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nal 282nd Independence Movement
채널: 잘잘법 |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AkDp549By6c | 길이: 30:38
요약
🎯 TL;DR — 1919년 3·1운동에서 소수 종교였던 기독교가 민족대표 절반 이상을 배출한 배경에는, 성경·태극기·우산(근대화)이라는 세 가지 선물과 한성감옥 정치범들의 종교체험이 있었다는 내용이다.
📌 핵심 논지 — 화자는 기독교가 조선에 들어온 지 20~30년 만에 3·1운동 민족대표와 만세시위 주모자급 독립운동가의 다수를 차지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추적한다. 그 핵심으로 성경(만민평등), 태극기(구국애국), 우산(근대문명)이라는 세 가지 선물, 그리고 독립협회 해산 후 한성감옥에 수감된 지식인들의 옥중 종교체험을 제시한다.
🗺️ 영상 구성
- 이승만계 인물이 겪은 환상(도사/예수님이 세 번의 기회를 언급)으로 도입
- 3·1운동 당시 기독교의 통계적 비중 제시
- 평양장로회신학교 1907년 졸업사진(성경·태극기·우산)으로 세 가지 선물 설명
- 독립협회 창설과 해산, 한성감옥 수감 과정
- 옥중 도서실과 지식인들의 신비체험(이상재, 김정식 등)
- 결론: 민중은 높아지고 지식인은 낮아지는 체험이 결합되어 민족운동 세력 형성
━━━ 본문 ━━━
3·1운동 속 기독교의 비중 1919년 3·1운동 당시 조선의 기독교인 수는 장로교·감리교 합산 약 15만~20만 명으로, 2천만 민족 중 1% 안팎의 소수 종교였다고 화자는 설명한다. 그런데도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기독교인이 16명으로 50% 이상을 차지했고, 나머지는 천도교 15명, 불교 2명이었다. 화자는 1919년 5월 일본 헌병대 통계자료를 인용해, 서대문형무소 등에 수감된 만세시위 주모자급 9천여 명 중 무종교인이 5,400명으로 가장 많았고, 종교 있음을 밝힌 이들 중 기독교인이 1,939명, 천도교인 1,368명, 불교인 106명이었다고 밝힌다. 이는 종교인 중 60%를 기독교가 차지한 셈이며, 여성 수감자 164명 중에서는 기독교인 비율이 82.8%에 달했다고 강조한다.
세 가지 선물: 성경, 태극기, 우산 화자는 1906년 평양장로회신학교 1907년 졸업생 사진에서, 길선주 목사 손에는 성경, 한석진 목사 손에는 태극기, 송린서·서경조 목사 손에는 우산이 들려 있었던 것을 두고 이것이 기독교가 우리 민족에게 준 세 가지 선물이라 표현한다.
첫째, 성경은 만민평등 사상을 담은 복음으로, 500년간 유교 중심의 수직적 질서 아래 있던 사회에 새로운 수평적 인권 개념을 소개했다고 설명한다. 그 결과 지배계층보다 피지배계층, 부유층보다 가난한 계층에서 먼저 기독교에 반응이 나타났으며, 화자는 그 사례로 1901년 최초 한인 목사 김창식(머슴 출신), 서울 숭동교회 초대 장로 박성춘(백정 출신),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수장수 조카)를 든다.
둘째, 태극기는 구국애국을 상징한다. 기독교 선교 시기가 운양호 사건부터 경술합방에 이르는 일본의 침략·지배 시기와 정확히 겹쳤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성경 속 모세의 출애굽 이야기와 바벨론 포로, 이사야·예레미야를 자주 읽으며 국권 회복과 노예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메시지를 얻었다고 화자는 설명한다.
셋째, 우산은 근대화·서구문명을 상징한다. 배재학당, 이화학당, 경신학교 등 미션스쿨을 통해 근대 학문(수학·과학·물리·지지)이 전파되었고, 당시 교인이 되면 가장 먼저 상투를 잘랐는데 이는 봉건적 가치와의 단절을 뜻했으며, 그래서 교회를 "개화꾼"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독립협회와 한성감옥 서재필, 윤치호는 1884년 갑신정변의 주역으로 실패 후 해외 망명, 특히 미국에서 10년간 기독교인으로 살며 청교도 신앙 기반의 민주주의를 체득했다고 화자는 말한다. 1896년 귀국해 독립협회를 창설하고, 한글 독립신문 간행, 배재학당 토론회, 만민공동회를 통해 시민의식 개혁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점차 대통령제 요구까지 과격해지자 고종이 위협을 느껴 1899년 황국협회를 동원해 독립협회를 해산시켰고, 이승만·신흥우를 포함한 지도자들이 한성감옥(현 종각 영풍문고 자리)에 투옥되었다고 전한다. 이후 박영효 옹립설, 사관학교생 쿠데타설 등의 정치적 사건을 빌미로 이상재, 김정식, 유성준, 안국선 등 진보 정치범들이 대거 수감되었다.
옥중 도서실과 종교체험 아펜젤러, 존스, 언더우드, 게일 등 선교사들이 수감자들을 면회하며 중국어 서양철학·정치 서적과 기독교 서적을 반입해 자연스럽게 옥중 도서실이 개설되었다고 화자는 설명한다. 정치범들은 처음에 한문책만 읽다가 1900년 신약 한글성경이 인쇄되자 이를 읽기 시작했고, 1901~1902년 사이 옥중에서 신비체험을 겪는다.
