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e if you dislike Christians but are curious about Jesus | Professor Kim Hak-chul | Jaljalbeop ...
채널: 잘잘법 |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icRijzDgtn4 | 길이: 31:43
요약
🎯 TL;DR — 김학철 교수는 성경을 종교인만의 경전(캐논)이 아니라 인류 보편의 고전(클래식)으로 초역(超譯)하여, 비기독교인에게도 예수의 말씀이 현대 심리학적 통찰과 실존적 고통에 유의미한 지혜로 다가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 핵심 논지 — 화자는 성경을 "믿는 자만 읽는 경전"이 아니라 유대교 미드라시, 일본식 초역 전통처럼 오늘날 언어로 새로 옮기면 비기독교인에게도 클래식으로 다가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관점에서 요한복음서·마태복음서·마가복음서의 구절들을 매슬로우의 욕구 이론, 인정 욕구와 나르시시즘, 회복탄력성 개념과 연결해 재번역한다.
🗺️ 영상 구성
- 고전(클래식)과 경전(캐논)의 어원 및 개념 차이 설명
- 비기독교인에게 성경을 "클래식"으로 소개하자는 문제의식 제시
- 요한복음 1장 38절 "그대들은 무엇을 찾고 있나요?" — 매슬로우 욕구 이론과 연결한 초역
- 마태복음 광야 시험 장면과 연결한 "단수 욕구" 해석
- 마태복음 골방 기도 구절 — 인정 욕구·나르시시즘과 연결한 초역
- 마가복음 씨 뿌리는 자의 비유 — 회복탄력성 개념과 연결한 초역, 몽골 신학생의 일화
━━━ 본문 ━━━
고전(클래식)과 경전(캐논)의 구분 화자는 클래식의 어원이 라틴어 클라시쿠스(함대를 보낼 수 있는 부유한 계층)에서, 캐논의 어원이 헬라어의 "재는 자(갈대 자)"에서 왔다고 설명한다. 캐논은 "삶과 신앙을 재보는 기준"이고, 클래식은 "개인·사회·국가의 위기에 함대를 보낼 만큼 풍요로운 책이나 사상"이라고 정의한다. 화자는 유교 경전(논어·맹자·대학·중용)은 한국 사회에서 이미 클래식이자 캐논으로 자연스럽게 읽히는 반면, 불교 경전이나 이슬람 꾸란, 특히 성경은 비기독교인에게 "종교의 산물"로만 취급받는다고 지적한다.
초역이라는 방법론 화자는 유대교의 미드라시(토라를 당대 언어로 재해석하는 작업)와 일본에서 유행한 초역(오래된 사상가의 말을 현대어로 옮기는 번역 방식)을 언급하며, 이를 성경에 적용해보고자 했다고 밝힌다. 그는 이 방식이 "예수님 말씀의 핵심이 사라졌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면서도, 클래식으로서 예수의 말씀을 들려줄 "길 중 하나"로 시도했다고 말한다.
요한복음 1장 38절 — 단수 욕구와 지니 비유 화자는 새번역 성경의 "그대들은 무엇을 찾고 있나요?"라는 구절에서 "무엇"이 단수라는 점에 주목한다. 그는 2025년 드라마 속 지니가 "소원 세 가지를 들어주는 존재는 사탄"이라 말한 대사를 인용하며, 구세주는 "하나만 말해보라"고 묻는다는 대조를 제시한다. 이를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생리적→안전→애정·소속→존중→자아실현) 이론과 연결해, 광야 시험에서 사탄이 예수에게 던진 세 가지 유혹(빵, 뛰어내림, 권력)이 각각 생리적·안전·존중 욕구에 대응한다고 해석한다. 예수는 이 모든 것에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마라", "하나님 한 분만 숭배할 뿐"이라고 답함으로써 단 하나의 욕구로 모든 욕망을 정돈시켰다고 설명한다.
골방 기도 — 인정 욕구와 나르시시즘 화자는 인간을 "진사회성 동물"로 규정하며, 인정 욕구 자체는 성장의 동기가 되지만 과도해지면 타인의 시선에 삶을 내맡기게 되어 거절·비판에 극도의 불안을 느끼게 된다고 말한다. 나아가 나르시시스트는 하나님마저 자기 욕망의 도구로 삼아 기도를 통해 영적 권위를 가장한 가스라이팅을 하기도 한다고 지적한다. 새한글성경의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히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는 구절에서 "그대"가 단수임을 강조하며, 이를 키르케고르가 말한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의 시간으로 풀이한다. 화자는 이를 "타인의 시선으로부터의 디톡스"라 부르며, > "타인의 시선은 진흙이고, 하나님이 은밀히 보시는 시간은 진주"라고 표현한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 — 회복탄력성 화자는 마가복음 4장의 비유가 통상 "좋은 밭이 되어 결실을 맺자"는 설교로 소비되지만, 원래 초점은 "밭"이 아니라 땅을 가리지 않고 씨를 아끼지 않는 농부에 있다고 재해석한다. 이 맥락에서 몽골 출신 신학생의 일화를 소개하는데, 아픈 아내와 자녀를 두고도 "저는 군인이었습니다. 군인은 자기에게 맡겨진 짐을 지고 걸어가는 사람"이라 답했던 그에게는 "왜 나에게(Why me)"라는 질문이 없었다고 전한다. 화자는 이를 회복탄력성 개념—역경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주변 자원을 찾아 일어서는 힘—과 연결해 비유를 재번역한다.
