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잘법 부흥회 풀버전] 요한복음이 가르쳐주는 사랑의 기술ㅣ김학철 교수

잘잘법 · 2026-08-28

채널: 잘잘법 |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ZJzHhozuzuo | 길이: 114:42

요약

🎯 TL;DR — 김학철 교수는 요한복음의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 공관복음의 이웃·원수 사랑과 다른 독특한 사랑의 범위를 제시한다고 설명하며, 진정한 사랑은 자기 자신을 건강하게 사랑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함을 논증한다.

📌 핵심 논지 — 화자는 요한복음이 예수의 사랑을 "세상"이 아니라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로, "이웃 사랑"이 아니라 "서로 사랑"으로 그 범위를 좁혀 제시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 독특함을 비판이 아니라 오늘날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현대인에게 필요한 메시지로 재해석하며, 자기 경멸과 병리적 나르시시즘이라는 두 극단이 사실 하나의 뿌리("성과주의적 자아")에서 나온다고 지적한다.

🗺️ 영상 구성

  • 도입: 잘잘법 6주년 부흥회 소개, 목사 인사·기도·찬양(다수 곡)
  • 본론: 요한복음 13장 사랑 계명의 독특성 분석
  • 이웃 사랑의 전제 = 자기 사랑이라는 논증
  • 영화 박싱 헬레나(1993)를 통한 병리적 사랑의 예시
  • 자기 경멸 vs 병적 나르시시즘, 두 병리의 공통 뿌리 분석
  • (자막은 "성과주의적 자아" 개념 설명 중 종료됨)

━━━ 본문 ━━━ 요한복음 사랑 계명의 독특성 화자는 요한복음 13장 1절에서 예수가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한 점을 짚으며, 세상 전체가 아니라 사랑의 범위를 제한했다고 말한다. 같은 장 34절에서는 유다가 나간 뒤 남은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고 말씀하신 것을 인용한다.

공관복음과의 대비 마태·마가·누가복음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이웃 사랑, 그리고 산상수훈의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원수 사랑을 강조하는 반면, 요한복음은 "서로 사랑"이라는 훨씬 좁은 범위를 제시한다고 대비한다. 화자는 과거 한 학자가 이를 "윤리의 실패"라 부르며 "기껏해야 자기네들끼리 사랑할 것이냐"고 비판했던 사례, 그리고 3~40년 전 교회가 "성벽에 갇혀 이웃을 외면하는 폐쇄적 집단"이라 비판받았던 사례를 언급한다.

이웃 사랑의 전제 = 자기 사랑 황금률("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의 기준은 곧 "나"라고 지적하며, 내가 나를 제대로 사랑하지 않으면 이웃 사랑도 왜곡된다고 강조한다. 자신을 경멸·학대하면 이웃에게도 분노·경멸로 향하고, 반대로 자신을 병적으로 숭배해도 이웃에게 재앙이 된다는 것이다. 화자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잊었다"고 단언한다.

영화 《박싱 헬레나》(1993) 사례 잘생기고 성공한 외과의사 닉 버너가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상처를 안고 있다가, 헬레나라는 여인에게 집착하여 교통사고를 당한 그녀를 병원 대신 자기 집으로 데려가고, 이후 그녀의 다리와 팔을 차례로 잘라 완전히 소유하려 한 이야기를 상세히 전한다. 화자는 이를 통해 "닉은 헬레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전까진 말이죠"라는 결론을 제시하며, 이것이 자기 경멸의 극단적 형태라고 설명한다.

자기 경멸과 병적 나르시시즘, 두 극단의 공통 뿌리 철학자 한병철의 "성과 사회" 개념을 인용해, 과거 규율 사회의 타율("뭘 하면 안 돼")과 달리 오늘날 성과 사회는 "너는 할 수 있다"는 긍정성의 구호로 스스로가 스스로의 성과 관리자이자 착취자가 된다고 설명한다. 직장인의 자기 소진, 학생들의 자기소개서에서 "훌륭한 상품"으로서의 자기 전시 등을 예로 든다.

반대편 극단으로는 나르키소스 신화와 현대 심리학자(하인즈 코헛으로 추정되는 언급)를 인용해, 나르시시즘은 자기애 과잉이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내면의 공허함을 감추기 위한 필사적인 방어 기제"라고 설명한다. SNS에서의 전시, 자녀를 명문대에 보내려는 부모의 동기(자녀의 성취인지, 부모 자신의 체면인지)에 대한 자기 성찰적 질문을 던진다.

화자는 두 병리가 "성과주의적 자아" — "나의 가치는 나의 행위, 나의 성과, 나의 업적, 나의 인기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자기상 — 라는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다고 정리하며, 경제학자 데이빗 리카도의 노동가치설을 빌려 "나의 가치는 나의 성과와 업적과 유용성과 매력으로 결정된다"는 왜곡된 자기 이해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자막이 끝난다.

💬 결정적 발언

"나는 나를 사랑하는 법을 잘 모릅니다. 그러니 어떻게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닉은 헬레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전까진 말이죠."

"감당할 수 없는 내면의 공허함을 감추기 위한 필사적인 방어 기재"(나르시시즘에 대해)

⚖️ 화자가 다룬 반론·한계

  • 과거 학자들이 요한복음의 사랑 계명을 "윤리의 실패"라 비판한 사례를 스스로 언급하며, 이제는 교회가 서로도 사랑하지 않아 그런 비판조차 하지 않는다는 자성적 지적을 덧붙인다.

🧩 핵심 용어

  • 성과주의적 자아 = 자신의 가치를 성과·업적·인기로 규정하는 자기상
  • 노동가치설(데이빗 리카도) = 상품 가치가 투입된 노동량으로 결정된다는 경제이론, 화자는 이를 유비로 사용
  • 병리적 나르시시즘 = 자기애 과잉이 아닌 내면 공허를 감추는 방어기제로 재정의

🔎 보완 & 확인

  • 배경 보완: "박싱 헬레나(Boxing Helena)"는 1993년 제니퍼 린치 감독의 실제 영화로, 한국 개봉 제목이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였던 것은 확인 가능한 사실이나, 정확한 국내 개봉 제목·연도는 별도 확인 필요.
  • 사실 유의점: 나르시시즘을 "내면의 공허함에 대한 방어기제"로 설명한 심리학자는 화자가 "하인스코"로 언급했으나, 발음상 하인즈 코헛(Heinz Kohut)일 가능성이 높음(자기심리학 이론과 부합) — 다만 자막 표기가 불분명해 추정이며 확인 필요.
  • 사실 유의점: 한병철의 "피로사회/성과사회" 개념 인용은 실존하는 저작(『피로사회』 등)의 논지와 대체로 일치하나, 정확한 인용 문구는 원저와 대조 확인이 필요.
  • 이 자막은 설교 후반부(나르시시즘 이후 전개될 결론·적용 부분)가 잘린 채 끝나 있어, 화자의 최종 결론(사랑 안에 거하라는 요한복음적 해법으로의 귀결)은 본 요약에 포함되지 않았다.

