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 질문에는 기독교만 답할 수 있습니다ㅣ김학철 교수ㅣ잘잘법 245회
채널: 잘잘법 |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2ifHcxweVMU | 길이: 45:28
요약
🎯 TL;DR — 김학철 교수는 "쓸모없는 인간은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기독교 신앙만이 인간을 도구적 가치가 아닌 절대적 가치로 바라볼 근거를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 핵심 논지 — 현대 사회는 인간을 쓸모(도구적 가치)로 판단하는 시선을 은연중 내면화하고 있으며, 이는 우생학적 폭력(사가미하라 사건)부터 저출산 담론까지 관통한다고 지적한다. 반면 성경(누가복음 15장 세 비유)은 인간을 계산되지 않는 절대적 가치의 존재로 선언하며, 그 가치는 사랑에서 나온다고 강조한다.
🗺️ 영상 구성
- 사가미하라 장애인 시설 살인 사건과 영화 『플랜 75』 사례
- 나치 시대 우생학적 수학 문제와 코로나 시기 아이의 질문
- 에스키모 노인의 자발적 발치(拔齒) 일화
- 트롤리 딜레마 변형을 통한 도구적 가치 저항 실험
- 마거릿 미드의 "부러진 다리뼈" 문명 기원론
- 누가복음 15장 잃은 양·잃은 드라크마·탕자(둘째 아들·큰아들) 비유 해석
- 노동가치설 대비 "사랑 가치설" 제안
- 한국 저출산 담론 비판으로 마무리
━━━ 본문 ━━━ 쓸모없음의 폭력 — 사가미하라 사건과 『플랜 75』 2016년 일본 가나가와현에서 한 남성이 자신이 근무하던 장애인 시설에서 19명을 살해하고 26명을 상해했다고 소개한다. 그가 남긴 말은 "사회에 도움되지 않는 장애인은 안락사하거나 살처분해야 한다"였다고 전한다. 이 충격에서 만들어진 영화 『플랜 75』는 더 나아가, 일본 정부가 아예 75세 이상 노인의 안락사를 돕는 정책을 시행한다는 설정을 갖는다고 설명한다. 화자는 이 영화의 진짜 충격은 살인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 이후 사회의 반응이 "보안 강화"가 아니라 "안락사 지원"으로 향했다는 발상 자체라고 지적한다.
나치의 수학 문제와 일상화된 계산 나치 시대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 나온 독일 초등학교 수학 문제 — 정신병·불구자·간질병 환자가 하루에 국가에 끼치는 손해를 계산해 "이들을 제거하면 국가 이익이 얼마인가" 묻는 문제 — 를 인용하며, 인간을 쓸모의 관점에서 계산하는 사고가 낯선 과거의 일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코로나 시기 한 아이가 "닭과 돼지는 병 생기면 살처분하는데 왜 인간은 안 하냐"고 물었다는 사례, 에스키모 노인이 스스로 앞니를 부러뜨려 "쓸모없어졌다"며 공동체에 짐이 되지 않으려 한 일화도 같은 맥락으로 제시한다.
트롤리 딜레마의 변형 실험 표준적인 트롤리 딜레마(한 명 희생으로 다섯 명 구조)에는 학생들이 쉽게 동의하지만, 같은 논리를 "건강한 한 사람을 장기이식으로 희생시켜 일곱 명을 살리자"는 형태로 바꾸면 학생들이 거부한다고 말한다. 이 차이에서 인간 내면 깊은 곳에 인간을 도구적 가치로 보는 것에 대한 저항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해석한다.
마거릿 미드 — 문명의 기원 문화인류학자 마거릿 미드가 "인류 문명이 언제 시작됐냐"는 질문에 "부러진 다리가 회복된 인간의 뼈"를 답으로 들었다고 소개한다. 다리가 붙는 몇 달간 당장 쓸모없는 사람을 기다리고 돌보고 먹인 행위, 즉 "쓸모 이전에 돌봄의 대상으로 본 것"이 문명의 출발이라는 해석을 제시한다.
도구적 가치 vs 절대적 가치 — 누가복음 15장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이 세리와 죄인을 사회에 쓸모없는 존재로 배척했지만, 예수는 이들과 함께 식사하며 다시 공동체로 받아들였다고 설명한다. 잃은 양 비유에서 "아흔아홉과 한 마리 사이에 부등호를 그리지 않는" 예수의 태도, 잃은 드라크마 비유에서 어머니의 사랑이 담긴 목걸이 은전을 찾는 여인의 행위를 통해 절대적 가치는 계산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탕자의 비유 — 두 아들 모두 도구적 관계 둘째 아들이 유산을 미리 요구하고 탕진 후 돌아오는 장면에서, 그가 아버지 집을 떠올린 것은 회개가 아니라 "먹을 것이 많다"는 계산이었다고 해석한다(헬라어 원문에는 '회개'를 의미하는 단어가 쓰이지 않았다고 지적).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품꾼이 아닌 아들로 맞이하며, 큰아들 역시 "나는 아버지께 쓸모가 있었다"는 논리로 항의하지만, 아버지는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었다"며 두 아들 모두 아버지를 도구적 가치로 대했음을 지적하고, 자신은 아들들을 쓸모로 본 적이 없다고 답한다.
사랑 가치설 경제학의 노동가치설(원재료에 인간 노동이 더해지면 가치가 발생)에 빗대어, 사랑이 부어지면 그것의 가치가 생긴다는 "사랑 가치설"을 제시한다. 딸이 선물한 저가 레이저 포인터가 고가의 리미티드 에디션보다 자신에게 더 가치 있다는 예를 든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때문에 계산되지 않는 절대적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라고 결론짓는다.
한국 저출산 담론 비판 한국 사회의 저출산 대책 논의가 "아이를 낳아야 경제가 산다"는 논리로 짜여 있으며, 이는 과거 국민교육헌장의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연성화된 인간의 도구화"라고 비판한다. 아이가 그 자체로 사랑받는 절대적 가치의 존재라는 인식 전환 없이는 출산율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마무리한다.
💬 결정적 발언
"사회에 도움되지 않는 장애인은 안락사하거나 살처분해야 한다" "인간의 문명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을 도구적 가치로 보기 이전에… 절대적 가치로 보기 시작한 거예요." "노동 가치설은 원재료에 인간의 노동이 부여되면 가치가 발생한다 그랬는데, 사랑 가치설은 어떤 것에 사랑이 부어지면 그것의 가치가 생긴다는 거예요."
