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봉사가 부담스러운 나, 믿음이 부족한걸까요?ㅣ권연경 교수ㅣ잘잘법 244회

잘잘법 · 2026-09-16

채널: 잘잘법 |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lhYNr7L27BI | 길이: 18:55

요약

🎯 TL;DR — 권연경 교수는 "믿음이 부족해서" 봉사를 부담스러워한다는 통념에 맞서, 교회의 종교적 언어 사용이 청년을 부당하게 옭아매는 경우가 많으며 일상의 삶 자체가 예배라는 신약의 통찰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핵심 논지 — 청년들이 교회 봉사·헌신 요구에 부담을 느낄 때 이를 곧바로 "믿음 없음"으로 단정하는 것은 위험하며, 실제로는 교회의 구조적 필요(노동력 동원)와 청년 개인의 현실적 시간 제약이 충돌하는 문제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종교적 언어를 신중히 사용하고, 일상의 삶 자체를 예배로 인식하는 신약의 패러다임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 영상 구성

  • 서울로 옮기며 교회를 떠나려던 학생이 장로에게 상처받은 실제 사례 소개
  • 그 발언이 나온 구조적 원인(교회 중심 사고) 분석
  • "믿음 없다"는 말이 왜 위험한지, 실제 시간 충돌 문제로 재정의
  • 종교적 언어(맹세·계시)가 권위/권력으로 오용되는 메커니즘
  • 이분법적(성/속) 사고라는 한국 교회의 근본 문제 제기
  • 신약의 대안: 일상 전체가 거룩함의 무대, 삶 자체가 예배라는 비전
  • 청년들에게 주는 결론적 권면

━━━ 본문 ━━━ 상처받은 청년의 사례 화자가 만난 학생은 지방 교회에서 평생 성실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서울로 이주하며 교회를 옮기겠다고 말씀드렸다. 담임 목사는 이해해줬지만, 평소 좋은 분이라고 여겼던 장로들이 "넌 뭐 먹고 튀냐"는 식의 발언으로 청년이 그동안 헌신해온 선교여행·봉사 전체를 부정하는 듯한 말을 쏟아냈고, 청년은 오랜 시간 울며 힘들어했다고 전한다.

장로의 발언이 나온 구조적 이유 화자는 장로가 나빠서가 아니라 교회의 필요를 최우선으로 두는 사고 구조 속에서 그런 말이 "저절로 튀어나온" 것이라고 설명한다. 청년들이 떠나면 교회를 굴리는 노동력(주일학교 교사, 성가대, 찬양팀, 심지어 행정일)이 빠져나가기 때문에 아쉬움이 서운함으로, 나아가 상처 주는 말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진짜 문제는 시간표 충돌 화자는 청년들이 실제로 힘들어하는 이유가 믿음 부족이 아니라, 학업·아르바이트에 이미 시간을 다 쓰는 상황에서 교회가 추가로 많은 시간을 요구하기 때문이라고 짚는다. "공부를 포기하든지 알바를 포기하든지" 양자택일을 강요당하는 상황에서 이를 "믿음이 없어" 한마디로 처리하면 청년은 저항하지 못하고 자책하게 되며, 이 자책이 심해지면 마음의 병으로 이어지기도 한다고 말한다.

종교적 언어의 권위 오·남용 화자는 예수님이 "맹세하지 말라"고 가르친 이유를 인용하며, 상대를 설득할 자신이 없을 때 하나님·예수님의 이름을 동원하는 것이 곧 맹세와 같은 행위라고 설명한다. "믿음이 없어", "헌신이 부족해" 같은 표현이 대화와 조율 대신 권위(때로는 "계시적 결단"이라는 말까지)로 청년을 압박하는 데 쓰이며, 권위가 건강하지 않으면 권력으로 작용한다고 지적한다.