자막 원문 (참고)

Kind: captions Language: ko 안녕하세요. 저는 잘잘법 연출을 [음악] 맡고 있는 임지은 피디라고 합니다. [박수] [음악] [박수] 갑자기 좀 추워졌어요. 그래서 이럴 때는 [음악] 좀 집밖에 나오기가 싫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와 주신 분들에게 [음악] 저희 잘법 제작진을 대표해서 제가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드리겠습니다. 어, [음악] 작년에 저희가 이맘 때이 같은 자리에서 공개 강연회를 했어요. 어, 그때도 정말 많은 분들이 와 주셨는데 [음악] 오늘도 그때보다 더 많이 와 주신 거 같아요. 혹시 작년에도이 자리에 오셨던 분들 계실까요? [음악] 손 들어 주시면 저희가 네. 혹시 어, 그때 어땠는지 그리고 오늘 어떤 마음으로 오셨는지 나눠 주실 수 있을까요? 예. 저 저는 [음악] 오늘 너무 오고 싶었는데 제가 댓글에 썼어요. 오늘 [음악] 보면은 제작진 분들 안아 주고 싶다고 생각을 하고 저는 김학철 교수님 때문에 올해를 진짜 너무 >> 네. 우와, [음악] >> 의미 있게 살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셔서 오늘 너무 감사하다는 말씀 꼭 드리고 싶습니다. >> 아, 예. 너무 감사합니다. 벌써 [음악] 저희 한번 말씀으로 벌써 안아 주신 거 같으세요? 혹시 또 오늘 어떤 마음으로 오셨는지 한 번만 더 [음악] 나눠 줄 수 있을까요? 저기 >> 어, 저도 댓글에다가 그 불자인데 참석 가능하냐고 물어 물어봤던 사람이거든요. >> 환영합니다. 예. 그 김학철 [음악] 교수님 말씀 항상 들으면서 고3이었거든요. 그래서 [음악] 많은 위로 받았고 그래서 한번 요런데 와도 괜찮겠다 싶어서 참석하게 됐습니다. >> 네. 환영합니다. [박수][음악] 어, 이렇게 정말 함께 해 주시는 여러분 덕분에 저희가 [음악] 벌써 6년이 됐거든요. 6년 동안 꾸준히 올 수 있었고 어, 오늘 이렇게 와 주신 마음, 사랑, 응원 다 마음에 새기면서 앞으로도 꾸준하게 [음악] 늘 꾸준하게 신앙의 동반자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음악] 그럼 지금부터 잘잘법 부흥회를 시작해 볼 텐데요. 지난에이어서 올해도 귀한 장소를 [음악] 허락해 주신 연동교회 담임 목사님 김주용 목사님 모시고 어 오늘의 순서 시작해 보도록 [음악] 하겠습니다. 김지영 목사님 나오실 때 박수 부탁드립니다. [음악] [박수] 우리 연덕께 오신 것을 환영하고 오늘 CBS 잘잘법 부흥에 [음악] 우리 교회에서 우리 연동교회 하게 된 것이 너무 기쁩니다. 아, 오늘 귀한 [음악] 초대교회와 같은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자,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희들 오직 한 분 하나님 때문에 이곳에 모였습니다. CBS 잘잘법 부흥회로 이곳에 함께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나아가고자 하오니 이곳에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자리, 뜨거움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자리, 그 가운데 결단하는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말씀을 전하시는 김학철 목사님 위에 강건함을 허락하여 주옵시고 찬양 가운데 은혜를 허락하여 주옵시며이 모든 것이 진행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함께하여 주옵소서. 자리를 지키는 모든 주의 사람 한 분 한 분을 축복하게 하시고 마지막까지 성령이 인도하는 부흥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이 모든 간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음악] [음악] >> 할렐루야. 아멘. 잘잘법 1일 부흥에 오신 여러분들 진심으로 축복하고 환영합니다. 우리 앞뒤 샤울 함께 먼저 축복하면서 이렇게 무난하고 인사했으면 좋겠습니다. [음악]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네 [음악] >> 특별히 이번 주제가 사랑이라는 주제인데요. [음악]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어 때에 따라 당연하게 생각하기도 하고 또 오해하기도 하고 그런 거 같습니다. 오늘 그러나이 자리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그 사랑 앞에 우리 모두가 함께 순복하며 그 은혜를 누리길 [음악]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 그러한 마음 담아서 우리 한 번만 더 축복하면서 인사할 텐데요. 잘 오셨습니다. 인사하겠습니다. [음악] 잘 오셨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우리이 시간 함께 축복하시면서 먼저 찬양하며 나아가겠습니다. [음악] 하나님의 [음악] 사랑이 >> 하나님의 사랑이 당신의 >> [음악] >> 삶 가운데 가득하기를 축복합니다. [음악] >>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가득하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음악] 사랑이 >> 하나님의 사랑이 당신의 [음악] 삶 가운데 가득하기를 축복합니다. [음악] >> 하나님의 은혜가 [음악] 우리 가운데 가득하 >> 자 우리 시간 두 손을 내밀고 함께 축복하겠습니다. [음악] 하나님의 사랑이 >> 하나님의 사랑이 [음악] 당신 내 삶 가운데 가득하기를 [음악]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음악] 은혜가 우리 가운데 [음악] 가득하길 기도합니다. >> 우리 시간 한 [음악] 번 더 축복할 텐데요. 한번 더 축복할 때에는 우리 앞에만 보지 마시고도 옆에 있는 분들 보시면서 사실 저희가 잘 모르긴 하고 [음악] 어색한 사이긴 하지만 주님 안에서 하나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 한마한 뜻으로 오늘 마음 말씀 가운데 나아가기 전에 그 사랑으로 우리 한 번 더 축복하며 나아가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음악] 사랑이 >> 하나님의 사랑이 [음악] 당신의 삶 가운데 가득하기를 [음악] 축복합니다. >> 하나님의 [음악] 은혜가 우리 가운데 가 >> 자 우리 마지막으로 우리 가슴에 손으로 [음악] 하나님의 사랑으로 축복 내려 주옵소서. 