이상재는 신약성경을 두 번째 완독하던 중 꿈속에서 예수님으로 짐작되는 인물을 만나 "내가 너와 네 민족이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세 번을 주었다. 지금까지 두 번을 네가 거부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만약 이번에도 거부한다면 너와 네 민족은 영원히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호통을 듣고 사라졌다고 회고했다. 이상재는 이를 세 번의 기회로 해석했다: 첫째는 1880년대 주미공사 수행원 시절 중국 공사관 서기로부터 한문성경을 선물받았으나 허무맹랑하다며 거부한 일, 둘째는 독립협회 활동 중 서재필·윤치호가 모임에 기독교 요소(찬송, 기도)를 넣자는 것을 종교모임이 아니라며 극구 말린 일, 셋째가 옥중 체험이었다. 이후 이상재는 성경 앞에서 자신의 오만함을 깨닫고 독방에서 펑펑 울며 회개했다고 화자는 전한다.
김정식은 이근택의 수하로 만민공동회 진압 명령을 받았으나 연사들의 말이 옳다고 판단해 오히려 시위에 동조했다가 투옥되었다. 그는 일곱 자녀를 모두 잃고 시각장애인 막내딸만 남은 불행한 가정사를 겪었는데, 옥중에서 『천로역정』의 주인공 존 버니언이 시각장애 딸과 함께 수감생활한 이야기에 심취했다. 어느 날 비몽사몽간에 "예수 형님"이 나타나 "내 너를 안다" 하며 등을 두드려주었고, "예수 형님 무릎에 내 머리 되고 밤새 펑펑 울었노라"고 회고했다고 화자는 전한다.
이상재, 김정식을 비롯해 유성준, 안국선, 이승만, 신흥우 등이 옥중에서 차례로 이런 체험을 하고, 1902년 성탄절 무렵 대부분 예수님을 영접해 감옥 안에서 자체 성탄예배를 드렸다고 화자는 설명한다. 이들은 옥중에서 누린 자유와 해방이 예수님을 알았기에 가능했다며, 석방되면 자신들을 감옥에 이끈 이근택을 찾아가 감사를 표하자고 결의했다는 일화도 전한다.
결론: 낮아짐과 높아짐의 결합 화자는 초기 기독교가 백정, 갑바치, 머슴, 수장수 등 밑바닥 민중계층에게는 존재가 고귀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여 신분이 상승되는 체험을 준 반면, 독립협회·한성감옥을 거친 지식인·엘리트 계층에게는 자신들의 오만이 깨지며 낮아지는 체험을 주었다고 정리한다. 봉건사회에서 단절되어 있던 지배계층과 민중계층이 기독교를 통해 접합점을 찾았고, 민중의 운동력과 지식인의 민족의식이 결합되면서 대한제국 시기 기독교의 민족운동 세력이 형성되었으며, 이것이 결국 3·1운동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화자의 결론이다.
🔢 핵심 수치
- 3·1운동 민족대표 33명 중 기독교인=16명 (천도교 15명, 불교 2명)
- 1919년 5월 기준 만세시위 관련 수감자=약 9,000여 명
- 무종교=5,400명, 기독교인=1,939명, 천도교인=1,368명, 불교인=106명
- 종교인 중 기독교 비중=약 60%
- 여성 수감자 164명 중 기독교인=82.8%
- 당시 조선 기독교인 수=약 15만~20만 명(전체 인구 대비 약 1%)
💬 결정적 발언
"내가 너와 내 민족이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세 번을 주었다. 근데 지금까지 두 번을 네가 거부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만약에 이번 기에도 네가 거부한다면 너와 네 민족은 영원히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예수 형님이 내게 나타나사 내게 하시는 말씀, 내 너를 안다."
"예수 형님 무릎에 내 머리 되고 밤새 펑펑 울었노라."
🧩 핵심 용어
- 민족대표 33인 = 3·1운동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명의 대표
- 독립협회 = 서재필·윤치호가 1896년 창설한 시민 계몽·개혁 단체
- 만민공동회 = 독립협회가 주도한 대중 토론·여론 집회
- 한성감옥 = 독립협회 해산 후 정치범들이 수감된 옥사(현 종각 영풍문고 자리)
- 충군애국 =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자는 당대 기독교인들의 구호
⚖️ 화자가 다룬 반론·한계
- 화자는 스스로 "이상재 선생 후손 손에 남은 옥중 도서 출납장" 등 1차 자료의 존재를 언급하며 근거를 제시하지만, 별도로 자신의 해석에 대한 반론을 직접 다루지는 않는다.
- 화자는 정치범들이 석방 후 실제로 이근택을 단체로 찾아갔는지는 "확인을 못 한다"고 스스로 한계를 밝힌다.
🔎 보완 & 확인 (요약가 註)
- 배경 보완: 영상에서 언급된 이상재(1850~1927), 김정식은 독립협회·YMCA 계열 인사로 알려져 있으며, 한성감옥 개종 사건은 한국 기독교사에서 "한성감옥 부흥"으로 자주 다뤄지는 사례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배경 지식이며, 세부 연도·인명 표기는 원 자막 그대로 옮겼다.)
