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l-Jal-Beop Binge-Watch] A Faithful Routine to End Procrastination

잘잘법 · 2026-08-12

채널: 잘잘법 |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viLem-bPKfM | 길이: 78:12

요약

🎯 TL;DR — 진정한 게으름이란 행동의 부족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와 소통이 끊어진 상태이며, 이를 극복하는 길은 비법이 아니라 예배의 회복, 소명의 불꽃, 그리고 꾸준한 성실함에 있다고 화자는 말한다.

📌 핵심 논지 — 화자는 일반적 의미의 게으름(무기력, 무행동)과 신앙적 의미의 게으름을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경(역대하 29장)의 히스기야 왕 사례를 근거로, 게으름의 본질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소홀히 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것이라고 정의하며, 그 해결책은 특별한 비법이 아니라 예배 회복·소명의 자각·꾸준함이라고 말한다.

🗺️ 영상 구성

  • 게으름의 정체 재정의 — 일반적 게으름 vs 신앙적 게으름
  • 역대하 29장 히스기야 왕 사례: 게으름 = 번제(예배) 소홀 =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
  • 비법이 아닌 예배 회복이 해답이라는 주장
  • 모세의 소명 사례를 통한 "불꽃"의 의미
  • 꾸준함·성실함의 강조 (야구 투수 비유)
  • 부지런함 자체에 대한 자기 점검(완벽주의 경계)
  • (후반, 화자 전환) 시간에 대한 성찰 — 미하엘 엔데 «모모», 크로노스/카이로스, 아브라함 헤셀의 시간관, 전도서 3장의 '때'

━━━ 본문 ━━━

게으름의 정체를 다시 묻다 화자는 "게으름은 극복해야 한다, 끊어내야 한다"는 통념에 앞서 게으름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소파에 누워 TV만 보는 사람이라도 리모컨 배터리가 없으면 즉시 뛰어나가 사 올 것이고, 노름하는 사람은 통장을 뒤져서라도 목숨 걸고 노름을 한다는 예시를 들며, 게으름이란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에 부지런한가'의 문제라고 지적한다.

역대하 29장: 히스기야 왕과 번제 화자는 역대하 29장 6~7절을 인용하며, 히스기야 왕이 제사장과 레위인들에게 "이제는 게으르지 말라"고 한 이유를 설명한다.

"우리 조상들이 범죄하여... 여호와의 성소를 등지고 또 낭실문을 닫으며 등불을 끄고 성소에서 분향하지 아니하며... 번제를 드리지 아니함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타락한 이유는 번제(예배)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 원인이 바로 게으름이었다는 것이다. 화자는 여기서 "죄란 어떤 잘못을 행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지 않은 것, 곧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은 것"이라고 강조하며, 중세의 칠죄종 중 하나인 게으름(나태) 역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상태를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비법이 아니라 예배 게으름을 극복하고 싶어도 잘 되지 않는 이유에 대해 화자는 신앙인들이 자꾸 '비법'을 찾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과거 부흥회에서 은혜를 받으면 삶이 변할 것이라 기대했지만, "은혜받았다는 감정이 삶을 바꿔 주지는 않더라"고 고백한다. 무협지의 무림 고수가 제자에게 물 긷는 일부터 시키듯, 특별한 비법 이전에 기본기(예배)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번제는 동물을 죽여 태우는 의식을 통해 자신의 죄의 무게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우는 시간이었으며, 이것이 곧 소통이자 예배였다고 설명한다.

모세의 소명과 '불꽃' 화자는 출애굽기 3장 모세의 소명 사건을 들어, 모세가 40년간 양을 치며 게으르지 않고 성실히 살았음에도 하나님이 그를 불러내신 것은 양치는 일이 그의 소명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신학자 매튜의 말을 인용한다.

"게으름의 처방은 부지런해지고자 하는 결심이 아니다. 게으름을 치료하려면 당신 안에 있는 불꽃을 다시 발견하라. 그리고 그 불을 태워라."

화자는 오늘날 교회와 청년들이 무기력한 이유가 이 '불꽃(열망)'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진단하며, 자신이 28살 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후 "새벽을 살아야겠다"고 결심하고 약 20년간 이를 지켜온 개인적 경험을 나눈다.

꾸준함이라는 두 번째 열쇠 소명의 불꽃만으로는 부족하며, 꾸준함(지속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야구 감독들이 최고의 투수로 화려한 20승보다 "매년 꾸준히 10승을 올려 주는 투수"를 꼽는다는 예시를 들며, 위대한 결심(내일부터 시간을 정해 기도하겠다)보다 "오늘부터 하루 1분 기도하는 것"이 더 훌륭하다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게으름을 이기는 것은 성실함이며, 그 성실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비롯된 불꽃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부지런함 자체에 대한 경계 화자는 자신의 큰 약점으로, 부지런함이 오히려 완벽주의나 자기 욕심에서 비롯되어 하나님을 앞서가거나 타인을 피곤하게 만들 수 있음을 고백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면, 우리가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하는가는 하나님 앞에 의미 없을 수도 있다"며, 부지런함의 정체 또한 예배(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점검해야 한다고 말한다.

(전환) 시간을 빼앗긴 사람들 — 미하엘 엔데의 «모모» 후반부 화자(대화 상대)는 미하엘 엔데의 소설 «모모»를 소개한다. 회색 신사들이 사람들에게 "시간을 저축하라"며 시간을 사들이자 삶은 오히려 더 빡빡해졌고, 사람들이 빼앗긴 것은 꽃과 구름을 무심히 바라보는 시간, 벗과 수다 떠는 시간처럼 생산적이지 않지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무용한 시간'이었다고 설명한다. 모모가 회색 신사들에게 시간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시간을 한껏 누리며 살았기 때문에 저축할 시간도, 팔 시간도 없었다"는 데 있다고 해석한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교회의 시간과 상인의 시간 화자는 그리스어에서 시간을 계측 가능한 크로노스와 삶에 수직으로 돌입하는 카이로스로 구분한다고 설명하며, 중세사학자 자크 르고프를 인용해 자연의 순환 리듬과 종교 행위에 맞춰 사는 '교회의 시간'이 상업·금융의 발달과 더불어 대금 지불과 생산에 쫓기는 '상인의 시간'으로 대체되어 갔다고 설명한다. 이 과정에서 "시간이 빠듯하다"는 감각과 "시간 낭비가 죄처럼 느껴지는" 근대적 시간관이 형성되었다고 말한다.

아브라함 헤셀: 공간 중심의 삶 vs 시간 중심의 삶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을 인용하여 삶의 태도를 두 가지로 구분한다. 공간 중심의 삶은 건물·소유·업적처럼 가시적 성취를 쌓아 나를 입증하려는 삶이며, 이는 공간을 둘러싼 욕망들이 충돌하는 "보이지 않는 전장"을 만든다. 반대로 시간 중심의 삶은 흘러가고 변화하는 시간의 흐름에 조화를 이루며 그 안에서 영혼의 빛을 바라보는 삶이며, 헤셀은 현재를 "변장한 영혼"이라 부른다고 소개한다.