하나님의 [음악] 사랑이 당신의 성 가운데 가득하기 [음악]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음악] 은혜가 우리 가운데 [음악] 가득하게 기도합니다. >> 가득하길 기도합니다. [음악] 가득하게 기도합니다. 가득하게 [음악] 기도합니다. 아멘. 네. 우리 서로에게 사랑과 축복의 격려 박수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 우리 모두 [음악] 예배하는 자 되어 온전히 영과 진리로 [음악] 주를 예배하자. 주가 우리와 함께 [음악] 영원히 함께하시고 마르지 않는 샘물로 [음악] 우리를 채우시리 우리 [음악] 모두 예배하는 자 되어 온전히 [음악] 영과 진리로 주를 예배하자. 주가 [음악] 우리와 함께 영원히 함께하시고 마르지 않는 샘물로 우리를 [음악] 채우시리 우리 모두 [음악] 예배하는 자되여 온전히 영과 [음악] 진리로 주를 예배 하자. 주가 [음악] 우리와 함께 영원히 [음악] 함께하시고 마르지 않는 재물로 >> 우리 모두 우리 [음악] 모두 예배하는 자되여 온전히 [음악] 영과 진리로 주를 예배하자. 주가 [음악] 우리와 함께 영원히 [음악] 함께하시고 마지 않는 생물로 [음악] >> 우리 여러분들의 목소리로 고백합시다. 주님 우리 모두 예배하는 [음악] 자되여 온전히 영과 [음악] 진리로 주를 예배하자. [음악] 주가 우리와 함께 [음악] 영원히 함께하시고 마르지 않는 재샘물로 [음악] 우리 한번 더우신 우리 모두 예배하는 자여 [음악] 온전히 영과 진리로 주 예배하자. 주가 우리와 [음악] 함께 영원히 함께하시고 [음악] 마르지 않는 샘물로 우리 시리 [음악] 하나님 우리와 영원히 함께 [음악] 하시네 꿈없는 우리게 그 나라 보여 주시네. [음악] 연약한 자들의 [음악] 친구가 되어 주세고 힘없는 [음악] 우리의 인생을 위해 [음악] >> 하나님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시는 [음악] 구없는 우리의 [음악] 여주라 모여주 연약한 자들 연약한 자들 [음악] 친구가 되어 주시고 힘없는 [음악] 우리 >> 우리 함께 주님께 손을 높이 들고 고백합시다. 하나님 우리와 [음악] 하나님 우리와 영원히 [음악] 함께 하시네. 꿈없는 우리네 그 [음악] 나라 보여 주시네. 연약한 자네. 친구가 [음악] 되어주시고 힘없도 우리의 인생을 [음악] 위로하시는 우리 주님의 그 사랑을 찬양합니다. 하나님 우리와 [음악] 하나님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는 [음악] 우리게 그 나라 보여 주시네 연약한 [음악] 자들 친구가 되어 주시고 힘없는 [음악] 우리네 인생을 를 위로하시네. [음악] 우리 시간 힘차게 박수 주시면서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노래하며 나아갑시다. 할렐루야. 아멘. 나를 향한 주의 [음악] 사랑 산과 바다에 넘치님 내 마음 열대 주님 나에게 참 자유 주셨네. 진리 [음악] 속에 거하며 나의 손을 높이들고 [음악] 언제나 주님의 사랑 자 우리 한번 더 나를 향한 [음악] >> 나를 향한 주의 사랑 산과 바다에 넘치니 내 마음 [음악] 열배 주님 나에게 천자유 주셨네 늘 진리 [음악] 속에 거하며 나의 손을 높이고 언제나 [음악] 주님의 사랑을 노래합니다. 아멘. 아멘. >> 주의 사랑 노래하리라. [음악] 영원토록 노래 가리라. 주의 사랑 노래하리라. [음악] 영어토록 노래. [음악] 한번 더 나를 향한 나를 향한 주의 사랑. 산과 바다에 넘치 [음악] 마음 열 때 주님 나에게 참 자유 주셨네. 내 [음악] 진리 속에 걸며 나의 손을 높이들고 언제나 주님의 사랑을 [음악] 노래. >> 함께 노래합시다. 주의 사랑 >> 주의 사랑 노래하리라. >> 영원토록 [음악] 노래하리라. 주의 사랑 노래하리라. [음악] 영원토록 [음악] 노래하 >> 내가 주를 줄 때 >> 내가 주를 줄 때 [음악] >> 다 비웃을지라도 >> 다 비웃겠지만 >> 그들도 >> 그들 주 알게 되면 [음악] 함께 기뻐 주일 주게 [음악] 되리 나를 향한 주의 사랑 산과 바다에 넘치니 내 마음 열매 주님 나에게 [음악] 창자 주셨네 늘 진리 속에거하며 나의 [음악] 손을 높이 들고 언제나 주님의 아멘 >> 주의 사랑 예 >> 주의 [음악] 사랑하리라 영원토록 노래하리라 [음악] 주의 사랑 노래하리라. [음악] >> 영원토록. >> 자, 우리 한 번 더 고백합시다. 주의 사랑 노래하리라. >> 주의 사랑 [음악] 노래하리라. 영원토록 노래하리라. 주의 사랑 노래하리라. >> [음악] >> 영원 자 우리 목소리로 함께 고백해봅시다. 주의 사랑 >> 주의 사랑 노래하리라. [음악] 영원토록 노래하리라. [음악] 주의 사랑 노래하리라. >> 사랑 노래하길 [음악] 망합니다. 한번 더 주의 사랑 노래하리라. 주의 [음악] 사랑 노래하리라. [음악] 영원토록 노래하리라. [음악] 주의 사랑 노래하리라. [음악] 영원토록 노래하리라. [음악] 아멘. 자, 우리 가능하신 분들은 그 자리에서 다 같이 일어나셔서 우리 함께 주님을 깊이 찬양하길 소망합니다. 입니다. 그 사랑 >> 그 사랑 [음악] 이유 없이 날 사랑해. 주님께 [음악] 드릴 것이 나는데 그 사랑 [음악] 없이 날 사랑해. >> 주님 >> 주님의 [음악] 나도 사랑해. 아무런 이유 [음악] 없다니 믿어지요. 내게 [음악] >> 주님의 사랑온 주님의 사랑 >> 믿을 [음악] 수 없던 그 사랑이 믿어지던 그 순간에 제 생명으로 태어났네. [음악] 나는 주님의 어 땡큐 [음악] 땡큐 나는 주님의 어 땡큐 사랑해 [음악] 오예 그 사랑 >> 그 사랑 [음악] 없이 날 사랑해 >> 주님의 [음악] >> 나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 우리의 고백입니다. 그래 아무런 것 [음악] 없다는 믿어지나요. [음악] 내게 찾아온 주님의 사랑 [음악] 믿을 [음악] 수 없던 그 사랑이 믿어지던 그 순간에 [음악] 내 생명으로 태어났네. 자 우리 함께 주님께 고백합시다. [음악] 땡큐 땡큐 땡큐 나는 [음악] 주님의 아양 땡큐 사랑해 [음악] >> 믿을 수 없던 >> 믿을 수 없던 그 사랑이 믿어지던 [음악] 그 순간에 새 생명으로 태어난데 [음악] 나는 주님의 언약 땡큐 [음악] 땡큐 나는 주님의 어린양 아멘 땡큐 땡큐 [음악] 사랑해 믿을 수 없던 그 사랑이 [음악] 믿어지던 그 순간에 새 [음악] 생명으로 태어났네. 나는 주님의 어 고백합시다. 땡큐 [음악] 땡큐 나는 주님의 어 땡큐 [음악] 땡큐 사랑해 [음악] >> 믿을 수 없다. 믿을 수 없던 그 사랑이 믿어지던 그 순간에 [음악] >> 새 생명으로 태어났네. 나는 주님의 어린양 땡큐 [음악] 땡큐 나는 주님의 어린양 땡큐 사랑의 [음악] >> [음악] >> 우리 구원의 반석되신 우리 예수님의 그 사랑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예. 