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구원론(매운맛ver) 듣고나서 울컥했어요 ㅣ권연경 교수ㅣ잘잘법 250회

잘잘법 · 2026-09-08

채널: 잘잘법 |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rEcxK42eWB4 | 길이: 30:48

요약

🎯 TL;DR — 권연경 교수는 "구원받았다"는 과거형 언어가 만든 착각을 지적하며, 구원을 이미 완료된 사건이 아니라 광야를 지나 가나안으로 향하는 목표를 향한 여정으로 이해할 때에만 신자의 삶과 순종이 진짜 의미를 가진다고 주장한다.

📌 핵심 논지 — 믿음과 행함을 둘러싼 이중적 사고("바울 박사와 야고보 씨의 공존")를 지적하며, 구원을 과거형("구원받았다")이 아니라 미래적 목표로 재정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공평하셔서 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갚아주시며, 은혜는 조건을 따지지 않되 우리를 다스리고 훈련시키는 능력이라고 설명한다.

━━━ 본문 ━━━

믿음과 행함의 이중적 사고 화자는 중학생과 어른에게 같은 질문(믿음으로 구원받는다 → 살아있는 믿음 → 행함이 따라오는 믿음 → 그럼 행함 없이는 구원 못 받는다)을 던졌을 때, 중학생은 논리대로 "예"라고 답하지만 어른들은 답을 회피하거나 침묵한다고 말한다. 그 이유를 "논리적으로는 예가 맞지만 대답하면 안 될 것 같으니까"라고 설명하며, 남을 볼 때는 야고보처럼(행위로 믿음 판단), 나를 볼 때는 행함 없는 믿음을 전제하는 이중적 삶을 지적한다.

"구원받았다"는 과거형 언어의 문제 구원을 과거형으로 인식하면 신약의 수많은 경고와 교훈이 "나에게는 해당 사항 없다"고 여겨지는 문제가 생긴다고 지적한다. 또한 "구원받았다"는 확신과 결합되기 쉬운데, 구원의 확신은 컨디션에 따라 달라지는 심리적 현상이라며 대학 시절 큐티를 빼먹거나 친구와 사이가 나빠졌을 때 확신이 흔들렸던 개인 경험을 예로 든다. 반면 성경은 구원을 갈라디아서의 "의의 소망", "상속받게 될 하나님 나라", "영생을 수확하게 될 것" 등 대부분 미래형으로 표현한다고 말한다. 빌립보서 3장의 바울("이미 얻었다는 것도 아니고... 목표만 바라보고 쫓아간다")을 그 근거로 제시한다.

영적 축지법과 광야 이스라엘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곧바로 가나안에 가지 않고 광야 40년을 거친 것처럼, 신자도 십자가(출애굽에 비견)를 경험했지만 마지막 심판(가나안)을 향해 가는 중이라고 설명한다. 이 광야 과정을 생략하고 "예수 믿는 순간 바로 천국"이라 여기는 사고를 영적 축지법이라 명명하며, 이 때문에 "현재 삶은 아직 해명되지 않은 회색 지대"로 남는다고 자신의 책 표현을 인용한다.

구원 개념의 혼용 문제 '구원'이라는 단어가 1세기에는 일상적 표현(감옥에서의 석방, 병 치유 등)이었다며, 빌립보서의 바울(감옥에서의 구원)과 복음서의 병 치유 사례를 든다. 신학적으로도 에베소서 2장의 '과거의 더러운 삶으로부터의 구원'(1차적 구원)과 마지막 심판 때의 최종 구원을 구분해야 하는데, 이를 하나로 합쳐 버리는 것이 사고 혼란의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공평하신 하나님과 행위 심판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는 구절이 구약뿐 아니라 예수님, 베드로전서 1장 17절, 야고보서, 요한계시록에도 반복된다고 말한다. 히브리서 11장 6절의 "상 주시는 분"도 원어상 "갚아 주시는 분"이라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설명한다. 로마서 2장에서는 이신칭의를 설명하기 직전에 바울이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2:6), "율법을 행하는 자가 의롭다 함을 받는다"(2:13)고 말하며, 2장 16절 "내 복음에 따라서"라는 표현으로 이것이 자신의 복음 전제임을 못 박는다고 지적한다. 이를 컴퓨터 운영체제(윈도우) 비유로, 행위 심판 사상이 바탕에 깔려 있고 그 위에서 다른 이야기가 작동한다고 설명한다.

하나님의 꿈 — 입양과 형상 본받기 로마서 8장 29절을 근거로, 하나님이 독생자 외에 많은 자녀를 얻기 위해 우리를 입양(양자됨)하기로 예정하셨으며, 그 목적은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과정 없이 결과만 얻으려는 것을 "도둑심보"라 표현하며, 공평하신 하나님의 구원에는 그런 지름길이 작동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순종을 이끄는 예수님의 전략 어린 시절 어머니가 우산으로 뒤에서 찔러가며 시장을 지나게 한 일화를 들어, 주기도문의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과거형)와 마태복음 18장 1만 달란트 비유(용서받은 자가 용서하지 않아 다시 감옥에 갇힘)를 통해, 예수님이 "네가 먼저 해야 나도 한다"는 방식으로 순종을 이끌어낸다고 설명한다.

은혜에 대한 오해 은혜를 단순히 '행위의 반대 개념'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오해라고 지적한다. 바울이 말하는 은혜의 핵심은 "쓸데없는 조건(유대인/헬라인, 할례, 학벌, 권력, 집안 배경)을 따지지 않는다"는 것이며, 이후 그 은혜가 로마서 5장처럼 우리를 "다스리고", 디도서처럼 "가르치고 양육"하는 능력으로 작동한다고 설명한다.

