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잘법 몰아보기] 이젠 알고싶다, 하나님의 뜻! 노진준 명설교 2시간
채널: 잘잘법 |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byKQX7qXEfo | 길이: 152:07
요약
🎯 TL;DR — 노진준 목사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다"는 갈망이 종종 운명론적·기복적으로 왜곡되어 있음을 지적하며, 신명기 29장 29절을 근거로 감추어진 미래(하나님께 속한 것)를 미리 알려 하기보다 이미 드러난 것(나타난 사건·성경의 계시된 뜻) 안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이 참된 하나님의 뜻 찾기임을 강조한다.
📌 핵심 논지 — 화자는 하나님의 뜻을 "미래를 미리 알아 쉬운 길을 택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태도가 운명론적이고 기복적인 오해라고 진단한다. 대신 하나님의 뜻은 ①이미 벌어진 일(나타난 것)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 것, ②성경에 계시된 원하심(사랑, 감사, 배려 등)을 따르는 것이라는 두 축으로 재정의된다.
🗺️ 영상 구성
- 도입: 인생의 갈림길(거주지·전공·결혼)에서 하나님의 뜻을 묻는 상황 제시
- 사례들: 청년의 진로 고민 → 자매의 전공 전환과 죽음 → 하반신 마비 성도의 후회 → 치킨 가게 기도 부탁
- 신명기 29:29 해석: 감추인 것 vs 나타난 것
- 하나님의 뜻의 두 층위: 기뻐하시는 뜻과 허락하신 뜻 구분(탕자 비유, 요셉, 예수님의 십자가)
- 화자 자신의 목회지 이전 경험과 로마서 8장 28절("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재해석
- 요셉의 생애("형통하게 하셨더라")와 욥기 해석
- 마지막에 산상수훈의 "염려하지 말라" 본문으로 화제 전환(자막 중단)
━━━ 본문 ━━━ 하나님의 뜻을 묻는 질문의 성격 화자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실은 하나님의 원하심을 묻는 것일 수도, 하나님의 계획을 묻는 것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후자, 즉 "정해진 하나님의 운명을 어떻게 찾아갈 것인가"로 이해하는데, 이것이 지나치게 운명론적인 경향으로 흐른다고 지적한다.
세 가지 사례: 고난과 후회 미국 유학 중 진로를 고민하던 청년, 피아노에서 생물학으로 전공을 바꾼 뒤 원인 모를 통증에 시달리다 "전공을 잘못 바꿔서 벌받는 것 아니냐"고 괴로워하다가 결국 극단적 선택을 한 자매, 그리고 신호등 앞에서 트럭에 받혀 하반신 마비가 된 뒤 "그 전화만 받지 않았더라면"이라며 자책하는 성도의 이야기를 통해, 화자는 하루 앞도 알 수 없는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미리 안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운명론과 기복성에 대한 경계 화자는 치킨 가게 두 곳 중 어디를 해야 할지 기도해 달라던 교인의 예를 들며, 그런 질문의 의도가 사실은 "어느 쪽이 대박 나겠는가"를 묻는 기복적 성격을 띤다고 짚는다. 진로·거주지·결혼 등의 고민에도 이런 운명론적·기복적 요소가 다분히 섞여 있다고 말한다.
신명기 29:29의 재해석 > "감추인 것은 하나님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것은 우리에게 속하였다" 화자는 나타난 것을 두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는 이미 벌어진 일(예: 자신의 장애)로, 이에 대해서는 "왜 이 일이 일어났는가"보다 "이것을 가지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둘째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원하심(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 어려움 중에도 감사하는 것, 약자를 돕는 것)이다. 반면 감추인 것은 미래의 모든 일이며, 이는 하나님께 속한 영역이므로 매 순간 알려 하기보다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을 믿고 받아들이는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기뻐하시는 뜻과 허락하신 뜻의 구분 발생한 일이 곧 하나님이 기뻐하신 일은 아니라고 화자는 강조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이나 한국 전쟁도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안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뜻"이라 부를 수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신 일이라는 뜻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 설명하며 누가복음의 탕자의 비유(아버지가 유산 요구를 허락했지만 기뻐한 것은 아님), 요셉의 노예살이·투옥(하나님의 큰 계획 안에 있었지만 그 고난 자체를 기뻐하신 것은 아님),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고난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통한 구원을 기뻐하심)을 예로 든다.
개인적 경험과 로마서 8:28 재해석 화자는 동부에서 33년간 목회하던 교회를 떠나 서부로 이주한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도 종종 회의가 든다고 고백하며, 레베카 페퍼트의 "인생은 살기에 좀 버겁다"는 말을 인용한다. 이어 남편을 이민 직후 교통사고로 잃고 두 자녀를 홀로 키운 한 부인의 사례를 소개한다. 이 부인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로마서 8:28)는 말을 들을 때마다 화가 났다며, 자녀들이 좋은 대학에 가고 자리를 잡았어도 남편을 잃은 상실은 채워지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이에 대해 화자는 이 구절이 "결과적으로 다 잘될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고난의 시간도 결코 헛되이 낭비되지 않는다는 믿음의 고백이라고 재해석한다.
요셉과 욥이 주는 함의 요셉의 생애에서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심으로 형통하게 하셨더라"는 표현은 총리가 되었을 때뿐 아니라 노예로 팔렸을 때와 억울한 누명으로 투옥되었을 때도 등장한다며, 이는 고난의 시간조차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시간이었음을 뜻한다고 설명한다. 욥에 대해서도, 욥이 던진 "왜"라는 질문의 본질은 고난의 원인이나 유익을 알고 싶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거기 계십니까라는 임재에 대한 갈망이었다고 해석한다.
