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istian Power Comes from Realizing the Mysteries of Daily Life | Professor Kim Jin-hyuk | Jalja...
채널: 잘잘법 |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KXg2VG_90kA | 길이: 22:21
요약
🎯 TL;DR — 김진혁 교수는 인간이 느끼는 '무가치함'은 자연스러운 감정이며, 신앙은 답을 미리 쥐는 것이 아니라 답 없이 나아가는 여정이자, 일상을 유용성이 아닌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이는 태도임을 강조한다.
📌 핵심 논지 — 무가치함은 실패의 증거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감정이며, 일상을 '경연대회'가 아닌 '선물'로 받아들일 때 그 감정에 잠식되지 않을 수 있다고 화자는 말한다.
🗺️ 영상 구성
- 무가치함이라는 감정의 보편성 소개 (신학책 신학의 슬픔과 기쁨 인용)
-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신앙은 답을 모른 채 나아가는 법" 명언 해설
- 성경 속 소명의 다양한 유형 (베드로 vs 구레네 시몬)
- 하나님의 '무용한 찬란함'과 유용성 없는 선(善)
- 일상의 여섯 가지 특성과 '일상을 일상으로 대하는 법'
- 라인홀드 니버의 기도, 개인 실천 사례로 마무리
━━━ 본문 ━━━
무가치함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 화자는 "나는 언제 어디서나 가치가 있고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과대망상증이거나 신이거나 이런 두 가지 극단적인 케이스"라고 말하며, 무가치함을 느끼는 것 자체가 실패의 증거가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지니게 되는 감정이라고 설명한다. 특히 현대사회에서는 개인의 영향력이 축소되고, SNS를 통해 선별되고 편집된 타인의 삶에 계속 노출되면서 무가치함이 더 강화된다고 지적한다. 화자 본인도 부교역자 시절 노래·악기·운전·축구 등 요구되는 역량을 다 갖추지 못하고 내향적 성향 탓에 무가치함을 느꼈고, 이것이 오히려 신학을 가르치는 길로 이끌었다고 말한다.
신앙은 답을 모른 채 나아가는 일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말을 인용하며, 신앙은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답 없이도 계속 답을 향한 여정을 걷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이를 '공부'에 비유하는데, 초등학교 때 얻은 답(1+1=2)이 중학교 수준에서는 디딤돌일 뿐 최종 정답이 아니듯, 신앙 속 답도 계속된 배움의 과정 속 하나의 단계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인간은 하나님이라는 신비와 무궁무진한 세계를 배우는 피조물이기에, 이런 시선은 답을 모르는 타인에 대한 관대함으로도 이어진다고 말한다.
성경 속 소명의 두 유형: 베드로와 구레네 시몬 베드로처럼 강한 확신을 갖고도 계속 오해와 배신을 반복하는 인물이 있는가 하면, 마가복음 15장 21절의 구레네 사람 시몬처럼 얼떨결에 십자가를 대신 짊어진 인물도 있다고 소개한다. 시몬은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왔다가 십자가 처형을 구경하려던 중 등 떠밀려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되었는데, 누구보다 먼저, 누구보다 가까이 예수의 십자가를 진 사람이 되었다고 강조한다. 마가복음의 시몬이 로마서에 언급된 루포의 아버지와 동일인이라면, 그의 가족이 초기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을 가능성도 성서학자들이 추측한다고 덧붙인다. 화가 티소(디걱더)가 그린 〈십자가를 진 시몬〉에서 예수와 시몬의 얼굴이 쌍둥이처럼 똑같이 그려진 점을 들어, 서양 회화에서 보통 야고보(예수의 동생)가 예수와 닮게 그려지는 관례와 달리 이 그림은 얼떨결에 소명을 얻은 시몬과 예수의 깊은 연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해석한다.
