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 it a sin to avoid relationships because I'm more comfortable alone? | Pastor Sung-hyun | Jal-J...

잘잘법 · 2026-07-22

채널: 잘잘법 |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oskXyfHw4Aw | 길이: 17:43

요약

🎯 TL;DR — 화자는 인간이 관계적 존재로 지음받았다는 근거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상호내주) 교리에서 찾고, 외로움은 이 관계성이 죄로 인해 파괴된 결과이며 회복의 출발점은 교회 공동체와 대화 방식의 변화라고 말한다.

📌 핵심 논지 — 화자는 인간이 3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관계적 존재로 창조되었다고 주장하며, "혼자 있으면 외롭고 함께 있으면 괴롭다"는 현대인의 딜레마를 삼위일체 교리인 페리코레시스(περιχώρησις, 상호순환·상호내주·상호침투)로 설명한다. 죄가 이 관계성을 파괴했고, 회복은 존중에 기반한 건강한 개인들의 공동체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 영상 구성

  • 도입: 외로움의 이중적 딜레마(연결되고 싶지만 상처받기 싫음) 제시
  • 3위일체·페리코레시스 개념 설명(비생물 vs 생물, 강강술래, 요한복음 15장 비유)
  • 서방 vs 동방 기독교의 3위일체 이해 차이와 현대 신학 흐름
  • 죄로 인한 관계 파괴(가인과 아벨, SNS 문화, 진영논리)
  • 대화 습관의 문제(독백적 대화)와 대안 제시
  • 홀로있음(솔리튜드) vs 외로움(론리니스)의 구분
  • 교회 공동체의 역할과 결론

━━━ 본문 ━━━ 페리코레시스와 인간의 관계적 본성 화자는 인간이 "관계적 존재로 지음받았다"고 말하며, 그 근거를 성부·성자·성령이 하나가 되는 방식인 헬라어 페리코레시스(상호순환, 상호내주, 상호침투)에서 찾는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컵과 도구(무생물끼리는 침투하면 깨짐)와 줄기·나무(생물끼리는 침투해도 서로를 침해하지 않고 열매를 맺음)를 대비시키고, 강강술래에서 손을 맞잡고 돌며 하나의 원을 이루는 모습, 요한복음 15장 5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는 구절을 예로 든다.

서방과 동방 기독교의 차이 화자는 서방 기독교가 3위일체를 "셋이 어떻게 하나가 되는가"라는 숫자 개념으로 접근한 반면, 동방 기독교는 원래 관계적 개념으로 이해해왔다고 설명한다. 소련 붕괴 이후 동방 학자들이 서방으로 망명하면서 이 관계적 개념이 전파되었고, 이를 통해 신학자들의 논리 중심 접근에 신비로운 상호내주 개념이 결합되었다고 말한다.

죄로 인한 관계성 파괴 화자는 죄가 침투하면서 관계가 파괴된다고 지적하며, 가인이 아벨을 죽인 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답한 사례를 관계 단절의 원형으로 제시한다. 이어 현대의 SNS "언팔로우" 문화, "너는 어느 편이야"를 묻는 진영논리("그럴 줄 알았어" vs "그럴 수도 있지")를 관계성 파괴가 현대 사회에 어떻게 드러나는지 보여주는 사례로 든다. 이 구조 속에서는 성공은 가능해도 성숙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대화 방식의 전환 제안 화자는 관계 회복을 위해 대화부터 바꿀 것을 제안한다. 상대의 논리적 허점을 지적하며 이기려는 "독백적 대화"를 지양하고, 상대의 말이 내 안에 들어올 여지를 두는 대화를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홀로있음과 외로움의 구분 화자는 반드시 필요한 것은 많은 관계가 아니라 의미 있는 관계라고 말하며, "혼자 있음"(솔리튜드)과 "외로움"(론리니스)을 구분한다. 관계를 원하지만 못 가진 사람은 혼자 있을 때 외로움을 느끼지만, 혼자 있음을 잘하는 사람은 오히려 충만함을 느낀다고 설명한다. 성부·성자·성령도 홀로 있을 수 있는 분이지만 서로 내주함으로 충만해진다고 말한다.

