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이 ‘이걸’ 모르면 극단주의에 빠집니다ㅣ김학철 교수ㅣ잘잘법 251회

잘잘법 · 2026-09-07

채널: 잘잘법 |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h535JfVLFik | 길이: 38:09

요약

🎯 TL;DR — 김학철 교수는 낙태 반대·정치 혐오·순교적 죽음처럼 겉보기에 신앙적 신념에서 비롯된 극단주의 행동들을 실제 사건으로 제시하며, 극단주의는 흑백 이분법·두려움과 혐오 조장·폭력 정당화라는 사고·감정·행동 패턴으로 작동한다고 분석하고, 이를 벗어나려면 에코챔버와 알고리즘에서 나와 사실 확인을 하고 예수님의 "급진성(사랑의 급진성)"과 "극단주의"를 구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 핵심 논지 — 보수와 진보는 상대적 개념으로서 공동체의 유지·존속에 합의하고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극단주의는 그 공동체가 합의한 법·제도·절차 밖에서 폭력으로 변화를 도모하는 것이라고 화자는 규정한다. 그는 기독교인들이 낙태 반대, 정치적 신념, 신앙적 소명 같은 "옳은 가치"를 위해 오히려 그 가치에 정면으로 반하는 폭력·자기파괴적 행동을 저지르는 아이러니한 사례들을 통해 극단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 영상 구성

  • 도입: 실제 극단주의 사건 세 가지 소개 (미국 낙태 관련 총격 2건, 한국 분신 사건 1건)
  • 극단주의의 정의와 보수·진보와의 구분
  • 극단주의적 사고(이분법)·감정(두려움·혐오)·행동(폭력 정당화·집단 극화) 분석
  • 극단주의에서 벗어나는 방법 (AI 사실확인, 알고리즘 탈피)
  • 전태일 평전 일화를 통한 성찰
  •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과 "거룩한 폭력" 논쟁에 대한 신학적 해설
  • 신약성서 묵시문학적 종말론과 극단주의의 관계, 급진성과 극단주의의 구분

━━━ 본문 ━━━

세 가지 실제 사건: 신념과 행동의 모순 화자는 1994년 미국에서 22살 청년 존 살비 3세가 프로라이프(낙태 절대 반대) 신념으로 낙태 시술 병원에 총기를 난사해 2명을 살해한 사건을 소개한다. 살비는 재판 과정에서 KKK·프리메이슨이 가톨릭을 핍박한다는 망상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고, 수감 후 1996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화자는 "생명을 지켜야 한다는 신념에 자신을 묶어 살아온 청년이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끝냈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지적한다. 두 번째 사례로 2025년 6월 벤스 볼터(57세)가 미네소타 민주당 의원 부부를 살해하고 다른 부부에게 부상을 입힌 사건을 들며, 그 역시 선교 활동 경력이 있는 프로라이프 입장의 인물이었다고 전한다. 세 번째로 2025년 1월 한국에서 노숙인 사역을 하고 교회를 개척한 59세 목사가 공수처 인근에서 정치적 구호를 외치며 분신해 사망한 사건을 소개하며, "교회를 개척한다는 것은 죽어가는 하나의 생명, 영혼을 돌보기 위한 정말 거룩한 일"인데 분신을 선택했다는 신앙적 일관성의 붕괴를 지적한다.

극단주의의 정의: 보수·진보와의 구분 화자는 보수와 진보를 상대적 개념으로 설명한다. 보수는 기존 법·제도·전통에 대한 존중감이 강하고, 진보는 새로운 당위성과 변화에 더 비중을 둔다는 차이가 있을 뿐, 둘 다 현재 공동체가 유지·존속돼야 한다는 데 일치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없어져야 할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보수든 진보든 인간 존엄·평등이라는 공동체의 보편 가치에 동의하고, 그 가치를 구현할 때 "돌을 들고 싸우지 않고 투표를 하는" 방식에 합의한다는 것이다. 반면 극단주의는 이 공동체가 합의한 법과 제도 밖에서 폭력으로 변화를 기획하는 것으로, 화자는 미국 국회의사당 난입 사건과 브라질 국회 난입 사건(가담자 다수가 보수 기독교인이었음을 "아주 부끄러운 얘기"라 언급)을 예로 든다. 또한 판결이 마음에 안 든다고 법원을 쳐들어가는 행위도 "우리 사회의 근본 권위를 무너뜨리는" 극단적 행동이라고 규정한다.

극단주의의 사고·감정·행동 패턴 화자는 극단주의적 사고의 핵심을 전형적인 이분법적 사고(흑백 논리)로 규정하며, 선과 악 사이에 타협점이 없다고 보는 것이라 설명한다. 이에 대한 반례로 예수께서 자기 제자가 아닌 자가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는 것을 막으려는 제자들에게 "막지 말라"고 하신 요한복음 일화, 그리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밥을 드신 사건을 들며 "성경은 선과 악을 구분하지만, 그 사이에 타협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인본주의 논리이며 굉장히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말한다. 감정적 측면에서는 극단주의 언어가 두려움과 위협("우리나라가 큰일 나게 생겼다")을 조장하고 이를 통해 특정 집단에 대한 증오·경멸·혐오를 불러일으키도록 구성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행동 측면에서는 폭력적 상황을 조장하거나 자신들이 내세운 가치에 반하는 폭력을 허용·부추기며, "끼리끼리 모이도록" 만들어 심리학에서 말하는 집단 극화 현상을 일으킨다고 설명한다.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이면 점점 더 과격한 발언의 한계를 늘려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극단주의에서 벗어나는 방법: 에코챔버와 알고리즘 화자는 이미 깊이 빠진 사람을 구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면서도, 예방과 완화를 위한 방법을 제시한다. 첫째는 에코챔버에서 나오는 것으로, SNS로 받은 선동성 메시지를 AI(GPT, 퍼플렉시티, 제미나이 등)에 붙여넣어 사실 확인을 해보라고 권한다. 화자는 실제로 이렇게 확인한 결과 "선동의 기초 기법이 사실과 거짓을 섞어서 화나게 만드는 것"임을 발견했다고 전하며 "물 50%에 독약 50%를 섞으면 그것은 독약"이라는 비유를 든다. 둘째는 유튜브 알고리즘에 빠지지 말 것을 권한다. 자신이 평소 클래식 음악만 즐겨 들었지만 데스메탈을 듣다가 그 안에서 "울부짖는" 감정을 발견한 개인적 경험을 예로 들며,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편향된 콘텐츠에만 머무르면 "답답한 인생"을 살게 된다고 말한다. 실제 사례로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다루는 영상 몇 개를 보다가 알고리즘이 계속 관련 영상만 추천해 밤에 잠을 못 이룰 지경이 된 신앙 좋은 지인의 경험을 소개한다.

