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Faith Self-Test That Moves You in Times of Stagnation and Shocks You in Times of Prosperity | P...
채널: 잘잘법 |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kl8dNzYK3NQ | 길이: 27:19
요약
🎯 TL;DR — 순교를 자처하고 신앙을 전시하는 행위는 예수·초기교회 전통과 배치되며, 진정한 신앙은 골방의 고백(컨페스)이지 무대 위의 자기증명(프로페스)이 아니다.
📌 핵심 논지 — 화자는 2018년 북센티널섬 선교사 존 챈의 죽음을 계기로,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를 존경하라"는 통념 대신 움베르토 에코의 "경계하라"는 말을 제시하며, 순교를 자처하는 신앙이 실은 영적 나르시시즘일 수 있음을 여러 역사적 사례와 성경 본문으로 논증한다.
🗺️ 영상 구성
- 도입: 존 챈 사건 소개 및 찬반 논쟁 제시
- 문제 제기: 순교를 자처하는 행위의 동기에 대한 질문
- 역사적 사례들: 폴리카르포스 순교록의 퀸투스, 스미르나 총독 아리우스 안토니우스, 뮌스터의 얀 반 레이던, 성 프란치스코 사후 제자들
- 성경적 근거: 마태복음 10장(피하라), 아나코레오(물러남) 용례, 고린도전서 13장 번역 문제
- 신학적 개념: 프로페스 vs 컨페스, 신적 수동태
- 결론: 예수님도 물러나셨지만 빌라도 앞에서는 고백하셨다는 대조
━━━ 본문 ━━━
존 챈 사건과 그 논쟁 화자는 2018년 인도 정부가 접근을 금지한 안다만 제도의 한 섬에 선교 목적으로 들어간 젊은이 존 챈의 사건을 소개한다. 그 섬은 오랜 고립으로 인해 외부인의 감기 바이러스만으로도 원주민 전체가 몰살될 수 있는 곳이었다. 존 챈은 어부들에게 돈을 주고 법령을 어겨 섬에 들어갔고, 결국 생존이 확인되지 않았으며 일기에는 "하나님, 이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는 기록이 남았다고 전해진다. 화자는 이 사건이 제국주의적 선교관이라는 비판과 신앙의 영웅적 행위라는 옹호 사이에서 논쟁이 되었다고 설명하며, 그 과정에서 존 챈이 인도 어부 대여섯 명을 실정법 위반자로 만든 문제도 함께 지적한다. 화자는 이 젊은이 개인의 의도나 과정을 함부로 평가할 수 없다고 전제하면서도, 이 사건이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을 사탄의 점령지로 여기고 그곳에 가기 위해 불법과 타인의 희생까지 감수해야 하는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고 말한다.
나르시시즘으로서의 순교 자처 — 역사적 사례들 화자는 이 질문을 뒤로하고, 신앙이 나르시시즘에 걸린 자기 신앙 전시로 변질된 역사적 사례들을 제시한다. 2세기 폴리카르포스의 순교록에 등장하는 퀸투스는 스스로 박해자 앞에 나서 순교를 자청했으나, 정작 맹수 앞에서는 공포에 질려 신앙을 부인하고 살려달라 애걸했다. 아시아 총독 아리우스 안토니우스에게는 한 무리의 기독교인들이 몰려와 "우리를 죽여 달라"고 외쳤는데, 총독은 "죽고 싶으면 절벽이나 목을 매달지 왜 나를 번거롭게 하냐"고 답했다고 전해진다. 가장 극단적 사례로 뮌스터에서 스스로 "새 예루살렘의 왕"을 자칭한 재침례파 급진주의자 얀 반 레이던은 순교를 영광스러운 길이라며 추종자들을 극단적 저항으로 몰아넣었지만, 정작 본인은 화려한 옷을 입고 일부다처제를 시행하다 함락 후 처참하게 처형당했다. 성 프란치스코 사후 일부 제자들은 모로코 등 이슬람권에서 무함마드를 공개적으로 모욕하며 처형을 자초했는데, 화자는 이들의 진짜 목적이 선교가 아니라 순교자의 관을 쓰는 것이었다고 지적한다.
