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잘법 몰아보기] 과학과 신앙이 인생의 질문에 답하는 방식
채널: 잘잘법 |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0NrRvKqqcaA | 길이: 108:10
요약
🎯 TL;DR — 생화학자 출신 발표자와 신학자가 "과학은 진리가 아니라 잠정적 답이며, 성서와 자연 사이에 모순이 보이면 성서 해석을 다시 해야 한다"는 원칙을 자신의 신앙 여정과 신학적 논증을 통해 풀어낸 강연 모음이다.
📌 핵심 논지 — 화자는 스스로를 "진화론자도 창조과학자도 아닌, 진화를 가장 합리적인 답으로 받아들이는 정상적 과학자"로 규정하며, 자연과 성서는 둘 다 하나님의 것이므로 모순될 수 없되 모순처럼 보일 때는 자연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후반부 신학자는 이를 "방법론적 자연주의"와 "학문 공동체" 개념으로 뒷받침한다.
🗺️ 영상 구성
- 1부: 생화학자의 개인 간증 — 독일 유학 시절 교수·장로에게 받은 충격, 미국에서의 오해와 정면돌파
- 2부: 청년부 갈등 사례와 부목사와의 창세기 해석 논쟁
- 3부: 과학사 예시(갈릴레오, 원자론)를 통한 "과학은 진리가 아니다" 논증
- 4부: 겸손(과학 문해력)과 질문 중심 신앙에 대한 제언
- 5부: 질의응답 — 재해석의 불편함, 여호수아 사건, 창조과학 비판
- 6부: 신학자의 보충 강연 — 가로등 비유, 학문 공동체론, 창조 용어 정리, 방법론적/존재론적 자연주의 구분
━━━ 본문 ━━━
독일과 미국에서 겪은 "두 개의 부캐" 화자는 독일 유학 시절 지도교수가 자신이 교회에서 설교한다는 사실을 알고 "뚜껑이 벗겨졌다"고 표현할 정도로 격하게 반응한 일화를 전한다. 반대로 교회 장로는 "신앙심이 좋은 분이 과학을 하려니 얼마나 양심의 가책을 받겠느냐"며 위로했다고 말한다. 화자는 이를 "원투 펀치"로 묘사하며, 그날부터 실험실·교회·집이라는 세 개의 채널 시스템을 장착하고 살았다고 밝힌다. 미국에서는 바이블 사이언스라는 책 제목만 보고 자신을 창조과학자로 오해한 교인들에게 "저는 창조학자가 아닙니다. 지구의 나이는 46억년이며, 창조 과학은 과학이 아니라 사이비 지식"이라고 정면으로 밝혔고, 예상과 달리 별다른 논란 없이 받아들여졌다고 전한다.
청년부의 균열과 부목사와의 논쟁 청년부 담당 집사로 활동하던 화자는 일부 청년들에게 "부장 집사님 미친 거 아니냐, 진화론자래"라는 뒷담화를 들었다고 말한다. 그는 창조론과 진화론을 두고 토론을 제안했지만 청년들이 학업·취업에 바빠 성사되지 않았고, 정작 그들은 창조과학자의 책 한 권 읽지 않은 채 "창조 과학이 곧 하나님 말씀"이 되어버렸다고 지적한다. 젊은 부목사가 "진화를 믿는다면 창세기 2장 4절까지는 어떻게 해석하느냐"고 따지자, 화자는 "자연은 하나님의 작품이고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 모순이 있을 수 없지만, 모순처럼 보이면 자연을 따라야 한다. 성서 해석은 신학자·목사의 일"이라고 답했다고 전한다.
과학은 진리가 아니라 잠정적 답 화자는 갈릴레오가 망원경으로 목성의 달을 관측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천동설을 흔든 사례를 들며, 당시 발견된 달 3~4개가 현재는 79개로 늘어난 것을 예로 "갈릴레이의 발견은 위대했지만 틀렸다"고 말한다. 원자 역시 "더 이상 쪼갤 수 없다"는 뜻이었으나 핵·양성자·중성자·쿼크로 계속 쪼개지고 있음을 지적하며, 과학자들은 새로운 사실이 나오면 아무 반성 없이 기존 지식을 뒤집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같은 논리로 "저는 진화론자가 아닙니다. 진화를 믿지 않습니다. 가장 합리적인 답으로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며, 화석 지층에서 반증 사례가 나오면 즉시 진화 이론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힌다.
두 가지 비유: 로봇 기술자와 두 어머니 화자는 스스로 환경에 적응하며 변화하는 로봇을 만든 기술자와, 자녀에게 시간표대로 통제하는 어머니 대신 실패할 기회를 주며 지켜보는 어머니를 예로 들어, 스스로 변화·적응하는 과정을 설계한 쪽이 하나님의 성품에 더 가깝다고 주장하며 진화를 신의 법칙으로 이해하는 자신의 관점을 뒷받침한다.
과학 문해력 = 겸손 21세기에는 문해력에 더해 "과학적 태도로 세상을 대하는" 과학 문해력, 즉 겸손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겸손이란 "자신의 지식과 본능의 한계를 인정하고 모른다고 말하기를 거리끼지 않으며,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면 기존 생각을 기꺼이 버리는 것"이라 정의한다. 과학관장으로서 그는 "과학관은 지식이 아니라 새로운 질문을 얻기 위해 오는 곳"이라며, 교회 역시 답이 아니라 질문을 발견하는 공동체여야 한다고 말한다.
질의응답 — 여호수아 사건과 창조과학 비판 청중이 "재해석"이라는 표현이 불편하다고 묻자, 화자는 여호수아 사건(해가 멈춘 사건)을 예로 "지구 자전이 실제로 멈췄다면 생명체가 대기권 밖으로 튕겨나갔을 것"이라며 문자적 해석의 한계를 설명하고, "성경이 주려는 메시지가 중요하지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이어 창조과학은 신학과 과학을 "엉성하게 짬뽕"해 갈등을 유발한다며, 둘을 철저히 분리해야 서로 더 잘 보인다고 주장한다.
신학자의 보충: 가로등 비유와 학문 공동체론 후반부 신학자는 어두운 밤 자동차 키를 가로등 아래에서만 찾는 사람의 비유를 들어, "자연과학이 비추는 빛의 범위 밖에 신앙의 언어와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어 계몽주의 이후 신학으로부터 각 학문이 독립하며 자기만의 연구 대상·방법론·검증 체계를 갖춘 "공인된 학술적 가치를 지닌 지식 공동체"가 형성된 과정을 설명한다.
창조 관련 용어 구분 신학자는 창조 이야기(성경 본문)→창조 이념(그 안의 가치)→창조론(체계화한 신념)→창조 신앙(개인의 수용)→창조학/창조 과학(성서가 현대 과학적으로도 옳다는 주장)의 다섯 단계로 용어를 구분하며, 창조과학은 공인된 학술 공동체 밖에 있다고 규정한다.