이분법적 사고라는 근본 문제 화자는 한국 교회의 근본 문제로 종교적인 것과 종교적이지 않은 것, 교회와 바깥, 예배와 일상을 구분해 전자만 중요시하는 사고를 지목한다. 이는 구약의 거룩한 시간·공간 구분(안식일, 성전)에서 비롯된 것으로, 신약 성경이 이미 극복한 "구시대 유물"이라고 규정한다.

신약의 대안: 삶 자체가 예배 화자는 신약 성경의 "가장 과감한 모험"이 일상 속에서 거룩함을 구현하는 비전이라고 설명한다. 바울의 로마서를 인용하며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바치는 것"이 곧 삶 전체가 드리는 예배라고 강조한다. 학생에게 적용하면 공부와 아르바이트 자체가 성실히 감당해야 할 소중한 "제사"이며, 이를 인식하는 것 자체가 예배라고 말한다.

청년들에게 주는 권면 화자는 청년들이 자신을 너무 쉽게 탓하지 말고, 종교적 언어의 권위에 흔들리지 않으면서 자신의 시간표와 상황을 냉정하게 따져볼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조언한다. 아울러 목사들에게는 청년들에게 신앙적 언어를 쉽게 갖다 대지 말고, 청년들의 실제 상황과 아픔에서부터 대화를 시작해 달라고 당부한다.

💬 결정적 발언

"그 사고 속에서는 그런 말이 툭 튀어나온 거니까. (…) 청년들을 재심히 살피는 그런 교회가 아니라 사실은 교회의 필요를 가장 우선도로 생각하면서 그게 청년들이 동원되는 구조였던 거죠." "이런 상황에서 네가 믿음이 없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위험한 해결책인 거죠." "우리가 좀 더 신약 성서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예배의 패러다임을 잘 배운다면 문제가 훨씬 더 간단해질 것 같은데요." "우리 청년들에게 너무 신앙적인 언어를 쉽게 갖다 대지 좀 말았으면 좋겠다."

⚖️ 화자가 다룬 반론·한계

  • 화자는 "정말로 믿음이 없어서 자꾸 회피하는 걸 수도 있다"고, 청년 쪽의 진짜 믿음 부족 가능성 자체를 배제하지 않는다.
  • 청년들이 "아직 다 잘하지 못해서 성실하지 못한 부분도 많다"고 인정하며, 청년 개인의 부족함이 전혀 없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 목사들에 대해서도 "고민하시는 분도 많이 계신다"며 모든 목회자를 일반화하지 않는다고 밝힌다.

🧩 핵심 용어

  • 맹세(하지 말라) = 예수님이 권위(하나님·예수님의 이름)를 동원해 상대를 설득·압박하는 것을 금한 가르침
  • 계시적 결단 = 일부 목사가 반대 의견을 누르기 위해 동원한다고 언급된 표현, 반박을 어렵게 만드는 권위적 언어
  • 이분법적/이원론적 사고 = 종교적인 것(교회·예배)과 세속적인 것(일상·바깥)을 구분해 전자만 중요시하는 사고방식
  • 산 제사(로마서) = 짐승을 죽여 바치는 옛 제사가 아니라, 자기 몸(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

🔎 보완 & 확인

  • 배경 보완: 화자가 언급한 "일주일 삶 자체가 예배"라는 주장은 로마서 12장 1절("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을 배경으로 한 것으로 보이며, 영상 내에서 화자가 직접 이 구절을 언급한다.
  • 사실 유의점: 화자가 말한 "신약 성경이 극복한 구시대 유물" 등의 신학적 평가는 권연경 교수 개인의 해석적 주장이며, 모든 신학 전통에서 동일하게 받아들여지는 통설은 아닐 수 있다(확인 필요).
  • 맥락 보완: 영상은 '잘잘법'(잘 믿고 잘 사는 법) 채널의 문답 형식 콘텐츠로, 권연경 교수는 숭실대 재직 중이며 학생 상담 경험을 근거로 발언하고 있다는 점이 자막 내에서 확인된다.

