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ust-Watch for Those Who Love the Church | Professor Kim Hak-chul | Jal-Jal-Beop Ep. 281
채널: 잘잘법 |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4VXLQOd21K8 | 길이: 32:05
요약
🎯 TL;DR — "한국 교회에 바라는 것이 없어야 사랑할 수 있다"는 역설 속에서, 화자는 한국 교회의 위기가 30년째 반복되는 이유를 성장(civic maturity) 없이 깨어남(spiritual experience)만 과잉된 비대칭 구조에서 찾고, 그 해법으로 "신앙의 급진성"이 아닌 "사랑의 급진성"을 제안한다.
📌 핵심 논지 — 한국 교회의 처방은 30년간 "회개하라, 뜨거워져라, 본질로 돌아가라"는 깨어남의 언어에 머물러 있었고, 정작 필요한 것은 시민으로서 약속을 지키고 타인을 존중하는 성장의 축이라는 것이다. 깨어남은 과잉이고 성장은 실종이라는 진단이 논지의 핵심이다.
🗺️ 영상 구성
- 제자 어머니의 편지(가족이 교회를 떠나려는 고민)로 문제 제기
- 30년째 반복되는 "한국 교회 위기론"과 똑같은 처방에 대한 회의
- "한국 교회에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라는 과거 발언과 그에 대한 오해 해명
- 성장(growing up)과 깨어남(wake up)의 구분 — 피아제·콜버그 발달이론 인용
- 한국 교회의 비대칭 진단: 깨어남 과잉, 성장 실종
- 성화 교리조차 다시 깨어남 언어로 회수되는 현상
- 신앙의 급진성 vs 사랑의 급진성
- '기독 시민' 개념 제안과 초기 한국 개신교의 사랑의 급진성 사례(백정, 여성 교육)
- 편지로 돌아와 결론
━━━ 본문 ━━━
편지가 던진 질문 화자는 자신이 가르친 학생의 어머니로부터 받은 편지를 소개한다. 보태신앙으로 시작해 가정을 신앙의 가정으로 키우려던 목표가 좌절된 사연으로, 남편이 "한국 교회의 너무너무 부끄러운 모습" 때문에 아내와 아들을 한국 개신교회에 보내선 안 되겠다고 결정한 것이 갈등의 핵심이다. 화자는 이 고민을 장로교 목사로서 듣는 자신의 "복잡한 심정"을 고백하며, 그럼에도 한국 교회를 계속 사랑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이 영상 전체의 질문으로 던진다.
30년째 반복되는 위기론과 처방 화자는 1990년대 초 군 제대 직후 참석했던 세미나를 회상한다. 당시 "양적 성장은 끝났고 질적 성장이 필요하다"는 진단이 나왔는데, 그때는 한국 교회가 오히려 왕성하게 성장하던 시기라 "생뚱맞아 보였다"고 말한다. 그런데 30년이 지난 지금도 세미나마다 "한국 교회가 위기"라는 말이 반복되고, 처방도 여전히 똑같다. 아드폰테스(근원으로 돌아가라), 회개, 기도 생활 회복, 말씀으로 돌아가라, 초대 교회로 돌아가라 등 화자는 이 처방들의 공통점이 위로부터 내려오는 수직적 각성, 즉 "귀환 언어"라고 짚는다.
"바라지 않아야 사랑할 수 있다" 발언과 논란 화자는 과거 한 책의 편집자 요청으로 "저는 한국 교회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라고 쓴 적이 있다고 밝힌다. 이에 대해 존경하는 한 목사가 북 콘서트에서 이 문장을 "한국 교회를 포기한 듯한 얘기"로 듣고 섭섭함을 표했던 일화를 소개하며, 당시 충분히 해명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화자는 자신이 한국 교회에서 "울고 웃고" 컸기에 포기할 수 없으며, 무관심이나 무집착도 아니라고 분명히 한다.
성장과 깨어남 — 발달이론의 인용 화자는 한 사상가(음성상 '켄버/캐버'로 들리는 인물)의 책에서 인간 변화를 성장(growing up)과 깨어남(wake up)으로 나눈 개념을 소개한다. 성장은 피아제의 인지발달 단계 이론과 콜버그의 도덕 발달 단계 이론을 근거로 설명된다. 피아제는 감각운동기(눈앞에서 사라지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김) → 전조작기(자기중심성) → 구체적 조작기(양의 보존 인식) → 형식적 조작기(추상적 사고)로 단계가 순서대로 진행된다고 보았다. 콜버그는 도덕 판단을 전인습 수준(벌·상에 따른 규칙 준수) → 인습 수준(타인의 시선, 법과 질서 의식) → 후인습 수준(법 너머의 보편 원리·양심에 따른 판단, 필요시 실정법 불복종)으로 나눴다. 화자는 두 이론의 공통점을 발달에는 순서가 있고 건너뛸 수 없으며, 시간·연습·숙성이 필요하다는 점으로 요약한다.
깨어남 과잉, 성장 실종 — 한국 교회의 비대칭 반면 깨어남은 "하나님이 나를 보시고, 만나시고, 말씀하신다"는 각성이다. 화자가 인용한 사상가의 핵심 통찰은 깨어남과 성숙(성장)은 함께 오지 않는다는 것 — "아주 깊은 깨달음을 가진 승려라고 해도 인격적으로는 미성숙하거나 사회적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화자는 이를 한국 개신교의 문제로 연결한다: 신뢰받던 지도자가 갑자기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때, 그 사람의 깨어남 체험 자체가 가짜라고 부정할 필요는 없고 다만 "발달하지 못한 것"이다. 반대로 성숙은 충분해도 내면이 공허해 깨어남이 없는 사람도 있다. 한국 교회는 "은혜받은 간증은 넘쳐나지만" 시민 사회의 눈으로 볼 때는 이상해 보이는 비대칭을 보인다고 지적한다.