전태일 평전을 통한 성찰 화자는 대학교 1학년 때 읽었던 전태일 평전을 회상하며, 분신 장면을 지나치게 "숭고하게" 묘사한 것에 대해 이를 집필한 조영래 변호사가 후회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전언 형태). 전태일이 지향했던 삶의 가치는 "인간답게 살게 해달라"는 생명 존중이었는데, 그 죽음의 장면을 숭고하게 그림으로써 독자의 마음속에 오히려 "죽음에 대한 마음이 더 커지게" 만든다면 그것은 전태일의 삶의 가치에 반하는 서술이라는 것이다. 화자는 이를 통해 "무엇이 진짜인지, 핵심에 놓여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야지, 형식만 따오면 안 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과 "거룩한 폭력" 논쟁 사회자가 "예수님도 성전에서 분노하셨는데, 그 폭력을 본받아 거룩한 폭력을 행사할 수도 있지 않느냐"고 묻자, 화자는 성전 정화 사건이 상징적(심볼릭)인 행동이며 성전 전체가 아닌 제한된 구역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설명한다. 그는 요한복음의 두 구절—"나는 심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심판하신다"와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심판권을 옮기셨다"—을 대조하며, 심판(신적 폭력)의 권한을 하나님과 예수님이 서로 조심스럽게 양도·공유한다고 설명한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죽임당한 어린양이 심판한다고 언급한다. 화자는 시민으로서 우리가 폭력의 권한을 국가에 위임했듯(누가 나를 때려도 내가 직접 복수하면 쌍방폭행죄가 되므로 국가 공권력에 위임), 신앙인으로서는 폭력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성령님께 위임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성전 사건의 의미는 "하나님과 거래하고자 하는 인간의 저열한 욕망, 하나님을 거래 대상으로 보는 천박한 인식"에 대한 상징적 심판이지, 오늘날 그 폭력 행동 자체를 그대로 따라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고 강조하며 "그것을 정당화하는 구실로 삼지 마세요. 그건 성경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 말한다.

신약성서의 묵시문학적 종말론과 극단주의의 관계 사회자가 기독교 내에 극단주의로 흐르기 쉬운 요소가 있는지 묻자, 화자는 신약성경의 모태가 묵시문학적 종말론이며 그 특징이 선과 악, 현재와 미래의 이원론과 세상이 곧 바뀔 것이라는 긴급성이라고 설명한다. 이 틀 안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해석되기 때문에 신약성서의 메시지 자체가 급진적이라고 말한다. 화자는 이 급진성의 형식(이원론·긴급성)만 따와서 자기가 좋아하는 부분만 취하면 그것이 성경 왜곡이자 극단주의로 흐르는 길이라고 지적하며, 형식 뒤에 있는 진짜 메시지는 "하나님이 긴급하게 이 세상이 사랑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예수님의 급진성(radical, 뿌리·근본에 닿아 있다는 뜻)은 "사랑의 급진성"이며, 이것이 극단주의와는 구분되어야 한다고 마무리한다.

💬 결정적 발언

"그런데 자기가 생각한 법원 평가이 안 나왔다고 법원을 쳐들어간다. 극단적인 겁니다." "우리 편이 아니면 적인가요? 예수께서는 흑백 이월론... 편지 않으셨어요." "성과 악사에 무슨 뭐가 있다고 하 타협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인본주의 논리예요. 그런 얘기 좀 하지 마세요. 그 굉장히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폭력을 하나님께 위임했어요. ... 그걸 정당화하는 구실로 삼지 마세요. 그 성경 구절을. 그게 성경을 욕되게 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급진성은 사랑의 급진성이에요. ... 극단주의랑 급진성이랑은 달라요."

⚖️ 화자가 다룬 반론·한계

  • "성전 사건도 폭력이고, 우리도 거룩한 폭력을 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반론에 대해, 화자는 성전 사건이 상징적 행동이었으며 오늘날 폭력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삼으면 안 된다고 답한다.
  • 화자는 자신의 강의(잘잘법 영상)만으로 극단주의에 빠진 사람을 구해내기는 "어림도 없다"고 스스로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주변 사람을 조금 완화시킨 경험은 있다고 언급한다.

🧩 핵심 용어

  • 프로라이프/프로초이스 = 낙태를 어떤 경우에도 반대하는 입장 / 선택권을 강조하는 입장
  • 집단 극화(group polarization) =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 서로 지지하면서 의견이 점점 과격해지는 심리 현상
  • 에코챔버 = 비슷한 정보·의견만 반복적으로 접하게 되는 폐쇄적 정보 환경
  • 묵시문학적 종말론 = 선악·현재와 미래의 이원론, 긴급성을 특징으로 하는 신약성서의 해석적 틀
  • 급진성(radical) = 화자에 따르면 "뿌리, 근본에 닿아 있다"는 뜻으로, 극단주의와 구분되는 개념

🔎 보완 & 확인

  • 배경·맥락 보완: 존 살비 3세 사건은 1994년 매사추세츠주 브루클라인의 낙태 클리닉 총격 사건으로 알려져 있으며, 벤스 볼터가 언급된 2025년 6월 미네소타 사건은 영상 녹화 시점 기준 비교적 최근 사건으로 추정된다(사건 세부사항은 뉴스 보도 확인 필요). 한국 분신 사건(2025년 1월, 공수처 인근)도 당시 언론 보도를 통해 교차 확인이 필요하다.
  • 사실 유의점: 영상 속 인물명(예: "벤스 루터볼터")과 사건 경위는 자동생성 자막의 음성 인식 오류 가능성이 있어 실제 영문 표기·정확한 사건 경과는 확인이 필요하다(추정/확인필요). 또한 화자가 전한 "조영래 변호사가 분신 묘사를 후회했다"는 일화는 화자 스스로도 "누군가 써준 이차 저술"이라고 밝혔듯 직접 인용이 아닌 전언(구전)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자막 원문 (참고)