🔢 핵심 수치 (없음 — 화자가 통계적 수치를 제시하지 않음)
💬 결정적 발언
"너 소원 말해 봐. 세 가지만. 그게 사탄이에요. 구세주는 말씀하십니다. 너 소원 말해 봐. 하나만." "타인의 시선이라고 하는 것으로부터의 디톡스를 예수께서는 말씀하시다." "농사를 짓는 사람이 수확을 바라고 씨를 뿌리러 나갔습니다. … 그는 땅을 가리지 않고 씨를 뿌렸지요." "군인은 자기에게 맡겨진 짐을 지고 걸어가는 사람이죠."
⚖️ 화자가 다룬 반론·한계
- 화자는 자신의 초역 방식이 "예수님 말씀의 핵심이 없어졌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고 스스로 언급한다.
- 이 초역이 유일한 길이 아니라 "길 중 하나"일 뿐임을 명시적으로 인정한다.
🧩 핵심 용어
- 고전(클래식) = 위기 상황에서 함대를 보낼 만큼 풍요로운 사상·문헌
- 경전(캐논) = 삶과 신앙을 재는 기준이 되는 문헌
- 미드라시 = 유대교에서 토라를 당대 언어로 재해석하는 작업
- 초역 = 오래된 텍스트를 현대 언어로 완전히 새롭게 옮기는 번역 방식(일본에서 유래)
- 매슬로우 욕구 발달 단계 이론 = 생리적→안전→애정·소속→존중→자아실현의 5단계 욕구 위계
- 회복탄력성 = 역경 속에서도 심리적 건강을 유지·회복하는 능력
🔎 보완 & 확인 (요약가 註)
- 배경·맥락 보완: 화자가 인용한 "지니/이블리스 사탄" 대사는 2025년 방영 드라마의 티저 영상에서 따온 것으로, 특정 신학적 전거가 아니라 대중문화 콘텐츠를 예화로 활용한 것이다. 매슬로우 욕구 이론 역시 신학이 아니라 20세기 인본주의 심리학 이론으로, 화자는 이를 성경 해석의 틀로 차용하고 있다.
- 사실 유의점: "라틴어 클라시쿠스=함대를 보낼 수 있는 계층", "카논=원래 갈대를 가리키는 말" 등 어원 설명은 화자의 강연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으로, 고전 어원학적으로 세부 뉘앙스(예: 로마 사회 계급 구분과 클라시쿠스의 정확한 용례)는 학술적으로 추가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다(추정/확인필요). 또한 "진사회성 동물은 벌·개미 외에 인간뿐"이라는 진술도 생물학적으로는 나문충류·벌거숭이두더지쥐 등 다른 진사회성 종이 존재해 다소 단순화된 서술일 가능성이 있다(확인필요).
자막 원문 (참고)
Kind: captions Language: ko 인간의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는 진위가 세 가지 소원을 들어 준대요. 근데 그 세 가지 소원이면 인간을 타락시킬 수 있대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는 사람들의 손을 이루는 지니 여러분들에게 익숙한 이름으로는 사탄이라고 하지. 와 나는 매우 정확한 말이라고 생각해요. 너 소원 말해 봐. 세 가지만 그게 사탄이에요. 구세주는 말씀하십니다. 너 소 말 말해 봐 하나만. 저는 우리 한 한국인들 특별히 비기독교인들에게 클래식으로서의 예수님의 말씀을들을 수 있는 그런 길이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해보게 됐죠.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잃은바 초역 이렇게 한번 해봤습니다. 몇 구절 소개해 드리고 싶은데 고존이란 말이 있고 경전이란 말이 있는데 어 서양 언어에서는 클래식 캐논 이렇게 부르죠. 둘 다 아주 오래된 언어인 헬라어하고 라틴어에서 각각 비롯했습니다. 고전이란 말로 우리가 번역하는 것은 클래식ic 그 말은 원래 라틴어 클라시쿠스에서 온 말인데 클라시쿠스라고 하는 건 원래 뜻이 함대가 있는 이런 뜻입니다. 함대가 있다. 부유한 거죠. 요즘은 전투선은 전투선으로 만들고 상선은 상선으로 만드는데 예전에는 뭐 상비군 이런 개념이 있기 전에는 다 예비군이에요. 그래서 뭐 이스라엘 사람들도 평소에 농사 짓다가 블레셋이 쳐들어왔다 그러면 쟁기 곡괭이 들고 나가는 거예요. 싸우러 고대 로마의 전쟁이 터지거나 위험이 생기면 어떤 사람은 자기 아들밖에 보낼 사람이 없어요. 로마 시민야. 내가 내 자랑스러운 땅인 로마를 지켜야 되겠어. 그런데 전쟁이 났어. 근데 내가 보니까 아들밖에 보낼 수가 없네. 그 푸롤레스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거기서 플로레타리아트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어 로마의 전쟁이 났어. 그런데 어마어마한 자원을 보낼 수도 있어요. 심지어 함대 여러 배들을 전투선으로 바꿔서 보낼 수 있을 정도예요. 그러면 대단한 거죠. 그래서 위기에 처했을 때 자원이 풍부한 사람, 부유한 사람을 이제 가르치게 됐거든요. 