🧩 핵심 용어
- 도구적 가치 = 사회·가족·국가에 대한 쓸모 여부로 인간을 판단하는 관점
- 절대적 가치 = 쓸모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 계산되지 않는 가치
- 사랑 가치설 = 사랑이 부어짐으로써 대상의 가치가 발생한다는 화자의 비유적 개념(노동가치설에 빗댐)
🔎 보완 & 확인
- 배경 보완: 2016년 사가미하라 사건(우에마쓰 사토시)은 실제 일본에서 발생한 사건이며, 영화 『플랜 75』(하야카와 지에 감독, 2022)는 이 사건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추정 — 영화 제작 배경에 대한 감독의 공식 언급은 별도 확인 필요).
- 사실 유의점: 나치 시대 "안락사 프로그램(T4 작전)" 관련 우생학적 산술 문제가 실제 교재에 등장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나,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로베르토 베니니, 1997)에 정확히 그 대사가 나오는지는 본 요약 작성자가 원문 대조로 확인하지 못했다 — 확인 필요.
- 사실 유의점: 마거릿 미드의 "부러진 다리뼈" 일화는 인류학계에서 널리 회자되는 이야기이나, 미드 본인의 정확한 원출처(강연·저작)는 논쟁적이며 후대에 재구성·각색되었다는 지적도 있다 — 확인 필요.
- 사실 유의점: 리카르도의 노동가치설을 마르크스가 계승했다는 화자의 설명은 경제사상사적으로 대체로 맞는 방향이지만("노동가치론"은 스미스-리카르도-마르크스로 이어지는 계보), 세부 이론 차이(리카르도의 투하노동가치설과 마르크스의 잉여가치론)는 영상에서 단순화되어 전달된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자막 원문 (참고)
Kind: captions Language: ko 2016년 일본 가나가와 현현이라고 하는 곳에서 장애인 센터에서 일했던 한 사람이 자기가 일했던 곳에 가서 19명을 살해하고 26명을 상해를 입힌 사건이 있었죠.에 그리고 나서 그 사람이 한 말이 너무 충격적인 말이죠. 사회에 필요가 없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죽어도 된다라는 거죠. 그래서 그 말을 그대로 옮기면 사회에 도움되지 않는 장애인은 알락사하거나 살처보내야 한다라고 하는게 그의 말이었습니다.이 사건이 굉장히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고 여기에 충격받은 한 감독이 플랜 75라고 하는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또이 영화도 마찬가지 한 사람이 특별히 어르신들 있는 곳에 가서 끔찍한 사례를 저지르고 일본이라고 하는 사회는 국가를 위해서 희생할 수 있는 사회다. 그렇게 얘기하면서 그 정확한 대사를 얘기하면 노인들도 국가의 패가 되긴 싫을 것이다. 나를 위해 죽음도 불사는 나라가 일본이다. 이렇게 얘기하면서 그 일을 정당화했다고 돼 있죠. 이것도 굉장히 충격적인 일인데 그다음이 더 충격적이죠. 자, 그럼 어떻게 될까? 우리 같으면 그냥 일반 상식의 근거에서 그런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도록 노인 보호 시설, 장애인 보호 시설을 치안을 보안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갔을 것 같아요. 근데이 영화의 설정은 일본 정부가 75세 이상이 된 노인들을 아주 편하게 알락스할 수 있도록 정부가 도와주는 걸로 정책을 센 겁니다. 이게 제일 충격인 거예요, 사실은. 그러니깐 한 사람이 가서 19명 살해하고 26명 상의한 거보다 야,이 일이 발생했으니까 어떻게 되지? 아, 우리가 잘 치한을 유지해야 되겠다. 보안을 강화해야 되겠다가 아니라 아, 어떡하지? 75세의 노인들 알락사할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주자.요 요 발상이 굉장히 충격적인 겁니다. 그래서이 정책이 발생하고 난 후에 일본 정부는 안내자들을 두어서 75세가 됐다라고 신청한 사람들을 그 신청을 받아서 그 마음이 변하지 않을 않도록 하고 이른바 알락사할 수 있을 때까지 잘 관리해 주는 사람들도 고용하기 시작했다는 거죠.이 영화 이제 내용이 계속되는데 미치라고 하는 이런 된 한 분이 직장에서 일을 하는데 성실이 했죠. 그런데이 사업주가이 사람을 해고 하고 싶은데 명분이 없는 거예요. 한 사람이 한 고객이 아유 노인분들 일하는 거 보니까 참 안타깝다라는 말을 했다. 그걸 구실 삼아서이 미치를 해고하게 되죠. 미치는 돌아보니까 자기가 아무 쓸모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아 플랜 75에 자기가 신청을 하게 되죠. 그리고 그 안내준 사람 알락사할 때까지 그 마음 변치 않도록 잘 다독이는 사람 그 사람하고 대화를 하다가 내가 사러운 이야기를 하고 내가 누군지를 다시 회복을 하는 거예요. 그리고 플랜 75에 참여하기를 거절하고 다시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로 결정하는 내용이이 영화의 내용입니다. 인간이 쓸모가 없다. 사회 더 이상 쓸모가 없다. 그 생각은 참 그 사람 살기 힘들게 하고 그 사람을 다른 사람 다른 사회에서 보는 시선도 그렇게 곱게 되지 않는 곱지 않은게 인간들의 생각인 거 같아요. 자기 스스로도 내가 아무 쓸모가 없는데 노인들만의 문제가 아니죠. 젊은 세대도 그렇게 생각해요. 내가 아무 쓸모가 없는데 내가 왜 살아야 되나 그런 생각들 많이 해요. 젊은 사람들도. 아, 이런 인간을 쓸모의 측면에서 보는 거 어제 오늘만의 일이 아닙니다. 다소 폭력적인 방식이긴 하지만 낮지 시대에도 그런 일이 있었거든요. 나지 시대에 그 인생은 아름다워라고 하는 영어에 나온 얘기잖아요. 이제는 그렇게 쓰지 않는 말들이 있는데 대사니까 그대로 해 보겠습니다. 정신병은 국가의 하루 4마르크의 손해. 불구자는 하루에 4.5마르크, 간질병 환자는 3.55마르크의 손해를 낸다. 평균 하루에 4마르크다. 30만 명의 환자가 있다. 이들을 모두 제거하면 국가의 이익은 얼마나가 되겠는가? 이게 영화 인생 나름다에 나온 독일 초등학교 수학 문제라는 거 아니에요.이 문제를 듣고이 문제를 전해 준 그 이탈리아 사람이 놀라요. 놀라면서 뭐에 놀랐느냐? 