💬 결정적 발언

"구원받았다"는 말은 구원을 과거형으로 보는 건데... 신약 성경은 구원을 목표로 제시하거든요.

우리는 구원의 확신하고 걸어 버리니까... 3일 전에는 구원받았었는데 오늘은 구원을 못 받은 거죠.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는게 바울 복음의 전제라는 거예요.

우리가 구원의 과정을 겪지 않고서 어떻게 구원의 결과를 먹고 싶어 하는... 그런 도둑심보는 공평하신 하나님의 구원 속에는 작동하지 않습니다.

🧩 핵심 용어

  • 영적 축지법: 광야(현재의 삶) 과정을 생략하고 출애굽(십자가 경험) 즉시 가나안(최종 구원)에 이르렀다고 여기는 사고
  • 1차적 구원: 에베소서 2장에서 말하는, 과거의 더러운 삶으로부터의 구원(이방 신자의 회심)
  • 최종적 구원: 마지막 심판 때 받는 구원, 신약이 주로 미래형으로 지시하는 구원
  • 양자됨(입양): 하나님의 독생자 외에 많은 자녀를 얻기 위해 신자를 예수님의 동생으로 입양하는 과정

🔎 보완 & 확인

  • 배경·맥락 보완: 이 강연은 '이신칭의(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음)'와 '행위 심판'을 대립이 아니라 순서(먼저 은혜로 부르심, 이후 그 은혜 안에서 행위로 심판)로 통합하려는 관점으로, 개혁주의 전통 내에서도 '값싼 은혜' 비판·성화의 필연성 논의와 맞닿아 있다(확인필요: 화자의 신학적 입장이 특정 교단·학파와 정확히 어떻게 구분되는지는 자막만으로 단정하기 어려움).
  • 사실 유의점: 로마서 2장 13절("율법을 행하는 자가 의롭다 함을 받는다")과 이신칭의(로마서 3-4장)의 관계는 신학적으로 논쟁적인 주제이며, 화자의 해석(행위 심판이 복음의 '전제'로 바닥에 깔려 있다는 해석)은 여러 해석 중 하나로 이해하는 것이 안전하다(추정: 이는 화자 개인의 신학적 강조점이며 보편적 합의는 아님).
  • 사실 유의점: "1만 달란트=20만 년치 임금" 환산은 화자가 언급한 대략적 비유적 계산으로, 당시 화폐 가치 환산은 사료에 따라 편차가 있어 정확한 수치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천문학적으로 갚을 수 없는 빚"이라는 비유적 취지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자막 원문 (참고)