근데 그것이 어떤 특정한 책 사상이 한 사람의 실전적 위기, 개인의 인생의 위기, 한 사회 공동체의 위기, 국가의 위기, 민족의 위기가 처했을 때 어떤 책, 어떤 사상은 함대를 보낼 수 있을만큼 풍요로워요. 그 클래식이 된 거예요. 그게 이제 고존의 의미입니다. 경전은 카논 캐논이라고 번역하지만 카논의 번역인데 카논은이 원래는 갈대를 가르키는 말이었고 그 후에 자 이렇게 재보는 자를 가르킵니다. 그래서 성경은 캐논인데 경전인데 이거는 우리의 삶과 신앙을 재볼 수 있는 겁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때문에 그 말씀을 가지고 우리의 삶과 신앙을 재보는 거죠. 이제 문제가 생기는데 그러면 캐논하고 아 클래식하고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 어떤 문학권에서는 어떠한 캐논이 클래식이 쉽게 됩니다. 예를 들면 노노맹자 대학 중용 시경 서경 역경 여러분 읽어 보셨는지 모르겠는데 저 같은 경우엔 대학 노노맹자 대학 중경 읽어봤죠. 그건 명확하게 유교 캐논, 유교 경전이거든요. 어떤 분들은 간혹 유교는 종교가 아니다. 이런 얘기를 하는데 그 지금 성균관 가서 물어보시면 됩니다. 성균관 가서 유교는 종교입니까? 철학입니까? 그러면 단호하게 종교라 그럽니다. 그럼 노노맹자 대학 주경을 기독교인이 읽어도 되나요? 아니 다 읽죠. 그 왜냐면 그 클래식이라고 생각해서 그래요. 자 그럼 말을 바꿔 볼까요? 금강경, 반야심경, 아함경 어떤가요? 읽어도 되나요? 기독교인들이 그 질문에서 조금 멈칫하시나요? 자, 꾸란을 읽어도 되나요? 아, 저는 이제 제가 공부한 사람이니까 반야신경 읽어봤고 외우기도 하고 반야신경은 짧기 때문에 금강경 당연히 읽어봤죠. 뭐 그리고 초기 불교 경전들을 읽어봤습니다. 이슬람 꾸란 읽어봤냐? 예. 읽어봤습니다. 그건 꾸란을 읽은지는 몇 년 안 돼요. 저도 본투 크리스천이라 꾸란을 읽으려고 막상하니까 어 뭔가 이렇게 좀 기분이 이상하더라고요. 아니 심지어 공부하는 저도 그런 느낌이 드니까 아 예 이게 문화권마다 클래식하고 캐논이 있는데 어떤 지역에서는 캐논이 그대로 클래식이에요. 기독교 문학권에서 어 성경 읽으면 클래식 읽는 거예요. 예. 참 재밌죠. 근데 우리가 기독교인이니까 성경을 캐논으로 생각하고 우리나라는 유교 불교 문화권이니까 유교 경전 읽었다 그러면 아무런 생각 없고 불교 경전 읽었다 그러면 어 너 종교의 관심이니 이렇게 얘기하고 성경 읽었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어요? 비기독교인들이 야 기독교인이 읽는 그 말도 안 되는 얘기 신화 다 거짓말 아니야? 그거 경전을 왜 읽냐 이렇게 얘기할 거잖아요. 서형에 가서 경성경은요 그거는 노원명자 대학 중형하고 똑같아요. 어떻게 할까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람들에게 비기독교인들에게 성경을 소개하면 캐논이 아니라 클래식으로 소개하는게 훨씬 더 좋을 수 있습니다. 그럼 클래식으로서 어 비기독교인들에게 성경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크게 두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는 완전히 현대적인 말로 옮겨 보자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걸 초역이라고 부르더라고요. 가마지 보니까 그 미드라시입니다. 유대교 미드라시. 미드라시는 율법에 쓰여 있는 거. 율법서. 율법사로 해면 우리는 구약 성경. 구약 성경에 써 있는 것을 당시의 선생들이 유대교 선생들이 오늘날하고는 너무 많이 다르거든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당 살던 동시대 사람들의 삶의 상황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토라가 기록된 대랑 너무 다르니까이 말을 그대로 적용하기가 어려운 거예요. 그리고이 말이 현실 생활에 전혀 상관이 없어요. 그 유대인 선생들이 그 말을 토라에 있는 말을 오늘날의 생생한 언어로 살려 놓으려고 해석해요. 그걸 미드라시 해석 작업을 해요. 아 그게 필요하겠다. 기독교 성경 2,년 전에 기록된 완전히 다른 문학권에서 기록된 건데 오늘날이 피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읽겠어요? 이거를 두 번째 오늘날 현대인들의 필요에 부흥해야 되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오늘날 많은 분들이 자기 개발서의 형태인 것도 많이 읽고 또 심리학 많이 읽고 현대인들은 얼마 전부 또 쇼페워 니체 막 이런 사람들 유행하잖아요. 그리고 나서 얼마 후에는에 초역 붙다 이런게 나와서 어 오래된 석가 시탈타의 말 석가모니의 말이 오늘날의 언어로 번역하는 초역부터는 사실 일본 초역이라는 말 자체가 일본 분들이 쓰는 말인데 그래서 아주 유행하는 걸 봤어요. 