- 사실 유의점: 영상 속 "3·1운동 당시 기독교인 15만~20만 명, 전체 1% 안팎" 수치와 "수감자 9천여 명 중 기독교인 60%" 수치는 화자가 스스로 "정확한 통계는 잡기 어렵다"고 전제한 값으로, 출처(일본 헌병대 통계 등)의 정확한 원문 대조는 확인이 필요하다(추정치일 가능성).
- 사실 유의점: 이상재의 "환상 체험" 일화는 그의 사후 회고(기독신보 등)에 근거한 것으로 화자가 소개하지만, 정확한 발표 매체명·연도는 자막상 다소 불분명해("26년... 27년에 돌아가시는데") 원출처 확인이 필요하다.
자막 원문 (참고)
Kind: captions Language: ko 이분이 꿈속에 환상 중에 도사 같은 양반을 만납니다. 그게 이제 예수님이에요. 내가 너와 내 민족이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세 번을 주었다. 근데 지금까지 두 번을 네가 거부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만약에 이번 기에도 네가 거부한다면 너와네 민족은 영원히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호통을 치고 사라졌대요. 그리고 꿈을 꾼 다음에 곰곰하게 생각한 거예요. 나한테 세 번의 기회를 줬다. 알고 봤더니 자기가 제일 첫 번째는 뭐냐? 1919년 3일운동이 일어날 당시에 이제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선교한지 이제 한 20년 조금 넘었을 때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그게 역사가 짧죠. 그리고 그때 당시 기독교 교인수가 정확한 통계는 참 작기 어렵습니다만은 뭐 장로교 감력교 다 합해서 한 15만에서 한 20만 정도 전체 그때 2천만 민족이라고 우리가 보면은 조선 민족 가운데 그 1% 안팎으로 아주 소수 종교라고 할 수가 있겠죠. 그런 어떻게 보면 이제 선교 역사도 짧고 교세도 그렇게 크지도 않은 기독교가 어 이게 민족 독립 자주 독립을 위한 독립 선언서에 서명한 민족 대표 33명 가운데 16명 50% 이상이죠. 음. 16명을 기독교인들이 차지하고 그다음에 이제 나머지 15명이 천도교 그리고 두 명이 이제 불교 이렇게 이제 민족 대표가 구성이 됩니다. 그 민족 대표로 참여했던 그 기독교인 선명은 다 목사 아니면 전도사 혹은 장로 그래서 교회 지도층 인사들이었죠. 민족 대표뿐만 아니라 이제 3월 1일 이후에 이제 전국적으로 만세 시위가 서울을 비롯해서 평양원산 자모 전국에서 이제 만세 운동이 가열차게 한 두 달 동안 일어납니다. 그래서 체포대에서 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 그게 1915년 5월 당시 이제 일본 헌병대 통계자료에 나온 겁니다. 그때 당시에 만세 시위로 어 수감되어 있는 그때 아주 시위 초이니까 아주 주모작금만 체포가 된 거겠죠. 만수 시위 과정에서 앞장서서 어 시위를 이끌었던 그런 지도자들을 체포해서 수감되는데 한 9천여 명 됩니다.이 9천여명 되는 수감자 중에 무종교인이 제일 많아요. 한 한 5,400명 정도가 자기는 종교가 없다. 아 이렇게 표현을 했고요. 자기가 종교가 있다고 밝힌 사람 가운데 1939명이 기독교인입니다. 그리고 천도교인이 1368명이고 그다음에 불교인이 106명.이 이 수치를 봐도 민족 대표뿐만 아니라 대중 시위 과정에서 시위를 이끌었던 주모자급 독립운동가들 중에 60%를 어 기독교가 차지하고 있었다. 종교인 가운데 여성은 더 합니다. 여성 수감자는 전체 한 164명 정도밖에 안 돼요. 그런데 164명 가운데 내가 기독교인입니다 하고 밝힌 사람이 82.8%예요. 8%예요. 그러면 이런 과정에서 결국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선교한지 이제 아직 30년도채 미치지 않은 시기에 어떻게 해서 기독교가 이런 민족 운동의 최선에서 앞장서서 이런 운동을 할 수 있었을까? 그 배경은 뭔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기독교가 이렇게 짧은 선교 역사 가운데서도 이런 민족동의 주도자로서 선도적인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아마이 부분에 있어서 지금도 이제 동작동에 국립 묘죄가 배문은 순국 열사 혹은 애국 열사여 묘역이 따로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상당히 많은 기독교인 지도자들이 거기에 묻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어요. 민족 대표로 참여했던 이필주 목사님, 최성모 목사님, 뭐 박동환 선생님, 김창준 선생님, 신석구 목사님, 오영 목사님, 김선주 목사님, 뭐 이런 분들 외외도 전덕기 목사님이라든지 주식 선생이라든지 소시키라선과 같은 기독교인들이 애국자로서 이제 국립 요소에 안장되어 있다 하는 얘기는 일제 강정기 시대 내내 파로 행 해방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독교인들이 항일 민족 족운동에 아주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하는 사실을 우리가 확인할 수가 있는 거죠. 