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잘법 부흥회 설교] 요한복음 위에 세우는 특별한 자기 사랑법ㅣ김학철 교수 잘잘법 258회
채널: 잘잘법 |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BzPraGN_G9s | 길이: 56:49
요약
🎯 TL;DR — 김학철 교수는 요한복음의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공관복음의 이웃·원수 사랑과 다른 이유를, 자기 자신을 먼저 사랑할 줄 알아야 이웃도 사랑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풀어내며, 그 사랑의 근거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랑의 선재성에서 찾는다.
📌 핵심 논지 — 요한복음의 사랑은 공관복음(이웃 사랑, 원수 사랑)과 달리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과 "서로"로 범위가 제한돼 보이지만, 이는 윤리의 실패가 아니라 건강한 자기 사랑이 없이는 이웃 사랑도 불가능하다는 통찰을 담고 있다는 것이 화자의 주장이다. 자기 경멸과 병적 나르시시즘은 모두 "성과주의적 자아"에서 비롯되며, 해법은 "내가 이미 사랑받은 존재"라는 복음을 수용하는 데 있다고 강조한다.
🗺️ 영상 구성
- 요한복음 13장의 독특한 사랑 표현 제시 (공관복음과 비교)
- 요한복음에 대한 과거 비판("윤리의 실패") 소개
- 이웃 사랑의 전제 = 자기 사랑 → 영화 《박싱 헬레나》 예화
- 현대인의 두 병리: 자기 경멸 vs 병적 나르시시즘 → 한병철의 '성과 사회' 인용
- 성과주의적 자아 진단 → 요한일서 4:19 "사랑의 선재성" 제시
- 폴 틸리히 인용: "당신은 받아들여졌습니다"
- 마틴 루터의 회심 사례
- 사랑받은 자의 특징: 존재론적 안정감, 자존감, 회복탄력성
- 결론: 사랑이 곧 선교(요 13:35)
━━━ 본문 ━━━
요한복음의 독특한 사랑 표현 요한복음 13장 1절에서 예수는 "세상"이 아니라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셨다고 표현되며, 13장 34절에서는 유다가 나간 뒤 남은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신다. 화자는 이것이 이웃 사랑과 원수 사랑을 명한 마태·마가·누가복음과 비교할 때 사랑의 범위가 뚜렷이 제한된다고 지적한다. 과거 한 학자는 이를 두고 요한복음을 "윤리의 실패"라 불렀고, 30~40년 전 한국 교회는 "자기들끼리만 사랑한다"는 비판을 받았다고 화자는 언급한다.
자기 사랑이 이웃 사랑의 전제다 황금률("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의 기준은 '나'이므로, 내가 나를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면 이웃 사랑도 왜곡된다고 화자는 말한다. 자기를 경멸·학대하면 이웃에게도 분노·경멸로 향하고, 반대로 자기를 병적으로 숭배해도 마찬가지로 건강하지 못한 사랑이 된다는 것이다. 화자는 "내 주머니가 비었는데 어떻게 가련한 사람에게 돈을 나눠줄 수 있겠는가"라는 비유를 든다.
영화 《박싱 헬레나》 예화 1993년 영화 Boxing Helena(국내 번역 제목: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를 인용한다.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상처를 가진 외과 의사 닉은 헬레나를 사랑한다며 사고로 다친 그녀를 병원 대신 자기 집으로 데려와 다리를, 이후 팔을 차례로 절단해 곁에 두려 한다. 화자는 "닉은 헬레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전까지 말이죠"라며, 자기 경멸이 곧 타인을 소유·통제하려는 왜곡된 사랑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한다.
현대인의 두 병리 — 자기 경멸과 나르시시즘 철학자 한병철의 '성과 사회' 개념을 빌려, 예전 사회는 타율(억압)이 인간을 소진시켰다면 오늘날은 "너는 할 수 있다"는 긍정성의 구호가 스스로를 착취자로 만든다고 설명한다. 직장인의 자기 착취, 학생들의 자기소개서(자신을 '상품'으로 포장), 부모의 자녀 명문대 집착 등이 예로 제시된다. 심리학자 하인즈 코헛을 인용하며 나르시시즘은 "감당할 수 없는 내면의 공허함을 감추기 위한 필사적 방어 기제"라고 설명한다. 화자는 이 두 병리(자기 경멸/나르시시즘)가 모두 "성과주의적 자아"(나의 가치는 나의 성과·업적·매력에 의해 결정된다는 자기관)에서 비롯된다고 규정한다.
사랑의 선재성 — 성과주의를 넘어서 요한일서 4장 19절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를 근거로, 화자는 이를 "사랑의 선재성"이라 명명한다. "나는 무엇을 했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았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는 "사랑 가치설"(데이비드 리카도의 노동가치설에 빗댐)을 제시하며, 딸이 준 저가 레이저 포인터와 회사 한정판 포인터 중 저가 포인터를 택하겠다는 개인적 일화로 설명한다.
폴 틸리히와 마틴 루터 신학자 폴 틸리히를 인용해, 죄란 도덕적 일탈이 아니라 하나님·타인·자기 자신과의 분리 상태이며, 은혜는 그 결합을 회복하는 것이라 설명한다.
"당신은 받아들여졌습니다. 지금은 그 이름을 묻지 마십시오. 아무것도 하려 하지 마십시오. 단지 당신이 받아들여졌다는 그 사실만을 받아들이십시오."
마틴 루터의 사례도 제시된다. 가톨릭의 성과주의적 교리 아래 고행·금식·수천 번의 고해성사로 자기 경멸에 빠졌던 루터가, 구원이 자신의 행위와 무관하다는 깨달음을 통해 자기 경멸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사랑받은 자의 특징 화자는 사랑을 수용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존재론적 안정감"을 여러 특징으로 설명한다: 외부 평가에 덜 의존하는 자존감(자존심과 구별), 자기 단점의 수용, 타인 비교에서의 자유, 세상을 "위험한 시댁"이 아닌 "엄마 집"으로 보는 안전감, 친밀한 관계 형성 능력, 높은 회복탄력성, 실패에 대한 낙관적 태도 등이다. 반대로 성과주의적 자아를 가진 이는 타인의 비판을 존재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여 관계에서 쉽게 적을 만든다고 설명한다.