Kind: captions Language: ko 제가 이렇게 실험을 이렇게 해 볼 때가 있어요. 어른들을 대상으로 이렇게 하고 그다음에 중학생 수준의 애들하고 대상으로 해서 제가 똑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중학생 앉혀 놓고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맞습니까? 그러면 예 그러죠. 근데이 믿음은 껍데기 믿음이 아니고 살아 있는 믿음이라 됩니다. 그럼 또 다 예 그러죠. 그리고 사람 있는 믿음은 뭐죠? 그러면 또 다 알아요. 행함이 따라오는 믿음을 말해요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행함이 없이는 구원 못 받는 거네요. 예 합니다. 똑같은 실험을 어른들에게 가지고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어른들은 내 안하고 아멘 해요. 그다음에 근데이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라 살아 있는 믿음이라 됩니다. 그러면 아멘이죠. 근데 살아 있는 믿음은 행함이 따라오는 믿음입니다. 그것도 아멘해요. 우리가 그러면 행함이 따라오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거네요. 그러면 대답이 반으로 줄어듭니다. 그리고 그러면 행함편은 그럼 결국 구원 못 받는 거네요라고 말하면 대부분이 침묵합니다. 논리가 안 돌아가서 그럴까요? 중학생보다 멍청해서 그럴까요? 그건 아니겠죠. 근데 왜 대답 안 하냐면 대답하면 안 될 것 같으니까. 논리적으로는 예라고 하는게 맞는데 그럼 뭔가 아닌 거 같으니까. 이 뭐냐면 우리가 이렇게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이 앞뒤가 안 맞는 거니까 앞뒤가 안 맞는 사유를 할 수 없거든요. 앞뒤 안 맞는 사유는 우리가 편리할 때 선택할 땐 좋아요. 필요한 거 고르면 되니까. 그래서 우리가 남들 바라볼 때는 약고보호 식으로 사유합니다. 다른 사람 행동을 보면서 믿음이 있나 없나를 판단해요. 그렇지 않나요? 나를 볼 때는 행함이 없는 믿음을 전제합니다. 그 내가 사고 쳐도 믿음이 없다라고 말하지 않고 주여 하고 엎드려 기도합니다. 주님의 용서를 구하면서 나는 그래도 해요. 왜? 그게 복음이니까. 남한테 또 그렇게 안 해. 이처럼 우리는 이중적으로 살아갈 때가 많은 거죠. 이걸 어떻게 풀어야 되냐? [음악] 우리가 우스갯 소리게 하고는 하는데 천국가 보면 다들 입만 와 있을 거다. 그런 우수갯 소리를 하기도 하고이 천국에 가했을 사람 중에 가장 최순위로 꼽히는 사람 중에 하나가 총알 택시 운전수다. 뭐 그런 농담도 하고 사람들 믿음 좋게 만드니까. 예. 총알 택시만 타면 주여 주여 그런 우수갯 소리를 하는데 그런 얘기 저도 어릴 때 말이 들었던 거 같은데 천국에가 있을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깐 천국에 못 간 그리 유명한 사람들도 많고 뜻밖에 천국에 와 있는 사람들도 많고 그럴 거다. 그 좀 의외성 그런 얘기를 많이 하는데 그런 얘기는 되게 사실 우리가 믿음믿음하지만 실제로 믿음대로 살았던 사람도 있고 아는 사람도 있다. 결국은 우리가 제대로 사는게 중요하다. 뭐 그런 얘기를 이렇게 하는 문맥이었던 것 같아요. 결국 보면 알게 모르게 우리도 얘기를 잘 들어 보면 우리의 삶이 중요하다는 걸 우리도 알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믿음 참 저분은 믿음이 좋구나라고 얘기할 때를 가만히 관찰해 보면 삶은 엉망이면서도 신앙 고백 잘하는 사람을 두고 우리가 그렇게 얘기하지 않거든요. 오히려 훌륭하게 살는 사람을 보면서 우리는 분은 참 믿음이 좋으시구나라고 말을 한단 말이죠. 그 그게 우리가 상식이에요. 근데 성경 공부할 때는 또 우리가 거꾸로 얘기하기 시작해요. 그 일상적으로는 우리가 이렇게 마치 야고보처럼 우리 행위가 중요하다는 걸 잘 알면서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데 성경 공부할 때는 우리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배우고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인로 구원받는다고 배우고 그러면서 이제 반대로 얘기하는 법을 배운단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적으로 살아가면서 하는 사고하고 성경적으로 혹은 성경 공부할 때 혹은 교리적으로이 생각할 때 우리가이 가지고 있는 생각하고 충돌하는 거죠. 그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두 가지 생각이 서로 엇갈리는 상태에서 살아가는 거죠. 그 제가 가끔 이제 패러디에서 얘기할 때 우리 속에는 바울 박사와 야고보 씨가 공존하고 있다. 그렇게이 우스갯 소리처럼 이렇게 하기도 하는데 근데 문제는이 두 개가 합쳐지지가 않아요. 예. 모순이기 때문에 그 뭔가 앞뒤가 안 맞는 거죠. 뭔가 논리가 안 맞는 부분이 있어요. 그 저는 이걸 푸는게 중요하다라는 생각을 참 많이 합니다. 이런 모순에는 여러 가지 사실은 뭐 이렇게 현상이 얽혀 있는 거 같은데 크게 보면 가장 중요한 우리의 이제 오해 중에 하나 제가 이제 풀어야 된다라고 생각하는 오해 중에 하나가 뭐냐면 일단 우리가 쓰는 단어 구원받았다는 표현이 많은 혼란을 자초하는 거 같아요. 구원받았다는 말은 구원을 과거형으로 보는 건데 이미 구원받은 사람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거라 말이죠. 근데 그렇게 되면 뭐가 문제냐면 신약 성경은 구원을 목표로 제시하거든요. 목표로 제시하고 그 구원을 향해서 가는 사람에게 말을 걸고 있는데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단 말이죠. 그러니까 신약 성경에 그 수많은 교훈이 우리한테는 직접 받았지 않아요. 성경 말씀이니까 읽고 아멘 하고 묵상은 하는데 소위 뼈를 때리지 않는 거니까. 왜? 나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구원을 못 받을 거라는 경고가 많이 나오거든요. 