 이렇게 번역하는 거는 그리스 로마 세계에서 굉장히 다양한 의미를 쓰였고 신약 성경을 이렇게 열어서 소조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는가 쭉 봐도 참 다양하게 사용되 있습니다. 첫 번째 소조 단어가 구조하거나 건져낼 때 그러니까 위험해 건져내는 거 이것을 소조라고 하는 단어가 가르킵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서 8장에서 갈릴리 바다의 폭풍이 이뤄요. 그러니까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우리를 소조해 주세요. 우리가 죽겠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익사의 위협에서 구원해 달라는 거죠. 그죠? 건져내 달라는 거죠. 이게 가장 원초적인 소조의 [음악] 의미입니다. 지금 상황이 어려움 아 덮쳐오는 파도 아무리 내가 어부로 지냈지만 이런 파도에 삼켜지면 살아나갈 수 없을 거라는 공포 이런 것들로부터 나를 구원해 주세요. 그 그 단어가 소조입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의 구원 체험의 하나는 뭐냐? 내가 이런 데서부터 건져내졌다. 기독교인들의 삶에도 위험해서 건져내진 경험이 특별히 있는 분들이 있어요. 이런 분들은 그 경험을 구원 체험이라고 말하면서 서로 나눌 수 있어요. 그래서 찾아보면 그런 체험들이 꽤 많습니다. 두 번째는 병에서 낳는 거. 치유와 회복을 소조라는 말로 사용합니다. 뭐 많아요. 뭐 예수께서 치유하는 기적은 많으니까. 마가복음 5장, 마가복음 10장, 누가복음 8장 등등에 보면 축귀나 그러니까 귀신을 내쫓는 거, 방에 걸린 사람을 고치는 거이 사람들의 치유를 말할 때 헬라어의 다른 단어가 있거든요. 고치다. 세라피오 지금도 요즘도 영어 단어로 세라피라는 말이 남아 있는데 세라피오 그 치다라는 단어 저 헬라어로 근데 그 단어를 사용 안 하고 소조라고 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든요. 그러니까 야고보서 5장 15절에서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할 때이 구원하리니라는 말은 치유된다는 얘기잖아요. 병이 낳는다는 얘기죠. 그래서 소조의 두 번째 것은 치유의 경험입니다. 우리가 기독교인, 신앙인이 살다가 잘 낳기 어려운 병에 걸렸어요. 그런데 그 병을 치료한 경험이 있어요. 그럼 그것은 구원 경험입니다. 그래서이 구원 경험을 우리가 충분히 나눌 수가 있어요. 너무 과정되지 않은 형태로 극적으로 극화해서 말하지 말고 이렇게 이렇게 내가 아프고 어려운 중에이 치유의 경험이 있다. 그런 경험 뭐 있을 수 있죠. 저도 뭐 그런 경험이 있죠. 아, 그런 것 있죠. 그런 건 나눌 수 있습니다. 그다음에 또 어떤 차원이 있냐면 온전함이라고 하는 차원이 있습니다. 이것은 누가복음 7장 50절부터 있는 건데 한 바리새인이 예수를 초청했어요. 자기 집으로. 그래서 가서 음식을 드시는데 상에 앉았는데 그 동네에 죄인이라고 이름 붙인 한 여인이 와 가지고 바리세파 사람 집에 온 거예요. 이거 진짜 말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도둑이 경찰집에 잔치하는데 온 거랑 똑같은 거예요. 그 마을에 죄인을 누가 규정하냐? 파리세파 사람들 주로 그거 하는 거예요. 저 사람 죄인이니까 마을 공동체 내보내야 된다고. [음악] 근데 바리세파 집에 예수님 때문에 잔치하는데 그 죄인이라고 불리던 한 여인이 와 가지고 그 여인이 향류가 당긴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뒤에서 서서 울고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고 예수님의 [음악] 발에 입을 맞추고 향류를 바릅니다. 그때 예수께서 내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소조입니다. 