아 독일들은 어떻게 이렇게 어려운 문제를 풀지? 이렇게 놀라요. 그때 그 영화의 여주인공 그분만이 아니 어떻게 그런 시험 문제를 낼 수 있냐고 그런 방식으로 놀래요. 근데 그게 저 옛날 독일 낮치 시대만의 문젠인가요? 그 한참 코로나이 얘기 나올 때 한 아이가 엄마한테 그렇게 지하철에서 질문했다는 거잖아요. 엄마 닭들은 병 생기면 다 죽이잖아. 살처분하잖아요. 돼지들도 구제역 하면 다 살처분하잖아요. 그런데 인간은 왜 코로나에 걸렸는데 살처분하지 않아? 그렇게 물어봤다는 거잖아요. 네. 이게 인간을 바라보는 어 하나의 시선이고 우리가 우리 스스로 내면화해 있는 거예요. 나는 쓸없는데 왜 사나? 그리고 사회도 그 시선을 우리에게 은근히 얘기하거든요. 쓸모없는 저 사람들은 왜 사나? 그것뿐만이겠습니까? 예. 더 많은 이야기들이 있죠. 3, 40년 된 일본 영어 같은데 큰 상을 받은 영화라고 하더라고요. 한 마을에서 논이 살다가 에스키모들도 마찬가지라는 얘기를 어서 읽은 적이 있는데이 암니가 빠지잖아요. 그러면 할 수 있는 마지막 노동이 없어진 거예요. 왜냐면 암리로 실을 끊거든요. 실을 끊어 가지고 바느질 같은 걸 하는데 이제 실을 끊을 정도의 암리가 다 없어지면 더 이상 노동할 수 없으니까 쓸모가 없어졌으니까 갖다 버리는 거예요. 자기 암리가 안 빠지는 거예요. 어, 여성 노인이 그러니까 몰래가 가지고 앞니를 일부러 돌에 찌어 가지고 암니를 빠지게 하는 거예요. 그다음에 아들한테 가서 얘기해요. 야, 나도 암리도 빠졌다. 자기가 쓸모없다고 느끼니까 자회를 하해서라도 자기가이 공동체에 패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거예요. 어, 어떻게 보면은 그럴듯한 얘기지만 신앙은 인간을 쓸모로 보지 않는데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을 쓸모의 관점에서 보는 걸 인간 아 도구적 가치라고 합니다. 사회를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 쓸모가 있냐 없냐로 어떤 한 사람을 판단하는 거 그거를 인간을 도구적 가치로 판단한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이게에 신앙의 눈에서는 그런 도구족 가치로 인간을 판단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우리 내명 깊은 곳에 인간을 도구족 가치로 보는 것에 대한 아 저항이 있습니다. 제가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원래 오래된 건데 마이클 샌델이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인용해 가지고 유명하게 된 트롤리 들레마라는게 있습니다. 트롤이라는게 이제 전차 같은 건데 고장난 전차가 가해요. 한 사람 있는데 그 앞에 자기 앞에 레바가 있어요.이 전차 가만 놔두면이라는 인부 다섯 명을 쳐요. 내가 레바를 이렇게 당기면 혹은 밀면 전차가 솔로를 바꿔서 가는데 이쪽에도 일하는 인부 한 명이 있어요. 전차를 당기면이 인부가 한 명 죽게 돼요. 자, 그러면 어떻게 할 거냐라고 제가 제 학생들에게 종종 물어보거든요. 그러면 학생들이 고민을 하다가 비교적 쉽게 레발을 담겨 당겨서 한 명의 목숨을 희생하더라도 다섯 명을 살린다고 그렇게 얘기를 해요. 정말 그렇게 할 거야? 그러면 어쩔 수 없대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대요. 제가 그렇게 반문을 해요. 자, 그럼 내가 문제를 좀 바꿔 볼게. 여섯 사람이 혹은 일곱 사람이 병상에 누워 있어?이 사람들이 모두 특정한 장기를 이식해야 할 사람들이 있어. 저기 한 사람 걸어가는데 굉장히 건강해. 그근데 그러면 저 사람 잡아서 최장 신장 심장 강막 하나 또 강막 하나 이식해서 최장 걸린 사람 죽을 사람 살리고 신장병 때문에 죽을 사람 하나 살리고 또 신장 때문에 죽을 사람 하나 살리고 심장 이식할 하나 살리고 간 이식해서 하나 살리고 두 사람은 강막 이식해서 못 보던 거 새롭게 해 주면 어떨까? 야, 한 사람 희생하면 일곱 명이 살아. 그러면 그 학생들이 갑자기 몸짓해요. 그래서 그런 건 아닌 거 같아요. 왜 안 되지? 레바를 달겨서 다섯 명 살리기에서 한 사람 희생할 수 하는 거 어쩔 수 없어요.라고 말했던 학생들이 일곱 명에게 새로운 삶을 주기 위해서 한 사람을 그렇게 희생할 수 있지 않아라고 하는 말에 대해서는 그건 안 될 것 같아. 왜 그건 안 될 거 같을까요? 이상하지 않아요? 똑같은 거잖아요. 레바를 달면 한 사람을 죽게 하는 건 똑같은 거잖아요. 다른 사람이 다 나는 내가 말로 저 사람 잡아서 일곱 명 희생시키 살립시다. 나는 말만 이렇게 하면 의견을 하면 어떤 사람이 대신해 줄 텐데 뭔가 꺼림찍해요. 그렇게 해서 안 될 거 같아요. 그렇게 해서 안 될 것 같죠. 뭔가 왜 그럴까? 인간 안에 깊이 인간을 도구적 가치, 슬모의 가치로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저항이 있어요. 그 저항이 있습니다. 아, 이런 겁니다. 어, 유명한 문화인류학자인 마그렛 미드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이 마그렛 미드라고 하는 분이 문화 인류로 굉장히 유명한 분입니다. 여성학자인데 당시 여성학자의 편견을 깨고 아주 뚜렷한 족을 남긴 분이니까 제가 그냥 여성학자라는 말을 좀 썼습니다. 아, 이분에게 기자가 물어봤어요. 아, 당신은 문화인류학자인데 인간의 문명은 언제 시작한 겁니까? 어디서부터 문명이 시작됐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질문을 했어요. 신석기 구석기 언제 부부까? 음, 구석기는 어떤 일부 유인원들은 도구를 그렇게 사용하기도 한다는데 궁금하죠. 저도 그렇게 했는데 마그렌비드가 어떻게 대답을 했냐면 부러진 다리가 회복된 인간의 뼈를 발견했는데 그것을 인간의 문명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렇게 얘기를 한 거예요. 그래서 이게 뭐지 하고 제가 곰곰히 생각해 보기 시작했습니다. 자, 인간의 문명은 일단 아, 일단 지식과 슬기가 있어야 돼요. 뭐냐면 부러진 뼈는 붙을 수 있다. 그게 슬기예요. 그런데 아무렇게나 붙은게 아니라 여기 강목 같은 걸 된 거죠. 그래서 붙인 거예요. 걸어다닐 수 있게. 