주 찬양해 >> 주 찬양해 [음악] 내 모든 것으로 온만에 [음악] 주 행하시길 감사드리세 >> 전능하신 전하신 [음악] 주 다스리시니 영원토록 [음악] 내 모든 삶을 주께 드리 [음악] >> 예수님 >> 예수님 내 잘못된 [음악] 것 영원 주만 따르 주님 내가 살아 숨쉬는 [음악] 동안 예수의 이름 예수만 높이 >> 주님 내 삶을 주님 [음악] 내 삶을 만족시키시니 내게 부족한 [음악] 처영없네 세상에 의 어떤 영화도 예수와 [음악] 비길 수 없네. >> 예수와 비길 수 없네. >> 예수와 비길 수 [음악] 없네. 예수는 내 삶의 모든 [음악] 건 영원히 주만 따르리 내가 살아 숨을 쉬는 동안 예수의 [음악] 이름 예수만 높이리 예수는 내 삶의 [음악] 모든 건강 영원이 주만 따르 [음악] 내가 살아 죽는 [음악] 동안 >> 자 우리 믿음으로 선포하며 나갑시다. 예수는 [음악] 내 삶에 예수는 내 삶의 모든 건강 [음악] 영원히 주만 따르가 살아 주시는 동안 예수의 한 예수 내 삶의 모든 것 >> 예수 [음악] 내 삶의 모든 건강 [음악] 영원이 주만 따르 내가 살아 [음악] 춤시는 동안 예수의 이름 예수만 [음악] 높이리 아멘 예수님만이 우리의 주인이시고 우리 삶의 모든 것이 우리 주님께 감사와 찬양의 의 큰 박수 올려 드립시다. 할렐루야. 아멘. 그 자리에서 앉으셔서 예수께서 찬양하며 나아가겠습니다. 은혜로 날으시고 [음악] 사랑으로 품어 주셔도 [음악] 내 마음 한자락도 지키지 [음악] 못하는이 모습 부끄럽습니다. 습니다. [음악] [음악] 곁내어 주신 >> 주님 [음악] 앞에 나갑니다. >> [음악] >> 교할 그로 나를 >> [음악] >> 붙드시는 주 이름만 바라봅니다. 매일 [음악] 마주한 슬픔을 견뎌나가며 주 예수의 마음을 닮아가네. [음악] 두려운 거음마다 [음악] 주가 동행하니 주시지하며 오늘을 걷네 주의 [음악] 신실한 소망을 입히 담으며 [음악] 주 예수의 풍요를 채워하네. [음악] 하나님의 자녀로 명예 지켜 [음악] 깊어진 삶을 주께 드리네. [음악] 은혜로 날으시고 은혜로 [음악] 날 보드시고 >> 사랑으로 [음악] 품어 주셔도 >> 내 마음 한자라도 [음악] 지키지 못하는 이 모습 [음악] >> 나스한 곁을내어 주신 >> 나스한 곁을내어 주신 >> 주님 [음악] 앞에 나갑니다 표현 못할 긍휼로 [음악] 나를 붙드 시는 주 이름만 바라봅니다. [음악] >> 매일 마주와 >> 매일 [음악] 마주와 슬픔을 겨나가며 주 예수의 마음을 [음악] 닮아가네. 두려운 걸음마다 [음악] 주가 동행하니 주지하며 [음악] 오늘을 걷네 주의 신실한 소망을 [음악] 깊이 나으며 주 예수의 풍요를 [음악] 채워하네. 하나님의 [음악] 찬녀로 명 지켜가며 기뻐진 [음악] 삶을 >> 우리 주님께 드립니다. 우리 한번 더 매일 마주한 >> 매일 [음악] 마주한 슬픔을 겨하가며 주 예수의 [음악] 마음을 달아가멘. 두려운 거마 [음악] 주가 동행하니 주지하며 오늘 건네 [음악] 주의 신실한 소망을 기다으며 [음악] 주 예수의 풍요를 채어 하네. [음악] 하나님의 자녀로 명예 지켜가며 [음악] >> 오늘이 예배를 사모하시며 우리 믿음으로 한번 더 고백하며 주님께 나아갑시다. 매일 마주한 [음악] 매일 마주한 슬픔을 엮겨 [음악] 나가며 주 예수의 마음을 닮아가네. [음악] 두려운 [음악] 거 주가 동행하 주지하며 주지하며 [음악] 오늘을 광내 [음악] 주의 신실한 소망을 입겨며 [음악] 주 예수의 분를 [음악] 채워하네. 하나님의 [음악] 자녀로 명 지켜 깊어진 [음악] 삶을 기뻐진 삶을 주께 드리네. 아멘. >> 우리 시간 함께 기도하시며 오늘 예배 가운데 더욱 깊이 나아가길 소망합니다. 하나님, 오늘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나아갑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싸우는 자가 아니라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아가는 자들입니다. 주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을 잊지 않게 하시고 오늘이 시간 말씀 가운데 은혜 베풀어 주시며 주의 말씀 앞에 순복하는 은혜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부어주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시면서이 예배를 위해 우리 함께 기도하시며 합심으로 나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자비로 오신 주님이 [음악] 시간 한 기도하며 나갑니다. 주님의 그 사랑 오늘도 없는 그 사랑 의지하며 우리 마음 가운데 찾아와 주신 주님의 그 사랑 없이 받아들이게 하시고 하나님 당연하게 생각하시고 놀라우신 그 사랑 앞에 우리가 순복하게 하시고 그 안에 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흔들리고 여전히 물러고 무력한 우리의 마음 가운데 [음악] 주님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주님 우리는 우리의 힘과 능력을 의지할 수 없으 기록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아갑니다. 주여 우리 가운데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다른 것들이 의지하지 않게 하여 주시고 주님의 사랑을 지어 주시옵소서. 주님 아버지 하나님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옵서 우리 마음 가운데 주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음악] 주님의 말씀 듣는 마음의 같이 허락하여 주옵소서. 여전히 지시고 무너진 우리의 마음이 주님의 천사 [음악] 채우시고 말씀 앞에 거룩히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 믿음의 담대함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세우시 아버지 주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변함 없으신 사랑으로 오늘이 시간 더욱 깊어지고 넓어지길 소망합니다. 오늘이 시간 우리가 주님의 말씀 앞에 섭니다. 우리의 존재 가치가 얼마나 큰지 말씀 앞에 다시 한번 기쁨과 승리를 누리는 시간 되게 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모든 영광 주님께 올려 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 [음악] >>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서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박수] >> [박수] >> 요한복음서 13장 1절을 보면 예수께서 숨을 거두시기 전에 유월절 마지막 유월절을 보내십니다. 