자막 원문 (참고)

Kind: captions Language: ko 제가 이렇게 실제로 우리 학생들하고 제 대화를 좀 많이 하는 편이거든요. 하다 보면 교회 생활에 관한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근데 대기해 보면 멋진 이야기보다는 조금 마음 아픈 이야기가 나올 때가 많습니다. 서울에서 멀지않는 지방에서 이제 자랐고 그 교회에서 평생 교회 생활을 해 왔고 열심히 사실은 이제 중고 중고등부 때까지 그리고 대학교 2학년 때까지 열심히 봉사했던 근데 이제 주말마다이 가는게 사실 뭐 아주 멀지 않아도 부담이니까 그래도 이제 조금 학년이 올라가면서 이제 서울에서 이제 교회 생활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이제 교회에다가 말씀을 드렸어요. 제가 남매 목사님 같으면 고민을 잘 들어보고 그런 말 하잖아. 그죠? 아 그렇구나. 그래 그러면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서울에서도 신앙생활 잘하고 그리고 이렇게 또 이렇게 뭐 종종 또 이렇게 와서 또 이렇게 같이 인사도 하고 그러자. 그리고 사실 축복기도 하고 보낼 것 같거든요. 근데 그 교회에서는 약간 악당을 한 거예요. 교회를 떠나는 마당이니까 정을 딸려 그랬을까요? 그러니까 악담을 하는데 그 악담이게 결국은이 친구가 어릴 때부터 교회 생활을 잘 해 왔거든요. 그리고 칭찬받으면서 이렇게 참 착한이니까. 그리고 열심히 해 왔고 근데 지금까지 자기가 해왔던 그 모든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식의 말을 듣기 시작한 거 아닙니다. 그것도 자기가 기대 믿고 의지했던 그런 장로님이나 이런 분들로부터 나쁜 분들이 그런게 아니라 그냥 정말 좋은 장로님이라고 말할 주는 분들이 그런 얘기를 하기 시작하는 거니까 그리고 또 이렇게 좀 심한 경우에는 그 친구 같은 경우는 선거 여행을 이렇게 막 다녀왔었는데 그 뭐 자기 돈 돈도 내지만 교회도 후원도 많이 하잖아요. 비슷한 돈 내고 선교 여행도 이렇게 보내주고 했는데 그러고 나서 넌 가냐? 약간 뭐 먹고 떠나냐? 약간 인식의 느낌으로 얘기를 하니까 그것도 엄청 상처가 되는 거니까 자기는 자기 나름 시간 투자해서 자기 돈도 좀 내고 그래서 자기는 선교행 간다고 간 건데 그게 먹고 친 것처럼 그렇게 얘기하니까 사실은 이게 너무 이게 힘들죠. 그니까 이렇게 자기가 살아온 사실은 자기로서는 자기 인생 전부인데 그걸 부정당하는 그런 경험을 하고 그 눈물을 사랑했던 교회에서 그런 경우 하니까 애가 그걸 견디기 쉽지가 않은 거죠. 굉장히 오랜 시간 동안 울고 불고 날리가 났었습니다. 예. 저는 왜 이런 상처를 줘야 되지? 근데 그 장론을 생각해 보면 왜 그런 얘기를 했을까 생각해 보면 그분 나빠서 그런게 아니에요. 근데 저절로 그런 얘기 튀어나온 거야. 근데 왜 그런 얘기 태어나냐면 장로님은 그 자기 교회 생활에 최적화된 사고를 하고 있었던 거지. 그 사고 속에서는 그런 말이 툭 태어나온 거니까. 그 사고가 뭐냐면 청년들을 재심히 살피는 그런 교회가 아니라 사실은 교회의 필요를 가장 우순도로 생각하면서 그게 청년들이 동원되는 구조였던 거죠. 그니까 그 청년이 떠나면 그만큼 이손이 빠져나가는 거예. 그러니까 아쉬운 거예요. 섭섭한 것이니까. 그런 면에서 우리가 그 청년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게 되고 그 좀 더 심하게 나가면 청년들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하게 되는 거지.