방법론적 자연주의 vs 존재론적 자연주의 학술 지식은 초자연적 존재를 상정하지 않는 "방법론적 자연주의"를 택하지만, 이것이 하나님이 없다는 "존재론적 자연주의"와는 다르다고 구분한다. 3.1운동을 하나님의 섭리로 설교할 수 있지만 학술 논문에는 그렇게 쓰지 않는 교회사 교수의 예, 그리고 실험실에서 세포분열 실패를 "기도가 부족했다"고 말하지 않는 신앙 깊은 과학자의 예를 들어, 두 언어 층위를 구분하지 못하면 과학도 신앙도 왜곡된다고 지적한다. 리처드 도킨스가 진화론(방법론적 자연주의의 산물)을 곧 무신론(존재론적 자연주의)으로 착각해 동료 생물학자들에게 비판받는다는 점도 짚는다.
💬 결정적 발언
"저는 진화론자가 아닙니다. 진화를 믿지 않습니다. 진화를 가장 합리적인 답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죠." "자연은 하나님의 작품이고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둘 사이에는 모순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일 때는 자연을 따라야 합니다." "과학은 진리가 아닙니다. 의심에 대한 잠정적인 답일 뿐이죠." "겸손이란 자신의 지식과 본능의 한계를 인정하고 모른다고 말하는 것을 거리끼지 않는 것이자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면 기존의 가던 생각을 기꺼이 버리고 바꾸는 것."
⚖️ 화자가 다룬 반론·한계
- 청중이 "성경을 얼마든지 재해석한다는 게 불편하다"고 직접 이의를 제기함 → 화자는 여호수아 사건과 인간 수명(900살) 기록 등을 예로 문자적 해석의 물리적 모순을 설명하며 답변
- 창조론-진화론 토론을 제안했으나 청년들의 시간 부족으로 무산됨을 화자 스스로 언급
- "이론"과 "법칙"을 자연과학이 구분해 쓴다는 일부 주장에 대해 화자가 생물학자·물리학자에게 직접 확인한 결과 근거 없음을 확인했다고 밝힘
🧩 핵심 용어
- 창조 과학 = 성서의 창조 이야기가 현대 과학적으로도 옳다고 주장하는 입장(신학자 정의상 학술 공동체 밖)
- 방법론적 자연주의 = 학술 지식 생산 시 초자연적 존재를 상정하지 않는 연구 방법론
- 존재론적 자연주의 = 초자연적 존재(하나님) 자체가 없다는 형이상학적 입장
- 과학 문해력 = 지식 습득이 아니라 겸손이라는 과학적 태도
🔎 보완 & 확인
- 배경 보완: '잘잘법'은 종교·신앙 관련 강연·인터뷰 콘텐츠를 다루는 유튜브 채널로, 이 영상은 여러 회차를 모은 "몰아보기" 편집본으로 보이며, 화자(생화학자)와 후반부 신학자는 서로 다른 사람으로 자막상 구분된다(자막에 실명은 명시되지 않음).
- 사실 유의점: 목성의 위성 개수가 "79개"라는 수치는 화자가 언급한 시점 기준으로, 이후 관측 기술 발전으로 공식 집계 수치가 계속 갱신되고 있어 현재 정확한 개수는 확인 필요(추정치로 이해할 것).
- 사실 유의점: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실제로 발견한 목성의 위성은 처음에 4개(갈릴레이 위성)였으며, 자막 속 "3개→79개"라는 서술은 화자의 개인적 기억 서술이므로 정확한 최초 발견 개수는 별도 확인이 필요.
자막 원문 (참고)
Kind: captions Language: ko 우리 교수님은 뚜껑이 벗겨지셨어요. 뭐 교회에 다닌다고 생화학자가 교회에서 설교를 한다고 생학자가 과학자의 탈을 쓰고서 그랬더니 장로님은 아니이 선생님처럼 신앙집이 좋은 분이 아니 과학을 하려니 얼마나 양심의 가책을 받겠어요라면서 저를 위로하시는 겁니다. 그날 저는 또 한번 충격을 받았어요. 상황을 전 정면 돌파해야 했습니다. 저는 진화론자가 아닙니다. 진화를 믿지 않습니다. 창조 과학은 과학이 아니라 그냥 사입이 지식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연은 하나님의 작품이고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둘 사이에는 모순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일 때는 독일에서 공부할 때 일입니다. 어느 날 교수님이 야, 정 일요일에 어디 좀 같이 가자 그러시는 거예요. 제가 대답했죠. 선생님, 전 일요일에 아르바이트가 있습니다. 제가 장학금을 제대로 못 받고 인쇄 공장과 트럭 운전 아르바이트로 가끔하는 것을 아시는 교수님은 안스러워하시면서 다시 물으셨어요. 아니, 일요일에 무슨 아르바이트야? 아, 내 교회에서 이래요. 힘들겠구나. 아니, 안 힘들어요. 아이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한게 재밌고 또 제게도 큰 도움이 됩니다.이 말에 우리 교수님은 뚜껑이 벗겨지셨어요. 뚜껑이 벗겨진다는게 이런 거구나 하고 깨달았죠. 정말 나이스한 분이시거든요. 똑똑하고 친절한 분인데 그렇게 흥분한 것 정말 처음 봤습니다. 뭐 교회에 다닌다고 생화학자가 아니 가족과 함께 그냥 교회에 참석하는 정도가 아니라 교회에서 설교를 한다고 생학자가 과학자의 탈을 쓰고서 저는 이때부터 기육할 때까지 교수님과의 관계가 편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교수님이 애써서 친절한 책을 해도 그때 그 모습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거든요. 나중에 교회 장로님이 물어보세요. 아니 무슨 일이 있어요? 표정이 왜 그래요? 그죠? 저는 자초 지정을 말씀드렸죠. 그랬더니 장로님은 아니이 선생님처럼 신앙집이 좋은 분이 아니 과학을 하려니 얼마나 양심의 가책을 받겠어요라면서 저를 위로하시는 겁니다. 그날 저는 또 한번 충격을 받았어요. 교수님과 장로님에게 연달아 원투 펀치를 맞은 겁니다. 신앙십이 좋은 사람이 과학을 하려니 양심의 가책을 받을 거라뇨? 제가 왜 양심의 가책을 받아야 하죠? 과학이 마약인가요? 불법인가요? 세상에 해악을 끼치는 일인가요? 아니죠. 하지만 장로님은 과학은 신앙과 어긋나는 것이라고 생각하셨던 거 같습니다. 그날부터 저는 쓰 채널 시스템을 장착하고 살아했습니다. 실험실 채널, 교회 채널, 그리고 집 채널 말입니다. 저 자신로 두 개의 북회를 더 가져야 했던 거죠. 개급 유죄석가 유산슬이라는 북회를 가지고 있잖아요. 그런데 개급엔 유재석과 가수 유산슬은 서로 상승 작용을 합니다. 근데 저는 그런 상승 작용이 아니라 하나가 다른 하나를 부인하는 캐릭터를 가져야 했습니다. 불편하죠? 이럴 때는 하나를 버려야 하는게 맞습니다. 그런데 신앙을 포기하겠습니까? 과학을 포기하겠습니까? 그런데요. 기곡에는 의외로 쉽게이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제가 교회에 다닌다고 뭐라고 하시는 교수님도 안 계시고 또 집사가 과학을 한다고 고생한다고 걱정해 주시는 권사님도 안 계신 거예요. 제가 기국에서 얼마 안 있다가 한 거의 20년 전에 바이블 사이언스라는 책을 썼습니다. 남성 구역 성경 공부 시간에이 책이 화제에 올랐습니다. 물론 성경 공부를 진행하시는 목사님이나 우리 구역 식구들이이 책을 읽어 보신 적은 없죠. 신문 광고를 보고 아 제가 책을 쓴 걸 알았고 또 바이블 사이언스라는 제목만 보고 제가 창조 과학자라고 지대짐작하신 겁니다. 저를 마고 칭찬하셨어요. 아 집사님 같은 분이 과학 있어야 진화론처럼 말도 안 되는게 교과서에서 빠지지 않겠습니까? 마시면서요. 저는 아하 또 올게 왔구나라고 했습니다. 기국에서도 우리나라에서도 또 여러 개의 채널로 또 다른 북회를 장착하고 살 수는 없잖아요. 상황을 전 정면 돌파해야습니다. 아닙니다. 의해하지 마세요. 저는 창조학자가 아닙니다. 