그런 역사적인 배경을 우리가 좀 거슬러 올라가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제가 1906년 당시에 평양에 있었던 장로회 신학교이 선교사님들이 운영하던 오늘날에 이제 남쪽에서는 장로교회 총신이나 장신의 모체가 되죠. 평양 장로회 신학교 학생과 교수들이 찍은 사진을 우연히 봤습니다. 그럼 제일 앞자리에 1907년에 졸업을 하고 안수를 받게 되는 일곱 명의 김선주 목사님, 그다음에 한석진 목사님, 송린서, 서경조 이런 분들이 쫙 앞줄에서 있거든요. 근데 그 1회 졸업생들의 손에 아주 흥미로운 것이 쥐어 있는 것을 봤어요. 제일 가운데 자리에 있는 길선주 목사님 손에는 성경이 들려 있었고 그 옆자리에 한석진 목사님 손에는 태극기가 들려 있었고 그 옆자리에 송림서 목사님 그리고 서경 목사님 손에는 우산이 들려 있어요. 그래서이 세 가지 성경과 태극기와 우산 이것이 상징하는 것이 상당히 저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거는 곧 우리 한민족에게 준 기독교의 세 가지 선물로 저는 그렇게 표현을 해요. 그러니까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와서 교회 세우고 뭐 교인들을 세례를 해 주고 뭐 이런 것도 많이 했지만 역사적으로 보면은이 세 가지 선물을 우리 민족에게 주었다. 첫째는 성경입니다. 아 성경은 복음이죠. 그 복음이 우리 민족에게 처음으로 소개가 된 거죠. 기독교 복음이 그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은 만민 평등 사상이에요. 하나님 앞에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다.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전에는 500년 동안 유교 중심의 어떤 그런 전제 본건주의 체제 그래서 수직적인 질서가 강조되는 그런 시기예요. 극소수의 상류충과 절대 다수의 민중계총으로 이원화가 된 기독교의 성경이 우리 민족에게 전달되면서 평등이라고 하는 수평적인 개념의 새로운 인권 개념을 우리가 소개받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다 평등한 사회. 그러다 보니까 기독교 복음이 들어왔을 때 이런 본건적인 사 수직적인 사회에서 눌렸던 사람들, 소회됐던 사람들이 기독교 복음에 더 적극적으로 응할 수가 있어요.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 일어났던 동학 혁민과 같은 그런 것들이 이제 결국 평등 사상을 구현하기 위한 운동이었는데 그게 한개 부딪쳐서 결국 끝나고 말았지 않습니까? 그러다 보니까 기독교가 추구하고 있는 남는 평등 사상이 이제 한국 사회에 전파가 되었을 때 지배 계층보다는 피의 계층, 부유한 계층보다는 가난한 계층에서 먼저 기독교에 대한 반응이 나타나죠. 1901년에 우리나라 최초 한인 목사가 안수를 받습니다. 김창식 목사님이라고. 이분이 머음 출신이에요. 그리고 서울 숭동교회 초대 장로 박성춘 장로님이 백정 출신이에요. 제일 밑바닥 계층이죠. 아주 천대 받았던 그리고 한말과 일제 강정기 독립운동에 아주 중요한 핵심적인 역할 했던 분이 상동계 전덕기 목사님인데 이분은 남대문 시장 바닥에서 수술 팔던 수장 수술의 조화예요. 어려서 고하고 그러니까 이처럼 본건 사회에서는 소회당하고 지배당하고 소외됐던 계층들이 기독교를 통해서 나도 하나님께서 고귀한 존재로 피조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를 통해서 이분들이 장로가 되고 목사가 되고 지도자가 되어 가는 과정이에요. 그러니깐 성경이 우리 민족에게 준 가장 큰 선물 중에 그것을 저는 제일 먼저 꼽아요. 두 번째는 이제 태극기입니다. 한석진 목사님. 그분은 이제 독립협회 평양 지부장을 하셨던 분이에요. 그래서 이분은 기독교로 개종할에 이미 독립협회 활동을 하셨던 분이에요. 우리나라의 기독교가 들어온 그 시기가 일본이 우리를 침략하고 지배하는 시기하고 이게 겹칩니다. 그렇게 해서 운양호 사건부터 시작해 가지고 청일 전쟁, 러일 전쟁, 울산 늑다에 정미 7조약 그리고 나중에 경술 합방에 이르기까지이 모든 일본의 침략과 지배의 과정이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와서 뿌리 내리고 정착하고 확산되는 그 시기하고 정확하게 일치해요. 그러다 보니까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일제의 침략과 지배라고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고민하게 되는 거죠. 