이 이런 식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우리가 지금 누구를 위해서 존재하는 교회인가 하는 질문을 근본적으로 하게 되죠. [음악] 일단은 우리 교회 상황을 생각해 봤을 때 이게 정말로 믿음이 없는 걸 수도 있겠죠. 우리가 정말 믿음이 없어서이 자꾸 회피하는 걸 수도 있는데 하지만 또 많은 경우에 특히 우리 어 제가 이렇게 만나는 학생들 같은 경우에는 정말 좋은 의도로 신앙생활 하는 친구들이 많아요. 근데 그런 친구들이 굉장히 힘들어해요. 근데 힘들어하는 이유가 뭐냐면 실제로 힘들어요. 뭐가 힘드냐? 교회가 요구하는게 실제로 너무 많은 거 아니까? 자기가 학정인데 학정인데다가 요즘 우리 숭실대 같은 경우 해도 학생들이 상당수가 아르바이트를 해야 됩니다. 알바를 해야 돼요. 시간 엄청 많이 쓰거든요. 그래도 교회 생활 하잖아요. 이제 교회도 많은 시간을 요구해요. 그럼 어떻게 시간을 배분하는게 맞을까? 그 교회가 요구하는 대로 다 하려면 알바를 줄이든지 아니면 공부를 들어놓을 수밖에는 없는 거니까. 근데이 두 가지 사실 포기하기 힘든 거잖아요. 그러면서 굉장히 고통스러운 상 고통스러운 상황을 겪는 중가 많은데 이런 일 이리 상황이 되는 이유 중에 하나가 교회가 사실은이 청년들 교회 입장에서는 청년들이 굉장히 중요한 노동력이잖아요. 교회라는이 시스템을 굴리려면 사람이 필요하고 그리고 또 청년들이 전통적으로 굉장히 또 많은 일을 해 왔고 그 돌아가려면 청년들이 주일학교 교사를 해 줘야 되고 청년들이 성가들을 해 줘야 되고 청년들이 찬양대에 또 이렇게 악기도 하고 찬양대 팀원도 해 줘야 되거든요. 그리고 또 필요한 경우는 이게 심지어 이렇게이 목회자 자녀들 같은 경우에는 행정일을 하는 경우도 있고 거의 전도사 역할을 이렇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역할을 어릴 때도 해 왔던 거고 그게 점점 많아지는 거잖. 아주 어릴 때는 괜찮지만 대학으로 학교 다녀야 되고 알바 해야 되고 이런 상황이 되면 쉽지가 않아지는 거지. 그러니까 교회를 유지해 나가기 위한 요구하고 실제로 학생 그 개인의 삶을 유지해 나가기 위한 그 스케줄이스로 충돌하니까 이런 문제가 생기는 건데 이런 상황에서 사실은 네가 믿음이 없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위험한 해결적인 거죠. 그게 아니라 상황을 따져야 되는 거죠.이 이 친구의 상황을 잘 봤을 때이 친구가 얼마만큼 교회 시간을 쫓할 수 있겠는지를 살펴야 되고 그리고 그게 근거해서 아 이만큼 할 수 있겠구나는 생각이 들면 거기에 맞는 일을 맡기는게 당연하고 그러지 않으면 뭔가 하나를 희생해야 된다 희생하면 안 되는 걸 희생하게 만들면 이게 힘들어지는 거거든요. 학생이 공부를 희생할 수 없잖아요. 사실 근데 또 생활 때문에 알바를 해야 되는데 알바를 희생할 수도 없는 거거든요. 근데 그걸 이제 강요당하면 고통스러워지는 거예. 근데 이게 되게는 믿음 혹은 헌신이란 이름으로 주어지니까 이게 저항을 못 해요. 그러니까 너무 쉽게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게 되는 거지. 믿음이 없어라고 말하면 그냥 내 잘못이라고 자기 자책을 하기 시작하는 거니다.이 자책이 심해지면 사실은 때로는 병이 나기도 합니다. 마음의 병이 그런 경우가 있었고요. 근데 그게 굉장히 위험하되는 거죠. 그래서 일단은 우리 교회가 이런 표현을 좀 더 신중하게 사용하는 법을 연습했으면 배웠으면 좋겠다 하는게 이제 개인적인 좀 바람 중에 하나고요. 그러니까 종교적인 언어를 너무 난발하지 않는 법. 