Kind: captions Language: ko 보수하고 진보는 상대적 개념입니다. 근데이 둘 다 모두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체가 유지되고 존속돼야 한다고 하는 데서 일치하는 거예요. 서로가 서로에게 상대 없어져야 할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데 자기가 생각한 법원 평가이 안 나왔다고 법원을 쳐들어간다. 극단적인 겁니다. 아주 부끄러운 얘기지만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었어요. 성전에 뒤집어 엎으신 예수님을 본받아 거룩한 폭력을 행사해야 할 때도 있지 않을까요? >> 성전 정어 사건은 심볼릭한 거예요. 상징적인 거예요. 예수님이 성전 자체 전체면 산게 아니라 제한된 구역에서 상징적인 행동을 하신 거예요. 그게 그러면 그것도 폭력 아니냐? 아 그 거룩한 폭력이 성전 사건 그렇게 했으니까 나도 그렇게 한다. 우리도 그 거룩한 폭력을 하는 거 아니야. 이렇게 얘기할 수 있어요. 근데 요한복음서 잘 읽어 보면 아주 참 재밌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음악] 극단주의에 빠진 기독교인을 많이 봅니다. 왜 극단주의에 빠지는 걸까요? >> 제가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 드릴 텐데 한번 들어보시고 그다음 이야기도 한번 들어보시죠. 모두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1990년대에 있었던 사건인데요. 1994년 12월 30일 당시 22살이었던 미용지망생 존살비 3세라고 하는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이 청년은 아주 강한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있었는데 가톨릭 교인이었습니다. 여러분 많이들 아시겠지만 미국에서는 대통령 선거나 이럴 때가 되면 꼭 한 가지 이슈가 아주 회외하게 등장하는데 프로라이프로 choice 그 논쟁입니다. 낙태와 관련된 논쟁인데요. 프로라이프는 낙태는 어떤 경우에서도 해선 안 된다고 하는 강한 주장입니다. 흔히 보수적 주장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죠. 프로초이스는 선택권을 강조합니다. 그래서이 두 사이는 여하튼 미국 대통령 선거 때마다 계속 등장합니다.이 쌀비 3세라고 하는 22살의 당시 청년은 프로라이프의 강력한 지자였습니다.이 이 청년은 자신의 신념이 훼선당하고 마땅히 옳은 일, 당위성이 있는 일을이 세상에 거부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 같아요. 그래서 총을 들고 낙태 시술을 하는 것으로 의심받는 한 병원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총을 난사하지요. 한 명이 안타깝게 숨을 거두시고 거기 있는 여러분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그곳에서 나온 쌀비는 한 이말 정도 떨어진 곳으로 가서 거기서도 총을 난사합니다. 거기서도 한 분이 숨을 거두시죠. 현장에 있었던 한 목격자가 당시살비가 너는 내가 치른 그 죄에 대한 벌을 받는 것이다. >> 이렇게 얘기를 했다고 전해집니다.이 살비는 결국 재판에 넘겨지게 됐고 체포가 됐고요. 그다음에이 심판 과정 중에, 재판 과정 중에 변호인단은이 쌀비라고 하는이 청년은 KKK, 프리메이슨 뭐 이런 단체들이 가톨릭을 없애고 핍박한다고 하는 망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하면서 그 혁량을 낮추려고 했지만 아주 중대한 아 벌을 선거받고 감옥에 수감됐죠. 더 아이러니한 것은 어떻게 됐는가? 이후로 알려진 바에 따르면 1996년 11월에 플라스틱 봉투를 머리에 써서 스스로 질식사하는 자살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참 이상하죠. 프로라이프 어떤 경우에도 생명을 인간이 스스로 거두면 안 된다라고 하는 신념에 꽁꽁 자기 자신을 묶어서 살아왔던 그 청년이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끝다 그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제가 다른 예를 또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이것은 2025년 6월에 일어난 일입니다. 벤스 루터볼터라고 하는 한 당시 57세 분이 일으킨 일인데요. 이분의 알려진 행적을 보면 아 중동이나 아프리카 가서 선교 활동을 하고 아프리카의 한 곳에서는 목사로서 설교하는 사진이 대중에게 알려지기도 했죠. 그런데 이분은 미네소타에 사는 미국 민주당 의원 집을 찾아가서 그 민주당 의원과 그 남편을 살해합니다. 그리고 낙태를 지지한다고 생각하는 다른 민주당 부부를 해치려다가 부성을 입히고 결국 대대적인 검거 작전을 통해서 검거됩니다. 알고 보니 이분도 프로라이프 입장에서서 거침없이 사람들을 죽인 거죠.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떤 경우에도 생명을 지켜야 한다고 그게 보편 가치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생명을 그렇게 아삭간다고 하니까 살비와 볼터의이 두 사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미국에서만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제가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던 또 불행한 일을 하나 언급하려고 합니다. 2025년 1월에 일어난 일이죠. 고의 공직자 범죄 수사처 우리가 흔히 공수처라고 하는 곳 그 인근에서 분신한 사건입니다. 한 분이에 정치적 구호를 외친 후에 당시 59세 분이 거기서 분신을 시도해 했고 전신의 3도 화상을 입은 후에 병원으로 긴급 이송되지만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분은 이것이 첫 번째 분신 시도가 아니었어요. 