움베르토 에코의 경고와 성경적 대안 화자는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구절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를 경계하여라"를 인용하며, "그런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자기와 함께, 자기보다 먼저, 혹은 자기 대신 죽게 한다"는 문장을 핵심 논거로 제시한다. 이에 대한 성경적 대응으로 마태복음 10장 23절의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는 명령을 든다. 화자는 예수님이 실제로 이 원칙에 따라 행동하셨다며, 헤롯의 학살 소식·세례자 요한의 체포·바리새인들의 살해 모의 앞에서 예수님이 아나코레오(물러나다·후퇴하다·도망가다) 하셨음을 마태복음 곳곳에서 확인한다. 화자는 예수님이 물러나신 이유를 "역사라는 무대의 주인공이 되기를 원치 않으셨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셨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프로페스 vs 컨페스 — 고백의 신학 초기교회 저술가 카르타고의 키프리아누스는 "누구도 형제들을 위해 소동을 일으키거나 자발적으로 이방인들에게 자신을 내어주지 말라. 붙잡혀 넘겨졌을 때야 비로소 말해야 한다"고 썼다. 화자는 여기서 프로페스(profess, 스스로 나서서 선언·과시)와 컨페스(confess, 물을 때 인정·응답)의 차이를 설명하며,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 스스로 자신을 내세우기보다는 증언하기를 원하신다"는 키프리아누스의 말을 인용한다. 이와 연결해 화자는 신약 헬라어의 신적 수동태(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그 행위의 주체가 하나님임을 암시하는 문법) 개념을 소개하며, 한국 개신교인들이 이 "수동성의 신앙"에 다시 눈뜨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고린도전서 13장의 번역 문제와 결론 화자는 20대 시절 이해하지 못했던 고린도전서 13장의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는 구절을 언급하며, 헬라어 원어에서 카오세소마이(불사르다)와 카우케소마이(자랑하다)의 발음이 유사해 번역이 갈린다고 설명한다. 새 한글성경과 새번역 성경은 이를 "자랑하려고 내 몸을 내어준다"로 번역했으며, 화자는 이 번역이 "사랑 없이도 신앙적 영웅이라는 타이틀을 위해 자기를 희생할 수 있다"는 의미를 더 정확히 담는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화자는 예수께서 물러나실 때는 물러나셨지만 빌라도 앞에서는 목숨을 걸고 진리를 컨페스하셨다는 대조를 제시하며, "십자가를 제작하지 말고, 다만 하나님이 허락하신 십자가는 져야 한다"고 당부한다.
🔢 핵심 수치
- 존 챈 사건 발생 연도 = 2018년
- 인도 어부 실정법 위반자 수 = 대여섯 명 이상
- 마태복음 인용 구절 = 10장 23절(피하라), 10장 32~33절(고백)
💬 결정적 발언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다라고 주장한 사람들을 경계하여라.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다라고 하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자기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자기보다 먼저 죽게 하거나 때로는 자기 대신 죽게 한다." — 움베르토 에코 인용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 스스로 자신을 내세우기보다는 증언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 키프리아누스 인용
"당신은 무대 위의 배우냐, 신앙을 연기하는 배우냐 아니면 하나님의 증언자로 살 것인가?"
⚖️ 화자가 다룬 반론·한계
- 화자는 존 챈의 개인적 의도·목적·과정을 "함부로 평가할 순 없다"고 스스로 유보하며,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촉발하는 근원적 질문에 집중하겠다고 밝힌다.
- 존 챈 사건이 "제국주의적 선교관" 비판과 "선교적 영웅행위" 옹호로 양분되어 논쟁이 있었음을 그대로 소개한다.
- 뮌스터 사건 관련해 화자는 "얀 반 레이던이 처형당한 것은 마땅한 대가"라면서도, 그에게 선동당해 목숨을 잃은 추종자들의 문제는 별개로 남는다고 지적한다.
