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 받는 구원 배우러 왔다가 일상까지 구원받았습니다|김학철 교수|잘잘법 285회

잘잘법 · 2026-09-11

채널: 잘잘법 |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PEHgrf2na4g | 길이: 33:11

요약

🎯 TL;DR — 김학철 교수는 구약 성서 히브리어 단어(야샤·고엘·파다) 세 개를 통해 구원이 "죽어서 천당 가는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지금의 삶 전체를 아우르는 다층적 경험임을 설명한다.

📌 핵심 논지 — 화자는 구원을 단일 사건(죽음 이후 천국행)으로 좁게 이해하는 개신교 내 왜곡된 관점을 비판하며, 구약 성서에서 구원으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단어들의 본래 의미를 통해 구원이 신체적·정서적·관계적·죽음 전반을 포괄하는 풍성한 개념임을 논증한다.

🗺️ 영상 구성

  • 도입: 구원 경험을 나누고 싶은 인간의 본성 비유(맛집 이야기)
  • 화자 개인 일화: "구원을 언제 받았냐"는 질문을 받았던 군대 시절 경험
  • 특정 개신교 분파의 "구원=특정 시점의 실존적 사건"이라는 좁은 이해 비판
  • 개화기 한국 개신교에 대한 "아멘→아맹/아면" 조롱 일화 소개
  • 히브리어 단어 3개(야샤, 고엘, 파다)를 순서대로 해설
  • 결론: 구원 경험의 다체로움을 알면 전도·신앙생활이 풍성해진다는 마무리

━━━ 본문 ━━━

구원을 좁게 이해하는 것에 대한 비판 화자는 군 복무 시절 휴가 중 만난 청년에게서 "언제 구원받았냐"는 질문을 받았던 일화를 소개하며, 이는 구원을 "어떨 때 딱 일어난 사건, 그리고 그 사건이 미치는 효력은 죽고 나서 천국에 가는 것"으로 국한하는 특정 개신교 분파(2단 이단으로 판정된 교단의 분파)의 이해였다고 밝힌다. 화자는 신학 공부를 하며 구원이 "다적이고 풍부해서 단 하나로 환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개화기 한국의 "아멘·아맹·아면" 일화 개신교가 한국에 들어온 초기, 당시 민중 마음을 얻던 동학·천도교는 '살아 있는 삶'을 중요시했는데, 개신교인들이 내세만 강조하자 이를 빗대어 아멘을 "아맹(눈멀었다)", "아면(면했다)"이라고 조롱했다는 일화를 소개한다. 화자는 이것이 "구원의 삶을 내세로 집중하고, 나는 구원받았다는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종교"로 오해된 왜곡된 형태였다고 지적한다.

야샤(יָשַׁע) — 넓은 곳으로 인도하다 구약에서 구원으로 가장 많이 번역되는 단어 '야샤'는 기본적으로 "넓게 만든다, 공간을 열어 준다"는 뜻이라고 설명한다. 시편 118편 5절의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가 이 원뜻을 살린 번역이며, 반대는 "좁혀 들어오다, 한 구석으로 내몰다"라고 말한다. 다니엘서 6장 사자굴 이야기(좁고 밀폐된 공간에서 넓은 곳으로 구원됨), 시편 34편 4절(두려움에서 건지심), 시편 6편 4절(사망 중에서 건지심)을 사례로 들며, 야샤는 신체적 위협·정서적 고통·죽음까지 포괄한다고 설명한다.

고엘(גֹּאֵל) — 관계에 근거한 구속자 두 번째 단어 '고엘'은 가난이나 채무로 땅을 잃거나 채무 노예가 된 친족을 값을 치러 되찾아 주는 사람을 뜻한다고 설명한다. 민수기 35장의 피의 복수자 역할도 고엘에 해당하며, 이사야 43장 1절("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욥기 19장 25절("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니")의 '구속자'가 모두 고엘이라고 밝힌다. 룻기의 보아스가 룻과 나오미에게 고엘이 되어준 이야기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로 든다. 고엘은 "자기와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에" 나서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파다(פָּדָה) — 대가를 치르는 구원 세 번째 단어 '파다'는 "몸값을 치르고 해방시킨다"는 뜻으로, 구원 행위에 반드시 대가가 수반됨을 강조한다고 설명한다. 출애굽기 12~13장 유월절 밤, 이스라엘 장자가 어린 양의 피로 죽음을 면한 사건을 대표 사례로 들고, 시편 49편 7~8절과 15절을 인용해 "인간은 형제의 생명을 속량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그 대가를 치르실 수 있다"고 설명한다.

게일어 단어를 통한 비유 화자는 감정을 표현할 단어가 없으면 그 감정을 설명하기 어렵다는 예로, 자신이 오랫동안 느꼈던 감정을 게일어의 단어 '히아레스'("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고향에 대한 그리움")를 통해 비로소 정리할 수 있었다고 소개한다.