사랑이 곧 선교다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를 들어, 우리는 스스로 사랑을 생산하는 공장이 아니라 사랑을 전달하는 통로일 뿐이라고 말한다. 요한복음 13장 35절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내 제자인 줄 알리라"를 근거로, 변증이나 도덕적 우월함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 안의 '서로 사랑'이야말로 선교의 핵심이라고 결론짓는다.
💬 결정적 발언
"우리는 조건부로 사랑받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 나라 사람들은 자존심은 센데요, 자존감이 낮아요." (아시아 축구 국가대표 코치의 발언 인용)
⚖️ 화자가 다룬 반론·한계
- 과거 요한복음에 대한 "윤리의 실패", "폐쇄적 집단" 비판을 스스로 소개하고, 오늘날은 그런 비판조차 하지 않을 만큼 교회의 사랑 실천이 약화됐다고 자문한다.
- "그러면 선교는 접어둘 것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고, 사랑이 곧 선교라는 답으로 이어간다.
🧩 핵심 용어
- 사랑의 선재성: 우리가 사랑받을 자격을 갖추기 이전에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셨다는 개념
- 성과주의적 자아: 나의 가치가 성과·업적·매력·인기로 결정된다고 여기는 자기관
- 존재론적 안정감: 외부 평가와 무관하게 사랑받는 존재로서 느끼는 내적 확신
🔎 보완 & 확인
- 배경 보완: 영화 《박싱 헬레나(Boxing Helena)》는 1993년作으로 국내에는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라는 제목으로 소개됐으나, 원제와 내용은 로맨스가 아닌 감금·신체 절단을 다룬 심리 스릴러다. 국내 개봉 제목이 내용과 크게 어긋나는 사례로 화자가 직접 언급한 내용이다.
- 사실 유의점: 폴 틸리히의 설교 "You Are Accepted"는 실제 저명한 신학 텍스트이며 인용 취지는 자막과 부합하는 것으로 보이나(추정), 정확한 원문 문구는 번역·재구성 과정에서 화자의 표현이 가미됐을 가능성이 있다. 한병철의 '성과 사회(피로사회)' 개념 인용도 자막 상 취지는 부합하나 원저 문구 그대로는 아닐 수 있어 확인이 필요하다.
- 분량 유의: 제공된 자막이 한 장로의 간증 일화(기도원에서의 치유 체험) 도입부에서 끊겨 있어, 영상의 결말부(간증 전체 내용과 맺음말)는 자막에 포함되지 않았다.
자막 원문 (참고)
Kind: captions Language: ko [박수] 요한복음서 13장 1절을 보면 예수께서 숨을 거두시기 전에 유월절 마지막 유월절을 보내십니다. 거기에 예수께서 자기가이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에게 갈 줄로 아시고 그다음에 성경 구절이 이렇게 되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우리가 많이 들었지만 좀 독특한게 있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다고 하지 않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셨다고 그렇게 사랑의 범위를 제안합니다. 같은 13장 요한복서 13장 34절 가면 이렇게 돼 있습니다. 가론 유다가 예수님을 팔로 나가고 빈 자리에 예수께서 남은 제자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세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서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이 요한복음서의이 사랑의 말씀은 공감 다시 말해서 마태, 마가, 누가 복음서와 비교할 때 굉장히 독특합니다. 왜냐면 제가 지금 말씀드린 마태, 마가, 누가는 이웃 사랑을 강조해서 예수께서 말씀하시거든요.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려. 그렇게 말씀하시고 또 마태복음서에서는 여러분 잘 아시는 산상순에 있는 말씀처럼 참 불가능한 요구를 우리한테 하십니다. 그것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해라. 그러니까 공간복음은 우리에게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고 우리가 할 수 없을 것 같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쉽지가 않죠. 그런데 원수를 사랑하라고까지 말씀하시니까 우리가 그 말씀을 도저히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방금 읽어 드린 요한복음서의 말씀은 어떤가요? 예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지 않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했다고 그 사랑의 폭을 굉장히 제한하십니다. 나아가서 요한복음서의 그 제자들을 보고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내가 세 계명을 너희에게 준다라고 말씀하시고서는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서 15장에 보면 예수께서 내 안에 거하라. 내 사랑 안에 거하라.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언뜻 이상하게 들립니다. 요한복음서에 있는 말씀과 마태, 마가, 누가에 있는 사랑의 범위와 대상이 사뭇 다르지요. 그래서 예전에 어떤 한 학자는 요한복음서를 보고 윤리의 실패라고 불렀습니다. 기껏해야 자기네들끼리 사랑할 것이냐. 그렇게 비판했죠. 이제는 그런 비판도 잘 세상에서 교회를 향해서 안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자기들끼리만 사랑한다. 그렇게 한 3, 40년 전에 그렇게 비판했습니다. 요즘은 교회도 서로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런 비판도 하지 않죠. 또 한 3, 40년 전만 해도 교회라는 성벽에 갇혀서 고통받는 이웃을 외면하는 폐쇄적인 집단이다. 이런 비판도 했습니다. 기독교인 저들의 사랑은 자기들에게만 갇혀 있다. 그런 말도 하고요. 요즘은 서로 사랑하지도 않으니까 교회 교인들이 교회들끼리도 서로 외면하니까 이런 비판조차 요즘은 하지 않죠. 그런데 여러분 언뜻듣기에도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요한복음 3장 보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다고 하는데 공간복음 보면 예수께서 이웃 사랑하라고 하고 또 우리가 묻칠 것 같은 원수 사랑하라고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요한복음서에서는 예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말씀하시고 또 내 제자들 너희들끼리 서로 사랑하라고 그렇게 이렇게 말하니까 말 말이죠. 