🧩 핵심 용어
- 프로페스(profess) = 스스로 나서서 신앙을 선언·과시·전시하는 태도
- 컨페스(confess) = 물음을 받았을 때 비로소 신앙을 인정·응답하는 수동적 태도
- 신적 수동태 = 주어(하나님)를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행위의 주체가 하나님임을 암시하는 헬라어 문법 구조
- 아나코레오(anachoreo) = "물러나다·후퇴하다·피하다"를 뜻하는 헬라어, 예수님의 반복된 행동 패턴을 지칭
- 호모로게오(homologeo) = "고백하다·진리에 동의하다"를 뜻하는 헬라어, 박해자 앞에서의 증언을 지칭
🔎 보완 & 확인 (요약가 註)
- 배경·맥락 보완: 존 챈(John Chau) 사건은 실제로 2018년 11월 북센티널섬(North Sentinel Island)에서 발생한 실제 사건으로 국제적으로 크게 보도되었으며, 영상에서 언급된 "잔 엘렌 차우"는 발음 전사 오류로 보이고 실제로는 John Allen Chau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자막 자동생성 특성상 확인 필요).
- 배경·맥락 보완: 뮌스터 재침례파 사건(Münster Rebellion, 1534~1535)과 얀 반 레이던(Jan van Leiden)은 역사적으로 잘 기록된 사건으로, 화자의 서술은 통상적인 역사 서술과 대체로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 사실 유의점: 고린도전서 13장 3절의 "카오세소마이/카우케소마이" 사본 이문(異文) 문제는 신약학계에서 실제로 논의되는 이슈이나, 어느 쪽이 "더 정확한 원문"인지는 사본 전통에 따라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어 화자의 단정("자랑하기 위해가 더 적절")은 하나의 학설로 이해하는 것이 안전하며 확정된 정설로 단정하기는 어렵다(확인필요).
- 사실 유의점: 폴리카르포스 순교록의 퀸투스 일화 및 아리우스 안토니우스 총독 일화는 초기 기독교 순교 문헌 연구에서 자주 인용되는 사례이나, 세부 인명·정황은 문헌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을 수 있어 원문 대조가 필요하다(추정).
Connected Concepts: [[영적 나르시시즘]] · [[초기교회 순교 문헌]] · [[재침례파 종말론]] · [[번역 이문(異文) 문제]] · [[신적 수동태]]
#순교신학 #영적나르시시즘 #존챈 #북센티널섬 #프로페스와컨페스 #신적수동태 #폴리카르포스순교록 #뮌스터반란 #고린도전서13장 #움베르토에코
자막 원문 (참고)
Kind: captions Language: ko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수능 시험에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괄로 놓고이 괄호에 들어가는 적당한 말은 이렇게 물어봤으면 아마 대부분은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존경하여라. 존경이란 말 고르겠죠.를 고를 수 있을까요? >> [종소리] >> 2018년에 있었던 한 사건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전 앨렌우라고 하는 한 젊은이가 인도 정부가 금지한 한 섬으로 여행을 떠나려고 했습니다. 그의 여행의 목적은 선교였습니다. 안담한 제도에 있는 한 섬인데요. 그곳은 굉장히 [목을 가다듬음] 오랜 시간 동안 외부와 차단되어 있었기 때문에 인도 정부는 만약에 외부인이 그 섬에 가게 된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몰라서 그 섬으로의 접근 조차를 금지했습니다. 워낙 오랫동안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외부인이 가면 심지어 감기 바이러스만 해도 그 섬에 사는 사람들 모두를 죽일 수 있기 때문이거든요. 그리고이 고립된 사람들이 외부 세계에 굉장히 적대적이에요. 그 이유는 그 사람들의 성격이 나빠서가 아니라이 사람들도 아마 그 역사를 통해서 외부인이 우리 섬에 들어오면 자신들이 이유 없이 죽어 나가는 일을 이미 겪었기 때문일 거예요. 그런데이 법령을 어 어기고 전 앨렌라고 하는 한 젊은이는 선교의 열정에 불탔습니다. 그래서 인도의 그 쪽 어부들에게 돈을 주고 자기를 아, 법령을 위반해서 그 섬에 가게 해 달라고 요청한 거예요. 어, 맨 처음에 접촉을 시도했는데 [음악] 그 섬에 있는 한 소년이 화를 쌌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 매체에 따르면 잔 엘렌 차우라는 사람이 어떻게 했었냐면 하나님이 [음악] 섬이 사탄의 마지막 요새입니까? 이런 글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제 진입을 시도했고 결국 그 섬에 들어간 그 젊은이는 생존 확인을 할 수가 없었다고 그렇게 합니다. 