나한테는 해당 사항이 없다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신자들한테 하는 얘기데도 불구하고 나는 구원받았기 때문에. 근데 이제 뭐가 문제가 되냐면 제가 이렇게 대학생 때 얘기를 자꾸 하게 되는데 구원받았다로 얘기하지만 사실 알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니까 눈에 보이는 표시가 없으니까.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에 구원받았다는 얘기를 많이 하는 곳에서는 구원에 대한 확신 얘기가 같이 나옵니다. 구원의 확신이 중요해지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제가 대학생 때도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구원받은거다 하는 얘기를 참 많이 들었어요. 근데 이게 문제가 뭐냐면 구원의 확신은 컨디션 따라 달라져요.이 큐t티를 한 3일 좀 빼먹었어요. 컨디션이 별로야. 근데 저한테 구원의 확신이 있냐라고 물으면 대답이 바로 안 나옵니다. 시간이 조금 걸리니까 구원을 천천히 받은 건가요? 그다음에 이제 하루는 제가 이렇게 같은 이렇게 그 선교 단치는 친구랑 사이가 아주 안 안 좋아졌어요. 근데 지금 꽝인 거지가 그 친구가 같은 자리에 있습니다. 거기에서 구원의 확신이 있냐고 물어요. 답이 안 나오더라고. 그때는 제가 구원을 못 받은 거죠. 그죠? 확신이 없으니까. 3일 전에는 구원 받았었는데 오늘은 구원을 못 받은 거죠. 근데 며칠 지나면 또 회복될 거니까 구원 받을 거예요. 받았을 거예요. 받았다, 못 받았다.이 말이 안 되잖아요. 이런 현상이 생기는 뭐냐? 구원의 확신하고 걸어 버리니까 그래. 근데 구원의 확신이라는 건 우리의 컨디션하고 관계가 되는 거잖아요. 근데 우리는이 확신을 갖게 되는 상황을 만들어 줘야 되는데 그건 아는 채로 확신 자체를 강하는 거지니까. 그럼 어때? 심리적인 교리적인 조작이 되는 거예요. 근데 이게 성경에서 그렇게 가르침을 웃기게 믿어야 되지만 성경을 읽어 보시면 구원을 대부분 미래로 설명을 해요. 대부분 구원의 소망이라는 표현을 들어보셨을 텐데 갈라디아서 같은 데는이 구원이라는 말은 안 나오거든요. 근데 의의 소망 혹은 우리가 장차 상속받게 될 혹은 상속 못 받게 될 하나님 나라 미래 행위에요. 그리고 6장 끝에도 우리가 영생을 수확하게 될 것이다.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다 미래예요. 이처럼 우리가 구원을 목표로 놓고 달려가는 그림. 바울이 빌립보서 3장에서 그 그림을 아주 이렇게 잘 쓰고 있습니다. 내가 이게 바울이 자기 얘기하면서 내가 이미 얻었다는 것도 아니고 이미 완전해졌다는 것도 아니다. 내가 붙잡은 거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나를 붙잡았는데 내가 그거 붙잡으려고 내가 쫓아간다. 그 뒤 있는 거 다 잊어버리고 목표만 바라보고 내가 몸을 쭉 내밀면서 내가 뛰어간다. 그러면서 누구든지 성숙한 사람들은 나처럼 생각하자.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게 제가 이렇게 하고 싶은 주분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생각하자는 거죠. 구원의 목표를 향해서 가는 사람으로 생각하자. 그렇게 되면 일단 우리의 삶의 얘기가 달라지죠. 많은 교인들은 지금 살아가는 삶이 내 구원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잘 몰라요. 왜?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예전 박영선 목사님이라는 분이 쓴 책 제목을 빌면 구원 그 이유가 되는 거잖아. 근데 구원이 우리 인생의 목표인데 구원 그 이유라는 건 마치 뭐가 있냐면 100m 달리게 할 때 결정점을 통과하잖아요. 통과하고 나서 우리가 바로 못 쏘잖아요. 계속 뛰잖아. 그거하고 똑같은 거니까. 근데 일단 결정점 통과하고 나면 계속 뛰든지 자빠지든지 뭐 이렇게 아무 상관 없잖아요. 우리의 삶이 철사 우리가 실패하더라도 우린 천국 가요. 왜 구원받았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는 거지. 그니까 우리의 삶이 실질적인 의미가 없어질 때가 이렇게 많습니다. 이게이 여러 가지 이제 문제를 양산하는데 첫 번째 이제 우리가 이제 그런 사고의 조건을 가지고 있는게 제가 이렇게 가끔 이제 그 쓰는 표현이 영적 축제법이라는 표현이 씁니다. 구약 성경이 우리 교회를 구약 성경하고 비교할 때는 항상 광야 이스라엘 비교를 해요. 왜냐면 그게 우리가 딱 맞거든.이 뭐냐면 광야 이스라엘은 일단 출애굽이라는 놀라운 경험을 한 공동체예요. 하나님이 이집트에서 나오게 한 거니까. 근데 어디로? 가나안으로 바로 가는게 아니죠. 광야로 들어갑니다. 그 광야에서 40년을 헤매요. 그러다가 가나안 향해서 가고 있는 거죠. 그 광야 이스라엘이 지금 교회하고 똑같은가? 우리는 이미 출애굽에 비견되는 그리스도를 만나고 십자가를 만나고 이미 하나님의 그 큰 구추를 경험한 거죠. 그 당시 이제 1세기 당시 이방 성도들 입장으로 말하면 과거의 더러운 삶으로부터 구출을 받는 놀라운 경험을 한 겁니다. 이게 십자가 그죠. 그 완성된 거냐? 그게 아니죠. 가나안을 향해서 가고 있는 거니까. 마지막 심판 때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받는게 구원이거든요. 그 구원의 목표를 향해서 가고 있는 거죠. 근데 그 가운데 있는 존재들. 근데 우리는 구원받았다는 말로 다 능치거든요. 출애굽하고 바로 가나안이야. 니까 그까 광야 40년을 접어 버리는 거예요. 그 제가 영적 축지법이라고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 우리는 축지법을 배워 가지고 예수 믿는 순간 바로 천국 그래서 지금 현재 삶을 설명하기가 쉽지 않아지는 그 제가 제 책에 이렇게 그런 편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의 의식 속에서 현재 우리의 살아가는 삶은 아직 해명되지 않은 회색 지도로 남아 있다. 이런 표현을 제가 쓴 적이 있거든요. 그 제가 이렇게 지금 우리의 삶을 설명하자면 에스클리트 위에서의 그 막막함 있죠?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그 어색함. 