성화 교리조차 깨어남 언어로 회수되다 화자는 장로교·감리교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성화 교리를 언급한다. 원래 성화는 칭의 이후 평생에 걸쳐 점진적으로 이뤄지는 변화를 뜻하지만, 실제 한국 교회에서 "성화된 삶을 살라"는 말은 곧바로 "더 기도하세요, 더 헌신하세요, 더 거룩해지세요"라는 다시 깨어남의 언어로 치환된다고 짚는다. 이웃을 존중하고 경청하며 무례하지 않는 것 같은 실질적 성숙의 항목은 다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화자는 잘잘법 채널 역시 "신앙 깊다는 사람들"로부터 오히려 더 많은 무례와 모욕의 말을 들었다고 언급하며, "영적으로는 그토록 뜨거운데 시민으로서는 그토록 미성숙"한 현상을 지적한다.
왜 성숙은 말해지지 않는가 화자는 깨어남만 강조되는 이유를 "어려워서"라고 단순하게 답한다. 깨어남은 기도로 하나님이 해주시는 일로 여겨지지만, 성숙은 일상에서 하나하나 쌓아야 하며 칭찬받지도 주목받지도 간증거리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화자는 "우리에겐 더 깊은 영성이 필요하다"는 식의 영성 열풍 대신 시민적 성숙 열풍이 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신앙의 급진성 vs 사랑의 급진성 화자는 "바라지 않고 사랑한다"는 것이 상대를 자기 기획·조작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 태도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신앙의 급진성(더 뜨겁게 믿고 새벽기도 가는 것 — 나를 뜨겁게 만듦)과 사랑의 급진성(고쳐주려 하지 않고 끝까지 곁에 있는 것 — 나를 힘들게 만듦)을 대비시킨다. 예수의 원수 사랑 명령을 두고 "원수가 바뀌어서 사랑하라는 게 아니라, 원수를 사랑해라"는 것이 이 급진성이라고 풀이한다.
기독 시민 — 두 축이 함께 자라야 화자는 '기독 시민'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기독'은 깨어남의 차원(신앙 체험, 예수와의 만남), '시민'은 성장의 차원(민주 시민으로서의 품격)으로, 이 두 축이 함께 자라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국 교회가 세상과 불화한다면 그것이 도덕적 미성숙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의 급진성 때문에 세상이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를 감싸안아서 생기는 불화이길 바란다고 말한다.
초기 한국 개신교의 사랑의 급진성 화자는 역사적 사례를 든다. 신분제 사회에서 백정 출신 박성춘·박서양을 교회로 받아들인 선교사(음성상 '사무엘 무원')의 사례, 마부였던 이자익을 목사로 청빙해 조덕삼 장로가 그 아래서 섬긴 이야기, 여성 고등교육을 주장했던 초기 한국 교회의 급진성을 소개하며, 그 사랑의 급진성이 오늘날 한국 교회를 있게 했다고 말한다. 반면 오늘날 "시민 상식도, 시민 윤리도 지키지 않는 교회"는 선교의 장벽이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편지로 돌아가서 — 결론 화자는 편지 속 아버지의 판단이 신앙 거부가 아니라 "시민으로서의 책무" 판단이었다고 재해석한다. 학생들에게 계속 받는 질문도 "당신들의 신앙은 존중하지만 한국 개신교가 보이는 행태는 왜 그런가"라는 것이며, 교회 진입 장벽은 신앙 장벽이 아니라 시민 사회 기초 윤리의 장벽이라고 결론짓는다. 마지막으로 화자는 "제 앞마당 쓸고, 힘 남으면 옆집도 도와주면서" 계속 말하고 쓰겠다는 다짐과 함께, 바라는 것 없이 그저 사랑하는 길을 택하겠다고 마무리한다.
💬 결정적 발언
"저는 한국 교회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깨어남은 과잉이고 성장은 실종이다."
"교회 개신교회에 진입하기 어려운 장벽은 신앙 장벽이 아니라 지금 시민 사회 기초 윤리의 장벽이에요."
"신앙의 급진성은 나를 뜨겁게 만들죠. 그러나 사랑의 급진성은 나를 힘들게 만들어요."
⚖️ 화자가 다룬 반론·한계
- 존경하는 한 목사가 화자의 "바라는 것이 없다"는 발언을 두고 "한국 교회를 포기한 것 같다"며 섭섭함을 표시한 일화를 화자 스스로 언급하고, 이에 대해 포기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해명한다.
- 화자는 피아제·콜버그 이론이 "수정되고 반박될 수 있다"는 점을 스스로 단서로 단다.