하나님의 '찬란할 정도로 무용하심' 화자는 인간이 확신 있고 두드러진 업적을 가진 사람에게 주목하는 것이 본성이라고 말하면서도, 하나님은 "전능자의 관점에서는 전혀 쓸모없어 보이는 연약한 인간들을 통해 선을 이루시는 분"이라고 설명한다. 벨기에 법학자·신학자 자크 르클레르크가 하나님을 "찬란할 정도로 무용하신 분"이라 부른 것을 인용하며, 라틴어 표현 "bona non utilia sed honesta"(유용성은 없어도 존한 선들)을 소개한다. 유용성이 없다고 해서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 이 대목의 핵심이다.
일상의 여섯 가지 특성 기독교 철학자 강영안 선생의 논의를 인용해 일상을 구성하는 특성을 필연성(반드시 죽음·이별), 유사성(비슷한 실패 경험), 반복성(먹고 자는 되풀이), 평범성(대부분 평범한 일들), 더없음(노력해도 흘러가 버림), 비일상성(예기치 못한 사건)의 여섯 가지로 정리한다. 무가치함을 강하게 느끼는 사람은 이 중 반복성·평범성·더없음 같은 특성에만 유독 주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일상을 선물로 대하기 vs 경연대회로 대하기 일상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받아들이는 능력이 있을 때 무가치함에 잠식되지 않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반대로 일상을 경연대회처럼 대하면, 즉 특기를 보여주고 남을 설득해 상을 얻는 방식으로 대하면 삶 전체가 무가치하게 느껴질 수 있다고 설명한다.
실천: 라인홀드 니버의 기도와 개인 사례 라인홀드 니버의 기도문을 소개하며, 첫째는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판별할 수 있는 지혜"를, 둘째는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것을 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구하는 두 포인트로 요약한다. 니버를 "기독교 현실주의자"로 소개하며, 이 판별을 스스로 정의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할 것을 권한다. 개인 실천으로는 산책, 강아지와 놀기, 그리고 무가치함을 강하게 심어줬던 페이스북을 접은 경험을 소개하며 "삶이 매우 밝아지는 것을 경험했다"고 말한다.
💬 결정적 발언
"신앙은 답을 모른 채 계속 나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 스탠리 하우어워스 "찬란할 정도로 무용하신 분" — 자크 르클레르크(하나님에 대한 표현) "유용성은 없어도 존한 선들" (bona non utilia sed honesta)
⚖️ 화자가 다룬 반론·한계
- 신앙이 답 없이 계속 나아가는 일이라면 "긴 빠지는(지치는) 일 아닌가", "굳이 신앙을 가져야 하나"라는 의문을 화자 스스로 제기하고, 이에 대해 소명의 다양한 형태(베드로형/시몬형)로 답한다.
- 모든 사람에게 페이스북 중단이 정답은 아니라고 화자 스스로 한계를 명시한다.
🧩 핵심 용어
- 소명: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의 태도, 화자에 따르면 단일한 형태로 규정될 수 없음
- bona non utilia sed honesta: 라틴어, "유용성은 없어도 존한 선들"
- 일상성의 여섯 특성: 필연성·유사성·반복성·평범성·더없음·비일상성 (강영안 개념 인용)
🔎 보완 & 확인
- 배경 보완: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는 듀크대학교 신학 교수로 미국의 대표적 신학자·윤리학자이며, 서사·공동체 윤리학으로 알려져 있음(추정 — 영상 내 상세 소개는 없음).
- 배경 보완: 구레네 사람 시몬 일화는 공관복음(마태 27:32, 마가 15:21, 누가 23:26)에 모두 등장하며, 화자가 언급한 로마서 16:13의 '루포'와의 동일인 여부는 확정된 것이 아니라 다수 성서학자들 사이의 추정적 논의임 — 영상에서도 "성사학자들이 많이 이야기하는" 추측으로 소개됨.
- 사실 유의점: 화가 이름이 자막상 "디걱더"로 표기되었는데, 영상 맥락(십자가를 진 시몬을 예수와 쌍둥이처럼 그린 작품)상 프랑스 화가 제임스 티소(James Tissot)를 가리킬 가능성이 높음(추정 — 자막 음성인식 오류로 보이며 확인 필요).
- 사실 유의점: 자크 르클레르크(Jacques Leclercq)의 표현 "찬란할 정도로 무용하신 분"의 정확한 출처 저작은 영상에서 언급되지 않아 확인이 필요함.