💬 결정적 발언

"구원이라고 하는 신약 성서, 구약 성서 그다음에 기독교 신약 전반에 퍼져 있는 그 구원에 대한 아주 다양하고 풍성하고 너무나도 아름다운 그러한 구원의 총체적인 면은 다 어디론가 사라지고 구원을 단지 하나로 환원하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종종 목격됩니다."

"만약에 구약 성서가 말하는 이 세 가지 구원의 층의를 알았다면 누구도 기독교의 구원에 대해서 아멘 혹은 아면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 핵심 용어

  • 야샤(יָשַׁע) = 넓게 만들다/공간을 열어주다, 구약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구원' 번역어. 명사형 '예슈아'는 '예수'와 같은 어근
  • 고엘(גֹּאֵל) = 구속자/기업 무를 자. 친족 관계에 근거해 빚·채무 노예·억울한 죽음 등에서 되찾아주는 자
  • 파다(פָּדָה) = 몸값을 치르고 해방시킴. 구원에 반드시 대가가 따름을 강조하는 단어

🔎 보완 & 확인

  • 배경 보완: 영상에서 언급된 "2단으로 판정된 한 교단의 분파"는 화자가 구체적 명칭을 밝히지 않았으며, 어느 교단인지는 자막상 특정되지 않는다.
  • 사실 유의점: "언제 구원받았느냐"를 강조하는 구원관과 "이단 판정" 연결은 화자의 개인 경험과 해석에 기반한 서술로, 특정 교단명이 자막에 등장하지 않아 검증이 필요하다(추정/확인필요).
  • 배경 보완: '아멘/아맹/아면' 언어유희는 개화기 한국 개신교 수용사에서 나타난 민간의 풍자로 소개되는데, 이 일화의 출처(문헌·구전)는 자막에서 명시되지 않아 정확한 역사적 사료 여부는 확인이 필요하다(추정/확인필요).
  • 배경 보완: 게일어 '히아레스(hiraeth)'는 실제로 웨일스어 단어로 더 널리 알려져 있으며("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뜻으로 통용), 화자가 "게일어"라고 언급한 부분은 언어 계통상 혼동일 가능성이 있다(추정/확인필요, 자막 원문 그대로 옮김).

자막 원문 (참고)