결국 예수 믿고 천당가고 예수 믿음 복받는다 하는 기복적인 그런 것이 아니라 위기 처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백성된 한 사람으로서 기독교인들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랬을 때 성경에서 이분들이 읽는 얘기가 모세의 출애급 얘기를 많이 읽어요. 그리고 바벨론 포로 이야기를 많이 들어요. 이사야 예레미야 굉장히 많이 읽습니다. 그래서 국권 회복, 나라의 회복, 그리고 노예로부터 해방. 이런 메시지가 교회 지도자들에게 아 성경이 이걸 가르쳐 주는구나. 그래서 진리가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자유케 되리라고 하는 그 말씀에 결국 우리가 일본의 침략과 지배의이 현실 속에서 기독교의 근본적 신앙이 자유와 해방인데 우리 민족을 자유 해방 자주 이런 국가로 만들어 가는 것이 기독교인의 당연한 의미가 아니겠느냐 이런 의식을 갖게 되는 거죠. 그러다 보니까 기독교인 가운데 성경을 읽고 자유와 자주 해방이라고 하는 개념을 민족의 처한 상황에서 그걸 실천하려고 하는 운동들이 나타나기 시작을 한 거죠. 그런 다음에 이제 우산이 상징하는 것은 근대화입니다. 서구문이에요.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선교사를 통해서 비로소 근대학문, 근대문, 근대 문명이 한국에 전파가 되기 시작하죠. 그 전까지는 우물 안에 개구이었죠. 그래서 세계가 어떻게 변하는지 전혀 관심이 없었던 거죠. 그런데 이제 배제학 서울에서 설립된 배제학당이나 이화학당 경신학교 이런 미션 스쿨을 통해서 근대 학문 수학과 과학과 물리 생물 지지를 과학적인 사고를 하게 돼요. 그러면서 서구에 발전된 문물이 기독교를 통해서 한반도에 들어오게 됩니다. 세계의 흐름에 비로써 한국의 지도자들이 호흡을 같이 하게 돼요. 결국 한국의 근대화의 과정에서 기독교 학교, 기독교 병원, 또 교회가 그런 중요한 통구가 되는 거죠. 그때 당시에 교인 되면 제일 먼저 하는게 뭐냐면 상투 자르는 거였어요. 상투 자르는 것이 교인된 표시였습니다. 상투를 자른다는 것이 뭘까요? 본건적 가치, 본건적 사회, 제도 관념 여기서부터의 단절을 의미하는 거죠. 그래서 그때 당시에 교회는 개화꾼이라 그랬어요. 교회 다니면 다 개화한다. 상투 자르고. 그래서 이제 근대화 과정에서 기독교가 그 역할을 감당하게 되는 거죠. 태극기 얘기를 조금 더 해 보십시다.이 태극기는 이제 대한제국 때 만들어진 겁니다. 그러니까 일본이 막 우리를 침략하는 이제 청일 전쟁 이후에 우리도 이제 세계로 어 나가야 되다 보니까 이제 서구 국가들이 가지고 있는 태극기도 우리가 필요했고 애국가도 필요했던 거죠. 이제 그렇게 해서 태극기가 이제 교회 기독교인들에게 아주 중요한 상징으로 어 다가오게 됩니다. 그래서 그때 당시 충구 애국이라는 말을 많이 썼어요.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자.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들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이다 해서 구국 운동, 구국 기도회 이런 걸 많이 하게 됩니다. 1896년에 해외 막명 같던 서재필 윤치 선생 이분들은 다 1884년에 일어났던 가심정변 때 주역이었어요. 그때 당시 다 유교 신봉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쿠대타를 일으켜 가지고 정권을 좀 해 보려고 전복해 보려고 했다게 실패하죠. 그리고 이분들이 다 해외 망명을 합니다. 그래서 중국이나 일본을 거쳐서 미국으로 가게 됩니다. 그래서 해외 망명, 특히 미국에서 10년 동안 망명 생활 하면서 이분들이 비로소 미국에서 미국식 시민 사회 운동,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체득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분들은 유교적 가치관을 가지고 계셨던 분인데 해외 망명 10년 동안 기독교인으로 살다 보니까 미국 사회가 미국이란 나라 자체가 퓨리턴 청교도들에 의해서 기독교 신앙 바탕 위에서 세워진 나라고 그것이 나름대로 대의민주의 그래서 투표로 대통령을 뽑는 그런 시민 사회 운동이 나라의 기반이 됐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이 강대국으로 발전하는 기초 원리가 됐다는 걸 알게 된 거죠. 그래서 1895년에 두 분이 다 들어와서 1년 후에 독립협회를 창설합니다. 그 독립협회가 추구했던 거예 바로 그 운동이에요. 과거에 전제 본건자 사회에서 위에지도 계층만 바꿔 가지고는 나라가 발전이 안 된다는 걸 이분들이 안 거예요. 그래서 밑바닥부터 의식 개혁 운동을 해야 된다. 시민 의식. 그래서 독립 신문을 한글로 가행하기 시작해요. 그 한글이 바로 대중의 언어이기 때문에. 