보니까 그래서 어 저는 우리 한 한국인들 특별히 비기독교인들에게 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소개하는 길은 길 중에 하나가 유일한 길이 아니라 길 중에 하나가 비록 예수님 말씀의 핵심이 없어졌다. 그런 비판을 받을지라도 클래식으로서의 예수님의 말씀을들을 수 있는 그런 길이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해보게 됐죠.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잃은바 유대 교식으로 말하면 미드라시 일본 분들이 한 번역에 따르면 초역 이렇게 한번 해봤습니다. 몇 구절 소개해 드리고 싶은데 예를 들어 요한복음서 1장 38절 있는 말씀인데요. 최근에 번역된 생글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예수님이 몸을 들려 그들이 따라온 것을 보시고 아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눈여겨 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들은 무엇을 찾고 있나요?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근데이 말씀이 굉장히 재밌는게 뭐냐면 무엇을 찾고 있나요 해에서 무엇이 단수예요. 복수면 너무 쉬울 것 같아요. 예수께서 몸을 탁 돌이키셔서 제자들에게 그대들은 무엇을 원하나요? 이러면 예수님 잠깐만요. 팬 갖고 와서 목록을 적을했을 거예요. 목록을 쭉 적어요. 뭐가 필요하고 뭐가 필요하고 뭐가 필요하고 뭐가 필요하고 자 예수님 이게 필요해요. 그런데 예수님의이 질문은 단수거든요. 그대들은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그럼 딱 하나만 말해야 돼요. 그러면 아주 아주 생각이 깊어집니다. 하나만 말해야 된 되니까 뭘 대답하시겠어요? 하난데 저는 이게 문화적으로도 중요하고 심리학적으로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는 현대 심리학의 이론들을 갖고 와서이 문장들을 다시 쓰고 싶었거든요. 제가 참고한 심리학은 메슬러우의 욕구 발달 단계 이론이었어요. 그리고 그전에 최근에 2025년에 그 방영된 다 이루어질지니 뭐 그런 드라마가 있더라고요. 거기 드라마 티저 영상 같은 거 봤는데 되게 재밌었어요. 나는 램프의 정명 지인이고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지. 얼른 비롯 빨리 비롯 당장 비어. >> 인간은 소원을 만났을 때 비로소 자신의 본성을 알게 되거든. >> 인간의 소원을 들어 준다고 하는 진위가 세 가지 소원을 들어 준대요. 근데 그 세 가지 소원이면 인간을 타락시킬 수 있대요. 세 가지 소원만으로 인간을 타락시킬 수 있대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는 사람들의 손을 이루어 주는 지니. 여러분들에게 익숙한 이름으로는 사탄이라고 하지. 와, 나는 매우 정확한 말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하는 말은 뭐냐? 너 소원 말해 봐. 세 가지만 그게 사탄이에요. 구세주는 말씀하십니다. 너 소원 말해 봐. 하나만. 소원 세 가지 말하라고 말하면 그 세 가지 소원을 과장되게 성취시킴으로써 소원을 빈 사람을 타락시킬 수 있다고 자신해요. 이블리스 사탄이이가 세 가지 소원은 인간을 타락시키고 인간을 죄인으로 만들어요. 그런데 구세주의 질문은 너는 뭘 원하니 하고 단수형으로 물어보세요. 하나만 말하라고 하는 분이에 후세주예요. 그럼 하나만 말하려고 하면 모든 욕망은 다 질서지고 있게 되 있어요. 생각해 보면 이것도 중요한게 아니, 이것도 중요한게 아니에요. 가장 중요한 거 하나만 말해야 되거든요. 그런데 메슬로우의 욕구 어 이론에 따르면 크게 다섯 단계가 있고 아래 욕구가 성취돼야 위에 욕구가 성취된대요. 그래서 1단계는 생리적 욕구합니다. 먹고 마시고 자고 이런 거. 이게 성취돼야 두 번째 단계로 나가는데 그건 뭐냐면 안전 욕구래요. 심리적으로 신체적으로 안정돼야 된대요. 예측 가능한 환경을 바란대요. 셋째로는 애정과 소속 욕고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고 친구 만들고 싶고 가족 있어야 되고 정말 맞는 말 같죠. 1단계가 채워져야 2단계가 되고 2단계가 돼야 3단계가 되고 3단계가 되고 나면 뭐가 되냐면 존중용의 욕구래요. 자존감과 다른 사람의 인정과 존경을 받고자 하는 욕이에요. 첫 단계부터네 단계를 결핍 욕구라고 부르고 그게 채우조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데 자하실현년 욕구라 그래서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자신다운 삶과 창조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욕구래요. 