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Is True Humility, Not Just Acting Humble? | Pastor Kim Ki-seok | JalJalBeop Ep. 267
채널: 잘잘법 |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aHpvveTtfA0 | 길이: 18:42
요약
🎯 TL;DR — 김기석 목사는 진짜 겸손이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자각하고 자기를 낮추는 내적 태도라고 말한다.
📌 핵심 논지 — 겸손은 "제가 뭐요"라는 말로 연출되는 것이 아니라 한자·헬라어 어원과 성경 인물들(베드로, 유다, 탕자)의 사례를 통해 볼 때 자기 존재의 바닥을 직면하고 그것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통로로 삼는 태도라고 강조한다.
🗺️ 영상 구성
- 신앙적 교만으로서의 "짐짓 겸손" 지적
- 겸(謙)·손(遜) 한자 어원 풀이
- 자존감·자존심·자신감의 구별
- 마태복음 11장 29절 "온유하고 겸손하니"의 의미
- 에스겔 16장을 배경으로 한 "부끄러움의 은총"
- 탕자, 베드로, 유다 세 인물을 통한 부끄러움의 두 갈래 결과
- 잠언의 칭찬 비유와 "파르마콘" 개념으로 마무리
━━━ 본문 ━━━
짐짓 겸손은 교만이다 목사님은 칭찬받을 때 "하나님이 하신 겁니다"라는 말조차 신앙적 교만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내면에 하나님이 하셨다는 확신이 있더라도, 그것을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순간 "내가 멋있어 보이는" 동기가 섞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겸손조차 자기 이미지를 강화하는 전략이 되는 시대라고 진단한다.
겸손의 어원 — 겸(謙)과 손(遜) 겸이라는 글자는 말씀과 곁을 뜻하는 글자가 합쳐진 것으로, "남 옆에서 나의 분수를 지키며 말하는 것"을 뜻한다고 설명한다. 손이라는 글자는 길 가다라는 뜻의 글자와 손자가 결합된 단어로, 할아버지와 손자가 길을 걸을 때 손자가 앞서지 않듯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지켜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풀이한다.
자존감과 자존심의 구별 자존감은 "내가 참 소중한 존재구나"를 내적으로 느끼는 상태로, 외부 평가에 좌우되지 않고 인생을 선물로 여기는 태도라고 설명한다. 반면 자존심은 타자의 인정으로 채워지는 결핍이며, 기대만큼 평가받지 못하면 화가 나고 공격적이 된다고 말한다. 자존감이 강한 사람이 사실은 겸손하다고 강조하며, 이는 타자를 배제하지 않는 개체로서의 존귀함을 긍정하는 것이라고 부연한다.
온유함 — 길들여짐 마태복음 11장 29절의 "온유하고 겸손하니"를 인용하며, 온유함이란 야생마가 길들여지듯 하나님의 마음에 조율된 상태라고 설명한다. 기존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구별해 말한다.
부끄러움의 은총 에스겔 16장의 이야기(광야에 버려진 아이를 하나님이 거두어 귀하게 키웠으나, 그 아이가 자기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타락한 이야기)를 배경으로, 부끄러움을 잃어버리는 것이 영혼의 전락과 관련된다고 말한다. 시련이나 패배를 겪고 자신의 연약함을 자각하는 순간이 "영혼의 회복의 길"이라고 강조한다.
탕자·베드로·유다 — 부끄러움의 두 갈래 누가복음의 탕자는 "내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이 많은데"라는 자각을 통해 아버지에게 돌아간다.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 부인한 뒤 통곡했고, 그 부끄러움의 눈물이 "예수님의 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 수로"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반면 유다는 은전을 돌려주고도 참회가 아닌 자기 의(義)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처벌하고 자살했다며, 이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처벌함으로써 스스로가 판단자가 되는 어리석음"이라고 평가한다.
헬라어 어원과 진짜 겸손 겸손을 뜻하는 헬라어 단어는 "바닥에 가깝다"는 뜻이라고 설명하며, 이는 자기를 과대 포장할 욕망이 없음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진짜 겸손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내가 살 수 없는 상태"를 깨닫고 자신을 그 은총에 맡기는 내적 태도라고 정리한다.