여긴 치유 얘기가 없어요. [음악] 뭐가 그러면 여기 구원이냐? 죄책감이 해소된 거예요. 내가 죄인이라고 사람들이 손가락질 했는데 [음악] 돌아보니까 자기가 죄인이에요. 죄책감 갖고 살았어요. 평생 죄책감 갖고 산다는 거 굉장히 힘든 삶입니다. 근데 [음악] 예수께서 소주하셨어요. 그래서 그 죄책감이 사라져요. 둘째 [음악] 그 사람은 수치스러운 여인이에요. 그래 가지고 바리세파 집에 함부로 못 들어오고 근데이 수치감으로부터 해방시켜요. 왜요? 예수께서이 여인을 내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평안히 가라 하고서이 여인을 인정했거든요. 수치는 어디서부터 오죠? 수치는 타인의 시선에서 오는 거예요. 죄책감은 어디서 오죠? 내 시선에서 오는 거예요. 보세요. 이렇게 한 사람이 길을 걷다가 턱 넘어졌어요. 어쩌고 없이. 그런데 이렇게 보니까 주변에서 아무도 내가 넘어지는 걸 안 봤어. 그럼 난 안수치스러워요. 아프지 그냥. 그니까 일어나가요. 그러니까 수치와 명예는 타인의 시선에서 와요. 죄책감은 내 양심에서 와요. 내면의 목소리예요. 예수께서 내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그렇게 얘기할 때는 내 양심의 소리가 이제 그 양심의 소리로부터 자유를 얻었어요. 내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이 이 말이 말씀을 통해서이 여인은 예수께서 저 사람을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믿음 있는 사람이라고 얘기한 거잖아요. [음악] 타인의 시선에서 이제 더 이상 수치스러운 사람이 아니에요. 그리고 그것도 바로 바리새인의 집에서 이제 너는 평안히 가라고 [음악] 사회적으로 복귀를 시켜줬어요.이 여인은 이제 죄책감 있는 여자. 죄를 지은 여인도 아니고 수치스러운 [음악] 여인도 아니야.이 사람은 온전하게 돼서 구원받은 사람이야. 그래서 평안이 갈 수 있어. 질병이 없어요. 아까는 질병 고친 걸 소주라고 했잖아요. 근데 질병이 없는데 죄책감, 수치감, [콧방귀] [음악] 사회로부터의 배제를 예수께서 돌이키셨거든요. 이걸 또한 구원이라고 [음악] 불러요. 그러니까 우리가 구원 체험했다고 하는 건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죄책감 우리 마음 이렇게 파보잖아요. 그러면 다시는 떠올리기 싫은 죄책감이 있어요. 저도 있죠. 생각하기도 싫은 죄책감이 있어요. 떠올리기도 싫고 다시 거기 근처도 갖고 싶지 않아요. 그러면 그 죄책감이 사로잡히면 사람이 살 수가 없어요. 근데 그 죄책감 죄는 남아서 나의 양심에서 말을 하지만 그래서 앞으로 그런 죄를지면 안 된다고 내 양심에 대고 신앙 양심에 대고 얘기하지만 죄책감을 계속 가지고 무거운 짐을 가지고 살지 않아요. 영화 미션 있잖아요. 미션에 보면 노예 사냥꾼인 한 사람 나오지 않습니까? 로보트 드니로.이 사람이 노예 사냥을 했는데 회심하고 신부랑 같이 자기가 사냥하던 과란니족 마을에 간단 말이죠. 그런데 자기가 노예 사냥하면서 입었던 갑옷 무기들을 다 짊어지고 이지고 가요. 신부가 그거 이제 벗어 놓으라고. 그래도 못 벗어요. 왜냐면 이것이 자기 죄책이에요. 일종의 상징이거든요. 은유. 간신이 거기 과란니 마을 그 높은 데로 간신이 그 큰 짐을지고 올라갑니다. 그런데 그걸 본 한 과란이족이 칼을 딱 빼들어요.이 사람이 자기 동족 노예 사냥하던 사람이거든요. 그러니까 모두 다가 긴장해요. 근데이 로버트 드니로 분이 저항할 생각이 없어요. 근데이 과란이 족쪽 한 사람이 가더니 목을 베는게 아니라 그 사람이 갖고 온 죄책의 무게를 끊어서 던져 버립니다. 그런 겁니다. 그런 거예요. 그 사람이 노예 사냥꾼이었다고 하는 죄가 있지요. 근데 다시는 사람을 노예로 팔지 않을 거예요. 근데 거기 죄책감은 안 거예요. 그러니까 죄책감이 없어졌다고 나쁜 놈 이렇게 얘기하는 거 아니에요. 