거기에 예수께서 자기가이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에게 갈 줄로 아시고 그다음에 성경 구절이 이렇게 되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우리가 많이 들었지만 좀 독특한게 있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다고 하지 않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셨다고 그렇게 사랑의 범위를 제안합니다. 같은 13장 요한복서 13장 34절 가면 이렇게 돼 있습니다. 가론 유다가 예수님을 팔로 나가고 빈 자리에 예수께서 남은 제자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세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서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이 요한복음서의이 사랑의 말씀은 공간복음 다시 말해서 마태, 마가, 누가 복음서와 비교할 때 굉장히 독특합니다. 왜냐면 제가 지금 말씀드린 마태, 마가, 누가는 이웃 사랑을 강조해서 예수께서 말씀하시거든요.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려. 그렇게 말씀하시고 또 마태복음서에서는 여러분 잘 아시는 산상순에 있는 말씀처럼 참 불가능한 요구를 우리한테 하십니다. 그것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해라. 그러니까 공간복음은 우리에게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고 우리가 할 수 없을 것 같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쉽지가 않죠. 그런데 원수를 사랑하라고까지 말씀하시니까 우리가 그 말씀을 도저히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방금 읽어 드린 요한복음서의 말씀은 어떤가요? 예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지 않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했다고 그 사랑의 폭을 굉장히 제안하십니다. 나아가서 요한복음서의 그 제자들을 보고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내가 세 계명을 너희에게 준다라고 말씀하시고서는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서 15장에 보면 예수께서 내 안에 거하라. 내 사랑 안에 거하라.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언뜻 이상하게 들립니다. 요한복음서에 있는 말씀과 마태, 마가, 누가에 있는 사랑의 범위와 대상이 사뭇 다르지요. 그래서 예전에 어떤 한 학자는 요한복음서를 보고 윤리의 실패라고 불렀습니다. 기껏해야 자기네들끼리 사랑할 것이냐. 그렇게 비판했죠. 이제는 그런 비판도 잘 세상에서 교회를 향해서 안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자기들끼리만 사랑한다. 그렇게 한 3, 40년 전에 그렇게 비판했습니다. 요즘은 교회도 서로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런 비판도 하지 않죠. 또 한 3, 40년 전만 해도 교회라는 성벽에 갇혀서 고통받는 이웃을 외면하는 폐쇄적인 집단이다. 이런 비판도 했습니다. 기독교인 저들의 사랑은 자기들에게만 갇혀 있다. 그런 말도 하고요. 요즘은 서로 사랑하지도 않으니까 교회 교인들이 교회들 끼리도 서로 외면하니까 이런 비판조차 요즘은 하지 않죠. 그런데 여러분 언뜻듣기에도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요한복음 3장 보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다고 하는데 공간복음 보면 예수께서 이웃 사랑하라고 하고 또 우리가 묻칠 것 같은 원수 사랑하라고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요한복음서에서는 예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말씀하시고 또 내 제자들 너희들끼리 서로 사랑하라고 그렇게 이렇게 말하니까 말 말이죠. 저는 오늘이 말씀 요한복음서의 말씀 예수께서 하신 말씀 내 안에 거하라 내 안에 머물러라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라고 하는 말씀 그리고 너희에게 세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해라.이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나를 살리고 또 이웃을 살리고 또 교회를 살리는 말씀이라고 아주 절실하게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고 서로 사랑하면서 선교했으면 좋겠다. 그런 말씀도 또 드리고 싶습니다. 일단 이웃 사랑이나 원수 사랑 보면 우리가 이제 이웃 사랑 황금률이라고 하는데 거기 보면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해라 그렇게 말씀하시잖아요. 그러면 기준이 내가 되는 거죠. 내가 예수께서 우리에게 어 네가 너를 사랑하잖아. 그 사랑처럼 이웃을 사랑해. 이렇게 말씀하시니까 이웃 사랑의 전제는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렇죠? 그런데이 기준 자체가 다시 말해서 내가 나를 제대로 사랑하지 않으면, 내가 나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면 내가 나를 경멸하면 내가 나에게 분노해 있으면 내가 나를 학대하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한다고 하면 이웃도 이웃에게 향해서도 분노하고 경멸하고 라고 혐오하겠죠. 반대로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병적으로 숭배하고 있다면 우리 자신의 모습과 우리 자신의 평판과 우리 자신의 성과에 병적으로 집착하고 있다면 그것도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제대로 사랑하지 않는 것이니까 그런 방식으로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면 이웃에게 재앙이겠죠. 저는 오늘 우리가 다 알다시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잊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모릅니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법을 잘 모릅니다. 