건강한 공동체와 교회의 역할 화자는 건강한 공동체는 "홀로설 수 있는 개인들"이 모여 서로 존중할 때 형성되며, 준비되지 않은 채 외로운 사람끼리 모이면 감정과 이상이 하나로 뭉쳐지는 "집단"이 되어 개인의 고유성이 파괴된다고 경고한다. 교회가 이 페리코레시스적 공동체 경험을 제공하는 가장 원형적인 장소여야 하며, 여기서 존중받은 경험이 직장·가정에서 실패해도 다시 시도할 용기를 준다고 결론짓는다.

💬 결정적 발언

"혼자 있으면 외롭고 함께 있으면 괴롭다." "관계를 원했던 사람이라면 혼자 있을 때 이게 외로운 거예요. 근데 내가 혼자 있는 걸 정말 잘하는 사람이면 외로움을 느끼는 게 아니고 홀로 있음에서 오는 충만함이 있는 거죠." "성공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성숙할 순 없어요."

🧩 핵심 용어

  • 페리코레시스(περιχώρησις) = 삼위 간 상호순환·상호내주·상호침투, 각자의 고유함을 침범하지 않고 서로 안에 거함
  • 솔리튜드(solitude) = 관계적 존재가 누리는 충만한 홀로있음
  • 론리니스(loneliness) = 관계를 원하나 갖지 못한 상태에서 오는 외로움

🔎 보완 & 확인

  • 배경·맥락 보완: 페리코레시스는 4세기 카파도키아 교부(바실리우스,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우스 등)와 이후 다마스쿠스의 요한이 발전시킨 개념으로 알려져 있으며, 20세기 들어 존 지지울라스 등 동방정교 신학자들이 관계적·인격적 삼위일체론으로 재조명한 흐름과 맞닿아 있다(추정 — 영상 속 "소련 붕괴 후 망명" 서술의 구체적 인물·시점은 확인 필요).
  • 사실 유의점: 영상에서 "서방=숫자적 개별 개념, 동방=관계적 개념"이라는 이분법은 신학계 내에서도 단순화라는 비판이 있는 대중적 도식이므로, 단정적 사실이라기보다 화자의 설명 틀로 받아들이는 것이 적절함.

자막 원문 (참고)