지구의 나이는 몇 천 년이 아니라 46억년이나 되었고 창조 과학은 과학이 아니라 그냥 사입이 지식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진화를 과학적인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정상적인 과학자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약간의 논란이 있겠구나 했는데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냥 끝이었어요. 목사님이나 구역 식구들이나 저를 그냥 그런 사람으로 받아 주셨습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뭐. 이런 표정이었습니다. 교회 어른들은 저를 아주 좋아해 주셨어요. 권사님이고 장로님이고 저를 정말 사랑해 주십니다. 제가 대표 기도를 하면 저렁저쩌렁한 목소리로 아멘을 외쳐 주십니다. 뭐 제 기도가 좋아서가 아니라 주차 봉사를 열심히 했기 때문이긴 합니다. 항상 좋기만 한 것은 또 아니었어요. 제가 청년부 부장 집사였는데 청년 가운데는 저를 참아 주지 못하는 친구들이 몇 명 있었습니다. 야, 우리 부장 집사님 미친 거 아니야? 야, 저 사람 진화로 온자래. 이런 이야기가 들리기도 했죠. 물론 대부분의 청년들은 제가 인도하는 성경 공부를 아주 좋아하긴 했습니다. 한 친구에게 조심히 제안한 적이 있습니다. 전 그렇게 생각한다면 창조원과 진 진화론에 대해서 같이 토론해 보는 것은 어떨까? 저는 사실 창조론과 진화론은 마토론을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층의 많이 다르거든요. 하지만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청년들은 정말로 너무너무 바빴어요. 우리의 때와 달리 학교 공부에 정말로 많은 시간을 써야 하고 그래도 취직하기도 어려웠으니까요. 친구들은 창조 과학이 맞다고 생각하지만 창조 과학자의 책을 읽어 보지도 않았습니다. 기껏해야 주일학교 시절 여름성경학교에 특강 강서로 초대된 창조 과학자의 강연을 한두 시간 드린게 전부였죠. 자기 입으로는 아마 창조학을 5분도 설명하지 못할 겁니다. 그런데 어느덧 창조 과학은 그냥 하나님 말씀이 되어 버렸어요. 의심할 수 없는 그런 어떤 대상이 된 거죠. 어느 날인가 젊은 부목사님이 제랑 친한 분이었어요. 제게 살짝 따지듯이 물었습니다. 얼굴은 웃고 있고 목소리는 평서처럼 원화했지만 사실 심각했습니다. 아마 저 때문에 고민에 빠져 있는 청년과 상담을 하고 오신 것 같았습니다. 집사님처럼 진화를 믿는다면 창세기 2장 4절까지는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겁니까? 이렇게 따지셨죠. 저는 대답했습니다. 자연은 하나님의 작품이고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자연과 성서 모두 하나님 거죠. 따라서 둘 사이에는 모순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근데 만약 자연에서 보이는 것과 성서의 말씀 사이에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적어도 그 경우에는 적어도 그 경우만큼은 자연에 따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소는 그 당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쓰여졌고 제석할 수 있지만 자연은 변경할 수 없는 실제성이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어요.이 이 세상이 적용되는 모든 물리 법칙, 생물 법칙 다 하나님 거잖아요. 그게 성소와 다르게 보인다고 해서 자연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성서를 다시 해석해야죠. 그때 목사님은 제차 물으셨습니다. 아니, 그러니깐 창세기 2장 4절까지는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는 말입니다. 제가 뭐라고 했겠습니까? 그게 바로 목사님 일입니다. 과학자는 자연을 밝히는 일을 하는 사람이고 성서를 해석하는 일은 신학자의 일이잖아요. 저도 성서 해석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그러라고 목사님이 교회에 계신 거 아닙니까라고 되물었습니다. 그 이후로 목사님과 그 문제에 대해서 다시 토론할 기회는 없었습니다. 너무 바쁘셨습니다. 저는 과학자입니다. 하지만 과학이 진리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과학은 진리가 아닙니다. 의심에 대한 잠정적인 답일 뿐이죠. 유는 지난 2009년을 국제 천분의해로 지정했습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1609년에 마원격으로 하늘을 봤어요. 그때부터 400주년 된 거를 기념한 겁니다. 아니 갈릴레이가 마원경으로 하늘을 본게 뭐 대단하다고 무려 400년이 지난 다음에 기념을 합니까? 그런데요. 정말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지식인 사이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냥 진리였어요.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천치는 지구를 중심으로 빙글빙글 지구를 중심으로 완벽한 원운동을 한다고 말했거든요. 그런데 목성에 달이네 개나 있는 거예요. 이게 뭡니까? 모든 전체가 지구를 돈다는게 아니라는 거잖아요. 적어도 내게는 지구가 아닌 목성을 돌고 있는 거잖아요. 이때 지식인들은 생각하게 되죠. 아, 아리스토텔레스가 무조건 진리는 아니구나.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에 다니면서 아리스토텔레스도 틀렸어요라고 말할 수도 없지만 적어도 우리 지식인끼린 뒤에서라도 아리소텔레스 좀 의심해야 봐야 되는 거 아니야라고요. 그 의심의 결심이 바로 지동설리입니다.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태양계 변방의 작은 행성에 불과하다는 거죠. 이게 끝이 아닙니다. 갈릴레이가 발견한 목성의 달네 개는 제가 학교에서 배울 때는 3개가 되더니 지금은 무려 79개가 됩니다. 갈릴레이 발견은 위대했지만 틀린 거예요. 진리가 아니죠. 물질을 이루는 가장 작은 입자가 뭡니까? 100년 전까지만 해도요. 원자라고 했습니다. 원자를 뜻하는 아픔 그 말 자체가 더 이상 쪼개 수 없다는 뜻이잖아요. 그런데 원자 안에 핵이 있다는 걸 우리가 알게 됐습니다. 또 핵이 다가 있어요. 핵 안에는 또 양성제와 중성자가 있어요. 또 양성제와 중성자도 세계의 쿼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과연 쿼크가 그끝 끝일까요? 우리는 그 끝을 알지 못합니다. 과학은 잠정적인 답일 뿐입니다. 결코 진리가 아닙니다. 과학자들은 과학의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정말로 잘 알고 있죠. 그래서 과학자들은 생각을 금방 바꿔요. 여태에 알고 있던 사실 말고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면 그날로 배신해 버립니다. 지금 쿼크가 제일 가장 작은 거라고 알고 있지만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면 그날로 딴 이야기 할 겁니다. 지금 목송의 달이 79개라고 우리는 이야기하고 있지만 하나라도 더 발견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전혀 반성하는 기미 없이 숫자를 바꿉니다. 