칭찬이라는 파르마콘 잠언의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연단하듯 칭찬으로 사람을 시험한다"는 구절을 인용하며, 칭찬이 그 사람의 본질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플라톤의 책에 나오는 헬라어 단어 파르마콘(pharmakon)을 소개하며, 이 단어가 약과 독이라는 상반된 뜻을 동시에 가진다고 설명한다. 칭찬을 자기 강화의 계기로 삼는 사람에게는 독이 되지만, 칭찬에 합당하지 못함을 마음 깊이 자각하는 사람에게는 약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 결정적 발언
"나의 부끄러움, 나의 허물, 아픔 그것들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 진짜 겸손이겠다" "칭찬 속에 머물면 안 됩니다... 돌아서서 자기 자신을 성찰해야 돼요. 그래야 칭찬이 독이 아니라 약이 될 수 있습니다."
🧩 핵심 용어
- 겸(謙) = 말씀+곁, 분수를 지키며 말하는 태도
- 손(遜) = 길 가다+손자, 자기 자리를 지키는 태도
- 자존감 = 외부 평가와 무관하게 내적으로 느끼는 존재의 소중함
- 파르마콘(pharmakon) = 약과 독을 동시에 뜻하는 헬라어 단어, 플라톤 저작 출전
⚖️ 화자가 다룬 반론·한계
-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신앙적이지 않은 경우가 제법 많다고 스스로 지적하며, 겉으로 겸손해 보이는 말이 오히려 교만일 수 있음을 인정한다.
- 부끄러움을 굳이 드러내야 할 이유는 없다고 밝혀, 부끄러움의 은총이 공개적 자기 폭로를 의미하지 않음을 스스로 한정한다.
🔎 보완 & 확인
- 배경 보완: 에스겔 16장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계약 관계를 버려진 아이를 거두어 기른 이야기로 은유한 본문으로, 예언서에서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를 배우자의 배신에 비유하는 대표적 구절 중 하나입니다. "부끄러움의 은총"이라는 표현 자체는 성경 원문 어구가 아니라 화자가 이 본문을 배경 삼아 만든 신학적 표현이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습니다.
- 사실 유의점: "파르마콘"이 플라톤의 저작(특히 『파이드로스』)에서 문자(글쓰기)를 가리키며 약/독 양면성을 논한 개념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철학 논의이나, 이를 "칭찬"에 적용하는 방식은 화자의 설교적 해석이며 플라톤 원전의 직접적 논지는 아닙니다(확인 필요). 겸(謙)·손(遜)의 한자 파자(글자 분해) 풀이는 설교에서 통용되는 해석 방식으로, 한자학적으로 엄밀히 검증된 어원 설명인지는 별도 확인이 필요합니다.
자막 원문 (참고)
Kind: captions Language: ko 우리가 겸손해야 돼라고 말할 때 내 속에는 자기에 대한 아주 그 자랑스러움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나의 근세한 모습 이런 것들이 가득차 있는데 [음악] 침짓 아 제가 뭐요 말하는 것은 진짜 겸손이 아니라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 목사님은 뭔가 칭찬을 받으실 때 >> 아이 하나님이 하신 겁니다. 뭐 이런 말씀은 일절 안 하시 >> 나는 그런 말조차도 그게 신앙적 교만이 될 수 있다고 생각을 해요. 그러니까 나의 내면 속에선 하나님이 하신 거라고 하는 생각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더라도 사람들 앞에 이건 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내가 멋있어 보여. 왠지 그래서 그냥 아 예. 그래 정말 우리가 태도로 조심해야 하는게 그런데 있다고 봐요. 왜냐면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사람들이 그다지 신앙적이지 않은 경우가 제법 많기 때문에 [음악] 그렇습니다. [음악] >> 네. 겸손이라고 하는 것이 요즘 자기 이미지를 강화하는 세상에서 [음악] 겸손도 전략이 될 수 있는 것이 세상인 것 같습니다. 대중들에게 드러나고 있는 이미지가 겸손하다 하면은 사람들이 그 사람을 좋게 여기고 또 그 사람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그래서 겸손조차 전략이 되고 있는 시대이긴 하지만 겸손이라고 하는 것은 나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그런 행동을 겸손이라고 사전적으로 얘기를 하죠.데 한자를 보면 겸손이라고 한 말 속에는 나의 은행이 다 포함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겸이라고 하는 글자는 말씀과 곁에를 뜻하는 겸이 합쳐진 단어이거든요. 그러니까 겸이라고 하는 것은 남 옆에서 내가 아 나의 분수를 지키며 말하는 것을 우리가 겸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나를 과장하지 않고 더라지게 보이려고 애쓰지 않고 폭력적으로 말하지 않고 다른 이와의 관계를 고려해서 조율하여 말할 줄 아는 것이 겸이겠고 손이라고 하는 글자는 아쉬엄 시험 가다라고 하는 척자와 손자 손자가 결합된 단어입니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길을 걸어갑니다. 그러면은 [음악] 요즘은 뭐 좀 달라졌는지 모르겠습니다만은 예전에는 선자들이 할아버지를 앞서지 않았겠죠. 