⚖️ 화자가 다룬 반론·한계
- 하나님의 뜻을 기도로 구하면 알 수 있다는 통념에 대해, 화자는 "매 순간 기도해도 모르겠다"는 현실을 스스로 인정한다.
-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구절이 결과적 형통을 보장한다는 통념에 대해, 남편을 잃은 부인의 반박을 그대로 소개하며 그 해석의 한계를 인정한다.
- 욥의 친구들이 "네 잘못 때문에 벌받는 것"이라 말한 논리를 언급하되, 화자 자신은 이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명확히 한다.
🧩 핵심 용어
- 감추인 것/나타난 것 = 신명기 29:29의 두 범주. 미래(하나님께 속함) vs 계시된 사건·율법(우리에게 속함)
- 기뻐하시는 뜻 =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원하고 좋아하시는 것
- 허락하신 뜻 = 하나님이 막을 수 있었으나 다른 계획을 위해 허용하신 것
- 형통하게 하셨더라 = 창세기에서 요셉의 고난 중에도 반복되는 표현, 고난 속 하나님의 계획 성취를 의미
🔎 보완 & 확인
- 배경·맥락 보완: 신명기 29:29은 원래 모압 언약 갱신 문맥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 순종을 촉구하는 구절이며, 설교에서는 이를 "인생의 진로 결정" 맥락에 적용해 재해석하고 있다. 로마서 8:28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개역개정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도 원문맥상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 완성을 가리키는 해석과, 화자처럼 "현재 고난의 무의미하지 않음"으로 읽는 해석이 신학자들 사이에서 갈리는 지점이다.
- 사실 유의점: 자막이 산상수훈("염려하지 말라", 마태복음 6장) 및 히스기야왕·여리고성 언급 대목에서 문장이 끊긴 채 종료되어, 이 부분 이후 내용(원래 2시간 분량 중 후반부로 추정)은 본 요약에 포함되지 않았다. 또한 극단적 선택을 언급한 사례는 민감한 내용이므로, 시청 시 주의가 필요하다는 점을 밝혀둔다.
자막 원문 (참고)
Kind: captions Language: ko 내가 한국에 있어야 할지 미국에 [음악] 있어야 할지 학교에 남아야 할지 아니면 직장 생활을 해야 할지이 사람과 결혼을 해야 할지 저 사람과 결혼을 해야 할지 [음악] 근데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고 말하지만 하루 일도 알지 못하는 저희들의 [음악] 입장에서 그 하나님의 뜻을 무슨 제주로 미리 알 수 [음악] 있을까? 저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저에게 떠오르는 성경 구절은 신명기 29장 29절 말씀이에요. 감추인 것은 어 [음악] 하나님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것은 우리에게 속하였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음악] 사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 하죠. 근데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 때 그 뜻이라는 말은 어 어떤 경우에는 그게 의도를 의미할 수도 있고 또 마음을 의미할 수도 있고 계획을 의미할 수도 있는 거 같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그 말은 하나님이 원하심이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일 수도 있겠고 아니면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묻는 경우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경우에 하나님의 뜻을 찾자고 기도를 하는 경우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그 일을 우리가 어떻게 찾아서 그 하나님의 계획대로 살 것인가 하는 것에 관한 질문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면 하나님의 뜻이 때로는 지나치기 운명론적인 경향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마치 어떤 우리에게 정해져 있는 하나님의 운명이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찾아가야 되는가 하는 것으로 이해를 하는 경우도 어 있지 않을까 싶어요. 제가 한 청년을 만났는데 그 청년은 미국에서 공부를 계속 해야 하는지 한국으로 돌아와야 하는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저에게 기도도 부탁하고 함께 기도하기도 했는데 그런데 사실 뭐 그래서 특별히 하나님께서 길을 가르쳐 주시거나 알려 주시는 경우도 아주 간혹 있을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그렇게 기도한다고 뭐 분명하게 알게 되지는 는 않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번은 한 자매가 저에게 전화가 왔어요. 그리고 만나고 싶다고 병원에 이번에 있던 자매였는데 어 그래서 제가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그랬더니 그 자매가이 하는 말이 원래 피아노를 전공했고 어릴 적부터 피아노를 했기 때문에 자기는 피아노를 계속 공부를 하다가 어 혼자 생각하기를 피아노를 해서는 어 생계를 유지하기도 쉽지 않고 그리고 또 경쟁도 너무 심하겠다 싶은 생각도 들어서 그래서 마음을 바꾸어서 어 생물학을 공부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래요. 한편으로는 평생 했던 피아노를 그만두는 것에 대한 마음의 불편함도 있었지만 워낙에 생물학을 좋아했기 때문에 공부를 아주 잘했어요. 그리고 저에게 전화 왔을 때는 그 당시에 어 박사 과정에서 생물학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어 온 몸이 다 아픈 거예요. 너무너무 아파서 꼼짝도 할 수 없을만큼 [음악] 많이 아프니까. 그러니까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이 뭔가 하면 [음악] 혹시 하나님은 내가 음악을 공부하기를 원하시는데 내 마음대로이 생물학을 공부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에게 벌을 [음악] 주시나 하는 그런 생각이 어 들더라는 거죠. 그 저에게 하나님의 뜻대로 가지 않아서 이렇게 벌을 받고 있는 건 아니냐고 [음악] 어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그 뭐 저야 뭐 하나님의 계획이 뭔지는 물론 모르지만 [음악]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볼 때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렇게 아 우리가 [음악] 잘 알지 못해서 어이 미래를 알지 못하고 결정하는 문제에 대해서 [음악] 책임을 물으시거나 우리에게 예지의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책망하시는 일은 없을 거다. 선하신 하나님은 [음악] 결코 우리가 전공을 바꾸었다고 어 하나님이 그렇게 벌하지 않으신다 하고 위로를 해 주고 [음악] 그냥 아픈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가지 않아서 그렇다고 [음악] 생각할 이유는 없지 않겠는가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하지만 그 자매는 사실은 그 고난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 [음악] 너무 버겁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 저하고 만나고 [음악] 어 한 일주일쯤 후에 제가 연락을 받았는데 아 그냥 극단적 선택을 어 하게 어 되었습니다. 그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음악] 그런 거죠. 어, 많은 사람들은 살면서 너무 힘들 때 그리고 너무 어려울 때 내가 어디에선가 길을 잘못 들어섰기 때문에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그 선택을 잘못해서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내가 그걸 미리 알 수 있었을까라는 그 고민을 어 하게 되는 것 같아요. 한번 제가 동부에서 사역을 할 때 어 어떤 분이 전화를 하셨어요. 그리고 어 그분도 재활원에서 이제 재화를 하고 계셨는데 교통사고로이 척추를 다치셔서 하반신 마비가 되신 분이었습니다. 