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prayer is terrifying, even though it's in the Bible | Pastor Kim Ki-seok | JalJalBeop Ep. 273
채널: 잘잘법 |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m4rR4X6ju7I | 길이: 13:14
요약
🎯 TL;DR — 시편의 저주 시편(원수를 향한 폭력적 언사)은 회피 대상이 아니라, 억눌린 부정적 감정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쏟아내어 치유에 이르게 하는 통로라고 김기석 목사는 말한다.
📌 핵심 논지 — 시편 109편·137편 같은 저주 시편은 인간의 모든 감정을 담은 시편의 한 갈래이며, 원수 사랑이라는 신앙의 기본값과 충돌해 기독교인들을 당혹시키지만, 그 불편함을 회피하지 않고 직면할 때 오히려 하나님의 치유가 시작된다고 강조한다.
━━━ 본문 ━━━ 저주 시편이 주는 당혹감 화자는 시편이 "인간의 신호애락, 희로애락의 모든 감정이 담긴 책"이라고 정의하며, 그중에서도 시편 109편·137편처럼 "이래도 돼? 이건 좀 너무 과한 얘기 아니야?"라는 생각이 드는 저주 시편들이 있다고 말한다. 기독교인들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기본값과 저주 시편 사이의 불균형 때문에 당혹스러워하며, 그 결과 저주 시편을 "우리와는 관계가 없는 거야"라며 패스하고 직면하지 않으려 한다고 지적한다.
저주 시편이 필요한 이유 — 그림자 이론 사람은 저마다 세상의 중심이기 때문에 관계 속에서 갈등·아픔·다툼이 불가피하며, 이때 해소되지 않은 분노는 마음속 "그림자"로 남아 점점 커지고 결국 나를 지배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실현되지 않은 욕망이 그림자로 변한 것이 밖으로 드러나야 그 장악력이 줄어든다는 것이 핵심이다.
드러내는 대상이 중요하다 —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부정적 감정을 사람들 앞에 쏟아내면 관계가 돌이킬 수 없이 어려워지지만, 시편의 저자들은 그것을 "자기를 괴롭혔던 사람에게 가져가지 않고 하나님에게로 가지고 갔다"고 말한다. 화자는 시편 51편을 인용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상한 마음의 제사"라고 강조한다. 고상하고 듣기 좋은 말만 하는 기도는 "허위의 시"일 때가 많다고 지적한다.
캐린 오리스와 본회퍼의 관점 화자는 캐린 오리스의 말을 인용해 "시편의 불편한 구절들은 우리의 마음을 갈아엎는다"고 말하며, 그 과정에서 숨겨뒀던 자기 내면이 드러나 하나님 앞에 문제를 내놓게 된다고 설명한다. 또한 히틀러 치하에서 순교한 본회퍼 목사를 언급하며, 저주 시편을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해야 한다고 말한다. 주님은 자신을 향한 모든 악담과 저주를 받아안고 십자가를 지시면서도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며 부정적 감정을 사랑으로 바꾸신 모범을 보이셨다고 설명한다.
하나님은 언어화되지 않은 신음도 들으신다 화자는 하나님은 언어로 바꾼 기도만 들으시는 분이 아니라 "땅에서 들려오는 신음 소리를 들으시는 분"이라고 말하며, 아벨이 흘린 피가 외치는 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성경 구절을 언급한다. 부모가 아이의 옹알이만으로 필요를 알아차리듯, 침묵조차 하나님 앞에서는 기도로 들릴 수 있다고 설명한다.
해결과 해소의 구별 화자는 해결과 해소를 구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기도를 통해 원수가 사라지거나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지만("원수의 아내가 과부가 되는 일이 없더라고요"),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기도하면 마음속 응어리가 녹아내리고, 그 감정이 나를 장악하는 힘이 약화되면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내적 능력이 생겨난다고 말한다.
💬 결정적 발언
"그들의 어린아이들을 돌멩에 내리치게 하시고 그들의 아내가 과부가 되게 해 주시고 — 이런 말들이 저주이죠. 얼마나 폭력적인 말입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상한 마음의 제사라고 얘기했습니다."