🧩 핵심 용어
- 성장(growing up) = 시간과 연습을 거쳐 천천히 이뤄지는 인지·도덕적 성숙
- 깨어남(wake up) = 하나님 체험과 같은 수직적·순간적 각성
- 성화 = 칭의 이후 평생에 걸친 점진적 변화를 다루는 신학 교리
- 아드폰테스 = 근원으로 돌아가라는 뜻의 표현
- 전인습/인습/후인습 수준 = 콜버그의 도덕 발달 3수준 (벌·상 회피 → 타인 시선·법질서 → 보편 원리·양심)
- 사랑의 급진성 = 상대를 고치려 하지 않고 바라는 것 없이 끝까지 곁에 있는 사랑의 태도
- 기독 시민 = 깨어남(신앙)과 성장(시민적 성숙)의 두 축이 함께 자라는 존재
🔎 보완 & 확인 (요약가 註)
- 배경 보완: 영상 속 성장/깨어남 구분은 음성상 '켄버/캐버/켄일버' 등으로 표기되나, 인지·도덕 발달론과 영성 체험을 "growing up / waking up"으로 구분하는 논의는 통합이론가 켄 윌버(Ken Wilber)의 프레임과 유사합니다. 자동생성자막 특성상 실제 인용 인물명이 다를 가능성도 있어 확인 필요입니다.
- 사실 유의점: 백정 출신 신자 수용 일화의 선교사 이름이 자막상 "사무엘 무원"으로 들리는데, 정확한 인명 표기는 불확실하며 별도 확인이 필요합니다. 조덕삼-이자익 일화(금산교회로 알려짐)와 1907년 평양대부흥은 한국 교회사에서 널리 회자되는 사례이나, 세부 사실관계는 전승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어 추정 선에서 받아들이는 것이 안전합니다.
- 사실 유의점: 피아제·콜버그 발달단계 이론은 학계에서 이미 상당 부분 수정·비판된 고전 이론이며, 화자도 이 점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자막 원문 (참고)
Kind: captions Language: ko 제가 얼마 전에 제가 가르친 학생의 어머니한테 편지를 받았는데 그분 편지는 [음악] 어렸을 때부터 보태신앙이었고 자기 가정을 기독교 신앙의 가정으로 키우는게 목표였는데 그게 좌절됐다는 거죠. 좌절 앞에 있다는 거예요. 좌절의 [음악] 핵심 내용이 뭐냐면 한국 교회의 너무너무 부끄러운 모습 때문에 아버님이 자기 아들과 [음악] 자기 아내를 지키려면 한국 교회 보내선 한국 개교회 보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라는 말을 하면서 고민하는 거였어요. 그 고민 너무너무 고통스러워요. 장로교 [음악] 목사로서 그런 얘기를 듣고 있다는게 저의 복잡한 심정 [음악]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를 계속 사랑할 수 있는 길은 뭔가? 한국 교회를 계속 사랑할 수밖에 없는데 저는음 있는 거죠. 제가 군대 제대한게 1990년대 초입니다. 그때 제가 학교 다닐 때 아 우리 시내에서 아주 유명한 한 교회에서 큰 세미나가 제가 다닌 학교와 그 교회가 공동으로 한 세미나라고 기억하는데요. 아, 그때 그 세미나의 주제가 뭐냐면 많은 분들이 왔는데 한국 교회의 위기였어요. 양쪽 성장이 끝나고 이제 줄어들 거다. 그래서 이제 질적으로 성장해야 된다. [음악] 그런 얘기 하셨습니다. 사실 그때는 사실 약간 생뚱맞아 보이기도 했습니다. 왜냐면 1990년대 중후반까지 한국 교회는 엄청나게 성장했고 신학대학들은 경쟁률이 높았고 [음악] 한국 교회가 그때처럼 부유할 데가 없었던 거 같아요. 그런데 그분의 선견지명으로 연 세미나에서 나온 얘기들 한국 교회가 위기다 이렇게 얘기하면서 한국 교회가 질적으로 성장해야 된다. 본질로 돌아가야 된다. 다시 뜨거워져야 된다. 회개 영상을 되찾아야 된다. 이후로 다른 곳에서는 뭐 대부흥 1907년 대부흥을 새롭게 일으켜야 된다. 뭐 이런 얘기들이 굉장히 많았죠. 당시는 그것이 굉장히 중요한 처방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근데 그로부터 한 30년이 더 넘게 지났는데 오늘날도 어디 세미나가 보면 저보고도 와서 얘기해 달라고 해 가지고 어느 세미나가 보면 하는 말이 한국 교회 위기인데 어떡하면 좋겠냐 그러는 거예요. 30년 동안 계속 이겨요. 30년 동안 그런데 대답도 똑같아요. 아 아드폰테스 뭐 뭐 근원으로 돌아가야 된다. 뭐 그래? 회개를 철저히 해야 한다. 다시 기도 생활 해야 된다. 말씀으로 돌아가야 된다. 뭐 그런 얘기 초대 교회로 돌아가야 된다. 그런 얘기 굉장히 많이 합니다. 그리고 이러저러한 한국교회에 대한 비판의 얘기 많죠. 이런 상황을 앞에 두고 제가 전에 잘법에서도 한번 얘기했지만 한 책을 끝내고 나서 편집자가 저한테 편집인 분이 저한테 한국 교회 하시고 싶은 말씀 있으면 맨 마지막으로 좀 한 문단 정도 써 줬으면 좋겠다라고 하는 요청을 해 가지고 저는 한국 교회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런 거를 쓴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아주 그 존경하는 한 목사님이 그 책을 두고 북 콘서트를 하는데 그 말을 딱 집으면서 한국 교회를 포기한듯한 아게 자기는 들렸다 그러면서 아 그 조금음 섭섭하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때 제가 충분히 해명해 드리지 못했는데 저는 뭐 한국 교회를 포기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는데 제가 뭐라고 한국 교회를 [웃음] 포기하겠습니까? 