전도서 3장: 14쌍의 때 마지막으로 전도서의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는 구절을 소개하며, 태어날 때와 죽을 때, 울 때와 웃을 때 등 14쌍(28가지)의 시간 경험을 나열한다. 화자는 통상 긍정적인 것을 앞에, 부정적인 것을 뒤에 놓는 습관과 달리 전도서의 나열 순서가 뒤섞여 있음에 주목하며, 부정적으로 여겨지는 시간조차 생애의 소중한 일부임을 자각시키려는 의도로 해석한다.

💬 결정적 발언

"게으름의 처방은 무엇인가? 게으름의 처방은 부지런해지고자 하는 결심이 아니다. 게으름을 치료하려면 당신 안에 있는 불꽃을 다시 발견하라. 그리고 그 불을 태워라." — (매튜라는 신학자의 말 인용)

"우리가 부지런하게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정말 하나님과 멀어질 때가 많이 있어요."

"당신이 어디에 부지런하며 당신이 어디에 게으른지는 당신의 시간과 당신의 지갑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것들은 무용해 보이는 그런 시간들인지도 모릅니다." (모모 관련 언급)

⚖️ 화자가 다룬 반론·한계

  • 화자는 스스로 "나는 완벽주의자는 아니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라며, 자신의 부지런함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니라 자기 욕망을 좇는 것일 수 있다는 점을 자기 점검의 대상으로 언급한다.
  • "젊은 사람들이 이런 얘기를 '꼰대가 하는 얘기'로 여길 수 있다"는 우려를 스스로 제기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이 삶을 타오르게 하고 집중력 있게 만든다는 원칙은 변하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 핵심 용어

  • 번제 = 동물을 잡아 태워 드리는 구약의 제사,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우는 소통의 방식
  • 크로노스 = 계측 가능한 물리적·순차적 시간
  • 카이로스 = 삶에 수직적으로 돌입하는 신적·질적 시간
  • 교회의 시간 / 상인의 시간 (자크 르고프) = 자연·종교 리듬에 따른 시간 vs 생산·대금 지불에 쫓기는 근대적 시간
  • 공간 중심의 삶 / 시간 중심의 삶 (아브라함 헤셀) = 가시적 성취를 쌓는 삶 vs 흐름과 조화하며 영혼을 바라보는 삶

🔎 보완 & 확인 (요약가 註)

  • 배경 보완: «모모»는 독일 작가 미하엘 엔데(Michael Ende)의 1973년 소설로, 시간 도둑 '회색 신사들'과 소녀 모모의 이야기를 통해 근대 자본주의적 시간 관리 문화를 비판하는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영상에서 언급된 "시간을 한껏 누리며 살았다"는 해석은 화자의 독자적 읽기이며, 소설 원문의 정확한 대사·전개와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어 원작 확인이 필요하다.
  • 사실 유의점: 자크 르고프(Jacques Le Goff)의 "교회의 시간 vs 상인의 시간" 구분은 그의 저작(예: Time, Work, and Culture in the Middle Ages)에서 실제로 다뤄지는 개념이나, 영상 속 설명은 상당히 요약·재구성된 형태이므로 세부 논지는 원저 확인이 필요하다(추정/확인필요).
  • 신학 용어 유의: "칠죄종(七罪宗, 치명적인 일곱 가지 죄)" 중 나태(acedia)가 게으름과 연관된다는 언급은 가톨릭 전통의 개념이며, 영상에서 소개된 것과 정통 신학적 정의 사이에 미묘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 인물 확인: 영상 속 "매튜라는 신학자"의 정확한 성명·저작은 자막만으로는 특정하기 어려워, 원 출처 확인이 필요하다(추정/확인필요).

자막 원문 (참고)