저는 진화론자가 아닙니다. 진화를 믿지 않습니다. 진화를 가장 합리적인 답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죠. 공룡 화석과 함께 토끼나 사람 화석이 같은 지층에서 단 하나라도 나온다면 저는 바로 그 순간에 제가 받아들이고 있는 모든 진화 이론을 버릴 준비가 돼 있습니다. 버려야 합니다. 물론 그럴리는 없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진화 역시 하나님의 법칙이라고 믿고 있거든요. 로봇 기술자가 있다고 해 봅시다. 김씨가 만든 로봇은 만든 그대로 남아 있어요. 모양이 바뀌지도 않고 새로운 기능을 새로 얻지도 못해요. 온도와 습도가 지나면 녹스러 버립니다. 그런데 박 만든 로봇은 다릅니다. 환경에 뭐 온도와 습다가 바뀌면 칠도 바뀌면서 버텨요. 또 시간이 지나면 모양도 바뀌고 점차 새로운 기능도 스스로 장착합니다. 누가 스스로 누가 해 주는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환경에 적응하는 거죠. 만든 그대로인 상태를 상태로 녹쓸러가는 로봇을 만든 김씨와 스스로 환경에 적응하는 로봇을 만든 박씨 가운데 누가 더 훌륭한 로봇 기술자일까요? 김씨와 박씨 가운데 누가 더 하나님의 모습에 가까울까요? 저는 스스로 변하는 로봇을 만든 박씨라고 생각합니다. 투 어머니가 있습니다. 둘 다 아이를 지독히도 사랑합니다. 최시 어머니는 아이에게 꼼꼼한 시간표를 만들어 줬습니다. 일어날 시간, 공부할 시간, 밥 먹을 시간, 학원 갈 시간, 놀 시간 꼼꼼히 챙겨서 관리하죠. 아이에겐 아브런 자유도 기회도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시 어머니는 아이에게 기본적인 환경만 제공해요. 먹여주고 재워 주기만 합니다. 나머지는 스스로 인생을 개척하도록 시간과 기회를 주죠. 최시 어머니와 정시 어머니 가운데 누가 더 하나님의 성품에 가까울까요? 저는 스스로 인생을 개척하도록 실패할 기회를 주면서 지켜봐 주는 정시 어머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21세기에 살고 있습니다. 과학 혁명은 일찍감지나갔고요.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죠. 예전은 글을 읽고 쓰는 것만으로도 문화를 즐기면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문회력이 아주 중요했죠. 21세기엔 여기에 덧붙여서 과학 문회력이 필요합니다. 과학 문회력이란 과학 지식을 갖추는 것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과학적인 태도로 세상을 대하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겸선입니다. 과학자들은 겸선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겸선이란 자신의 지식과 본능의 한계를 인정하고 모른다고 말하는 것을 거리끼지 않는 것이자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면 기존의 가던 생각을 기꺼이 버리고 바꾸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자신의 본등과 지식의 한계를 임장한다는 것은 내가 똑똑하지 않는 데다가 모르는게 너무 많다는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린 다 똑똑하지 않고 모르는게 많다는 걸 다 알고 있잖아요. 그러니 모른다고 말하는 것을 거리낄 이유도 없을 겁니다. 그런데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면 기존에 갔던 생각을 버리는 것, 기전의 생각을 바꾸는 것 이건 쉽지 않습니다. 특히 우리 신앙인들이 그렇죠. 어릴 때 주일학교에서 배운게 평생 내 마음을 지배하기도 합니다. 어릴 때 저희 주일학교 선생님은 여고생이었습니다. 여고생 누나가 가르쳐 준 게요. 평생 저를 지배하더라고요. 저는 과학관 관장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과학관은 호기심을 해결하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지식을 얻는 곳이라는 거죠. 그런데요. 호기심을 해결하고 지식을 얻으려면 굳이 과학당까지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스마트폰 검색창을 여세요. 그게 더 빠릅니다. 과학간에 오는 이유는 지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질문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일 유학 시절에 유학생들이 하는 성경 공부를 인도했던 신학생은 제게 짜증을 낸 적이 있어요. 뭐야? 아, 성경 공부 시간에 그런 질문 좀 하지 마. 너 때문에 은혜가 안 되잖아. 답을 얻으려면 검색창을 열면 되잖아요. 우리가 품고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는 이미 답이 나와 있더라고요. 다양한 답이 있습니다. 교회에 와서 설교를 듣고 성경 공부를 하고 친결을 나눈 이유는 자신과 지역 공동체의 질문을 새로운 질문을 발견하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자연은 하나님의 작품이고 성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둘 사이에는 모순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일 때는 자연을 따라야 합니다. 성서는 얼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쓰여졌고 해석할 수 있지만 자연은 변경할 수 없는 실제성이 있으니까요. 제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서를 이야기했다고 순환을 당해야 했던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편지에서 하소연한 이야기입니다. 3수년이 지났습니다. 우리가 지금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우리는 정말 게으른 겁니다. 지금까지 얘기하신 것 중에 그게 불편한게 있었어요. 그게 뭐냐면 얼마든지 재해석할 수 있다. 이거였거든요. 그래서 근데 말씀은 진리라고 저희가 믿고 따르고 있잖아요. 과학은 진리가 아닌데 말씀은 진리고 그러니까 얼마든지 재해석해야 된다 이런 말 되게 불편한데 과학자 어떻게 성리가 성경 말씀 안에 있다고 믿어요. 저도 진리가 성사의 말씀 안에 있는데 그거는 우리는 글자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는 거예요. 그 성경에 쓰여진 시기가 있잖아요. 뭐 기원전 몇 세기 뭐 9세기 많게 쓰여진단 말이야. 그 당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게 설명했죠. 이런 거 있잖아요. 여호수아가 했더니 해가 멈췄었어요. 해가 정말 멈출 수 있을까요? 해가 안 움진 것처럼 보인다는 건 뭐냐면 자전이 멈춘 거잖아요. 자전이 멈출 수가 있을까요? 우리는 그 위에서 많은 생명체들이 다 붙어 있어요. 가음지가 갑자기 떡 버리면 마치 버스가 갑자기 펑쓴 것처럼 우리는 앞으로 쏟아지죠. 