그러니까 항상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지켜가는 것이 손이라고 [음악] 얘기할 수 있습니다. 겸손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기 때문에 말과 행실에 있어서 타자와 늘 때 [음악] 자기를 낮추는 태도 이런 것들이 이제 겸선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는데요. 가끔은 자기에 대한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존심과 자전감이라고 하는 걸 조금 구별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전감이라고 하는 것은 아 내가 참 소중한 존재구나라고 하는 것을 내적으로 느끼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외부의 평가에 좌우되지 않고 내 인생이 갑치다. 선물로 받은 인생이다라고 느끼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 그런 태도가 자존감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또 자신감과는 조금 다른데 자신감이라고 하는 것은 나는 할 수 있어. 난 해낼 거야. 이런 것들이 자신감이지만 자존감은 자신감과는 또 구별되는 태도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러니까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자존감입니다. 그런데 자존심 그러면 조금 달라집니다. 자존심은 항상 다른 사람 앞에 나를 과도하게 드러내고 싶은 마음과 관련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깐 자존감은 스스로 충만함을 낄 때 찾아오는 감정이라고 한다면 자존심이라고 하는 것은 나의 결핍을 채우려고 하는 그런 마음이 자신감으로 표현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근데 그 결핍은 어떻게 채워지냐면 타자들이 나를 인정해 줄 때 채워집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칭찬하거나 아 나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려 주면 우리가 자존심이 채워지는 것처럼 느낍니다. 대게 자존심이라고 하는 말은 아 난 자존심이 채워져서 이렇게 말하지 않고 자존심 상해 이렇게 말하니 까닭은 타자들에 의해서 내가 부정되었다고 느끼기 때문에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감에 사로잡혀 살고 있는 사람들은 항상 타자들이 나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대해서 관심이 많아요. 그리고 내가 기대한 만큼의 대상들이 내게 그렇게 평가를 해 주지 않으면 화가 나기도 하고 공격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존감이라고 하는 것은 타자들의 평가와 무관하게 내 삶이 무한히 값진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압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될 것은 뭐냐? 내가 무한히 값진 사람이니깐 너와 난 달라라고 한 태도가 아니라 아 나에게 주어져 있는 개체로서의이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존귀한 [음악] 삶이라고 하는 사실을 긍정하는 것이죠. 이것은 타자를 배제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자존감이 강한 사람이 [음악] 사실은 겸손합니다. 우리가 마태복음 11장 29절에 보면은 [음악] 예수님이 그런 말씀하시죠.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음악] 내게 배우라고 하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이때 온유하다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말을 생각해 보면 야생말들은 길들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사람이 올라타려 그러면 날 뛰고 그러죠. 탈 수가 없어요. 그런데 야생마을 붙잡아 가지고 길들이면은 사람들이 자기의 목적에 맞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온유하다고 하는 것은 길드려졌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니깐 기존의 질서에 길드려진 것이 온유함이 아니라 성경이 얘기하고 있는 온유함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조율된 상태라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이 이제 온유함이겠고요. 부끄러움의 은총이라고 하는 말은 사실은 이제 성경에 그런 단어가 나오는 건 아니죠. 어 에스겔 16장에 나오는 말씀이 아 그런 표현의 배경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는데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나타내는 이야기입니다. 아 하나님이 그렇게 얘기하죠. 