Kind: captions Language: ko 게으음은 극복해야 된다. 끊어내야 된다. 아, 이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나는 게으름에 있어서 진짜 중요한게 게으름의 정체를 아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진짜 게으음은 뭘까? 그리고 우리가 구별해야 되는 것은 일반적인 게으음과 신앙적인 의미에서의 게으음을 구분하는 것도 게으음의 정체를 좀 바라보자. 그러니까 부지런함에 대한 정체를 바라보자. 부지런하게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정말 하나님과 멀어질 때가 많이 있어요. 내가 부지런함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을 너무 피곤하게 하고 내가 하나님을 앞서가거나 하는 것은 아닌가? 그니까 내가 생각하고 있는 부지런함이 진짜 부지런함이 아니라 나의 완벽주의 내가 원하는 것, 내가 바라는 것을 못 참아내는 것은 아닌가? 그니까 우리가이 부분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면 우리들이 얼마나 많은 유용한 일을 하는가, 우리가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하는가 이런 것들이 하나님 앞에 의미 없을 수도 있죠. 이건 굉장히 우리들이 두려운 모습으로 우리를 봐야 되고 이건 나에게 있어서 굉장히 큰 약점 가운데 하나 거예요. 자, 게으르다. 우리들 머릿속에 떠오르는 어떤 사람이 있어. 어, 그 사람 참 게을러 정서를 안 한다든지 뭐 빈둥빈둥되고 TV만 본다든지. 근데 예를 들어서 이렇게 매일 소파에 누워 가지고 이렇게 TV만 보는 그렇게 지독하게 게으르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이 리모컨을 돌리다가 리모컨이 작동을 안 해. 보니까 배터리가 없어. 그 사람은 어떡할까요? 그 사람 절대 게으르지 않을 거예요. 제 빨리 뛰어나가서 배터리를 사 가지고 올 거 같아요. 노름하는 사람 이렇게 생각해 보면 야 저 사람은 인생을 왜 저렇게 살아? 맨날 노름만 하고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 노름하는 사람은 묵음 걸고 노름을 합니다. 세상에 집에 감춰 놓은 거 어 어떻게 쓰든지 찾아내고 통장을 찾아내든지 목숨 걸고 노름을 하죠. 사실이 게으음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에 어떤 우리들이 생각하는 그런 게으름에 대한 부분이 아니라 무엇을 하느냐 그것이 굉장히 중요한 부분일 거 같아요. 이게 성경에 보면 역대하 29장에 게으음에 대한 말이 등장을 하고 있어요. 내 아들들아 이제는 게으르지 말라. 게으르지 말라. 히스기아 왕이 제사장과 레위인들에게 게으르지 말라.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히스기아 왕은 왜 게으르지 말라 이렇게 얘기를 했을까? 제가 성경으로 조금 돌아가 볼게요. 역대아 29장 6절과 7절 말씀에 보니까이 게으음과 연관이 되어 있는 부분인데 우리 조상들이 범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하나님을 버리고 얼굴을 돌려 여호와의 성서를 등지고 또 낭실문을 닫으며 등불을 끄고 성소에서 분양하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함으로 그 지금 히스기아 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폐역하고 하고 타락하고 한 일이 뭐냐 보니까 번제를 드리지 않았다는 거야. 요즘 우리 말로 얘기하면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 이유가 뭐냐면 게을렀다는 거예요. 게을러서 예배를 소월리하고 번제를 드리지 아니함으로 너희들이 타락하고 하나님 앞에 벌을 받게 되었다. 자, 여기에서 보면 이게 죄라고 하는 것은 어떤 잘못을 행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지 않은 것이 죄인 거죠.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은 것 그것이 죄라고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중세의 치명적인 일곱 가지 죄 있잖아요. 뭐 정욕, 탐욕 이런 거 있는데 그중에 게으음도 바로 죄에 속한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찾지 못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것. 그것을 게으음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들이 성경적인 의미에서 게으음은 뭘까요?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지게 하는 것이 게으음이라는 거죠. 게으음을 끊어내고 아 게으음을 좀 이렇게 단절하고 싶다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게 잘 되지 않아요. 특히 우리 신앙인들에게 지금 게으음을 극복하고 하나님과의 소통이 좀 일어났으면 좋겠는데 이게 잘 되지 않는 거죠. 저는 이유를 이렇게 찾아봤어요. 우리들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자꾸 뭔가 비법을 찾는다. 그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신앙생활에 있어서 비법을 찾아요. 그니까 예를 들면 옛날에는 그랬던 거 같아요. 그니까 예수 잘 안 믿고 또 믿음에 좀 신실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 사람들을 위해서 교회가 매년 한두 차례씩 뭐 했냐면 부흥해를 했어요. 그리고 우리들이 이런 권면을 많이 했죠. 제발 집회에 나와 봐. 그리고 은혜 받아. 은혜 받으면 뭔가 해결될 거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기 지금 이제 유튜브로 방송을 듣는 분이나 우리 필이나 옛날에 부흥에 한번가 봤어요. 은혜도 받아 봤어요. 자, 은혜 받고 변한 걸로 생각하면 우리가 지금 성자가 돼 있어야 돼. 집회 참석할 때마다 변했으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가 은혜받고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감정이 우리의 삶을 바꿔 주지 않더라고요. 그니까 다른 표현으로 얘기하면 우리는 자꾸 어떤 비법을 찾아요. 특별한 세미나, 특별한 집회. 그런데 절대로이 게으음에 대한 문제를 극복하는 것은 비법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내가 또 하나 예를 들어 볼까요? 나는 옛날에 무협지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근데 무협지를 보거나 이렇게 중국 영화를 보다 보면 패턴이 있어요. 아주 일정한 패턴인데 되게 원수를 갚는 거예요. 나쁜 놈이 부모를 죽이거나 자기 문파를 없애거나 그래서 홀로 살아남은 주인공이 원수를 갖기 위해서 고수를 찾아가는 가서 무술을 배우는데 제일 힘들어 하는게 뭐냐면 무림 고수가 무스를 가르쳐 주는데 이상한 걸 시켜요. 물 떠와 또이 물 길어다 저기다 갖다 이렇게 담어 계속 그런 걸 시켜요. 어느 정도를 하다가 화가 나요. 내가 배우러 온 건 이런게 아니라 특별한 무공 비급을 배우러 왔는데 지금 나에게 비법을 가르쳐 주는게 아니라 일만시켜 우리가 벌써 탁 머리에 떠오르는게 다이죠. 아, 알아요. 우리는 뭐냐면 저 비법을 배우기 위해서는이 기본기에 충실해야 비법을 배울 수 있는 거죠. 그래서 무림 고수는 그 비법을 가르쳐 주기 전에 차근차근 체력을 기르는 일부터 해 주는 거예요. 자, 오늘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어 여러분들 게으름을 극복하고 싶으세요? 우리가 적어도 신앙인이라면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있어서 게으음을 회복하고 싶으세요? 그러면 비법을 찾지 마시고요. 예배에 충실하세요. 이거 우리가 너무나 많이 듣던 이야기고 매번 듣던 이야기예요. 그런데 진짜 중요한 것이 예배를 회복하고 예배를 드립니다. 근데 만일 우리가 예배를 단순한 의식 또 어떤 리추얼한 그런 예식으로 생각한다면이 예배를 이야기하는게 아니고요.이 이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시간으로 생각한다면이 예배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일하게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통로가 뭐였냐면 역대아 29장에는 번제를 통하여 하나님과 소통하는 방법이었어요. 