근데 너 교회를 좀 더 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할 수도 있는 거를 믿음이 없어 헌신이 부족해라고 말을 하는 이유가 뭐냐면이 권위가 필요하냐면 예수님이 맹세하지 말라고 가르쳐 적게 있거든요. 맹세하지 말라고 얘기한 이유가 뭐냐면 그냥 A면 A고 B면 B라고 그러지. 근데 목숨 걸고라고 말하지 말라는 거니까. 근데 우리가 이게 뭐 이렇게 뭐 하나님을 걸고 혹은 뭐 이렇게 예수님을 걸고 이렇게 말하게 되는 그 동기에는 상대방을 내 마음대로 설득하고자는 욕망이 작동하는 거 아니다. 그냥 얘기해서 안 될 것 같으니까 수단을 동원하는 거죠. 그 동원하는게 뭐냐면 권위를 동원하는 거 하나님을 동원하고 예수님을 동원 이게 맹세거든요. 그런 맹세하지 말라는 거죠. 근데 우리가 상황을 두고서 청년들을 보고서 아 네가 좀 이렇게 성가대회를 좀 하면 좋겠다 혹 찬양증을 좀 했으면 좋겠다라고 얘기하면 되는데 근데이 청년이 좀 스케줄이 스케줄이 이렇게 해서 하기 할 수 어렵다 하기 어렵다 그러면 성격해 보고 아 그렇구나라고 하든지 그래도 네가 조금 더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대화가 가면 좋은데 바로 믿음이 없어 그래라고 말해 버리면 이게 사실은 설득은 안 된처럼 근데 반응은 못 하고 고통을 겪게 되는 거잖아요. 이런 고통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근데이 경험상 실제로 우리 청년들이 이런 상황을 마주할 때가 굉장히 많은 것 같습니다. 물론 이게 청년의 문제만 아닌 거 같아요. 그래서 어떤 목사님들은 당연하다가 이제 자기 의견이 반대 부딪히니까 하다 하다가 나중에는 이제 이렇게 뭐 계시라는 단어를 꺼내 가지고 이건 계시적인 결단이니까 따라 달라. 그럼 장로들이 반대하기 쉽지가 않아지는 거야.이 이 권위가 잘 건강하게 작동할 때는 권위지만 이게 조금만 건강하지 않으면 이게 그냥 부 건강 건강하지 않으면 권력으로 작용할 때가 많거든요. 근데 실제로 교회에서 그럴 때가 많은 거 같아요. 근데 그럴 때이 권력 혹은 권위가 작용하는 방식 중에 하나가 이게 언어죠. 권위를 싫은 언어를 활용하는 거니까. 그게 이제 우리가 사용하는 믿음, 헌신, 이렇게 신앙 이런 식의 언어들이 이제 권위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면 우리는 그것을 이제 실제로는 이게 인간과 인간의 관계로 볼 수도 있는 문젠인데 그것을 종교적인 관점에서 혹은 신앙적인 권위 입장에서 보게 만드니까 사태 파악을 힘들게 만드는 거니까. 그래서 가볍게 대답할 수 있는 가볍게 생각하고 대답할 수 있는 것을 대답 못 하게 만드는 거죠. 사실 시간표 따져서 결정하면 될 건데 이게 헌신의 관점에서 접근해 버리니까 시간표를 따지면 안 될 것처럼 생각이 돼 버리고 무조건 아멘 해야 될 것처럼 생각이 들고 그러다 보면 인생이 더 꼬이고 이렇게 되는 거잖아. 우리 청년 입장에서도 그런 상황에서 사실은이 조금 우리가 잘 성장해야 될 것 중에 하나가 뭐냐면 언 언어의 권위에 너무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을 좀 배웠으면 좋겠다는 거죠. 믿음, 헌신 이런 단어가 나왔을 때 그게 경계하지 말고 좀 더 차분하게 생각하면서 좀 더 자신있게 생각해도 좋지 않을까? 왜냐면 나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 잘 살아가려고 애를 쓰고 있는 상황인데 내가 그렇게 나쁘게 하고 있는 거 아닌데 그런 내가 힘들게 느낄 때는 이게 내 잘못도 있겠지만 아닐 수도 있거든요. 