그런데 그것만으로 아, 인간 문명이 시작됐다고 말하는게 아니죠. 왜? 일단 수렵 채집의 시대기 때문에 이동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그런데 다리뼈가 붙으려면요 한 달 이상 걸린단 말이죠. 그러면이 사람이 붙기를 기다리고 기다려 줘요. 그런데 가만히 기다려면 주면 됩니까?이 이 사람을 돌봐야 돼요. 이동할 때이 사람이 거치를 못하니까이 사람을 부축하거나 혹은 없거나 해야 돼요.이 사람에게 먹을 걸 줘야 돼요. 인간 문명이 어쩔 수 있겠는가.이 사람은 쓸모가 없어요. 당장 2, 3개월 쓸모가 없어요. 사실. 그리고 다리뼈가 붙고 난 후에도이 사람이 우리 집단에 쓸모가 있을지 없을지 판단하긴 쉽지 않아요. 근데 그럼에도 불구하고이 사람을 기다리고 치료하고 돌보고 먹이고 입히고 데리고 다니면서이 사람과 함께 있으려고 해요. 그리고 기대해요.이 사람을이 사람에게 기대해요. 나아지기를 우리에게 다시 돌아오기를 여기에 문명이 있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다시 말씀 뭐냐? 쓸모 이전에이 사람을 돌봄의 대상으로 본 거예요. 쓸모는 부처적이에요. 더 앞선 것은 뭐냐? 그 사람을 돌봄의 대상으로 보고 돌보려는 슬기를 가지고이 사람의 미래를 기대해 준 거예요. 그게 문명의 시작이라고 마그렌 미드가 말한 거 같아요. 제가 그 해석한 겁니다. 그럼 말을 바꾼 뭐냐? 인간의 문명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을 도구적 가치로 보기 이전에 다른 말로 하면 절대적 가치로 보기 시작한 거예요. 도구적 가치는 A라는 목적을 위해서 인간을 도구화하는 거예요. 사회의 쓸모, 가족의 쓸모, 나의 쓸모를 위해서 저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는 거예요. 예. 그런데 절대적 가치라고 하는 건 뭐냐면 이것은 그 자체로 대단해요. 그 자체로 가치가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다른 것들이 이것에 봉사해야 돼요. 요것을 절대적 가치라고 말할 수 있겠죠. 예수께서는 인간을 절대적 가치를 지닌 존재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 바로 복음과 관련되 있다고 우리에게 얘기를 해 줍니다. 뭐 여러 예를 들 수 있는데 아 누가복음 15장에 있는 예를 들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거기 보면 세 비유가 나오는데 그중에 한 비유는 잃어버린 양에 대한 비유잖아요. 이렇게도 있습니다. 세금업자와 죄인들이 죄인들과 예수님께서 올리시잖아요. 거기에 바리세파와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그걸 10일 걸어요. 바리세파와 율법학자들 눈에는 세금 징수업자 세리라고 하는 사람 하고 죄인들은이 정말 쓸모없는 인간들이에요. 세금 징수업자는 당시에 로마 세계에서는 잘 아시다시피 관세 국세청이 없어요. 세금을 걷는 사람들은 공무원이 아니에요. 그냥이 지역에 세금을 거둬야 되겠는데 누가 세금 거둘래 하면 입찰을 해서 경쟁을 해 가지고 그 사람에게 세금 증수권을 주는 거예요. 그러면 월급을 따로 주지 않기 때문에이 사람은 자기 지역에 세금을 거을뿐만 아니라 거기서 자기의 월급투 거둬야 돼요. 근데 입찰 경쟁이기 때문에 대부분 100만 원 거둘 수 있는 지역에서 100만 원 써서 될 수지 않아요. 200만 원 써야 돼요. 예를 들어 200만 원 쓰고 끝이에요? 아니요. 자기 돈도 있어야 되잖아요. 250만 원 써야 돼요. 100만 원 거을 지역에서 250만 원을 써야 입찰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세금 증수업자를 유대인 사회에서 바라볼 때는 정말 끔찍한 인간들이에요. 저 사람들은 우리 동족을 동족의 피를 빠는데 로마인들 대신 빠는 나쁜 놈들이에요. 죄인들은이 사회가 건강하게 유지돼야 되는데 여기서 말성을 일으키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어떻 하냐면 바리새인과 율법 학자들은 이들을 사회에서 쓸모가 없기 때문에 내보내요. 너희들은 우리랑 어울리지 말아라. 너희들은 쓸모가 없다. 사회의 누룩, 기생충, 사회에 오염시키는 사람들은 저기 가라 하고 내 보냈는데 예수님은 그들하고 같이 식사를 하면서 다시 사회로 돌려 놓는 거예요. 그깐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화가 머리끝까지 난 거죠. 쓸모 없는 인간들을 다시 데려오는 거예요. 사회 쓰레기를가 열심히 불리수고 해 가지고 갖다 버렸는데 다른 사람이 가서 그걸 갖고 오는 거예요. 그리고 방 안방 한 가운데도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내가 열심히 불리소고 해 가지고 재활령 쓰레기 갖다 버렸는데 재활용 쓰레기 갖다 버린 것뿐만 아니라 종량제 봉태 갖다 놓은 것도 갖고 안방이 갖다 놨다고 생각해 보세요. 화가 벌컥 날 거 아니에요. 인간 쓰레기, 인간 재활용 쓰레기 해가지 갖다 버렸는데 그걸 갖다 놓으니까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이 너무 화가 나 가지고 예수님한테 따져 버려요. 당신은 왜 종량제 쓰레기 갖다 버린 인간들을 갖고 와서 밥상 위에 갖다 놓는가? 밥상 옆에 놓고 우리랑 같이 먹는가? 예수님께서 이런 예를 듭니다. 당신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양 100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를 잃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아은 안무아머리를 벌판에내버려두고 그 이런 양을 찾아낼 때까지 그걸 찾아다니지 않습니까? 이렇게 물어봐요. 제가 만약 그 말씀할 때 그 앞에 있었으면 양 한 마리를 찾으러 나서지 않겠습니까?라고 라고 저한테 예수님이 제 눈 보고 얘기하면 저는 그 앞에서 아니요. 제가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합니까? 일단 아은 아홉 마리는 그 도둑이 위험에 들 수도 있고 들짐승의 위험에 들 수도 있기 때문에 빨리 휴대전화해 가지고 야 양 한 마리 없어졌어. 