번제는 뭔지 아시죠? 동물을 잡아서 태워 죽이는 거예요. 그 시간을 통해서 무엇을 깨닫죠? 아, 내 죄가 이렇게 무섭구나.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저 동물이 대신 죽어야 될만큼 내 죄가 무서운 일이구나. 또 그 동물을 태우는 역한 냄새를 맡고 그 동물을 가를 때 피가 튀는 피냄새를 맡으면서 내 죄가 이런 것이었구나. 이게 하나님 앞에서 매번 번제를 드리면서 자기 죄를 돌아보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우는 일이었죠. 이게 소통이었어. 이게 예배였고. 근데 그것을 게을리함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타락했다. 오늘 우리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 게으음에 대한 문제는 뭘까요?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의 관계, 소통, 예배의 문제가 생겼다는 거죠. 아, 우리가이 게으음에 대하여 분명히 생각해야 될 것이 있어요. 우리는 무엇에 대하여 부지런하고 우리는 무엇에 대하여 게으른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가장 아, 부지런한 일은 내가 원하고 내가 열망하는 일에 부지런해요. 그리고 내가 가장 게으른 일은 뭐냐면 내가 하기 싫은 일에 게으른 거죠. 우리가이 게으음에 대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나의 삶의 우선 순위가 무엇인지를 볼 수 있어야 돼요. 그 우리가 흔히 이런 얘기하죠. 당신이 지금 어디의 시간을 가장 많이 투자하고 있고 당신의 지갑에 있는 돈이 어디에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가 그것을 보면 당신이 누구인지랍니다. 당신이 어디에 부지런하며 당신이 어디에 게으른지는 당신의 시간과 당신의 지갑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자, 다시 이야기하면 게으음은 어떤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들이 무엇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느냐에 대한 문제이다. 그 우리가 게으음의 정체를 우리들이 올바로 보는 것이 중요할 것 같아요. 중요한 얘기죠. 하나님과의 소통이 단절되는 것 그것을 우리 신앙적으로 가장 게으른 문제, 가장 큰 죄의 문제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거죠. 하나님과의 관계 소통이 소홀해지면 왜 큰 문제가 생길까요? 하나님의 소리를 듣지 못하면 우리는 자꾸 주변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돼요. 참 신기하죠? 우리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에 소리가 들려요. 저도 종종 놀라운데 이게 길을 가다가 뒤에서 목사님 이런 소리가 들리면 그냥 돌아봐요. 그런데 아저씨 뭐 이런 얘기에는 제가 뒤를 돌아본 적이 별로 없는 거 같아요. 나를 굉장히 당황스럽게 했던 일 중에 하나가 내가 이제 군목을 마치고 미국 유학을 가기 전에 종로에 있는 어학관에서 토을 공부를 할 때였어요. 난 이미 결혼한 사람이었고. 어 그런데 이렇게 토플 공부를 하는데 아저씨 아저씨 소리가 자꾸 들리는 거야. 나는 안 돌아봤어요. 근데 계속 아저씨 소리가 들려요. 그래서 봤더니 나를 부르고 있더라고요. 나는 내가 아저씨인지 그때 처음 알았어요. 나는 목사님인 줄 알았거든. 자 우리가 관심 가지는 소리에 우리의 머리가 돌아가고 귀가 돌아가고 관심이 돌아가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들이 신앙인의 관점에서이 게으음 이것은 하나님과 소통에 대한 문제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되고요. 그러면 이제 이런 궁금증이 생기는 거예요. 그 하나님과 우리들과의이 소통에 대한 문제에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이 게으음의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궁금하시죠? 네. 역대야 29장 11절에 보니까 이런 말씀이 있어요. 내 아들들아 이제는 게으르지 말라. 그다음이 중요한데 여호와께서 이미 너희를 택하사 그 앞에 서서 수정들어 그를 섬기며 분양하게 하셨느니라. 게으르지 말라. 이유가 뭐예요? 여호와께서 이미 너희를 택하셨다. 그니까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게으음을 극복하는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우리들이 깨닫는 부분이에요.이 매튜라고 하는 사람이이 신학자인데 참 멋진 말을 했어요. 게으음의 처방은 무엇인가? 게으름의 처방은 부지런해지고자 하는 결신이 아니다. 게름을 치료하려면 당신 안에 있는 불꽃을 다시 발견하라. 그리고 그 불을 태워라. 당신 안에 있는 불꽃을 발견해라. 그리고 불꽃을 다시 태워라. 이게 무슨 의미? 열마인 거죠. 그니까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해야만 되는 일.이 불꽃이 살아 있는가? 나는 오늘날 교회를 가장 무기력하게 만들고 지금이 사회 젊은이들이 무기력해지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불꽃이 사라졌다고 생각하고요.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고 이건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편인데 야 내가이 일을 하다 죽어도 좋아도 좋은 일들 가운데 있는가? 예를 들어 볼게요. 출애굽기 3장에 보면 모세의 소명장이라고 불리는게 나와요. 음.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죠. 가시나무 불꽃 가운데서 불은 불인데 타지 않는 불 가운데서 모세야 오세야 부르세요. 그때 모세의 직업이 무엇이었나요? 40년 동안 양을 치고 있었어요. 성경은 모세가 양을 치고 있었다고 하는 그 직업에 대하여 비하하지 않아요. 그리고 요셉은 양을 치는 40년 동안 그가 게을렀다고 하는 어떤 단서도 없어요. 그는 열심히 양을 쳤던 거 같아요. 심지어이 호렙산, 시내산까지 양을 데리고 온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양에게 풀을 먹이기 위해서 열심히 살았는가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근데 참 신기하죠? 모세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고 모세가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고장을 소명장이라고 불러요.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셔서 소명을 주셨다. 그러니까 모세는 우리의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는 게으른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충실히 하고 있었던 사람이에요. 근데 하나님이 그를 불러내신 거예요. 소명으로. 그리고 그의 마음속에 꺼져 있던 그의 불꽃을 사르셨어요. 그러면 하나님이 왜 모세를 굳이 양치는 데서 끄집어내셨을까? 양치는 것이 그의 소명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양치는 일이 하차는 일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모세는 이미 하나님께서 40년 동안 왕궁에서 왕의 아들로 리더가 되는 교육을 받고 하나님이 모세를 쓰시고자 하시는 목적이 있었는데 모세가 그 목적에 합당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었던 거예요. 자, 열심히 살지 않고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게을렀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신 그의 불꽃이 타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죠. 자, 그래서 오늘 저는 그렇게 도전을 하고 싶은데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속에 불꽃이 있습니까?에 하나님이 당신을 부르신 그 부르심이 분명합니까? 