Kind: captions Language: ko 구원의 경험을 했는데 그 구원을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정말 드나요? 아니, 난 들 거 같아요. 별로 안 친한 사람이라도 길을 걷다가 내가 아주 맛있게 먹은 음식점이 나오잖아요. 그럼 한 마디 해 줘요. 저 집 음식 정말 맛있다. 내가이 말을 한다고 해서이 사람에게서 어떤 대가를 얻어내는 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정말 맛있다. 이야, 이거 정말 좋은데. 하는이 좋은 경험은 참 신기하게도 주변하고 나누고 싶어요. 인간이 어떤 기쁨을 누리고 아주 좋은 곳을 맛봤는데 야, 요렇게 좋은 거는 나만 맛야 되겠다. 뭐 그럴 순 있겠지. 예를 들어이 맛집이 유명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만 갔으면 좋겠어. 예. 그렇게 하지만 비밀리에 다 말하게 돼 있어요. 결혼한 사람이면 아내한테 말하게 돼 있고 자기 자식한테 말하게 돼 있고 부모님한테 말하게 돼 있어요. 좋은 것이 숨겨지지 않죠. 하나님께 구원받은 기쁨이 큰 사람은 그 기쁨을 안 나누고는 배기지 못하죠. 인간이 그래요. 그래서 우리가이 세 단어로 포착한 구약 성서의 구원의 모습과 정서를 포착했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할 수 있어요. 예전엔 구원이 죽은 후에 천당 가는 걸로 환정하면 맨날 친구한테가 가지고 너 죽은 다음에지고 안 가려면 예수 믿어. 이렇게만 얘기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구원이라고 하는 것이 이렇게 다체롭게 우리 삶을 해석하고 알려 준다면 예수 믿으면 뭐가 좋은데 그럴 때 말해 줄게 많아요. 얼마나 전도의 혹 예수님을 만난 구원의 경험을 나눌게 많아져요. 너무 많아질 것 같지 않아요? 그런 것들이 우리가 구원을 구약 성소에서 바라볼 때 얻을 수 있는 유익이다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군대 있을 때 일어난 일인데 군복 입고 휴가를 나갔거든요. 어 버스 정류장 정도에서 있었는데 한 젊은 청년이 와 가지고 저도 그때 당연히 젊었죠. 기독교인이냐고 물어봐서 그렇다고 대답하니까 그러면 구원을 언제 받았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저는 계속 교회 다닌 사람인데 그런 질문 한 번도 받아본 적도 없고 제가 다니던 교회에서 그런 질문을 한 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어한이 봉벙봉에서 이렇게 가만히 있었는데 자신이 언제 구원받았는지 모르면 구원받지 못한 거라는 식으로 얘기를 해서 참 이상했어요. 그리고 몇 마디 나누다가 이제 헤어지게 됐는데 구원을 언제 받았는지 특정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구원이라고 하는 사건을 자기가 실존적으로 깨닫게 되는 그 시간이 있고 그때부터 자기는 이제 구원이 되었으니까 죽음 이후에 처벌받지 않고 회 가게 됐다라는 그런 전제가 있는 거 같아요.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하나는 실존적으로 구원 사건을 강렬하게 경험했고 그다음에 그 후에 죽은 이후에 그 구원이 성립된다 이런 얘긴데 그때는 그게 하도 희한한 말이라서 언제 구원받았느냐이 말이 희한한 말이라서 아 궁금하다가 그게 어떤 특정 개신교류 교단에서 2단으로 판정된 한 교단의 분파의 이야기라는 걸 알게 됐어. 아, 이렇게 구원을 어떨 때 딱 일어난 사건 그리고 그 사건이 미치는 효력은 죽구나에에 천국에 가는 거 이런 방식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나중에 제가 신학을 하면서 구원에 대해서 공부 하면 구원이라는 것이 참 다적입니다. 아주 다체롭고 또 풍부해요. 그래서 단 하나로 화는 할 수가 없어요. 구원이란 뭡니까? 그러면 뭐라고 바로 대답하는 그 하나로 환원될 수가 없습니다. 예전에 제가 아 뭐 미술에 관한 책도 내고 좀 그랬으니까 어디 가서 강연을 하게 됐는데 그때 어떤 한 분이 손을 들고 램브란트를 한마디로 얘기하면 뭡니까? 이렇게 물어보더라고요. 그래서 그때도 그 질문이 너무 이상했지만 그래도 질문한 분을 봐서 대답은 했는데 사실 어떠한 풍부한 거, 대단한 거 아니 그것도 아니고 그냥 내 자신을 두고 너는 한마디로 무엇이냐 이렇게 물어보면 누가 한마디로 자기 인생을 요약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참 신기하게 구원이라고 하는 신약 성서, 구약 성서 그다음에 기독교 신약 전반에 퍼져 있는 그 구원에 대한 아주 다양하고 풍성하고 너무나도 아름다운 그러한 구원의 총체적인 면은 다 어디론가 사라지고 구원을 단지 하나로 환원하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종종에 목격 됩니다. 가령 우리나라에에 개신교가 이제 돌아와서 얼마 지난 후에 우리가 기독교인들이 진실로 그렇게 되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아멘이라고 하는 말 있잖아요. 그걸 빚돼서 그 말을 가지고 기독교인들을 어 조롱했거든요. 그 중에 하나가 뭐냐면 아멘. 