큰일 났어. 가까운데 있대요. 그럼 빨리 와. 빨리 와. 내 양 아은 한 마리를 너도 같이 보고 있어. 보고 있어. 아니면 내가 빨리 울타리 있는 곳으로 양 아은 한 마리 몰고 가서 그다음에 문 잠그고 그다음에 양 한 마리 찾으러 나서지. 내가 왜 그걸 들판에 두고 찾아서요? 내가 바보예요. 양 한 마리랑 아은 아홉 마리인데. 그런데 예수님은 너무나 당연한 듯이 양 한 마리 찾아 나서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얘기해요. 예수님은 1과 99 중에 부등어를 못 그리시나? 99에 부등 부등호를 그려야죠. 그게 어떻게 이퀄이에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거 이퀄리라고 말을 바꾸면 절대적 가치는 계산할 수 없는 거예요. 우리가 계산할 수 없는게 있어요. 우리 인생에서 계산되지 않는 것들이 있어요. 문제는 그걸 계산하면서 우리가 다 이런 바 타락한 거예요. 계산되지 않는 걸 계산하려고 했던 거. [음악] 사람들이 그거 받아들이지 못하죠.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두 번째 비유 드시는 거잖아요. 어떤 사람이 어떤 여인이 열드라마크마가 있었습니다. 아마 목고리로 이렇게 해서 열마 했을 거예요. 한드라크마가 정규직 하루 품삭 정도 되거든요. 로마 군인들의 하루 아 월 저 1급이 한 컴마 정도 됐다 그래요. 근데 아마이 여인 그거 열 드라크마가 있었다 얘기는 아마 시집 때 엄마가 지참금 같은 걸로 준 거 같아요. 혹은 부적으로 가난한 집이 없겠죠. 친정 엄마가 시집 가는 딸에게 출게 없어요. 여기저기 꼬서 열 드라크만 만들어요. 마치 부족처럼 만들어요. 그리고 딸 목에 걸어 주면서 너 이거 정말 필요할 때 써라. 엄마의 사랑이 당긴 거죠. 어떤 학자는 이제 부적이라고도 얘기하고요. 그걸 실다 하고서 있는데 아이 그거 목걸리 실 끊어지면서 아홉들 그만 찾았는데 한들 어디 있는지 모르는 거예요. 당시에 전기가 없으니까 유리창도 없으니까 가난한 집에서는 벽에 요만큼 구멍 내고 살았거든요. 거기 천 덮고 유리 없으니까 그거 열어도 집안 어두컴컴해요. 그니까 불 켜고 막 빗자루질하면서 찾는 거예요. 그 왜 그걸 찾아요? 일하지. 밖으로 나가서 아니야. 그거는 엄마야. 엄마 찾아요. 한 들거마 찾으니까 기뻐 가지고 잔치하요. 아무튼 잔치하자면 한 드라크마이 생일 거예요. 근데이 드라크마 하나는 드라크마 하나가 아니죠. 엄마 사랑인 거예요. 계산하지 못해요.이 어리석은 여자는이 어리석은 목동은 계산하지 못해요. 1대 99 사이에 부등어도 못 그려요. 근데 그걸 통해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뭐냐면 계산되지 않는게 있다. 그거 알려 주시는 겁니다. 누가복음서 15장에 우리가 탕자의 비유라고 말하는 거 제가 저는 사랑하는 아버지의 슬픔의 비유 이렇게 얘기했는데요. 아버지 슬픔이 뭔지 제가 여러 군데서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여기 보면 딱 두 종류의 관계가 나옵니다. 하나는 아들들이 아버지와 맺는 관계가 있고 아버지가 아들들과 맞는 관계가 있어요. 아들들이 아버지와 맺는 관계는 도구적 가치예요. 도구적 관계예요. 둘째 아들이 아버지한테 와서 아버지 아버지 어차피 죽으면 유산 상속할 거죠. 미리 주세요.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거 요즘 내도 중동 사람들에게이 얘기했다고 하는 자식 있다. 그러면 어떻게 생각하냐? 그러면 중독 사람들이 화를 내면서 이것은 나는 아버지가 죽었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말과 다를 바 없다고 그렇게 얘기해요.이 비유에서 재밌는 건 뭐냐? 숨겨진 얘기는 뭐냐? 큰아들로면 뭐 한 거예요? 거기서 대제 제대로 된 큰아들이라면 자기 동생 벽살 잡고 네가 그러고도 아들이냐? 이렇게 되거든요. 근데 큰아들이 안 그렇게 했어요. 그냥 이유는 추종해 보건데 유산 상속의 법에 따르면 큰 아들, 작은 아들 1/3이거든요. 아이고 동생덕에 손 안되고 커픈 거지. 그리고 사라생전 아버지가 자식에게 재산을 줬어도 재산 처분권 여전히 아버지한테 있어요. 그런데 둘째 놈이 그걸 처분해 버렸네. 그리고 먼 곳으로 떠나요. 자기가 삶을 즐길 수 있는 아버지와 아버지 제사는 그저 아버 자기가 삶을 즐기는에 도구예요. 가서 흉년이 들고 쓴 있는 곳 다 없어지고 나니까 다 옆에 친구들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요. 사람들이 자기를 도구족 가치로 받기 때문이죠. 돈 있는 둘째 좋은 사람이지만 돈 없는 둘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쓸모가 없어졌어요. 둘째. 그러니까 돼지 치고 돼지가 먹는 열매 먹고 살려고 하고 있어요. 굶어 죽게 생겼어요. 그 그러다가이 둘자들이 재정신이 들어요. 우리가 재정신이 들었다 이렇게 돼 있는데 그거를 예전에는 많은 분들이 회개했다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그건 제 생각에는 회개한게 아닙니다. 회개했다고 볼 수 없는데 재정신이 돌아오자이 말이요 단어가 헬라 단어 아 헬라어 문크가 회개를 의미한 적이 성경에 없습니다. 거의 그냥 어 뭐야 이거 이런 거예요. 그리고 어떻게 얘기하냐면 내 아버지에게는 품들이 그렇게 많아도 먹을 것이 넘쳐났는데 나는 여기서 굶주여 주는구나. 이게 회개한 사람의 말이에요. 아이고 내가 잘못했구나. 내가 바보구나. 내가 어리석구나. 그거 아니라 어 나 굶어 죽게 생겼는데 어 우리 아버지 집에는 먹을 거 맞는데. 그게 생각나는 거예요.이 얘는 계산한 거예요. 어떻게 계산했냐? 아, 그럼 내가 아버지 집에 가야지. 왜? 거기 먹을게 많으니까. 그리고 어떻게 자기 변명을 해할지 연습해요. 이렇게 말해요. 이렇게 말하면 아버지가 날 받아 주겠지. 아버지 제가 하늘 하늘을 거슬려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더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할 것을 연습합니다. 그러니까 회개한게 아니라 계산한 거예요. 아들은 제 정신이들은 거예요. 