저는 오늘이 말씀 요한복음서의 말씀 예수께서 하신 말씀 내 안에 거하라 내 안에 머물러라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라고 하는 말씀 그리고 너희에게 세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해라.이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나를 살리고 또 이웃을 살리고 또 교회를 살리는 말씀이라고 아주 절실하게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고 서로 사랑하면서 선교했으면 좋겠다. 그런 말씀도 또 드리고 싶습니다. 일단 이웃 사랑이나 원수 사랑 보면 우리가 이제 이웃 사랑 황금률이라고 하는데 거기 보면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해라 그렇게 말씀하시잖아요. 그러면 기준이 내가 되는 거죠. 내가 예수께서 우리에게 어 네가 너를 사랑하잖아. 그 사랑처럼 이웃을 사랑해. 이렇게 말씀하시니까 이웃 사랑의 전제는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렇죠? 그런데이 기준 자체가 다시 말해서 내가 나를 제대로 사랑하지 않으면, 내가 나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면 내가 나를 경멸하면 내가 나에게 분노해 있으면 내가 나를 학대하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한다고 하면 이웃도 이웃에게 향해서도 분노하고 경멸하고 라고 혐오하겠죠. 반대로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병적으로 숭배하고 있다면 우리 자신의 모습과 우리 자신의 평판과 우리 자신의 성과에 병적으로 집착하고 있다면 그것도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제대로 사랑하지 않는 것이니까 그런 방식으로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면 이웃에게 재앙이겠죠. 저는 오늘 우리가 다 알다시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잊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모릅니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법을 잘 모릅니다. 그러니 어떻게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주머니가 비었는데 어떻게 가련한 사람을 위해서 돈을 나눠 줄 수 있겠습니까? 내 영혼이 공허하고 허무한데 내가 나를 향한 사랑이 건강하지 않은데 어떻게 타인을 사랑하겠습니까? 원수 사랑이든 서로 사랑이든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고 사랑받는 존재로 먼저 건강하게 세워야 하는데 우리는 정말 그것을 잘하고 있는지요? 자신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이 부서져 있는 상태에서 사랑을 한다고 그런 생각을 할 때 저는 예전에 잘잘법에서도 한번 말씀드린 한 영화가 떠오릅니다. 1993년도에 본 영화인데요. 그 연도수를 왜 정확하게 기억하냐면 제가 제대했을 때거든요.데 네. 원제로는 박싱헬레나라고 하는 영화입니다. 우리나라 말로는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 이렇게 잘못 번역됐습니다. 그렇게 번역돼서 사랑과 로맨스의 영화인 줄 알았더니 굉장히 아 비극적인 영화였거든요. 영화는 한 잘생기고 부유한 외과 의사 닉버너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이은 외과 의사예요. 아주 잘 나가는 외과 의사입니다. 잘생겼어요. 남자 주인공 배우가 잘생겼어요. 그리고 의사로서 성공했기 때문에 저택 삽니다. 그러니까 잘생겼죠. 직업도 좋고 명성도 얻었어요. 그런데이게 내면에는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은 상처가 너무 큽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닉을 버리고 떠났거든요. 그리고 어 자기를 떠난 어머니. 어머니가 자기를 떠났는데 그것은 어머니에게 자기가 적절한 행동을 하지 못해서 자기가 버림받았다고 하는 극심한 상처와 외로움으로 가득쳐 있었습니다. 그런데 살다가 헬레나라고 하는 아주 멋진 여인을 보게 되었습니다. 닉은 오로지 헬레나를 자기 집에 초대하기 위해서 정말 어마어마한 파티를 엽니다. 어택에서 성대한 파티를 열죠. 헬레나는 파티에 왔지만 닉이 자기 자신에게도 잘 못하는데 어떻게 헬레나에게 잘하겠습니까? 자기 자신에게도 자기 자신도 잘 못대하는 사람이 어떻게 남에게 잘돼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헬레나는 자기 자신에게 매우 서툴고 거칠게 다가오는 릭을 거의 조롱하다시피 하고 파티 끝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때 집박에서 끔찍한 교통 사고 소리를 듣지요. 닉게 나가 보니까 헬레나가 뺑손이를 사고를 당해서 다리를 심하게 다친 것을 발견합니다. 닉은 그 여인을 병원에 데려가는 대신에 자기 집으로 데려옵니다. 그리고 그 여자 배우가 굉장히 연기를 잘했는데 그 참담한 얼굴 표정을 클로즈 합니다. 가까이서 비춰 줍니다. 줌 아웃하니까 두 다리가 잘려 있습니다. 니은 헬레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이제 아무데도 갈 수 없어. 당신은 오직 나만의 것이야. 그리고 닉은 정성을 다해서 헬레나를 돌보기 시작합니다. 헬레나는 계속 닉을 경멸하고 모욕하지만 탈출을 시도하지만 닉은 끝까지이 여인을 돌보려고 합니다. 어느날 좀 돌보니까 헬레나가 자기의 마음을 넣는 듯하게 착각한 거예요. 그래서 헬레나를 안으려고 이렇게 다가갔는데 헬레나가 옆에 있는 물건으로 닉을 때렸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장면도 너무 선명하게 기억이 납니다. 그때부터 처참한 얼굴로 영화는 헬레나의 얼굴을 비춰 줍니다. 줌 아웃하니까 닉을 내리쳤던 두 팔을 외과 위사한 닉은 잘라 버렸습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비너스 비너스 상 아시죠? 아 다리 없고 팔 없는 살아 있는 비으로 헬레나를 만들고 목욕시켜 주고 밥 먹여 주고 완벽하게 소유하려고 합니다.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상처하고 엄마가 내가 부격해서 떠났어. 라라고 하는 자기 경멸하고 어떻게든 자기가 사랑한 사람을 내 옆에 두고 싶은데 어린 익은 그걸 하지 못했지만 어른이 된 외과 의사 닉은 자기가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여인의 두 다리와 두 팔을 자름으로써 자기 옆에 두도록 그렇게 했다는 영화입니다. 이후 결말은 수포일이 될까 봐 얘기하진 않겠습니다. 닉은 헬레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전까지 말이죠. 닉은 자기 경멸의 형 형태인데 자기 혐오와 자기 학대 형태인데 그것은 오늘날 많은 현대인들이 겪는 그런 고통이죠. 