저는 메슬로의 이야기를 화전에 접했는데 아 생각해 보니까이 말이야말로 사탄적이더라고요. 예수께서 세례 받고 나와서 시험 받으실 때 사탄이 나와서 얘기해요. 40을 금식하셨으니까 배고프시죠? 도를 빵으로 만드세요. 가장 중요한 욕구는 생리적 욕구 아니겠습니까? 생리적 욕구가 채워져야 다른 욕구를 실행하실 수 있잖아요. 그 질문이잖아요.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니, 생리적 욕구도 단 하나의 욕구 아래 있는 거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 두 번째는 뭘 얘기하냐면 안정 욕망을 자극하거든요. 높은 데로 올라가서 뛰어내리라 그래요. 하나님의 천사들이 널 보해 줄 거래요. 안전해야 하나님 일을 할 수 있다는 얘기잖아요. 그건 너무나 당연한 얘기 같아요. 예수께서 말씀하세요. 아니 하나님 시험하지 마. 그리고 세 번째 모든 권력 영광 보여주고 나한테 절하면 이거 다 주겠대요. 그러니까 존중 욕구. 다른 사람에게서 인정과 존경을 받고자 하는 욕구잖아요. 예수께 그걸 시험했더니 예수께서 대답하세요. 아니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숭배할 뿐. 예수님은 요한복음서 1장 38절에 있는 제재들에게 한 질문을 답을 갖고 답하시는 거예요. 딱 하나의 욕구만이 존재할 수 있다고. 근데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진정으로 뭘 원하는지 몰라요. 아세요? 몰라요. 딱 하나만 얘기하라 그러면 그거 찾는데 오랜 시간 걸릴 수밖에 없거든요. 근데 예수께서는 답을 주셨어요. 딱 하나만 원해야 된다고. 다른 너저분한 욕망은 딱 하나의 욕구에 의해서 정돈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냐? 구원을 받아요. 정돈되지 않은 욕망을 가지고 살면 인간은 지옥에 삽니다. 생리적 욕구 해결해야지 좋게 멋지게 맛있는 거 먹어야 되니까. 안전 욕구 해결돼야 되죠. 그러니까 좋은 대학 가고 좋은 직장 가고 많이 돈 많이 벌어야 돼. 그다음에 사랑받고 사랑받아야 되는데 조건 좋은 남자, 조건 좋은 여자 만나야 돼. 아 인정받고 존경받아야 되니까 사회적으로 성공해야 돼. 그다음에 무슨 욕구? 자기 자기도 실현해야 돼. 악마적인 거예요. 사탄은 딱 세 가지 소원을 들어 준다는 말로 우리를 타락시킬 수 있습니다. 구세주는 딱 하나의 욕구가 뭔지 알아오라 그래요. 너무 멋지잖아요. 예수님의 말씀. 근데 제자들은 뭐라고 대답했나요? 주님 선생님이죠. 거기서 라비 님. 선생님은 어디에 머물고 계십니까? 그렇게 다시 질문해요. 제자들은 그래서 제자들은 구원받았어요. 예수님의 거처를 묻거든요. 저는 그래서 그런인가 현대인들을 고통스럽게 하는게 욕구예요. 너절한 욕구. 너저분한 욕구. 전동 정돈되지 않은 욕구가 우리를 고통 속에 몰아놓요. 제가 이렇게 번역해 봤습니다. 그대가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찬히 살펴보라. 제목을 그렇게 정했어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던 그대들. 그를 버려두고 나를 따라오는 그대들. 그대들은 무엇을 찾고 있나요? 의식주가 해결되기를 바라나요? 안전을 바라나요? 돈과 명예와 권력을 원하나요? 자기 삶이 실현되기를 바라나요? 그대들은 무엇을 원하나요? 그대들이 나를 따르고자 할 때 그대들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그 욕망은 무엇인가요? 각자가 가지고 있는 시면에 놓인 그 욕망은 무엇인가요? 이렇게 번역해 봤어요. 어, 그까 현대의 심령 이론과 성경 예수님의 그 말씀 해서 그렇게 초역해 봤습니다. 음. 참 예수님의 질문은 그 질문으로 우리를 구원하거든요. 딱 하나만 말해라. 네가 진짜로 원하는 그거. 근데 우리는 몰라요. 우리의 용고를 그걸 알아야 사는데 그걸 알아야 구원받습니다. 딱 하나 그걸 대답할 수 있을 때. 두 번째 현대인들이 스스로 고통받고 다른 사람으로 고통받을 때 공통된게 하나 있는데 뭐냐면 인정 욕구와 나르시스트가 주변에 있는 거거든요. 인간은 대부분의에 대부분 어 생물학자들에 따르면 우리를 진사회성 동물로 분류하더라고요.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물 중에 진사회성 그러니까 아주 사회성이 높은 동물들은음 벌이나 개미 정도 외에 별로 없대요. 대 인간만큼 사회성을 지닌게 그 말은 바꾸 뭐냐면 타인이 자신에게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그니까 타인이 자신에게 굉장히 중요해요. 