자막 원문 (참고)
Kind: captions Language: ko 가치 없다라는 느낌.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자연스러운 느낌입니다. 나는 언제 어디서나 가치가 있고 유용하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과대 망상증이거나 신이거나 이런 두 가지 극단적인 케이스 아닐까 생각합니다. 계속해서 저희는 자신의 무가치함을 느끼면서 살아가는데 아주 뛰어난 신학자라고 이렇게 칭송받기도 했던 스테니 하워스는 신앙은 답을 모른 채 계속 나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어떻게 보면 신앙이란 것이 답을 줘야 될 것 같은데 답 없이 계속 살아간 일이라면은 이거 좀 긴 빠지는 일 아닌가? 아니면은 굳이 우리가 신앙을 왜 가져야 되나라는 생각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수님이 신학의 슬픔과 기쁨이 책 출판사에서 보내 주셔 가지고 예의상 앞부분만 봐야지 하다가 어 저도 모르게 완전 빠져들었어요. 그래서 이제 이걸 한 번에 다 읽으면 안 되겠다. 그래서 토요일마다 조금씩 나눠 읽으면서 어 나중에 좀 다시 보고 싶은 부분은 이렇게 책깔피로 줄도 많이 쳐 놨거든요. 근데이 책이 되게 신앙인 그리고 직업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 일상의 이야기를 잘 정리해 주고 거기서 내가 발견하지 못했던 것들을 좀 발견하게 해 주더라고요. 근데이 책이 아이러니하게도 무가치함이라는 이야기로 시작하던데 얘기 좀 해 주시겠어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살면서 무가치하다라는 그런 생각 혹은 느낌을 받을 것 같습니다. 꼭 뭔가의 실패했거나 남에게 뒤쳐졌기 때문에 무가치하다기보다는 인간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가지고 살아야 될 감정이 무가치함이 아닌가라고 생각이 듭니다. 특히 오늘날 현대 사회는 많은 것들이 빨리 변하죠. 이런 사이일수록 나의 생각과 행동이 어 나의 주변에 영향을 미치기가 힘들어집니다. 그럴 때 더 무가치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고요. 특히 SNS를 통해서 타인의 삶 그것도 그냥 삶이 아니라 어 선별되고 그리고 편집된 삶에 저희가 계속 노출되다 보니까 나만 뒤쳐지는 것이 아닌가 어 나만 무용한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무가치함을 많이 느꼈던 곳이 있었는데요. 그것은 아이러닉하게 교회였습니다. 제가 교육자로도 이제 일을 하게 되었는데 보통 부교역자들에게 요구되는 것들이 있잖아요. 예를 들면은 노래도 잘해야 되고 악기도 잘 다뤄야 되고 운전도 잘해야 되고 심지어 축구도 잘해야 되고 근데 제가 이런 것들을 다 잘하지도 못했고 내양적 성향이 있기 때문에 어 교인들에게 새각게 인사도 하지 못하고 게을러서 새벽 예배라든지 여러 이벤트들 같은 것도 잘 준비하지 못하고 그렇기 때문에 어 실제로 어 제 선배 부교역자로부터 많은 핀잔도 받고 눈치도 보게도 됐습니다. 어떻게 보면이 무가치하다라는 느낌. 교육자로서 내가이 교회에서 별로 할 수 일 없더라는 느낌. 그것이 저를 이제 목회의 길로 이끈 오히려 신학을 가르치는 이런 직업을 선택하지 않았나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는데요. 그렇다면은 이런 무가치함이 저희가 반드시 부정적으로 보어야 될 것인지 아니면은 또 이제 무가치함이 어 저희가 계속해서 안고 실험하며 살아야 될 무엇인지에 대해서 오늘 잠깐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어 먼저 한 신학자의 유명한 명언을 하나 소개해 드리려고 하는데요. 어 미국의 유명한 신학자죠. 스테니어 하워스가 한 말인데요. 어 신앙은 답을 모른 채 계속 나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입니다. 보통 신앙이라고 하면 우리에게 답을 줄 것 같은데 어 미국의 아주 뛰어난 신학자라고 이렇게 칭송받기도 했던 스탠니 하워스는 오히려 답을 모른 채 나아가는 일이 이제 신앙과 연결지였는데요. 인생은 넓은 의미에서 보면은 공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공부해 본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그래서 언제나 답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공부를 할 때 저희가 답을 얻고 나면은 그 답이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닌 경우도 꽤 있죠. 어, 답을 얻고 나면은 오히려 더 많은 문제들이 생기는 경우도 있고 그리고 그 답을 통해서 계속해서 새로운 또 문제들을 해결할 힘을 얻기도 합니다. 어, 한번 생각해 보면은 초등학교 때 저희는 수학 문제를 풀면서 여러 답을 얻었죠. 1 + 1은 2, 뭐 2 + 2는 4 이런 식으로 답을 얻었습니다. 