이게 너무나 우리들이 들었던 아주 진부한 얘기처럼 들리지 못하는이 부분들이 우리들에게 살아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게으른 사람이 될 수밖에 없어요. 저는 우리의 속에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할 때 우리를 부지러게 만드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우리들의 삶을 굉장히 전략적으로 만든다는 거예요. 제 이야기를 조금 할게요. 그 지금까지 내 생을 이렇게 돌아보면 나는 늘 열심이었던 때가 있었어요. 중학교 들어갈 무렵에 그때 난 무협지를 너무 좋아했어요. 그래 가지고 만나가게에 있는 무협지를 정말 다 봤던 거 같아. 그 심지어는 만나가게 주인이 나 때문에 이렇게 무협지를 바꿔 놔야 될만큼 무협지를 참 열심히 봤어요. 중학교 3학년 때 탁구를 참 열심히 쳤던 거 같아. 그래서 우리 어머니가 너 안 되겠다. 그래서 내 탁쿠라켓을 다 쪼개 버리고 고등학교 올라갈 무렵에 내가 노래를 너무 좋아했어요. 그 중창단을 만들어서 아 그 당시 여학교 막 문학의 밥 이런데 하는데 축제 다니고 너무 재밌었어요. 대학교 와서는 당구를 참 열심히 졌어요. 그래서 수업은 거의 안 들어가고 당구장에서 살았어요. 대학교 2학년 됐을 때는 소위에 이제 그룹 사운드 만들어서 이렇게 딴따라 그때 내가 굉장히 머리 길게 기르고 다니면서 찢어진 청바지 입고 다니면서 보면 나는 참 열심이었어요. 그런데 내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그런 시간이 있었어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구나라고 하는 고백을 했던 그 시간이 있었어요. 그때 내 마음에 찾아왔던 안타까움이 있었어요. 아, 내가 지금까지 인생을 헛살았구나. 나는 늘 열심이었는데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아까웠어요. 그때 내가 결심을 했죠. 새벽을 살아야 되겠다. 새벽을 살아야 되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되게 이제 목회자들 패턴이 그 당시에 그랬어요. 새벽 예배를 인도하고 나면 피곤하니까 집에 가서 한두 시간 자고 그다음에 아침에 나와서 일을 하고 근데 나에게 그 아침이라고 하는 시간이 새벽 예배를 마치고 난 그 시간이 내 인생의 제일 귀한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건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시간이야. 나만이 쓸 수 있는 시간이야. 예. 그때 내가 이제 28살 때입니다. 새벽을 살아야 되겠다. 그때 결심을 했어요. 그리고 내가 몸이 아파서 내가 많이 힘들어서 이제 설교도 못 하고 목회도 못 하고 힘들었던 고시기가 오기 전까지 대략 한 20년 동안 나는 새벽을 굉장히 열심히 살았던 거 같아요. 아, 지금 나를 생각하면 지금 나를 만나기 위해 목사로 내가 지금 목회를 할 수 있도록 만들었던 가장 중요했던 시간이 뭐냐면 하나님이 나를 부르셔서 내 소명을 읽게 주셨던 그 시간이었어요. 그게 내 삶을 굉장히 전략적으로 만들어졌던 거 같아요. 게으음을 이길 수 있는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뭐냐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불꽃이 살아나기 시작할 때 우리들의 삶에 집중력이 생긴다는 거죠. 아마 이런 얘기 하면 아마 젊은 사람들 아 이거 꼰대가 하는 얘기야라고 이야기할지 몰라고 옛날에 우리들이 들었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뭐 소명 성공하세요 이런 이야기들을 생각할지 몰라요. 그러나 나는 변하지 않는게 있다고 생각해요.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들의 삶을 타오르게 한다는 것이고 우리들의 삶을 집중력 있게 만든다는 거예요. 그러면 소명이 생겼기 때문에 우리는 완전히 게으음에서부터 우리들이 벗어날 수 있는 걸까요? 나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그다음부터 우리들의 중요한 또 다른 키워드 하나가 등장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은 꾸준함이에요. 내가 정말 강조하고 싶은 것은 꾸준함인데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 우리 젊은 사역자들에게 교육을 할 때 두 가지를 늘 강조를 해요. 하나는 사람이이 땅 위에 살아가는 동안 창조적이었으면 좋겠다. 그냥 살아가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으니 창조적으로 살아. 크리에이티비티는 굉장히 중요한 일이에요. 그러나 아무리 창조적이어도 그 창조를 이어갈 수 있는 지속성이 없다면이 창조성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그 부르심 가운데서 우리들이 얼마나 꾸준하게 우리들에게 주어진 일을 할 수 있는가. 그러니까 우리들에게 소명이 오고 우리들의 삶에 불꽃이 다올라도 내 삶의 의지적인 노력이 없이는 우리들의 게으음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어요. 야구 우리나라에 제일 인기 있는 종목 중에 하나데 야구 투수들 평균 뭐 자책점도 있고 뭐 몇 승을 하느냐도 있고 그런데 감독들에게 물어봤어요.이 팀에 제일 소중한 투수는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감독들은요. 매년 꾸준히 10승 정도를 올려 주는 투수가 최고랍니다. 한해 20승하고 그다음에 10승도 못 올리거나 뭐 아무리 평균 뭐 자책점이 아무리 좋아도 제일 훌륭한 투수는 누구냐? 꾸준히 십승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가장 좋은 뜻을 하는 거예요.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소명자로 살아가면서 우리들이 제일 훌륭한 사람은 누구냐? 시종 여일하게 신실하게 자기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이죠. 게으음을 극복하는 방법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길이죠. 가끔 위대한 결심을 하는 사람을 많이 봐요. 하나님, 제가 정말 영적으로 훌륭한 기도의 사람이 되겠습니다. 제가 내일부터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겠습니다. 근데 진짜 중요한 건 오늘부터 하루 1분 기도하는게 정말 훌륭한 거고 우리들이 어떤 위대한 결심, 다음에 무엇을 하는 것들이 아니라 평생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살겠습니다라고 하는 위대한 소원보다 지금 오늘 우리들에게 주어진이 시점에서 우리들이 어떻게 거룩하게 살아가는가? 그래서 결론은 보면 너무 당연해요. 게으름을이기는 것은 성실함이에요. 그런데 그 성실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그 부르심, 우리의 가슴을 불타게 하는 그 일에서부터 우리의 소명이 불타오를 때에 우리를 게으음으로부터 이겨나가게 만들고 부지런하게 만들고 전략적으로 만든다는 거. 난 목사인데 이런 말을 좋아해요. 전략적 이양 우리들에게 주어진 동일한 시간, 동일한 삶이 우리들에게 주어졌다면 좀 전략적으로 살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생명을 조금 더 가치 있게 살 필요가 있다. 그러면 게으음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사람들이 병이라 그러는데 나는 늘 내가 게으르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아 내가 이렇게 살면 되나? 어 이건 병입니다. 버콜리. 그 난 내가 스스로 이제 병이라고 인정을 하니까 아 좀 게으러지려고 노력을 많이 해요.이 말은 이게 게으름에 대한 의미가 다른 건데 내가 부지런함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을 너무 피곤하게 하고 내가 하나님을 앞서가거나 하는 것은 아닌가? 그니까 내가 생각하고 있는 부지런함이 진짜 부지런함이 아니라 지금 얘기한 것처럼 나의 완벽주의 내가 원하는 것 내가 바라는 것을 못 참아내는 것은 아닌가? 그니까 우리가 게으음의 정체를 좀 바르보자. 그니까 부지런함에 대한 정체를 바르보자. 그니까 나는 진짜 부지런하게 살아. 근데 우리가 부지런하게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정말 하나님과 멀어질 때가 많이 있어요. 