이전에도 했고 왜 분신 시도했냐라고 물어보는 취재진의 질문에 정치적 이유를 남겼습니다. 자신의 정치적 이해와 신념과 상식이 통하지 않는이 세계를 향해서 자기가 분신으로서 이것을 알려야 되겠다고 이렇게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이분이 어떤 분인지 알고 보니까 한 지역에서 교회를 개척한 목사이기도 하고 이곳 저곳에서 어 아주 훌륭한 사역을 했더라고요. 예를 들면 노숙인 사역 같은 걸 한 겁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노숙인 사역을 했다. 우리 기독교인들 일반이 받아들일 때는 아이고 훌륭한 분이다. 훌륭한 목사님이다. 그렇게 얘기할 거 아니에요. 예. 목사였습니다. 그런데 노숙인이라고 하는 사회에서 굉장히 약자를 돕는다라고 하는 마음은 생명에 대한 사랑이거든요. 교회를 개척한다라고 하는 것은 죽어가는 하나의 생명, 영혼을 돌보기 위한 정말 거룩한 일이잖아요. 분신을 했다는 건 차사를 선택했다는 건데 도대체 어떻게 보면 자기 신앙의 일관성을 어떻게 이렇게 무너뜨릴 수 있을까요? 그분의 분 사건 이후 우리 한국 개신교회에서 한국 계신교에 수치를 주고 있다라고 말하는 그분 신앙의 정도에서 벗어난 것이 확실한 한 분이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걸 들었습니다. 하루에도 수백통이 문자 메시지하고 연락을 받는다. 자신이 죽을 수 있다. 얼마든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으면 효과적인 죽음이 될지에 대해서 자기가 얘기해 줄테니까 기다려라. 이렇게 얘기하면서 자신은 오히려 자자하는 걸 맡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주장했다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연관이 없을지는 의문입니다. 지금 나라가 그 정도로 위험한가요? 사회가 지금 완전히 망하게 생겼나요?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과장된 현실 인식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정면으로 반하는 행동을 하고 겁니다.이 세례를 모아서 우리가 극단주의라고 하는 것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극단주의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는 보편적 가치 그리고 한 사회가 생각하는 상식적인 혹은 널리 수용되는 가치 밖에 있는 그것이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극좌하든 극든 한 사회가 지행하고 있는 보편적 가치와 그것이 허용된 상식적 범위 내 밖에 있는 사람들을 가르쳐서 우리가 흔히 극단주의라고 하는데 비율의 범위기도 하지 문제이기도 하지만요. 동시에 한 사회 전체가 혹은 한 집단 전체가 극단주의로 흐를 수도 있죠. 독일의 낮 같은 경우입니다. >> 그런데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건강한 보수, 건강한 진보와 그구, 극자는 구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자, 보수하고 진보는 상대적 개념입니다. 어 어떤 사안에 대해서 어 어떤 의견을 서로 필요하는데 보수는 기본적으로 기존에 있는 법과 제도와 전통에 대한 존중감을 보이는 거예요. 그리고 진보는 여기에 대한 존중감이 보수보다 좀 더 약하고 우리가 어떤 당위성, 새로운 당위성, 새로운 가치 혹은 변화되어야 할 무엇에 대해 좀 더 비중을 두는 거예요. 그거는 그래서 상대적인 거예요. 근데이 둘 다 모두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체가 유지되고 존속돼야 한다고 하는 데서 일치하는 거예요.이 현 상태가 극단적으로 나쁘지 않으며이 상태가 개선될 수 있거나 유지될 만한 가치가 있다는데 서로 합의해요.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상대 없어져야 할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나의 운명의 흥함이 우리 단체 내 생각의 흥함이 반드시 저 단체의 멸망이나 저 단체의 하강하고 결부이고 생각하지 않아요. 보수는 보수대로 성장할 수 있고 이런바 진보는 진보대로 확장할 수 있어요. 그리고 둘이 연결 고리가 있어요. 이결하는 우리 사회의 보편적 가치가 있어요. 보수든 진보든 인간이 전놈하다라고 하는 가치를 서로 그렇습니다라고 얘기를 해요. 아, 그러니까 보수든 아, 진보든 그 공동체 설립의 기본. 우리나라는 민주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인간의 존엄, 인간의 평등이 가치에 동의한단 말이죠. 그리고이 가치를 구현할 때 서로가 서로를 해치지 않는 방식을 합의해요. 그래서 어떻게 하냐? 새를 모으지만 돌을 들고 서로 싸우지 않고 투표를 해요. 그러니까이 공동체를 해치지 않는 방식에서예요. 그런데 극단적인 것은 뭐냐면 지금 공동체를 형성하는 보편 가치나 법과 제도 밖에서 공동체의 변화를 뭐 기획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국회를 쳐들어간다. 국회를 무기를 들고 쳐들어간다. 이것은 극단주의적인 행동입니다. 미국에서 그런 일이 있었죠. 국회의사당을 무기를 들고 쳐들어갔습니다. 브라질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거기 가서 난장을 피웠어요. 아주 부끄러운 얘기지만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었어요. 브라질에서. 이건 극단적인 겁니다. 국회는 국민의 뜻을 대변한 사람들을 투표를 통해서 선출한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데 들어가면 안 됩니다. 