아 아멘이 아니라 아맹 나는 맹멀었다. 아 이건 무슨 뜻이냐면에 자기가에 그 기독교인들이 아멘 아 아멘 아멘 하지만 실제로이 삶의 현실에 대해서 제대로 보지 않는다는 거예요. 당시 개신교하고 함께 몰락한 유교 성리학 대신에 민중들의 마음을 얻던게 이제 동학, 천도교 뭐 이런 건데 거기선 살아 있는 삶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근데 개신교인들 만나면 그렇게 내세에 관한 얘기를 많이 했나 봐요. 그러니까 아멘. 참 저 사람들은 내세에 구원받는다고 하면서이 세상의 삶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구나. 아멘. 아멘. 하지만 사실은 아맹이다 이렇게 놀리기도 하고 두 번째로 놀렸던 말은 아면 이렇게 놀렸다는 거예요. 나는 면했다. 나는 뭐 지옥불로부터 면했다. 그런 뜻이겠죠. 아, 삶이 고통스러울수록 저 세상 내세를 추악 추구하고 소망하게 되어 있으니까 기독교인들 얘기하는 거 보면 내세를 바라는데 자기는 구원받았다는 거예요. 나는 면했다. 그러니까 그 아맹하고 아면은 비록 아 우리 기독교인들 초기 개신교인들을 믿고는 말이지만 아 기독교 개신교에 왜곡된 형태가 있는 거 같아요. 구원의 삶을 내세로 집중하고 또 아 남들이 아니라 나는 구원받았다라고 하는 굉장히 개인적인 그리고 좀 어떻게 볼 때는 보성 산악의 이기적인 그런 종교로 이해가 됐던 거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보면 그 안에 구원에 대한 정말 아름다운 말들이 많고이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죽은 후의 문제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 그리고 죽음을 면해서 모두 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의 현실을 선사하고 있다고 하는 거 그것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오늘은 구약 성서에 나온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하고요. 그리고 다음에는 신약 성서에 나온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너무 그 구원의 이야기가 다체롭기 때문에 그냥 구약 성서를 다룰 때는 히브리어에서 구원으로 번역된 말. 우리가 구원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근데 이게 뭐 한국어로 쓰인게 아니잖아요. 구약 성경은 주로 히브리어로 쓰였으니까 히브리어 단어들 구원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들은 뭔가 그걸 살펴보고 그 쓰임을 통해서 구원의 면모를 이해하고요. 신약 성서는 헬라어로 쓰였잖아요. 그러니까 구원으로 번역된 신약 성서의 헬라어 단어를 찾아서 아 구원이 어떤 것인지 예 우리가 조금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구원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나 풍요롭지만 저는 오늘 그렇게 아주 간략하게만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원이라고 번역되는 히브리 성서 구약 성서의 첫 번째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는 바로 야샤라고 하는 단어거든요.이 이 야샤라고 하는 단어의 명사형이 예슈아입니다. 여호수아랑 같은 거의 비슷한 발음이죠. 우리 예수 그리스도 할 때 예수가 바로 예슈와 이렇게 발음됐다고 하잖아요. 아 예수님께서 공생이 사실 때 지상에 사실 때 그분의 이름을 예슈아라고 발음하는게 제일에 정확할 것이다. 그런 추정들을 많이 하거든요. 같은 어근에서 나온 말입니다. 야샤 예슈아 같은 말이거든요.이 이 말의 기본적인 뜻은 뭔가? 우리가 구원이라고 번역했지만 히브리어 그 야샤라고 하는 단의 기본 뜻은 뭐냐? 넓게 만든다. 공간을 열어주다. 그런 뜻입니다. 이게 참 재밌게도 시편 118편 5절에 보면 이상하게 야샤라고 하는이 단어를 구원하다라고 많이들 번역했는데이 시편 118편 5절에서는 야샤의 뜻을 그대로 살려서 번역했거든요. 개혁 계정에서. 제가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이렇게 되 있습니다. 여기서 넓은 곳에 세웠다가 야샤를 번역한 거예요. 참 재밌죠? 히브리어의 우리가 구원이라고 번역한 야샤의 기본 뜻은 넓게 만들다. 공간을 열어 주다. 그러면 그 반대는 뭐죠? 넓게 만든다의 반대는 좁혀 들어오다. 그리고 공간을 열어 주는게 아니라 한 구석으로 내몰다. 이게 구원의 반대되는 그러니까 우리가 벗어나야 하는 그 뭐라 할까요? 악이라고 할까요? 벗어나고 싶은 상태가 바로 조여오는 거, 좁혀오는 거, 구속으로 멀어놓는 거 이런 겁니다. 그래서 시편 118편 5절 이하를 읽어 보면 원수들이 사방에서 저를 에워삽니다. 벼랑 끝으로 몰리는 이런 이야기들이 쭉 있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시편 저자가 저를 야샤해 주세요라고 청원하는 그런 상황이에 됩니다. 신체 경험도 똑같아요. 