아 여기서 굶어 죽게 생겼는데 음식이 많은 곳이 떠올라왔어요. 어디냐면 아버지 집이에요. 근데 면목이 없잖아요. 들어갈 면목이 없으니까 정당성을 말하고 싶어요. 정당성 뭐냐? 아유, 저는 아들 자격이 없는데 죄를 적거든요. 그냥 품꾼의 하나로 봐 주세요라는 거예요. 그리고 일어나서 아버지한테 갑니다. 근데 아버지는 멀리서 아들을 이렇게 보다가 아들이 오는 걸 보고 달려가요. 달려가서 아들을 맞습니다. 아들의 목을 껴앉고 다중하게 입을 맞춰요. 아버지는 아들을 둘째를 아들로 맞은 거예요. 근데이 바보 같은 둘자들이 뭐라 그러는지 보세요. 아버지는 아들로 맞아서 껴안고 입맞췄어요. 그런데 껴앉고 입맞추고 딱 났더니 돌아온 아들이라고 하는 놈이 자기가 연습했던 걸 그대로해요. 21절에 아버지 제가 하늘 거슬러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새글 성께는 갑옷 쓸모가 없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제 품꾼의 하나로 봐 달라고 하는 얘기를 하겠죠. 세상에 이런 바보가 없어요. 아버지는 품꾼이 필요하지 않아요.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기를 말했지 품꾼은 주변에 넘쳐나요. 얘는 진짜 바보예요. 저 쓸모 있어요가 아니에요. 제가 잘못했어도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 아들이에요. 그거를 아버지는 원한다고요. 그러니까이 아버지가 아들한테 너 내 아들이야. 그래도 그렇게 얘기하지 않고 얘는 아직도 자기를 아버지로 생각하지 않고 주인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너무 답답해서 품꾼에게 자기 종에게 얘기해요. 빨리 좋은 옷 어 옷 갖고 와서 입히고 손에 가락지 끼고 가락지는 얘 인감 도장입니다. 인주 있는게 아니라 이렇게 모양 있으면 양피치 같은데 이렇게 꾹 찍는 거예요. 그러면 재산 처분하고 인간 도정처럼 하는 거예요. 살진 송아지 끌어다가 잔치하자. 그다음에 나의이 아들은 나의이 아들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쓸모로 보지 않아요.이 사랑많은 아버지가 하나님을 은유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쓸모로 보지 않아요. 이게 기독교의 시선입니다. [음악] 두 번째 계속 이어지는 얘기가 있죠. 큰 아들이 있어요. 큰아들이 돌아오다 보니까 집에서 잔치 소리 나요. 그러니까 집에 안 들어가고 종을 하나 불러요. 그리고서 얘기합니다.이 뭔 일이냐? 그랬더니 아들에게 대답합니다. 아우님이 와 계십니다. 그리고 주인 어른께서 살진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아우님이 건강하게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큰아들은 화가 나요. 그리고 집에 안 들어가요. 이제 첫째가 집 나간 거죠. 예전에는 둘째가 집 나갔는데 그랬더니 어떻게 하냐? 아버지가 밖으로 나와요. 그리고 새한글 성경은 아버지가 나와서 그를 타일렀어요. 이렇게 번역했는데 이거 번역을 너무 순한 겁니다. 이건 간청한 겁니다.이 헬라우는 예수님 앞에 사람들이 나와서 예수님한테 간청하며 치유를 요청하거나 죽기를 요청할 때 쓰는 그 단어예요. 그니까 얼마나 간절하게 아픈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제 병을 고쳐 주세요라고 간청하는 그 간청을 애하게 간청하는 그 간청을 아버지가 큰 아들에게 하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집 안으로 들어오자고 들어오라고 그렇게 얘기를 해요. 그랬더니 아들이 아버지한테 뭐라 그러냐면 아마 유대인들 읽어 보면 중독 사람들 지금도 중독 사람들 읽어 보면이 아버지 바보라 그럴 거예요. 근데 큰아들이 아버지한테 뭐라 그랬냐면 저는 이렇게 열회 동안 아버지를 위해 종처럼 일했는데 아버지는 나에게 염수새끼 준 적 없습니다. 아버지랑 결래한 거예요. 얘는 계속 큰아들은 아버지를 도구족 가치로 본 거예요. 그러면서 30절에 그러나 아버지의이 아들은 이렇게 밝혔는데 세번 세상글 성경에는 이건 뭐냐면 영어로 얘기하면 유선 내 동생 아니야 당신의 아들에 당신의 아들은 외부에 나가서 허랑방탕하게 살았잖아요. 그런데 그 돌아왔다고 이렇게 살진 소아지를 잡아요. 나는 당신에게 쓸모가 있었고 걔는 쓸모가 없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똑같이 대합니까? 큰아들이 얘기해요. 그랬더니 아버지가 이렇게 간청하 아버지가 이렇게 얘기해요. 예야 넌 말이야. 늘 나와 함께 있었고 이게 핵심이거든요. 나는 너에게 도구족 가치로 존재한게 아니었고 나는 너를 나의 쓸모로 본 적이 없어. 넌 나랑 늘 같이 있었잖아. 나는 세상에서 그게 제일 중요한데. 그런데 아들 큰 아들 둘째 아들 모두 다 아버지의 재산에 관심 있는 거예요. 넌 말이야. 늘 나와 함께 있었고 내 거 다 될 거야. 그런데 지금은 우리가 즐기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니? 너의 동생이 왔어. 너는 너의 동생을 쓸모로 보지 마. 이렇게 얘기합니다. 오늘날 쓸모의에 시각이 강하게 있는 우리에게는 둘들은 정말 상종하지 못하고 첫자들 편들고 싶어요. 그렇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첫째 아들이나 둘째나 똑같이 아버지와 맺는 관계가 쓸모의 관계, 도구적 가치의 관계라고 하는 데서 일치한다고 알려 주세요. 아버지가 아들과 맺는 관계는 쓸모의 관계가 아니라 아까 말한 절대적 같이 가치 계산되지 않는 거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이렇게 얘기를 해 주세요. 그 가치는 어디서 올까? 둘째 가치. 둘째 아들의 가치. 첫째 아들의 가치는 어디서 올까요? 쓸모가 없는 아니 둘째 아들 같은 사람이 와 가지고 저한테 저한테 그런 일이 없겠지만 제가 뭐 회사를 하고 있는데 제 회사에 1분 자본 나가 가지고 다 망 망가드려서 온 와서요. 아버지 제가 지금 아들은 안 되겠고요. 제가 그냥 평사원으로 입사할게요. 제가 왜 그 사람을 평사원으로 받아들여요? 