자기 검열, 자기 학대, 자기 소진입니다. 우리나라의 철학자인 한병철이라고 하는 분은 과거 사회가 있고 교율이 있고이 기율에 인간이 자기 자신을 맞춰가면서 자기 자신을 소진시키고 자기 자신을 힘들게 하는 그런 율 사회였다면 오늘날의 성과 사회는 예전에는 너는 뭘 하면 안 돼 뭘 하면 안 돼 이렇게 어떤 타율이 바뀌 있는 것이 그 사람의 삶을 소진시키는 거라면 오늘날의 성과 사회에서는 너는 할 수 있다. 유캔 do it 정신이 그 긍정성의 구호가 우리를 통제한다고 얘기합니다. 예전에는 우리의 성과 관리자가 외우 있었다면 이제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성과 관리자이자 착취자가 된다는 겁니다. 한 직장인이 주말도 반납하고 야근하고 스스로를 몰아붙입니다. 나는 할 수 있어. 누구처럼 성공하고 싶어? 그러다가 성과가 떨어지거나 프로젝트가 실패하면 그 사람은 상사나 동료나 시스템을 점검하기보다는 곧바로 자기 경물로 들어갑니다. 나는 쓸모 없어. 나는 무능해 하고 자기 자신을 혐오하고 경멸합니다. 학업에 예도 있는데요. 제가 학교에 있다 보니까 학생들의 자기 소개서를 볼 기회가 꽤 있거든요. 거기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학생들은 끊임없이 자기 삶에 자기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 상품인지를 여러 스펙을 통해서 보여 주려고 합니다. 저는 당신이 뽑을 만한 훌륭한 상품이에요라고 얘기합니다. 그렇게 다른 사람 앞에 자기를 훌륭한 상품으로 내놓는 훈련을 하면서 자기가 자기 자신을 인격으로 대하는 기회는 점차 사라지는 거죠. 더 비싼 가격에 팔려갈 상품으로 자기 자신을 만들어 가는 거죠. 프리랜서하고 자영업자들도 마찬가지죠. 나는 할 수 있어라는 구호 아래 스스로 소진시키다가 무엇인가 잘 안 되면 자기 내가 존재가 없구나 하고 자기 경멸에 들어갑니다. 이것이 한 극단에 있다면 다른한 극단은 병리적인 나르시티시즘 자기 집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그리스도 신화 속에 나르키소스는 물에 비친 자기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자기 자신과 물에 비친 자기 자신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잖아요. 그래서 결코 거기를 떠나지 못하고 죽는 이야기데 현대 심리학자 하인스코 같은 분은 이런 나르시즘은 사랑이 자기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감당할 수 없는 내면의 공허함을 감추기 위한 필사적인 방어 기재라고 얘기합니다. 저는 그 진단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타인을 인격으로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타인은 자기의 위대함을 비춰 주는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SNS 중독 많이 하는데요. 자신의 화려한 휴가, 가피싼 음식, 행복해 보이는 순간만을 편집해서 전시하죠. 자기의 삶을 사랑하는 걸까요? 아니면 타인의 좋아요를 필요로 하는 걸까요?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하는 걸까요? 그가 사랑하는 것은 자기 삶이 아니라 남들의 주목일 수 있습니다. 여기 부모님들께 계시는 거 같은데요. 자녀를 명문대에 보내려고 하는 어머니나 아버지의 마음은 자녀의 성취 때문인가요? 아니면 명문대의 자식을 보낸 부모인 애가 더 중요한 것일까요? 저도 아들 하나 딸 하나 있으니까요. 가끔 헷갈리더라고요. 내가 자기 자신, 내 자식을 사랑해서 말하는 건지 아니면 누군가한테 말할 때 내 자식이 부끄러우면 내가 부끄러울까 봐 걱정하는 건지. 저 스스로도 한번 생각해 보게 되더라고요. 그렇다면 자식의 성공이 나의 위대함을 그것을 위해서 내가 내 자식의 자식을 몰아붙인다면 나는 자신을 사랑하는게 아니라 사실은 내 가치를 증명해 줄 트로피가 필요한 거겠죠. 사랑하는 능력이 결려된 사실은 나르시스트는 자기의 불행과 공허한 내면을 애써 감추려고 하는 발보둥일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이 이 두 병리 하나는 자기 경멸 다른 하나는 병적인 자기 집착 이것이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의 자아에서 온 거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 자의 이름을 제가 성과주의적 자아고 불러보겠습니다. 나의 가치는 나의 행위, 나의 성과, 나의 업적, 나의 인기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하는 자기에 대한 상입니다. 저는 역시 잘잘법사 있겠는데 데이빗 리카도라고 하는 경제학자의 이론을 빌려서 노동 가치설이라는 말로 붙이기를 좋아합니다. 노동 가치 서른 상품의 가치는 그 상품을 생산하는데 투입된 노동의 양에 의해 결정된다라는 건데 성과주의적 자안은 뭐냐? 나의 가치는 나의 성과와 나의 업적과 유용성과 매력대 매력으로 결정된다라고 하는게 성과주의적 자하입니다. 그래서 나르시스트는 내 노동이 내 성과가 나의 높은 가치를 성공적으로 만들어 준다고 착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자식도 아내도 남편도 부모님도 모두 나의 가치를 방어하기 위한 수단이 되겠죠. 반대로 자기 경렬자는 가치 생산에 실패했기 때문에 스스로 무가치한 존재라고 스스로를 판결합니다. 그래서 나르시스트나 그리고 자기 경멸자나 모두 이런 성과주의적 자아라고 하는 데에서 그 불행이 온다고 그렇게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어둠에 빛이 있으라고 요한복음서를 통해서 말씀합니다. 여기에 위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 19절에 보면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이렇게 선언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저는 이것을 사랑의 선재성이라고 얘기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있거나 성과가 있거나 매력이 있거나 무언가 무언가를 성취하기 이전에 일방적으로 우리가 사랑받았고 바로이 사랑받은 것에서 우리의 가치가 생성된다고 하는 사랑 가치서를 말하고 싶습니다. 나는 무엇을 했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았기 때문에 가치가 있습니다. 나는 지금 병상에 누워 있어서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지만 내 자식이 내 손자 손녀가 내 친구가 나를 사랑하고 나에게 사랑의 눈길를 보내는 한 나는 같이 있습니다. 용도를 다 했지만 낡았지만 거기에 누군가가 사랑을 부여하면 그것은 사랑의 가치가 있습니다. 제게는 아주 좋은 한정판 레이저 포인터가 있습니다. 어 어떤 거는 제 이름도 써 있는 아주 좋은 회사에서 받은 겁니다. 다른 하나는 어디 이름도 모르는 저가 레이저 포인터입니다. 둘 중에 하나 고드를 하면 노동 가치설 성과주적 자하는 리미티드 에디션을 골립니다. 