그래서 오늘 역대 29장에 이야기한 것처럼 게으르지 마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소홀리하지 마라. 그니까 우리가이 부분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면 우리들이 얼마나 많은 유용한 일을 하는가, 우리가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하는가 이런 것들이 하나님 앞에 의미 없을 수도 있죠. 이건 굉장히 우리들이 두려운 모습으로 우리를 봐야 되고 이건 나에게 있어서 굉장히 큰 약점 가운데 하나 거예요. 어 나는 완벽주의자는 아닌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이게 지금 성이 풀리는 사람이야. 열심히 하죠. 근데 이게 진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인가? 이건 내가 열심히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있는가? 그래서 때때로 자기 점검이죠. 나는 자기 성찰이라고 하는 말을 중요하는데 그 우리들의 삶에 자기 성찰을 하는 시간들이 필요해요. 그 왜 방향을 잡아 주니까. 근데 그게 뭐예요? 예배예요. 예배.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대한 부분. 그니까이 부분에서 게을러지면 우리들이 열심히 하는 것, 부지런한 일들이 정말 의미 없을 수도 어 Да. 우리는 늘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낄 때가 아주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미하 앤데라고 하는 분이 썼던 모모라고 하는 색은 우리가 빼앗겼던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다뤄 주고 있습니다. 어 회색 일당들이 나타나 가지고 사람들에게 얘기합니다. 우리가 잘 살기 위해서는 시간을 아껴야 돼. 쓸데없는 시간을 줄여야 하고 시간을 저축해야 돼. 우리가 맡아 줄게. 이러면서 시간을 사들이기 시작합니다. 그런고 나니깐 더욱더 삶이 빡빡해지는 겁니다. 그런데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 하나 있습니다. 미아엘 앤데가 작가로서 하는 말인데요. 모모는 어떻게 회색일당에게 시간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냥 게으르게 답하자고 한다면 모모는 특별한 능력이 있으니까 이러면 간단합니다. 근데 그건 작가로서 굉장히 게으른 태도이죠. 이게 고심을 했다는 겁니다. 뭐냐? 깨달음이 모모는 시간을 저축할 생각이 없어요. 왜? 저는 파워제이로 제 시간을 철저히 계획하며 삽니다. 하지만 이런 계획적인 삶이 어쩌면 제가 주인이 되어 제 인생을 주도하고 통제하려는 주님을 신뢰하지 않는 태도가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듭니다. >> 네. 시간이라는게 참 묘합니다. 우리가 시간 속에 사는게 분명한데요. 태어남에서부터 죽음까지 일평생 우리는 시간 여행자로 산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정말 재미있죠. 시간이 뭐냐고 누군가가 묻는다고 한다면 설명하기가 여관 어려운게 아닙니다. 물리학자들은 설명하는 방식이 있을 순 있겠는데 것들은 이제 어 물리적인 시간을 얘기하는 거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시간은 물리적 시간의 경과와는 조금 다른 시간들을 경험하며 살고 있죠. 그 때문에 이제 그리스도 사람들은 시간을 둘로 나누어서 하나는 계측 가능한 시간 크로노스를 얘기하고 있고 또 하나는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 어떻게 보면은 수직적으로 우리의 삶 속에 돌입하는 시간을 카이로스라고 얘기하기도 하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내 때가 이러지 않았다 혹은 뭐 때가 찼다라고 하는 것은 아 그런 수직적으로 우리에게 돌입하는 신적 시간을 읽컫는 말로 쓰이기도 합니다. 근데 어쨌든 이렇게 설명을 해 보지만 시간에 대해서 말해 줘. 누군가가 질문한다고 한다면 말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 어 사실입니다. 다만 우리는 시간과 관계하는 나의 모습을 통해서 시간을 의식할 뿐이죠. 이게 이제 우리들의 시간 개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근데 어쨌든 시간을 누리는 방식이 다양한데요. 종세학자인 자크 루고프라고 하는 분은 중세를 분석하면서 중세 사람들이 시간 경험이 어떻게 변화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려 줍니다. 하나는 교회 시간입니다.이 교회 시간이라고 얘기하지만 꼭 예배에만 관련되는 건 아니고 교회의 시간이라고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자연의 순환하는 리듬에 따라 살아가는 흐름 속에 자기를 맡기고 살아가는 삶을 뜻합니다. 농사의 리듬 같은 것이겠죠. 파종에서 추수에 이르는 늘 반복되고 있는 순환의 리듬을 얘기하고 있고 또 거기에는 이제 그 종교 행운이도 들어갑니다. 예배를 드리고 그 기도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에 따라서 시간에 맞춰서 기도를 하고 삶의 시간들을 구해 가는 그런 시간들이 있죠. 우리가 밀레종이라고 하는 그림도 매우 좋아합니다만는 그 정소리가 들릴 때 그 부부가 들판에서 귀도를 올리는 그 장면을 우리는 인상깊게 본 적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죠. 그러니깐 내 삶에 위드이 있어요. 질서가 있어요. 그리고 그 질서가 나를 둔둔하게 채워갑니다. 이게 자크루고프가 얘기하고 있는 교회의 시간입니다. 그런데 점점 점점 세상이 복잡해지고 상업이 발달하고 금융업이 발달하고 제조업이 활발해지고 이러면서 사람들 사이에 교육이 빈번해지고 이러면서 상인의 시간이 도래하게 됩니다. 그 상의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대금도 지불해야 하고 뭔가를 생산해 내야 하고 생산된 것들을 요해야 하고 요통하지 못한 것들을 폐기해야 하는 어떻게 보면은 교회의 시간과 구별되고 있는 시간 그런 시간으로 점점 바뀌어 가기 시작했다는 것이죠. 뭐 시계의 탄생도 상인의 시간과 관련된다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근데 그러다 보니까는 시간이 불확실성이 많아지고 시간이 우리에게 공포로 다가오고 또 시간을 낭비하는게 죄처럼 느껴지고 이런 것들이 이제 중세말로 가면서 근대화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시간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늘 하는 얘기가 뭐냐? 시간이 빠듯하다라고 하는 거. 빠듯한 시간을 쪼개서 살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늘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낄 때가 아주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미하 앤데라고 하는 분이 썼던 동화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뭐뭐라고 하는 책은 바로 우리가 빼앗겼던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다뤄 주고 있습니다. 어 회색일당들이 나타나 가지고 사람들에게 얘기합니다. 우리가 잘 살기 위해서는 시간을 아껴야 돼. 시간 절약해야 돼. 그러기 위해서는 쓸데없는 시간을 줄여야 하고 시간을 저축해야 돼. 우리가 맡아 줄게. 이러면서 사람들에게 시간을 사드리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의 많은 시간을 회색일당에게 넘겨 줘요. 그러고 아니 더욱더 삶이 빡빡해지는 겁니다. 근데 회색일 땅에게 사람들이 팔았던 그 시간은 그냥 물리적 시간이 아닙니다. 어떤 시간이냐면 뭐 예를 들면 아 꽃이라든지 또 구름이라든지 흘러가는 시내물이라든지 그런 것들을 무심히 바라볼 수 있는 시간. 아 그리고 친구들과 수다를 뜰 수 있는 시간. 새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시간.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면서 정말 멍하니 영혼을 동경하는 그런 시간들. 그런 시간들이 다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것들은 무용해 보이는 그런 시간들인지도 모릅니다. 