많은 생명체들이 대기권 바깥으로 튀어나갈 수 있었을 겁니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근데 그 당시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했으니까 아 그 저기 하나 빌 수 있어라고 생각할 수 있죠. 또 우리 목사님도 그거 설계 쓰셨어요. 야, 나중에 나사의 과학자들이 계산해 보니까 정말로 하루가 비었대라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런데요. 그때는요. 우리가 쓰고 있는 단력은 1982년에 만들어진 단력이에요. 그 당시에는 이런 단력이 있지도 않았어요. 근데 하루가 빈 걸 어떻게 알아요? 어떤 신학자가 알고 어떤 과학자가 알겠습니까? 옛날 900살까지 살았던게 정말일까라는 것들을 뭐 다양하게 해석할 순 있어요. 혹시 그때는 한 달이 한 살이였나 뭐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할 순 있겠죠. 하지만 그게 결코 답이 될 수는 없어요. 근데 거기서 중요한 거는 숫자가 중요한게 아니잖아. 몇 살까지 살았다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거기서 주려고 하는 메시지가 있잖아요. 이제 그게 중요한 거지. 그걸과 성경을 과학 책으로 받아들려고 하는 태도거든요. 그게 창조 과학이 왜 문제냐면 과학은 과학이고 신학이 신학이야 되는데 창조학 그 신학과 과학을 그냥 엉성하게 짬뽕을 만들어 버렸어요. 그러면서 갈등을 유발시킬 수밖에 없게 돼 있는 거거든요. 철저하게 일단 분리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떨어져서 보면 서로 더 잘 보이는 부분인데 섞여서 보기 때문에 서로 불편한 거거든요. 다르지 않아요. 똑같아요. 저한테 이적을 행하신 분이고 저를 계획하시는 분이고 저에게 또 많은 기회를 주는 분입니다. 그 제가 저의 간절함을 아는 분이고 과학자라고 해서 다를까요? 최후는 다르고 뭐 예술는 다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과학이란 것들이 뭐 대단한게 아니잖아요. 우리 삶의 한 부분 부분일 뿐입니다. 입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자동차 키기가 없어진 거예요. 그런데 이분이 어 자기가 오동기를 되돌아와서 가로등이 켜진 곳에서만 계속 자동차 키를 찾고 있는 거예요. 어디서부터 왔는데요? 저기서부터 여기까지 걸어왔습니다. 그러면 저기 어두운데도 떨어질 수 있는데 왜 여기서만 찾으세요라고 물어볼 때이 사람이 아 여기 가로등이 켜졌으니까 여기서 자동차 키를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얘기한다면 그 말이 좀 이상하죠. 왜냐하면 가루등이 없는 곳에 자동차키가 떨어져 있을 수도 있잖아요. 자연과학 자연과학이 대상으로 하는 범위가 있습니다. 그리고 자연과학이 그 대상을 밝히는 가로등이 있어요. 근데 신앙의 언어와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들은 자연과학이 비추는 빛의 범위 밖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거든요. 아 우리가 기독교 기독교 신앙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싶다라는 말은 자연과학이겠죠. 그러면 오늘날 현대의 지식이 어떻게 구축되어 왔는지 학문이라고 하는 거 공인된 학술적 가치를 지닌 지식의 역사를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A라고 하는 사건이나 사태에 대해서 각각 여러 말들을 할 수 있겠죠. 그런데 뭐 A라고 하는 어떤 사건이나 사태에 대해서이 사람의 말과이 사람의 말이 있어요. 그런데이 사람의 말이이 사람의 말보다 보다 유용해요. 그리고이 사람의 말이이 사람의 말보다 좀 더 안전하게이 A 사건을 이해하게 해 줘요. 그러면이 사람이 한 말이 안전하고 또 아 유용한 지식이 되겠죠.이 이 아랫 사람이 한 말보다는요. 그런데 이게 이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왜냐면 그걸 누가 검증할 것이고 어디에 유형하고 어디에 유형하지 않은지를 각각 판단 내려 줘야 하거든요. 그래서 그것을 하는 오늘날이에 단체들이 각각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공인된 학술적 가치의 공동체, 지식 공동체 이렇게 부르는데 아 간단하게 그렇게 불렀지만 사태는 상황은 쉽지 않습니다. 어떤 것이 학문이고 어떤 것이 학문이 아닌가 이런 얘기할 때도 쉽지가 않아요. 가령 제가 어느 날 점이 궁금해서 점이요. 수학에서 점이 궁금해서 점에 관한 정의를 찾아봤더니 선어가지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궁금해서 제 주변에 있는 수학과 교수님한테 여쭤봤어요. 내가 점에 대한 정의를 찾아보니까 선억이 되더라. 뭐가 오르냐? 그랬더니 그것 말고도 더 있대요. 점에 대한 정의가. 그래서 수학과 교수님한테. 그럼 그중에 어떤 정의가 제일 적절합니까라고 물어보니까 아 그거 쉽게 말할 수 없다고 그러고. 그래서 제가 이제 반문하기로는 점에 대한 정의가 없으면 선을 정해 내릴 수 없고 선을 정의 수 없으면 면을 정해 내릴 수 없는데 어떻게 수학에 기억하기 시작해요? 이렇게 물어보니까 일단 점을 무엇무엇이라고 그냥 가정하고 시작한다고 그렇게 얘기하시더라고요. 아 인간이 인간의 학문이라는 것도 아 가장 엄밀한 수학의 세계에서도 그렇게 정의를 합의하고 시작하기는 어렵구나. 그렇게 정의하고 시작하긴 어렵지만 수학자들이 이후에 펼쳐진 기학적인 연구 또는 대수와 관련된 연구를 보면 나름대로 이것은 공인된 학술적 가치를 지닌 지식이고 어떤 것은 아니라고 그렇게 판음해 주거든요. 그것을 그것을 하는 단체를 수학 공동체 수학의 학문적 공동체라고 얘기할 수 있겠죠. 대학 방금 말씀한 학회 그다음에 연구소가 오늘날 세계에서 무엇이 공인된 학술적 가치를 지닌 지식이고 그렇지 않은지를 구분하는 일종의 재판관처럼 활동하고 있다. 그렇게 일단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계는 이런 공인된 학술적 가치를 어 학문적 공동체가 개별 학문적 공동체가 생산하고 검증하고 유통하고 비판하고 해체해서 재구성하는 이런 노력을 하고 있지요. 신학은 신학 나름대로 있게 되고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신앙의 자기 이해입니다. 신앙이 내가 지금 믿고 있는 건 뭘 뭐지? 내가 이걸 어떻게 표현할 수 있지? 어떻게 내가 믿고 있는이 내용이 논리적이지?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이것을 설득할 수 있지? 이러한 등등의 고민을 체계적인 언어로 만든게 신학인데 이제 그 신학은 신학 나름대로의 연구 대상과 방법론을 가지고 발전해 왔듯이 다른 분야도 그렇게 됐지요. 그렇게 쭉 지내오다가 중세가 끝나고 종교 개혁이 시작되고 종교 개혁 이후에 계몽주의라고 하는 사조가 시작되면서 원래는 교회가 전체에 중세 교회가 담했던 지식의 전 분야가 각각 자기의 자율를 주장 좌율를 주장하면서 독립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이 각 독립된 학문들이 자기의 연구 대상과 그 연구 대상을 연구하는 적합 방법론 그래서 연구 대상과 연구 방법론이 이전의 신학이나 다른 학문들과는 다르다. 그리고 자체적으로 규율을 갖고 있다. 자율이죠. 그걸 오토놈이라고 하는데 스스로 유를 갖고 있다라고 주장하면서 어 교회의 지식, 신학적 지식으로부터 독립을 하기 시작합니다. 