그래서 타인에게 존중 호위 좋은 평가를 받고자 하받아서 자기의 존재 가치와 의미를 확신하고자 하는 거 확인받고 싶어 하는 거 그 인정 욕구라고 하거든요. 단순히 칭찬받 칭찬받는 거 그 수준 이상으로 내가 의미 타인의 인정이 필요한 거예요. 사람들은 아 말씀드렸듯이 아 인간은 진사회적 존재예요. 그러니까 학생이 어떤 학생이 선생님 아주 무섭고 까다로운 선생님한테 어 너 참 잘했다. 너 같은 학생 처음 몇 년 만에 처음 본다. 그러면 동기 부여가 크게 돼서 안정감 느끼고 성공했는데 내 성경안 이면에는 초등학교 때 공부 못 하던 나화를 보고 수학을 참 잘한다고 말씀해 주셔서 수학자가 됐어요. 이런 얘기 있잖아요. 인정욕구예요. 그거 굉장히 숨기능이죠. 그래서 성장하고 성취하는데 중요한 동기가 됩니다. 그런데 인종 욕구의 부정적인 측면이 뭘까요? 자기가 오직 자기 존재 이유가 남에게 달려 있거든요. 내가 진짜 원하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날 볼 때 뭘 어떻게 볼지가 더 중요해져요. 그러니까 타인의 평가에 자기의 삶을 내맡기거든요. 타인이 칭찬하면 그거 하고 타인이 반대하면 그거 안 해요. 그건 나는 없어 줘요. 결국은 누군가 나를 거절하거나 비판한다. 그러면 극도의 공포, 불안, 우울에 빠져요. 자기 상실하고 자기 버 아웃 되죠. 버 아웃. 어 내가 쓸모없는 존재인가 그렇게 생각해요. 인종 욕구를 버리려고 해도 버릴 수가 없어요. 왜냐면 인간은 그렇게 생겼어요. 그런데 인종 욕구를 내가 스스로 있다는 걸 알지만 그곳에서 벗어나는 틈이 있어야 공간이 있고 시간이 있어야 내가 나와져요. 그렇죠? 근데 그걸 어떻게 할까요? 심약자들은 여러 얘기 하겠죠. 둘째 나르시시스트가 있어요.이 사람은 아 자기 자신이 너무 중요해서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거를 다 도구화해요. 이런 사람들은 기도할 때 어떻게 해야 되냐면 하나님마저 자신의 욕망에 도구가 돼요. 그러면 안 되면 어떻게 해요? 금식해기도 해야지. 뭐 하나님께 생대를 쓰는 거야. 생대를 쓰는데 이유가 뭐냐? 하나님이 나의 영광의 무대를 비춰주는 조현자가 돼야 돼. 내가 간증을 해. 하나님이 나에게 나타나서 나에게 은혜 베푸신 간증을 해. 그런데 하나님이 빛나는게 아니라 자기가 빛나야 돼요. 말은 뭐 하나님이 빛나신다고 그렇게 얘기하지만 이런 기도, 이런 얘기하는 사람 특별히 나르시스트인 확률이 높습니다. 내가 기도해 보니 하나님 너에게 이걸 하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내 죄를 나에게 알려 주셨는데 아 이런 것들을 회개하라고 하신다. 이거 영적 권위를 이용해서 일종에 가스 라이팅하는 거예요. 실제로는 자신의 뜻인데 하나님의 뜻으로 조작해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활용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게 아니에요. 다른 사람을 통제하고 자기의 뜻의 말에 조작을 해야 되기 때문에 기도도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런 배경을 깔고 제가 예수께서 하라고 하는 기도를 바꿔 봤습니다. 새한글 성경에는 어떻게 됐냐면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대는 기도할 때 그대의 골방으로 들어가세요. 그대의 골방문을 닫고 골방이라고 하는 건 아 예전 우리나라 가혹에도 그런게 있었는데 보물 중요한 것들을 숨겨 놓는 방이에요. 그러니까 작아요. 그대의 골방문을 닫고 그대의 아버지 곧 감춰져 계신 분께 기도하세요. 그러면 그대의 아버지 곧 비밀리에 보고 계신 분이 그대에게 갚아 주실 겁니다. 제가 이렇게 한번 번역을 해 봤습니다. 은밀한 기도의 기쁨 이렇게 했는데 기도할 때는 그대의 골방으로 돌아가 그 문을 닫고 제가 그문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제 기억이라는 헬라오르는 그대의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할 때는 내 방에 들어가서 너의 문을 닫고 이렇게 돼 있을 거예요. 아마 은밀하게 계시는 그대의 아버지에게 기도하십시오. 여기 그대인는 확실히 들어 있어요. 이게 단수예요. 단수. 계속 인정 욕망을 인종 욕구를 타인에게서 구하는 시선을 자꾸 닫아요. 기도할 때는 그대의 골방으로 들어가고 그 문을 닫고 은밀히 계시던 그대 아버지 앞에서는 거예요. 그리고 가장 은밀한 내면을 은밀하게 보시는 아버지께서 그니까 은밀한 내면을 은밀하게 보신 아버지께서 그대에게 가장 적절한 것으로 응답하실 것입니다. 응답하신다는 거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너를 책임져 주신다. 