죄가 남은 흔적이 계속 우리를 고발해 고발할 거예요. 그런데 죄책의 무게를 치고 살진 않게 해 줘요. 참 [음악] 고마운 말이죠. 우리가 다른 사람이나 나 자신에게 지었던 죄 생각해 보면 고기 들고 다닐 사람은 몇 없어요. 그런데 그 죄책을 끊어서 보내주니 얼마나 고맙습니까? 수치시도 마찬가지고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 많았어요.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 보면 밤에 이불 같은 거 뭐 하다가 그것도 지칠 정도로 많이 했잖아요. 그리고 사회적 관계에 깨진 거 그 모든 것이 다 회복되는 그 경험 그 구원 경험. 구원 경험이에요. 그러면 얼마나 우리가 할 말이 많아요. 수치심, 죄책감, 관계 파탄으로부터 오는 고통 이런 걸로부터 회복되는 경험이 구원 경험이에요. 또 아 누가복음서 19장 10절 보면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왔다 할 때 소조인데 그 사개 사건의 마무리 얘기입니다. 그때 그 사개 세리장 사계가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나눠 주겠다. 이거 뭐 뭡니까? 구원이라는 건 뭐냐면 경제적 양극화적 어떻게 됐든 세리장 사격 재산이 많은데 이렇게 경제적 양극화 혹은 파탄데 한쪽에서 부유하고 한쪽에서는 궁핍한이 상황을 구원되지 않는 상황이라 생각하고 세리장 사개가 자기의 제산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경제적 격차 때문에 벌어졌던 세리장과 마을 사람의 관계가 재산의 절반을 나누는이 결단으로 해서 회복돼요. 사회적 관계의 회복과 내면의 변화가 동시에 있어요. 이게 소조 구원의 경험이에요. 그러니까 이런 경험은 우리 인생 삶에서 찾아보면 많아요. 그게 그리스도 신앙으로부터 오는 구원 경험이에요. 그러니까 그 경험이 우리에게 있으면 참 감사한 거예요. 참 감사하고 그 경험을 누리고 사는 겁니다. 마음서 5장에 12년 동안 혈루증 앓는 여인 이야기가 나와 있는데 이걸 보면 소재라고 한 말이 전체적으로 나온 얘기라고 알 수 있습니다.이 여인이 아파요. 근데이 아픈이 병은 레위기 15장에 따르면 정결법에 따라서 사회적 종교적 격리를 해야 돼요.이 이 여인이 이거 알려고 온갖 의사 다 찾아다니다가 몸도 더병들고 경제적으로 파탄됐어요. 예수께서 그 여인을 생물학적으로 치유하셔요. 다 치유됐다고 해서 사회적으로 복귀시키셔요. 내면의 수치와 공포로부터 자유를 주셔요. 이게 구원 경험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소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그러니까 우리 경험이 얼마나 풍부해요.이 이 구원 경험이 이런 것들이 신앙 언어로 포착될 수 있고 우리 신앙생활 속에서 이런 것들을 맛본다 얘기할 수 있겠죠. 이게 이제 복음서의 주요 얘긴데 바울 사도 바울의 글에 보면요 구원 경험을 여러 가지 언어로 얘기하는데 그것 참 보다 보면 참 흥미롭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계신 거는 특별히이 바울의 여러 언어 중에 하나만 얘기해요. 예를 들어 바울의 언어로 보면 법정의 언어가 있고 관계의 언어가 있고 시장의 언어가 있고 연합의 언어가 있거든요. 그게네 가지 종류의 언어가 있는데 우리나라 개신교가 제일 많이 하는 건 법정적 언어예요. 생각해 보세요. 죄 은혜 은혜는 사면이야. 사면 사면 고발 >> [콧방귀] >> 심판 이거 다 법정에서 일어난 일이잖아요. 왜 법정적 언어를 썼을까? 법정처럼 절박한 데가 없어요. 내가 피의자 범죄자로 고소당했어요. 그래서 법정에 섰어요. 그것만큼 내가 있는 돈, 없는 돈, 있는 자원, 없는 자원 다 끌어다가 나를 무죄 방면 하고 싶잖아요. 그만큼 절박한 상황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변호사 예전에는 수학자가 되고 싶었던 이유 중에 하나가 뭐냐면 그 절박한 운명이 결정되는 자리. 