Kind: captions Language: ko 성경적인 입장에서 여러분들의 그 외로움을 이렇게 [음악] 보면서 해결해 나아가면 어떨까라는 얘기를 해 드리고 싶습니다. 특별히 오늘 얘기는요. 그래서 3위일체란 얘기를 하려고 하는데요. 3위일체가 왜 내 외로움하고 관계 돼 있느냐? 혼자 있으면 외롭고 함께 있으면 괴롭다. 어떠세요? 여러분들 종종 경험하시는 느낌들이죠. 혼자 있자니 외로워서 SNS를 뒤져거리고 막상 사람들을 만나면 눈치 보다가 깃발려서 빨리 집에 가고 싶어 하는 참 아이런인데요. 연결되고는 싶은데 상처받기는 싫은 마음이죠. 자, 우리는 왜 그럴까요? 저는 오늘이 시간에 한번 성경적인 입장에서 여러분들의 그 외로움을 이렇게 보면서 해결해 나아가면 어떨까라는 얘기를 해 드리고 싶습니다. 특별히 오늘 얘기는요. 그래서 3위일체란 얘기를 하려고 하는데요. 겁먹지 마십시오. 3일체 그러면 어우 딱딱한 교리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게 아니고요.이 3위일체가 요즘 신학교에서 정말 많이 얘기되고 있고 충분히 여러분들이이 얘기를 들으시면 아 이게 딱딱한 교리가 아니고 정말 나한테 도움이 되어지는 아 하나님의 선물이구나라는 걸 깨달으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자 그러면 3위일체가 왜 내 외로움하고 관계돼 있느냐? 인간이요 3위일체 하나님을 닮아 있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혼자서도 잘 살게 지어진 존재가 아니거든요. 음. 이렇게 표현할 수 있어요. 인간은 관계적 존재로 지음받았다라는 거예요. 자, 인간이 관계적 존재로 지음받았다는 건요. 성경을 보면 이렇게 얘기할 수 있어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죠. 바로이 하나님께서 관계적으로 하나가 되시거든요. 성부 성자 성령의 3위가 하나가 되신 방식을요 헬라어로 요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페리코레시스라고요. [음악] 자, 이게 무슨 [음악] 말이냐면요. 상호순환, 상호 내주, 상호 침투라는 건데요. 쉽게 말하면 서로 안에 거하되 각자의 고유함을 침범하지 않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살아 있는 존재들은요. 서로간에 연결되어지고 침투했을 때 서로를 침해하지 않아요. 그런데 무생물끼리는요. 침투하면 깨집니다. 컵과 도구의 관계예요. 그럼 그 도구가 컵을 뚫고 들어가면 컵은 물이 세게 되죠. 근데 반대로 줄기와 나무의 관계라면 줄기의 수액이 가지로 넘어가고 가지의 영양분들이 서로 교류하는 가운데에서 열매를 맺게 되어지는 거죠. 이게 바로이 둘인 듯하지만 하나가 되어지는 생명의 관계예요. 비율을 하나 들어 드리겠습니다. 간광솔레 아시죠? 강강 보시면 손에 손을 맞잡거든요. 그리고 서로간에 돌면서 춤을 춥니다. 자, 서로서로 손을 잡을 때 손을 잡는다고 해서 훼손이 되지 않아요. 그러나 춤을 추기 위해선 반드시 손을 잡아야죠. 그리고 함께 원을 그리면서 춤을 줄 때 밖에서 보면 하나가 되는 거예요. 또 우리가 알고 있는 요한복음 15장 5절 말씀에 이런 표현이 있어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이라는 표현이 있어요. 바로이 페데코레시스를 말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내 안에 내가 예수님 안에 바로 이게 관계적 존재거든요. 하나님께서 성부는 성자와 성령 안에 성자는 성부와 성령 안에 성령은 성부와 성자 안에 거하면서 새 위격이 서로 침범하지 않고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것 그게 우리가 아는 삼위가 하나가 되었다라는 삼위 일체라고 하는데요. 보통요 개념이 기독교 2년 역사에서는 주로 서구 기독교적인 개념이 있다 보니까 하나가 어떻게 세시되나 숫자 개념으로 생각한 거예요. 근데 알고 봤더니 서방 기독교 말고 동방의 기독교에서이 있었던 개념이었던 거예요. 아 3일체 하나님은 관계적으로 존재하신다. 그러니까 서방은 개체였어요. 따로 따로 따로. 그래서 세 개가 어떻게 하나가 되지 숫자 개념으로 수학처럼 생각한 거고 이쪽은 관계적으로 원래 동반 기독교가 있던 거예요. 근데 이게 현대로 넘어오면서 어떤 스토리가 있었냐면 소련이 무너지고 러시아에 있었던이 학자들이 망명을 한 거예요. 석으로 그러면서 동방에 있던이 관계적 개념이 넘어간 거예요. 서방으로. 그러면서 신학자들이 정교한 어떤 인간의 논리로 만 놨었는데 그냥 관계적 개념이 쑥 들어오고 보니까 그냥 다 이해가 된 거예요. 아 이게 서로 간의 내주하고 거할 수 있는 신비로운 관계구나. 이성 중심의 논리 중심의 서방에서 이미 대략 알고 있었지만 이것이 전폭적으로 요런 관계적인게 들어오면서 아 하나님이 관계적이시라면이 사회도 관계적으로 가는게 맞겠구나에 대한 눈이 열리기 시작했던 거죠. 