그러니 어떻게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주머니가 비었는데 어떻게 가련한 사람을 위해서 돈을 나눠 줄 수 있겠습니까? 내 영혼이 공허하고 허무한데 내가 나를 향한 사랑이 건강하지 않은데 어떻게 타인을 사랑하겠습니까? 원수 사랑이든 서로 사랑이든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고 사랑받는 존재로 먼저 건강하게 세워야 하는데 우리는 정말 그것을 잘하고 있는지요? 자신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이 부서져 있는 상태에서 사랑을 한다고 그런 생각을 할 때 저는 예전에 잘잘법에서도 한번 말씀드린 한 영화가 떠오릅니다. 1993년도에 본 영화인데요. 그 연도수를 왜 정확하게 기억하냐면 제가 제대했을 때거든요. 때 원제로는 박싱헬레나라고 하는 영화입니다. 우리나라 말로는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 이렇게 잘못 번역됐습니다. 그렇게 번역돼서 사랑과 로맨스의 영화인 줄 알았더니 굉장히 아 비극적인 영화였거든요. 영화는 한 잘생기고 부유한 외과 의사 닉버너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이은 외과 의사예요. 아주 잘 나가는 외과 의사입니다. 잘생겼어요. 남자 주인공 배우가 잘생겼어요. 그리고 의사로서 성공했기 때문에 저택에 삽니다. 그러니까 잘생겼죠. 직업도 좋고 명성도 얻었어요. 그런데이 닉의 내면에는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은 상처가 너무 큽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닉을 버리고 떠났거든요. 그리고 어 자기를 떠난 어머니. 어머니가 자기를 떠났는데 그것은 어머니에게 자기가 적절한 행동을 하지 못해서 자기가 버림받았다고 하는 극심한 상처와 외로움으로 가득쳐 있었습니다. 그런데 살다가 헬레나라고 하는 아주 멋진 여인을 보게 되었습니다. 닉은 오로지 헬레나를 자기 집에 초대하기 위해서 정말 어마어마한 파티를 엽니다. 어택에서 성대한 파티를 열죠. 헬레나는 파티에 왔지만 닉이 자기 자신에게도 잘 못하는데 어떻게 헬레나에게 잘하겠습니까? 자기 자신에게도 자기 자신도 잘 못대하는 사람이 어떻게 남에게 잘돼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헬레나는 자기 자신에게 매우 서툴고 거칠게 다가오는 릭을 거의 조롱하다시피 하고 파티 끝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때 집박에서 끔찍한 교통 사고 소리를 듣지요. 닉게 나가 보니까 헬레나가 뺑손이를 사고를 당해서 다리를 심하게 다친 것을 발견합니다. 닉은 그 여인을 병원에 데려가는 대신에 자기 집으로 데려옵니다. 그리고 그 여자 배우가 굉장히 연기를 잘했는데 그 참담한 얼굴 표정을 클로즈 합니다. 가까이서 비춰 줍니다. 줌 아웃하니까 두 다리가 잘려 있습니다. 닉은 헬레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이제 아무데도 갈 수 없어. 당신은 오직 나만의 것이야. 그리고 닉은 정성을 다해서 헬레나를 돌보기 시작합니다. 헬레나는 계속 닉을 경멸하고 모욕하지만 탈출을 시도하지만 닉은 끝까지이 여인을 돌보려고 합니다. 어느날 좀 돌보니까 헬레나가 자기의 마음을 넣듯하게 착각한 거예요. 그래서 헬레나를 안으려고 이렇게 다가갔는데 헬레나가 옆에 있는 물건으로 닉을 때렸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장면도 너무 선명하게 기억이 납니다. 그때부터 처참한 얼굴로 영화는 헬레나의 얼굴을 비춰 줍니다. 줌 아웃하니까 닉을 내리쳤던 두 팔을 외과 위사한 닉은 잘라 버렸습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비너스 비너스 상하 아시죠? 아 다리 없고 팔 없는 살아 있는 비노 헬레나를 만들고 목욕시켜 주고 밥먹여 주고 완벽하게 소유하려고 합니다.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상처하고 엄마가 내가 부족해서 떠났어 라라고 하는 자기 경묘를 하고 어떻게든 자기가 사랑한 사람을 내 옆에 두고 싶은데 어린 닉은 그걸 하지 못했지만 어른이 된 외과 의사 닉은 자기가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여인의 두 다리와 두 팔을 자름으로써 자기 옆에 이렇게 두도록 그렇게 했다는 영화입니다. 이후 결말은 수포일이 될까 봐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닉은 헬레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전까진 말이죠. 이건 자기 경멸의 형 형태인데 자기 혐오와 자기 학대 형태인데 그것은 오늘날 많은 현대인들이 겪는 그런 고통이죠. 자기 검열, 자기 학대, 자기 소진입니다. 우리나라의 철학자인 한병철이라고 하는 분은 과거 사회가 있고 교율이 있고 이율에 인간이 자기 자신을 맞춰 가면서 자기 자신을 소진시키고 자기 자신을 힘들게 하는 그런 규율 사회였다면 오늘날의 성과 사회는 예전에는 너는 뭘 하면 안 돼 뭘 하면 안 돼 이렇게 어떤 타율이 바뀌 있는 것이 그 사람의 삶을 소진시키는 거라면 오늘날의 성과 사회에서는 너는 할 수 있다. 유캔 do it 정신이 그 긍정성의 구호가 우리를 통제한다고 얘기합니다. 예전에는 우리의 성과 관리자가 외우 있었다면 이제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성과 관리자이자 착취자가 된다는 겁니다. 한 직장인이 주말도 반납하고 야근하고 스스로를 몰아붙입니다. 나는 할 수 있어. 누구처럼 성공하고 싶어? 그러다가 성과가 떨어지거나 프로젝트가 실패하면 그 사람은 상사나 동료나 시스템을 점검하기보다는 곧바로 자기 경물로 들어갑니다. 나는 쓸모 없어. 나는 무능해 하고 자기 자신을 혐오하고 경멸합니다. 학업에 예도 있는데요. 제가 학교에 있다 보니까 학생들의 자기 소개서를 볼 기회가 꽤 있거든요. 거기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학생들은 끊임없이 자기 삶에 자기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 상품인지를 여러 스펙을 통해서 보여 주려고 합니다. 저는 당신이 뽑을 만한 훌륭한 상품이에요라고 얘기합니다. 그렇게 다른 사람 앞에 자기를 훌륭한 상품으로 내놓는 훈련을 하면서 자기가 자기 자신을 인격으로 대하는 기회는 점차 사라지는 거죠. 더 비싼 가격에 활력할 상품으로 자기 자신을 만들어 가는 거죠. 프리랜서하고 자영업자들도 마찬가지죠. 나는 할 수 있어라는 구호 아래 스스로 소진시키다가 무엇인가 잘 안 되면 자기 내가 존재가치가 없구나 하고 자기 경멸에 들어갑니다. 