몇몇 어부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의 시체가 끌려다니 봤다라고 하는 목격담은 있었고요. 나중에 발견된 그의 일기에 따르면 그것도 여러 매체들이 하는 얘긴데요. 하나님 아이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자기 자기가 어떤 일을 당해도이 사람을 용서해 달라고 하는 그런 이야기를 남겼다고 합니다. 겉으로 볼 때는 되게 대단한 선교적 열정에 불타는 한 사람인데요. 그런데 여러분 아 이걸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이 이 사건 이후로 아이 사건을 두고 여러 논쟁이 있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냐면 제국주의적 선교관을 지켰다. 이렇게이 젊은이가 비판을 받았습니다.이 섬 원주민들이 사탄이 지키는 마지막 요새에 있었던 것일까요? 그래서 그곳에 생명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이 한 젊은이가 그 섬에 간 것은 마땅히 칭송받아야 할 신앙의 영웅행위인가요?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요? 어떠한 아 조치도 없이 그냥 그 섬에 가면 그 섬에 있는 원주민들이이 한 사람 외부인이 가져간 여러 가지 바이러스나 뭐 세균 뭐 이런 것 때문에 몰살를 당할 수 있는 위기가 위험이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사랑의 생명의 복음을 지니고 가야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만약에 그곳에 복음을 전한다면 다른 방식으로 전해야 하는 걸까요? 한 가지 문제는 더 있습니다. 선교를 하기 위해서 결과적으로이 젊은이는 인도의 어부 대여섯 명 이상을 불법을 저지른 사람, 다시 말해서 실정법을 위반한 사람으로에 만들었습니다. 저는이 사건에 대해서 들으면서 찬찬히 생각해 봤습니다.이 젊은이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많은 분들은 어이 젊은이의 동기 또이 동기를 실현하려고 하는 목적 그 목적을 실행하기 위한 과정을 이렇게저렇게 평가를 하는데요. 우리가 한 젊은 이의 죽음에 대해서 그의 의도나 목적이나 과정을 함부로 얘기할 순 없겠죠. 그러나이 이야기가 혹시 아이 젊은이를 영웅적 순교자로 만들려고 한다거나 맞아. 그 원주민이 사는 그 섬은 사탄의 마지막 요새야라고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어떤 것을 사탄의 점령지로 생각한다거나 그래서 그 사탄의 점령지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불법적인 것도 할 수 있고 그리고 그 지역에 있는 사람들을 범죄인으로 만들어도 괜찮고 그리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이 선교 행위를 통해서 생명을 잃을 수도 있잖아요. 아까 말한이 바이러스나 이런 것 때문에 그런 것을 걸어서도 해야 하는 것인가? 이런 아주 근원적인 질문에에 있답게 됩니다. 나아가서 과연 이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성경과 이런 행동을 통해서 우리가 하려고 하는 것이 뭔가 그 내면적 동기를 그 젊은이는 젊은이의 사건은 뒤로 두고 우리 스스로 물어야 할 그 물음에 처 있다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습니다. [콧방귀] [음악] 깃발을 들게 흔들면서 결국 성취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혹시 나르시시즘에 걸린 자기 신앙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증인,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증언자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누구인가를 보여주려고 하는데 그 행동에 동기가 있는 것이 아닌지를 진지하게 검토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 예수님 당시에 또 초기독교 기독교가 되고 얼마 되지 않은 그 시간 동안에 여러 갈래로 일어났습니다. 박히라는 것이 있었죠. 예수님도 마태복음서에 보면 뭐 마가누가 모두 예수님을 박해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 박해나 혹은 핍박의 행에 대해서 일정한 행동을 취하셨어요. 그런데 많은 분들이 잘 그 구절에 관심을 안 썼는데 마태복음서 10장 23절에 보면 이렇게 돼 있습니다. 제자들을 파송하는 명령을 하시면서 그러니깐 선교를 보내는 거예요. 이렇게 명령하세요.