근데 제가 찾아갔더니 그분이 어 굉장히 신실하신 분이에요. 하나님 잘 믿는 분이었고 아주 열심히 살시던 분이었는데 그런데 그분이 제가 찾아갔더니 막 웃시는 거예요. 그렇게 막 울면서 어이 교통 사고가 나서 신호등 앞에서 있는 걸 뒤에 큰 트럭이 와서 받아 받아서 어 그래서이 [음악] 이렇게 다쳤다고 이야기를 해요. 그분은 저한테 했던 말이 내가 그날 [음악] 그 전화만 받지 않았더라면 내가 그날 그 길로 오지 않고 다른 길로만 왔더라면 [음악] 그 평생을 장애인으로 살아야 되는 그 고난의 길을 가지 않았을 >> [음악] >> 텐데 아 자기가 그 전화를 받았다는게 너무 화가 나고 너무 속이상하고 [음악] 그리고 그 길로 들어섰다는게 너무 힘들다고 이야기를 어 하는 거예. 그런데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고 말하지만 하루 일도 알지 못하는 저희들의 입장에서 그 하나님의 뜻을 무슨 제주로 미리 알 수 있을까? 매 순간순간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저는 그래서 그분께 어 어쩌면 내가 뭘 잘못했기 때문에 선택을 잘못해서 이런 일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보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어 하나님의 어떤 특별한 계획 가운데서이 일을 허락하셨다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는게 더 맞지 않겠습니까라는 말씀을 어 드렸던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 때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의 뜻이 너무 운명론적이고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뜻이 지나치게 기복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이 뭐냐고 묻는 그 의도 속에는 어떤 길이 조금 더 수월한가를 묻는 것이고 어떻게 하면 내가이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피해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인데 사실 연약한 인간의 입장에서는 아 조금만 그 계획을 미리 알아도 좋을 것 같고 그리고 선택을 조금만 더 잘해도 어 많은 고난을 당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그 열악한 환경과 어쩔 수 없는 인간의 그이 연약함 가운데는 사실 그렇게 조금 더 기복적으로 어 구할 수 있는 건 어쩔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정말로 그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기도한다고 그렇게 미리 알아서 가장 쉽고 편한 길로 갈 수 있을까? 우리가 원하는 것이 너무 쉽고 편한 건 아닐까라는 생각은 좀 하게 되는 거 같아요. 제가 목회 초기에 한 교인이 저에게 기도 부탁을 하셨습니다. 아 이제 치킨 가게를 시작하려고 하신다고. 그런데 치킨 가게가 괜찮은 가게가 두 개가 나왔는데 저 보고 기도를 좀 해 달라 그래요. 어떤 가게를 하면 좋을지 기도를 해 달라고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어 제가 그 부탁을 받는 순간에 이건 내가 잘못하면 뒤집어 쓰겠다 하는 생각이 좀 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어 질문의 의도는 어느 가게가 대박이 나겠는가? 어떤 가게가 매상이 더 오르고 장사가 잘되겠는가는 걸 저보고 기도해 보고 좀 알아봐 달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인데 그러니까 장사가 잘 안 되면 완전히 재탓이 어 되는 거잖아요. 근데 우리가 내가 한국에 있어야 할지 미국에 있어야 할지 학교에 남아야 할지 아니면 직장 생활을 해야 할지이 사람과 결혼을 해야 할지 저 사람과 결혼을 해야 할지 뭐 이런 것들을 가지고 고민하고 있는 그 저의 어쩌면 우리는 조금 운명론적일뿐만 아니라 기복적인 아 그 요소가 다분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데 저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저에게 떠오르는 성경 구절은 신명기 29장 29절 말씀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을 이야기하면서 신명기서에 기록된다로 한다면 감추인 것은 하나님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것은 우리에게 속하였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까 여기 나타난 것이 우리에게 속했다고 말할 때 나타난 것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율법였고 그 당시에는 저희들에게는 성경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나타난 것이 무엇이냐고 말하면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되는데 우선 첫 번째 그 나타난 일은 바로 이미 되어진 일들이죠. 아, 그것은 나타난 것이다. 제가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건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죠. 아, 이미 벌어진 일이니까. 그러면 그 일은 나에게 속했다라고 이야기를 한다면 결국 저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왜 나에게이 장애를 주셨을까를 가지고 고민을 하고 그리고 그 답을 찾으려고 하는 것보다는이 장애를 가지고 그러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하는 것에 관해서 오히려 더 많이 생각을 해야 되는 건 아닌가?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물을 때 [음악] 저는이 장애를 주신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이 무엇이었는가 [음악] 하는 것보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내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실까 하는 그 질문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음악] 뜻을 찾는 질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두 번째로 하나님의 뜻을 이야기한다면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원하심이겠죠. [음악] 아, 남편의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어렵고 힘든 가운데도 감사하는 [음악]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보면 배려하고 도와주는 것 그게 하나님의 뜻이다. 성경이 명백하게 계시하고 있다면 [음악] 우리는 너무 미래에 관계된 혹은 기복적으로 운명론적으로 어떤 [음악] 계획을 미리 알려고 하는 것을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라고 말하지 말고 그 일에서 하나님의 [음악] 원하심이 무엇일까 하는 것을 찾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겠다. 그래서 감추인 것은 하나님께 속했다라고 말씀하시는데 감추인 것은 저는 미래의 모든 일들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실 저희는 지금 이렇게 오늘 하루를 지나고 내일 무슨 일이 있을지 한시간 후에 무슨 일이 있을지조차도 우리는 알 수가 없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산다는 말의 의미가 성경에 보면 종종 하나님 앞에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찾지 않아서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는데 그런 경우도 저는 그 구약에 나오는 사건들을 조금 더 구속사적으로 살펴봐야지 이것을 마치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어떤 원리인 것처럼 그렇게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매 순간마다 기도를 해야 된다는 것이고 더 힘든 거는 매순간 기도를 해도 모르겠다는 거죠. 