제가 뭐 오만하긴 해도 그 정도로 오만하진 않습니다. 한국 교회 내에서 울고 웃고 잘하고 도움받고 간혹 도움 주고 한국 교회에서 잘하고 한국 교회에서 커왔던 제가 한국 교회가 너무 깊이 숨며 있죠. 제 삶에. 그래서 제가 뭐라고 한국 교회를 포기하겠습니까? 아,이 한국 교회는 포기할 수도 없고 내가 등 돌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오늘날에 여러 한국 교회 현실을 보면서 그것을 맞다고 온전히 다 맞다고 지지할 수도 없는 저의 복잡한 심정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를 계속 사랑할 수 있는 길은 뭔가 고민하다가 나온 말이거든요. 바라지 않습니다. 그냥 아 사랑하려면 바라지 않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누군가 포기의 말로 들리겠지만 그런 말 아닙니다. 아, 그리고 생각해 봤어요. 아, 제가 [한숨] 한국 교회에 관해서 무슨 말을 저보고 또 하라 그러면 뭐라 그럴까? 그러다가 이런 생각을 좀 하게 됐습니다. 위기담. 한국 교회가 위기다라는 한 30년도 더 된이 말 공회전 한 가닭이 어디나? 맨날 위기라 그러는데 왜 여전 여전히 위기란 말이 반복되는가? 처방이 늘 똑같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아까도 말한 [음악] 것처럼 회개해라. 다시 뜨거워져라. 첫사랑을 회복해라. 본질로 돌아가라. 성령의 은사를 사모해라.이 [음악] 이 말들 가만히 들여다 보면 한 가지 홍통점이 있습니다. 뭐냐면 위로부터 내려오는 수직적 각성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열정 무릎 꿇고 회개하고 기도하고 뜨겁게 통성으로 [음악] 말하고 기도하고 소리 소리 부르짖고 뜨거운 은혜가 임했던 그때의 신앙 감격으로 돌아가라. 귀환 언어죠. 어디로 돌아가라고 하는 귀환 언어. 귀환 [음악] 언어고 동시에 아주 귀한 언어이기도 하죠. 근데 30년 동안 계속 위기이고 30년 동안 같은 처방이라면 [음악] 그리고 여전히 한국 교회가 위기이고 한국 교회를 고쳐야 된다면 저는 다른 처방, 다른 문제점을 생각해 봐야 한다고 그렇게 결론을 내리게 됐는데요. 어떻게 말할까 이렇게 고민하다가 켄버라고 하는 한 사상가 있는데 그분 책을 읽다가 좋은 언어를 발견해서 제가 같이 나누려고 합니다. 인간의 변화를 두 가지로 나눴는데 하나는 성장이 있고 하나는 깨어남입니다. 성장은 growing up 이렇게 하고 깨어남은 wake up 이렇게 얘기한 겁니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가 계속 강조했던 건 wake이 이것은 수직적인 이야기라고 한다면 업장은 어떻게 보면 천천히 시간을 걸려서 성숙해 가는 과정을 뜻합니다. 그분의 책에서 보면 삐아제가 말한 인지발달 단계 이론, 콜보그가 말한 도덕 발달 단계 이론을 주로 말씀하더라고요.이 이 삐어자이라고 하는 분은 아이 자기 아이를 가만히 관철하면서 인간이 정해진 순서에 따라 단계를 거쳐서 인지가 발달한다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감각 운동기인 아기는 간단한 아기는 눈앞에 사라지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대요. 정말 그런지 아닌지 요즘 뇌과학이나 이런 걸로 좀 더 찾아보긴 해야 되겠지만요. 전 조작기의 아이는 세상을 오직 자기 관점으로만 본다는 거예요. 산머에서 보면 풍경이 어떻게 보일지 생각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그게 이제 자기 중심성이죠. 그다음에 구체적 조작기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때는 아이가 컵의 모양이 바뀌어도 불의 양이 그대로라는 걸 인식할 수 있다는 거예요. 더 나가면 형식적 조작기 비로소 들어서면 추상적 사고를 하고 가설를 세우고 하는 발달 단계를 거친다는 거예요. 핵심 아이디어는 뭐냐? 인질환 한꺼번에 주어지지 않고 단계를 밟아서 천천히 구성된다라는 거죠. 그다음에 콜복그라고 하는 분은 도둑의 영역으로이 통차를 옮겼는데요. 도덕적 판단의 수준을 세 수준 여섯 단계로 나눴는데 아주 그냥 거칠게 말한다면 가장 낮은 전 인습 수준에서는 사람이 벌을 벌받을 걸 무서워서 혹은 상위탐나서 규칙에 따른다는 거예요. 혼내면 안 하고 상주면 하고 그건 전 인습 수준이고 그다음에 인습 수준에서는 남들의 시설을 의식한다는 거죠. 비로소. 남들이 좋게 봐 주니까 혹은 법과 질서가 그러하니까 따라요. 그니까 기준이 집단과 사회로 넓어지죠. 이거는 남의 시선을 자기 행동에에 고려하는 거예요. 그전에는 자기 이해 관계만 보다가 남의 시선을 보고 마지막 후인습 단계 수준에 이르서는 사람은 법너머의 보편 원리를 생각한다는 거예요. 실정법이 이래도 보편적인 어 인간의 원리가 자연법이라고 하는데 그런 것이 그렇다면 실정법을 어기고서라도 인간의 존놈과 정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도덕적 발달 단계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실정법도 간혹 불복정할 수 있다. 