도착할 때까지 딱히 할 일도 없는데 참 어색하죠. 그래서 휴대폰이 나와서 조금 나아지긴 했는데 이게 쳐다보고 있시면 되니까 그래도 어색해. 마치 우리 현재가 그런 거 같은 거지. 도달할 때까지 어색하게 소비해야 되는 큰 의미 없는 시간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은 거니까. 네. 우리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바로 아까 말씀드렸던 그 달리기 그림을 우리가 놓쳐서 그런 거죠. 광야 이스라엘과 같다는 걸 생각하지 않으니까. 지금 우리는 광야에 있다. 십자가라는 놀라운 경험을 했지만 우리는 가나안을 향해서 가고 있다. 하는 걸 기억하는 거죠. 그 성경이 성경을 한번 쭉 훑어 보시라고 좀 권해드리기도 해요. 그러면서 구원이라는 이야기, 구원, 영생, 뭐 하나님 나라, 영광 이런 것들이 얼마나 미래적인 소망으로 지시되고 있는지를 한번 확인해 보시라고 제가 이렇게 권유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나면 진짜네. 그럼 우리가 목표를 향해서 걸어가고 있는 그렇게 되면 지금 우리의 삶의 의미가 달라지죠. 지금 우리는 구원 그 이유가 아니라 구원을 향해서 가고 있는 삶인 거죠. 이제 우리가이 조금 신경을 써야 될게 뭐냐면 구원이라는 말만 나오면 우리가 경기로 하는 거 같아요. 너무 큰 말이라. 근데 우리가 뭘 기억해야 되냐면 구원이란 단어 자체는 굉장히 일상적인 용어예요. 1세기 당시에 아주 흔하게 쓰이던 단어예요. 뭔가로부터 벗어나면 구원이에요. 그래서 빌립보서 1장에서 바울이 빌립보서는 감옥에서 썼잖아요. 그죠? 이제 옥중 서신이라고 불리는데 다시 말하면 모든 얘기는 지금 감옥에 사는 얘기거든요. 그래서 바울이 자기 구원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여러분이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고 계시고 성령이 도와주셔서 내가 내 구원에 이르게 될 것 같다. 이렇게 얘기를 하거든요. 그때 구원은 무슨 얘기냐? 감옥에서 구원 그러면 무슨 뜻이 될까요? 바울이 내가 천국 갈 것 같아. 이런 얘기 하지는 않았겠죠. 내가 추록하게 될 것 같다는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지금 하고 있는 거니까 성도들이 기도를 하고 있으니까 바울 빨리 풀려나 풀려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겠죠. 그것처럼 이처럼 구원해라는 말이 상황 따라서 다양하게 살면 됩니다.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이 걱정하지 마라 따라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이렇게 얘기하죠. 그때 구원은 병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하죠. 다양한 의미에서 구원이 구원이라는 말을 사용됩니다. 그리고 신학적으로 구원을 얘기할 때 요게 제가 아까 말씀드렸 때 영적 축적법 관련된 건데 우리는 구원을 하나로 능쳐요. 신학적인 구원이어도 근데 구원이라는게 에베소서 2장에서 말하는 구원. 그 에베소서 2장 1절부터 쭉 보시면 뭘 말하냐면이 이방 신자들이 예수 안 믿을 때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예수 믿었잖아요. 바울이 그 얘기 하는 거예요. 그니까 허물과 저로 죽었던 여러분들을 그러면서 얘기를 시작해요. 그리고 1절 2절 3절에서는 그때 과거의 그림을 새가맣게 그립니다. 불순종하고 살았던 근데 그러다가 4절로 넘어가면 그러나 긍휼히 풍성하신 하나님이 그러면서 반전이 일어나요. 그리고 이제 지금 상황을 그림 그리거든요. 그 두 개를 비교하는 거니까 그걸 구원 비교할 때 여러분이 인로 구원을 받았다라고 표현합니다. 구원받았다는 말을 할 수도 있어요. 근데 그게 그때 그 의미는 과거에 더러운 삶으로부터 구원받았다는 얘기가 그게 선명한 의미를 우리가 알고 있어야 되는 거죠. 그리고 이거는 마지막 심판 때 구원받는 가고는 구별이 됩니다. 근데 우리는 자꾸 이걸 하나로 합치려 버려요. 그러다 보니까 사고의 혼란이 생기는 거지. 일단 우리가 이걸 좀 구분하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제가 이렇게 많이 드리고 싶고요. 그래서 우리가 이미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일차적인 구원을 경험한 사람이죠. 하지만 그리고 우리는 마지막 심판 때 최종적인 구원을 향해서 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여전히 폭풍속을 가고 있기 때문에 사실은 앞이 확실하지 않은 상황을 가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지금 오늘이 중요해지는 거니까 지금 우리가 잘못하면 큰 일 날 수도 있는 거죠. 이거는 그냥 하는 얘기가 아니라 실질적인 위험이 되는 거죠. 여기서 우리의 삶이 중요해진다는 얘기가 되는 거죠. 인내가 중요해지고 우리의 삶이 중요해진다는 얘기가 바로 여기 나옵니다. 이거는 행위 구원론 차원의 얘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구원을 향해 가고 있는게 맞다면 지금 우리의 걸음거리가 중요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리고 그 걸 그런거이 중요하니까 근데 내가 제대로 안 걸으면 못 갈 거 아니에요. 나는 안 갔는데가 있더라. 이렇게 될 수 없잖아니까. 그런 면에서 우리의 삶은 바로 구원을 향해 가는 여정이고 바울의 말로 하면 구원을 완성해 가는 과정인 거잖까. 그니까 우리가요 두 가지를 구분하면서 지금 우리가 광야길을 걸어가고 있고 가나안을 향해서 가고 있다 하는 그림만 잘 생각하면 지금 오늘이 중요하다는 걸 말할 리가 없 여부가이 여부가 없어지는 거죠. 지금 내가 걸음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 그런이 경고들이 많습니다. 요즘서 우리가 좀 긴장해야 되는데 우리가 너무 쉽게 구원 다 받아먹은 사람처럼 행동을 하니까 이게 문제가 생겨나는 거지니까. 