그런데 그 저가는 제 딸이 생일 선물로 준 겁니다. 둘 중에 하나가 파악돼야 된다면 저는 뒤도 안 돌아보고 리미티드 에디션을 포기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면이 가치가 우리에게 이렇게 주어졌는데 어떻게 해야 되는가? 딱 하나만 하면 됩니다. 수용하는 겁니다. 나는 사랑받고 있다라는 복음을 수용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결코 쉽지 않습니다. 내가 사랑받고 있다. 그래서 나의 가치가 생선된다라고 하는 그 복음을 사람들은 받아들이기를 너무 힘들어합니다. 파울틸리라고 하는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가 있는데 이분은 어떻게 얘기하냐면 죄는 단순한 도덕적 일탈리나 행동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과 다른 사람과 심지어 나 자신과 소외되고 분리된 상태를 말한다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과도 분리되고 다른 사람과도 분리되고 내 자신과도 분리됐으니까 내가 너무 공허해요. 왜냐면 어떤 사랑도 받지 못하거든요. 그 사랑이 없는 빈자리, 허무, 꼭대기인 거 같은 내 자신의 가치를 내 성과로 채우려고 노력하는 거란 말이죠. 그럴 때 은혜라고 하는 건 뭐냐면 우리가 다시 한번 하나님의 하나님과 다시 결합하고 내 육과 다시 결합하고 내 자신과 화해하는 겁니다. 그분은 이렇게 얘기하는데요.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파고들며 마치 어떤 목소리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당신은 받아들여졌습니다. 우리는 이걸 잘 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나는 받아들여셨습니다. 혹시 그 연애 결혼하시거나 연애를 해 보셨다면 연애 성공하시거나 뭐 실패하셨더라도 연애 경험이 있다고 가정하면 내가 고백했을 때 내 고백이 받아들여졌던 순간을 생각해 보세요. 혹은 누가 나에게 사랑을 고백해서 내가 그 사람에게 받아들이었던 그 순간을 생각해 보시죠. 파울틀리인 말을 계속 이렇게 읽습니다. 당신보다 더 위대한 존재가 당신을 받아들였습니다. 지금은 그 이름을 묻지 마십시오.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하려 하지 마십시오. 아무것도 구하지 말고 아무것도 수행하려 하지 말고 아무 의도도 갖지 마십시오. 단지 당신이 받아들여졌다는 그 사실만을 받아들이십시오. 이것이 요한복음이 하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거하라. 예수께서 내 사랑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셨지. 그다음에 내 사랑을 맛봤지. 그러니까 뭐 해라 하지 않고 우리에게 주신 명령은 내 사랑 안에 거하라. 우리가 이걸 잘못하죠. 파울틀리의이 말을 저는이 30년 전에 읽었는데 오늘이 자리를 위해서 다시 한번 읽으면서 감격하게 됐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마십시오. 단지 당신이 받아들여졌다는 그 사실만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니 우리가 이렇게 생각 나의 가치는 나의 불완전한 성과가 아니라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신실함에 근거해 있다. 그렇게 확신하는 겁니다. 나의 자아가 내 성취에 달려 있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내 가치를 지지해 주고 계신다. 그래서이 사랑 같이 서를 사랑 때문에 내가 같이 있다라고 하는 이것을 깊이 받아들이면 나를 내 스를 경멸하게 했던 경멸적 자나 나르스타에게서 벗어나게 되죠.이 이 복음은 너는 너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아니 너의 실패 이전에 이미 무한한 가치가 있다고 선표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여기 계시는 분들 중에 자기 경멸자 계시죠? 자기 학대하는 분들. 저는 둘 중에 어느 거 따진 가깝냐면 자기 경멸자에 가까웠습니다. 그거는 누가 40대 중반까지 그랬습니다. 사실입니다. 살 때 중반까지 저는 자기 경멸자에 가까왔습니다. 아 우리는 받아들이셨습니다. 자기를 병리적으로 집착하는 나루시스트에게 이렇게 얘기하겠습니다. 너의 성공이 너의 가치를 결정하지 않는다. 이미 너의 가치는 사랑으로 주어졌다. 그러니 그다음 말은 더 이상 너의 위대함을 증명하려고 타인을 도구화하지 마라. 너의 자식 도구화하지 마. 너의 가치를 증명하려고 너의 아들 딸을 명문데 보내려고 했쓰지 마. 그냥 자식을 그냥 사랑해. 그렇게 아마 자기 안에서 나오는 목소리를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미 사랑받았으니 누군가를 도구화해서 자기 자신을 입증하려고 하지 마십시오.이 이 선재적 사랑,이 사랑같이 설,이 성과주의적 자를 넘어서서 저는 이것을 사랑받은 자라고 불러보고 싶습니다. 여기서 뭐가 나오냐? 존재론적 안정감이 나옵니다. 저는이 말씀을 너무 좋아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제발견한 것이 종교 계획을 했던 마틴 루터입니다. 마틴 루터는 성과주의적 자, 성과주의적 자로 당시의 신앙인들을 가르쳤던 가톨릭의 잘못된 잘못된 교리를 어 통해서 자기 경멸자, 자기 혐오자가 됐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의로움에 도달하려고 하는 마음으로 고행하고 금식하고 수천 번의고해 성사를 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에게 인정받으려고 했습니다. 유명한 얘기가 있지 않습니까? 새벽부터 밤까지고해 성사를 하는 겁니다. 말틴 루터가 고해성사 신부에게. 아니,고해 성사를 그렇게 아침부터 밤까지 하는데 죄는 도대체 언제 짓죠? 놀랍지 않습니까? 아침부터 밤까지 고회 성사를 하는데 도대체 죄를 언제 짓는다는 걸까요? 말틴 루터는 하나님의 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의에 도달할 만한 의를 달성해야 한다고 여겼죠. 그래서 스스로를 경멸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깨달았습니다. 아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뭘 하는 것하고 아무 상관이 없구나. 먼저 우리를 사랑한다고 선언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셨구나. 그 생각 덕분에 그 깨달음 덕분에 루터는 끔찍한 자기 경멸의 굴러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증명하려고 애을 필요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래서 기독교의이 복음을 복음이 오늘날 많이 사라진 거 같아서 아주 고리타분하고 오래되고 이미 수천번 수만 번 들어오셨겠지만 우리가 지난 2, 30년간 우리 한국 교회가 이것을 잊어버렸고 잃어버렸다고 생각해서 오늘 여러분과 같이 나누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조건부로 사랑받는 존재가 아닙니다. 