그러니까 그리스도 복음을 말하기 너무 좋아해요. 아, 인간이 죄인이야. 그래서 고발됐어요. 법정에 율법이 고발해요. 그때 우리를 위해서 대신 나타나 주는 분이 있어요.이 히브리서에도 그런 얘기가 있는데 히브리서도 그런 걸 하죠. 인간이 내 죄인인 내가 이걸 도저히 자기가 죄가 없다고 할 수 없어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통해서 의인으로 선언하시고 하나님의 새로운 공동체로 그를 불러요. 그러니까 구역 성경의 언어 우리가 저 전에 했던 구약 성경의 언어로 하면 대가를 하나님이 치르시는 구원이니까 파다예요. 왜 우리를 구하시냐? 우리의 아버지 되셔요. 그래서 고엘이에요. 파다와 고엘의 구원을 그 법정적 언어에서 우리가 볼 수 있어요. 그게 칭의 뭐 이런 거예요. 근데 그게 바울이 말하는 구원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우리가 정말 확실히 아니 알아야 됩니다. 이게 없다는 거 아니에요. 두 번째 화해의 언어가 있습니다. 이건 관계 언어죠. 관계의 은유를 통해서 구원을 말하는 겁니다.이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했다라는 말을 써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9절 이데요.이 화목이란 말이지만 이거 하탈락케라고 하는 헬라어인데 이거는 법정의 언어가 아니에요. 법정에서 뭐 화해하세요라고 하는 거는 법정 선고가 내기 전에 뭐 화해의 여지가 있으면 화해라 그러면 법은 거기서 물러놔요. 아니 뭐 친구끼리 싸웠어? 법정 갈래 화여할래? [웃음] 법정에 갔어. 그래도 거기서 화해하면 법정은 거기서 물러나요. 그러니까 이건 관계의 언어거든요. 이것은 적대하던 사이가 우정의 사이로 멀어진 사이가 각각 사이로 뒤틀린 사이가 원활한 사이로 이런 관계의 언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과 자기를 화해하기를 원했다는 거예요. 세상을 자기와 화해하기를 원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후서 5장 20절 제가 세 번역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우리가 엠베소더 대사라는 거야. 대사. 그럼 그 대사의 메시지가 있을 거 아니야.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리하여 간청합니다. 그러면 누가 간청하는 거예요? 여기에 우리가 있어요. 근데 바울볼이 와예요. 바울 일행이. 그리고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대사예요. 엠버서드예요. 근데 그런 식은요. 우리가 대신 전할 말 있어요. 그리스도의 말을. 그 뭔가요?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간청해요. 그래서 그 무슨 말인지 들어다 봅시다. 그랬더니 뭐라 그러냐면 여러분은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건 뭐예요? 우리가 하나님을 별로 보고 싶지 않다는 거잖아. 우리가 하나님을 적대하거나 적대한다는 말을 하니까 우리가 죄짓은 사람이니까 하나님이 거룩하시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보기 싫어한다. 그렇게 생각이 쉽게 할 수 있지만 저는이 구절을 아 이렇게 생각합니다. 인간도 하나님한테 섭섭한게 있습니다. 하나님한테에 불만인게 있고 욥의 아내처럼 욥에게 그렇게 살 바에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세요. 하나님을 저주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욕 같은 사람을 보고 욥의 아내가 당신은 그런 말 할 자격이 있어. 