그 답들은 그 답으로도 가치가 있지만 중학교와서 조금 더 복잡한 수학 연산을 하기 위해서 어떤 뒤돌로 사용되는 거죠. 그래서 초등학교 때 배웠던 그 답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또 중학교라는 또 조금 더 높은 수준에서의 또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그때는 답이라기보다는 답을 찾아가기 위한 디딤돌 혹은 이제는 배경이 되어 준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가 어떤 단계에서 얻은 답이 어 저희가 계속해서 살아가면서 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맞는 키처럼 작동되는 것은 아닌 거 같고요. 그것은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어 다시 한번 저희의 삶을 공부라고 한번 비유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공부를 가르치는 여러 나라 말들이 있는데 뭐 중국어로는 꽁프라고도 하고요. 라틴어로는 스튜디움이라고도 하고 뭐 프랑스는 애듀드라고도 하는데이 모든 말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뜻이 있습니다. 그건 뭐냐면은 힘들고 고대게 무언가를 이제 배운다라는 거죠. 만약에 인생이 공부라고 한다면은 저희의 인생이 그저 평탄하게 흘러가면서 답을 얻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고민하고 애쓰고 때로는 분투하면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라고 할 수 있겠죠. 근데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을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로 보고 있죠. 근데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는 없습니다. 왜냐면은 하나님은 신비시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를 다할 수 있냐? 그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만든 세계는 정말 무궁무진한 곳이죠. 그렇기 때문에 한 신앙인으로서 살아간다라는 것은 우리가 계속해서 신비신 하나님과 무궁무진한이 세계를 배워 나가는 과정 속에 들어가 있다라고도 이제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저희는 이제 인생을 살아가면서 계속해서 공부를 하고 답을 가지고 있다기보다는 답 없이도 계속해서 답을 향한 여정을 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고요. 이런 식으로 신앙을 생각할 때 타인을 볼 때도 조금의 시선이 바뀐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타인이 단지 답을 모르기 때문에 틀린 것이 아니라 나와 마찬가지로 어 답 없이도 어 자신의 길을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게 되면서 조금 타인과 그리고 주변에 대해서 관대한 시선도기를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신앙을 정의할 때 스탠니 하우스처럼 신앙은 답을 모른 채 계속 나아가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어떻게 보면 신앙이란 것이 답을 줘야 될 것 같은데 답 없이 계속 살아간 일이라면은 이거 좀 긴지는 일 아닌가? 아니면은 굳이 우리가 신앙을 왜 가져야 되나라는 생각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 뭐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면서다는 모습은 단 하나로만 규정을 할 수 있는 건 아닌 거 같습니다. 예를 들면은 하나님의 부름 혹은 이제 소명을 받고 어 강한 확신을 유지하면서 살아간 사람도 있겠죠. 근데 성경에 보면은 그와 다른 모습의 사람들도 있습니다. 뭐냐면 처음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어 자기가이 부르심의 의미를 잘 안다 생각하고에 그리고 강한 확신을 가지고 살려 그러죠. 근데 살다 보니 그렇지 않다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삶의 위기가 있었을 때 혹은 자기가 기대가 껴졌을 때 어 하나님의 부르심이 이거였나라고 이제는 또 고민하는 경우도 있죠. 예를 들면은 예수님의 수제자로도 불리는 베드로 같은 경우는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오라 그랬을 때는 바로 따라갔지만 계속해서 예수님을 오해하고 또 심지어 예수님을 배신하는 예 그런 모습까지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건 뭐냐면은 계속해서 우리는 내가 받은 소명 혹은 나의 부르심 이런 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계속해서 생각하고 성찰하고 때로는 뉘우치기도 하는 사람이란 걸 보여주죠. 