아까 필리의 말대로 지금 아무 생각도 하지 마세요. 어떤 의도도 갖지 갖지 마세요. 어떤 계획도 하지 마세요. 지금이 순간은 그저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들였다는 사실만을 받아들이세요. 우리는 늘 조건부 사랑에 살았거든요. 넌 무엇을 할 때만 같이 있어. 넌 뭘 할 때만 뭘 성취할 때만 같이 사랑받아. 아,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거절함으로써 세상과 다른 자기 자신, 교회라는 공동체를 꾸려갑니다. 교회는 바로 그것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계속 성과주의적 자로 우리 스스로를 길들이라고 얘기하거든요. 그렇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일주일에 한 번, 일주일에 두 번 혹은 매일 새벽 기도로 교회 오면서 뭘 하냐면 절대로 성과주의적 자의 우리 스를 내버려 두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를 계속 이곳에서 확인하면서 교회에서 우리 서로 그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러면 사랑받는 사람, 선재적으로 사랑받는 사람의 특징은 뭘까요? 제가 아까 존재론적 안정감이 말씀을 드렸는데 일단 자신의 가치를 외부의 평가나 성과 타인의 인정이 크게 의존하지 않죠. 그래서 내면의 확신이 참니다. 자존감이라고 하는 것이 생깁니다. 자기가 사랑받으니까요. 어느 한 아시아 국가의 국가 대표 코치로 갔던 축구 국가대표 코치로 갔던 한 분이 한 말씀이 너무 기억이 났는데요. 그 나라 다른 나라 축구 선수들 가르쳐 보니까 어떻습니까라고 하는 질문에 잊지 못할 대답을 한 것을 기억합니다. 그 그쪽 그 나라 사람들은 자존심은 센데요. 자존감이 낮아요. 너무나 좋은 말인 거 같습니다. 너무나 정확한 말이죠. 우리가 성과주의적 자한은 자존심을 내세웁니다.에 그러나 선지적 사랑을 수용한 사람은 자존 자존감이 있습니다. 자기가 사랑받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수용할 줄 압니다. 내 장점뿐만 아니라 내 단점도 받아들입니다. 왜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단점을 인정하기가 싫죠? 내가 완벽해야 수영되기 때문이죠. 그러나 완벽하지 않아도 수영된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받아들이면 인생이 정말 편해집니다. 그럼 제 옆에 있는 저랑 친한 한 교수님 덕분이기도 한데요. 저는 이런 아 제가 자기 경멸자에 비슷하다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냐면 자기 수영하는게 너무 힘들었어요. 왜냐면 내가 결정이 많거든요. 형편 없는 것도 많고 가끔 그런 얘기 하는데요. 저만 그런 거 아닌 줄 압니다. 저도 여기서 그냥 그래서 자기는 별로 그렇게 나쁜 생각 난다고 그런 말씀하시는 분이 있어서 여기 교회 스크린에 그분의 머리 연결해 놓고 센서로 그분이 24시간 하는 모든 생각을 여기 화면으로 비친다고 하면 자신이 있으시냐고 물어본 적에는 있습니다. 자신이 있으신가요? 근데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 나쁜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를 견딜 수가 없죠. 근데 아 제 옆에 오랫동안 같이 있는 한 분인데 그분은 자기 실수를 금방금방 인정하고 돌아서서씩 웃어요. 저는 너무 놀랬어요. 그리고 그분은 건강합니다. 자기를 수행하는 거예요. 왜 그럴까? 그분은 자신이 사랑받는다는 걸 아는 거 같아요. 우리 안에 있는 단점 그냥 인정해도 됩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가 가치가 없는게 아닙니다. 위선을 떠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이제 남하고 비교 그만해도 되죠. 하여간에 남하고 비교하면 좋을 것은 별로 없습니다. 남하고 비교하면 한 번 행복하고 한 열 번은 슬픕니다. 굳이 비결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리고 그런 분들을 보면 제가 아까 제 옆에 오래 뒀던 그분 타인에 대한 신뢰가 있어서이 세상을 위험하고 적대적인 곳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안전하고 신뢰할 만한 곳으로 전제하고 살더라고요. 저는 그게 되게 좋았습니다. 제가 그것도 잘법이 한 말씀인데 자유라고 하는 것은 엄마 집에서 사는 거라고. 그게 무슨 뜻이냐면 수집살이 호되게 하는 며느리가 친정한 거랑 똑같다고. 친정 가면 발 뻗고 누워 자잖아요. 엄마 앞에서.이 이 세상은 못 살게 구는 시댁이 아니라 엄마 집이라고 우리가 사는 이곳이 그런데 성과주의적 자는 안절부절해요. 왜냐면 여기가 성과를 내야 할 곳이거든요. 여기는 엄마 집입니다. 우리 인생은 여러분 마음을 놓으세요. 제가 그분하고 같이 저희 집에 간 적 있는데 아무도 없는 줄 알고 그분하고 같이 갔거든요. 근데 말씀도 안 하시고 연락 없이 장모님 와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아니 저 장모님 너무 좋으신 분이기 때문에 저는 괜찮은데 둘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가서 장모님 계시면 이분 불편할 거 아니에요. 조금 아 이거 조금 가야 되나? 근데 놀랍게 저랑 둘을 것처럼 있어요. 이분은 세상이 위험하고 적대적인 것이 아니고 처음은 동료의 장모님도 위험하고 적대적으로 나를 평가하는 누가 아니라 안전하고 신뢰할 만한 누구로 보고 마음이 거기서도 편해요. 저는 그건 너무 인상적이었습니다. 아직 전 그게 그것이 뭘 의미하는지 몰랐습니다. 여러분이 세상을 자꾸 광야로 생각하시거나 시험장으로 생각하시거나 누구는 여기에 큰일 난다고 종말 온다고 급박하다고 여러분을 위협하고 협박하고 또 뭐 얼 을러될 때 그 얼굴에 대고 내 얼굴에 대고 얘기할 수 있어야 됩니다. 아니 여기는 우리 엄마 집이야. 이곳은 하나님이 사랑을 하신 사람들의 곳이야. 여러분 마음을 놓으셔야 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하고 친밀한 관계를 맺는데 어렵지 않습니다. 성과주의적 자아를 가진 사람들은 남하고 관계를 맺는게 어렵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버림 받을까 봐요. 잘 못할까 봐요. 그래서 누군가 관계를 맺으면 자기가 좋으면 과도하게 집착하거나 아니면 회피하기 마련이죠. 관계가 맺어졌다가 끊어질 수도 있지 뭐. 그게 안 되거든요. 그런데 마음을 놓고 살면 그게 됩니다. 사랑을 갈고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이미 내면에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면에 충만하니까 이제 베풀 수 있습니다. 