그러면서 지금 상황이 부당하다는 것을 생각할 수도 있는 좀 용기가 있었으면 좋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 물론 이게 조금 훈련이 필요한 거기도 한데요. 그러면서 우리가 좀 혹시 청년들이 좀 더 자신감 있게 생각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으면 도와야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근데 이제 교회 입장에서 이게 섣불리 믿음이 없다. 헌신이 부족하다는 얘기를 하게 되는 그 배우를 생각해 보면 이제 우리 한국 교회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 중에 하나 이분법적인 사고 혹은 이월론적인 사고가 있는 거 같아요. 종교적인 것과 종교적이지 않은 것을 구분해서 종교적인 것은 중요하고 그러지 않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교회는 중요하고 바깥은 중요하지 않고 예배는 중요하고 일상은 중요하지 않고 하는 이런제 이번법적인 사고죠. 사실 이거는 신약 성경이 극복해 버린 사구 중에 하나거든요. 구시대 유물인데 구약 시대에는 거룩한 시간의 구분이 있었고 거룩한 공간의 구분이 있었어요. 그래서 안식일이 있었고 성전이 있었고 근데 우리 신약 성경의 가장 과감한 모험 성능이 실패인지는 우리가 두고 봐야 되겠는데 제가 이렇게 그냥 과감한 모험이라고 표현하는 건데 일상 속에서 거룩함을 구현하는 비전을 가진게 신약 성경계거든요. 근데 그럼 거룩함이 없냐면 그게 아니라 모든 삶의 무대가 거룩함의 공간이 되는 거죠. 우리가 일상 속에서 거룩함을 구현해야 되니까 이게 모험일 수밖에 없는 거죠. 왜냐면 일상의 공간은 여러분 고린도 교회 같은 경우 보면 이게 고린도 사회를 뒤덮고 있던이 세속적인 가치들 누가 학벌이 좋냐 누가 힘이 세냐 누가 집안이 좋냐 누가 돈이 많냐 이런 가치들이 이렇게 지배하는 세상인데 그런 일상의 공간에서 다른 삶의 비전을 구현하려고 애를 쓰는 거니까 이게 과감화되는 거잖아. 그러면서 우리 교회가 사실은 성전과 성전 바깥, 주일과 주일 다른 일주일 이런 구분을 사실은 극복해야 되는데 여전히 우리가 그런 사고를 자꾸 회개하는 거 같아요. 네. 그런 면에서 우리 교회가 많은 목사님들은 여전히 교회는 굉장히 소중해. 교회 일이 너무너무 소중한 하나님의 일이야. 그면 일상을 좀 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거 같아요. 특히 성도들의 일상. 근데 이게 조금 조심해야 될게 뭐냐면 목사님 입장에서는 교회가 자기 직장이거든요. 목사님은 교회가 아주 잘 돌아가면 인생이 성공하는 거인거. 교인들은 교회가 아무리 잘 돌아가도 일주일이 또 따로 있어요. 일주일 따로 살아야 돼. 근데 그 부담을 사실은 목사님들이 때로 놓칠 때가 많은 거죠. 그래서 어 어떤 장로님이 그랬다 그러죠. 교회가 원하는 대로 잘 하려면 백수 건달이 되면 딱 좋겠습니다. 그랬더 그 교회가 새벽기도 시작해서 뭐 금요일 기도에도 있고 뭐 하여튼 그다음에 이제 가끔 가다가 이제 부흥에도 주중에 부흥회도 하고 온갖 모임들을 다 가려면 사실은 직장 없이 그냥 백수 건다리면 딱 맞겠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는 거죠. 그게 농담 같지만 사실은 농담이 아닌 거죠. 그럼 부담을 지고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거룩함이 무엇일까를 고민을 해야 되는데 가끔 이제 우리 목사님들이 그런 고민을 조금 덜 하시는 경향 있는 거 같아요. 