그러니까 실청법으로 어기면 처벌 받게 되니까 실법으로 어면 다른 사람들에게 제재를 받게 되니까 또 뭐 법과질서 인습 수준에서도 남들이 좋게 봐주지 않으니까 안 하고 싶거든요. 근데 후인습 단계에서는 보다 보편적인 원리, 양심, 인간의 존엄 이런 것 따르고자 하는 도덕 발달이 됐기 때문에 실정법을 어길 용기를 낼 수 있다. 두 사람이 말하는 공통점이 뭐냐? 발달에는 순서가 있고 그 순서는 건너뛸 수 없고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데는 시간, 연습, 성숙, 숙성의 시간들이 필요하다. 이게이 두 사람의 통찰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뭐 콜버그나 뭐 삐아제 이론 수정되고 뭐 반박되고 여러 가지 있을 수 있지만 중요한 단어 고르라면 시간, 성숙, 발달 단계, 수준 이런 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캐버가 말하는 깨어남은 아 우리가 하나님 체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거. 하나님 체험 그 중에 하나는 아 하나님이 나를 보시네. 나를 만나셨네. 나에게 말씀하시네. 내 앞에서 무엇인가를 보여 주시네 등등이 되겠죠. 그러면 온 우주의 하나님이 나를 기억하시고 내게 주목하시고 그러니 내가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삶을 사네라고 하는 각성이 오는 거죠. 굉장히 중요 성령 체험 캔일버는 어떻게 얘기하냐면요 깨어남 하고이 성숙 발달이 한꺼번에 오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주 깊은 깨달음을 가진 승려라고 해도 인격적으로는 미성숙하거나 사회적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라는 겁니다. 우리 한국 계신교회 여러 가지 문제 중에 하나가 한국 개신교회뿐만 아니겠습니까? 뭐 다른 뭐 것도 마찬가지지만 한국 개신교 그래도 특별히 개신교 문제 중에 하나가 위대한 지도자 내가 믿었고 신뢰했던 하나님 체험 신앙에 대한 깊은 진리를 망해 준 어떤 분이 갑자기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일을 저질러요. 우리 흔히 그거 봤어요. 그분을 보면서 그분의 신앙 체험 하나님 체험 그로부터 오는 성경과 기독교 진리를 말하는 그 수준을 그 깨어남의 체험을 부정하거나 그거 다 가짜야. 저 사람 그렇게 하는 거 보니까 다 가짜야. 그렇게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있는 거예요. 그러나 발달하지 못한 거예요. 도덕이나인지 수준이 여전히 전 인습 수준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성숙은 충분히 일어났어요. 약자를 위해 헌신하고 세계 시문으로 반듯하게 살아가고 누군가를 위해서 헌신하 그 보편적 가치를 위해서 헌신하지만 정작 자기 내면이 공허한 사람이 있어요. 자기가 이것이 옳다고 생각해서 자기 삶을 살지만 정작 자기는이 세계에서 누구인지 여전히 빈 공간 속에 살아갈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깨달음과 성숙이 따로따로라는 거예요. 깨어나의 순간이 있어도 성숙이 오지 않을 수 있고 성숙이 있어도 깨어남이 오지 않기 때문에 결국이 둘이 균형을 이루거나 아니면 한쪽만 발달하면 다른 쪽을 발달시켜야 된다. 그렇게 얘기를 해야 되겠죠. 이런 측면에서 보면 우리 한국 교회의 비대칭 한면이 뚜렷하게 보입니다. 은혜받은 간증은 넘쳐납니다. 뭐 어떤 교회 가면 매주일 병고친 아 체험을 적어 놓는 교회들 주보 많이 왔습니다. 눈물의 회개, 불같은 체험, 응답받 기도 깨어나는 순간 자기 삶에 역사했던 하나님의 음성 이런 것들이 너무너무 많아요. 한국 교회에서 이것들 다 보면 어느 교회 가서 하나님 체험 좀 얘기해 주세요. 이러면 굉장히 많을 거예요.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한국 교회를 바라볼 땐 그들이 그렇게 풍요로운 하나님 체험이 있다고 깨어남이 있다고 말하지만 시민 사회의 눈으로 볼 때 한국 교회는 매우 이상하게 보이는 거예요. 뜨겁게 은혜받아서 사회적 신분이 이른바 높은데도 교회 주차장 관리를 한 분이 이웃에게 막말을 하고 거듭났다고 고백한 사람이 공극적 영역에서 매우 이상한 행동과 언행을 하고 우리가 너무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깨어난 체험이라는 것 자체가 거짓말이다. 혹은 독선적이다. 저 사람들은 만 인만 벌리면 사람들이 죄인이라 그러고 자신들은 회개하고 용서받았다 그러는데 저 사람들은 왜 그러냐 이렇게 시민 사회는 깨어남의 언어만 가득한 한국교회에 대해서 그렇게 얘기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현상에 대해서 성화를 말하기도 하죠. 