그렇게 해도 하나님이 길을 선명하게 알려 주시는 것도 아니고 그런 의미라고 한다면 결국 감추인 것은 하나님께 속했다. 하나님이 [음악] 그 선하신 주권 가운데 내 삶을 인도하고 계시다고 하는 그 믿음을 가지고 우리는 [음악] 그냥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중에 어떤 일이 벌어지면 아 이게 하나님께서 이제 원하시는 일이었구나 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고 그리고 [음악] 그 가운데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건 뭘까를 생각하는 것 그게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 [음악] 아닐까라는 생각을 좀 하게 돼요.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이야기할 때는 [음악] 전 감추인 것과 계시된 것이 있는데 감추인 것은 하나님께 속했고 드러난 것은 [음악] 나에게 속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나님의 뜻에 관해서 또 오해가 되고 있는 또 다른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서 즉 발생한 일이라고 해서 그게 하나님께서 항상 기뻐하신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하는 거죠. 사람들이 그걸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 때 분노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게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셨던 일이라고 생각을 어 하는 겁니다. 지금 어이 벌어지고 있는 뭐 우크라이나 전쟁이 하나님의 뜻이었을까요? 아니면은 [음악] 한국 전쟁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 한편으로 생각하면 하나님이 절대적 주권을 가지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라면 그렇다면 저는 그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것이 맞겠다고 생각해요. [음악] 다시 말하면 그때는 그 말의 의미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일어나고 있고 하나님이 모르시는 일이 없다는 의미겠죠. 그래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하나님이 기뻐하셨다고 말해도 될까? 아마도 그것 때문에 저는 하나님의 뜻을 구분하면서 하나님의 뜻에는 기뻐하시는 뜻과 허락하신 뜻이 있다라고 그렇게 구분을 해 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어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 일을 허락하셨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뻐하고 계시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아마도 대표적인 예가 누가복음에 나오고 있는 탕자의 비유가 아닐까는 생각이 들어요. 그 아들이 자기 목세 유산을 가지고 집을 나가겠다고 했을 때 그 재산은 아버지의 재산이잖아요, 사실은. 그러니까 아버지가 안 주면 돼요. 안 된다고 말하면 되고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면 되는 건데 그런데 아버지는 그 아들이 그것을 가지고 나갈 수 있도록 허락을 해 주었죠. 하지만 허락해 주었기 때문에 그것을 아버지가 기뻐하신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아버지는 그 일을 기뻐하지 않으셨지만 거기에 그 아버지의 또 다른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아니면 그 의도가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허락해서 그 아들에게이 아들 목세 유산을 주고 난 다음에 아버지는 매일 기다리는 거죠.이 이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그리고 아들이 다시 와서 회복되기를 그 기다렸던 것 그것은 아마도 아 이건 모든 경우에 적용될 수 없겠지만 아마도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교육적인 의미에서 가서 고생을 좀 하기는 하겠지만 그렇지만 그것을 통해서 그 아버지의 사랑과 아버지의 보호하심을 [음악] 더 경험하도록 하기 위해서 허락하신 경우죠. 그러니까 아들이 나가는 걸 아버지가 좋아했다고 말할 [음악] 수는 없겠다. 요셉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 같아요. 요셉의 경우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하셨던 약속 때문에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음악] 애굽에서 400년 동안 종사리를 하다가 이제 큰 민족을 이루어서 [음악] 가나안을 이제 차지하도록 하기 위한 그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서 요셉이 [음악] 노예로 팔려서 아 그 근 어 어 13년 정도를 많은 고생을 하면서 그가 [음악] 살아가고 있는데 요셉이 그 고난을 받았던 그것은 하나님의 [음악] 뜻이었다면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었다는 의미이지만 요셉이 그런 고난 당하는 [음악] 것을 기뻐하셨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오히려 요셉이 그 당한 고난은 사실은 [음악] 요셉이 총리가 되는 개인의 명예나 아니면 개인의 어떤 영광과 [음악] 성취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은 다른 그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한 큰 민족을 이루어서 그 땅을 차지하도록 하기 위한 사실은 타인을 위한 고난이었다고 [음악]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당하면 그 고난의 원인이 뭘까 하는 것은 사실은 잘 모르잖아요. 어떤 경우는 그 고난이 우리들의 인품과 성품 또는 인격을 형성하기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하겠고 어떤 경우에는 그 고난이 징계인 경우도 있겠죠. 또 어떤 경우에는 사실은 우리의 고난이 누군가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 고난을 어 허락하시는 경우들도 어 있을 겁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고난을 당하실 때 주님은 예수님이 당하시는 고난을 기뻐하신게 [음악] 아닌 거죠. 주님이 기뻐하셨던 것은 예수님의 고난을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음악] 오히려 그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심으로 그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고 [음악]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그것을 기뻐하신 것이지 그 예수님이 고난 당하는 걸 하나님이 좋아하셨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 하는 겁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찾으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온전히 믿고 의지하고 그것을 신뢰할 수만 [음악] 있다면 그렇다면 나는 내가 당하는 고난이 왜 이런 고난을 내가 당해야 되는지 몰라서 [음악] 마치 하나님이 그 고난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면 그게 하나님께서 굉장히 좋아하신 일인 것처럼 [음악] 착각을 하면 저희들의 마음이 좀 많이 상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심지어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 고난 당하는 분들을 뵐 때마다음 저는 그 고난의 원인을 정말 모르겠어요. 아 그냥 제 마음 같아서는 제발 그런 일들 당하지 않았으면 하는 그런 간절한 마음이 있고 아픈 분들을 보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고 그리고 어 빨리 그 병을 좀 고쳐 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너무 간절하거든요. 