또 아 우리가 권력을 분산하고 있잖아요. 법원. 법원의 결정을 정말 마음에 안 들고 나중에 역사를 통해서 뒤집어야 하는 사항들이 있습니다. 당연히 예를 들면 예전에 간첩 조작을 했거나 혹은 국가가 저지른 폭력에 대해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보호해 주지 않고 국가 폭력을 옹호했던 사건들 이런 것들은 법원의 실수니까 나중에 법적 절차를 통해서 그게 재판결 바뀌게 돼요. 그런데 자기가 생각한 법원 평가이 안 나왔다고 법원을 쳐들어간다. 극단적인 겁니다. 왜냐면 우리 사회의 근본 권위를 무너뜨리는 거거든요. 여하튼 그 그런 사람들이 사회에서 우리 사회를 유지하려고 우리가 권위를 부여한 기구들을 어 물리력과 폭력으로 전복하려고 하는 시도들 그 극단주의 단체들입니다. 민주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전복하려고 하는 것들, 그런 세력들, 그런 생각들을 극단주의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이 극단주의 세력들, 극단주의적 사고, 극단주의가 불러오는 감정, 극단주의가 불러오는 행동의 양식이 있습니다. 극단주의적 사고는 뭐냐? 전형적인 이분법적 사고입니다. 흑백 논리예요. 선과 악이 나누져 있고 선과 악 사이에는 어떤 타협점도 없다고 하는 이분법적 사고 이분법적 사고 중에 흑백 논리입니다. 우리 편 아니면 어 적이죠. 그런가요? 우리 편이 아니면 저인가요? 예수께서 제자들을 자기 앞에 보내시면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 제자 받아들이지 않으니까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님 아 저기에 블레이라고 할까요? 예수님 거절하셨습니다.이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사람이 예수님 이름으로 귀신 내쫓네요. 하지 못하게 할까요? 예수께서 나도라. 예수께서는 흑백 이월론 우리 너희 편지 않으셨어요. 그 흑백 논리적 사고 선악 이분법으로 세상을 판단하면 참 편하지만 그것은 실상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라고 권하는 거 성경은 성과 악을 구분하고 이분법이에요. 성경 좀 놀리고 성과 악사에 무슨 뭐가 있다고 하 타협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인본주의 논리예요. 그런 얘기 좀 하지 마세요. 그 굉장히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사는 세상 나 자신만 바라봐도 내 안에 선거이 공존에 있어요. 그냥 병존에 있고 그것도 고통스러워요. 성과 악을 나누면 세리와 죄인들하고 밥 못 먹어요. 그런데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을 밥상으로 불러들리신 것은 선과 악이 지금 딱 규정되 있어서 저 사람들은 우리 쪽으로 못 오고 우리는 저 사람들한테 절대 가지 않고 부자와 나사로인가요? 무슨 깊은 골이 있어서 오구하지 못하나요? 그게 극단주의 전형적인 사고 패턴입니다. 두 번째로 극단주의는 아주 중요한 눈에 띄는 감정적인 것들이 있는데 하나는 두려움과 위협에 대한 얘기입니다. 우리나라가 큰일 나게 생겼어요. 우리 교회가 큰일 나게 생겼어요. 우리나라가 다 공산화되게 생겼어요. 그런 얘기 두려움과 불 어 두려움과 위협을 불러일히죠. 극단주의자들의 언어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도록 고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극단주의 언어는 악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위협을 갖고 오니까 그 악한 사람들을 증어하고 경멸하고 혐오하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행동하느냐? 제가 아까 극단주의 정의를 말씀드릴 때 이미 언급했지만 현 현 현 질서 체제 내에 어 절차를 따라서이 일을 하도록 안내하지 않습니다. 폭력적 상황을 조장합니다. 심지어 자신들이 자신들이 내세웠던 그 가치를 반하는 폭력적 상황을 허용하거나 부혀요. 쌀비도 볼턴도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들었던 사례도 그 행동이 자신의 생각 가치 그리고 자신이 혐오했던 방식 그대로 하도록 하잖아요. 그리고 끼리끼리 모이도록 하죠. 아, 끼리끼리 모여서 서로가 서로를 집단 극화라 그러는데 그것 심리학에서 서로가 서로를 지지해 주면서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어떤 사람이 갖고 있었던 의견이 그거 같은 사람 의견끼리 모았을 때 점점점 극단화가 된 돼 갑니다. 그것을 심리학에서 집단 극화 현상이라고 하는데 그런 현상들이 일어나죠. 서로가 서로의 과격한 생각, 과격한 발언의 한계를 점점점 늘려 나갑니다. 점점점 늘려 나가서 사회의 그 극단주의가 아닌 세력들 아는 사람들이 볼 때는 너무나 극단적이고 너무나 그 망상에 사로잡힌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거예요. 폭력을 정당화하고 어떤 타협도 거부하고 선동과 선전이 있고 내 의견이 애들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지적으로 무식하거나 무식하다거나 아 저 사람은 원래 이상한 사람이었다거나 하는 식으로 사회에서 자신들을 선민 의식화하고 혹은 배타식 집단으로 모이게 만들죠. 이런 것들이 극단주의의 아까 말한게 정의고 극단주의의 특징입니다. 내가 있는 단체가 내가 접촉하고 있는 사람이 나에게이 세상을 선악 이분법으로 보게 한다. 선과 악의 이분법을 보게 한다. 그 사람이 내게 전해지는 말이 위협,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분노하게 하고 누군가를 혐오하게 하고 경멸하게 막 자꾸 만드는 말을 한다. 