그리고 때로는 구원의 확신 얘기를 아까 했습니다만은 구원받았다고 굳게 확신하는게 강한 믿음이라는 생각을 하다 보니까 이게 때로는 자만에 빠지고 착각에 빠지는 거니까 우리가 하는 오해 중에 하나가 하나님에 관한 근본적인 오해가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자꾸 잊어 먹는 건데요.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람을 편해하지 않거든요. 제 예를 들면 제가 기독교과 교수예요. 제가 이제 이번 학계 예를 들 이제 헬라어를 가르친다 그러면 이제 우리 기독교 학생들도 있고 또 이제이 이게 헬라어니까 이게 헬라어는 또 이렇게 고대 철학 공부하는 사람들이 또 공부를 또 하고 그러잖아. 그래서 철학과 학생이 또 제 수업을 듣는 경우들이 좀 있어요. 그 몇 명이 지금 제 수업에 들어와 있는데 한번 상상해 보는 겁니다. 안 그랬으면 좋겠지만 기말 고사를 받는데 철학과 학생이 성직이 훨씬 더 좋아. 제가 우리 학과 학생을 특별히 사랑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철학과 학생을 제가 미워하는 건 아니거든. 우리 학과 교수지만 또 난 숨실 전체의 교수이기도 하니까 우리 학과 다른 학과 학생들도 여전히 사랑하게 되죠. 그러니까 뭐냐? 공평해야 되는 거인가? 그래서 눈물을 먹음고 철학과 학생을 A로 주고 우리 학과 학생을 B로 낮춥니다. 그러고는 한 소리 하죠. 이놈 쉽게 공부 좀 하려니까 하고 잔소리를 하죠. 이런 상황이 가끔씩 생기거든요. 그것처럼 하나님이 공평하신 분이라서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거든요. 차별하지 않는다는게 성경적으로 어떻게 표현되냐면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는 말로 표현이 됩니다. 이걸 우리가 까먹는 거니까 그걸 까먹다 보니까 너무 구원을 쉽게 생각해요. 가장 자주 인정되는 구약 구절 중에 하나가 이거예요.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 근데 하나님은 이게 구약에서만 그런게 아니라 신약에 이게 자주 나옵니다. 그 예수님이 인용해요. 천사들과 함께 자기 영광 중에 올 때 그때 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갚아 줄 것이다. 베드로도이 구절을 인용합니다. 베드로 전서에 보시면 1장 17절에 보면 사람을 외적인 조건으로 따지지 않고 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분을 여러분들이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지금 나그네로 지내는 이때를 두려움으로 지내십시오라고 훈계합니다. 야고보서 내용 잘 아시죠? 행함이 없으면 꽝이다 하는 이야기. 요한계시록 보시면 행한 대로 갚아 줄 것이라는 얘기가 계속 나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공평하셔요. 그리고 히브리서 같은데도 믿음을 얘기할 때 믿음이 뭐냐? 믿어야죠. 뭘 믿어야 되냐? 우리 11장 6절 유명한 구절 있죠? 하나님께 나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다. 살아 계신다. 다시 말하면 있으나 만한 분이 아니라는 거예요. 눈을 심풀럽게 또 살아 계셔요. 그 이게 무슨 얘기냐? 그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상 주시는 분임을 알아야 된다. 이게 번역이 좀 약간 아쉬운데요. 상 준다는 뜻이 아니라 갚아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냥 프라이즈를 준다는 뜻이 아니고 자기에게 갚아 주시는 back. 우리 인생은 하나님과 하는 장사와 같아요. 우리가 잘하면 영생으로 갚아 주시고 우리가 못하면 심판하신다고 이야기합니다. 바울도 똑같아요. 바울도 로마서 2장에서 이신칭 얘기 시작하기 직전에 이렇게 얘기하죠.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 그래서 참고 선을 행하면서 영광 종기이 썩지 않는 것 이런 걸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영생으로 갚아 주시고 당을 지어서 진리를 쫓지 않고 악을 쫓는 사람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갚아 주신다. 그리고 순서 바꿔서 그에게 한 번 더 반복하고 첫째는 유대인에게 그다음 헬라인에게 요즘으로 바꾸면 믿는 사람부터 마 그리고 안 믿는 사람도 이렇게 가는 거 똑같습니다. 그리고 결론 11절. 하나님은 사람을 외적인 조건으로 차별되 하지 않는다. 그리고서 그다음에 하나님 앞에서 누가 의인일까요? 2장 13절에 이런 얘기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사람이 아니라 율법을 행하는 사람이라 의롭다을 받을 것이다. 야고보서 2장 13절이 아니라 로마서 2장 13절이에요. 근데 그 에이 그건 이신칭이 믿음 얘기하기 전에 그냥 유대인 식으로 한 얘기겠지가 아니라 조금 더 가면 2장 16절에 내 복음에 따라서라고 얘기합니다. 지금 자기 복음 얘기하고 있다는 걸 분명히 못 박습니다.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는게 바울 복음의 전제라는 거예요. 말하자면이 복음이 우리 컴퓨터로 치자면 윈도우처럼 바닥에 깔려 있습니다. 그 윈도우 프로그램 속에서 다른 프로그램이 작동하잖아요. 그것처럼 행위 심판 사상이 바닥에 깔려 있고 기본 바탕으로 그 위에서 다른 야기가 작동한다는 얘기잖아.이 공평하신 하나님을 놓치면 우리가 다 놓치는 거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대해서 공평하셔요. 왜? 우리의 삶을 무시하지 않거든요. 우리의 삶을 무시하면 책임을 안 물어도 되겠죠. 근데 그건 해답이 아닌가니까 우리를 무를 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취급해서 해답이 되는 순간은 없겠죠. 하나님 그런 전략은 절대 취다. 우리의 삶은 중요해요. 그러니까 어떻게 책임도 우리가 져야 되는 거지. 우리는 가끔 어떤 그림을 그냐면 나는 어떻게 되든 천국에만 어떻게 들어가는 내가 천국이면 쏙 들어가는 그림만 생각하는 거 같아. 