이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이 이 피하라고 하는이 동사에 저는 굉장히 주목을 합니다.이 명령 곧 피하라고 하는 명령이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 시대뿐만 아니라 초기 기독교에서도 매우 중요한 명령으로 이해됐기 때문이거든요. 왜냐면 초기 기독교 시간 시대에는 이른바 순교를 자청하는 사람들 순교를 이런 표현까지가 가능하다면 순교 당하고 싶어서 매우 안다리 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에요. 그런 거 보면 어 아주 그 안타깝고 슬프고 [한숨] 아 도대체 신앙을 한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하는 의문을 드는 사건들이 있습니다. 여러 있는데 그 중에 몇 가지만 얘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폴리카르포스의 순교록이라고 하는이 책이 있는데 초기 2세기에 있었던 일을 적었습니다. 거기에 퀸투스라고 하는 한 인물이 나오는데 아이 사람은 박해 소식이 들리니까 스스로 박해하는 권력자들 앞에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순교를 자초합니다. 그런데 정작 맹수들이 자기 눈앞에서 표요하자 공포에 질려서 비명을 지르면서 자기 신앙을 부인하고 살려달라고 에거를 한 거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혹시 스스로 자기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입증하고 순교라고 하는 거룩한 순교자라고 하는 거룩한 이름을 얻기 위해서 어떠한 망상적 자기 과장으로 이르도록 하는지 보여주는 정말 안타까운 사례죠. 그것 말고도 여럿이 있습니다.이 아시아의 총독이었던 아리우스 안토니우스라고 하는 사람이 역시 이세기 사람인데이 사람도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를 했다고 전해지는데요.이 사람이 지나갔는데 한 무리의 기독교인들이 그에게 몰려와요. 그리고서 우리가 기독교인이니까 우리를 죽여 달라고 외치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기가찬인 총독은이 가련한 사람들아 죽고 싶으면 절벽이나 목을 매달지 왜 굳이 나를 번거롭게 하냐고 그렇게 얘기했다는 것이 전해져 내려와요. 자신이 속한 기독교인의 공동체 아주 제가 생각할 때 아주 폐쇄적이고 아 우리를 박해하는 그들이 사탄의 세력 안에 있고 그래서 우리가 순교를 당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 신앙의 증언이고 그래서 거룩한 행위라고 얘기를 하면서 했겠지만 외부 사람들 눈에 볼 때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근데 이런 광기가 아 몇몇 개인들에게 일어나면 그 참 슬프고 안타깝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지도자를 자취하는 사람이 이런 관기에 사로잡히면 그 사람의지도 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이른바 순교 희생 신앙을 위한 아 박해라는 이름으로 고통을 당하게 되죠. 제일 유명한 것이 독일의 윈스터에 왕을 자칭했던 얀반 레이던이라고 하는 사람의 이야기데요.이 제침내파 아주 급진주의자들이죠. 제침내파 급진주의자들이 민스터를 점령했는데 얀반 레이던이라는 사람은 자신이 자신을 새 예루살렘의 왕이라고 그렇게 말하면서 극단적인 종말론을 퍼트렸습니다. 그리고 성이 포유되자 도시가 포유되자 민스타가 포유되니까 순교는 영광스러운 왕국으로 가는 분이라고 아주 무무한 저항을 자기를 따르는 추정단들에게 얘기한 거예요. 근데 정작 본인은 어떻게 살았냐? 화려한 옷을 입고 일부 다처제를 시행하고 굴림했어요. 함락후에 처참하게 처형당했죠. 그 사람이 잘못했으니까 그 사람 처형당한 건 그의 마땅한 대가를 얻었다라고 하지만 제가 생각할 때 나르시스트인데 나르시스트의 선동당한 그 아까운 목숨을 잃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란 말이죠? 이탈리아의 학자였던 운베르타에코가 그의 유명한 장미 이름에서 한 유명한 이야기가 제 침내파 급진주의자들 얘기를들을 때 떠올랐습니다. 거기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여라. 아마 수능 시험에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괄로 놓고이 괄호에 들어가는 적당한 말은 이렇게 물어봤으면 경계하여라. 를 고를 수 있을까요? 아마 대부분은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존경하여라. 존경이란 말 고르겠죠. 근데 운베르테코는 아주 적절한 단어를 잘 골랐습니다.