근데 성경에 보면은 또 다른 위형이 있습니다. 아주 강한 결심을 가지거나 아니면 자기 뜻을 가지고 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한 거 아니라 얼떨결에 예수 그리스도를 따랐던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으로 마가복음 15장 21절에 나온 구레네의 사람 시몬이 있습니다. 구레네의 사람이라고 이렇게 수식어가 붙은 걸로 봐서이 사람은 뭐 예루살렘에 있었던 사람 아니겠죠. 어, 유월자를 맞아서 예루살렘에 올라온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리고 아마 당시에 있었던 가장 큰이 어떤 정치적 이벤트라고 할 수도 있겠죠. 십자가 형을 구경하려고 옆에 서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힘이 빠지셔서 예스러지셨을 때 십자가를 지우고 가다가 힘이 빠지셨을 때 등이 떠밀려서 대신해서 십자가를지게 된 케이스죠. 근데이 경우 같은 경우를 보시면 알겠지만 뭐 본인이 특별히 뜻이 있거나 계획을 세워 가지고 혹은 강한 결심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 것은 아니지만 누구보다도 예수 그리스도 가까이 있었고 어떤 제자보다도 먼저 십자가를 쉬었습니다. 예수께서 이제 마태복음 11장 28절을 보시면은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치라라고 했는데 린네 사람 시몬은 그런 이야기를 듣지도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다른 제자들보다 먼저 지었고 예수 십자가에 예수 그리스도 가장 옆에 있었던 사람이 되었죠. 그것을 보시면은 또 흥미로운 것 중에 하나가 뭐냐면은 마가복음에 따르면 시몬은 루포의 아버지라고 되어 있고요. 그리고 로마서에 보면은 바울이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무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만약에 그 마가복에 나오는 그리고 로마서에 나오는이 루포가 그 루포이고 그렇다면은 루포의 어머니가 바울이 자기 어머니라고까지 불렀던 그 바로 그 어머니가 됩니다. 그러면 저희가 추측할 수 있을 건데 성사학자들이 많이를 하는 건데이 구린 사람 시몬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대신져 주고 자기 삶을 살아 살려 떠난 것이 아니라 어 초기 그리스도 교회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고 그 아들과 그리고 그의 아내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라는 것을 알 수가 있겠죠. 요런 그 부는 사람 시몬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위치를 잘 보여주는 예술 작품이 있습니다. 디걱더라는 분이 그린 십자가를 진 시몬이라고 하는 작품인데요. 거기 보면 십자가를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고 시몬이 함께지고 있습니다. 그 두 명의 얼굴이 너무나 똑같이 마치 쌍둥이처럼 그려지고 있는데요. 그만큼 구린 사람 시몬이 예수 그리스도와 얼마나 가까이 있었는지 얼떨결에 십자가를지게 되었지만 얼떨결에 어떤 어떻게 보면 자기도 예상치 않는 소명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것이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와 자기 사이에 깊은 연대를 만들어 내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서양 해화에서 주로 예수 그리스도와 비슷하게 생긴 그런 그 제자로 그려지는 사람은 야고보입니다. 왜냐면은 동생이기 때문에 그렇죠. 레오나드 다빈치의 최 만찬이라든지 이런 그림을 보면은 예수 그리스도와 야고보와 비슷하게 그려지는데 오히려 직업 회더는 아주 예술가적 상상력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고 구 사람 시몬을 같은 얼굴로 그리는 것을 이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역사는 단지 강한 확신을 가진 사람 그리고 자신의 삶을 잘 준비한 사람들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은 아닐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보통 인간은 확신이 강하고 그리고 두드러진 업적을 가진 사람들에게 주목하기 마련입니다. 