내 입장에서 천국에 들어가는게 이렇게 뭐 그 해결책을 수 있지만 하나님 입장에서 생각하 생각하는 구원은 뭘까? 제가 하나님의 꿈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기도 하는데요. 그게 이제 예정 교리 설교할 때 하나님이 예정하신게 있어요. 그 예정은 바로 구원의 그림이거든요. 그 예정이 뭐냐면 우리 로마서 8장 29절 같은데 나오는게 바로 그겁니다. [음악] 이제 제가 하나님의 가족 교획 이런 편들 쓰기도 하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 있거든요. 그 우리 그 독자잖아. 우리는 성경에서 독생자 그러니까 그냥 독자라는 뜻이에요. 근데 하나님 아들이 하난데 하나가 너무 작아. 더 자식이 많았으면 좋겠어. 그 하나님이 뭐 하냐? 많은 자식을 얻기 위해서 입양을 하기로 합니다. 그래서 바울도 입양이라는 단어를 자주 씁니다. 양자됨이라고 번역되 있어요. 우리 개혁 성경에. 근데 입양을 하려면 우리가 이제 예수님의 동생이 되는 거죠. 아들이 하나 있고 우리가 예수님 동생으로 입양이 되는 거예요. 근데 입양이 되는게 우리 입장에서는 어쨌든 호적이면 올라가면 되는 것처럼 생각하겠지만 하나님 입장에서는 우리가 예수님 동생 답게 돼야 된단 말이죠. 그 예수님을 닮아야 되는 거 아닙니까? 동생처럼. 그래서 바울의이 표현을 그대로 하자면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도록 그렇게 정했다는 거. 미리 하나님 뭘 정했냐? 우리가 예수님 그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도록 정하신 거예요. 미리. 이게 하나님의 꿈이다라고 제가 설명을 합니다. 그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모습을 닮으면 우리가 예수님 동생이 되는 거거든요. 그럼 이제 예수님이 동생이 되면 예수님이 원래는 독자였거든. 근데 이제는 동생들이 많으니까 독자가 아니라 마다들이 되는 거죠. 그게 바울이 쓴 단어입니다. 많은 자녀들 중에서 마다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고 가는게 바로 그 얘기죠. 근데 그 과정의 핵심이 뭐냐면 우리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거예요. 닮는 거예요. 이게 구원의 핵심인 거지니까. 근데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안 되고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기를 꿈꾼단 말이죠. 근데 그건 믿음이 아니라 도둑시켜 보이는 거지니까 우리가 구원의 과정을 겪지 않고서 어떻게 구원의 결과를 먹고 싶어 하는 그런 도돔 신보는 공평하신 하나님의 구원 속에는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럼 믿으면 공평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안 해도 되는 길을 모색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점에서 아주 단호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안 되고 될 수 있는 길은 없으니까 내가 가야만 하니까. 근데 우리가 잘 못 가잖아요. 가기 싫고 자꾸 피하고 싶고. 그 어떤 데는 아주 강하게 얘기하는 거지. 제가 이렇게 비호적으로 얘기할 때 제가 어릴 때 이제 저희 어머니랑 이제 외가집에 갑니다. 부산 사직동이라는 곳에서 동네라는 곳으로 이제 가는데 가다 보면 이제 시장을 지나가게 된다고 쳐 보세요. 일곱살짜리가 시장을 예쁘게 지나갈까요? 눈 돌아가는데 이것도 있고 저것도 있고 온갖게 말이니까 막 그죠. 그니까 시장을 못 지가는 거니까 좀 있다 보면 애가 사라지고 없고 보면 가기 안에 들어가 있고 그 잡아와야 되고 제대로 못 가니까 근데 빨리 가기는 가야 되고 나중에 이게 어떻게 했냐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저희 어머니가 저를 앞장세와요. 저를 앞장세우고 어떻게 하냐? 그 우산 긴 거 있죠? 앞에 새꽃증이 달린 그 기운산 그걸로 뒤에서 쿡 찌릅니다. 그럼 제가 가다가 눈 돌아가잖아요. 딴 대로. 그럴 때도 쿡 찌르면 윽 하고 다시 돌아오고 그렇게 해서 가요. 근데 그렇게 가면 제가 앞장서 가는 건가요? 엄마가 나를 데리고 가는 건가요? 제가 주도서 가는 건가요? 그 장면 내가 앞서 가는 거 같지만 사실은 엄마가 나를 왜 가지 데리고 가는 방법 중에 하나인 거죠. 마태복음에 예수님이 사실 그런 예수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냐? 예수님이 우리가 안 하니까 근데 안 하면 안 되잖아요. 내가 왜 갈지 가야 되거든. 그러니까 예수님이 네가 먼저 해야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주기도 잘 아시죠? 여러분 여러분 그 제자들한테 너희들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그렇게 기도하지 마 이제는.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리고 쭉 하면서 주기도문에 제일 불편한 대목 여러분들 아실 텐데 그죠? 제일 챙기는 대목 하나 있지 않나요? 아무 생각 없이 넘어가지만 잘 생각하고 이렇게 기도하면 잘 안 삼켜지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과거 형입니다. 다시 말하면 용서해 주고 나서 와서 용서를 구하라는 뜻입니다. 그 얘기는 무슨 네가 용서 안 해주면 용서 못 받는다는 얘기죠. 근데 이렇게 한 마디 술하고 나면 우리가 또 못 들어갈까 봐. 예수님이 죽도 죽이도 끝나자 말자. 너네들이 사람의 죄를 잘못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용서해 주신다. 근데 너희가 사람의 잘못 용서 안 해 주면 하나님도 절대 용서 안 해 주신다라고 못을 받습니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냐면 그래야 우리가 용서를 하니까. 그래서 우리 마태복음 18장또 유명한 비유 보면 1만 달란트 용서받는 그 유명한 비유 있죠? 1만 달란트 빚진 종을 용서해 줘요. 