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다라고 주장한 사람들을 경계하여라. 그다음에 이렇게 말을 있습니다.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다라고 하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자기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자기보다 먼저 죽게 하거나 때로는 자기 대신 죽게 한다. 정확한 말입니다. 자기 신앙을 전시하고 과시하고 그 그런 사람들이 특별히 지도자가 되면 수많은 사람들을 무모한 희생의 고통으로 몰아넣을 수가 있죠. 이런 일들은 너무너무 많기 때문에 제가 딱 한 가지 예만 더 들고 말겠습니다. 성프란시스코 성인이죠. 가톨릭 교회에서 이분은 평화적 선교를 지향했는데 그분의 사후의 일부 제자들은 모로코 같은 이슬람권을 찾아가서 자신들이 기독교를 선교하고 증언한다고 하면서 이슬람교와 그 이슬람교의 주요한 예언자로 칭송받는 무하마들을 공개적으로 모욕했거든요. 그러니까 사용시켜 달라는 거예요. 이들의 목적이 뭐 뭐였을까요? 겉으로는 내세우는 목적은 선교고 또 증언이지만 가장 깊은 곳에서는 이른바 순교자의 관을 쓰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라고 얘기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여기서 다시 한번 마태복음서 23장에 있는 예수님의 그 말씀 여기에서이 마을에서 너희를 박해하면 저 마을로 피하라 그 말씀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키프리아누스라고 하는 초기독교 작가죠. 카르타고의 키프리아누스라고 하는 분이 자기 신앙을 고백하고 증언하는게 아니라 공개적으로 공원하고 기독교 신앙의 깃발을 흔들어되는 되고 그래서 스스로 순교를 자처하는 유도하는 그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쓴글이 있습니다. 여러분 중 누구도 형제들을 위해 소동을 일으키거나 자발적으로 자신을 이방인들에게 내어주지 마십시오. 붙잡혀 넘겨졌을 때야 비로서 말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아 기독교 신앙의 기독교 신앙의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이 땅에서 시민으로 기독교 시민으로 살아간다고 하는 것,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서이 사회에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신앙을 내밀히 갖고 있다가 중요한 순간에 그 신앙을 증언하는 것이지 밖에 나가서 깃발을 흔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서 그분은 이렇게 말을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 스스로 자신을 내세우기보다는 증언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글을 써요. 영어로는 자신을 내세우기보다는 프ess스라고 번역하고 증언해라는 컨페스라고 번역하는데 내세우기보다는 그 프로패스하기보다는 컨페스 하라는 거예요.이 둘 차이가 뭐냐? 프로패스는 프로라는게 앞으로 전진하다 그런 뜻이거든요. 앞으로 나와서 사람들이 묻지 않는데도 스스로 선언하고 과시하고 전시하고 사람들에게 도발을 하고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고 그래서 특정한 거부 반응을 일어난다면 그 거부 반응을 그리고 그런 어떤 모욕된 것을 자기 신앙의 면류관으로 삼는 거죠. 그러나 키프리아노스는 얘기합니다. 고백하라고. 고백하는 건 자기의 신앙을 어떤 중요한 상황에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냐라고 물을 때 인정하고 응답하는 거지요. 수동성입니다. 아 신앙의 수동성. 신약 성경 헬라어에는 신적 수동태라는게 있는데요. 주원은 숨어 있습니다. 주는 하나님이라고 드러나지 않는데 그 일의 주체가 하나님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을 때 그때 학자들이 신적 수동태라는 말을 쓰는데 저는 우리 한국 계신교인들이 신적 수동태의 신앙에 다시 한번 눈 뜨기를 [음악] 바랍니다. 어쩔 수 없을 때, 그럴 수밖에 없을 때, 고백할 수밖에 없을 때 고백하는 거랑 자기가 기독교인이라고 깃발을 흔든 거, 흔드는 거랑 그 차이가 있다고 하는 것. 아, 수동성의 신앙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예수께서 마태복음 23장에 이미 말씀하시고 예수께서도 그런 삶을 사셨다. 아나코레오라고 하는 헬라어거든요. 이게 물로 났다. 뒤로 나아갔다. 철수했다. 후퇴했다. 