그러면서 여론 운동을 시작하는 겁니다. 독립 협회가 바로 여론 운동이에요. 그리고 정보를 계속 날아다는 거예요. 정보의 독점이 아니라 서제필 선생이나 윤초 선생이 제일 가르친 것이 바로 배제학당에서 토론회입니다. 토론회라고 하는 말은 누구든지 자기 생각을 발표할 수 있는 권리 자격이 있다는 거예요. 이게 만문 평등 사상이에요. 그러다 보니깐 학생회를 통해서 협성회를 통해서 이런 토론 문화를 그래서 모든 문제를 다수결로 결정하는 민주주의적 절차 그거를 학생들한테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이제 시민 사회 운동을 하면 만민 공동회가 되는 거죠. 그래서 만민공동회를 통해서 이제 비로소 계층 사람들이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거예요. 이런 과정을 통화하면서 결국은 500년 동안 지탱해 왔던 본건적 사회 체제에 대한 그 한계점이 무엇인지를 민중계층이 아는 거죠. 그러면서 개혁 운동이 시작이 됩니다. 시민 사유. 그러다 보니까 뭐 내각제로 하자. 뭐 프랑스 식으로 하자. 뭐이 내각제로 하자. 이런 의견들이 히 나옵니다. 그러다 보니까 처음에는 고종황제가 독립 협회를 굉장히 지원해 줬고 지지해 줬어요. 개혁적일 개화파 어 흐름에. 근데 이게 점점점 과각해지는 거예요. 이제는 왕이 아니라 대통령을 우리가 뽑아야 된다. 이런 식으로까지 가니까 위협을 느끼는 거죠. 그래서 1899년에 고정황제가 결국은 수급파들의 손을 들어 줍니다. 그래서 황국 협회 보부상들이 중심이에요. 한국 협회를 어 대항 조직으로 만들어 가지고 그래서 황국 협회와 독립협회를 동시에 해산시켜 버리는 그래서 1899년에 독립협회 해산이 되고 가장 극렬하게 아이 정체 계약을 주장했던게 바로 배제학당의 이승만 신흥우 두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그들 비롯해서 동협회 지도자들을 체포해서 한성 감옥에 가둡니다. 그 이후에 이제 1900년 1901년 계속해서 일본의 망령 중인 박영을 뭐 대통령으로 추대하려고 그랬다. 일본에서 사관학교를 다니던 사람들이 국내로 와 가지고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했다. 이런 정치적인 사건들을 계속해서 보수파 직권 세력들이 그걸 만들어내 가지고 소위 말하면 진보적이고 과거에 독립협회 지도자들로 활동했던 사람들을 체포해서 한성 감옥에 가둡니다.이 이 한성 과목이 지금 서울 종각의 그 영풍문고짜리가 바로 한성 과목짜리예요. 그래서이 한성 감옥에 소위 말하면 독립협회 중심으로 활동했던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정치 지도자들이 대거 수감이 됩니다. 이상제, 김정식, 유성준, 안국선 독립 협회의 진보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던 정치범들이 전부 한성 과목에 갇치게 되죠. 처음에는이 사람들이 어떻게 정체적인 음모 때문에 자기네들이 수감됐기 때문에 복수심 나가기만 하면 우리가 정권 잡고 다시 수급파 세력들을 전복시키리라. 특히 이제 그때 당시에 독립협회의 부회장으로 활동했다가 세대가 급변하면서 급격하게 친업화로 어 말을 갈아탄 이완용 아주이 수급파에 의뜸이 됩니다. 나중에 이제 7파 거두가 됩니다. 그리고 이제 이근택이라고 하는 경무 총감 그래 이근택을 통해서이 정치범들을 다 체포해 가지고 수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이 정치범들의 머릿속에는 나지만 하면이 이근을 우리가 뭐 어떻게 듣든지 응징하리라는 복수심이 꽉 차 있었던 거죠. 그런데이 수감 생활이 길어지는 거예요. 계속해서 보수 세력들의 직권이 점점 더 공고해지는 거죠. 그래서 1901년 2년대 되면 굉장히 한성 감옥 안에서 2년 3년 옷골를 치르는 과정 중에 좌절합니다. 절망을 합니다. 그런데 이무렵에 이제 이승만 신흥우가 배제학당을 다녔기 때문에 배제학당 교사였던 아펜젤러 그다음에 존스 경신학교 언더우드 학당을 만들었던 그 언더우드 게일 이러한 선교사님들이 옥중에 수감되어 있는이 정치범들을 면합니다. 면하면서 그 수감자들이기 때문에이 사람들 다 벼을 하던 사람들이니까 무료하니까 독서를 좋아해요. 책 있기를 그래서 집중적으로 감옥 안에 책을 집어넣어 줍니다. 차입을 해 줘요.이 사람은 양반 출신들이기 때문에 중국에서 인쇄된 중국 상해나 어 북경에서 인쇄된 한문으로 된 서양 철학, 서양 문명, 서양 정치 한문 책을 많이 넣어 줘요. 그리고 나서 그때 당시 이제 배제의 학당에 부속했던 삼문 출판사에서 인쇄된 장양호 상론이라든지에 뭐 유약 황독이라든지 철로역정이라든지 이런 기독교 서적들도 집어넣어 줘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옥중 도서실이 개설됩니다. 그때 당시에 이제 한성 감옥 감옥이 수감자들의 뭐 어떻게 보면이 수감자들의 지식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서 그런 옥중 도서실 개설을 허락해 줘요. 