그런데도 그래서 제가 하나님보다 선한게 아니라면 그런데 왜 하나님이 그 고난을 허락하셨을까?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는 그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셨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걸 기뻐하신게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아 우리는 그래서 그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고난 중에 참아내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을 더 하게 되는 거 같아요. 따라서 저희가 어떻게 하면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을까라고 그렇게 묻는다면 우리는 매일매일 주어지는 삶의 현장에서 그 선택의 순간에 [음악]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원하심을 당연히 기도해야 되겠고 할 수만 있다면 어려움 당하지 않고 좀 쉬운 길로 갈 수 있기를 [음악] 바라는 마음이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신다면 우리가 어려움 중에도 또 하나님을 [음악] 믿고 참아내고 또 기다리고 아 [음악] 그리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것 아 그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음악] 삶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어 생각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당하고 있는 그이 [음악] 경험하는 그 가난,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경험하고 [음악] 있는 그 아픔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사람들은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아프고 왜 가난할까를 [음악] 묻는게 아니라 저 가난한 사람과 아픈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하나님은 지금 나에게 무엇을 하기를 [음악] 원하실까 어떻게 살기를 하나님은 더 기뻐하실까 아마 그것을 [음악] 찾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을찾는 성도들의 모습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꽤 많은 경우에 하나님의 [음악] 뜻을 너무 기복적이고 운명론적으로 이해를 하다 보니까 아무리 기도해도 안 되는 거 같고 아무리 [음악] 어 살펴보아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 하나님의 뜻만큼 애매하고 많이 쓰는 말인데도 불구하고 어 [음악] 또 많이 오해가 되는 것도 없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좀 해 보았습니다. 입니다. [음악] 저는 동부에서 목회를 오래 했거든요. 이제 그 교회를 떠나서 서부에 와서 목회를 한번 해 보자. 서부로 갔는데 저는 그 선택이 정말 옳았을까? 33년 동안을 같이 살면서 [음악] 같이 울고 웃었던 사람들을 다 떠두고 전혀 아무도 모르는 사람들만 있는 LA에 [음악] 가서 새롭게 목회를 시작하고 그렇게 목회를 하면서 힘든 일을 만날 때마다 감당하기 어렵다 싶은 [음악] 일이 떠오를 때마다 내가 그때 잘못 선택한 거 같은데 그때 거기에 있었어야 [음악] 되는데 내가 너무 교만했던 것 같다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 사람들을 떠난 것을 [음악]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나에게 이렇게 벌을 주시나 그런 생각이 [음악] 들기도 하거든요. 그런데 그런 생각이 들 때 저의 마음을 지켜줄 수 있었던 것은 [음악] 레베카 페퍼트라고 하는 [음악] 여류 작가는 말하기를 인생은 사람이 살기는 좀 버겁다라는 말을 [음악] 했습니다. 근데 인생이 사람이 살기에 버거운 여러 가지 [음악]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 하나가 있다면 어떤 것이 최선의 선택인지를 모르는 그 상황에서 우린 끊임없이 무언가를 결정해야 되고 선택해야 한다는 사실이 저희들을 굉장히 두렵게 만들고 인생을 버겁게 만드는 것 같아요. 그래서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과거에 내가 잘못 선택한 그것 때문에 내가 실패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을 하기도 하고 그 현명한 선택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이야기하기를 나는 정말로 후회없는 삶을 살았다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지만 그가 택한 것이 최선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가 택하지 않았던 다른 것들은 어떤 결과를 냈을지 우리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죠. 아,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택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고 어떤 것이 최선인지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저희들로서 기독교인들은 종종 이럴 때 사용하는 말이 하나님께 맡긴다 하는 말을 씁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을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손에 맡긴다라고 이야기하는데 하나님께 맡긴다는 말은 그러면 무슨 말일까? 사실 그렇게 쉬운 개념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목회할 때 한 부인이 계셨는데 아주 옛날에 미국의 어린 아이들 둘 데리고 이민을 왔어요. 남편과 함께. 그런데 이민을 온 그다음 날인가요? 며칠이 안 돼서 남편이 일을 나가다가 교통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이 부인은이 아이들 둘 어린 깐난하기 둘을 키우느라고 정말 [음악]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뭐 중노동을 하기도 하고 버겁고 힘들게 살아가면서 그 외국에서이 아이들을 키우면서 [음악] 정말 열심히 살았어요. 그리고 그 아이들이 잘 성장해서 [음악] 나름대로 이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살 수 있게 되었는데 한번은 그분이 저한테 그 [음악] 말씀을 하세요. 자기는 모든 것이 합력해서 [음악] 선을 이룬다는 그 말을들을 때마다 너무 화가 난다는 거예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그 말이 어 너무 자기는 어이 [음악] 받아들이기가 힘들다고 이야기를 해요. 