이런 얘긴데 마태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께서 곳곳에서 아나코레오 하세요. 뒤로 물러나세요. 헤롯대왕이 어린아이들 학살한다 그러니까 뒤로 물러납니다. 세례자 요한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께서 뒤로 물러나세요. 피하세요. 4장 12절에 안식일 논쟁 후에이 예수님의 대적자들이 예수님을 죽일 모의일 하자 예수께서 피하세요. 그걸 다른 말로 도망갔다고도 말할 수 있어요. 물러났다. 후퇴했다. 철수했다. 도망갔다. 피했다. 떠났다. 한단합니다. 아나코래요. 왜 그러신가? 세례자 요한이 죽고 난 후에 바리새인들에게서 권력의 협박 앞에서 예수께서는 물러나셔요. 그거 왜 그런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음악] 예수께서는 그분의 때가 언제인지를 찾으신 거예요. 역사라는 무대 앞에 자기가 주인공인 걸 원치 않는 거예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시고 [음악] 무의미한 충돌로 자기 자신이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려고 [음악] 하시지 않는 거예요. 예수께서도 아나코레어 물러나시는데 하물며 인간인 우리가 스스로를 불사르겠다고 앞에 나가 나서는 일은 얼마나 오만한 일인가 저는 그것을 종종 생각해 봐야 한다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러나 컨페스 할 때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2절에서 33절 보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호모로게요오라고 하는데 고백할 수밖에 없을 때 고백하다, 진리에 동의하다 그런 뜻이거든요. 호로게오라는게 그럴 때는 핍박자들 앞에서 진리를 말해 할 때는 그렇게 말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때 아 너희가 말할 때는 성령께서 함께 증언하신다고 우리가 그런 증언을 할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지 무대를 제작해서 그 무대 위에서 자기가 위대한 신앙을 갖고 있다라고 하는 신앙의 영웅으로 무대오르는 사람으로 부름을 받지 않았다고 그것을 깊이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래 전부터 지금까지 이른바 영적 나르시시즘에 대해서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자기를 증명하려는 욕구가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때를 앞서가 있는 사람이죠. 순교자가 되려고 하는 자기의 욕망이 자기 의죠. 자기 의로움과 자기 신앙의 순수성을 내세우려고 하는 욕망이 거칠고 힘들고 때로는 타협하는 거 같고 때로는 비겁한 거 같은 그러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라고 하는 그것을 앞서는 때가 있죠. 영적 나르시즘입니다. 그래서 그런 질문을 할 수가 있습니다. 당신은 무대에 위에 배우냐 신앙을 연기하는 배우냐 아니면 하나님의 증언자로 살 것인가? 그 두 그 질문 앞에 서서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뿐만 아니라 바울 시대에도 그런 일이 있었죠.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장이라고 얘기하는데 거기에 개혁 성경은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이렇게 돼 있거든요. 저는 정말 20대 때이 말이 잘 이해가 안 갔어요. 아니, 내 몸을내어 준다고 하는 거는 그는 사랑의 최고행이잖아요. 어떻게 사랑없이 자기 [목을 가다듬음] 몸을내어 줄 수 있어요? 그런데 사도 바울이 내 몸을내어 준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렇게 말씀하는게 이해가 안 갔거든요. 아 그런데 제가 지금까지 쭉 했던이 마 말의 맥락에서는이 말이 이해가 돼요. 사랑이 없어도 얼마든지 자기를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요. 어떤 사람인가? 그 희생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입증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그 희생을 감할 수 있죠. 개혁 계정에는 불사르게내어 줄지라도 이렇게 되어 있지만 사실 신약학에서는 아마 불사르게보다는 자랑하기 위해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왜냐면 요게 헬라어가 발음이 딱 하나 달라요. 