그 시간은 뭔가를 생산하는 시간은 아니지요. 그러니깐 생산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효율적 시간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생의 경험을 통해 합니다. 나를 아게 하는 것은 바로 그런 무용해 보이는 시간들을 내가 누릴 수 있을 때라고 하는 사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을 빼앗긴 채 허덕거리고 있습니다. 분조함이라고 하는 말이 어떤 신분을 나타내는 말이 된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대접하기 위해서는 요즘 한가하시죠. 그러면 안 됩니다. 분주하시죠.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내가 분주하다는 것은 내 일정이 가득차 있다고 하는 것은 내가 중요한 인물이라고 하는 사실을 타자들에게 입증시키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렇죠.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야 될게 뭐냐면 분주할 망자는 잊을는 어떻게 돼 있습니까? 망할 망자 밑에 마음 심자가 있어요. 마음이 망한 거예요. 어떻게 보면 잊어버리는 것은. 그런데 그 망자 밑에 있는 마음심을 좌측으로 끌어내고 그리고 거기에 신방부 옆에다 망할 망자를 수면 분주할 망자입니다. 내가 분주하면 잊어버리지 말아야 될 것을 잊어버리지 못해 있어요. 내가 누구인지도 물어 모르고 내가이 세상에 왜 왔는지도 우리들이 묻지 않게 되고 내 옆에 있는 타인들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도 잊어버리게 되는 거죠. 이것이 시간을 뺏긴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근데 모모라고 하는이 아이는 사람들이 잃어버렸던 그 시간을 회색 일당으로부터 되찾아 주고 싶어 합니다. 뭐뭐가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깊이 공감하고 그러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깐 그들은 자기의 말이 경청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자기의 인생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지 실마리를 스스로 찾게 됩니다. 누군가가 해결해 주기 때문이 아니죠. 그런데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 하나 있습니다. 미아엘 앤데가 작가로서 하는 말인데요. 모모는 어떻게 회색일 당에게 시간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입니다. 이게 고심을 했다는 겁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대요. 뭐냐 깨달음이 뭐뭐는 시간을 저축할 생각이 없어요. 왜? 시간을 한껏 누리며 살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한껏 누렸기 때문에 저축할 시간도 없고 누군가에게 팔 수 있는 시간도 없는 거예요. 그 시간에 충실했던 것이지요. 이게 뭐뭐의 생의 비결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자, 그런데요. 요거를 조금 다른 방식으로 얘기를 한번 해 볼 텐데요. 아브라함 저수와 헤셀은 우리의 삶을 두 가지로 나눠서 간결하게 설명을 해 봅니다. 하나는 공간 중심의 삶이라고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공간 중심의 삶이라는게 뭐냐? 뭔가 가시적인 성취를 얻어내는 그니까 나의 성취를 다른 사람이 눈에 보이도록 공간화하는 이런 일들 그러니까 뭐 건물을 세운다든지 내가 가지고 있는 소유를 통해 나를 입증한다든지 뭐 이런 내가 가지고 있는 업적 이런 것들을 세워가는 것 이것이 이제 공간 중심적인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게 뭐냐면 인간은 공간을 통제하려고 하는 욕망을 갖고 있고 그런 욕망들이 부딪히고 있기 때문에 어 우리의 삶의 현장은 보이지 않는 전장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다른 삶의 태도가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아 시간 중심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인데 시간이라고 하는 것의 특색은 뭐예요? 흘러가는 것입니다. 변화입니다. 흘러가고 변화하는 그 시간 속에서 내가 산다고 하는 것은 그 흐름에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겠죠. 그리고 그 변화하는 시간 속에서 깨끗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아브라함 저수 해셀은 현재를 뭐라고 말하냐면 변장한 영혼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러니까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그 시간을 정말 그 흐름 속에서 영혼의 빛을 볼 수 있는가라고 하는게 무엇보다도 소중합니다. 그러니까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려고 하는 그런 강박관념이 우리로 하여금 오히려 시간에 종속되도록 만들고 있는데 그 시간에 흐름을 타고 사는 사람들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생각을 해 보는 거죠. 바로 그것이 시간을 성화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시간을 성화하는 것이고 또 그것이 영혼에 되어져 사는 삶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성경의 전도 설히자는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알맞은 때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 때에 대한 이야기를 하거든요. 14개의 때 쌍을 얘기해 주고 있습니다. 근데 이게 흥미로운 대목인데요. 태어날 때와 죽을 때, 심을 때와 뽑을 때, 죽일 때와 살릴 때, 허물 때와 세울 때, 울 때와 웃을 때, 통곡할 때와 기법 춤출 때, 도를 흩어버릴 때와 모아들일 때, 껴을 때와 껴는 것을 삼갈 때, 찾아나설 때와 포기할 때, 간직할 때와 버릴 때, 찢을 때와 꿰멜 때, 말하지 않을 때와 말할 때, 사랑할 때와 미워할 때, 전쟁을 치를 때와 평화를 누릴 때 14개의 쌍으로 돼 있습니다. 그 14개 쌍이란 얘기는이 전도석 기자가 얘기하고 있는게 28가지의 시간 경험을 얘기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그런데이 대목에서 흥미로운게 있어요. 우리는 이제 이렇게 나열를 할 때 습관이 긍정적인 걸 앞에 두고 부정적인 걸 뒤에 놓고 이렇게 리듬을 만들려고 합니다. 근데 여기 언급되 있는 것을 보면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으로 우리가 인식하는 것들이 때때로 순서가 바뀌어 있기도 하고 뒤섞여 있습니다.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걸까요? 우리는 부정적인 것들을 우리의 인생에서 빨리 제거해야 할 부정적 순간으로 바라보고 있지만은 천도 기자는 그 시간까지도 우리의 생애 너무도 소중한 일부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에게 자각시키기 위한 거라고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잘 산다고 하는 건 뭘까? 생각해 보면 내게 다가오는 것들을 내 삶으로 수용하려고 하는 마음의 태세라고 저는 늘 생각합니다. 어 때때로 낯선 시간이 내게 다가오게 되면은 우리는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지요. 왜? 낯설다고 하는 것은 내게 그 편안했던 세계를 혼란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낯설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 건 사실이지만 낯선 세계와 직면하지 않으면 내가 커지는 방식이 없습니다. 나와 다른 세계, 내가 예측할 수 없었던 세계와의 만남. 이것은 나를 더 커지라고 하는 일정의 부름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시간 경험이 내게 찾아옵니다. 