왜냐면 우리 눈은 가시적인 것에 더 끌리게 되고 우리는 호기심이 많기 때문에 어 나와 다른 삶을 살아가는 특히 뭔가 시끌퍽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더 눈길이 가기도 하죠. 그리고 인간은 본성상 원래 남의 떡이 더 커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뭔가 이룬 사람, 뭔가 대단한 사람,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입증한 사람에 저희는 주목을 하고 그들이 바꿔 가는 역사에 저희는 관심을 기울립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자라는 관점에서는 전혀 쓸모 없어 보이는 혹은 유용성이라고 없어 보이는이 연약한 인간들을 통해서 선을 이루기도 하시고 그리고 역사에 놀라운 일들을 만들어 가시는 분이죠. 그래서 약간의 과정을 보태자면은 역사는 자기의 삶을 잘 계획하고 그리고 분투하면서 뭔가 일어낸 사람이 아니라 지금 당장에는 쓸모 없어 보이는 일을 하더라도 그러한 일들을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묵묵히 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변화하고 역사가 진행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해 볼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유형성의 관점에서 보면은 예 급변하는 세상 그리고 모두가 자본과 권력을 쫓아가는 세상 속에서 케케무는 묵은 신학을 가르치고 그리고 누가 읽을지 모르는 책을 쓰고 그리고 조회수가 얼마나 될지 모르는 동영상을 찍는 저 자신도 무가치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근데 하나님을 보면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아무 조건 없이 세상을 만드시기도 했고 그리고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인간을 친구로 삼기도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하나님의 모습을 어 벨기의 법학자이자 그리고 신학자이기도 됐던 자크 러클레르크는 란 찬란할 정도로 무용하신 분이라고 불렀습니다. 무용하다는 것이 그냥 무용한게 아니라 찬란하다. 어떤 아름다움의 모습까지도 갈릴 수 있는 거죠. 이것이 어떻게 보면은 하나님이 만드신 만드신이 세상이 가지고 있는 신비가 아닐까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에는 유용성이 없더라도 좋은 일들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그것을 이제 라틴어로 보나논 유틸리아 세드 오네스타스라는요. 유용성은 없어도 존한 선들 그런 한국어 표현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눈에 유용성이 없더라도 그것이 무가치한 것은 아니죠. 왜냐면 하나님은 유용성이 없는 곳에서도 선을 만드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네. 그렇다면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될까요? 계속해서 저희는 자신의 무가치함을 느끼면서 살아가는데 그러면 무가치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 할지 잠깐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사는 삶이 언제나 놀랍고 새롭고 의미심장한 일이 나는 곳은 아닙니다. 일상에 많은 일. 예. 먹고 자고 울고 웃고 누군가를 만나고 누군가와가 헤어지고 시험을 치고 때로는 실패하고 이런 것들이 어떤 경우에는 너무나도 평범하게에 무의미하게 지나갈 때도 많이 있죠. 그런데 우리는 일상의 이런 다양한 모습들을 과장없이 보고 응시할 수 있어야 됩니다. 만약에 우리가 일상을 너무 과도하게 과장하거나 아니면 일상을 축소한다면은 우리의 일상을 가능하게 해주는 그 저는 은혜의 힘이라고 부고 싶은데요. 그 은혜에 접속을 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 철학자 강령한 선생님은 예 일상의 특성을 몇 가지 단어로 요약을 합니다. 첫 번째는 필연성입니다. 반드시 죽는다는 것. 예. 그리고 누군가와 반드시 이별해야 된다라는 것. 이런 것들은 불가피한 일이죠. 두 번째로 유사성이 있습니다. 누구나 비슷하게 겪는 일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은 저희는 성인이 되기 위해서 어 이전의 삶을 버려고 뭔가 준비를 해야 될 때도 있죠. 그때 저희가 비슷한 형태에 실패를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시험에 실패할 수도 있고 취직에 실패할 수도 있죠. 유사한 경험들을 하게 되죠. 그리고 반복성입니다. 날마다 대풀이 되는 일들이 있죠. 