뭐 장로교 교례이기도 하고 뭐 감리교회에서도 굉장히 중요하게 얘기하는 건데 성화 교리는 깨어남 이후에 성장을 책임지는 신학 언어거든요. 그런데 여러 가지 논란이 있지만 칭위 이후에 성화가 온다. 그리고 성화는 평생에 걸친 점심적인 변화다. 이렇게 이제 배우지만 사실 우리 한국 교회에서 실제 성화에 대한 얘기하는 걸 들어보면 되게 다 어떤 거냐면 성화된 삶을 살아라 하고 나오는게 뭐냐면 기도하세요. 성화된 삶을 살아라 하고서 더 교회에 헌신하세요. 성화된 삶을 살아라 더 거룩해 주세요. 하고 다시 성화의 언어를 다시 깨어남의 언어로 다 바꿔 버린단 말이에요. 더 기도하세요. 더 헌신하세요. 그러깐 어 시민 사회의 성숙을 말할 수 있는 성화라고 하는 교리마저도 깨어남의 수직 축구로 찾고 넣는 거죠. 이웃을 향해서 함부로 말하지 않고 약속을 지키고 주를 서고 약자의 말을 끝까지 듣고 이런 것들은 하지 않죠. 상대방을 존중하고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고 내 말을 할 때 상대방에게 무례하지 않고 모욕적이지 않고 함부로 하지 않고 자기가 함부로 하는 어떤 말은 신앙으로 정당화하고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적으로 말하고 사탄으로 생각하고 우리 잘잘법도 얼마나 많은 어 무래와 모욕의 말을 당했어요. 그거 가만히 보면 신앙 깊다고 하는 사람들이 더 그래요. 그러니까 이분들은 자기는 신앙 진리를 위해서 자기 입을 더혔는 것을 참을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이 저렇게 함부로 막말을 할 수 있는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 마을을 정리하면 영적으로는 그토록 뜨거운데 시민으로서는 그토록 미성숙해요. 깨어남은 과잉이고 성장은 실종이다. 그렇게 진단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저한테 한국 교회 30년 위기라 그러는데 왜 아직도 위기입니까? 그러면 처방이 계속 성숙 저 깨어남을 말해서 그럴 수도 있는 거 같으네요. 성숙을 말하지 못하는 거 같아요. 그렇게 답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근데 왜 성 깨어나면 얘기하고 성숙은 말하지 않을까요? 아주 간단해요. 어려워서 그래요. 어려워서 깨어나면 하나님이 해 주시는 거라고 생각해서 하나님 오늘도 저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세요 하고서 기도하면 되거든요. 말씀 읽고. 그런데 성숙한다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은 일상에서 하나하나씩 해야 되는 건데 그것은 칭찬받는 것도 아니에요. 누군가의 주목을 받는 것도 아니에요. 우리가 점자는 언어를 쓴다는게 눈앞에서 바로 칭찬받습니까? 사회적 약속을 지키고 민주 시민으로서의 품격을 지키는게 사회적으로 바로 칭찬받아요. 그렇지 않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깨어나며 놀라운 체험을 하면 신유의 은사를 갖고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 주목받습니다. 성숙은 힘들고 귀찮고 어렵고 번거롭고 주목받지도 못하고 칭찬받지도 못하는데 깨어남의 언어는 화끈하거든요. 주목받고 간증거리가 안 되잖아요. 제가 오늘 시민으로서 기독 시민으로서 주를 잘 썼어요. 주가 그거를 칭찬해 주기했어요. 간증거리도 안 되잖아요. 우리 한국 교회에서 간증하려면 하나님이 무슨 말씀 하셔 가지고 놀라운 일이 있었다고 간증해야 되잖아요. 우리는 성숙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하죠. 보고 싶지 않아요. 힘든 일은 보고 싶지 않아요. 오히려 더 깊은 영성을 부르짖으면서 우리 스스로를 위로하죠. 우리에겐 더 깊은 영성이 필요하다. 맨날 그런 얘기. 한국에 한동안 영성 열풍 불었잖아요. 영성 영성 영성. 그 말을 저는 시민적 성숙 결풍이 불었으면 하고 바라 바라보기도 합니다. 귀찮고 어렵고 힘들고 번거롭고 누구도 주목하지 않고 칭찬받지도 않는 그거 그거 한국 교회가 외면하고 무시해 왔던 건데 사실 그것이 없어서 한국 교회는 여전히 위기입니다. 제가 한국 교회를 사랑하려면 한국 교회에 바라는 것이 없다. 저는 한국 교회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음악] 한국 교회를 더 사랑하고 싶어서요. 그렇게 얘기를 한 것은 한국 교회 무관심해서가 아닙니다. 무집착한 것도 아니에요. 어, 제가 한국 교회 무집착했으면 여기 나오지도 않습니다. 그냥 학자로서 논문이나 쓰고 살아가면 됩니다. 글이나 쓰고. 결과에 마음 두지 않는 뭐 거리두기 이런 것도 아닙니다. 살 바라지 않고 사랑하는 것은 상대를 내 기획 내 조작에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겁니다. 저는 한국 교회를 제가 지금까지 뭐 성숙이 부족하다 이렇게 [음악] 얘기하지만 한국 교회를 내 뜻대로 고쳐쓰면서 한국 교회 이렇게 둬야 돼. 저렇게 변해야 돼. 