그렇게 생각한 거 같아요. 욥의 아내를 어리석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욥의 아내도 자식 열을 잃은 사람이에요. 그리고 자기 남편이 지금 죽게 생겼어요. 피고병에 걸려서. 그니까 욥의 아내가 그런 말 했다고 욥의 아내 그 어리석은 여자야. 꼭 그렇게 얘기할 필요 [음악] 없는 거 같아. 인간도 하나님을 향해서 섭섭한게 있고 안타까운게 싫은게 있고 하나님 보기 싫은게 있어요. 하나님 생각하기 싫은게 [음악] 있어요. 하나님하고 싸우고 싶은 주제가 있어요. 제가 아는 한 권사님 얘긴데이 권사님 가족이 부부의 자식이 셋시 있었는데 운전을 하다가 교통 사고가 났어요. 그래서 막내가 큰 일을 당했고 둘째가 몸에 상처를 얻게 됐습니다.이 권사님이 새벽 기도 나오시는데 제가 신방 갔더니 그 권사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제가 왜 새벽 기도 나가는 줄 아세요? 그래서 그 그 교회는 원래 새벽 기도하는 교회가 아니었거든요. 왜 나가세요? 이런저런 얘기 하시다가 그렇게 하시더라고요. 저는요. 매일 하나님하고 싸워요. 설거지하다가도 싸워요. 왜 나한테 그렇게 했냐고. 왜 우리 가족한테 그렇게 했냐고. 어, 바울이 그 권사님 같은 분을 찾아가서 당신 죄인입니다. 그렇게 얘기하는 [음악] 그런 언어로 얘기하지 않아요.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리하여 간청합니다. 하나님과 그냥 화해하세요. 그 화해의 근거가 뭔가? 그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가장 아끼는 그분을이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자리에 넣어 가는 걸 허락해서 그분이 파다하셨어요. 십자가에서 파다하셨어요. [음악] 그러니 하나님도 속상한 분이라고 당신의 심정을 모르지 않다고 그러니까 화해화해할 수 있죠. 하나님 물론 하나님도 인간에서 섭섭한게 너무 많으시죠. 분노하실게 많고. 근데 인간도 살다 보니까 하나님한테 섭섭한 거 분노할게 많죠. 그때 이때는 화해 언어를 사용하는 거예요. 이거 이런 경험을 한 분들이 있어요. 근데이 화의 언어를 잘 모르니까 기독교인들이 잘 모르니까 하나님하고 하나님한테 화난 건 많은데 어떻게 하나님하고 잘 지내야 될지 몰라요. 어떻게 구원의 삶을 사는지 모르고 그냥 하나님한테 화는 나 있고 내가 죽어서 천당 가는 건 아는데 구원의 삶을 살 수가 없어. 왜냐면 화의 언어를 모르면 예수 그리스도를 대리해서 바울 사도가 우리에게 간청을 하는구나. 그냥 권고하는 정도가 아니야. 간청을 해. 그리스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간청을 해. 하나님하고 화해하라고. 그 우리가 그 간청을 들었어요.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돼요? 하나님 하고 항의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하고 화해하시라고 이렇게 간청하지요. 참 놀라운 말이죠. 이 화해의 언어가 없으면 우리 기독교인의 삶에 중요한 경 후원 경험을 할 통로가 없습니다. 하나님하고 싸우면 계속 죄짓는 거 같죠? 그럼 하나님의 뜻은 알아야 되겠어. 우리 집에 일어난이 엄청난 사고를. 그런데 마땅한 언어가 없어요. 내가 하나님 앞에 분노하고 화가 났는데 그렇게 하면 안 된대요. 아, 근데이 고린도후서 5장 20절 보면 아, 그런 경험도 가능한 거구나. 그리고 하나님도 가장 고통스러운 아들을 잃는 경험을 했는데 나랑 비하구나. 내 심정을 아시겠구나. 화의 길이 생기겠죠. 이걸 어떻게 칭위의 원어로 다 포섭합니까? 바울은 참 잘 알죠. 그 우리가 이걸 뒤집어 보면 사도 바울이 선교했던 사람들이 어떤 분들인지 알 수 있어요. 하나님 하나님에게 화가 나 있는 사람들인 거 같아요. 자, 내 인생이 너무 억울해요. 그런 분들 말이죠. 