타인주인 주는 호위나 사랑을 의심 없이 감사함에 받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잘 가려야 될 때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세상이나 다른 사람을 향한 마음이 따뜻합니다. 왜냐면 자기가 자기 삶을 따뜻하게 바라봐 줄 수 있으니까요. 왜냐면 내가 하나님에게 수용됐다는 하나님의 따산 눈길과 손길을 수용했으니까요. 실패나 역경이 왔을 때 성과주적 자는 나는 역시 실패했어. 내가 준비가 부족했지 얘기하겠죠.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수용한 사람은 요즘 말로 하면 높은 회복 탄영성을 갖고 있습니다. 정서적으로 안정 돼 있습니다. 냉소주의나 비관주의에 쉽게 빠지지 않고 긍정합니다. 삶은 긍정합니다. 미래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낙관합니다. 자연스럽게 자신감이 있습니다. 타인의 인정을 구하다가 그 사람이 나를 배반하면 비난이나 비판을 하고 어쩔 줄 몰라합니다. 자신의 내가 한 어떤 의견을 비판하면 나에 대한 존재의 비판으로 생각해서 그 사람을 적으로 삼습니다. 그러니까 주변에 원수와 적이 넘쳐나죠. 어떤 분들 만나서 얘기하면 자기가 살아온 얘기인지 자기를 해꽂지했던 사람들의 역사의 이야기인지 모를 때가 있는데 그분들은 그분은 왜 그렇게 피해자로만 살아왔을까요? 참 놀라운 일입니다. 그분은 피해만 받고 살았던 거 같아요. 자기가 가했던 기억은 안 나고 피해 피해받은 기억만 나는 모양인데 왜냐하면 자기가 준 사랑이 늘 배신당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죠. 도전해서 실패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도전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쭉 말씀을 드렸 드렸습니다. 여러분에게이 말씀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으라. 예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계명이 다른 거 아닙니다. 서로 사랑해라.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그다음 말씀이 너무 은혜가 됩니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여러분 2025년 마감하고 2026년 시작하실 때 아무것도 계획하지 마시고 아무것도 의도하지 마시고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시지요. >> 그러면 선교는 접어둘 것인가? 참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계속이 말씀을 상고하게 하는데 우리가 이런 존재론적 안정감을 회복 그 회복했을 때 아버지 품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스스로 사랑을 생산해내는 공장이 아닌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스스로 사랑을 해야 하는 공장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전달하는 통로일 뿐이라는 걸 깨닫게 되죠. 가지는 스스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포도나무에 붙어 있음으로 해서 저절로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의 서로 사랑은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과제 안에 거하는 것으로부터 오는 필현적인 결과일에 뿐이죠. 사랑이 곧 선교입니다. 요한복음서 13장 35절에 보면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서 모든 사람이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이렇게 말씀해 줍니다. 세상은 무엇을 보고 우리를 예수의 제자라고 말하는가? 무엇을 보고 그들은 하나님을 믿게 되는가? 우리의 웅장한 예배당인가? 우리의 유청한 편증인가? 어떤 분들은 간혹 제주위에 예수를 믿을 수밖에 없는 변증이나 논리적 증명을 하면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게 됐다고 믿을 수 있다고 그렇게 말하는 분들을 가끔 보는데 변증은 예수를 믿는데 나아가 예수를 믿게 나아갈 때 있는 장애물을 피하는 정도입니다. 우리가 사회 봉사를 통해서 사람들을 예수를 믿게 할 수 있을까? 우리가 도덕적으로 우월해서 예수를 믿게 할 수 있을까? 예수께서는 단 하나의 말씀을 합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서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교회에서 서로 사랑 서로 사랑의 실험을 하고 서로 사랑의 반문화적 대한공동체를 우리가 이끌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럴 때 사람들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 줄 알고 사랑이 있는 곳에 몰려들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이 말씀을 하면서 한 장로님 이야기가 생각났는데요. 우연히 만난 분입니다. 이사쯤으로 옮길 일이 있어서 분당에서 서울에 있는 저의 집으로 이사쯤을 옮겼는데요. 분당에 잘 둔 건 아닌데 분당에서 어떤 한 가구를 옮기느라고 크지 않는 트럭 하나를 빌렸는데 거기서 그 짐을 싣고 제가 분당해서 그분 운전하시는 분 있고 제가 그 옆에 앉아서 오는데 나이가 그때 한 60대 중반 정도 되신 분 거의 70이 다 되시는 분인데 이제 말씀을 시작했어요. 심심하니까. 근데 이제 뭐 다 아시다시피 자식자랑 먼저 하시고 그래서 자식자랑 잘 듣고 있는데 이러저런 말씀하시다가 그분이 이런 말씀하시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가 교회 장로라고 아이 그러세요. 제가 목사 말 안 하고 있습니다. 아 그러세요 그래서 근데 자기가이 전도를 하고 싶으셨던 분이에요. 그런데 이제 당신이 예수 믿은 얘기를 해 주는 거예요. 자기가 사 하신 얘기를 쭉 한 다음에 예수 믿게 된 얘기를 하는데 이런 겁니다. 당신이이 젊었을 때 운동을 하셔서 몸이 건강했대요. 정말로 그분 지붕기둥 보니 깜짝 놀랬어요. 연세가 60대 거의 후반인데 몸도 크지 않으시거든요. 근데 그 무거운 걸 그냥 번쩍번쩍 들러시는 거예요. 그래서 어 놀랬는데 속으로 자기가 잘못쓴 권투 선수도 하고 힘쓰는 일을 많이 했다고 그런데 어느 날 건강이 갑자기 나빠져 가지고 이게 도저히 고칠 수가 없으니까 그 한 4, 50년 3, 40년 전에는 뭐 했냐면 금식 기도원 기도원 이런데 갔단 말이죠. 거기서 병을 치료한다고 하니까 한 금식기도원을 소개를 받아서 예수 안 믿을 때 아 전혀 안 믿을 때 어떻게든 살아야 되겠으니까 금식 기도원을 갔다는 거죠. 갔는데 어떤 한 여자분이 우연히 만나서 얘기를 하게 됐는데 어떻게 오게 됐냐? 