그러니까 이건 뭐냐면 키알케고르라고 하는 한 철학자가 말한 하나님하고 단둘이 있는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서는 시간을 갖는 거예요. 인정 욕구와 SNS는 우리를 늘 타인의 시선 앞에 세우거든요. 그런데 기도의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가장시면시면 앞에 자기 자신을 세우는 거예요. 그러면 인정 욕구가 더 중요한 시선을 느끼니까 다른 시선이 중지된 상태예요. 요즘 디지털 디톡스 한다면서요. 이런 식으로 말아 된다면 예수께서는 타인의 시선이라고 하는 것으로부터의 디톡스를 말씀하시다. 그러면 자기 자신이 누군줄 알거든요. 좋아요 200개 받는 나. 뭐 무슨 댓글 100개 달리는 나. 잘잘뽑해서 창조나 창조냐 진화냐 댓글 3만 개 달리는 그 영상의 내가 아니라 아는 것도 별로 없고 게으르고 하나님 마음에 안 들게 뻔한 나를 하나님 앞에 갖다 놓고 하나님의 은밀한 시선 속에 그분이 갚아 주시는 것을 보는 거죠. 그분의 책임이 책임을 지시는 것을 느끼는 거죠. 아, 내가 바보처럼 타인의 시선을 욕망해서 이렇게 저렇게 하려고 했네. 바부처럼 하나님이 응당 그분의 것으로 책임지시는데 그리고서는 제가 그다음에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문과 같은 말에 꼼짝없이 말려들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우리 아뭐 아브라카다브라 수리수리 마술 이거 다 주문인데 주문은 뭐냐면 신적인 힘을 얼굴 매는 힘이라고 믿은 거였거든요. 신적인 힘을 얼거 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도 그렇게 얼거매서 자기 뜻대로 부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근데 하나 그다음에 제가 이렇게 보냈겠습니다. 하나님이 바보인 줄 알고 온갖 미사욕을 써서 기도하지만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시지요. 심지어 우리가 A를 달라고 해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A가 아니라 B임을 알고 계시기도 하지요. 그대 자신의 내면을 가장 찬히 살펴보고 하나님 앞에서는 기도의 시간을 하나님과 흥정하는 시간으로 남에게 자신의 경건을 뽐내는 시간으로 바꾸지 마세요. 이거 진주를 진흙하고 바꾸는 거예요. 타이네 시사는 진흙 같아요. 왜냐면 열광했다가도 금방 식어서 캔슬 컬처 캔슬해 버리잖아요.이 사람은 이제 아웃이야. 그렇게 얘기하고 나이 사람 좋아했거든. 근데 그 사람 말 할 때 이제 그 사람 아웃 누구랑 친하게 지내다가 말 실수했다고 그 말 실수한 거 보면 그 사람이 인격 전체가 보여. 그냥 그 사람을 캔슬해 버려요. 사람의 시선이라는 거는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나의 껍데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언제든지 좋아하고 싫어할 수 있어요. 거기에 목을 매는 건 진짜 바보 같은 거예요. 그 타인의 시선은 그 진흙이고 하나님이 우리를 은밀하게 보시는 그 진주의 시간 그거 얼마 안 되는 시간인데 그 시간을 익어 갖고 바꿔치는 바보 같은 너를 타지 마라.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 그 취지를 이렇게 번역했는데 어떠세요? 오늘날에 시선에 좀 들어오시는지. 마가복음 4장 3절에서 9절에 있는 씨뿌리는 농부의 비유가 있는데요.이 비유를 회복 탄력성이라고 하는 개념을 가지고 번역해 보려고 노력했어요. 회복 탄력성이라는 건 힘든 일을 겪어도 완전히 부서지 않고 다시 일어서거나 오히려 더 성장하는 성 힘 말하는 거죠. 스트레스, 실패, 상실, 트라우마 같은 역경 속에서도 심리적 건강을 유지하고 회복하고 일상 기능을 다시 일상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그런 능력. 그래서 유연함을 갖추고 근거를 가지고 낙관하고 어떤 감정과 충동이 일어나도 자기 조절할 수 있고 문제가 있으면 해결할 수 있고 해결하려고 하고 그니까 왜 나에게 이런 일이이 일냐 이렇게 질문하지 않고 아 그다음에 내 주변에 있는 자원들이 뭐 있는지를 찬찬히 찾아볼 수 있는 그런 회복 탄력성 있는 그런 사람들이죠. 어떤 불행한 일이 일어나면 me 이렇게 얘기한단 말이에요. 그 얘기 하 영어 쓰는 분이 하도 많이 표현해서 제가 저도 나왔는데 와이미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요? 그 얘기를 많이 들어서 어 질문이니까 대답해 주고 싶단 말이죠. 그런데 제가 몽골에서 신학을 하러 온 한 분을 만난 적이 있는데 몽골에서 있다가 나이 한 30대 중반에 신학을 알아 왔습니다. 