임금님이 아무 조건이 없어요. 그냥 용서해 주면 불쌍하니까 봐 줘요. 근데 뭐냐면이 친구가 나가서 백내리 삐진 친구를 만났는데 용서를 안 해 주죠. 멱사를 잡고 흔들다가 감옥에 쳐 넣어 버려요. 그럼 어떤 일을 버리냐? 임금님이이 친구를 다시 잡아드립니다. 그리고 감옥에 쳐넣어 버립니다. 그리고 뭐라 그러냐?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너의 동료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 하는 거죠. 이건 선택상이 아니었던 거예요.이 친구가 그걸 거부한 거죠. 은혜를 베풀어 주실 때 아버지 그 임금의 뜻이 뭐였냐면 너도 똑같이 하라는 거였거든. 근데 그 은총 속에 담긴 뜻을 거부하는 것은 은총 자체를 거부하는게 되는 거죠. 하나님을 거부하는게 되는 거 그런 사람에게 은혜가 유지될 수가 없는 거죠. 감옥 가는 거예요. 끝장난 거야. 임금님이 그렇게 한 푼도 남남기지 않고 갚기 전까지는 못 나온다 그랬는데 1만 달란트는 갚을 수 있는 돈이 아니거든요. 1만 달란트는 남자가 보통 그 당시 그냥 평범한말 투하면 하루에 한 대나리온 준다라는 말을 그대로 활용하면 20만 년을 일해 볼 수 있는 돈입니다. 20만 년. 그러니까 못 갚죠. 넌 끝났다는 얘기입니다. 이게 마태복음인 거잖가 그 결론 이처럼 너희가 중심으로 다른 사람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똑같이 하실 거다라고 똑같은 결론이 나옵니다. 마태복음에서 왜 그렇게 하시냐 우리가 용서하는 삶으로 변해가지 않고서는 우리가 구원을 이룰 수는 방법이 없어요. 우리가 하나님의 모습을 담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길이 없는 거니까 그걸 포기하면 안 되는 거지니까. 그러니까 이렇게까지 때로는 극역 처방을 쓰시는 거니까 네가 해. 그럼 나도 할게라고 해서 우리 순종을 이끌어내는게 예수님의 전략이었던 거죠. 이처럼 우리의 삶을 포기하는게 아니라 우리의 삶을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면서 우리에게 구원을 동료하는 것이 신약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이걸 우리가 행위 구원이라고 얘기하면 성경을 크게 오해하는 거잖아.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이 하루하루가 얼마나 수한지를 우리가 까먹으면 안 되는 거죠. 지금 오늘 우리의 길은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가는 과정이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숙해 가는 과정이다. 그게 바울 말처럼 두럽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들 성취해 가는 과정일기 때문에 내 그름이 소중한 거죠. 근데이 과정이 하루하루라고 얘기했으니까 이게 엄청게 대단한 얘기가 아니라 바로 실제로 내가 살아간 하루하루의 이야기인 거죠. 오늘 우리 하루가 그런 삶이라고 우리가 인식한다면 우리가 이게 행위냐 뭐냐 하는 얘기를 더 이상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오히려 내 하루하루에 내 삶이 하나님의 자녀가 돼 가는 그 소중한 과정이라는 걸 우리가 알게 될 테니까. 그래서 이런 생각을 좀 하면서 우리가 조금 더 자신감 있게 그리고 좀 더 내 삶에 대해서 좀 이렇게 진지하게 그렇다고 너무 이렇게 심각하게 아니겠지만 내이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은혜는 사실 우리가 가장 크게 오해하고 있는 개념 중에 하난데요.이 이 은혜를 우리가 오해하는 이유가 뭐냐면 자동적으로 우리 행위의 반대 개념으로 생각해서 그렇죠.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근데 그게 사실 바울서는 크게 오해한 건데 처음에는 맞죠. 우리의 행위로 필요해서 아무 조건도 필요 없이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 받는 건 맞아요. 우리가 그걸로 모든 그림을 다 설명하려고 한다는데 있는 거죠. 근데 실제로 바울이 은혜를 사용할 때 우리 해당 본문들을 잘 살펴보시면 핵심적인 포인트가 뭐냐면 우리가 도덕적으로 순종이 필요하지 않다는 얘기가 절대 아니고 하나님은 쓸데없는 조건을 따지지 않는다. 그 계급장 뗀다는 얘기하고 똑같습니다. 유대인 헬라인 이제 다 필요 없어. 할례 뭐 할례 다 필요 없어. 학벌 필요 없어. 권력 필요 없어. 집안 배경 필요 없어. 아무나 이게 은혜예요. 은혜는 조건을 따지지 않는다는게 핵심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럼 은혜가 그 조건을 따지는 은혜가 우리에게 다가왔어요. 와서 어떻게 하냐? 내가 우리를 통치 통치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를 다스린다. 로마서 5장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우리를 다스려요. 혹은 디도서 표현처럼 우리를 가르쳐요. 우리를 양육해요. 우리 에oc케ate 우리를 가르치는데 어떻게 훌륭한 사람 되라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라고 우리를 가르쳐 가는 거죠. 그래서 바울이 말하는 은혜는 능력이라는 개념과 굉장히 비슷합니다. 이런 은혜를 우리가 알아야 된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인간적인 쓸데없는 조건 따지는게 아니라 실제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가시고 그러기 위해서 우리를 통치하고 다스리고 우리를 가르치는 이런 하나님의 능력으로서의 인해를 우리가 사실 잘 알면 많은 오해를 풀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잘잘법은 여러분의 소중한 후원으로 제작됐습니다. 잘잘법에 전기 후원자가 되어 주세요. 요 [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