또 시장의 언어도 있거든요.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6장 20절 보면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 되었다.요 말은 아고라조, 엑사고라조 말인데 강조입니다. 뭐냐면 본래 시장에서 물건을 사드릴 때 쓰던 말이거든요. 그러니깐 우리가 팔린 거야. 우리가 팔렸는데 그 값을 치고 다시 산 것이다. 이렇게 얘기한 겁니다. 지금은 많이 받아들이지는 것 같진 않지만 고존학자 아돌프 다이스만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요게 신전에서 노예 해방 관습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신의 이름으로 대금을 지불 하면 노예가 법적으로 자유이 되는 절차가 있었다는 거예요. 신전에서 이런 것이 반영되 있지 않겠느냐. 바울의 언어에 뭐 그랬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는데 요게 바로 대속물입니다. 예수께서 대속하셨다. 대신 값을 치른 거예요. 이거 시장의 언어죠. 어떤 것을 살려면 시장에서 그냥 주나요? 값을 치어야 얻을 수 있죠. 그러니까이 시장에 익숙한 사람들은 그 언어로 구원을 이해할 수 있는 거예요. 아, 내가 채무노회로 팔렸는데 고혈되신 하나님께서 나를 값을 치르고 사셨구나. 구약의 언어로 하면 그렇게 되겠죠. 제가 아는 구약 학자 한 분은 이슬람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할 때는 시장의 언어가 제일 적합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한 걸 기억합니다. 그니까 시장의 언어가 우리가들을 땐 낯설지만 이게 아 이슬람 사람들에게는 아주 적절하게 이해되는다. 그렇게 얘기하더라고요. 그리고 제가 이제 세 개 얘기했는데 이제네 번째 마지막으로 연합의 언어가 있습니다. 에게 그리스도와의 연합인데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억울을 바울이 정말 많이 씁니다. 100번 이상 쓰는 거 같아요. 구원이 외부에서 법정이나 관계나 시장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 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참여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산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것은 그 오늘날 좀 철학적인 얘기를 하면 실존적인 변화, 새로운 존재로 탄생하는 거잖아요. 연합, 연합해서 탄생하는 거예요.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거. 그니까 존재가 변화한다는 것은 체질이 달라진다는 거예요. 제가 가끔 체질 얘기를 하는데 원래는 죄인인데 죄인이란 거 하나님과 떨어져 있었는데 그리스도 안에 있으니까 체질이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 있는 사람이 됐어요. 그러면 어떻게 된 거냐? 바로 새로운 전체, 연합의 언어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칭의의 언어, 관계의 언어, 시장의 언어, 그다음에 연합의 언어.이네 개가 있습니다. 제가 복음서 얘기했죠. 공원복음. 그다음에 바울 얘기했습니다. 그리고에 마지막으로 요한복음서 얘기할 수 있는데 요한복음서 보면 구원이란 말도 있지만 중요하게 나타난 말이 영생이거든요. 영생. 우리가 영생이라고 번역하지만 실제로 지격하면 다음 세상의 생명 뭐 이런 뜻인데 여하튼 영생이 뭐냐? 여기도 마찬가지예요. 죽어서 가는 천당을 뜻하는게 아니에요. 요한복음서 17장 3절에 보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게 뭔가? 