광야에서 피덩이가 되어서 버림받은 어린아이를 보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 가지고 거두어서 닦아 주고 그리고 옷을 겁게 입혀 주고 예쁘게 이제 자하게 해줬다는 겁니다. 정말 귀히 여기고 그런데 그 버림 받았다가 구출됐던 그 아이가 자기 아름다움에 도치되어서 자기의 벌레 뿌리를 잃어버리고 아주 그 음란한 삶으로 나아가는 거예요. 이게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예언자의 어떤 그 비판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끄러움을 잃어버리는 거, 수치심을 잃어버리는 것이 영혼의 전락과 관련되는데 어떤 순간 시련을 거쳐서든 패배의 경험을 겹쳤서든 내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하고나 자신을 자각하게 되었을 때 그때 비로서 나는 영혼의 회복의 길에 접어든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겠는데요. 그러니까 오늘 우리 사회를 보더라도이 부끄러움이 없는 염치가 없는 그런 사회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복음이라고 하는 감정은 때로 부정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의 연약함 이런 것들이 다른 사람의 눈 앞에서 드러나기를 원하지 않죠. 그걸 숨기려고 하고 있습니다. 부끄러움을 굳이 드러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나 스스로가 자신을 살피면서 내가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지 내가 얼마나 아 배운 망덕한 삶을 살았는지 이런 것들을 깊이 자각하는 그 순간은 우리에게 뭔가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아 기점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 우리가 압니다만 탕자가 아버지의 유산을 가지고 먼길 떠나다가 방탕한 세월을 보내고 그 땅에 기근이 들어 가지고 재산도 다 떨어지고 친구들도 사라지고 [음악] 그래서 돼지 키우는 사람 곁에 가서 살다가 배를 채울 길조차 없어서 취업나무 열매를 먹으려고 하다가 문득 [음악] 깨닫게 되는게 있죠. 내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이 많은데라고 말하면서 아버지 집을 떠올리게 [음악] 됩니다. 그때 자기의 실상이 드러나기 시작하죠. 그건 뭐였습니까? [음악]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자. 가서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내가 일컬럼 받을 수가 없으니 종으로 여겨 달라고 하자. 그러면서 돌아섭니다. 자기의 존재에 대한 부끄러움. 자기가 얼마나 전락한 자리에 있는지 자기가 얼마나 부끄러움의시면 속에 있는지를 자각했을 때가 회복의 시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얘기도 해 볼 수 있겠는데요. 가야바이 법정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 달개음 소리가 들려나왔을 때 그는 문 밖으로 나가서 [음악] 통곡했다고 성경이 얘기합니다. 자기의 바닥을 본 거죠. 자기가 꽤 근사하다고 자기를 이미지화하고 지내왔는데 두려움 앞에서 죽음의 공포 앞에서 [음악] 자기가 얼마나 허약한지 그는 초절하게 자각했습니다. 부끄러웠죠. 그러나 부끄러워서 터트린 눈물이 베드로로 하여금 [음악] 예수님의 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 수로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음악] 그 부끄러움이 거꾸로 작동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음악] 그것은 뭐냐? 유다입니다. 예수님을 은전 서른잎에 팔아넘기고 그리고는 나중에 좌책감이 들었던 [음악] 것이죠. 그래서 은전을 돌려 주고 나서 그는 [음악]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렇게 복음서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부끄러웠지만은 그는 그것을 [음악] 참회의 계기로 삼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초발하는 자기 의에 사로잡힌 것이라고 저는 그렇게 보고 있는데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처벌함으로써 스스로가 판단자가 되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이건 겸손한 것이 아니다. 나의 부끄러움, 나의 허물, 아픔 그것들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 진짜 겸손이겠다 하는 생각을 합니다. 겸손하다라고 하는 것은 아, 그 헬라오 단어를 보면 바닥에 가깝다. 그런 뜻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닥에 가깝다고 하는 거. 