물론 고민하시는 분도 많이 계셔요. 계시지만 아닐 분도 있더라는 거죠. 그러니까 목사님 입장에서 당장 주일날이 프로그램이 제대로 돌아가는게 너무너무 중요하거든요. 그걸 위해서는 성도들의 헌신이 필요하고 근데 이제이 청년이 잘하다가 갑자기 뭐 알바 때문에 조금 이제 힘들다고 얘기하니까 이게 좀 이렇게 그게 기분이 좋을 리가 없죠. 어떻게 냐면이 알바랑 잘 따져서 뭐가 중요한지를 잘 해서 청년을 설득하는게 아니라 그냥 바로 그냥 넌 믿음이 부족하다라고 쉽게 눈쳐버리고 헌신이 부족하다고 쉽게 말해 버리니까 청년은 해결할 수 없는 사실은 이렇게 궁지에 빠지는 것인가 굉장히 고통스러워하거든요. 자기를 신앙 없는 사람을 만들 것인가? 아니면 알바를 포기하고 힘들게 살면서 그냥 시키는 대로 할 것인가? 이런 고민 해야 되니까. 그런 점에서 우리가 좀 이분법적인 사고를 좀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이게 극복하도록 우리가 애들 쓰는게 좀 필요하다. 목사님 입장에서도 그렇고 사실 우리 청년들 입장에서도 내가 살아가는 일주일 삼전체가 결국은 예배의 장소다. 이게 신약 성경의 가장 큰 통찰 중에 하난데 우리가 좀 청년들이 마음에 좀 이렇게 좀 위로를 받으려면 아마 이게 더 필요할 것 같아요. 바울이 로마서를 말한 것처럼 이제 우리가 드리는 제사는 짐승의 죽은 제사가 아니거든요.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받치는 거니까 우리의 삶 자체가 이제는 하나님께 드린 예배가 된단 말이죠. 그 우리의 일주일 삶 자체가 예배예요. 그까 그것처럼 우리가 좀 더 신약 성서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경근의 그 패라다임을 좀 더 잘 배운다면 문제가 훨씬 더 간단해질 것 같은데 그렇게 되면 우리의 삶의 예배 삶 예배가 중요하죠. 삶의 예배가 중요하죠. 그럼 우리가 교회를 생각할 때도 교회는 그 교회 시스템을 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이 시스템이 왜 필요하냐면 우리의 삶의 예배를 잘 드릴 수 있는 성도들 그런 성도들을 만들어 내는데 사실 의미가 있는 거냐 또 그런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니까 또 의미가 있는 거죠. 그러니까 초점이 뭐냐면이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전의 일부가 되어서 삶의 제사를 잘 드리는 거잖아요. 그게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되는 그니까 그걸 학생에게 적용하면 학생에 드리는 재상문 일도 학생가 공부했죠. 그리고 학생이지만 또 부자가 아니니까 또 알바를 해야 된단 말이죠. 그것도 굉장히 중요한 삶의 일부겠죠. 그게 교회처럼 중요한 일이 아닌 허접한 일이 아니라 그 자체가 소중한 제사라는 걸 인식하는 거 그 자체가 예배라는 것입니다. 이걸 성실하게 잘 드리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신 예배고 그런 학정으로서 훌륭하게 살았을 때 그런 내가 주일날 교회 갔다 그랬을 때 함께 찬양드릴 때 그게 기쁜 찬양이 되고 하나님이 기뻐받으시는 함께 공동의 예배가 되는 거니까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한다면 우리가 이런 좀이 딜레마에 빠졌을 때 내가 헌신이 부족한 거 아닌가? 