우리가 위험한 순간, 고통스러운 순간은 사지가 마비된다 그러고 숨이 턱 막힌다 그러고 사지가 오그라든다 그러잖아요. 그 반돼 되는 거는 사를 쭉 폈다. 그리고 한 숨을 쉬다. 한 숨을 쉬다는 건 이완했다는 거거든요. 아, 그러니까 야라고 하는이 단어는 참 신체적 언어 같잖아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라는 중요한 뜻은 뭐냐? 우리에게 숨통을 튀어 준다. 우리의 신체를 이완시킨다. 우리의 마음을 턱 놓게 한다. 우리가 위급한 순간에 우리의 시야가 좁아지면 우린 참 바보 같은 짓는 많이 하거든요. 그때 구원은 뭐냐면 우리의 좁아진 시야를 넓혀 주는 거거든요. 그러면 파멸의 길로 가지 않고 생명을 선택하는 길로 갑니다. 그래서이 야샤가 그런 의미에서 구원의에 뜻을 히브에서 갖고 있습니다. 요게 제일 잘 쓰인 곳이 바로 다니엘서 6장에 있는 사자굴 이야기입니다. 다니엘이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이유로 사자굴에 던져요. 그때이 사자굴이라고 하는 것은 좁은 것을 아주 이미지를 잘 보여 주는 거예요. 굴이 예요. 그러니까 어두운 곳이에요. 밀폐된 곳이에요. 그리고 불에 집어넣고 탈출구를 돌로 봉인하죠. 그러면 맹수들이 다가와서 맹수들의 순결이 느껴져요. 그러니까 긴장하죠. 몸이 움추어들죠. 그러다가 내가 맹수들에게 먹힐 가능성이 있죠. 그러니까 사자굴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야샤의 정 반대편 내가 수축하게 되고 위축되게 되고 맹수가 쫓아오니까 도망치다 도망치다가 코너에 몰리게 되잖아요. 우리가 코너에 몰리다라는 말이 은유적으로 위계처했다는 거잖아요. 하룻밤 지났습니다. 다리 세자와 다리 왕이 일어나 가지고 막 그 사자골에 달려가 가지고 불을 치우면서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이렇게 부르면서 내가 항상 섬기는 내 하나님이 능히 너를 사자에게서 구원하셨느냐 할 때 구원하셨느냐 그 단어가 야샤하셨느냐 이렇게 돼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야셔하셨냐? 그러니까 그 좁은 공간, 밀폐된 공간, 어두움 공간, 습한 공간, 코으로 몰린 그 공간에서 하나님이 너를 넓은 곳으로 인도하셨느냐? 그런 뜻이 되겠죠. 네.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야샤하셨죠. 그거 외에도 시편 34편 4절 같은데 보면 내가 여호와를 찾았더니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이렇게 개혁 계정 번역하는데 건지셨도다.요 단어도 야샤입니다. 신체적인 좁음에서 건지시고 그다음에 인간의 심리 두려움. 인간에게 가장 원초적인 감정이 두려움이라고 하더라고요. 여러 감정이 있지만 한 뇌 과학자에 따르면 여러 감정이 있지만 다 두려움이 변주한 거라네요. 그거 참 재밌었어요. 하늘에서 비가 내릴 때 뭐 이슬비, 가랑비, 장마, 뭐 보슬비 뭐 여러 비가 많지만 비잖아요. 다 하늘에서 내리는 액체, 물. 그것처럼 인간이 시노에락 다 느껴도 결국 두려움이 변줄하는 뇌악자들의 말이 있는데 시편 34편 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두려움에서 사람을 야하시는 분이다. 두렵게 되면 위축돼요. 만약에 우리가 이렇게 걸어가는데 밤에 어떤게 갑자기 앞으로 확 나와 봐요. 그럼 어떻게 되죠? 탁 움추려들죠. 움추어든 상태에서 야하시는 건 뭐냐면 우리가 손을 놓고 마음을 놓는 거예요. 두려움에서 우리를 야서하신다. 제가 지금 구원은 죽어서 천당 가는 것만이 다 다가 아니다. 히브리어를 보면 우리 첫 번째 보면 사자해서 두 번째 우리의 신체적인 것으로 그게 다 구원의 현실이에요.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의 모습들이에요. 세 번째 보면 시편 6편 4절로 기억하는데 거기 보면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그것도 야샤입니다. >> 실제적인 위협 우리의 정서적인 고통 마지막으로는 우리의 죽음까지 하나님께서 야샤 하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얼마나 구원이라고 하는 말이 다체롭습니까? 그래서이 말을 가만히 묵상하고 있으면 정말 우리가 자유롭다고 한다는 거, 자유가 구원의 결과라고 하는 것을 정말 잘 느낄 수가 있어요. 우리가 구원받는 구원받는 삶이 뭡니까? 그렇게 물어보면 그냥 단 한 마디로 얘기하라 그러면 우리가 자유롭게 되는 거예요. 좁은 데서 넓은 데로 가고 억압된 데에서 자유로 가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가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구원의 한 단락입니다. 굉장히 크죠. 우리가 그런 야샤 구원의 경험이 있으니까 옆에 있는 사람에게 야샤하는 작은 구원자가 되는 거거든요. 우리가 가끔 다른 사람을 코너로 몰아넣잖아요. 다른 사람을 정서적으로 위축시키잖아요. 그렇죠? 혹은 그런 사람들을 보죠. 우리가 하나님을 닮는다고 하는 것은 그런 사람들 앞에 야하는 사람으로 나타나는 거죠. 그게 구원받은 사람의 삶이죠. 