그러니까이 과정에서 정치범들이 기독교 서적 처음에는 이제 기독교 거듭 보지도 않습니다. 유교 신봉자들이기 때문에 지금도 이제 그때 옥중 도서 출납장이 지금도 남아 있어요. 자료로. 어, 그게 이제 이상 선생님 후손에 손에서 그게 남아 있어요. 그래 가지고 그게 이제 연구자들한테에 공개가 됐는데 그러면 누구는 무슨 책 빌려갔다가 얼마만에 그걸 반납했고 그게 다 나옵니다. 그래 보면이 정치범들 초기에는 다 한 문책을 읽어요. 중국에서 나온 근데 중국에서 나온 한 문책도 밑바탕은 다 기독교적인 거거든요. 서양 정치사, 서양 철학사, 서양 문명사 이런 것들.데 근데 그런 걸 다 읽다 보니까 또 읽을 책이 없으니까 이제 그다음에 한글로 들어가요. 그러다 봐가 마지막에 이제 1900년부터 한글 성경이 신약 성경이 인쇄돼서 나와요. 그래서 한글 성경을 읽기 시작을 합니다. 그 과정에서 1901년 1902년 어간에이 지식인들이 옥중해서 종교적인 신비 체험을 해요. 그러니까 수감된지 2년 3년 돼서 언제 석방될지는 모르고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결국 유일한 소일거리가 책이 읽기인데 책을 읽다 보니까 점점점 서양 문명사, 서양 철학사, 서양 정치사를 통해서 서양 종교사를 가고 그다음에 한글로 인쇄된 성경책 본질까지 가게 되는 거죠. 거기서 결국 평소에 하지 못했던 신변 종교 체험을 합니다. 이상제 선생 같은 경우에 신약 성경을 한번 빌려다가 완독했어요. 두 번째 또 빌려다가 읽기 시작했을 때 어느 날 저녁에 이분이 꿈속에 환상 중에 아주 신비로운 도사 같은 양반을 만납니다. 그게 이제 예수님이에요. 그래 가지고 그분이 호통을 치는 거예요. 내가 너와 내 민족이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세 번을 주었다. 근데 지금까지 두 번을 네가 거부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이다. 만약에 이번 기에도 네가 거부한다면 너와네 민족은 영원히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호통을 치고 사라졌대요. 이게 나중에 이제 26년 그분이 이제 27년에 돌아가시는데 그 전에 이제 기독 신부에 자기가 어떻게 해서 예수 믿었는가 하는 걸 이렇게 회고로 씁니다. 그리고 꿈을 꾼 다음에 곰곰하게 생각한 거예요. 나한테 세 번의 기회를 줬다. 알고 봤더니 자기가 제일 첫 번째는 뭐냐? 주미공사의 수행원으로 미국 갔던 적이 있어요. 1880년대. 그래서 미국가 가지고 처음으로 그 중국 통변으로 나온 중국 서기관한테 중국 공사관의 서기관한테 미국이 이렇게 부강한 나라가 된 비결이 뭔지를 내가 배우고 싶다 그랬더니 아마 그 사람이 크리스천이었나 봐요. 그래서 미국 공사관에서 나온 그 서기가 한문 성경책을 선물로 줬대요. 그래서 이상 선생이 처음에는 그 짝을 탁 보고 아 여기 두려이 미국이 이런 강대국이 된 비결이 다 여기 있다. 군함은 어떻게 만들고 다리는 어떻게 건설하고 그다음에 정부 조직은 어떻게 이게 있는 줄 안 거야. 그러는데 딱 펴서 읽으니까 뭐 세상을 뭐 7일 만에 창조했다는 등 뭐 온 세상에 물에 잠겼다가 났다는 등 뭐 예수가 무리를 걸었다는 허무맹랑 거예 이게. 그래서 당장 저번 치우고어야 이거 요상한 책이다. 이렇게 허무망랭 책이 있냐? 그리고 한국에 있는 자기 아들 이승인한테 야 내가이 야소교 성경책 하나 읽었는데 이거 허무맹랑하다. 너 당 이런 건 읽지도 말아라 하고 편지를 썼다는 거야. 그게 이제 첫 번째예요. 두 번째는 언제냐? 아, 독립협회 운동을 하면서 서제필 선생이나 윤초 선생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모든 독립회 모임에 기독교적인 요소를 집어넣으라는 거예요. 모이면은 만민공동이 하기 전에 찬송 부르고 기도회하고 선교사 불러다가 설교도 듣고 이런 걸 하려고 그런 거예요. 그걸 극적으로 말린게 이상제 선생이에요. 이건 종교 모임 아니다. 이건 일반 시민 모임이다. 그것이 바로 두 번째라는 거예요. 이제 옥중에서 세 번째인 거죠. 그렇게 해서 그 두려움이 요번이 마지막 기회다 하고 사라지셨으니까. 그래서 이상제 선생이 두려움을 가지고 성경을 읽다 보니까 성경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추악한 존재인지가 깨달아지면서 얼마나 교만하고 얼마나 자기가 오만했는지를 그래서 펑펑 울면서 회개를 했대요. 옥중에서 혼자 독방에서 김정식 선생은 그 이근택의 수아였습니다. 그래서 경무가 아니었어요. 그래서 이건택무 총감이 만민공동에 동료 협회 하니까 저거 진압회를 하고 명령을 한 거예요. 그런데 김성직 선생이 가서 만민 공동에 하는 연사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까 그들의 말이 맞아.이 백성 지도자들이 잘못한 거지. 백성은 잘못이 없는 거야. 그래서 진압은 커녕 시위에 동조해 버린 거야. 그래. 