그는 아주 명확한 거예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깊은 사김 속에서 내가 그분 안에 있고 그분이 내 안에 있는 그런 경험을 하면서 사는게 구원이에요. 내 안에서 나도 생각하지 못한 거룩한 생각, 아름다운 생각, 위대한 생각, 나를 넘어서는 생각 그래서 나를 설레게 하는 그 생각들. 그 출처 내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에요. 그래서 내가 그분 안에 있고 그분이 [음악] 내 안에 있어요. 그래서 요한복음서 5장 24절 보면 이렇게 하나님과 사기 살면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어요. 죽어도 죽은게 아니에요. [음악] 우리의 육체 생명이 육체적 생명이 다 해도이 하나님과 누리는이 영생의 삶은 끝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요한복음서를 강조하는 우리가 서방교회 전통에 있으니까 서방교회는 주로 법정적 언어로 구원을 해석했거든요. 그래서 뭐 죄, 은혜, 뭐 뭐 용서, 심판 이런 얘기를 많이 했단 말이죠. 그런데 동방 정교회는에 주로 연합의 언어를 많이 사용했어요. 연합의 언어. 그러니까 법종적 언어를 사용하면 법정과 도덕이에요. 법정이 가지 않으려면 도덕적으로 살아야 되거든요. 그렇잖아요? 근데 동방정교회는 구원을 주로 요한복음서를 중심으로 이해한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여기는 가장 중요한 단어를 뭐라고 하냐면 우리는 죄가 문제고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용서 곧 은혜를 받아야 된다. 이렇게 얘기하는데 동방정교에서 가장 큰 문제는 뭐냐면 하나님과 떨어진 거예요. 하나님으로 분리됐어요. 그래서 그거를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됐다고 얘기해. 이게 가장 큰 문제예요. 요한복음서에 같은 언어예요. 하나님과 떨어져 있는 거예요. 그러면 떨어져 있으면 어떻게 하는게 저 구원받는 거예요? 하나님과 같이 하나가 되는 거잖아요. 하나님과 하나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변해야 되잖아요. 내가 내가 새우 알러지가 있으면 새우가 많은 시장에 갈 수가 없잖아요. 그럼 내가 하나님과 더불어 살려면 내가 하나님이 우리처럼 되셨는데 이게 아주 유명한 아타나시우스의 성육신론에 나온 건데 그분이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를 신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얘기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그분과 연합이 되려면 그분과 하나가 되려면 우리가 하나님처럼 돼야 되는 거예요. 신화. 그러니까 그걸 데오티스 이렇게 얘기하는데 하나님처럼 돼야 되는 거예요. 서방교회는 법정적 도덕적을 놓으니까 죄와 용서와 은혜와 의인이 중요해. 그리고 심판 때 가. 근데 동방정교회는 제일 중요한 문제가 뭐냐면 하나님과 떨어진 거야. 하나님으로부터 소회된 거야. 그러니까 하나님과 하나가 돼야 돼. 하나님과 하나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돼?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신 것은 우리가 신이 되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게 아타나시우스의 얘긴데 바로 여기에 동방 종교의 중요한 때우스 있어. 하나님처럼 된다라고 하는 중요한 구원의 통찰이 있습니다. 근데 오해는 하지 말아야 됩니다. 왜냐면 신화는 하나님처럼 된다는 건 우리의 본질이 하나님처럼 된다는게 아니라 그게 하나님처럼 될 순 없습니다. 