이게 이제 야샤라는게 제일 많이 쓰이는 거고 그다음에 쓰이는 단어가 바로 고엘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이게 가알이라고 하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인데 어떤 사람은이 단어를 구원을 말할 때 가장 아름다운 단어라고 그렇게 얘기하기도 하더라고요. 고이라고 하는 건 구속자 뭐 이렇게 번역하거나 기업 부를자 예전엔 그렇게 어렵게 번역했는데이 고엘이 무슨 역할을 하냐면 여기 한 집안이 있어요. 그리고 여기 이제 친지들이 모여 살아요. 그런데이 가족이 가난 때문이든지 아니면 병에 걸려 가지고 그 가족이 갖고 있는 땅을 팔아야 됐어요. 그런데이 땅을 팔면이 가족이 먹고 살게 없단 말이죠. 참 복이 딱하잖아요. 아니 뭐 당시 사회에서 땅이 유일한 생산 수단인데 그걸 빼앗기고 나면 다른데 가서 소작을 하거나 아니면 날품파리 같은 걸 해야 되는데 참 딱하고 안 됐어요. 그러면 옆에 있던 사 친지가 그 상황을 보고 모른 척하지 않고 모른척하지 않고 값을 치르고 그 땅을 되찾아 줘요. 그 사람을 고엘이라고 불러요. 아까 그 가족이 땅을 팔았어요. 가난과 질병 때문에. 근데 아무리이 고엘이 있어도 그 땅값을 치를 여은 안 될 수 있잖아요. 그러다가이 빚을 갚다 갚다 못 해서 당시에는 뭐 오늘날처럼 제1극민콩은 없습니다. 다 고리대금이에요. 다 고리대금. 그래서 빚을 갚다 갚다 못 갚고 이자를 갑다 갚다 못 갚아 가지고이 집안에 있는 한 사람이 채권자에게 채무 노예가 돼요. 그러면 그 사람의 뭐 집안에 한 16, 15살 된 애가 있으면 남자애든 여자애든지 그 집가 가지고 채무 노예로 10년 20년 보내야 되는 거예요. 안 됐잖아요. 옆에서 내가 땅을 땅값을 치를 여력은 안 되는데 그래도 내 친지가 뭐 조카가 혹은 뭐 내 사촌 동생이 아니 자기 그 한 분 태어난 그 아름다운 인생을 누군가의 채무 노예로 사는게 얼마나 복이 딱해요. 그래서 있는 다 가지고 그 채무 노예값은 주고 얘를 해방시켜요. 그 사람이 고엘이에요. 또 민수기 35장 보면 어떤 가족이 부당하게 살해당했어. 그러면 그걸 갚아 줄 사람이 필요하지. 피해복수자가 필요해요. 그 역할을 한 사람도 고엘이에요. 구약성서에서 구원이라고 번역된 구원자라고 번역된 주요한 단어가 바로 고엘입니다. 고엘이 왜 고통에 처한 사람,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을 위해서 나서죠. 자기와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잘하는이 이야기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다. 이사야서 43장 1절이죠. 뭐 우리나라 한국 계신교인들 다이 구절을 외워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할 때 그 구속이 고리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이 구조를 밀어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혈 되신다는 거예요. 우리가 체문노회로 팔려갈 때 우리가 우리의 삶의 수단을 잃고 고통에 처했을 때 우리가 누군가에게 우리의 권리를 치매당하고 심지어 우리의 목숨을 잃게 됐을 때 하나님께서 고되어 주신다. 고엘로 활동하셨다. 이게 구원의 한 번역입니다. 그러니까 그것도 얼마나 얼마나 좋습니까? 하나님의 구원 천포때 야가 우리의 숨통을 치워 주시는 거잖아요. 그러면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고 그걸 만끽하게 한 구원 경험이거든요. 고엘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가까운 사이기 때문에 우리가 겪는이 어려움 속에서 친히 고이 되어 주시겠다. 욥기 19장 25절 같은 경우에도 욥이 고통을 당하면서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실 것이라. 여기서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니 할 때 구속자가 고엘이거든요. 욥이 아무도 자기 편을 들지 않아요. 다 너 죄 있어서 고통받는 거라 그래요. 욥이 말하는 거죠. 나의 고혈이기시다. 요걸 가장 아 잘 보여주는 구절은 아마 루기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겁니다. 루기. 여기 보면 루과 나오미가 있는데 나오미는 원래 이스라엘 출신이면 루은 외국인이었잖아요. 근데 거기서 살다가 나오미의 남편 아들 둘 다 돌아갔어요. 그러면이 무슨 뭐 여성들 그 특별히 나오미처럼 나이 많은 여성들이 어디서 무슨 일을 해서 먹고 살겠어요? 그러니까 여기서도 힘들고 저기서도 힘들 것 같으니까 자기가 고향 땅에 돌아가서 죽겠다고 마음으로 고향으로 돌아가잖아요. 그러면서 자기 두 며느리에게 너희는 여기 남아도 된다. 이미 나를 부양할 의미가 없는 거죠. 부양할 의무가. 그런데 루은 어머니 따라오잖아요. 시어머니. 이게 생생하게 아마 실감이 안 날 텐데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우리나라의 한 가족이 베트남으로 사업바러가 가지고 아들 둘이 거기서 결혼을 했는데 가장 죽고 아들 죽고 그 시어머니하고 베트남 며느이 두 남은 거예요. 