그렇게 말하는 분들의 그 의도는 비록 어 남편을 먼저 보냈고 그리고 힘들게 살았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결과적으로 그렇게 어 선하게 인도해 주셔서 아이들이 좋은 대학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좋은 자리에서 자기의 삶을 살게 됐으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 것이 아니냐라고 그렇게 말을 하는데 그분이 저에게 했던 말은 그 어떤 것도 내가 잃어버린 그 상실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아이들이 좋은 대학을 간 거, 아이들이 자리를 잡고 살아가는 것 자기 그거보다 내 남편 좀 돌려 주세요라는 말을 하고 싶다라고 그렇게 말씀을 하시면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 결과적으로 그게 다 잘될 거라는 의미라면 자기 인생에서는 남편이 떠나고 난 다음에 내 인생이 잘됐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라고 그렇게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그 말은 결과적으로 나중에 다 잘될 거라는 그러한 의미는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그 선택을 잘못했기 때문에 아니면 어떤 이유에서든 우리의 인생이 굉장히 길고 지루한 고난의 그 인생을 살아가는 경우들도 있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결과적으로 다 좋아질 거야라는 그러한 의미에서 바울은 합력해서 선을 이룬다고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라 비록 그 어렵고 힘들고 고통의 순간들이라고 할지라도 그 어떤 순간도 헛된 시간은 없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그 현장에서 어 우리가 버텨내고 살아낼 수 있는 것은음 내가 비록 힘들고 어렵지만이 힘들고 어려운 시간들도 결코 그냥 낭비되거나 헛되지 아니하고 설령 그것이 내 잘못된 선택으로 인하여서 발생한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조차도 하나님은 [음악] 헛대히 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그 믿음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고백 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냥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음악] 믿음뿐인데 그런데 그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실까 그거는 저희는 잘 알 수가 없지만 [음악] 그 견뎌야 되는 삶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다 평탄하고 [음악] 모든 것이 다 형통해서 꽤 괜찮고 고난이 없는 삶을 산 것만 의미 있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는 [음악] 그겁고 힘들게 견뎌낸 그것도 하나님 앞에 의미가 있는 삶이다 하는 [음악] 그이 믿음이 우리에게는 필요할 것 같아요.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의 이루시는 선이라는 것은음 이거는 이제 관점의 차이에 따라 다를 것 같은데 [음악]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냥 편안하게 누릴 수 있음이 [음악] 선이 아닌 거죠. 음. 진정한 의미에서의 선은 어쩌면 하나님의 원하심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아름답게 드러나게 되는 것. 그것이 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요셉의 생애를 보면 저는 좀 더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요셉의 생애 가운데 요셉은 진짜 고난 중에 살았던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그 요셉의 생애 가운데서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심에 그를 형통하게 하셨더라 하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처음에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심으로 그를 형통하게 하셨다라는 그 말이 처음 나온 건 그가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갔을 때 두 번째 나오는 하나님이 그를 형통하게 하셨다라는 말은 언제 나올까?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 그때 나오면 이해가 되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그 하나님이 [음악] 그 고난 가운데 드디어 그를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셨구나. 그런데 사실 [음악]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심으로 그를 형통하게 하셨다라는 말이 한 번 더 나오는 것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갔을 때입니다. [음악] 정말 억울하죠. 말도 안 되는 그런 누명을 쓰고 갔으니까. [음악] 그 상황에 있을 때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는 것을 간수장이 [음악] 보았고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심으로 그를 형통하게 하셨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음악] 그러면 요셉의 생에서 형통하게 하셨다는 그 말이는 의미는 비록 그가 굉장히 고난 가운데 절망 가운데 있었지만 [음악] 그 시간도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고 있는 시간이었더라. >> [음악] >> 그 의미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계획을 이루고 계셨던 그 시간이라 그렇다면 그 고난의 시간도 의미가 있다. 자신의 그 잘못된 선택 혹은 욕심에 의해서 아니면 뭐 본인의 어떤 교만함 때문에 잘못된 선택으로 인하여서 내 인생이 많이 힘들어졌다고 후회하게 되는 경우들도 물론 있겠다 싶긴 해요. 그런데 그 인간의 잘못된 선택이나 인간의 그 허물과 죄에 대해서조차도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다고 저는 생각해요. 그러니까 그 선택이 설령 내가 잘못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서도 결코 그를 버리지 않을 것이고 내가 그런 선택을 했기 때문에 내 인생은 실패한 인생이거나 내가 자초한 그 불행의 길을 가게 되었다고 그렇게 생각할 이유는 없겠다 하는 생각을 하는 거죠. 왜냐하면 어차피 모든 사람들이 내리는 그 결정 가운데는음 다 죄가 있는 거 같아요. 욕심도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니까 결과적인 것을 놓고 내 인생이 잘못되었다, 잘되었다를 말하기보다는 오히려 비록 내 선택이 어땠는지 그건 잘 모르지만 나는 죽을 힘을 다해서 살 거다. 그러나 그 결과는 주님의 손에 맡길 거다. 주님의 손에 맡긴다는 건 하나님의 선하심을 나는 의지하겠다는 그런 의미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설령 내가 잘못 선택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되는 경우라고 할지라도 내가 그때 그 선택을 잘못함으로 너무 좋은 걸 놓쳤다고 생각한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그걸 어떻게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도 우선은 한번 해 볼 만한 질문이고 설령 내 실수로 그것을 놓쳤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지금 현재 최선을 해서 살아가는 그 삶을 결코 무의미하게 만들지는 는 않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향하여서 가지고 계신 그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을 이루어 가시는 그 삶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게 더 심각한 문제일 수도 있겠는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내가 살아가는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면 그건 단순히 누림은 아니거든요. 얼마나 많은 걸 내가 누리고 얼마나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을 가지고 우리의 삶의 의미나 아니면 가치를 찾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극심한 고난 가운데 말로 다할 수 없는 그러한 상황에서 태어날 때부터 흑저로 태어 흑수자로 태어나서 그야말로 고난과 고생의 연속인 삶을 살았던 그 사람들의 삶도 그것도 의미가 있다고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거기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라고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때뿐일 텐데 그 우리는 이제 자꾸만 어 그런데 왜일까를 생각해 보면 왜 나에게 이런 걸 주셨 하나님은 왜 나에게 장애를 주셨을까? 