김정수 선생도 결국 감옥에 갇힌 거예요. 동협표 지도자들이랑. 이분도 이제 처음에는 한 문책을 읽다가 이분은 뭘 읽었느냐 하면은 이제 그 철로 역정 철로 역정을 읽는 과정에서 이분이 마음이 열린 거예요. 김정식 선생은 자녀가 일곱때 다 죽어요.이 어려서 굉장히 가정적으로 불로했습니다. 막내 딸이 하나 살아남았는데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인이에요. 그러다 보니까 김정식 선생 자기 가정 사이에 그런 불행이 있는 거죠. 그러면서 철로 역정에 주인공인 존 버년이 정치 개혁 운동을 하다가 피리탄 계혁 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혔었잖아요. 자기랑 비슷해. 그때 존 번연이 감옥에 있을 때 앞을 못 보는 딸을 하나 데리고 수감 생활을 해요. 그것도 자기랑 처지가 비슷해. 그래서 천로 역정의 내용이 심취해 가지고 쭉 들어가는데 이번에 어 회고에 그런 대목이 나요. 어느 날 저녁에 비몽사몽간에 예수 형님 내게 나타나사 내게 하시는 말씀 내 너를 안다 그러면서 내 등 두드려 주셨다는 거예요. 너의 억울함, 너의 가정 사회 그 피극 누구한테도 얘기할 수 없는 그러면서 내 너를 안다 하면서 자기 등을 두드려 얼마나 그래서 그분 표현이면 예수 형님 무릎에 내 머리 되고 밤새 펑펑 울었노라 요렇게 나와요. 이것이 바로 이상제 김정식 만년이나 유성준도 그렇고 안국선도 그렇고 이승만 신흥는 그 보다 앞서서 그런 체험을 하고 그렇게 해서 이분들이 정치범으로 수감되 있다가 감옥 안에서 다 그 종교 체험을 해요. 예수 신비 체험을 해요. 그러니까 지식인들에게 있어서는 그 꿈 체험, 환상 체험이 이게 결정적이거든요. 그래서 이분들이 1902년 성탄절이 되면은 거의 다 예수님을 영접해요. 감옥 안에서 그러면서 이분들이 성탄절 안에서 성탄 예배를 드려요. 자기네들끼리. 그러면서 그들이 결의를 해요. 우리가 언제 석방될지 모르지만 우리가 석방돼서 나가면 제일 먼저이 근을 찾아가자. 왜? 우리가 지금 누리고 옥중에서 누리고 있는이 자유와 해방. 예수님이 주신 그런이 행복. 이것이 결국은 예수님을 알았기 때문에 우리가이 행복을 느끼고 있는데 감옥에 들어오지 않았던들 우리가이 행복을 예수님을 어떻게 알았겠느냐 그러니 우리를 감옥으로 이끈 이건택이 공로자다. 그래서 나가는 대로이 근데을 찾아가서 우리가 감사의 뜻을 표하자. 물론 이분들이 추록한 다음에 단체로 찾아가는지 아닌지 확인을 못 해요. 그러나 자원 1902년 성탄절에 한성 과목 안에서 이루어진이 성탄 예배는 굉장히 혁명적인 거죠. 아직 세례를 받기 전입니다, 이분들이. 그렇게 해서 거기서 예수를 영접하면서이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오만함, 엘리트 계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교만 이게 깨져 버리는 거예요. 자, 그러니까 이게 뭐겠어요? 처음에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가지고 믿은 사람들이 백정, 갑바치, 그다음에 가난한 그다음에 머음 그다음에 수장수이 밑중 계층들이 예수를 믿으면서 전분전이 상승되는 체험을 합니다. 고기한 존재라는 걸 깨닫고 반면에 독립협회와 한성 과목의 그 경험을 통해서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오만과 그것이 깨지면서 이분들이 결국 낮아지는 체험을 하는 거죠. 저는 이것이 기독교가 우리 민족에게 들어와 가지고 본건적 사회에서는이 지배 계층과 민중계층이 대화가 안 돼요. 언어가 달라요. 교류가 없어요. 단절돼 있어요. 그런데 기독교가 들어와서 민주 계층은 높이고 지배 계층은 낮추고 그러면서 접합점이 생기는 거죠. 그러면서 결국 민중들이 갖고 있는 운동력을 지식인 계층들의 민족 의식이 결합되면서 저희 대한제국시기 기독교의 민족동 세력이 형성되는 걸로 저 보는 거죠. 결국 이분들이 결국 3일운동까지 연결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민족 대표로 검명되었던 33명 가운데 16명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어떻게 보면 다 이런 체험을 하신 분들이에요. 예수님을 만나면서 낮아지는 체험들. 그리고 반대로 대중계층들은 특히 분여자들은 여성들은 철저하게 피집의 종속 개념이었다가 기독교를 통해서 거리에 나올 수 있는 용기 태극기를 흔들 수 있는 그러한 지도력을 발휘하게 되는 거죠. 결국 성경이 담고 있는 만민 평등 그리고 자유와 해방이 정신이 민중계층과 지배계층에 다 어떤 종교적인 체험을 통해서 결합이 되면서 그것이 결국 1%밖에 되지 않는 소수의 기독교이었지만 민족동 전개 과정에서는 50% 이상의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그런 배경이 아닐까? 전 그렇게 보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