그것은 자기를 아 과대하게 포장할 욕망이 없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침짓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나를 낮추는 것이 겸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내가 살 수 없는 상태라고 하는 것을 깨닫고 자기의 인간적인 연약함 같은 것들을 알기에 하나님의 은총 [음악] 속에 자기를 맡기는 태도가 겸손이라고 한다면 겸손은 [음악] 내적 태도와 관련되는 것이지 그것이 남들 앞에 보여주기 위한 일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아, [음악] 하나님의 형상대로 내가 지음받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지 못해서 하나님을 비추어내지 못하는 불투명한 존재가 되었죠. 그것을 이제 자각했을 때 어떤 사람들은 그 [음악] 부끄럽기 때문에 오히려 자기를 강화함으로 자기의 부끄러운 모습을 숨기려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부끄러운 모습 때문에 [음악] 자기를 닦아 나가는 사람이 있는 것이죠. 그 자기 다을 회개라고 얘기하고 있는 거고 우리가 신앙생활 속에 [음악] 머문다라고 하는 것은 다른게 아니라 자기의 바닥을 직면해서 [음악] 그것을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로 삼을 줄 아는 것이 [음악] 신앙생활이라고 얘기해야겠죠. 부끄러움이 나를 바닥까지 낮추는 것은 사실이지만 [음악] 그 바닥이야말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통로가 열리는 자리라고 얘기할 수 있겠고 그것은 일종의 자각이고 결단이죠. 그래서 부끄러움은 우리에게 은총의 길, 또 은총의 수단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칭찬받기를 좋아합니다. 아, 누가 나를 칭찬해 주면은 내가 한 일이 긍정되고 평가받는 것 같아서 행복해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칭찬은 때로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왜 그러냐? 잠원에 이런 얘기가 나오거든요. 보관위로운을 또 영광로 금을 달련하는 것처럼 칭찬으로 사람을 시험한다라고 하는 구절이 등장하는데 그러니깐 아관니 속에 은을 넣고 어 아주 뜨거운 불로 가해 가지고 녹여숲을 불순불 제거하는 것처럼 용광로에 금광석을 집어넣어서 재련해서 금을 얻어내는 것처럼 누군가를 칭찬해 보면 그 사람의 사람됨이 드러난다라고 라고 하는 얘기입니다. 아, 내가 칭찬받아 마땅한 사람이죠. 태도로 어, 사람들 앞에 우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누가 나를 칭찬해 줬을 때 뭐 짐짓 겸손하기 위해서 아이 제가 뭐요?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는데 말은 겸손하나 사실은 내면 속에서는 교만함이 있는 경우도 제법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칭찬으로 사람을 시험한다고 하는 말은 뭐냐? 그 사람을 칭찬해 보면 그 사람의 내쪽 본질이 드러난다라고 하는 얘기일 겁니다. 자, 파르마이라고 한 말이 있는데요. 헬로에 이게 이제 그 어 플라톤의 책에 나오는 단어인데 어 어떤 단어냐면은 어 인간의 언어라고 하는 것이 갖고 있는 본질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한데이 단어는 두 가지의 상반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약이란 뜻이에요. 또 하나는 독이란 뜻이기도 합니다. 동일한 단어가 때때로 누군가에게는 약이 될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독이 될 수 있습니다. 칭찬도 똑같습니다. 어떤 사람을 칭찬해 보면 그냥 정말 마음에서 울어나와서 제가 그 칭찬에 합당한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라고 마음 깊이 자각하는 사람들이 있죠. 그러나 그 칭찬을 자를 강화하는 계기로 삼는 사람들이 있어. 아, 난 정말 대단해. 정말 나는 멋있어. 이런다고 한다면 그 칭찬이 독이 되는 경우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다음 순간 누군가가 나를 칭찬하지 않고 비난하는 순간 자기의 삶이 다 무너진 것처럼 느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잔뜩 주눅들어 있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서 사람들을 힘 있게 살게 해 주는 약이 될 때도 있지만 칭찬으로 너무 사람들을 길들다 보면 칭찬이 소고되는 순간 자기의 존재 자체가 부정당한 것처럼 느낄 수 있어요. 이것이 이제 아 독으로 작동하는 경우라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인들은 누군가가 나의 삶을 보고 어 칭찬을 해 줄 때 그 칭찬 속에 머물면 안 됩니다. 뭐 짐짓 아 제가 뭐 이렇게 얘기할 것도 없지만 아 그렇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응답은 하되 돌아서서 자기 자신을 성찰해야 돼요. 그래야 칭찬이 독이 아니라 약기될 수 있습니다. 기에 존재를 [음악] 하나님의 시선 앞에서 파악한 사람에 자기를 [음악] 낮출 수밖에 없는 그런 마음 바로 그 마음이야말로 하나님의 은총이 흘러 들어오는 통로라고 얘기할 수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