욥이 힘들어 했던 것도 그거니까 하나님 왜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음악] 욥의 친구들은 너 잘못한게 있으니까 하나님 앞에 벌받는 거야라고 말했고 >> [음악] >> 욥은 그게 너무 억울했거든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왜냐고 계속 묻고 있는데 그런데 제가 이해하기에는 [음악] 뭐 저도 비슷한 경험을 했지만 그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이 [음악] 외를 묻고 있는 그 질문의 의도는 내가 당하는 고난의 원인과이 고난의 유익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다는 [음악] 그러한 질문이 아니라 오히려 욥처럼 내가 당하는이 고난 [음악] 가운데 하나님 하나님 거기 계십니까? 그 질문이었다고 생각해요. [음악] 하나님이 임재가 있고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지 만일 하나님이 거기 계시다면 [음악] 그러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내가 괜찮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계획과 의미가 있다면 내가 말로 다할 수 없는 그러한 힘들고 버거운 인생을 산다고 할지라도 그래도 저도 저는 괜찮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따라서 그 욥이 그렇게 간절하게 갈망했던 [음악] 너무 억울하다고 외치고 부르짖으면서 그가 찾고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음악] 임재죠. 하나님 거기 계십니까? 그 질문이고 저는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많은이 [음악] 땅에 고난 중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것이 잘못된 선택이었다 할지라도 [음악] 그로 인하여서 힘들어하고 버거워하면서 내가 그때 왜 그랬을까를 후회하고 [음악] 있는 그 현장조차도 결국은 하나님 여기 계십니까? [음악] 하는 그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목마음일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대답은 [음악] 내가 거기 있다 말씀하시고 그래서 욥이 나중에 크게 위로를 [음악] 받은 것은 하나님이 그 고난 가운데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셔서 내가 말로만 듣더니 이제 [음악] 직접 되니까 됐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하거든요. 주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음악]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현실적으로 가능합니까? [음악] 우리가 살면서 염려하지 않고 살 수 있나요? 먹을 것, 입을 것을 가지고 염려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이 아니면 그 길이 어 [음악] 있는 걸까요? >> [음악] >> 네. 예. 이제 사실 살면서 불안이나 아니면 걱정 근심이 생기면 어쩌면 어 믿음 생활을 잘 하려고 애를 쓰고 교회 생활을 하는 분들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걱정하고 있는 그 자신이 믿음이 없는 것처럼 보여지거나 [음악] 혹은 어 내가 바로 믿고 있지 않다는 생각에 불필요한 죄책감을 갖게 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음악] 불필요한 죄책감을 가지고 염려하는 행위 자체에 대해서 우리가이 우리가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있다면 아마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때문에 그렇겠죠.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잖아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시고 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라고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염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비결은 어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주님께 맡기는 것이다라고 그렇게 생각을 할 수가 있을 것 같아요. 근데 저는 이제 성경을 볼 때 자칫 우리가 우리의 그 연약한 한계 때문에 불가피한 일일 수도 있겠는데 우리는 자꾸 성경을 보면서 비결을 찾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노하우를 알고 싶어 하죠.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염려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면 하나님이 다 채워 주시니까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을 하는 그게 방법이라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뭐 그것처럼 성경을 보면서 히스기아 왕이 병이 나왔다고 하면 그러면 히스기아 왕이 어떻게 병이 나왔을까를 보면서 우리도 어떻게 하면 그 질병에서 고침을 받을 수 있을까 생각을 한다든지 여리고성이 무너진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여리고성이 왜 무너졌지? 그 여리고성이 무너진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일인데 사실은 순종을 요구하셨던 일이죠. 그런데도 우리는 거기에서 여리고성이 무너졌던 그 노하우를 찾으려고 합니다. 성을 돌아서 그렇다. 하루에 한 바퀴씩 돌고 일곱 번째 날 일곱 바퀴를 돌아서 그렇다. 만일 다 그렇게 말씀하진 [음악] 않겠지만 어떤 분이 그래서 땅밝길을 말한다면 그 성을 돌면 [음악] 하나님이 그 성을 무너뜨릴 거라고 생각을 한다면 하지만 여리고성의 그 사건은 사실은 어떻게 하면 성이 무너지는가를 어떻게 하면 승리하는가를 가르쳐 주신 것은 아닙니다. 가나안 전쟁 가운데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사건처럼 이와 같은 일은 단 한 번도 그 이후에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여리고성의 사건은 순종함을 보여 주신 것이 하나님의 능력보다도 하나님이 능력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면 굳이 그 백성들로 하여금 성을 돌게 하실 이유도 없었을 것 같아요. 그냥 줄 세워 놓고 봐라. 그리고 그냥 무너뜨리셔도 될 텐데 그들이 어떻게 순종을 통해서 그리고 그 아이성에서의 그 불순종을 통해서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전쟁을 해야 되는가를 어 주님께서 말씀하셨다면 이건 전쟁을이기는 노하우를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을 어 하는데 그런데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러면 나머지는 다 해결된다. 이것도 마치 그런 노하우를 말씀하시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아요. 행상을 하는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근데 그분이 행상을 하면서 아주 힘들게 살았어요. 어렵고 버게 살면서도 마음에 가지고 있던 꿈이 있다면 [음악] 내가 이제 돈을 좀 모아서 그 돈을 가지고 시장 어기에 가게 털을 하나 [음악] 장만하는 것. 그래서 더 이상은 행상을 하지 않고 가게를 운영하는 것 그것이 그분의 [음악] 꿈이었습니다. 그 정말 열심히 일을 하고 어느 정도 돈을 모았는데 이분이 다니는 교회에서 어 부흥회가 있었어요. [음악] 건축을 위한 부흥회였습니다. 그리고 그날 부흥회를 하면서 강사 목사님이 하셨던 말씀이 어 하나님은 새방사리를 하는데 교인들은 좋은 집에 산다고 이야기를 하고 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다 해결될 텐데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지 않고 세상 일로 염려를 하고 있기 때문에 삶이 지지부지하다라고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말을 듣고이 여인은 어이 정말로 그렇다는 생각에 아 그가 그동안에 모아두었던 모든 그이 돈을 건축 헌금으로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해결해 주시고 채워 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말이죠. 