"해결되진 않아요. 원수의 아내가 과부가 되는 일이 없더라고요. 그런데 하나님 앞에 그렇게 기도를 하게 될 때... 내 속에 있던 응어리들이 녹아내리는 걸 경험해."
⚖️ 화자가 다룬 반론·한계
- 질문자가 "미워해도 된다는 뜻이냐"고 묻자, 화자는 미워하라고 권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는 마음이 들 때 자기 감정에 솔직해져야 한다"는 뜻이라고 구별한다.
- 상대방에게 직접 "난 너 싫어"라고 말하는 것은 관계를 영원히 망가뜨리므로 지양해야 하며, 그 마음을 하나님께 가져가야 한다고 설명한다.
- 다만 너와 나 사이의 문제를 상대를 배제한 채 하나님에게만 가져가 해결하려는 것도 적절한 태도는 아니며, 때로는 하나님의 빛의 조명을 받은 후 관계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 필요하다고 덧붙인다.
🧩 핵심 용어
- 저주 시편: 시편 109편·137편처럼 원수를 향한 폭력적·저주적 언사가 담긴 시편.
- 그림자: 해소되지 않은 분노·욕망이 무의식 속에 쌓여 자신을 지배하게 되는 심리적 상태(화자가 사용한 표현).
- 해결 vs 해소: 외부 상황(원수)이 실제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응어리가 녹아내리는 내적 변화를 가리키는 화자의 구별.
🔎 보완 & 확인
- 배경·맥락 보완: 영상에서 언급된 "캐린 오리스"는 시편에 관한 저작(예: The Cursing Psalms, Praying the Psalms 등)으로 알려진 신학자·시편 연구자로 추정되나, 정확한 저작·원어 표기는 확인이 필요하다. 디트리히 본회퍼(영상 속 "티리 보네퍼")는 나치 독일 치하에서 처형된 루터교 신학자로, 저서 『시편의 기도』(Das Gebetbuch der Bibel)에서 시편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한 것으로 알려져 있음 — 이 배경이 영상 내용과 부합한다.
- 사실 유의점: 화자 이름·인용된 학자명("캐린 오리스", "티리 보네퍼")은 자동생성 자막의 음성 전사 오류 가능성이 높아, 정확한 실제 인명(예: 캐런 오리스 → Kathleen O'Connor 등 시편 저주시편 연구자일 가능성, 티리 보네퍼 → 디트리히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로 추정)은 원 발화·정식 표기 확인이 필요하다.
자막 원문 (참고)
Kind: captions Language: ko 그들의 어린아이들을 돌멩해 내리시게 하시고 그들의 아내가 과부가 되게 해 주시고 이런 말들이 저주이죠. 얼마나 폭력적인 말입니까? 무섭죠. 이런 말들. 그런데 시편에 등장하고 있는 그 불편한 구절들. 그 구절들을 직면하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시편은 인간의 신호에락, 에오욕의 모든 감정들이 다 담겨 있는 책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그 속에는 뭐 기쁨도 있고 슬픔도 있고 단식도 있고 다양한 것들이 있죠. 다양한 중에 우리를 당혹하게 만드는 시편들이 제법 많이 있습니다. 흔히 우리가 저주 시편이라고 하는 대목인데 읽다 보면 시편 109편이나 137편 같은 시편은 이래도 돼. 이건 좀 너무 과한 얘기 아니야? 아무리 나를 괴롭게 하는 사람이라고 해도이 정도로 저주한다고 이런 생각이 드는 시편들이 있습니다. 특히 기독교인들은 그 시편들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몰라 당혹스러워합니다. 왜냐면 우리에게는 기본값이 있잖아요. 내 원수까지도 자랑하라고 주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러니깐 내가 원수를 사랑하지 못하지만 그러나 사랑해야 해라는 강박 관념 같은 것들이 우리에게 있는데 원수를 저주하는 시편들이 나오면 그 불균형 때문에 우리는 당혹스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많은 기독교인들이 저주 시편들을 패스 할 때가 아주 많이 있어요. 저주시켜는 우리와는 관계가 없는 거야 하면서 패스하고 어 또 직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선택적으로 보는 거죠. 어떻게 보면 저주 시편이 시편의 세계 속에 들어온 가닥도 그게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살다 보면 늘 어 어떤 그 조건 속에서 살 수밖에 없고 역사적 조건일 수도 있고 자연적 환경의 조건일 수도 있고 다양한 인간 관계의 조건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바라는 바대로 생이 흘러가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나 인생은 그렇게 바람대로 되지 않습니다. 