그리고 특정한 어 사람이 했다고 하는 말을 계속 들으라고 얘기하고이 방식대로 행동해서 어떤 수는 폭력을 정당화하거나 타협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나를 몰아가는 것을 느낀다. 거기는 극단주의 단체, 극단주의 성격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될까? 이미 극단주의에 깊이 빠진 사람들은 거기서 나오는 것이 사실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그 자체 논리에에 빠져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되는지에 대해서 아 얘기를 좀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왜냐면 이게 피해가 너무 크거든요. 개인적으로 극단주적 사고를 하고 있는 사람이랑 만나면은요. 정말 힘들어요. 제 주변에 뭐 없겠습니까? 카톡에 어마어마하게 올려돼요. 무슨 산이 있을 때마다 계속 주류 언론이라고 하는 데에서 전혀 접하지 못했던 사들을 쫙 올려요. 그러니까 내가 그 사람하고 다른 얘기를 하고 싶어도 계속 그 주제를 얘기해요. 제가 그 만나기 싫죠. 오래된 친구라도 가깝게 생각했던 사람이라도 같이 대화하기가 싫어요. 왜냐면 나는 그 사람과 일상을 나누고 싶지 편양된 정보를 두고 커멘트하고 싶지 않거든요. 그렇다고 제가 그분의 얘기를 일일이 반박을 한다. 그렇게 하기도 싫냐? 내가 왜 그 쓸데없는 일에 인생을 보내요? 어떤 피해가 생기냐? 주변에 사람이 하나씩 둘씩 사라져 간다 그러면 내가 극단주의적 말을 하고 있다고 하는 걸 생각해야 됩니다. 혹은 안 사라져 가면 어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다 착한 거예요. 그다음에 어떻게 되 어떻게 되나? 자기 정신 건강 굉장히 폐해됩니다. 자기 인간관계 자체가 왜 저 나빠지고 인지적인 외곡이 생깁니다. 이거 쉽지 않습니다. 그다음에 자기가 속한 가깝게는 가족 관계부터 해체되기 시작해요. 성과 때문에 밥상 뒤집어 없고 어 부모 자식간에 형제 자매간에 견디기 어려워지는 상황이 됩니다. 사회적 폐해 국가적 폐해 같은 거는 말하고 싶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미 다른 분들이 많이 말했으니까 극단주의가 갖고 오는 팬들은 너무나 심각하니까요. 극단주의적 사고에 빠져 있는 사람을 이렇게 어 건져낼 수 있는가? 제 강의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제가 예전에 잘잘법에서 이단과 사회비 얘기했는데 그 얘기 듣고 이단 사회에 비해서 막 나온 사람들이 속출할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제게 와서 자기와 자기 가족이 이단에 있다가 나오게 됐다는 얘기를 할 때 제절법 영상이 도움이 됐다는 학생을 만난 적은 있습니다. 정말 고마워 하면서 얘기하더라고요. 보람을 느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극단주의가 뭔지를 알고 우리가 스스로 조심해야 되고 혹은 그런데 이렇게 경도된 분이 있으면 가끔가다 한두 마디 해 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거든요. 사실 저는 제 주변에 있는 약간 그런 분들 몇몇을 사실을 논하지 않고 제가 지금 하는 말들을 통해서 조금 완화시킨 경험들은 꽤 있습니다. 첫 번째 어떻게 됐느냐? 이른바 에코챔버 형상이라고 하는 데서 나와야 됩니다. 아까도 말한 카카오 톡에 온갖 종류의 그 루머 이런 것들을 보낸 분들이 있어요. 제 주변은 얼마나 많겠습니까? 제가 한번 어떻게 했냐면 거기 있는 그 내용을 복사한 다음에 지금 어 AI 있죠? GPT나 뭐 퍼플렉서티나 재미나이에 붙여 놓고서 메뉴에다가 이것이 내가 SNSS 받은 내용인데 요것을 사신 확인해라 그랬더니 야 대단하더라고요. A4G 반장 정도 되는 얘기였는데 A4G 한 장 반을 쫙 나열하면서 요것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데 그렇게 말해서요 정부 단체는 잘못된 겁니다. 우선 아주 AI가 사실 확인을 쫙 해 주더라고요. 선동의 기초 기법이 사실과 거짓을 섞어서 화나게 만드는 거예요. 어떤 부분은 사실이에요. 어떤 부분은 거짓이에요. 뭉치면 거짓이에요. 여기 50% 물 있습니다. 순수한 물. 50% 독약 있어요. 섞으면은 독약이에요. 그 그거 아주 선동의 전형적인고 기초적인 기법이거든요. 이런 거 한 번만 확인하면 돼요. 오늘날 AI가 발달할 때 거짓 정보 얼마든지 걸러낼 수 있으니까 나를 분노하게 하고 누군가를 혐오하게 하고 경멸하게 하고 뭔가 조금 가웃하면 아 그래하고 받아들이지 말고 AI만 넘어봐라. 둘째 알고리즘에 빠지지 말아라. 알고리즘에 어 잘잘 것 같은 보수적인 기독교 재말 보지 마라. 좀 진보적이고 또 신앙에 대해서 어 급진적으로 말하는 체력들도 좀 봐라. 자존법도 많이 보시고요. 우리 자절법같이 보수적이고 이런 채널만 보면 그냥 신앙이 이게 전부 단절합니다. 좀 진보적이고 또 뭐 약간 과격한이 신앙에 대한 이야기도 읽어 봐야 아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거든요. 유튜브 알고리즘에 빠지면 절대 안 됩니다. 그러면 그것을 유튜브 알고리즘에 빠지 빠진 것 스스로 모르는 사람들만큼 자기가 세상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 없습니다. 제가이 재밌는 경험을 하나 했는데 전 사실은 음악을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근데 음악을 굉장히 여러 장르를 들어요. 예전에는 그 유한 세바스천 바음만 하루에 한 시간씩 들었거든요. 그런데 그게 하도 지겨워져 가지고 어떻대. 그래서 인상주의 음악 들으니까 너무 좋은 거예요. 인상주의 낭만주의 음악. 이게 그래서 사람들이 인상주의 난만주의 음악을 듣는구나 알게 됐어요. 근데 그건 클래식이잖아요. 그 취향이 제가 좀 더 넓습니다. 1년에 한 달 정도는 데스메탈이라는게 있어요. 진짜 시끄러운 음악이거든요. 