불사르게는 카오세소마이라고 하는 거고 자랑하기 위해서는 카우케소마이 이렇게 하는데 발음이 비슷 비슷하죠. 그래서 지금 최근에 새로 성서공에서 번역한 새 한글 성경에는 나에게 있는 것을 서서히 다 나누어 주고 또 자랑하려고 나의 몸마저내어 준다고 하더라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런 이득이 없습니다. 이렇게 얘기 번역을 했습니다. 새번역 성경에도 내가 자랑삼아 내 몸을 넘겨 줄지라도 이렇게 번역을 했거든요. 그러니까 신앙의 이름으로 신앙의 영광을 얻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희생할 수까지 있다고 하는 걸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사랑 없이 자기의 몸을 희생해서 신앙적 영웅이라고 하는 타이틀을 얻는 것이 더 중요한 사람들이 있고 그것이 나 자신이 아닌가 이렇게 돌아봐야 하는 거죠. 그리스도는 자기를 비우셨어요.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권능을 비우셔서 우리 중에 하나같이 되었다고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11절은 말씀하는데 그런데 우리들은 간혹 신앙의 열광이 신앙의 열정이 우리 안에 가득차서 우리가 온갖 은사를 받고 우리 안에 가득한 그 신앙 열정이 다른 사람에게도 전염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간혹 십자가를 지기보다는 십자가를 제작해서 많은 사람들이 보는 신앙 무대라고 하는 영국 위에 올리고자 하죠. 저는 이것이 신앙을 왜곡하는 그리고 그 왜곡된 신앙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 삶을 신앙이란 이름 때문에 불필요하게 희생하게 하는 슬픈 장면이라고 얘기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의 시대를 보면 사람들이 다 가지고 있는 인종 욕구를 어떻게든지 구현하라고 제촉하는 거 같아요. SNS를 하면 좋아요 개수, 공유 개수, 최고예요 개수, 댓글 개수에 시달려요. 그걸 얻고 싶어 가지고 안달이 나요. 그러니까 자기 신앙을 겸허히 골방에서 컨페스 고백해야 하는 그 신앙의 아름다움은 신앙의 깊은 [음악] 사라지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신앙을 전시해서 자기가 신앙이라고 하는 무대 위에 뛰어난 주연 배우가 되고 싶어 하는 신앙을 프로페서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저는 선교 명령을 하는 예수께서이 동네에서 박해하면 저 동네로 피해라 말씀하시고 불필요한 갈등, 불필요한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 이곳저곳에서 아나코레오 하셨던 예수님의 [음악] 그 모습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때에 맞지 않는 희생의 자리는 피하셨지만 빌라도 앞에 서셨을 때 그분은 진리를 컨페스하셨습니다. 아주 중요한 순간에는 그분의 목숨을 걸고 진리를 말씀하셨다라고 하는 것을 오늘 우리가 세삼스럽게 [웃음]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자신의 [음악] 신앙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이 나를 볼 때 내가 목사, 내가 장로, 내가 권사 집사, 내가 성도, 모태 신앙으로 내 신앙을 증명하고자 안다를 내야 했던 그리고 그렇게 해야 올바른 것이라고 말해 줬던 그 모든 것들을 다시 한번 점검해 봤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자기 신앙을 증명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제작하지 마십시오. 다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십자가는 지어야 하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어떤 분인지를 전시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삶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장 [음악] 중요한 고백으로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기독교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날 신앙의 전신은 많은데 [음악] 가장 중요한 순간에 신앙의 고백이 없는 우리 스토리를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합니다. 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