오늘날 자연과학은 중세 시대는 그냥 자연 철학이라고 이렇게 불리기도 했는데이 자연과학 역시에 이전에 있었던 그런 어떤 통합된 학문 체계에서 자신의 대상 꼭 자연 현상이죠. 그다음에 경험적 관찰과 합리적 분석이라고 하는 자신 나름들의 과학 방법론을 통해서 분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분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내에서 아주 철저한 아 지식 생산 시스템, 검증 시스템을 거쳐서 아 이것은 안전하고 유용하고 진실한 지식이다라고 인증을 일정해 주게 되죠. 그런데이 공인된 학술적 가치를 지식의이 각 세부 영역이 매우 전문화되고 세분화돼서 이제 한 사람이 그 모든 지식을 다 알 수 없을 정도로 굉장히 발전하게 됩니다. 상당한 수준으로 다른 분야가 발달해 있고 우리는 평생 자기가 공부한 학자들도 자기가 공부한 한 분야에 또 요만큼의 요만큼에 대한 지식만 아주 협수한 지식만 겨우 알 수 있을 정도로 오늘날 지식은 매우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제가 좀 길게 설명했는데 그래서 나의 신앙 기독교를 자연과학적으로 설명한다고 하는 것은 사실 굉장히 어려운 일이 되었습니다. 첫째 이유는 자연과학이 매우 발달하고 정교하고 그곳에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은 거기서 나온 지식을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우주 안에 살지만이 우주가 시작됐다고 하는 표준 모델인 빅뱅 티어리도 특들면 무슨 말인지 잘 알지 못하고 무슨 다중 우주론이라는 것도 있고 첫근 이론이라고 하는 것도 있고 이런 수많은 얘기들을 우리가 다 알지 못합니다. 거기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분이라고 해도 실상 2,년 되도록 지속된이 기독교라고 하는 종교를 사실 다 알고 해명하기라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질문하신 분에게는 첫 번째로 이렇게 답하겠습니다. 아, 자연과학을 가르치시는 교사고 기독교 신앙을 가진 분으로서 자신의 신앙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하고 그 의도도 알겠지만 실상 기독교를 자연과하게 전망해서 설명하라고 하는 것은 분명한 한계가 있을 것이다. 첫 번째 그렇게 말씀드리고 두 번째 그런데 그 한계를 짐진짓 모른 채하고 조금 억지로 그것을 풀기 시작하면 기독교를 왜곡하든 아니면 자연과학을 왜곡하든 그런 유혹에 빠지게 될 것이다. 아 그래서 저는 자연과학의 언어가 있고 신앙과 신학의 언어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에 가깝습니다. 둘은 서로 대화할 수 있고 서로에 대해서 열린 마음으로 경청할 수 있지만 신앙과 신학의 언어가 자연과학의 언어 아래에서 모두 다 해명되는 건 아닙니다. 왜냐면 자연과학은 자연과학의 연구 대상 범위가 있고 그다음에 연구 방법론이 있거든요. 어떤 분이 이것을 굉장히 재밌게 풀어 놨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겁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주머니를 살펴보니까 자동차 키가 없어진 거예요. 그런데 이분이 어 자기가 오동기를 되돌아와서 가로등이 켜진 곳에서만 계속 자동차 키를 찾고 있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지금 뭐 하고 있냐고 물어본 겁니다. 잃어버린 자동차 키를 찾고 있습니다. 어디서부터 왔는데요? 저기서부터 여기까지 걸어왔습니다. 그러면 저기 어두운데도 떨어질 수 있는데 왜 여기서만 찾으세요라고 물어볼 때이 사람이 아 여기 가로등이 켜졌으니까 여기서 자동차 키를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얘기한다면 그 말이 좀 이상하죠. 왜냐하면 가루등이 없는 곳에 자동차키가 떨어져 있을 수도 있잖아요. 자연과학 자연과학이 대상으로 하는 범위가 있습니다. 그리고 자연과학이 그 대상을 밝히는 가로등이 있어요. 근데 신앙의 언어와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들은 자연과학이 비추는 빛의 범위 밖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거든요. 그래서 꼭이 자연과학의 가루등이 비치는 요것에 기독교 신앙의 언어를 애써서 갖고 오면 여기서 신앙의 언어를 모두 풀어 준다. 풀어줄 풀를 것이다. 이렇게 하면 그 상당한 외국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아 그렇게 일단 답하겠습니다. 그래서 어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자연과학을 공부하고 자연과학이 낸 결론이나 그 지식의 과정을 존중하고 깊이 새기지만 거기서 신앙의 나의 신앙의 모든 것 혹은 일부라도 완전히 좀 해명받고 싶다라고 하는 그 해결에 해결을 향한 욕구와 욕망은 잘 이해하지만 다른 층위의 언어를 사용하고 다른 범위를 우리가 얘기하고 있다. 그걸 이제 먼저 생각하시는 것이 저는 좋을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게 이제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이슈로 등장하니까 제가 거기서 좀 첨원을 하고 싶은데 창조 과학이라고 하는 것은 제가 아까 말씀드렸던 공인된 학술적 가치를 지닌 지식 책 안에 있는가라고 물어봐야 되겠죠. 일단 용어를 잘 정리해야 할 것 같아요. 하나님의 창조와 관련된 행위를 담은 성경의 본문이 있습니다. 그것을 창조 이야기 혹은 창조 본문이라고 제가 부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창조 이야기 창조 본문 뒤에 어떠한 것을 말하고 싶은가? 그 이념과 가치가 있죠. 그것을 창조 이념 혹은 창조 이야기 배우에 있는 가치라고 얘기하겠습니다. 그리고 창조 이야기 배우에 있는 가치와 신념을 체계적으로 또 조직적으로 말하려고 하는 것을 창조론이라고 말하겠습니다. 그 창조론을 자신의 신앙으로 받아들이면 그것을 창조 신앙이라고 규정 규정하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것과 하나 구분하겠습니다. 그것은 뭐냐면 창이 성경에 있는 이야기가 현대 과학적 성과와 배치되어도 성서의 창조 이야기가 과학적으로 옳다라고 주장하는 그 주장을 창조학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창조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과 아 창조로는 제 용어에서 분명히 구분된다고 하는 것을 이제 말씀드리겠습니다. 현재 생명 현상을 다루는 공인된 학술적 지식은 진화에 관련된 이론입니다. 것을 진화론이라고 부릅니다. 진화로는 특정한 이념이나 사상을 주장하려는게 아닙니다. 거기에 알맞는 방법론에 따라서 연구한 것을 자연과학적으로 정리한 겁니다. 어떤 분들은 이론하고 법칙하고 자연과학 내에서 차이가 나는 거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예를 들면 진화론은 그냥 가설일 뿐이고 만인력의 법칙은 증명된 것이라서 법칙이란 말을 붙인다.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저는 그런 얘기를 처음 들어서 제가 있는 학교에 생물학자하고 물리학자들에게 돌아가면서 물어봤습니다. 