이것이 한 극단에 있다면 다른 하나한 극단은 병리적인 나르시티시즘 자기 집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그리스도 신화 속에 나르키소스는 물에 비친 자기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자기 자신과 물에 비친 자기 자신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잖아요. 그래서 결코 거기를 떠나지 못하고 죽는 이야기긴데 현대 심리학자 하인스코 같은 분은 이런 나르시즘은 사랑이 자기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감당할 수 없는 내면의 공허함을 감추기 위한 필사적인 방어 기재라고 얘기합니다. 저는 그 진단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타인을 인격으로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타인은 자기의 위대함을 비춰 주는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SNS 중독 많이 하는데요. 자신의 화려한 휴가, 가피싼 음식, 행복해 보이는 순간만을 편집해서 전시하죠. 자기의 삶을 사랑하는 걸까요? 아니면 타인의 좋아요를 필요로 하는 걸까요?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하는 걸까요? 그가 사랑하는 것은 자기 삶이 아니라 남들의 주목일 수 있습니다. 여기 부모님들께 계시는 거 같은데요. 자녀를 명문대에 보내려고 하는 어머니나 아버지의 마음은 자녀의 성취 때문인가요? 아니면 명문대의 자식을 보낸 부모인 애가 더 중요한 것일까요? 저도 아들 하나 딸 하나 있으니까요. 가끔 헷갈리더라고요. 내가 자기 자신, 내 자식을 사랑해서 말하는 건지 아니면 누군가한테 말할 때 내 자식이 부끄러우면 내가 부끄러울까 봐 걱정하는 건지. 저 스스로도 한번 생각해 보게 되더라고요. 그런 그렇다면 자식의 성공이 나의 위대함을 그것을 위해서 내가 내 자식의 자식을 몰아붙인다면 나는 자신을 사랑하는게 아니라 사실은 내 가치를 증명해 줄 트로피가 필요한 거겠죠. 사랑하는 능력이 결려된 사실은 나르시스트는 자기의 불행과 공허한 내면을 애써 감추려고 하는 발보등일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이 이 두 병리 하나는 자기 경멸 다른 하나는 병적인 자기 집착 이것이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의 자아에서 온 거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 자의 이름을 제가 성과주의적 자아고 불러 보겠습니다. 나의 가치는 나의 행위, 나의 성과, 나의 업적, 나의 인기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하는 자기에 대한 상입니다. 저는 역시 잘잘법사 있겠는데 데이빗 리카도라고 하는 경제학자의 이론을 빌려서 노동 가치설이라는 말을 높이기를 좋아합니다. 노동 가치 서른 상품의 가치는 그 상품을 생산하는데 투입된 노동의 양에 의해 결정된다라는 건데 성과주의적 자안은 뭐냐? 나의 가치는 나의 성과와 나의 업적과 유용성과 매력대 매력으로 결정된다라고 하는게 성과주의적 자하입니다. 그래서 나르시스트는 내 노동이 내 성과가 나의 높은 가치를 성공적으로 만들어 준다고 착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자식도 아내도 남편도 부모님도 모두 나의 가치를 방어하기 위한 수단이 되겠죠. 반대로 자기 경멸자는 가치 생산에 실패했기 때문에 스스로 무가치한 존재라고 스스로를 판결합니다. 그래서 나르시스트나 그리고 자기 경멸자나 모두 이런 성과주의적 자아라고 하는 데에서 그 불행이 온다고 그렇게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어둠에 빛이 있으라고 요한복음서를 통해서 말씀합니다. 여기에 위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 19절에 보면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이렇게 선언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저는 이것을 사랑의 선재성이라고 얘기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있거나 성과가 있거나 매력이 있거나 무언가 무언가를 성취하기 이전에 일방적으로 우리가 사랑받았고 바로이 사랑받은 것에서 우리의 가치가 생성된다고 하는 사랑 가치서를 말하고 싶습니다. 나는 무엇을 했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았기 때문에 가치가 있습니다. 나는 지금 병상에 누워 있어서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지만 내 자식이 내 손자 손녀가 내 친구가 나를 사랑하고 나에게 사랑의 눈길를 보내는 한 나는 같이 있습니다. 용도를 다 했지만 낡았지만 거기에 누군가가 사랑을 부여하면 그것은 사랑의 가치가 있습니다. 제게는 아주 좋은 한정판 레이저 포인터가 있습니다. 어어 어떤 거는 제 이름도 써 있는 아주 좋은 회사에서 받은 겁니다. 다른 하나는 어디 이름도 모르는 저가 레이저 포인터입니다. 둘 중에 하나 고드를 하면 노동 가치설 성과주적 자하는 리미티드 에디션을 골립니다. 그런데 그 저가는 제 딸이 생일 선물로 준 겁니다. 둘 중에 하나가 파악돼야 된다면 저는 뒤도 안 돌아보고 리미티드 에디션을 포기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면이 가치가 우리에게 이렇게 주어졌는데 어떻게 해야 되는가? 딱 하나만 하면 됩니다. 수용하는 겁니다. 나는 사랑받고 있다라는 복음을 수용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결코 쉽지 않습니다. 내가 사랑받고 있다. 그래서 나의 가치가 생선된다라고 하는 그 복음을 사람들은 받아들이기 너무 힘들어합니다. 파울틸리라고 하는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가 있는데 이분은 어떻게 얘기하냐면 죄는 단순한 도덕적 일탈리나 행동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과 다른 사람과 심지어 나 자신과 소외되고 분리된 상태를 말한다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과도 분리되고 다른 사람과도 분리되고 내 자신과도 분리됐으니까 내가 너무 공허해요. 왜냐면 어떤 사랑도 받지 못하거든요. 그 사랑이 없는 빈자리, 허무, 껍데기인 거 같은 내 자신의 가치를 내 성과로 채우려고 노력하는 거란 말이죠. 