그래서 그 바람이 간절해서 제가 한국 교회 변화 프로젝트, 개선 프로젝트 [음악] 그렇게 그런 걸 만들 어 힘도 없고 아 그렇게 한국 교회를 몰아 세우고 싶은 [음악] 그런 마음도 없습니다. 더 뜨겁게 믿어라. 더 철저히 헌신해라. 세상과 더 날카롭게 [음악] 구별돼라. 그렇게 말하는 것이 잘못 부족하다. 뭔가 큰 걸 놓치고 있다고 제 의견을 들려 드리면서 한국 [음악] 교회가 할 수 있다면 제가 한국 교회를 사랑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좀 더 급진적으로 사랑했으면 [음악] 좋겠다. 한교회가 누군가를 고쳐 주려 하지 말고 끝까지 곁에 있어 줄 순 [음악] 없는가? 바라는 것 없이 그대로 품어 줄 순 없는가? 나와 다른 누군가를 적이나 원수나 사탄이나 마귀나 [음악] 무엇으로 부르지 말고 그냥 이웃으로 옆에 그들의 부족함을 끌어안 [음악] 줄 수는 없는가? 이런 사랑의 급진성이 오히려 한국 교회에 부족한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음악] 해봅니다. 신앙의 급진성은 나를 뜨겁게 만들죠. 그러나 사랑의 급진성은 나를 힘들게 만들어요. 신앙의 급진성 더 열심히 기도하고 새벽 기도 가면 하나님이 내 삶 온전히 채워진 거 같아서 얼마나 좋아요. 아침에 성경 말씀 읽었는데 깨우침 있으면 얼마나 마음이 뜨겁고 좋아요. 그러나 사랑의 급진성 고쳐 주려 하지 않고 옆에서 있는 것은 아 너무 힘들어요. 누군가를 사랑해 본 사람들은 다 알아요. 사랑하는 대상을 고쳐 주려고 하면 싸움밖에 남는게 없다는 거. 바라는게 많으면 그 사람을 온전히 사랑할 수가 없다는 거. 저 사람 마음에 안 드는 것이 내 눈에 보인다고 사랑을 그만둘 수 없는 관계를 우리가 갖고 있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 그가 우리의 마음에 들지 않아도 혹은 내가 생각하는 방식대로 살지 않아도 혹은 간혹 가는 저렇게 저렇게면 안 될 거 같은데 하는 대상이라도 끝까지 그 옆에 남아 있으면서 내가 잘못하고 잘못된 길로 가는 걸 알면서도 너 왜 그랬니? [음악] 왜 계속 내 옆에 있니? 나처럼 못나고 망가지고 마구 살고 이런 사람 [음악] 옆에 너 왜 있니? 이렇게 물어볼 때 내가 무슨 말 해도 너 바뀌지 않을 건 알지만 알 알지만 그래서 힘들었지만 [음악] 그래도 내가 너 옆에 있어. 주는 거 왜 달리할게 없어서 그렇게 했어?라고 라고 말해 줄 그런 교회는 없는지 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음악] 그 말 어려운 말 아니에요. 예수께서 원수 사랑하라 그랬잖아요. 원수가 바뀌어서 사랑하라는게 아닙니다. 원수를 사랑해서 바꿔라. 원수를 사랑하라. 그러면 원수는 바뀌어서 너의 편이 [음악] 된다. 예수께서 그렇게 말한게 아니라 원수를 사랑해라 했던 그 사랑의 급진성을 [음악] 한국 교회가 닮으면 어떨까 그런 생각도 해 봅니다. 그래서 [음악] 저는 성장 그리고 사랑의 급진성을 말씀드리면서 기독 시민이라고 하는 말을 새롭게 좀 생각해 보자. 하나는 기독이란 말인데요. 그건 깨어남의 차원이죠. 나의 신앙, 우리 교회 신앙, 우리 교단 신앙, 우리 교파 신앙 여기에이 곳에 속하면서 나에게 나타나셨던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는 전율, 성령 체험, 예수 그리스도와 만났던 그 아름다운 이야기들, 그런 것들을 가슴 [음악] 깊이 갖고 그것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우리가이 시대를 살아가니까 시민으로서 살아가는 그 성장의 차원을 [콧방귀] [음악] 한국 교회가 전면적으로 받아들이죠. 참 어떻게 보면 좀 이상한데 진리를 선포해서 [음악] 세상과 불화해야만 한다라고 간혹 얘기하는 거 많이 듣는데 그게 옳은 측면도 있는데요. 세상과 불화하는 그 대목이 우리의 미성숙 때문에 오는 건 아닌지도 [음악] 가끔 생각해 봐야 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요. 기독 시민은이 두 축이 함께 자라는 겁니다. 깨어남의 [음악] 측면, 시민의 측면. 우리가 한국 교회가 시민 사회와 불화한다면 그 시민 사회와 불라하는 지점은 우리가 도덕적으로 미성숙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한국 사회에서선 받아들일 수 없는 어떤 대상에 대한 사랑의 급진성 때문에 불화하는 그런 일을 좀 겪어 보고 싶어요. [웃음] 한국 사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들이야. 그런데 왜 한국 교회는 그들을 감싸고 있냐? 그런 급진성을 좀 그런 것 때문에 불러하는 그런 모습을 좀 보면 안 될까? 그런 이야기요. 제가 얼마 전에 제가 가르친 학생의 어머니한테 편지를 받았는데 그분 편지는 어렸을 때부터 보태 신앙이었고 자기 가정을 기독교 신앙의 가정으로 키우는게 목표였는데 그게 좌절됐다는 거죠. 좌절 앞에 있다는 거예요. 좌절의 핵심 내용이 뭐냐면 제가 구체적으로 다 말씀드릴 수 없으니까. 한국 교회의 너무너무 부끄러운 모습 때문에 아버님이 자기 아들과 자기 아내를 지키려면 한국 교회 보내선 한국 개신교회 보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라는 말을 하면서 고민하는 거였어요. 