자연과학에서 이론이란 말하고 법칙이란 말을 그렇게 구분해서 사용합니까? 그랬더니 생물학자나 물리학자가 모두 저는 그런 얘기는 처음 들어봅니다. 그렇게 얘기하더라고요. 창조과 학은 공인된 학술적 가치 밖에 있는 겁니다. 지금 학문 공동체 내에서 존재하는 모든 아 공인된 학술적 가치를 가진 지식은 방법론적 자연주의를 택합니다. 이것을 존재론적 자연주의와 헛갈리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방법론적 자연주의는 우리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학술적 지식을 얘기할 때 초자연적인 존재를 방법론적으로 상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현상이 있으면 자연 세계 내에서의 원인과 결과로서만이 현상을 설명하지 아 초자연적인 하나님이나 뭐 귀신이나 뭐 어떤 뭐 영적 세계를 얘기하면서이 현상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보수적인 아 신학대학의 교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나라의 3일 운동을 보면 아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이 굉장히 큰 공원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대학의 어느 신학대학의 교회사 교수도 일운동은 하나님이 이끄신 섭리입니다라는 논문을 쓰지 않습니다. 설교에선 그렇게 할 수 있죠. 그러나 학술 논문으로 그것이 제출될 때는 3일 운동을 어 설명할 때 당시 역사 사회 문화 정치적 배경을 설명하고 거기서 움직였던 행위자들을 설명해요. 그래서 논문을 완성했어요. 하나님 없이 말했어요. 그런데이 모든 과정을 보고 이것이 하나님 없다라고 하는 주장을 한 겁니까? 교회사 교수가 그건 전혀 아닙니다. 교회 사수가 그 논문을 썼어요. 그래서 아 이래 가지고 3일 운동이 일어났구나 하고 사람들이 다 이해해요. 근데 이분이이 논문을 다 쓰고 나서 책상 앞에서 앉아 가지고 손을 모으고 기도해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러한 상황과 그러한 여건 중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낙담하거나 좌절하거나 용기를 내지 못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일어났습니다. 그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기도했어요. 그게 모순되는게 아니에요. 그를 이해할 수 있어야 됩니다. 어떤 자연 과학자가 생물학자가 신앙이 좋아요. 신앙이 깊어요. 새벽 기도 가요. 새벽 기도 가서 하나님이 세상 모두 하나님이 운영하십니다. 모든 생명 주님께서 지탱하시고 유지하시고 인도하십니다. 주님 주님은 뜻 앞에 복정하겠습니다. 하고 자기 학교에 출근해요. 연구소가 가지고 거기서 하는 연구원한테 물어봐요. 그거 우리 실험하는 그거 세포 본연 잘했냐고? 안 했. 잘 안 됐다 그래요. 그 왜 안 됐니? 그랬더니이 영국원도 어 기독교 신앙인데 이렇게 대답했다고 해 보세요. 제가 기도가 부족했나 봐요. 그러면은 새벽 기도를 하고 온 그 교수가 아 기도가 부족했구나 그렇게 말하겠습니까? 야 그거 온도 잘 맞추고 그 그 시약 잘 넣고 플라스 그 깨끗한지 안 깨끗한지 잘 봐. 그리고 다음날 또 저 새벽 기도하고 왔어요. 그 연구원한테 가서 그 세판뿐열 잘했습니까? 했어요. 물어봤더니 아 제가 금식 기도를 해야 될 것 같아. 잘 안 되는데요. 그럼 뭐라 그러겠어요? 그래 금식기도를 해 봐라. 그렇게 얘기하겠어요? 실험실에서 실험실에서 그렇게 말하는게 교회에서 그렇게 말하는 거랑 분열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우리가 우리가 쓰는 언어가 구분되어 있고 우리의 삶의 현상이 구분되어 있어요. 그리고이 구분된 것을 나름에 우리의 삶 안에서 통합해요. 그 통합의 과정이 있지이 실험실 안에서 세포분열를 잘 아는 걸 기도의 문제로 환원해 버리면 그것은 더 이상 과학이 아니죠. 그러니까 방법론적 자연주를 택하는 거랑 신앙은 교회사 교수가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지만 논문 쓸 때는 보편의 언어 다시 말해서 종교가 있든 없든 성별이 무엇이든 인종이 무엇이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언어로 얘기하는 거예요. 어,이 방법론적 자연주의와 존재론적 자연주의를 헛갈리는 일은 자연과학자들 사이에서도 일어났는데 예를 들면 그 유명한 리차드 도킨스 같은 분은 방법론적 자연주의의 결과인 진화로는 존재론적 자연주의 곧 하나님이 없다는 무실론으로 쉽게 이해질 수 있다고 주장을 합니다. 착각하는 거죠. 그래서 동료 생물학자들에게 비판받고 있습니다. 도킨스는. 그런데 우리나라의에 온 미국의 일부 어떤 분들은 방법론적 자연주의의 산물인 진화론이 존재론적 무실론을 존재론적 자연주의를 주장할 수밖에 없다고 도킨스랑 똑같은 논리로 주장을 하거든요. 어 진화론을 과학의 이론으로 현상으로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으로 진화론을 수용하는 수많은 크리스천 과학자들이 있어요. 이분들은이 진화론이 하나님이 안 계기시다라고 하는 것을 함의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 사람들이 그런 크리스천 과학자들이 엄 얼마든지 있어요. 그러니까 방법론적 자연주의를 택한 진하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인 진언론을 수용하는 것이 곧 존재론적 부실론을 가정하는게 아니에요. 방법론적 자연주의를 가지고 설명한 진화론이 하나님이 없다라고 하는 것을 함의한다. 이렇게 생각한 사람이 리차드 도킨스고 또 어떤 분들 우리 기독교인 중에서도 방법론적 자연주의로 자연성을 다 설명했다고 하면 하나님이 없는 거랑 같다는 얘기 아니냐 이렇게 말하는 분이 있고 이렇게 말하는 분들 중에 도저히 그걸 참을 수 없으니까 이른바 현대 과학의 진화론을 모두 폐기해야만 나의 신앙이 가능해지니까 나의 신앙을 위해서 공인된 학술적 가치로 인정받지 못하는 창조과 의 형태를 주장한단 말이죠. 그러니까 그걸 둘을 헛갈려서는에 우리가이 되지 않습니다. 현재 공인된 학술적 가치를 부정하려고 하는 이런 시도를 우리가 과학 부정론이라고 부르는데 창조학 역시 과학 부정년의 전형적인 사례에 속한다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자연과학도들은 일차적인 청중이 자기의 동료학자들입니다. 물리학자들은 물리학자를 상대로 논문을 쓰고 생물학자들은 생물학자를 대상으로에 논문을 씁니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창조를 과학적으로 입증하겠다라고 하는에 그런 글들은 물리학자나 생물학자나를 대상으로 하지 않고 비전문가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우리가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분야에 애써서 노력하는 분들이 계신데 그중에서는 자연과학자나 공학자분들이 굉장히 많은 걸수록 또 알고 있습니다. 그분들은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 하는 학문 활동처럼 이런바 창조과학의 영역에서 활동하지 않습니다. 