그러면서이 3위일체의 개념이 더 풍성해지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아 이일체 교리가 단지 이단이냐 아니냐를 간별하는 그런 얼음 딱딱한 교리가 아니고 오늘 우리의이 땅을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외로움 사회적인 여러 가지 갈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정말 중요한 단소구나라는 걸 알게 된 거예요. 결국 하나님이 삼위의 하나님이 이렇게 관계로 존재하셨고이 세상을 지으실 때 인간들 또한 이런 관계 속에서 서로 간의 영향을 주고 영향을 받으면서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창조하셨다라는 거예요. 그런데 죄는요 바로이 관계성을 파괴시켜요. 관계가 없어도 살 수 있다고 얘기하는 거예요. 죄가 침투하면서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깨어져 버려요. 죄가 침투하면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깨져 버리는 거죠. 가인과 아벨은 형제예요. 그런데 거기에 죄가 침투하자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하나님께서 물어봐요. 아벨이 어디 있느냐라고 가에게 묻자 가인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까 관계 없다라는 말이에요. 이게 바로 인간이 가지는 문제들인 것이죠. 관계가 깨어진 것들이 고스란이 현대 사회 안에 들어오게 됩니다. 인터넷 문화에서도요. 내가 좋아하면 팔로우를 하죠. 그리고 그 사람 팔로우에서 글들을 읽다가 사진들을 보다가 마음에 안 들어요. 그러면 엄팔이라고 하죠. 그냥 끊어버리면 돼요. 뭔가 그 사람에게 묻고 질문하고 관계를 맺는게 아니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사람과의 관계를 그냥 단절시켜 버리는 거예요. 영향을 주고받지 않는 거죠. 또 우리가이 살아가는 시대는요. 자꾸 이걸 물어봐요. 너는 어느 편이야? 관계를 맺어서 서로 간의 영향을 주고받는게 아니고요. 내가 어느 한 편에 속하게 돼요. 우리 편이 아닌 다른 편에서 자못이 발견돼요. 그럼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럴 줄 알았어. 반면에 우리 편이 잘못을 해요. 그럼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럴 수도 있지. [콧방귀] 서로 반성하고 서로간에 배워가는 관계가 아니고요. 철저하게 정죄하거나 계속 자기 합리하는 쪽으로 성을 쌓아가게 되는 거죠. 그러다 보니 현대인들은 살아가면서요. 자기 자랑과 자기 비하이 극단을 달리게 돼요. 그리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이런 파괴된 상태를 당연한 상태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원래 세상은 그렇게 나눠져 있는 거야라고 이것을 당연시 하는 거죠. 남이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도 초에 나랑 무슨 상관이야 할 때 우리가 관계적이라면 마땅히 아파야 되고 죄책감을 느껴야 되는데 그렇지 않은 거죠. 그냥 이렇게 넘어가는 거예요. 저 불행이 나에게 넘어오지 않아서 다행이다라고 넘어가는 거죠. 그리고 나와 다른 사람과 이렇게 소통되어지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도 원래 세상은 그런 거야라고 합류하는 문화가 그냥 팽배해 버린다라는 것이죠. 누가 더 그래서 힘을 가질래? 누가 더 많은 [음악] 편을 가질래? 흐름으로 자꾸 세상이 변화가게 된다는 거죠. 그러면 이런 문제가 발생합니다. 성공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성숙할 순 없어요. 성숙이란 건 내가 가진 것들 너의 다른 이질적인 것, 나와 다른 것들이 들어옴을 통해서 나를 돌아볼 수 있어야 돼요. 나를 채울 수 있어야 돼요. 그런데 관계 맺음이 아닌 곳에서는 이런 성숙이 일어나기가 어려운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면서이 외로움의 문제, 소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요. 아, 내가 관계를 그리워하는구나를 이상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고요. 아,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이구나라는 것들을 알아야 돼요. 