아 하나님의 적근 불가능한 본질이 아니라 우리에게 베풀어진 에너지가 있어요. 하나님의 본질로부터 나오는 에너지. 그 에너지에 참여한다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신의 성품에 우리가 참여하는 거예요. 이게 베드로후서 1장 4절에 명확하게 남 나와 있어요. 신자가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예요. 예수를 믿는다는 건 하나님의 신성한 성품에 참여한다. 이렇게 번역되 있는데 아주 이런 구절을 성서에서 찾아보면 성경에서 찾아보면 너무 많이 나와요. 너희가 하나님의 장성한 분량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야 된다. 하늘 계신 하나님 너희 아버지를 닮아라. 이렇게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자비론 활동에 인간이 하나님처럼 활동하고 그 에너지죠. 하나님의 성품을 닮으라고 하는 거. 그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라고 하는 거. 약간 오해 소지가 있지만 요한복음서에는 아 너희를 다 신이라 하였거늘이라고 하는 구약 성경의 말을 인용하는 구절도 있어요. 개신교와 같은 서왕교회 눈에는 그런 구절이 눈에 잘 안 보여요. 성경을 몇 똑똑해도 베드로후서 1장 4절 하나님 믿는 사람이라고 하는 건 신성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거다. 하나님처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처럼 자라는 것이다. 이게 잘 눈에 들어오지 않아요. 왜냐면 그런 걸 쳐다볼 시선이 안 안 되거든요. 우리가 우리가 아는 것에 눈이 가요. 그런데 이러한 성경의 언어를 자꾸 보면 하나님의 구원의 여러 가지 모습을 볼 수 있거든요. 구원받는다는게 뭐냐?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고 우리의 인격이 우리의에 체질이 하나님 체질이 되는 거죠. 그건 너무 아름다운 얘기예요. 어떤 분노할 일 같은게 생겼는데 분노하는 사람과 화를 찾는 사람과 애시당초 화가 안 난 사람과 다른 거잖아요. 누가 모욕을 했어요? 모욕적인 말을 했어요. 모욕적인 말을 못 참고 결투하는 사람과 모욕적인 말을 당했으나 참고서 사랑을 베풀어야지 하는 사람과 네가 나한테 모욕적인 말을 했다고 해서 내가 화낼 이유는 없다 하는 사람하고 완전히 다르죠. 신의 성품을 우리가 얻는다고 하는 것은 신의 성품에 참여한다고 하는 것은이 세상 정말 참 잘 사는 길일 수 있습니다. 그게 구원받은 사람의 삶일 수 있죠. 지금까지 제가 공간보험에 특히 나오는 소라는 말 바울의 법정적 칭의 언어, 관계 언어, 시장의 언어, 그다음에 연합의 언어 얘기했고 요한복음서의 영생 얘기했고 그다음에 동방정교회 때우스에서 신화 이야기했습니다. 이게 신약 성경 그 크지도 않잖아요. 그 길주다는 신약 성경 27권에 나온 구와 구원에 대한 다양한 층의 이야기들입니다.이 풍부한 것을 제쳐두고 왜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 이해에 머물러 있으려 합니까? 또 풍요로운 [음악] 아름다운 곳을 두고 왜 좁은 하나의 이해에만 정착하려 하나요? 저는 그래서 구약과 신약에 나온이 언어들을 구원의 구원을 표현하는이 언어들을 우리가 [음악] 하나하나씩 잘 보면서 우리 삶에서 이미 일어났는데 아지 못했던 구원 그런 구원 체험들을 서로 나눌 수 있고 [음악] 아 이런 것이 구원이구나 하는 그런 것들을 깨달아서 거기에 [음악] 참여하려고 노력할 수도 있고 아 그러한 다양한 경험을 통해서 [음악] 기도 기독교인으로서 사는 재미, 기독교인으로서 사는 기쁨, 기독교인으로서 사는 아 그 충만함 그런 것들을 누리셨으면 좋겠다. 이렇게 말씀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