그래서 이렇게 저렇게 돼서 내가 몸이 너무 아파 가지고 여기이 기도관에 기도하면 낳는다고 금식 기도하면 낳는다고 그런 얘기 들어서 왔다고 그렇게 얘기를 했더니 그 처음 보는 그 기도원에 계시던 그 여성분이 뭐라 그러냐면 이렇게 얘기했대요. 아 그러시냐고 그러면 내가 같이 금식기도 해 드리겠다고 그런 얘기를 하셨다는 거예요. 근데 그분은 원래 불교적 배경이 있는 분인데 제가 그분이 한 말씀을 그대로 기억합니다.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그 장로님이 예수가 도대체 얼마나 큰 분이길래 처음 보는 나를 위해서 밥을 안 먹고 기도를 해 준다는 건가? 거기서 그분이 완전히 마음이 묻어진 거죠. 아름다운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그 장로님이 교회를 몇 군데 개척하고 그 얘기 들으면서 그렇지 우리가 뭘 한다고 뭘 선교하고 전도한다고 이거 한다고 저거 한다고 사람의 마음을 무너뜨리는 건 내가 당신을 위해서 금식기도 돌하겠습니다. 그 말인데 그 얘기 하다 보니까 어머니가 해 주시던 말씀이 경 하는 나는데 제가 무슨 요리하고 있으니까 내가 이거 요리해서 20대 때 같은데요. 어머니가 제가 이거 요리하고 엄마 밥 좀 차려 드릴까 그랬더니 어머니가 저한테 했던 네가 뽀한다고 요리하니까요. 그 말 그냥 패러드에서 우리까지 뭐 한다고 선교한다고 난리냐?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서 세상 사람들이 너희한테 제자인 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거 잊어버리고 사랑할 능력이 없으니까 오니까 다른 거 하면서 예수쟁이 놀이탄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알지 못하니까 쓸데없이 뭐 한다고 이거 한다고 저거 한다고 그렇게 밖으로 놔둔 겁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그 말씀 그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 사랑 안에 충분히 자기의 온 삶을 당구지 못했으니까 어디 가서 뭐 한다고 그렇게 쓸데없는 짓하고 돌아다녔습니다. 처음 보는 분, 자기 목숨 때문에 기도하러 온 분에게 나도 당신을 위해서 금식하며 기도하겠습니다. 불교적 배경의 후분이 도대체 예수가 얼마나 큰 분이길래 전부는 나를 위해 밥을 안 먹고 기도한다고 하는가? 예전에 많이 읽었던 여러분들이 많이 읽었던 책인데 필립 이안씨의 한 책에 영화 화일강의 나리라에 나오는 실제 배경이었던 태국의 전쟁포로 수영소 이야기가 있죠. 어스트 고든이라고 하는 제가 할 때는 제가 기억할 땐 프리스턴 티로지컬 세미나이 아 교목이 있었던 분으로 기억하는데 거기에 그분도 갇혀 있었는데 50도가 넘는 폭염 영양실조 각종 수인성 질병 뭐 이질 말라리아 그리고 일본군 관수의 무자비한 폭행 포로들은 먹을 것이 부족하니까 먹을 것을 두고 서로 싸우고 음식을 훔치고 아픈 동료를 방치하고 하고 오로지 자기 자신을 살기 위해서 발부둥치는 그런 무한의 생존 논리가 작용하던 그 그때 그곳 어느날 작업이 끝나고 공구를 모아두고 일본군 간수각을 하나하나씩 세다가 삽 하나가 없어졌다고 고함을 칩니다. 그리고선 그 일본인 간수가 여기 있는 모두를 죽이겠다고 협박하면서 총을 켜눕니다. 공포가 만연한 그 순간에 한 병사가 앞으로 나가서 사실은 내가 숨겼다고 거짓 고백을 하죠. 그리고 그 사람은 그 자리에서 무자비한 폭행을 받아서 죽게 됩니다. 그날 밤 공구를 다시 세게 됐는데 사실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 거짓 고백한 그 병사는 모두를 위해 자신을내어 준 거죠. 그때 한 포로가 거기 한 포로가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서 15장에 있는 한 말씀을 떠올립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이 선재적 사랑, 선재적 사랑의 희생이 그 지옥 같은 수용소를 바꿔 놨습니다. 버로들은 더 이상 음식을 훔치지 않습니다. 일명 죽음의 집이라고 사람이 거기서 이질이나 말라리아 걸려서 죽음의 집이라는 곳에 놔두면 그냥 주께 방치했는데 동료들을 위해서 음식을 나누고 간호하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고급 시계를 팔아서 약을 구해오고 심지어 대학을 만들어서 서로를 가르치고 돌봅니다. 이것이 누군가의 선재적 사랑 안에서 이루어진 서로 사랑의 현장입니다. 사는 곳이 지옥 같아도 누군가 사랑하고 그 사랑을 통해서 서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면 그것은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이 되지요. 저는 오늘 말씀에 처음을 왜 요한복음서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서로 사랑하라 이렇게만 말하고 이웃 사랑이나 원수 사랑 말하지 않나? 어떤 학자는 이것을 보고 요한복음서는 인류적으로 파탄난 파산한 복음서다. 그렇게 모르지만 실상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하나님의 하나님이 자기의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그 사랑을 말하는이 복음 그리고 서로 사랑을 말하는이 복음 요한복음서야 말로이 세상에 던지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라고 우리가 같이 지금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강력한 선교의 힘이라고 우리 복음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받은 사람으로서이 세상을 엄마 집 앞에서 사는 것처럼 삽니다. 엄마 집으로 생각하고 그리고 내 옆에 있는 저 사람을 신뢰하고 그 사람을 도고하지 않고 그 사람 때문에 상처받지 않고 삽니다. 내 가치가 내 성과나 내 트로피 때문에 있지 않다는 걸 확인합니다. 세상에 무엇을 바꾸려고 하기 전에 우리가 사랑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 사랑을 살아낼 때 단혹 우리 역사가 우리가 사는 것을 화해강의 포로 수영서로 만들지라도 그곳에서는 우리는 그곳에서도 우리는 정글 대학을 세울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돌볼 수 있습니다. 그때 세상이 우리를 보면서 저들은 무엇이기에 예수는 얼마나 큰 사람에게 존재에게 저렇게 사랑하는가 그 장로님에게 했던 그 말을 우리의 서로 사랑을 보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서 할 것이라고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는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 아멘. >>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내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주님 감사합니다.이 사랑이 우리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