그런데 은혜라고 하는 건 뭐냐면 우리가 다시 한번 하나님의 하나님과 다시 결합하고 내 이웃과 다시 결합하고 내 자신과 화해하는 겁니다. 그분은 이렇게 얘기하는데요.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파고들며 마치 어떤 목소리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당신은 받아들여졌습니다. 우리는 이걸 잘 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나는 받아들여셨습니다. 혹시 그 연애 결혼하시거나 연애를 해 보셨다면 연애 성공하시거나 뭐 실패하셨더라도 연애 경험이 있다고 가정하면 내가 고백했을 때 내 고백이 받아들여졌던 순간을 생각해 보세요. 혹은 누가 나에게 사랑을 고백해서 내가 그 사람에게 받아들이었던 그 순간을 생각해 보시죠. 파울틀린 말을 계속 이렇게 읽습니다. 당신보다 더 위대한 존재가 당신을 받아들였습니다. 지금은 그 이름을 묻지 마십시오.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하려 하지 마십시오. 아무것도 구하지 말고 아무것도 수행하려 하지 말고 아무 의도도 갖지 마십시오. 단지 당신이 받아들여졌다는 그 사실만을 받아들이십시오. 이것이 요한복음이 하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거하라. 예수께서 내 사랑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셨지. 그다음에 내 사랑 안을 맛봤지. 그러니까 뭐 해라 하지 않고 우리에게 주신 명령은 내 사랑 안에 거하라. 우리가 이걸 잘못하죠. 파울틀리의이 말을 저는이 30년 전에 읽었는데 오늘이 자리를 위해서 다시 한번 읽으면서 감격하게 됐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마십시오. 단지 당신이 받아들여졌다는 그 사실만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니 우리가 이렇게 생각 나의 가치는 나의 불완전한 성과가 아니라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신실함에 근거해 있다. 그렇게 확신하는 겁니다. 나의 자아가 내 성취에 달려 있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내 가치를 지지해 주고 계신다. 그래서이 사랑같이 저를 사랑 때문에 내가 같이 있다라고 하는 이것을 깊이 받아들이면 나를 내 스를 경멸하게 했던 경멸적 자하나 나르시스타에게서 벗어나게 되죠.이 이 복음은 너는 너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아니 너의 실패 이전에 이미 무한한 가치가 있다고 선표합니다. 그니까 여러분 여기 계시는 분들 중에 자기 경멸자 계시죠? 자기 학대하는 분들. 저는 둘 중에 어느 거 따진 가깝냐면 자기 경멸자에 가까웠습니다. 그거는 누가 40대 중반까지 그랬습니다. 사실입니다. 살 때 중반까지 저는 자기 경멸자에 가까왔습니다. 아 우리는 받아들이셨습니다. 자기를 병리적으로 집착하는 나루시스트에게 이렇게 얘기하겠습니다. 너의 성공이 너의 가치를 결정하지 않는다. 이미 너의 가치는 사랑으로 주어졌다. 그러니 그다음 말은 더 이상 너의 위대함을 증명하려고 타인을 도구화하지 마라. 너의 자식 도구화하지 마. 너의 가치를 증명하려고 너의 아들 딸을 명문데 보내려고 했쓰지 마. 그냥 자식을 그냥 사랑해. 그렇게 아마 자기 안에서 나오는 목소리를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미 사랑받았으니 누군가를 도구화해서 자기 자신을 입증하려고 하지 마십시오.이 이 선재적 사랑,이 사랑같이 설,이 성과주의적 자를 넘어서서 저는 이것을 사랑받은 자라고 불러보고 싶습니다. 여기서 뭐가 나오냐? 존재론적 안정감이 나옵니다. 저는이 말씀을 너무 좋아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제발견한 것이 종교 계획을 했던 마틴 루터입니다. 마틴 루터는 성과주의적 자, 성과주의적 자로 당시의 신앙인들을 가르쳤던 가톨릭의 잘못된 잘못된 교리를 어 통해서 자기 경멸자, 자기 혐오자가 됐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의로움에 도달하려고 하는 마음으로 고행하고 금식하고 수천번의고해 성사를 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에게 인정받으려고 했습니다. 유명한 얘기가 있지 않습니까? 새벽부터 밤까지고해 성사를 하는 겁니다. 말티루터가고해 성사 신부에게 아니고해 성사를 그렇게 아침부터 밤까지 하는데 죄는 도대체 언제 짓죠? 놀랍지 않습니까? 아침부터 밤까지 고회 성사를 하는데 도대체 죄를 언제 짓는다는 건가요? 마틴 루터는 하나님의 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의에 도달할 만한 의를 달성해야 한다고 여겼죠. 그래서 스스로를 경멸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깨달았습니다. 아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뭘 하는 것하고 아무 상관이 없구나. 먼저 우리를 사랑한다고 선언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셨구나. 그 생각 덕분에 그 깨달음 덕분에 루터는 끔찍한 자기 경멸의 굴러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증명하려고 애을 필요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래서 기독교의이 복음을 복음이 오늘날 많이 사라진 거 같아서 아주 고리타분하고 오래되고 이미 수천번 수만 번 들어오셨겠지만 우리가 지난 2 30년간 우리 한국 교회가 이것을 잊어버렸고 잃어버렸다고 생각해서 오늘 여러분과 같이 나누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조건부로 사랑받는 존재가 아닙니다. 아까 힐리의 말대로 지금 아무 생각도 하지 마세요. 어떤 의도도 갖지 갖지 마세요. 어떤 계획도 하지 마세요. 지금이 순간은 그저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들였다는 사실만을 받아들이세요. 우리는 늘 조건부 사랑에 살았거든요. 넌 무엇을 할 때만 같이 있어. 넌 뭘 할 때만 뭘 성취할 때만 같이 사랑받아. 아,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거절함으로써 세상과 다른 자기 자신, 교회라는 공동체를 끌려갑니다. 교회는 바로 그것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계속 성과주의적 자로 우리 스스로를 길들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