그 어머니는 야 내가 먹고 살게 없어도 그래도 한국 돌아가게 되겠다 이렇게 한 거잖아요. 근데 베트남 여인 둘 한국 한국어도 모르는데 여기 오면 어떻게 해요? 그래서 너희들 베트남에 나와서 재원하고 잘 살아라 그랬더니 그냥 그 베트남 며느리 하나가 따라온 거예요. 한국에 이렇게 생각하면 좀 생생하지 않아요? 근데 한국에 왔는데 무슨 한국어를 합니까? 뭘 합니까? 그 아주 참 좋은 법이죠. 이렇게 별을 밀 같은 걸 벨 때 밭을 쭉 베지만 한구위에는 한 귀퉁위에는 고통받고 가난한 사람들 땅 없어서 낡은 팔에 다니는 바는 사람들 위해서 이만큼 남겨 두잖아요. 또 나다를 거을 때 땅에 떨어진 거 죽지 않잖아요. 일부러 밤 이런데 와서 왜 밤에 해요? 낮에 와서 그렇게 하면 수치스럽잖아요. 그러니까 밤에 와서도 뭐 낮에도 할 수 있겠지만 당연히 곡식을 거둘 때 귀퉁이 거기 가서 거두면 되고 밤에 달빛에 의지해서 따 주어 가지고 생존하는 거죠. 그런 거 생각해 보면 참 구약 성서에 있는 빈민과 약자를 돌보는게 참 중요한 거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맨 처음에 들어온 언더우드 선교사도 맨 처음 세운 기관 중에 하나가 고아운이거든요. 우리 한국 개신교 초기에 고아운 참 열심히 했습니다. 예. 품 없는 아이들 돌보는 일을 참 열심히 했는데 여하튼 그때 보아스가 법적 의무 이행만이 아니라이 루에게 고엘이 되어 주겠다라고 한 겁니다. 고엘이 되어 주겠다. 얼마나 좋습니까?이 이 고통받고 있는 여인에게 고엘이 되어져서이 사람의 생계 나오미의 생계를 같이 책임져 줘요. 그리고 아주 놀랍게이 루과 보아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이름을 올리게 되죠. 이게 구원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생각해 보세요. 고엘이 누구냐? 루에게 보아스 같은 존재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에게 고이 되어 주신다. 그러니까 그 말을 우리가고 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면 그 말을 바꾸면 구원 구원 경험을 그렇게 우리가 체험했죠. 그러면 다른 사람에게 고혈이 돼져야 되는 거예요. 그게 구원받은 삶의 경험이고 그냥 마땅히 생기는 의무다. 그렇게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세 번째는 파다라고 하는 히브리어인데요. 이것은 몸값을 지으라고 해방시킨다. 그런 뜻입니다. 고엘이 관계에서 나오는 의무를 강조한다면 파단은 그 구원 행위에 반드시 대가가 소반한다. 그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야샤를 잘 보여주는 본문이 다니엘서 6장이고 고해를 제일 잘 보여주는 본문이 루기라면이 파다를 가장 잘 보여주는 맨 처음에 나온게 바로 출애굽기 12장 13장에 나오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와 가축의 첫 새끼가 하나님께 속해요. 그래서 반드시 파더로 구속돼야 돼요.이 규정의 배경이 유월절 밤이거든요. 이집트의 장자가 죽을 때 이스라엘 장자가 살아남은 것은 어린 양의 피를 뿌려서해요. 문설주에.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장자가 구원을 받았죠. 죽음에서 건져냈죠. 그때 그 구원의 행위는 반드시 대가가 있는 행위라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한 생명이 구원되는 것은 그만큼의 대가를 치른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실 때 하나님도 대가를 치르신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이 구원해 주신이 구원을 가벼히 여겨서는 안 되죠. 특별히 또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때 파다 하실 때 우리는 참아 치를 수 없는 값을 치르고 구원하시는데 예를 들어 시편 49편 7절에서 8절 보면 어떤 사람도 자기 형제의 생명을 속량할 수 없다 이렇게 얘기하거든요. 그다음 바로 시편 49장 15절에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 영혼을 수월의 권세에서 건지시리니 파다하시리니 그가 나를 영접하실 것이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데 하나님이 구원하실 때 그분은 인간이 치를 수 없는 대가를 치실 수 있다는 거예요. 우리가 애를 키우거나 하다 보면 애가 아프면 말이죠. 내가 대신 아파 주고 싶어요. 애가 그냥 콧물이 뜯든 코가 있어 가지고 숨도 모시고 핵거리면 내 코가 막혔으면 좋겠어요. 대신. 그럼 나는 어른이니까 코 풀면 되잖아요. 그런데 아무리 자기 자식을 사랑해도 엄마가 아기 대신 아파질 수가 없어요.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나보다이 사람이 사는게 나. 근데이 사람은 죽어가고 나는 산다는게 말이 안 돼. 그래서 아이 사람 데려가지 말고 내 목숨을 데려가세요. 