그렇게 저 쓸모없는 사람을 예수님은이 비유를 통해서 어떤 것이 가치가 있을 때 쓸모로 쓸모가 있는 가치 말고 그 존재를 다르게 가치 있게 하는 요소가 있다고 해요. 자, A라는 사람이 쓸모가 있어요. 그러면 그 사람이 외국어도 잘하고 성실하고 뭐 컴퓨터도 잘하고 그래서 쓸모가 있어. A가 그래서 가치가 있거든. 그래서 연봉 1억 줄게.이 사람을 가치 있게 하는게 요런 스펙들이에요. 요건 우리가 다 잘 알아요. 그런데 그거 외에 A라고 하는 사람을 가치 있게 만드는게 있다는 거예요. 그게 뭘까? A라는 상품이 있어요. A라는게 있어요. 이게 어떻게 가치가 있냐? 노동 가치서를 말한 사람이 있어요. 리카르도라고 하는 사람. 나중에 리카르도라고 기억해요. 막스가 그걸 갖고 왔다고 제가 기억해요. A라고 하는게 왜 가치가 있냐?이 원재료의 인간 노동이라고 하는 행위를 통해서 무엇인가를 만들 때 거기에 원재료가 있어요. 거기에 인간의 노동이 더해지면 가치 있는 제품도 생산돼서요 가치 있는 제품이 누가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제품이 돼.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A라는 사람이 있어. 가치가 있어. 왜 가치가 있어? 우리 회사에서이 사람을 1억을 주려 그래. 왜? 이렇게 일을 잘하니까. 이익이 없는 사람들 있잖아요. 그 사람 얼마든지 죽여도 돼. 하는 중장애인. 생전에 있었던 기억을 다 잃어버린 어떤 사람들. 자기 자신의 몸도 조조차 가르지 못한 사람들. 젊은 사람들. 노인 세대들. 중년의 사람들. 나는 자격이 없나 봐. 나는 가치가 없나 봐.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이 술목 없는이 아들 둘 가치가 어디 있나요? 어디서 발생하나요? 그는 전적으로 아버지의 사랑에서 나옵니다. 노동 가치설은 원재료에 인간의 노동이 부여되면 가치가 발생한다 그랬는데 사랑 가치설은 어떤 것에 사랑이 부어지면 그것의 가치가 생긴다는 거예요. 그런데 특별히 인간은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개의산되지 않는 절대적 가치를 갖는다고 하는게 기독교의 신앙입니다. 어렵지 않게 예를 들 수 있습니다. 레이저 포인터가 있어요. 하나는 저가 제품이에요. 하나는 제 친구가 준 건데 리미티드 에디션이 있습니다. 제가 중고 거래하는 마켓에이 두 가지 작품을 나눈다. 그러면 압도적으로 리미티드 에디션 이게 가격이 높을 거예요. 이거는 제가 거의 사용도 안 했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은 새 것이고 실제로 시장 가치가 비싸요. 요거는 중국은 내가 오래 사용했던 거예요. 실제로 저가예요. 근데 요건 제 생일에 제 딸이 선물한 거예요. 자, 둘 중에 이렇게 있는데 둘 중에 하나가 파괴돼야 된다. 그러면 나는 이게 파괴되기를 얼마든지 선택할 겁니다. 요거는 나한테 엄청 같이 있어요. 쉽게 이해할 수 있어요. 왜냐? 여기는요 레이저 포인터에는 내 딸의 사랑이 있기 때문이에요. 사랑이 가치를 보여해요. 나도 이거 여기 저가 레이저 포인터에 가치를 부여했고요. 사랑의 가치를 부여했고요.요 레이저 포인터는 가격은 적지만 여기에는 사랑이 담겨 있어요. 그러니까 나한테는 리미티드 에디션 좋은 것보다 훨씬 더 같이 있어요. 사랑같이 설리예요. 우리가이 사회에서 쓸없다고 하는 사람들 보고 우리가 기독교 신앙에 학각해서 그 사람 쓸모 없는 거 아니라고 그 사람 가치 없는 거 아니라고 쓸모가 없다는 말이 곧 가치가 없다는 말 아니라고 강력하게 신앙에서 저항합니다. 왜? 그 사람 사랑받고 있다고. [음악] 누군가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 난 그 사람은 가치 없는 거 아니라고. 내가 더 이상 창조적인 일을 못 하고 우리 가족의 패만 되는 거 같고 사회에서 나를 필요로 하지 않고 그냥 알바나하면서 용돈버리나 하는 날 길러진 부모에게 패나끼치는 그런 못난 아들 딸 같다고. 내가 이렇게 누워서 꼼짝도 못 하는데 우리 아들 딸은 나 때문에 얼마나 힘들까? 나는 사회 귀생충 같으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인들은 한 사람에게서 다른 가치를 봐요. 당신은 사랑받고 있다고. 그리고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이끌어내는 존재라고. 그리고 병상에 누워 있는 당신도 누군가를 사랑함으로써 가치를 생산하고 있지 않냐고 그렇게 말해 주는게 기독교 신앙인이에요. 그래서 기독교 신앙에는 사회에 쓸모가 없다고 해도 여전히 사랑할 수 있는 사람,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 그 사람이 계산되지 않는 절대적 가치의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고 얘기해 줍니다. 이것이 쓸모 없는 사 쓸모 없다고 평가받는 사람들도 여전히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될 것이다. 저는 그렇게 확신합니다. 우리나라 사회가 아이를 안 낳고 그래서 사회가 위기가 있다 그러고 저출산 대책을 마련하자 그래요. 가만히 들어보면 무슨 얘기하냐면 아이를 이렇게 안 나면 한국 사회가 망하고 한국 경제가 망하고에 노인들이 많아지면 부양할 인구가 적어지기 때문에 경제 한국 경제 활력이 떨어진다 그래요. 그러면서 아이를 낳아서 지방도 살리고 한국 경제도 살린다고 그렇게 얘기를 해요. 그런 시선을 바꾸지 않는 한 아이를 알 생각이 없어요. 왜냐면 그 태어날 아기는 한국 경제의 활력을 위해서 낳는 거니까요. 지금은 하지 않지만 예전에는 국민 교육 헌장이라는게 있었죠. 그것은 한국 신민 서사 예전 일지 시대 거를 본따 맞는 거라고 얘기해요. 거기 보면 첫 구절이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뛰고이 땅에 태났다고 그렇게 써요. 첫 문장이 아무도 해나면 안 돼요. 그러면 우리가 애낳는게 민족 중흥에 우리가 태어나는 그 아기가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달성하기 위해서 태어났다. 그러면 민족 중의 역사적 사명은 목적이고 우리가 나는 애는 수단이잖아요. 이걸 민족주의 그구주의라고 불러요. 민족주의 그구 민족 어 국가주의 속에서 아이를 나라라고 말하는 건 그거는 범죄예요. 