아주 막 그냥 귀한 분장을 해서 그걸 이제 글램이라고도 하는데 아주 희한한 분장을 하고 나서 노래를 부르는게 있어요. 가끔 듣습니다. 한 달, 1년에 한 한 달에 한 달 정도는 정해 놓고 틀어요. 그 맨 처음에는 이게 도대체 때려 부시고 가서 알아들을 수 없어요. 그냥 막 어마어마하게 시끄러워요. 기타 소리 뭐 드럼소리 어마어마하게 시끄어요. 근데 어느 날 듣다 어느날 우연히이 그 데스 메탈을 듣는데 가만히 들어보니까 울부짖는 거예요. 우는 거예요. 막 울어요. 드니까 우우는 거더라고요. 자기 운명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자연의 고통에 대해서 재난에 대해서 우는 거더라고요. 어떤 건 그런 내용이 아니지만. 어, 그러니까 갑자기 그게 확 와닿어요. 근데 제가 클래식 자주들 하잖아요. 맨날 그 바로 그막만 계속 알고리즘에 떠요. 계속. 내 취향은 유튜브 알고리즘보다 더 큰데. 그러니까이 알고리즘이 답답해 보이더라고요. 알고리즘에 빠진 사람, 스스로 답답한 사람이란 걸 알아야 돼요. 내가 뜨는 채널,한테 뜨는 채널, 내가 즐겨 듣는 그 정치 이야기, 사회 이야기 있잖아요. 그거 좀 더 생각하고 공부하고 어 살아가면서 사유하면 그건 답답한 거예요. 나한테 바로 그만 자꾸 알고리즘 뛰어주면 이제 싫더라고요. 그게 유튜브 알고리즘이라는 겁니다. 거기에 그 나한테 추천해 어우 유튜브 알고리즘 너무 훌륭하지 않니? 나한테 좋은 것만 추천해. 그 인생 좁게 사는 거예요. 훨씬 제가 음악만 얘기했지만 훨씬 더 넓은게 있어요. 신앙도 제가 농담삼아 보수적인 잘잘법만 보지 마라 이렇게 얘기했는데 우리의 신앙의 이야기는 이만큼 넓어요. 그런데 여기에 그냥 그거 극단주의로 빠질 수 있습니다. 편양에 빠질 수 있어요. 제가 알고 있는 한 분은 경 굉장히 신앙이 좋은 분이에요. 하나님만 믿고 살아요. 그런데 어떡하다가 지옥에 대해서 관심 있어서 지옥에 대한 얘기를 들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분이 가슴속에 두려움이 생겼어요. 지옥에 대한 나 죽으면 지옥 가면 어떡하지? 그다음에 계속 지옥의 두려움에 관련된 얘기를 두 세 개 듣다 보니까 계속 알 유튜브에 지옥의 두려움을 경고하는 알고리즘만 계속 되는 거예요. 그분이 밤에 잠을 못 자요. 지옥 무서워서 나 지옥 가면 어떡하지고 물어봐야 저한테. 그래서 아니 평생을 예수 믿고 살고 평생을 헌신하고 아니 왜 지옥이 두려움을 자꾸 보냐고 하나님의 사랑을 보라고 자꾸 왜 엉뚱한데 자꾸 고기를 돌리냐고 그렇게 짜증내면서 말한 적 있습니다. 극단주에 빠지지 않으려면 자기에게 오는 메시지 AI 한 번만 넣어 보세요. 사실 확인해 달라. 둘째, 알고리즘에 빠지지 마세요. 그 참 한심스러운 거예요. 나한테 분노, 혐모, 경멸, 두려움을 일으키는 거, 진실과 사실을 섞는 거 전형적인 선동의 수사학이에요. 거기에 넘어가지 마세요. 무엇보다 보편적 가치에 반하는 절차적 합리에 맞는 그런 걸 유욕할 그것을 유혹할 때 넘어가지 마세요. 보세요. 예수님 앞에 악마가 서서 너 나한테 절하면 세상 모든 것 준다. 예수께서 세상 모두를 구원하고 싶으셔요. 그래서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게 하기를 원하세요. 중요한 가치죠. 모든 사람에게 중요한 가치예요. 그런데 그걸 하기 위해서 악마에게 절하래요. 안 하시죠. 자기가 생각하는 중요한 정당성을 이루기 위해서 악마에게 절을 할 수 있다고요? 예수님 그거 유혹 넘어가지 않으셨어요. 이런 생각을 쭉 하고 오늘 왔는데 갑자기이 원고를 준비할 때 정말 대학교 1학년 때 들어가서 읽었던 전테일 평전이 기억났습니다. 참 그 전일 평전 읽으면 가슴 아픈 대목이 많아요. 그리고 어떻게 그 젊은 그 당시 젊은 전테일이라고 하는 분이 저런 생각을 했을까? 그때 뭐 제음에서 학교 들어간 사람들은 다 전테일 평전을 갔어요. 그런데 거기에 이제 전태일 열사라고 부르죠.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그 묘사가 있는데 제 선배 중에 어떤 분들은 오늘날 예수께서 계셨으면 바로 전 같은 분이다.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고 또 그 분신 장면이 굉장히 그 아 뭐라 그럴까요? 순고하게 느껴진단 말이죠. 근데 이제 그것 그 읽은 독서 경험이 굉장히 큰데 그 몇 년 후에 그것을 직접 지은 조용내의 변호사가 하셨던 말씀이다라고 했던 말이다 하고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때 자기가 그 부분을 묘사하면서 너무 이것을 수사적으로 강하게 얘기한 걸 후회한다. 죽음을 너무 순고하게 그려서 이것이 인간의 삶을 지향하자고 하는 건데 결국 전탱일이라고 하는 한 청년이 지향했던 삶의 가치가 아니 어떻게 이런 노동 환경에서 일을 하라고 합니까? 잠깨라고 그 잠 깨우는 주사 맞춰가면서 어린 요공들 12된 어 시골에서 온 애들 때려가면서 이게 어떻게 인간 살 겁니다. 인간 답게 살게 해 주세요라고 생명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전테일이 살았는데 그 평을 다 입고 나서 어떤 사람 마음속에 죽음에 대한 마음이 더 커지게 하는 그런 서술이라면 그건 전태율의 삶에 반하는 거잖아요. 조용내번사가 그 부분을 비화했다라는 것을 후회했다라고 누군가 써 준 이차 저술이죠. 그분이 직접 쓴 건 아니지만. 그걸 듣고 전 사실 마음속으로 굉장히 고마웠습니다. 실제로 전태일이라고 하는 분의 삶의 가치가 그런 거잖아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거든요. 무엇이 진짜지 무엇이 핵심에 놓여 있는지 뭐가 핵심이고 중요하고 이것을 구현하기 위해서 어떤 방법을 취해야 되는지 생각해야지 자꾸 우리를 살짝살짝 비틀어서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거든요. 제가 잘잘법에서 한 두 세 번 얘기한 거 같은데 우리 신앙의 핵심에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가 있고이 우주의 근원의 사랑이 있으니까 여기가 우리의 집이다. 여기가 우리 아버지 어머니의 집이다. 