보통은 이런 간증이 끝나고 나면 그 간증의 결과가 그렇게 했더니 하나님이 무상으로 그 가게 털을 하나 얻게 해 주셨다든지 아니면 몰랐던 어 유산을 얻게 되었다든지 뭐 그렇게 끝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이 여인이 그런 간증을 한다면 저는 그게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게 틀렸다고 말하진 않을 것 같은데 그 이유는 그건 그 여인에게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그 교회가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모르기 때문에 저는 함부로 판단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그 간증이 갖는 위험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공식화의 문제라는 말입니다. 일반 특별한 경험을 자꾸 일반화시키려고 하는 경향이 있죠. 내가 이런 은혜를 받았으니까 당신도 이렇게 하면 은혜를 받습니다. 내 기도가 이렇게 해서 응답됐으니까 당신도 그렇게 하면 응답이 될 겁니다. 어 나는 이렇게 살았더니 하나님이 복을 주셨는데 당신도 이렇게 살면 큰 복을 받을 겁니다라는 식으로 그들이 경험하고 있는 그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를 자꾸 일반화시키고 공식화시키려는데 문제가 있다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런 간증이 가질 수 있는 두 번째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성과 속의 구분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교회와 관계된 것 아니면 종교적인 일들은 거룩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세상적인 일들이나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들은 다 세속적인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하면이 말의 의미가 먼저 그 종교적인 일들을 하면 보교회 봉사를 하면 교회를 잘 섬기면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머지는 잘 해결해 주신다라고 그렇게 이해를 하고 있는 것이죠. 그 우리는 종종 그래서 교회와 교회 아니면 종교적인 것과 비조교적인 것 이것을 나누어서 성과 속으로 구분하려는 그러한 경향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먼저 교회 나라를 구했더니라는 말은 먼저 교회에 헌금했더니 먼저 봉사했더니라는 말로 이해를 하게 되고 그러면 하나님이 다 채워 주신다라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제가 생각할 때는 심각한 이원화라고 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어 합니다. 주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현실적으로 가능합니까? 우리가 살면서 염려하지 않고 살 수 있나요? 먹을 것, 입을 것을 가지고 염려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이 아니면 그 길이 어 있는 걸까요? 아니 그 반대로 염려를 하지 않고 사는 삶이 혹은 패만하거나 아니면 무책임한 삶을 의미하는 것은 혹 아니겠습니까? 주님께서 아무것도 먹을 걸 위해서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드레핀 백화파를 보라.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그들이 길삼도 하지 않지만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지키시지 않는가라고 이야기를 한다면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삶의 방식이 그렇게 그냥 아무것도 준비하지 말고 염려하지 말고 그냥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러한 그 인생관을 주님께서 지금 말씀하셨다고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우선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지 않는가를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이 말씀이 의미하지 않는 바는 태만함이나 무책임함을 권장하는 그러한 삶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걱정들은 책임감에서부터 비롯되는 경우들이 허하게 많습니다. 대부분의 염려는 우리의 일상에서 책임감에서부터 비롯되는 염려들일 텐데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이 그것들로부터 자유하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건 아니어야 한다는 말이겠죠. 여기에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한 염려는 사실은 마태복음 6장 전체에서 보면 이것은 외식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 6장에서 처음 말씀하셨던 외식의 종류로는 어 종교적 행위에 있어서의 예식입니다. 유대인들이 경건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유대인들의 그 경건 활동 가운데 중요한 세 가지는 기도 그리고 금식 또 구제였습니다. 그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서 기도하고 시장 어기나 회당에서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기도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또한 주님께서 어 금식에 관해서 말씀하시면서는 너희는 금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사람들에게 금식하는 것을 보이지 않도록 하라고 말씀하셨고 그리고 또한 주님께서 말씀하시면서 어 구제할 때는 나팔을 불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이 이 세 가지 그 경건 행위에 대해서 문제가 되었던 그 동일한 그 공통적인 문제가 있다면 하나님을 향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사람만 의식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이이 일을 했다는 것이죠. 사람에게 보이려고의 반된 말은 사람에게 안 보이려고가 아닙니다. 그러니까는 골방이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어 가장 그 최고의 장소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의 의미는 아무도 모르게 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사람에게 보이려고 할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에게 보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다른 한 종류의 위선으로 주님께서는 염려를 말씀하셨다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어 먹고 사는 문제에 있어서는 어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그러한 모습인 거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창조주가 되시고 내 삶의 주인이 되신다고 말하면서도 예배당에서 예배를 하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노래하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찬양하면서도 정작 먹고 사는 문제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내 삶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