실패의 경험, 누군가에게 배신당하는 경험, 그리고 내가 세웠던 것들이 허물어지는 경험들. 그런 것들은 우리를 잠시 힘들게 만들고 쓰리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우리가 디딤돌로 삼을 수 있는게 인간이지요. 그래서 그런 내게 당도한 시간과 잘 화해를 이룰 줄 아는 사람 그것을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면서 아 그것을 더 커지는 계기로 삼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잘 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저게는 들고 있고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내가 바라는 시간, 내가 바라는 방식 때로 내 인생이 흘러가지 않는다고 낙심할 이유가 없겠다. 그 모든 것들이 나의 삶을 이루는 하나의 시실과 날실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아,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아, 그 일에 멀두하고 있는데 너희의 시선의 방향을 좀 바꿔 봐라고 말합니다. 공중에 나는 새를 좀 보아라. 더빈 꽃을 바라봐라라고 얘기합니다. 자, 어떻게 보면 부질없는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내가 몰두하고 있던 그 시선으로부터 나의 시선이 다른 것을 향하게 될 때 삶은 무한히 값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내 시선의 방향이 바뀔 때 그때 삶을 대하는 나의 태도도 달라질 가능성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 더 큰 세계와 접속하려고 하는 그런 노력을 우리들이 기울인다고 한다면 내게 주어져 있는 시간은 공포가 아니라 아 설렘일 수 있고 시간이 우리에게 가져오는 선물을 기대해도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은 이제 시간을 고핵 지어 가지고 시간의 리듬을 만들어 내죠. 1년이 365일이고 뭐 12달로 돼 있고 또 한 달은 30일로 돼 있고 일주일은 1회로 돼 있고 하루는 24시간이고 왜냐면 그런 구액이 없다고 한다면은 흘러가는 그 시간 속에서 리듬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관리라고 하는 말보다는 그 시간의 리듬 속에 내가 리듬을 빼앗긴 채 아 살지 않고 그 리듬을 잘 지켜 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는데 관리란 말이 너 너무 자본주의적이어서 저는 좀 그렇게 좋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저는 이렇게 얘기하고 싶은데요. 많은 사람들이 시간 관리라고 하는 것을 저는 다른 방식으로 얘기하고 싶은데 튼튼한 로틴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인데요. 교회 시간과 상인의 시간을 구별하면서 교회 시간이라고 하는게 예배당에 들려오는 어떤 그 종소리에 따라서 기도하는 시간들을 일제 두는 거라고 얘기한 것처럼 내 시간도 그런 루틴을 정확하게 만들어 두면은 그렇게 해서 거기에 매일한 얘기가 아니고 내 삶을 든든하게 해 주는 것은 루틴이 튼튼할 때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들은 흐름에 맡겨져서 거기에 적응해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그냥 흘러가기만 해서 안 됩니다. 튼튼한 루틴이 있어야 돼. 예를 들면 뭐 이런 시간은 내가 틀림없이 독서를 한다. 이런 시간은 내가 틀림없이 기도를 한다. 이런 시간은 틀림없이 내가 뭐 운동을 한다. 이런 루틴들이 만들어지게 될 때 그 삶은 일단 질서를 갖추게 되고 그 질서가 오히려 무질서해 보이는 다른 시간들을 지탱해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렇게 해서 두 가지가 함께 가야 합니다. 너무 꽉 채워서 루틴을 만들지 말고 내 삶의 뼈대로서의 루틴을 만들고 나머지 시간들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들을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열린 태도로 좀 접근하면 어떨까 싶어요. 그게 너무 상투적일 수도 있는데이 이런 얘기는 좀 재수 없는 얘기일 수도 있는데네 제 평생의 습관는 새벽일찍 일어나는 거였습니다. 학생 때부터 이런 시간에 일어나는 거였고요. 교회 다니기 전부터도 새벽 시간이 저한테 너무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새벽 기도회를 가기 위해 일어나시는 시간에 저를 깨워 주시면은 그때부터 학교에 가기 전까지의 그 시간은 오로시입니다. 그러니깐 그 시간은 아무에게도 방해를 받지 않는 시간이고요. 그니까 나중에 뭐 목사가 되어 살면서 새벽 기도회를 하는 시간도 있었지만은 또 지금도 동일한 시간에 일어나고 그래서 아침 식사를 하기 전에 제법 많은 일들을 하죠. 기도하고 성경 묵상하고 기독교 고전 읽고 내가 읽고 싶은 책 읽고 글 쓰고 하는 일들이 아침 식사 전에 벌써 한 세 시간 정도 그 정도가 이루어지고 그러고 나면은 하루가 길게 경험되죠. 아, 그것이 저의 어떤 그 일상의 루틴 가운데 하나라고 얘기할 수 있겠는데요. 그러니까 이거는 이제 포기하지 않습니다. 옛날에 우리 선배 목사님 한 분이 목요일마다 등산을 하셨어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마찬가지입니다. 몸이 좋지 않을 때는 산을 올라가지 못하면은 공원을 걷더라도 목요일은 빠뜨리지 않고 걸었습니다. 어느 날 제가 물었습니다. 선배님 그렇게 분주하신데 어떻게 목요일마다 산에 가세요? 선배님이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린 목사이기 때문에 주일날은 반드시 지키지. 예. 그렇죠. 그것처럼 나는 주일 성수하듯 산에 간다라고 얘기합니다. 그게 농담처럼 한 얘기였지만은 바로 그 시간 반드시 지켜갔던 그 시간이 그분의 다른 날들을 건강하게 만들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내 삶이 어떤 경우에도 떠내려가지 않은 내 시간의 와 같은 루틴을 만들어 놓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이 시간은 내가 포기할 수 없어라고 하는 거. 근데 그러기 위해서는 제가 새벽에 일찍 일어나기 위해서는 잠자는 시간도 일정해야 합니다. 아무리 재밌는 일이 있어도 그 시간이 되면은 잠자리에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예가 좋은 예인지 모르겠습니다만은 월드컵 축구를 하는데 우리나라 경기가 전반전 끝났는데 내가 자야 할 시간이면 전투로 가서 잡니다. 다음날 새벽에 어 잘 일어나기 위해서 그러니까 남들에게 드러나지 않는 모습이지만은 그 시간이 저를 든든하게 세워 준다고 생각합니다. 지혜 있는 자처럼 세월을 아껴라. 때가 악하다.이 구절을 그냥 시간을 절약해라라고 인식하던 데가 많았는데 그 본문은 좀 다르더라고요. 절약의 세이브가 아니고 구원의 세이브더라고요. 대가를 치르고 시간을 되사 와라. 그럼 세시간씩 덩어리로 보면 아침, 오전, 점심, 오후, 저녁, 밤 이렇게 여섯 가지 덩어리가 생깁니다. 제가 이걸 369 일정표라고 하는데 똑같은 수박인데 한 통에 15,000원 하고 반에는 만 원 1통 반에 반에는 7,000원 한다면 어떤 걸 사시겠어요? 한 통 사야. >> 그렇죠. 그 효용으로 봤을 때는 한 통이 제일 싸게 보이는데 그 혼자 살거나 단 둘이 사는 부부의 경우에는 1분통만 해도 다 못 먹을 수도 있고요. 싸다고 한 통을 사면 반 잘라서 냉장고에 보관하고 언제 먹을지 모르다가 버릴 수도 있고 어 신순서가 떨어져서 맛 없는 걸 먹을 수도 있고 제가 경영학을 했지만 그 창고 비용입니다. 일종에 냉장고의 전기, 냉장고의 공간 이런 것들을 차지하는데 들어가죠. 그래서 누가 우수갯 소리를 그렇게 해요. 그냥 집 앞에 마트에 보관하고 그때그때 사 먹어라. 그러면 집에 공간도 남고 전기도 덜 쓴다. 효용이라는면 외에 다른 좀 지혜와 통찰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인터넷 쇼핑에 대한 여러 소비자의 심리를 알게 되는데요. 왜 사람들은 이렇게 싼 거를 살려고 이렇게 이리저리 손을 많이 팔까? 최적과 쇼핑하려고 하잖아요. 2, 300원 아끼고 싶고. 그래서 뭐 쿠폰도 적용하고 뭐 할인 카드도 찾아보고 그러다 보면 뭐 한시간이 후딱 지나가는데요. 소비자의 심리로 봤을 때 진짜 돈을 아끼고 싶어 하는 심리보다 더 중요한 심리가 하나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