그런데 그것이 교묘하게 바뀌었어요. 우리 한국 사회 활력, 경제적 그 풍요, 유지, 복지가 가능하려면 애가 어느 정도 있어야 된다라고 하는 말은 한국 경제 잘 살기 위한 걸 위해서 애를 낳야 된다는 거. 애를 많이 낳아 줘야 우리 한국 사회가 유지됩니다. 그러면 부드러운 현태 같지만 민족 민족주의 구적 국가주의하고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해요. 좀 부드러운 차원에 연성화된 인간의 도구화예요. 그래서 한국 사회에 애가 없다는 건 아이가 그 자체로 사랑하고 사랑받는 절대적 가치의 존재라고 하는 인식의 전면적인 변화가 없는 한 낫지 않죠. 우리 아이가 한국 경제의 활력을 위한 도구적 같이 그거를 직감적으로 아는 우리가 왜 애를 낳아요? 애낳으면 교육시켜 주고 집 집 지어 주고 이렇게 다 할 겁니다. 여러분 애 나오십시오. 그러면 애 나요? 그걸 왜 애를 낳요? 애가 나아서 삶의 기쁨과 의미와 행복 속에 보름과 가치를 가지고 사랑하며 사랑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의 살 수 있는 사회를 기대할 수 있어야 우리가 인간으로 사는 것을 기대할 수 있어야 우리가이 아름다운 세상에 우리가이 아름다운 아이를 통하여 살아가 봅시다 하고 아이를 알 수 있는 마음이 생기죠. 본말 전도된 사회에서 아유 뭐 이거 이거 다 해 줄게. 애만나. 정말 미안한 얘긴데 저저한테 그냥 솔직히 얘기하라 그러면 아예 못 낳겠어요. 애들이 다 도구화되고 조금 경제적 여유가 없는 사람들. 우리가 왜 경제적 부유한 사람들의 노예를 낳아 줘요? 그런 얘기 한다잖아요. 그게 과장되고 약간 아 냉소적인 말이지만 그렇게 말한 분들에게 반박할 말이 없어요. 다만 그냥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기독교인이라면 하나님이 생육하고 번성하라 그랬어. 그냥 그렇게 말할 것 같아요. 왜냐면 그때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 창세기 그 말씀 나올 때 하나님이 너무 인간이 보기 아 아름답고 예쁜 거예요. 그런데 인구가 별로 없잖아요. 땅에 그때는 야 너희들 많아졌으면 좋겠어. 왜? 너희들이 참 예쁘니까. [음악]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거예요. 아이를 나면 참 행복해요. 애가 참 예뻐요. 그리고 그 아이도 나아준 부모님을에게 감사할 거예요. 엄마 참 사는게 행복해. 참 사하는게 기뻐. 부모에게 그것 이상의 효도의 말은 없습니다. 우리가 저도 아들 딸 중 20대 중반인데 저한테 와서 아 제가 참 행복해요. 그것 이상 바랄 수 있는 말이 어디어요? 그건 효도다 하는 말이거든요. 엄마 나 사는게 참 기쁘다. 그것 이상의 말이 어디어요? 하나님께서 아 아담과 하와에게에 만인아 너희들 참 예쁘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야 할 일 있거든 애 좀나라게 아니 그렇게 말하지 않았잖아요. 근데 왜 우리 사회가 애들을 향해서 젊은 세대를 향해서 야 너 일 좀 하게 해라 그렇게 말하냐 말이에요. 너 참 예쁘니까 도달에 많이 나 많이 나와줘 그 말 해야 되잖아요. 기독교인들도 [음악] 엘라라고 얘기할 때 그렇게 삶에서 불어나서 근데 사실 제 아내와 제처는 그 제 아내하고 제는 그런 얘기 하거든요. 우리가 힘든 일도 많았고 아 어려운 일도 많았고 난관 같이 헤쳐 나갔지만 참 사는게 행복하지 않아? 그러면 그 맞아. 우리 삶이 참 의미 있고 충만해. 기뻐. 아 우리 자식도이 삶의 기쁨을 알았으면 참 좋을 텐데.이 삶의 기쁨을 알았으면 참 좋을 텐데. 그렇게 얘기하면서 아, 제 자식들을 바라보거든요. 저는 제 아들과 딸이 아이를 낳았으면 좋겠어요. 어떤 마음에서 낳았으면 좋겠냐? 아,이 세상 참 좋고 행복한 거 우리 아들도 아들 딸도 우리 손자 소년도 알았으면 좋겠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너희들 참 예쁘거든 많아졌으면 좋겠어. 그 말 하신 것처럼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애들한테 바빠서 애들 애 못 나왔을 것 같아. 그 얘기에 하는 아 제 딸한테 그 말을 듣고 제가 이렇게 생각해 봤어. 상상해 봤어요. 우리 제 손녀 손자를 안고 제가 학교로 출근하는 상상을 해 봤습니다. 야 야 할아버지 강의하고 있으니까 여기 잠깐 앉아 있어라. 하는 생각을 잠깐 해 봤어요. 한국 사회의 활력을 위해서 경제 활력을 애나라는 말을 그만둘 때 애를 낳습니다. 우리 사회가 행복할 때 애를 낳습니다. 그렇게 얘기하고 주고 싶어요. 애는 낳으면 좋겠어. 왜?이 이 세상 고통 많은데 그래도 저 깊은 곳에 삶의 의미와 기쁨이 있다. 그 말을 전해 주고 싶어요. [음악] 음.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있겠죠. [음악] 그 뭐 제가 말할 수 없습니다. 그건 어 얼마나 힘들시겠어요. 제 주변에도 꽤 있어요. 자식을 키우는데 참 말할 수 없어요. 네. 특별히 그 사랑은 받는데 얘가 우리를 사랑하는가? 아, 그것도 불분명한 상태에서 자식을 키우는 분도 있고 또 아, 그렇게 좋은 분이었는데 알차이머나 치매를 알면서 내가 알았던 그분이 아닌 그분을 돌보는 그 과정이 또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저는 위로도 못 드리겠어요. 감이. 아, 그저 하나님께서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더 커지도록 그렇게 기도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음악] 사랑은 힘을 내게 하거든요.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힘이 납니다. 그러니까이 힘을 내라 말씀드리기 전에 하나님께 간절히 우리가 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해 달라. 실패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굽히지 않고 일어서는 사랑을 우리 마음속에 주시라. 그렇게 같이 기도하고 싶습니다. 니다. [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