역사가 나를 휘몰아칠 때도 있고 또 자연적 조건이 내 삶을 사정없이 바닥에 내동댕이 칠 때도 있고 게다가 나와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타자들이 내 생을 그냥 두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왜냐면 사람은 저마다 세상의 중심이기 때문에 중심과 중심 사이에 갈등이 없을 수가 없어요. 다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아픔이 발생하고 갈등이 생기고 어 때때로 다툼이 생기고 그것이 폭력으로 화하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우리의 마음속에 그림자가 쉽게 드려옵니다. 저 사람 때문에 내 인생이이 모양이야. 어떻게 보면 내 마음속에 있는 누구인가에 대한 분노라고 하는 것은 해소되지 않은 그림자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내 속에 그림자들이 진하게 생겨나요. 근데 우리가 해소되지 않은 그림자를 애속에 이렇게 두고 있으면은 점점 점점 그림자의 영역이 커져요. 이게 그게 나를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원망하는 마음으로 터져나오고 있고 때때로 그것이 자기 비하의 감정으로화할 때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뭐냐? 내 마음속에 있는 실현되지 않은 욕망이 그림자처럼 변해 버린 그것이 밖으로 나와서 드러나야 할 때가 있습니다. 왜? 그래야 그 그림자가 나를 장악하는 힘이 줄어들어요. 근데 우리는 내 원수를 사랑하라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얘가 나오려고만 하면 놀러. 근데 우리가 경험이 있잖아요. 아, 스프링처럼 이게 점점 점점 누적되는 거예요. 그러다 보면은 어떤 순간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뚝을 넘고 내 마음속에 있는 분노, 서로움 어, 그리고 어, 이런 그 부정적 감정들이 타자들에게 향해서 관계를 돌이킬 수 없게 만들 때가 아주 많이 있습니다. 근데 우리가 봐야 할 것은 뭐냐? 시편은 하나님을 향한 기도이고 하나님을 향한 노래입니다. 그러니깐이 마음속에 억눌린 부정적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사람들 앞에 가지고 와서 쏟아내면 우리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이 어려워질 때가 있습니다. 근데 그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가요. 하나님 나 정말이 사람 미워요. 그 시편에 그런 얘기 나오잖아요. 그들의 아내가 과부가 되게 해 주시고 이런 말들이 저주이죠. 그들의 어린아이들을 돌멩에 내리치게 하시고 얼마나 폭력적인 말입니까? 무섭죠. 이런 말들은 그런데 그런 말이 터져나올 수밖에 없는 생애 상황 속에 있었던 사람들이 있단 말이죠. 근데 그들은 그것을 자기를 괴롭혔던 사람에게 가져가지 않고 하나님에게로 가지고 갔습니다. 그 그걸 드러내 놨어요. 그때 비로소 시작되는게 뭐냐면 하나님의 치유가 시작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언제나 고상한 말, 하나님 듣기에 좋은 말 이런 말들만 하는게 좋은 기도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건 허위의 시일 때가 아주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을는 그대로 우리가 시편 51편도 얘기하잖아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상한 마음의 제사라고 얘기했습니다. 나의 상한 마음 어 내 속에서 으깨져 버린 나의 마음 내 속에 있는 부정적인 마음들 그것들을 가지고 이게 접니다라고 얘기할 때 하나님의 치유가 시작된다라고 하는 것이죠. 그런데 시편에 등장하고 있는 그 불편한 구절들 그 구절들을 직면하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캐린 오리스라고 하는 분이 했던 말인데 시편의 불편한 그 구절들은 우리의 마음을 갈아엎는데 그니까 내 마음이 이렇게 평탄하게 있는 줄 알았는데 그 불편한 마음이 내 마음을 갈고 보니깐 내 마음 속에 있는게 드러나어 나도 이런게 있었는데 숨겨뒀었네. 결국 그 시편을 통해서 나를 보게 되고 그래서 그 문제를 하나님 앞에 내놓음으로 하나님의 치유가 시작되도록 한다는 얘기지요. 