내가 믿음이 부족한 거 아닌가 하는 그런 질문에 직면 했을 때 내가 생각을 조금 더 선명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단순히 믿음 헌신되는 그 말의 권위에 휘둘려서 막 그게 막 당황해서 찔쩔매는 그런 상황이 아니라 냉정하게 생각해 보고 정말로 내가 믿음이 부족한게 맞는 건지 내가 사실은 열심을 낼 수 있는 건데 내 다른 쓸데없는 욕심에 빠져서 내가 지금 이르고 있는 건지 아니면 내가 내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 정말로 시간표가 충돌이 생겨서 내가 어쩔 수 없는 건지 그렇다면 내가 가질 필요는 없는 거죠. 왜? 나는 이미 나 나름대로 내이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려고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런 나를 의심할 필요는 없는 거니까 나는 충분히 완벽하진 않겠지만 나름들은 열심히 하나님 섬기려고 살아가고 있다. 근데 여기서 좀 더 시간 내서 뭘 하기는 힘들 것 같다. 그러면 과감하게 그걸 말씀드리고 그걸 받아 주시면 좋지만 만약에 목사님이 그걸 이해를 잘 못 하시면 그거는 목사님의 이게 잘못인 거지 사실은 내 탓으로 돌릴 필요는 없는 거예요. 근데 우리가 사실 약하잖아요. 그래서 피해자가 되게 자기 탓을 많이 하잖아요. 그것처럼 우리는 자꾸 이제 자기를 탓타리는 경이 참 많잖아요. 자신이 없으니까. 우리 청년들도 교회를 바라볼 때는 조금 그런 식으로 너무 쉽게 자기를 탓타는 물론 청년들이 잘하지 못하는 것도 많죠. 아직 다다 잘하지 못해서 성실하지 못한 부분도 많고 특히 우리처럼 나이가든 사람 보기에는 아직 아쉬운게 많은데 하지만 또 한편을 보면 참 아름다운 부분도 많거든요. 특히 또 이렇게 많은 청년들하고 비교해 보면 그래도 열심히 신앙생활 하려고 애를 사람들이 참 많아요. 근데 그런이 청년들이 너무 쉽게 자책을 하게 되고 괴로움 괴로워하게 되고 그건 참 안타깝죠.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내가 이미 내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다. 그리고 나의 삶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소중한 삶이다. 이건 교회 가는 것보다 보다라고 말하면 좀 그럴까요? 교회 가는 건 못지 않게 소중한 일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좀 더 균형 있게 생각하면서 좀 더 자신있게 내 스케줄을 맞춰서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내가 신앙생활 할 수 있지 않을까? 특히 저는 우리 목사님들에게 많이 좀 부탁을 하고 싶어 우리 청년들에게 너무 신앙적인 언어를 쉽게 갖다 대지 좀 말았으면 좋겠다 하는 것. 이것 때문에 고통 없는 청년들이 너무 많습니다. 차라리 신앙적인 언어를 걷둬내고 청년들의 상황으로 들어가서 청년들의 입장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가면 어떨까? 그리고 청년들의 아쉬움을 이야기하고 청년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그러면서 얘기해 나간다면 우리 청년들이 훨씬 더 멋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좀 이렇게 바람을 갖게 되기도 입니다. [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