이렇게 아무리 얘기해 봐야 우리는 그 사람의 죽어가는 목숨을 치를 대가가 우리의 수중엔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대가를 치르실 수가 있고 그 대가를 치르시고 그분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구원하셔요. 이게 구원의 하나의 특성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이 이 세 가지 단어가 이렇게 같이 놓이면요. 얼마나 풍요롭습니까? 우리가 죽어서 천당 가는 걸 구원으로 못 받고 살면이 생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될지 모르겠어요. 그냥 뭐 거짓말 안 하고 욕심 안 부리고 그냥 살면 되는 건가요? 그건 구원받은 사람의 삶의 기쁨과 경험을 누리지 못하는 거예요. 우리가 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야샤하신 사건들 우리를 넓은 곳에 세우시고 우리 우리에게 숨을 탁 아 마음을 턱 놓고 아 이제 살 거 같아. 그 그 안도의 숨 우리가 안도의 숨을 쉬면서 몸을 탁 이렇게 느려뜨리면서 아, 정말 좋아. 코너에 몰렸을 때 몰려서 아 어떤데도 갈 수 없을 때 것처럼 보이는데 눈을 돌리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넓은 공간을 만들어 주셔서 거기로 가게 해 주신 그 경험 그 경험을 느리는 사람은 그 구원의 경험을 똑똑하게 생각하고 왜냐면 언어가 없으면 그것을 포착할 수가 없거든요. 우리가 뭘 느꼈어. 근데 그 느낀 것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으면 그걸 설명하기가 굉장히 어려워요. 제가 저 최근에 게일어에서 제가 한동안 오래 느꼈는데 한 번도 접해 보지 못한 단어가 게러에 있다는 걸 알았는데 그게 무슨 단어냐면 전 이상하게 제가 어렸을 때 살돈에 대한 특별한 노스텔 지어가 있는데 그때 실제로 그 공간에 가도 그 노스테일 지어가 없어지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도대체 어떤 감정인지 몰랐거든요. 그러니까 노스텔어라는 말만 붙였지만 그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가 없으니까 늘 그 단어가 그 감정이 해명이 안 되니까 그냥 답답한 채만은 있었어요. 그런데 게일 어중에 히아레스 한 마디를 어떻게 얘기할 수 있냐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고향에 대한 그림 역설이죠. 고향은 자기가 익숙한 곳이 고향이란 말이에요. 근데 그 단어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고향에 대한 그림이에요. 고향 그리운 거예요. 그건 말이 맞아요. 근데 그 고향을 형용하는 말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것이. 근데 제가 딱 그런 감정을 갖고 있었어요. 근데 게어에 그게 있다고 하니까 이제 그 감정이 정리가 돼요. 그니까 우리의 감정이 이렇게 있는데 이거를 정리할 단어가 없으면 우리가 이게 뭔지 모르고 살거든요. 근데 여러분, 우리 신앙생활 할 때 우리가 신앙생활을 통해서 우리를 넓게 한 우리의 생각을 넓히시고 우리의 숨 우리가 숨쉬는 걸 안 되물 쉬게 하시고 우리의 신체를 이완시켜 주시고 우리가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우리의 생각에 공을 열어 주신 그 사건이 모두 구원 사건이에요. 구원의 경험이에요. 그러니까 그 구원 경험을 기쁘게 생각하면서 우리가 그런 구원을 실천하며 살 수 있어요. 다른 사람에게도 구원의 열매를 나누게 할 수 있습니다. 보엘이라고 하는 단어가 구원이란는 말로 알게 되면 우리가 구원 체험을 해요. 하나님께서 나와 깊은 관계를 맺으시기로 작정하시고서 나에게 내가 채무 노예로 팔릴 때 내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나의 고이 되어 주신다. 그런 경험을 한 사람은 주변에 누가 고통을 당할 때 아 내가 치지니까 도우긴 해야 되는데 아 나도 어상 형편이 어려운데 막 이런 생각할 거 아니에요. 그때 고혈되신 하나님 루에게 고되어 준 보하스의 이야기를 생각하면 우리가 용기를 내게 되죠. 우리가 구원을 구원의 환일를 같이 나누 나눌 수 있는 힘이 생기죠. 단어 개념으로 우리의 구원 경험을 파악한다는 건 그렇게 도움이 됩니다.이 세층 하나님께서 야샤하시고 우리의 고혈되시고이 모든 과정에서 인간은 참아치를 수 없는 그 값을 치르시는 파다의 구원의 하나님이 되신다.이 이 얘기를 우리가 들으면 지금 여기서 고통받는 타자의 얼굴을 주목해 볼 수 있고 그 타자를 위해서 내 공간을 내어주고 함께할 수 있고 그 회복의 값을 치를 때 기꺼이 치를 수 있는 사랑의 자리에 우리가 임하게 되면 하나님의 구원의 경험을 이곳에서 다시 한번 아름답게 체험하고 사는 겁니다. 그럼 신앙생활이 훨씬 더 생동감이 있게 되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니 아면이나 아맹하고 히브리어 구원들 구약 성서에 있는 구 얘기하는게 완전히 달라요. 만약에 구약 성서가 말하는이 세 가지 구원의 층의를 알았다면 누구도 기독교의 구원에 대해서 아멘 혹은 아면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