저는 그 아버님의 판단이 굉장히 나빴다. 나쁘다 이렇게 말씀드리기보다는 시민 상식을 가진 분이 한국 교회 여러 병패를 보면서 모든 한국 교회가 그렇진 않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 병패를 보면서 내가 사랑하는 아내와 내가 사랑하는 자식들을 과연 이런 곳에 보낼 수 있는가? 그런 아버지 혹은 남편으로서의 책물을 유기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서 교회 가는 것을 반대한다는 그런 얘기였어요. 그 고민 너무너무 고통스러워요. 장로교 목사로서 그런 얘기를 듣고 있다는게 이건 시민으로서의 고통인 거예요. 신앙을 반대하는게 아니에요. 하나님을 믿는 삼일체 하나님을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믿는 교회의 거룩함을 믿는 신앙을 져버린게 아니라 한국 계신교회 병패에 대한 고통이에요. 신앙인으로서의 고민이라기보다는 시민으로서의 고민이거든요. 저는 한국계 교회 개신교가 줄어드는 이유가 신앙의 순수성을 잃어서 기도가 부족해서 말씀으로 돌아가지 못해서 아까 말한 얘기하는 건 계속 깨어나면 죽이잖아요. 이러면 이걸로 떠나는게 아니라는 거예요. 계속 제가 제 개인 경험으로 계속 받는 메일은 계속 받는 메일은 뭐냐면 한국 교회가 도대체 왜 그런 건가? 제가 학생들을 만나면서 계속 듣는 얘기는 어 당신들의 신앙은 존종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 개신교가 보이는 행태는 왜 그런 것이냐를 물어요. 교회 개신교회에 진입하기 어려운 장벽은 신앙 장벽이 아니라 지금 시민 사회 기초 윤리의 장벽이에요. 제 삶의 경험이니까 다른 분들은 다른 삶의 경험이 있을 수 있는데 제 삶의 경험은 그렇다. 그래서 기독 시민 교회가 시민적 상식을 기본적으로 확인하고 교회가 시민 사회랑 부활하려면 사랑의 급진성이 있는 곳에서 불화하는 것이다. 그러면 [음악] 나중에 지나서 아 교회가 오았구나. >> [음악] >> 한국 교회 초기 개신교 때 백정을 두드는 사무엘 무원 목사 [음악] 조소는 양반 귀족 천민 양인 있어서 철저히 구분해야 된다. 우리가 다니는 양방 교회에는 천민 못 온다. 천민 오면 우리 나간다. 이렇게 [음악] 반 협박했던 양반들에 맞서서 사무엘 무 목사님이 [음악] 하나님 앞에서 모두 평등하다. 사랑의 급진성이죠. 오늘날에 계급이 없는 사회에서선 그게 무슨 말인지 [음악] 감히 짐작도 못 해요. 그 사랑의 급진성을 가지고 백정이었던 박송춘 선생 [음악] 그다음에 박수영 선생을 아 아는 한국 초기 기독교의 사랑의 급진성이 [음악] 오늘날 한국 교회를 입게 한 거지. 그래서 시민 그때는 [음악] 사회랑 불화했지만 그 불안은 사랑의 급진성 때문에 했거든요. 우리가 잘 알고 있는이자 목사님하고 조두삼 장로님 [음악] 그분 이야기도 어떻게 말을 부리는 마부를 지주 양반이 고개 숙기고 [음악] 섬길 수 있어요. [음악] 그런 사랑의 급진성이 한국 교회를게 한 거지. 여기 와서 여자들도 공부할 필요가 있어. [음악] 이런 얘기 할 때 여성들도 고등 교육을 받아야 돼. 이런 급진적인 여성의 인권과 여성의 교육에 대한 급진성을 가진 한국 교회가 한국 사회 한국 교회를 훌륭하게 이끌었지 시민 상식도 되지 않는 시민 윤리도 지키지 않는 교회가 오히려 오늘날에는 선교의 장벽이 되고 있다. 한국 교회를 계속 사랑할 수밖에 없는데 저는음 있는 거죠. >> [음악] >> 제 앞마당 눈 왔는데 지금 내 앞마당 쓸고 홍수 왔는데 내 앞에 있는 거 고쳐가고 힘 남으면 옆집도 도와주면서 [음악] 계속해서 뭐 이렇게 말하고 그렇게 글 쓰고 그러니까 교회에 남아 [음악] 있는 교회 신앙생활하는 여러분도 아 우리가 더 말씀으로 뜨거워져야 돼 [음악] 얘기 다 좋은 거지만 우리가 시민 상식은 최소한 교회 내에서 회복하고 그 회복되면 더 나아가서 사랑의 급진성을 보여주는 교회가 돼 보자. 그렇게 다짐하면서 [음악] 견딜 수 있는 분들은 계속 견뎌 가면서 [웃음] 하는 거죠. 저는 한국 교회 [음악] 여전히 바라는게 없습니다. 그냥 제 나름대로 사랑할 뿐입니다. 내가 이렇게 헌신하고 노력하고 프로젝트 [음악] 만들어서 얘기하고 잘법 나와서 얘기하고 여기저서 말하면 바뀌겠지. 그런 기대가 없습니다. 그냥 오늘도 제 앞마당 씁니다. 나와서 이렇게 저렇게 얘기합니다. [음악] 하나님 체험 소중하게 간직하면서 사랑의 급증성 때문에이 [음악] 사회와 불라하는 그런 교회를 한번 머릿속에 꿈꿔 봅니다. 거기에 [음악] 무슨 거창한 부흥 있을 수 있지만 그거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성실하게 [음악] 약속 지키고 차례 기다리고 시민의 기본 상식과 [음악] 기본 도덕을 충실히 지키는 시민인데 어떨 때는 바라는 것 없이이 [음악] 사회에서 저 사람들 참마 사랑할 수 있을까 하는 사람도 품어낼 [음악] 수 있는 사랑의 급진성을 가진 그런 기독 시민들이 우리 한국 교회에 가득한 [음악] 그 생 그 상상을 을 가끔 해봅니다. [음악] 그래서 저는 여전히 바라지 않고 사랑하는 길을 택하도록 [음악] 택하려고 니다. [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