그분이 속한 아 그분들이 속한 영역에서 전문적인 학수 활동을 하는 방식대로 이른바 창조과학이라고 불리는 부분에서 분야에서 학술 활동을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 차이가 나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에이 에이 창조각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면 이른바 담배 전략이라고 하는 표준화된 과학 부적론의 전략을 사용합니다. 한 여덟 가지 있는 걸로 그렇게 얘기하는데 일단 과학과 싸웁니다. 과학 전부를 전부랑 과학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과학 전체를 싸우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얘기하지만 아 생물학에서 가장 중요한 뼈대인 진화론과 싸우려고 합니다. 그리고에이 진화론에 온갖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의심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과학이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고도 주장하고 자신의 편을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의 자신의 편을 데려오고 지지해 줄 전문가들을 고용하고 고유한 과학적 성과를 제시합니다. 일반적인 방식이 아니라 고유한 과학적 성과를 주장하고 여러 대중 언론에 그러니까 전문가들을 상대하지 않고 대중 언론의 대중적인 언어로 어 그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습니다. 아, 저는 이것이 아, 한국 개신교회에 굉장히 큰 우려 사항이라고 생각하고 어, 마치 진화론이 계속 여전히 있으면 우리의 신앙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얘기하는 것이 심히 우려됩니다. 신앙은 진어론이라고 하는 과기론이 있기 전에도 있었고 있은 후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현대 과학의 어떤 성과가 부정되고서야 비로서 나의 신앙이 성립한다면 그것은 나의 신앙의 명운을 과학에 내맡긴 꼴입니다. 여러분 제가 지구 평면 논자들 있습니다. 지구 평평론자들 그분들이 성경에서 근거 갖고 옵니다. 요한계시록 보면 하늘의 천사가 땅에 내 모퉁이를 붙잡고 있어요. 이거 전형적인 고대인들의에 땅에 대한 생각이거든요. 땅이 네모네요. 평평하고 성경에 있는 말씀의 문자 그대로 땅은 평평하고 네모 네모의 사각에에 한 천사가 붙 붙들고 있다고요. 그거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지구 평평론자가 아니면 기독교 신앙인이 아닌가요? 아니잖아요. 그런 게. 그런데 왜 어떤 지식, 어떤 어 과학을 부정해야만 내 신앙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지 그거 참 저로서는 굉장히 고통스러운 생각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현대 과학의 어떤 이론이 옳든 그러든 그것과 상관없이 존재할 수 있고 존재해야만 하고 얼마든지 풍요롭게 우리의 신앙으로 받아들여 줄 수 있습니다. 제가 드리고자 하는 말은 진화론을 수용해야만 멋진 신앙인이고 깊이 있는 신앙이란는 뜻이 아니에요. 신앙은 진화론이 옳던 그러든 신앙 그 자체의 가치와 문법과 이야기와 독자적인 체계를 가지고 창조 신앙을 말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창조 신앙이 진화론이 옳든 그러든 거기에 우리의 명운이 걸린 것이 아니다. 그렇게 얘기하겠습니다. 제가 어 전공하는 한 분야의 아 나름대로 전문가라고 저는 나름애써서 어 제가 전문 지식이 있다고 주장하거든요. 그런데 생물학과 2학년 학생보다 생물학에 대해서 모릅니다. 그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생물학 필드에 가면 저는 초라해집니다. 제가 물리학과 1학년, 2학년, 3학년 학생, 3학년 학생하고 저는 물리학 지식을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럼 제가 분리학 교실에 가면 그 질문하신 분의 표현대로 하면 초라합니다. 그러나 제가 다 초라한가요? 아닙니다. 제 분야에 오면 나름 어깨를 펴고 지식을 산출하고 남이 산출했다고 하는 지식을 검증하고 비판하고 해체하고 재구성하는데 열심을 갖고 참여합니다. 나름의 권위가 주어집니다. 제가 생물학이나 물리학 3, 4학년에게 가서 너희가 배운 생물학 물리학은 틀렸다라고 얘기할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정말 그 표현대로 하면 완전히 인생 자체가 초라해지는게 아닙니다. 그 분야에서는 제가 경청해야 할 분야인 거지 제가 초라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이 자연과학적으로 다 해명돼야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성경을 통해서 교회 전통을 통해서 우리에게 조망해 주시는 성령님의 인도를 통해서 신앙을 가지고 그 신앙에 우리의 삶을 맡기고 있고 품격 있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신앙이 사회과학 분야에서도 자연과학 분야에서도 소설 분야에서도 시에서도 체육 분야에서도 모두 아 대단해 기독교 신앙과 기독교 신앙에 관한 말들은 모두 다 맞고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진리가 들어 있어 그런 찬를 꼭 받아야 되는 거 아니다. 아 저는 그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신앙, 우리의 신앙은 자연과학에 우리의 명혼이 걸려 있지 않다. 그러니 거기서도 인정받으려고 너무 애쓰지 말아라. 자연과학이 정말 멋져 보이고 오늘날의 시대를 자연과학의 시대라고 하죠. 그래서 자연과학자들 중에 일부 제가 기억하기로는 지금 돌아가신 하워드 대학에 에드워드 윌슨 같은 분은 인간에 대한 모든 이해와 학문 책에는 생물학을 중심으로 재편돼야 된다. 이런 얘기 하지만 그런 얘기를 할 때 신학자뿐만 아니라 이문학자나 사회과학자도 에드워드 윌슨의 말을 쉽게 동의해 주지 않습니다. 지금 아무리 자연과학계시다라고 해도 그러니까 우리의 신앙을 우리의 신앙 문법대로 말하는 것에 대해서 너무 기죽지 마시라. 그러니까 과학에서도 내 신앙이 인정받아야 되고 내 믿음이 인정받아야 된다는 것은 그과 어떤 과학이 있고요. 제 신앙이 있어요. 근데이 과학이 내 신앙을 지지해 줬어. 아, 내 신앙은 과학으로도 입증되는 거야. 다 들었지. 얼마 후에이 과학이 잘못된 것으로 판명났어. 그럼 제 신앙이 문제가 생긴 겁니까? 문제가 생기겠죠. 왜냐면 과학하고 신앙을 이렇게 완전히 맞물려 놨으니까. 왜 이런 일을 하죠? 과학은 변해요. 과학은 언제나 최종적 결론도 가설 수준이에요. 과학자들은이 과설이 변하면 얼마든지 과학을 변할 수 버릴 수 있어요. 그 사람들에겐 그것이 오히려 통쾌한 일이에요. 아, 요런 설명으로 이런 설명으로 이거 설명했는데 내가 어딘가 미심 찍었단 말이야. 그런데이 설명이 잘못되고요 다른 설명이 더 잘 설명하네. 그럼 이전 설명을 잘못된 것으로 버려요. 근데 우리의 신앙을 이전 신앙 과학하고 이렇게 얽매고 내 목숨을 걸었는데 이게 잘못된 것으로 판명되면 우리는 그 신앙 버립니까? 왜 우리의 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