우주를 그렇게 알고 살아가야 되는데 자꾸 여기를 위험의 장소로 두려움의 장소로 분노해야 할 장소로 만드는 것은 선동이다. 극단주의로 나가는 일이다.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님도 성전에서 분노하셨는데 의로운 분노와 극단주의는 어떻게 다를까요? 성전 정화 사건은 심볼릭한 거예요. 죄3대 영어로써서 상징적인 거예요. 예수님이 성전 자체 전체를 돌아면 산게 아니라 제한된 구역에서 상징적인 행동을 하신 거예요. 그게 그러면 그것도 폭력 아니냐? 아, 그 거룩한 폭력이 근데 우리도 그 거룩한 폭력을 하는 거 아니야. 이렇게 얘기할 수 있어요. 근데 요한복음서 잘 읽어 보면 아주 참 재밌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나는 심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심판하신다. 이런 구절이 있는데 또 다른 구절에서 요한복음 다른 구절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아들에게 심판권을 옮기셨다. 그래 참 재밌죠. 심판한다는 것은 신적 폭력, 정당성의 폭력을 쓰는 건데 그것을 하나님도 예수님도 서로가 서로에게 조심스럽게 양도 혹은 공유하려고 해요. 둘째,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입니까? 요한계시록 보면 죽임당한 어린양이 심판을 해요. 그러면 그 전에는 폭력으로 세상이 맞서지 않아요. 그러니까 기독교인들은 우리 대한민국에 산 사람들은 우리의 폭력 권한을 정부에게 넘겼어요. 국가에. 그래서 누가 나 와서 나한테 한대 쳤다 혹은 나한테 사기를 쳤다 그러면 나한테 한대 쳤다 쳤기 때문에 내가 가서 한대 친다 그러면 쌍방 폭행죄예요. 그렇잖아요. 누가 나한테 쳤다 그러면 내 복수를 누가 해주냐면 국가에서 공권력이 해요. 왜? 내가 국가의 이론이 되면서 내 폭력의 권한을 국가에게 양도했거든. 위임했거든. 그래서 위 폭력을 내가 직접 사용하면 규칙 위에 아니에. 어, 누가 나한테 사기를 쳤다. 그런데 그 사람 뜻 사기를 치냐? 아니야. 그 사람 고발해서 국가가 해결해지도록 우리가 폭력을 위임한 거예요. 똑같아요. 기독교인들은 폭력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위임했어요. 요한복음서에 보면 예수께서 성령께서 오실 때 죄에 대해서 정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알려 주실 것이다. 그러니까 기독교인들은 자신 우리의 폭력을 예수께 위임하고 하나님께 위임하고 성령님께 위임한 거예요. 그래서 제가 드리는 말씀은 예수께서 성전에서 한 일을 어떻게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받아들이냐? 그건 상징적인 행동이다. 성전에서 어떤 행동을 했다. 그 상징 행동이에요. 그럼 그 상징 행동에 뭘 의미하느냐? 하나님과 거래하고자 하는 인간의 저열한 욕망. 하나님을 거래 대상으로 보는 하나님에 대한 천박한 인식.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요청한다고 하는 뭐 뭐 뭐 돈을 가져와라. 뭐 비둘기나 먹고 싶어. 소를 잡아와라. 약 먹고 싶어. 그렇게 하나님을 오해하는 행동. 그걸 해 주면 하나님이 만족해 만족할 수 있다고 하는 우리의 착각. 하나님을 달래서 어르고 달래서 우리가 원하는 걸 얻어낼 수 있다고 하는 이런 착각. 그런 거는 불가능하다 하고 예수께서 상징 행동하신 거예요. 그럼 우리가 그것을 그 상징 행동의 의미를 받아들이고 오늘날 살아야지 그 상징 행동을 그대로 따라하는게 그걸 의미를 살린게 아니라고. 그리고이 성경에 물어보는 거예요. 정말 그 폭력 행동, 예수님처럼 하는 폭력 행동이 신앙에서 어 저 적절한 거냐? 폭력을 하나님께 위임했어요. 신앙인들은 시민으로서 우리는 우리의 폭력 행동을 국가에 위임했고 신앙인으로서 우리의 폭력 행동을 하나님께 위임했어요. 그걸 정당화하는 구실로 삼지 마세요. 그 성경 구절을. 그게 성경을 욕되게 하는 거예요. >> 극단주의자들을 살펴보면 교회 다니는 크리스천인 경우가 많습니다. 혹시 기독교 내에 극단주의로 이어지기 쉬운 요소가 있는 건가요? 신약 성경의 모태는 묵시문학적 종말론이라는 것입니다. 묵시문학적 종말론의 특징이 이월론이에요. 현재와 미래의 이월론, 선과 악의 이월론이에요. 종말론은 긴급성을 요청해요. 자, 선과 악의 이원론을 얘기하고 이원론을 얘기하고 현재와 미래의 이원론을 얘기하고 나쁜 것과 좋은 곳에 이원론을 얘기하는데 둘이 전쟁 중이고 곧 세상이 바뀔 것이라고 하는 긴급성을 얘기해요. 종말론으로. 그러면 당연히 극단주의로 흐를 가능성이 매우 높죠. 묵시문학적 종말론의 신약 성서 예수님의 말씀이 해석에 그게 그 틀거리예요. 그 아래 놓여 있어요. 그러니까 급진적이에요. 신약 성서의 메시지는. 근데 우리가 그걸 알고 아 신약 성서의 메시지는 급진성을 띄고 있는 시대에 나와서 이런 급진성이 있구나. 그거를 이해하고 그거 그 외 뒤에 있는 메시지가 뭔가? 하나님이 긴급하게이 세상의 사랑의 세상을 실현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이 철저하게이 세상은 사랑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기를 원하신다. 그 메시지를 읽어야지 그 형식을 읽 읽고서 그 형식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부분만 따 가지고 하겠다. 그게 바로 성경을 왜곡하는 거예요. 성경 전체에 급진화 급진적인 메시지 극단화하는게 있어요. 근데 그거 형실을 그대로 따오겠다. 아, 예수님의 급진성은 사랑의 급진성이에요. 사랑의 급진성이라고요. 극단주의랑 급짐성이랑은 달라요. 레디컬한 거예요. 예수님의 레디컬하다는 건 레디컬은 뿌리예요. 뿌리. 근본에 일각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걸 구분할 수 있어야 돼요. 예수님의 급진주의와 극단주의를 많은 부분 비슷한 거 같지만 구분할 수 있어야 เฮ [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