이게 우리가 저주 시편 같은 책들을 읽어야 하는 까닭기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히틀러 치아에서 순교를 당했던 아 티리 보네퍼 목사님이 시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그 저주 시편을 우리 주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시켜 봐야 한다는 거죠. 왜? 주님은 당신을 향한 모든 악담과 저주 그런 모든 것들을 받아앉고 십자가를 지셨는데 근데 그 속에서 주님은 그런 부정적 감정 속에 있지 않고 오히려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함입니다. 자기 속에 있는 부정적인 것들을 오히려 사랑으로 바꿔내는 그런 모습을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줬던 것이죠. 우리가 부정적 감정을 품고 살아도 안 되고 숨겨도 안 되고 그것들을 사람 앞에 터트려도 안 되고 그것을 하나님께로 가져가서 정난하게 나를 드러내게 될 때 하나님이 치유하시고 또 그 부정적 감정을 거기에 머물지 않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까지도 도 대신 받으셨다는 사실 앞에 우리가 겸호하게 머리를 숙일 때 어 내 마음속에는 어둠은 쓰러질 거라고 생각해요. 하나님은 우리가 언어로 바꾼 기도만을 들으시는 분이 아니죠. 하나님은 땅에서 들려오는 신음 소리를 들으시는 분이라고 성경이 얘기합니다. 아벨이 흘린 피가 외치는 소리를 하나님 들으셨다고 얘기합니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옹거리면 부모들은 아이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알아차리는 것처럼 언어화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침묵한다 해도 침묵조차도 하나님 앞에는 기도로 들릴 수 있는 거지요. 이게 이제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때때로 하나님 앞에 가서 하나님 제 마음 아시죠 하고 앉아 있어도 기도해요. 그런데 속이 부글부글 끌어 가지고 견딜 수가 없어 가지고 정말 하나님 앞에 아무게 정말 미워요라고 얘기를 할 때 하나님은 보고 못난 놈 그러지 않는다 그 얘기지.네 네 마음의 아픔을 내가 알겠다. 그런데 재밌는 건 뭐냐면 모의식의시면 속에 있었던 것들이 나를 굉장히 괴롭히는데 이거를 일단 밖으로 내놓고 나면 그 부정적인 감정이 나를 사로잡는 힘은 약화돼요. 거듭거듭. 그것을 내 의식의 표면 속에서 바라보게 될 때 특별히 하나님의 은총의 빛 앞에서 바라보게 될 때 그 부정적 감정이 나를 장악하는 힘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 저는 흔히 해결과 해소를 구별하는데 기도를 통해 내 원수가 사라지진 않아요. 해결되진 않아요. 원수의 아내가 과부가 되는 일이 없더라고요. 그런데 하나님 앞에 그렇게 기도를 하게 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내 속에 있던 응어리들이 녹아내리는 걸 경험해. 문제가 문제 아닌 나의 그 고통스러운 그 마음이 나를 온통 장악하고 있었는데 그 장악력이 약화되면서 내가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내적 능력이 내 속에서 생겨나더라 하는 얘기죠.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야 할 까닭 가운데 하나입니다. >> 누군가 미워하는 마음이 올려면 뭐 그래도 된다. 미워해도 된다. >> 아니 미워하는 감정이 드니까 누굴 미워해라라고 얘기하는게 아니라 >> 그렇게 누군가 미워하는 마음이 들 때 자기 감정에 솔직해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난 너 싫어라고 얘기하는 순간 영원히 관계에 바이라기 때문에 그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가라 하는 얘기죠. 그러니깐 너와 나 사이에 생겨진 문제 갈등이 생겼을 때 너를 도회시한 채 하나님에게가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도 적절한 태도가 아니지만 때때로 너와 나의 관계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 그 관계를 하나님께 가지고 가서 하나님의 빛의 조명을 받아이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