이분하고 얘기를 하게 됐는데 한국말을 고자하셔서 우리말로 했는데 이분의 부인이 아파요. 그니까 심각한 병이에요. 몽골에 사는데 한국에 와서 심각한 병에 걸린 아내를 두고 애들도 있어요. 그러니까 얼마나 힘들겠어요. 하나님의 길을 간다고 신학을 하는데 뭐 상황은 좋아지는게 없죠. 그러니까 와이미 할 수 있잖아요. 제가 그분한테 아, 얼마나 힘드시겠어요? 아, 그런 일이 있어서 참 고통스러우시겠어요. 아, 하나님이 도와주시길 바라는데 어쩔지 모르겠어요. 그랬더니 그분이 뭐라 그런 줄 아세요? 저를 이렇게 딱 보더니 교수님, 저는 몽골에서 군인이었습니다. 네. 그랬더니 그분 하신 말씀이 군인은 자기에게 맡겨진 짐을지고 걸어가는 사람이죠. 아픈 부인도 아이들도 제가 지금 학업을 하고 동시에 돈을 벌어야 되니까 일 하는이 모든 것도 내가 치는 짐이지 그것이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대답하더라고요. 그분에게는 와이미가 없어요. 그 말을 듣고 아 왜 나에게는 이런 일이 벌어지죠? 하는 그 얘기들을 하는 그 고통의 신음 소리들이 그것 엄살은 아니지만 다른 삶의 자세가 있더라고요. 그분 저는 군인이었는데요. 몽골에서 군인은 자기에게 맡겨진 짐을 칩니다. 그리고 행군합니다. 아, 그렇지. 그래요. 그래서 제가 마태복음서 마가복음서 4장 3절에서 구절을 초역했는데이 구절을 보통으로는 어떻게 설교하냐면 아 우리가 좋은 밭이 돼 가지고 씨가 뿌려지면 100배 결치를 맺시다. 그렇게 설교를 하거든요. 근데 그거는 마가복음서의 원래 뜻하고 좀 다릅니다. 그래서 이렇게 번역해 봤습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이 수학을 바라고 씨를 뿌리러 나갔습니다.이 비유는 씨 뿌리는 농부의 비우지 열매 맺는 밭채 비유가 아니에요. 농사를 짓는 사람이 수학을 바라고 씨를 뿌리러 나갔습니다. 그는 땅을 가리지 않고 씨를 뿌렸지요. 위대한 말이죠. 땅을 가리지 않아요. 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는다면서요. 그는 땅을 가리지 않고 씨를 뿌렸지요. 남들은 가려뿌리라고 하였지만 그는 씨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어떤 신은 길가에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새들이 와서 그 씨들을 쪼아먹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새들도 원망하지 않았죠. 이게 시뿌리는 자의 원래 뜻입니다. 그가 뿌린 신은 돌밭에도 떨어졌습니다. 땅이 깊지 않았으나 싹이 났습니다. 그러나 뜨겁게 해가 뜨자 신은 타 들어갔고 뿌리가 없으니 말라버렸습니다. 하지만 농부는 체념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뿌린시는 또 가시던불에서 자라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가시덤불이 씨가 숨쉬는 것을 방해했고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됐습니다. 그래도 그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이 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씨 뿌리는 농부의 초점이 있는 거예요. 열매 맺는 밭이대란 뜻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제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가 뿌린 씨 가운데 좋은 땅에 떨어진 씨도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싹이 났고 열매를 맺었습니다. 아끼지 않고 씨를 뿌린 농부의 희망이 이루어졌지요. 그러니 아끼지 맙시다. 실망하지도 맙시다. 반드시 열매를 거둡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에요. 씨 탓하지도 않고 바탓하지도 않고 새 탓타하지도 않고 해탓하지도 않아요. 군인은 자기에게 지어진 짐을 짊어지고 갔거든요. 저도 그래서 몽골 신학생의 그 씨 뿌리는 농부의 기계를이 구조 통해서 다시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에게도 성경은 캐논만이 아니라 클래식으로서 충분히이 시대에 고통받고 힘들고 좌절하고 눈물 흘리고 실패했다고 하는 분들에게 유미한 말씀이라고 확신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비기독교인들에게 소개하고 싶습니다. 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