그래서 저희가 관계를 생각할 때이 단어로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어요. 남에게 영향을 받는게 자연스러운 거라고요. 우린 영향을 받았을 때 되게 부끄러워하거나 내가 모자한 거야. 또는 그 영향을 준 사람을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아야 된다라는 거예요. 자, 이런 겁니다. 교회를 제가 한번 얘기를 예를 들어 볼게요. 우리 교회에 누군가가 새로 들어와요. 그러면 우리도 모르게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우리이 공동체가 준 특징을 빨리 당신은 습득해. 그런데이 [음악] 페르코레스 관계적으로 생각하면요. 우리 공동체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면 우리는 마땅히이 생각을 해야 돼요. 저 사람이 들어옴으로 인해서 우리 공동체는 또 어떻게 변할 것인가? 왜? 그 사람이 가진 것들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거든요. 영향을 주게 되어 있어요. 오케스트라가 있습니다. 거기에 새로운 악기 편성이 들어와요. [음악] 그럼 어떻게 될까요? 소리가 달라지는 거예요. 새로운 악기로 들어옴을 인해서 이점과는 또 다른 소리가 풍성해지는 거죠. 그 경험을 하는 거예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래서 내가 무조건 주기만 하는 사람 또는 반대로 받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고 우리는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이란 걸 깨닫게 되어지는 것이죠. 음, >> 한 가지만 좀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이렇게 관계가 단절되어져 가고 갈수록 외로운 시대 속에서 우리가 살아갈 때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까? 저는 대화부터 바꿔 나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말을 할 때 대화를 할 때 우리의 평소의 습관이요. 독백이 너무 많아요. 그리고이기는 대화를 하려고 해요. 상대방의 말에 있어서 논리가 부족한 부분들을 우리가 꼭 짚어내서 내가 당신보다 훨씬 더 정교한 논리를 가지고 있고 내가 당신보다 많이 압니다를 과시하거나 또는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해요. 대화를 하고 있는데도 머릿속에는 그다음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생각하고 대화를 해서 말은 대화인데 실제로 독백들이 계속 이어지는 거죠. 그러지 말고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의 그 이야기가 내 안에 좀 들어올 수 있도록 좀 공간을 주었으면 좋겠어요. 마음의 여지를 좀 누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그 사람의 말이 내 안에 들어와서 내가 이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측면이 있을 때 무조건 방어적으로 쳐내지 마시고 왜 저런 얘기를 했을까를 들어보는 거예요. 그리고 내가 이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 혹시 없는가를 생각하고요. 상대방에게 말을 할 때에도 내가 이기겠다라는 표현보다는 상대방과 함께 나눈다라는 마음으로 대화를 시작하는 거죠. 그렇게 할 때 영향을 주고받게 되죠. 우리 사회가 자꾸 이런 면에서 서로 간의 오고 가는 영향을 주고 받는 것보다는 너무 벽을 쌓고 방어적으로 상대방을 대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기억하셨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관계적으로 살아가도록 지음받은 존재예요. 결코 이것이 부끄러운 얘기가 아닙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과 자꾸 관계를 맺으면서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의의 관계를 맺어 가려고 하고 그럴 때 사회에는 조금 더 따뜻한 공동체가 많아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 제가 이렇게 얘기하면 어떤 분들은 화대짝 놀라서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 저는 관계 뒤었습니다. 관계 너무 힘들어요. 