우리는 먹고 자고 일하고 이런 일들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평범성입니다. 예, 많은 일들이 평범합니다. 만약에 모든 일들이 다 의미가 있다면은 저희는 너무나도 과도한 그런 그 자극 때문에 일상을 살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사실 저희의 일상에 상당한 부분은 평범하게 진행이 되고 있죠. 그리고 또 중요한 일상의 특성은 더없음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흘러가 버린 일들이 있죠. 열심히 준비했는데 시험 점수가 안 나올 수도 있고 그리고 열심히 취직 준비했는데 내가 원하는 직업을 구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건강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했는데 건강을 잃을 때도 있죠. 이렇게 우리 삶에 많은 것, 우리 삶에 많은 것들이 더없이 흘러갈 때가 있습니다. 근데 저희 삶이 그것으로 끝나는게 아니고요. 어, 또 중요한 특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비일상성입니다. 내가 얘기치 못한 일들이 늘 일어나는 곳이 예, 바로이 일상이죠. 어떤 경우에는 제가 원하지 않는 비극과 같은 일이 날 때도 있고 사고가 날 수도 있지만 또 동시에 내가 기대하지 못했던 아주 기쁘고 예, 그리고 어떤 어떤 의미에서 나의 삶을 새롭게 바꿔 줄 그런 일이 또 일어나는 곳이 바로이 일상입니다. 그래서 필연성, 유사성, 반복성, 평범성, 더없음, 비상이 모든 것이 저희의 일상을 이루고 있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내 삶이 얼마나 화려하든지 아니면 무가채 보이는 상관없이 누구나이 여섯 가지 특성들을 다 가지고 일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자신의 삶을 너무 무가치하게 느낀다면은이 다체로운 일상의 모습 중에서 어떤 특정한 부분들 예를 들면은 반복성, 편성, 더덕성 이런 것들만은 너무 주목하고 사는 것은 아닌지 한번 되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무가치함을 없애기 위해서 무가치함의 감정을 극복하려고 저희가 너무 뭔가를 성취하려고 혹은 뭔가를 얻어내려고 한다면은 오히려 무가치함에 더 빠져들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저희의 성취 가운데서도 성범성이라든지 더없성이라든지 반복성이라든지 이런 일상의 특성은 그대로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중요한 것이 뭐냐면은 일상을 일상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일상을 일상을 된다는 것은 아까 말했던 여섯 가지 특성 모두가 우리의 삶을 구성한다라는 것을 겸호하게 받아들이는 거고요. 기독교 신학적으로 얘기한다면은 어 조금 특별한 단어를 쓸 것 같은데요. 그건 뭐냐면은 일상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 받아들이는 그런 능력이 있을 때 우리는 오히려 무가치함의 느낌을 느낌의 잠식이 되지 않을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일상을 선물이 아니라 경현대회처럼 대하는 수도 있겠죠. 그렇기 때문에 경현대회처럼 내가 뭔가 열심히 나의 특기를 보여주고 다른 방을 설득함으로써 상을 얻는 그런 방식으로 일상을 대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삶 자체가 혹은 삶 전체가 경연대회가 될 수는 없고요. 그렇지만 우리의 삶 전체는 선물이 될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이 바로이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우리의 삶에 많은 것이 나의 노력과 성취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은혜에 지탱하고 있다라는 것을 알게 될 때 일상이 조금 더 화나게 보일 수가 있게 되는 거죠. 지금까지 말씀드렸던 내용을 조금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인생을 학교 공부로 비유한다면은 일상을 일상으로 대하는 법은 필수 과목이 아닐까라고 생각이 됩니다. 가치 없다라는 느낌.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자연스러운 느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언제 어디서나 가치가 있고 유용하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과대 망상증이거나 신이거나 이런 두 가지 극단적인 케이스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일상을 선물처럼 대하는가 아니면 일상을 경현대일처럼 대하는가가 아닐까라고 생각이 들고요. 