우리가 오해하면 안 되는게 관계를 맺으라는게 무조건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으라는 건 아니죠. 그 소위 말하비티아로 [음악] 치면 아이형들은 그렇게 많은 친구가 필요하진 않거든요. 하지만 [음악] 의미 있는 관계는 필요하다는 거예요. 한 명이 됐든 소수가 됐든 우리에게 그런 관계는 필요한데 그 자체를 아예 [음악] 단절했을 때 사람 존재 자체 가지고 있는 그런 외로움을 해결하지 못한다는 거죠. 실제 우리한테는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해요. 분명히. 근데 그 혼자 있음은 외로움이 아니고 홀로이음인 거죠. 로니스가 아니고 그러니까 솔리트가 필요하다라는 얘기를 헬리나오이 하거든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우리한테 정말로 관계가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파괴적인 관계나 집단화된 관계 때문에 그거에 대한 거부감으로 인해서 외로움으로 한 거죠. 관계를 원했던 사람이라면 혼자 있을 때 이게 외로운 거예요. 근데 내가 혼자 있는 걸 정말 잘하는 사람이면 외로움을 느끼는게 아니고 홀로 있음에서 오는 충만함이 있는 거죠.요 차이가 좀 있는 거죠. 그래서 그렇게 된 이유 중에 하나가 현대 사회 속에서 얘기한 대로 잘못된 관계로 인해 사람들이 이제 확 트라우마가 생긴 거죠. 그러다 보니까 홀로이 있음이 아니고 그냥 외로움인데 이걸 그냥 나는 그냥 혼자 있는 거라고 생각하면서 자꾸 상실감도 경험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거죠. 위 하나님 자체가 성부 성자 성령께서 홀로 있을 수 있는 분인데 이분들이 서로 간의 내주를 통해서 이게 온전히 충만해지는 거였거든요. 그런데 놀라운 건 홀로서 있지만 상대방 안에 들어갔을 때 상대방을 치매하지 않는 거죠. 마찬가지로 우리도 살아가면서 눈과 한 개인이 있어요. 근데 제대로 홀로서 있는 두 사람이 모이면 이게 치매가 당당 당당하지 않는 거예요. 왜? 저 사람하고 같이 있을 때 저 사람이 나를 존중해 주거든요. 오히려이 사람하고 함께 할 수 있는 일 때문에 풍성해지는 거거든요. 정말 성경에서 말하는 건요. 건강한 내가 홀로서 있을 수 있는 관계를 말하는 거예요. 홀로서 있는 개인, 개인, 개인이 모여서 서로간에 존중하는 거죠. 그리고 그 존중에 모였을 때 하나의 건강은 공동체가 되어지는 거예요. 근데 이게 준비가 안 되면 그냥 외로운 사람끼리 모이면요. 집단이 되는 거예요. 서로 간의 감정도 다 그 하나 안에서 뭉쳐 버리고요. 서로 간의 이상과 비전도 다 뭉쳐 버리는 거예요. 한 목소리밖에는 허용을 안 하게 돼요. 그럴 때 개인은 그 관계 안에서 나의 고유성이 파괴되는 경험을 하게 돼요. 내가 위협당하는 경험을 하게 돼요. 그래 서둘러 도망쳐 나오는 거죠. 오늘 현대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직장에서 내가 없어지는 경험을 하는 거예요. 어떤 때는 안타깝지만 교회에서도이 경험을 하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자꾸 떨어지는 거예요. 그리고 외롭지만 관계를 거부하게 되는 거죠. 하지만 우리가 궁극적으로 나가야 되는 거는 그런 외로운 관계가 아니고요.이 외로움 너에서의 내가 관계적 존재라는 걸 알고 내가 온전히서는 가운데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상호 교류할 수 있는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로 나아가는게 필요하다는 거죠. 그리고 무엇보다도이 페레코레시스를 교회에서부터 시작해야 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이 공동체적인 경험을 해 줄 수 있는 가장 원형에 가까운 곳이 교회거든요. 내가 존중받을 수 있는 경험을 여기서부터 원형적으로 했을 때이 경험을 했던 사람이 직장에서, [음악] 가정에서 또는 사회의 어떤 조직 안에서 이것들을 조금 실패하더라도 실험해 볼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어지죠. 하다가 또 실패해요. [음악] 상처받아요. 다시이 공동체 안에 들어와서이 페르코레스가 실현되어지는이 관계적 공동체 안에서 내가 또 회복을 얻게 되어지고 [음악] 다시 나아가서 세상 가운데 다시 관계적인 것들을 계속 실현해 나가는 이게 선순한 구조가 이루어져야겠죠. [음악] 물론 쉽지 않아요. 하지만 포기하면 안 되는 것이고 아 이렇게 [음악] 관계를 맺는 것이 참 좋은 것이구나. 본래 이게 내가 느껴야 되는 소속감이고 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익이구나라는 것들을 깨닫게 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나가야 되는 방향이겠죠.