일상을 경대처럼 대한 뭔가 보여주고 뭔가 성취하고 뭔가 설득하지 못한다면은 나의 삶은 무가치한 삶처럼 보일 겁니다. 일상을 선물처럼 받아들일 때 어 나의 무가치함은 단순히 나의 무능함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을 살아갈 때 겪게 되는 하나의 감정이고 그렇지만 그 감정이 우리 삶을 정의하지 않는다라는 것을 알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당장 제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일 요것을 조금 구분할 수 있는 것도 좋은 일이 좋은 그 방법인 거 같고요. 라인홀드 니버의 기도라고 유명한 기도가 이렇게 또 인터내시션 이렇게 돌아가는데 두 가지 포인트입니다. 기도문에서 하나는 뭐냐면은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판별할 수 있는 지혜를 하나님께 구하는게 기도문의 첫 번째이고요. 두 번째는 뭐냐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은 그것을 할 수 있는 힘과 용기 달라고 하는게 라인홀든 이버의 기도문의 주제이거든요. 어 라인드 니버는 기독교 현실주의자라고 불리 정도로 뭐 그때는 조금 정치적인 의미도 있지만 어 어떤 기독교 기독교인이 살아갈 때 현실의 모습이 어떤지를 가능한 좀 충실히 보여주는 어떤 그런 신학적인 어 사고를 했다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인에게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무조건 벽을 민다고 문의되는 예 곳이이 세상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거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해야 되는데 그것도 우리는 스스로 정의하려 그러잖아요. 그거 아니라 그것도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 가지고 내가 할 수 있는 일, 할 수 없는 일 조금 그것을음 변형시켜서 바란다면은 내가 지금 해야 될 일과 나중에 해야 할 일도 조금 구분할 수 있는 지혜가 있을 것 같고요. 내가 지금 해야 하는 일이라면은 또 덜 주저하고에 시작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도 중요한 방법이 아닐까라고 생각이 되고요. 각자가 가지고 있는 삶의 문제가 다르듯이 각자가 가지고 있는 욕망의 렌조도 다르다고 생각이 들고요. 그렇기 때문에 일상을 일상으로 살아내기 위한 기술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습득을 해야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 같은 경우는 예를 들어서 뭐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어떤 고질적인 어떤 선입견들 혹은 자기 중심성을 성찰할 수도 있는 분들도 있을 거고요. 어떤 분들 같은 경우는 문자에 너무 약한 분들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 읽다가 오히려 다른 생각에 또 빠지는 분들도 있게 되고요. 어, 저 같은 경우는 오히려 이제 산책이라든지 저와 이제는 인간의 언어로 대화하지 못하는 강아지와 노는 것 이런 것들이 이제는 저 자신을 조금 이제 그 저 자신을 향해 있던 에너지들을 풀어 주는 역할을 하게 되는 거고 그것이 조금 일상을 조금 더 일상으로 충실하게 살아가게 하는 방식이 아닐까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무가침함과 싸울 때 어 제가 제일 먼저 했던 방법 중에 하나는 내가 지금 살 수 있는 일은 페이스북을 접는 거다.라고 해서 페이스북을 접었습니다. 그리고 삶이 매우 밝아지는 것을 경험을 했었는데요. 모든 사람이 페이스북을 접을 필요는 없지만 페이스북이 저에게 무가치 무가치함의 감정을 너무나도 많이 심어줬던 그런 때가 있었을 때는 과감하게 그 페이스북을 접고 다른 방식으로 이제 친구들과 소통하는 길을 선택하기도 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일상을 살아가는 중이고 그리고 일상을 일상으로 제안한 법을 배우는 중입니다. 그 과정 중에 무가침한 느낌, 때론 불안함의 느낌, 우울함의 느낌 모두가 찾아올 것이고요. 그럴수록 우리는 일상을 일상으로 볼 수 있는 그런 눈길를 깃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도 일상을 일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오늘 하루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라는 것을 깨달을 때 타인을 보는 시선도 관대해지고 우리 사회를 조금 더 인간미가 넘치는 세상으로 보게 되지 않을까 그런 기대도 해 봅니다. A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